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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5대 국왕
루이 6세 Louis V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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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81년 12월 1일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137년 8월 1일 (향년 55세) | ||
프랑스 왕국 생피에르 | |||
재위기간 | 프랑크인의 왕 | ||
1108년 7월 29일 ~ 1137년 8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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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 카페 가문 | |
아버지 | 필리프 1세 | ||
어머니 | 홀랜드의 베르타 | ||
배우자 | 로슈포르의 루시엔 (1104년 결혼 / 1107년 이혼) | ||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1115년 결혼) | |||
자녀 | 필리프, 루이 7세, 앙리, 로베르, 콩스탕스, 필리프, 피에르 | ||
종교 | 가톨릭 | ||
별칭 |
전사왕(Le Batailleur/the Fighter) 비만왕(Le Gros/The F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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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카페 왕조의 제5대 왕이다.2. 생애
필리프 1세와 홀랜드의 베르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출생했을 때 부왕 필리프 1세가 미리 정해둔 이름이 있었지만 한 성직자로부터 루이로 불린다면 장차 위대한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루이로 지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생 드니 성당에서 보내며, 신부들의 보호어린 사랑을 받았고, 부왕의 명으로 철통 같은 호위를 받았지만 거추장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때, 그의 이복형제 플레리와 결탁한 랭스 대주교가 그의 대관식의 정당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로 동시대와 후대의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존경받았다고 한다.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1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1]의 배신으로 패배하여 궁지에 몰렸을 때, 쾌활한 낯으로 식탁에 앉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좌절하지 않는다. 숱한 불행들이 날 단련시켰다."
이후 순식간에 헨리 1세의 반대파를 끌어모아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왕들[2] 및 지방의 대봉건제후들과 전투를 벌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약탈을 일삼는 지방의 불량 악덕영주(robber baron)들과 많이 싸웠다. 그래서 악덕영주의 약탈에 시달리던 교회 성직자와의 관계가 좋았다. 젊을 때는 많은 전쟁을 한 '전사왕'이었지만 식탐이 심하여 40대가 되어선 몸이 매우 비대해져서 '비만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3] 1137년 생피에르에서 이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