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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0:15:33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1. 개요2. 성 사바스 전쟁 (1256 ~ 1270년)3. 쿠르촐라 전쟁 (1294 ~ 1299년)4. 해협 전쟁 (1350 ~ 1355년)5. 키오자 전쟁 (1377 ~ 1381년)

1. 개요

11~13세기 들어 십자군 전쟁과 함께 급부상한 이탈리아의 두 해상 세력 간의 운명적인 격돌. 13세기 후반 ~ 14세기 후반의 기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2. 성 사바스 전쟁 (1256 ~ 1270년)

십자군의 수송과 보급 및 이집트와의 교역으로 세력을 키운 이탈리아의 두 해상 세력인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필연적으로 패권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250년대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공위기와 이탈리아 코뮌 시대의 개막 등 기존 유럽 질서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양측의 전쟁은 촉발되었다.
본래 아크레는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의 세 공화국이 상업 지구를 설치한 상태였다. 그중 베네치아와 제노바 구역 사이에는 정교회 소속인 성 사바스 수도원이 소유한 몽조이라는 이름의 언덕이 하나 있었다. 수도원은 베네치아 측에 소유권을 이양했는데, 이를 제노바 측이 문제를 삼으며 분쟁이 불거졌다. 어느날 밤을 틈타 제노바 인들이 언덕을 점거하였고 이에 베네치아 측이 항의하였다. 그럼에도 제노바 인들은 피사 인들과 함께 베네치아 구역을 약탈하였다. 이로써 양측의 갈등은 증폭되었으나 아크레 정부의 중재로 어찌 어찌 합의가 이루어졌다. (1256년 연초) 한편 아크레 북쪽의 도시 티레 역시 제노바와 베네치아 구역이 병존하였는데, 그 영주이자 평소 베네치아를 탐탁지 않아하던 필리프 드 몽포르는 이번을 기회로 베네치아 상인들을 도시에서 축출하였다. 베네치아 측은 이를 제노바 인들이 사주한 것이라며 분노하였고 이에 제노바 측이 중재에 나섰으나 별 효과가 없자 갈등은 재점화되었다. 아크레의 베네치아 지휘관 주스트니아니는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이면서도 독립적인 행보를 이어간 티레를 경계하던 섭정 장 드 이벨린과 연합하였다. 한편 추이를 지켜보던 피사 인들은 제노바를 배신하고 베네치아 측에 붙었다. 그러자 열세에 놓인 제노바가 티레와 동맹하며 십자군 세력은 양분되었다.
1258년 6월, 이참에 무력으로 상권을 취하기로 결정한 제노바 공화국은 로소 델라 투르카 제독을 티레에 파견하였다. 그는 티레에 당도한 직후 현지 함대를 합친 50여척의 대함대로 아크레로 향하였고 동시에 티레의 영주인 필리프 드 몽포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아크레 공격에 나섰다. 이 소식에 고무된 아크레의 제노바 인들이 베네치아 구역을 공격하였고 아크레 정부는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50여척의 제노바 함대는 베네치아의 제독 로렌초 티에폴로 휘하의 40여척의 함대 앞에 기습적으로 등장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델라 투르카 제독이 머뭇거리는 사이 전열을 정비한 베네치아 측이 공격해오자 대패하였다. 24척의 전함과 1700명의 병력을 상실한 제노바 함대는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 덕에 추격을 받지 않고 티레로 도주할 수 있었다. 티레의 육군 또한 아크레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승리 후 베네치아 함대는 제노바 인들이 항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끊고 진입하여 베네치아 구역을 회복하고 제노바 구역을 포위하였다. 제노바인들은 그들의 자랑인 석궁병들의 활약으로 포위를 버텨내었다.
1258년 7월, 보다못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개입하여 양측의 휴전을 지시하였다. 아크레의 제노바 구역을 빼앗고 대신 티레에서의 권리를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의 사절단이 아크레로 파견되었고 비슷한 시기 몽골군의 위협이 고조되며 싸움은 자연히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1260년 몽골군이 시돈을 공격하는 등 레반트에 전운이 드리우자 다급해진 예루살렘 왕국의 주선으로 협상이 가속화되었다. 마침내 1261년 1월, 양측은 앞서 제시된 교황의 제안대로 휴전을 체결하였다. 제노바는 티레, 베네치아와 피사는 아크레의 상권을 나눠 가졌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3월, 제노바 공화국은 동로마와 님파이온 협약을 체결하며 에게 해와 흑해에서의 독점 무역권을 확보하였다. (협상 자체는 1260년 말 시작) 비록 미카일 8세의 예상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은 제노바의 도움 없이 이루어졌지만 제노바-동로마 동맹은 이후 반세기 가량 지속되었다.
휴전 중이던 1262년에 베네치아 선박들이 동로마의 마르마라 해역을 약탈하다가 동로마-제노바 선박에게 격퇴되는 등 양측의 적대감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1263년, 동로마의 아카이아 원정을 돕기 위해 그리스 남부를 항해하던 48척의 제노바 함대는 세타포치 섬에서 32척의 베네치아 함대와 조우하였다. 베네치아 측이 십자군 깃발을 들고 전진하자 제노바 측에선 겨우 14척만이 응전하였고 그중 4척이 사로잡혔다. 나머지는 도주하며 동로마에 대한 원조는 무산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듬해 제노바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베네치아와 협상했지만 결렬되었다. 결국 1266년 무렵 시칠리아 왕국의 위협에 직면한 미카일은 재차 제노바와 동맹하였다.
제노바는 연이은 승리에 고취된 베네치아의 앞마당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17척의 제노바 함대는 아드리아 해 (베네치아 만)으로 이동, 알바니아 근해의 사세노 섬에 정박한 20척의 베네치아 수송선을 발견하였다. 제노바측 제독 시모네 그릴로는 베네치아측 호위 함대를 트인 바다로 유인한 후 우회하여 그들을 따돌렸고 곧장 사세노 섬으로 향하여 정박하고 있던 수송선 중 15척을 나포하고 나머지 2척을 격침하였다. 이후 베네치아 함대가 돌아오기 전에 전장을 빠져나버렸다. 일거의 습격으로 베네치아는 10만 리브르의 손해를 보았다.
1263년 무렵 제노바와 티레의 영주 필리프 드 몽포르는 베네치아의 위협에 맞서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체결한 터였기에 다른 십자군 도시들 역시 베네치아 편이었다. 따라서 1264년 9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레반트에서 제노바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 거점인 티레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1266년 봄, 24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북아프리카의 튀니스에 들이닥쳐 정박 중이던 제노바 무역선과 창고를 약탈하곤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이에 당시 코르시카에 주둔 중이던 27척의 제노바 함대가 남하하여 시칠리아 서부의 트라파니에서 조우하였다. 베네치아 해군의 연승에 기가 죽은 제노바 함대는 사슬로 함대를 묶어 전투 중 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한꺼번에 격파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제노바 측 병사들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베네치아 측은 모든 적함을 나포하고 8백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육지로 향해 헤엄치던 병사들 중 1200명이 익사하는 등 제노바 측은 대패를 겪었다.
1267년 8월, 제노바 공화국은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재차 아크레 탈환을 시도하였다. 루체토 그리말디 휘하 27척의 함대가 거점인 티레를 떠나 아크레로 향하였고 방파제 끄트머리의 필레 탑을 점령, 그곳을 거점으로 항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0여일 후 그리말디는 15척의 함대와 선박의 수리를 위해 티레로 귀환하였고 그 틈에 26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남은 제노바 함대를 공격, 5척을 침몰시키며 격파하였다. 남은 7척의 제노바 함대는 티레로 도주하며 제노바 공화국의 아크레 점령 시도는 무산되었다.
1267년 이후 재차 소강 상태가 이어지던 1269년, 8차 십자군을 앞둔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양 도시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그리고 교황청과 시칠리아 왕국의 압력까지 더해져 결국 5년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만 루이의 뜻과는 달리 그해 10월, 도리아 가문의 주도로 기벨린 (친독일, 반프랑스) 세력이 제노바를 장악하여 십자군의 원활한 수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1288년에 이르러서야 제노바는 아크레의 상업 구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3년 후에 도시가 함락되며 상실했지만.

3. 쿠르촐라 전쟁 (1294 ~ 1299년)

4. 해협 전쟁 (1350 ~ 1355년)

5. 키오자 전쟁 (1377 ~ 13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