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선형(善亨) |
본관 | 창녕 조씨[1] |
출생 | 1908년[2] 8월 18일 |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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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8년 1월 1일 (향년 89세) |
미국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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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조병화는 1908년 8월 18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에서 아버지 조일승(曺佾承, 1879. 1. 14 ~ 1948. 12. 25)과 어머니 경주 김씨(1876. 5. 11 ~ 1929. 12. 4)[4]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4월 일본 오사카의 계시교회에서 '삼천리 강산을 나의 무대로 삼아'라는 제목으로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다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하여 오사카 거주 한국인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34년 10월에 '기독청년들아 분기(奮起)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43년 6월 야마구치현 아사정(厚狹町)으로 이주하여 일제의 한국인 차별대우의 부당성을 폭로·규탄하였다.
1944년 5월에는 동포들에게 태평양 전쟁의 추이와 조국독립이 머지 않음을 역설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글보존을 위하여 활동하던 중 그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구금되었다가 1945년 8월 21일 야마구치현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198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998년 1월 1일 사망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