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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9:53:41

로베르 1세(노르망디)

파일:노르망디 문장.svg
노르망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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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
Robert I
파일:로베르 1세(노르망디).jpg
이름 로베르 1세(Robert I)
별명 장엄한 자 (le Magnifique)
출생 1010년
노르망디 공국 페캉
사망 1035년 7월 2일 (향년 24~25세)
아나톨리아 니케아
지위 노르망디 공작
1027년 ~ 1035년
배우자 아를레트 드 팔레즈( 정부)
자녀 윌리엄 1세( 사생아), 아델라이드(사생아)
아버지 리샤르 2세
어머니 주디트
형제 리샤르 3세, 기욤, 아델라이드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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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 3대 공작. 잉글랜드 왕국의 정복자 윌리엄 1세의 아버지이다.

2. 생애

1010년경 노르망디 공국 페캉에서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브르타뉴 공작 코난 1세의 딸인 주디트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026년 리샤르 2세가 사망한 뒤 형 리샤르 3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고, 그는 엑매스를 주도로 삼은 아이모아 백국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리샤르 3세는 팔레스에서 반란군을 포위했고, 로베르 1세는 곧 항복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리샤르 3세는 이에 만족해 동생이 직위와 영지를 유지하도록 해줬다.

1027년 8월 6일, 리샤르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1세기 노르만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그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몽생미셸 수도원장이자 노르만 연대기 작가 로베르 드 토리니(Robert de Torigni, 1110 ~ 1186)에 따르면, 그를 독살한 자는 남동생인 로베르 1세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로베르 1세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노르망디 공작을 꿰찬 것만은 분명하다.

1027년 또는 1028년, 노르망디 남부 국경 지역인 벨렘의 영주인 기욤 1세가 로베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베르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랑송에서 반란군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곧 항복했고, 로베르 1세는 기욤 1세에게 맨발로 걷고, 말 안장을 등에 지고 자기 앞에 나타난 뒤 경의를 표하는 조건으로 용서했다. 이후 비이외의 주교이자 아이브리 백작 위그 디브리가 자기가 노르망디 궁정에서 홀대받는 것에 분개하여 프랑스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등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그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오기 전에 아이브리 성앞에 진영을 세웠다. 위그 디브리는 성으로 피난한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와 협상해야 했고, 1032년까지 노르망디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용서받았다.

한편, 로베르 1세는 즉위 직후 수도원과 대성당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젊은 로제 1세 드 몽고메리 등 젊은 추종자들에게 나눠줬다.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아들이며, 에브뢰 백작이자 루앙 대주교였던 로베르가 이에 항의하자, 로베르 1세는 군대를 일으켜 에브뢰를 포위했다. 루앙 대주교이자 에브뢰 백작 로베르는 한동안 항전하다가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에게 망명한 뒤 노르망디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루앙 대주교에게 호응하자, 로베르 1세는 루앙 대주교와 화해하고 그가 백작과 대주교의 책무를 다시 맡는 걸 허용했다.

이후 로베르 1세는 루앙 대주교와 함께 교회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앞서 몰수했던 토지들을 도로 수도원과 성당에 돌려줬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는 토지의 영유권을 확인했다. 또한 아버지 리샤르 2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세리시라포레 수도원을 건설했고, 고모인 노르망디의 베아트릭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몽티빌리에 수도원을 재건하고 수도자들을 수녀로 대체했다. 그의 가신들도 주군을 본받아 수도원을 잇달아 건설했다. 아르케 자작 고슬랭은 1030년 몽스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을 건설했고, 1042년 루앙의 생아망드 수도원을 복원했다. 보몽르로제의 영주인 온프로이 드 비에유는 레 프레오에 수도원을 세웠고, 기사 헤르루인은 리슬 강변에 노트르담 뒤 베크 수도원을 세웠다.

1030년, 로베르 1세는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한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를 응징하기 위해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그는 먼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국경에 셰루에익 또는 샤루엘 성을 세워서 거점으로 삼은 뒤, 브르타뉴 해안을 황폐화시킨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브르타뉴로 진격했다. 알란 3세는 아브랑챙에서 맞섰지만 큰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이후 루앙 대주교 로베르의 중재하에 몽생미셀 수도원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로베르 1세와 화해했다.

1031년,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가 사망하고 앙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곧 어머니 아를의 콩스탕스의 지지를 얻어낸 남동생 로베르의 반란에 직면했고, 블루아 백작 외드 2세도 로베르 왕자에게 가세했다. 이에 앙리 1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페캉으로 피신했고, 그는 앙리 1세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삼촌인 모제 드 코르베유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이어진 빌뇌브생조르주 전투에서 반란군을 참패했고, 앙리 1세는 남동생 로베르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프랑스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베르 1세에게 벡상 지역에 대한 영주권을 수여받았다. 한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도 아들 보두앵 5세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밀려나자 로베르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로베르 1세는 플란데런으로 진군해 초크 성을 공략했다. 플란데런 귀족들이 이에 겁을 집어먹고 로베르 1세에게 항복하자, 보두앵 5세는 어쩔 수 없이 보두앵 4세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화해하기로 했다.

이 무렵, 노르망디 궁정에서는 잉글랜드 전임 국왕 애설레드 2세 엠마의 두 아들이며, 크누트 대왕에게 밀려난 에드워드와 앨프리드 왕자가 있었다. 로베르 1세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된 두 사촌을 도와주기로 하고, 크누트 대왕에게 사절을 보내 두 아이에게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크누트 대왕이 단호히 거부하자, 로베르 1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소환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함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식량, 무기, 병력을 실은 함대는 페캉에 모인 뒤 항해를 시작했지만, 폭풍에 직면하자 저지 섬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노르망디로 귀환했다.

1034년,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으로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이는 그가 형제 리샤르 3세를 독살한 것을 참회하려고 순례를 결심했다고 기술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는 떠나기 전에 귀족들을 페캉에 소집한 후 당시 7살된 어린 아들 기욤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루앙 대주교 로베르, 지역 주교, 대영주 모두가 기욤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사실 많은 귀족은 사생아인 기욤이 후계자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로베르 1세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따랐다. 그 후 로베르 1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궁정에 기욤을 맡기고,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를 기욤의 대부로 삼았다.

1035년 초, 로베르 1세는 시종 터틴 고츠, 오돈 스티간드, 드로곤 드 베생 등 귀족 몇 명과 함께 순례를 떠났다. 그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간 뒤, 바닷길로 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해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4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귀환 중이던 1035년 7월 2일 니케아에서 병사했다. 그 후 유일한 아들 기욤 2세가 노르망디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1] 어느 영지를 다스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