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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1:53:23

기욤 1세(노르망디)

파일:노르망디 문장.svg
노르망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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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1세
Guillaum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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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기욤 1세(Guillaume I)
별명 롱그에페(Longue-Épée, 롱소드)
출생 900년
미상
사망 942년 12월 17일
프랑스 왕국 피퀴니
지위 루앙 백작
927년 이전 ~ 942년
아버지 롤로
어머니 바이외의 포파
형제 아델
배우자 베르만두아의 리에트가르드, 스프로타
자녀 리샤르 1세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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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의 전신인 루앙 백국 제2대 백작.

2. 생애

기욤 1세가 사망한 직후에 지어진 시인 <기욤 롱그에페의 불평>(La Complainte de Guillaume Longue-Épée)은 그가 해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이교도이고 어머니는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다. 아버지 롤로는 약탈할 땅을 찾아 바다를 여행하는 바이킹 지도자였다. 어머니 포파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뒤동 드 생캉탱(Dudon de Saint-Quentin, 960년 또는 970년 ~ 1026)이 롤로의 손자이며 기욤 1세의 아들인 리샤르 1세의 의뢰에 따라 집필한 <노르만인의 역사>(Normannorum)에 따르면, 포파는 그녀가 바이외 백작 베렝가리오 2세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11세기에 집필된 <루앙 연대기>에 따르면, 그녀는 센리스 백작 기의 딸이라고 한다.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해 남쪽에 위치한 영국의 군도인 헤브리디즈의 양치기 집안 출신의 첩이라고 한다.

911년 아버지 롤로가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면서 루앙 백작이 되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루앙 백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랭스의 수도자 리샤르(Richer de Reims, 941 ~ 998)가 기술한 <네 권의 역사서>(Quatre livres d'histoire)에 따르면, 롤로는 플란데런 백국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인 92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았으며, 기욤 1세는 927년 노르만족 지도자로서 서프랑크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 뒤 채널 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롤로가 925년에서 927년 사이에 아들에게 양위한 뒤 932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더글러스(David Douglas, 1898 ~ 1982)는 양위는 없었고 925~927년 사이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931년, 브르타뉴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브르타뉴 방면 바이킹 지도자 펠레칸을 비롯한 다수의 바이킹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접한 기욤 1세는 인콘을 지원해 브르타뉴 반군을 물리치고 반란을 주도한 알란 2세를 축출했다. 뒤동은 그가 "노르만인과 브르타뉴인의 공작"을 칭했다고 밝혔으며, 고고학자들은 몽생미셸에서 그를 브르타뉴 공작이라고 지칭하는 동전을 발견했다. 이로 볼 때, 그는 이 시기에 브르타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33년, 기욤 1세는 서프랑크 국왕 라울에게 "바다 해안에 위치한 브르타뉴인의 땅" 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영지를 코탕탱 반도 및 아브랑챙 일대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66년 전 샤를 2세가 브르타뉴 전임 국왕인 살로몬에게 하사한 땅이었는데, 이 시점에 기욤 1세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934년, 코탕탱 및 아브랑챙 일대의 지도자 리울프가 이끄는 노르만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기원은 불확실한데, 일각에서는 기욤 1세가 서프랑크 왕국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반감을 품은 노르만인들이 리울프를 앞세워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려 했을 거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이들은 루앙 백작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르만인들의 독립 시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리울프는 루앙 성벽 아래 몽 리부데 계곡 인근으로 진군한 뒤, 그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기욤 1세는 이에 맞서 청지기인 안슬레크 드 브릭퀘벡, 노르만 귀족 베르나르, 베생 백작 보톤과 함께 몽토말라드 언덕으로 진군했다. 이후 기욤 1세는 중갑옷을 입은 프랑스 기병대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을 몰아붙여 진압했다.

기욤 1세는 935년경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의 딸인 리에트가르드와 기독교식으로 결혼했다. 이때 그녀의 지참금으로 롱그빌, 쿠드르, 일리에레베크를 받았다. 또한 서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거물인 대 위그의 승인을 받아 누이 아델과 푸아투 백작 기욤 3세 사이의 결혼 계약을 맺었다. 이후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생피에르 드 쥬미에쥬 수도원을 복원했다. 또한 누이 아델에게 푸아티에의 생시프리앙 수도원에서 12명의 수도자를 루앙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뒤동은 그를 평화와 질서의 회복자라고 호평하며, 그의 치세에 노르만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936년 라울 왕이 급사하자 루이 4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다. 939년, 몽트뢰유 백작 에를뤼앙이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에 의해 몽트뢰유를 빼앗긴 뒤 기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기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몽트뢰유로 진군해 탈환했고, 에를뤼앙은 기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기욤 1세는 피카르디를 통제하고 플란데런 공국이 남쪽으로 확장하는 걸 저지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플란데런으로 쳐들어가 여러 영지를 약탈했다가, 교황청으로부터 기독교 영주를 해쳤다는 이유로 파문당했다. 941년 루이 4세가 루앙에서 중재한 평화 협약이 브르타뉴와 노르만인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942년 12월 17일, 기욤 1세는 아르누울 1세의 초대를 받고 피퀴니 인근의 솜강의 한 섬으로 가서 평화 협상을 논의했다. 그런데 평화 협약이 성립된 직후, 캉브레 백작의 아들인 보두앵이 아르누울 1세의 사주를 받아 그를 암살했다. 추종자들은 그의 시신을 되찾은 뒤 루앙 대성당에 안장했고, 10살된 아들 리샤르 1세가 루앙 백국 3번째 백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