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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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 Richard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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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샤르 2세(Richard II) | |
별명 | 봉(Bon, 선한 자) | |
출생 | 미상 | |
사망 | 1026년 8월 19일 (향년 불명) | |
노르망디 공국 페캉 | ||
지위 | 노르망디 공작 | |
996년 ~ 1026년 | ||
아버지 | 리샤르 1세 | |
어머니 | 군노르 | |
형제 | 로베르, 모거, 엠마, 하와이즈, 마틸드 | |
배우자 | 주디트, 파피아 | |
자녀 | 리샤르 3세, 로베르 1세, 기욤, 아델라이드, 모거, 기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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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 초대 공작. 그의 치세부터 노르망디 공작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2. 생애
아버지는 루앙 백작 리샤르 1세이다. 노르만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로베르 드 토리니(Robert de Torigni, 1110 ~ 1186)에 따르면, 어머니 군노르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는 페이 드 코의 임업가였다. 그녀는 지역 산림 관리인의 아내였던 언니 세인프레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인근에서 사냥하던 리샤르 1세가 그 집에 들렀다가 세인프레다에게 홀딱 반했다. 리샤르 1세는 세인프레다에게 자기 침대로 오라고 명령했지만, 세인프레다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인 군노르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리샤르 1세는 군노르를 정부로 두거나 ' 데인족 방식으로'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아내 엠마가 사망한 뒤 ' 기독교 방식으로' 결혼했고, 이미 낳았던 자식들은 합법적인 자녀가 되었다.996년 11월 21일, 리샤르 1세가 페캉에서 사망한 뒤 직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다. 11세기 노르만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그가 집권한 직후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 스스로 통치하기 위해 의회를 결성했다. 리샤르 2세의 삼촌인 라울 디브리[1]가 진압에 착수해 수많은 반군을 살육하고 주동자들의 손과 발을 잘라냈다.
또한 기욤에 따르면, 리샤르 1세의 사생아이자 리샤르 2세의 이복형인 이에모아 백작 기욤 리샤르가 리샤르 2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라울 디브리가 재차 원정대를 이끌고 기욤을 체포했다. 그러나 이에모아 백작의 가신들은 이에 맞서기로 마음먹고, 1001년경 감옥에 갇혀 있던 기욤을 구출했다. 하지만 기욤은 더 이상 항전하길 포기하고 리샤르 2세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고, 리샤르 2세는 용서해줬지만 이에모아 백국이 동요할 것을 우려해 이에모아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기욤을 외 백작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렇듯 집권 초기에 분쟁이 벌어졌지만 삼촌 라울 디브리의 활약으로 잘 수습되었고, 리샤르 2세는 1001년경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이후 재위 30년간 공국의 내부 개편을 단행했다. 그는 스스로 노르망디 공작을 자처했고, 노르망디의 가장 중요한 주교단 및 백국인 바이외, 루앙에 형제를 앉혔으며, 이브리, 에브뢰, 모르탕, 이에모아, 외, 브리온을 백국으로 편성하고 백작을 선출했다. 이 백작들은 각 영지에서 자율적으로 통치할 수있었지만, 공작의 뜻에 따라 직위와 영지를 몰수당할 수 있었고, 공작의 권한에서 분리된 권한을 대표단에 의해서만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리샤르 형제들은 5개 백국과 2개 주교직을 보유했다. 또한 리샤르 2세는 백국이 없는 지역에 자작을 세웠다. 이리하여 봉건제가 그의 치세에 노르망디에서 부분적으로 확립되었다.
리샤르 2세는 조부 기욤 1세, 아버지 리샤르 1세 처럼 수도원 복원 사업을 이어갔다. 1001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인 페캉에 베네딕도회 수도자이자 이탈리아 수도원 개혁가 굴리엘모 다 볼피아노(Guglielmo da Volpiano, 962 ~ 1031)를 초대했다. 굴리엘모는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페캉으로 가서 그곳 수도원을 이끌었으며, 에브뢰의 생토랭 수도원, 몽테빌리에 수도원, 노트르담 드 베르네 수도원의 재건 또는 건설에 기여했다.
또한 리샤르 2세는 서기관이자 고해신부인 뒤동 드 생캉탱에게 자신의 조상들을 주변 영주와 노르망디 귀족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한 도덕적으로 올바른 기됵교 지도자들로 묘사하는 내용의 연대기를 집필하도록 했다. 이것은 노르만인들의 정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선전 작품이었기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많이 실렸지만, 현대 학자들은 노르망디 공국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한다.
한편, 리샤르 2세의 초년기 동안 바이킹은 잉글랜드 왕국에 대한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노르망디 정부의 동의에 따라 공국 서쪽을 후방 기지로 사용했다. 1000년경,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는 이들을 뿌리뽑기 위해 노르망디 공국을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코탕탱 반도의 레빌에 상륙한 애설레드 2세의 군대는 코탕탱의 자작인 넬 드 생 소뵈르의 역습으로 참패했다. 그 후 성년이 된 리샤르 2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기 위한 협상을 시작한 끝에 1002년 여동생 엠마를 애설레드 2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1002년 11월 13일, 애설레드 2세는 사악한 음모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왕국에 사는 모든 데인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 이에 분노한 데인족은 스벤 트베스케그의 지휘하에 1003년, 1004년, 1006년, 1009년에 잉글랜드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결국 1013년에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했다. 애설레드 2세, 엠마 및 그들의 아이들은 노르망디 공국으로 피신해 리샤르 2세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1014년 스벤 1세가 사망한 뒤 애설레드 2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얼마 안 가 사망했다. 그 후 스벤 1세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재차 정복한 뒤 엠마와 결혼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애설레드 2세와 엠마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 그대로 남았고, 리샤르 2세는 크누트 대왕의 집권을 용인했다.
리샤르 2세는 아버지처럼 카페 왕조를 주군으로 받들고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위그 카페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 로베르 2세는 그처럼 교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에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1003~1005년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로베르 2세와 부르고뉴 및 마콩 백작 오도 기욤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베르 2세에게 가담해, 로베르 2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장악하는 데 일조했다. 1006년 5월 30일 페캉에 찾아온 로베르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006년 9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인 발랑시엔을 점령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는 로베르 2세, 리샤르 2세를 끌어들여 보두앵 4세와 대적했으나 발랑시엔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리샤르 2세는 브르타뉴 공국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앙주 백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부터 렌 정권을 지원했던 블루아 백국은 새 백작인 외드 2세가 동쪽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기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먹고, 리샤르 2세의 누이인 하와이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여동생 주디트를 리샤르 2세의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두텁게 다졌다.
1008년, 브르타뉴 공작이자 누이 하와이즈의 남편인 조프루아 1세가 로마 순례를 다녀오던 중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사망하자, 조프루아 1세의 두 형제 알란 3세와 에우돈이 공동 공작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조카인 두 형제의 대부가 되어줬다. 1009년, 리샤르 2세는 몽생미셸 수도원장 메이너드 2세에게 압력을 행사해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으로 밀어내고 힐데베르트 1세를 몽생미셸 수도원의 새 수도원장으로 세웠다.
리샤르 2세는 1005년 이전에 여동생 마틸드를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와 결혼시키고 드뢰 절반을 지참금으로 제공하는 등, 블루아 백작과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리샤르 2세는 관례에 따라 지참금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외드 2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리샤르 2세는 드뢰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1013년 틸리에르 요새를 건설했다. 외드 2세는 멘 백작 위그 3세, 멜룬 자작 갈레랑 1세와 함께 틸리에르 성채가 완공되기 전에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했다.
1014년, 리샤르 2세는 자기 형제이자 루앙 대주교 로베르에게 세레를 받은 올라프 2세 하랄드손을 사주해 돌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했으며, 브르타뉴 공국에 압박을 계속 가해 양국의 국경을 셀루네 강에서 셀룬 강까지 밀어냈다. 그 후 로베르 2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쿠드레에서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블루아 백작이 드뢰를 갖고 자신은 틸리에르 및 아브레 강둑을 가지기로 했다.
1026년, 리샤르 2세는 샬롱쉬르손에 포로로 잡혀 있던 사위 부르고뉴 백작 르노 1세를 구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먼저 샬롱 백작이자 오세르 주교인 위그 드 샬룡에게 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위그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죄수의 경비를 강화하자 아들 리샤르 3세에게 군대를 소집해 그를 응징하도록 했다. 그러나 샬롱 침공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인 1026년 8월 19일에 페캉에서 사망했고, 리샤르 3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유해는 페캉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주디트(982 ~ 1017): 브르타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 리샤르 3세(1008 ~ 1027): 노르망디 공작.
- 로베르 1세(1010 ~ 1035): 노르망디 공작.
- 기욤(? ~ ?): 페캉 수도자.
- 아델라이드(1005 ~ 1038): 부르고뉴 공작 르노 1세의 부인. 교황 갈리스토 2세의 할머니.
- 파피아: 노르망디 해안이에 위치한 탈루( Talou)의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전해지며, ' 데인족 방식'으로 리샤르 2세와 결혼했다고 한다.
- 모거 드 루앙(1017년 이후 ~ 1060년 이전): 루앙 대주교.
- 기욤 드 아르퀘(1026년 이전 ~ 1054년 이후): 아르퀘 백작.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지만 진압된 뒤 해외로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