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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20:44:25

담 해전

담 해전
영어: Battle of Sandwich
시기 1213년 5월 30일 ~ 5월 31일
장소 플란데런 백국 담 해안가
원인 프랑스 왕국의 침공을 받은 플란데런 백국을 도우려는 잉글랜드 함대의 출진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롱게스피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사바리 드 몰레옹
병력 수백 척 500척 이상
피해 불명 나포 300척, 파괴 100척, 나머지 자침
결과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존 왕과 동맹 세력의 프랑스 침공.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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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13년 5월 30일 ~ 5월 31일, 잉글랜드 왕국 해군이 프랑스 왕국 해군을 플란데런 백국의 담 해안가에서 섬멸한 해전.

2. 배경

120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대공세로 인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 푸아투 등을 빼앗기고 잉글랜드로 후퇴한 존 왕은 기필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푸아투를 향한 잉글래드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했고, 본인은 새로운 함대를 창설해 노르망디로 항해하려 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잉글랜드 기사 10명 중 1명꼴로 전쟁에 동원하고 나머지 9명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도록 했으며, 기사들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왕의 휘하에서 복무하도록 했다.

존은 공성전을 준비하고자 강력한 공병대 및 상당한 수의 전문 석궁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 윌리엄 마셜, 로저 드 레이시, 웨일스 변경백 윌리엄 드 브라오스를 포함한 군사 전문 지식을 가진 유력한 남작들의 지원을 받았다. 존 왕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항구인 도버 항 등 잉글랜드 남동부의 다섯 개 항구 외에도 포츠머스를 추가로 확장했으며, 1204년부터 1212년까지 104척을 건조했다. 잉글랜드 행정관 로섬의 윌리엄이 "갤리선의 수호자"로 임명된 뒤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흩어진 함대와 상선을 하나의 작전 함대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듯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상황은 잘 풀리지 않았다. 1205년에 감행하려던 원정 계획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 걸 수습해야 했기에 중단되었고,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소규모 병력 만이 푸아투로 투입되었다. 1206년, 존은 직접 푸아투로 진군했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 가스코뉴를 위협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한 뒤, 존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앙주 백국의 중심지인 앙제를 점령했다. 필리프 2세는 존과 대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양자 모두 섣불리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면서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가 2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존 왕은 휴전 기간 동안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막대한 돈을 모집한 뒤, 새로운 동맹을 맺는 데 활용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놓고 프리드리히 2세와 경쟁하던 조카 오토 4세를 회유했으며, 뒤이어 불로뉴의 르노 백작, 플란데런의 페랑 백작을 포섭했다. 필리프 2세 역시 존 왕이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를 결정적으로 꺾어버릴 기회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던 중 1205년부터 1212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 문제로 존 왕과 첨예한 갈등을 벌이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존 왕을 파문한 뒤 1213년 1월 필리프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해 존 왕을 폐위하라고 권고했다.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수아송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소집한 뒤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의 격려하에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대규모 함대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존 왕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했고, 1213년 5월 도버의 템플기사단 교회에서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락되었다.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가 지지하는 스티븐 랭턴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취임하는 걸 받아들였고, 잉글랜드 왕국을 교황청에 매년 1,000 마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으며, 위기 동안 손실된 수입을 교회에 보상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진 뒤, 인노첸시오 3세는 즉시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반대했다. 필리프 2세는 이대로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하면 교황청이 자신을 적대할 것임을 직감하고, 판둘프 베라치오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 원정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존 왕이 아직 파문 중이었을 때 수아송에서 소집한 회의에 불참하고 잉글랜드 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불충한 봉신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을 응징하기로 하고, 당초 잉글랜드를 치려던 대규모 함대를 플란데런 침공으로 돌렸다. 함대는 불로뉴에 집결했고, 지난 8년간 존 왕을 섬겼다가 이번에 필리프 2세 쪽으로 돌아선 프랑스 하급 귀족인 사바리 드 몰레옹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존 왕은 플란데런 백국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3대 솔즈베리 백작이자 이복형제인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플란데런 백국을 구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리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대규모 해전이 임박했다.

3. 전투 경과

당시 프랑스 진영에 있었던 왕실 사제이자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기욤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함대가 1,700척에 달한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지나친 과장으로 간주하고 대략 500척 이상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들은 와인 베이컨, 군대의 급여 상자, 프랑스 귀족들의 개인 물품을 잔뜩 싣고 그라블린으로 이동한 뒤, 당시 플란데런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항구로 손꼽히던 담 항구로 향했다. 담은 지금은 대부분 퇴적물로 막힌 즈윈 강 어귀에 위치했으며, 브뤼헤 시의 주요 항구로 기능했다. 그 후 프랑스 함선들이 담 인근 해안가에 정박하는 동안, 프랑스 군은 카셀, 이프르, 브뤼헤를 접수한 뒤 겐트를 포위했다.

한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 존 왕의 지시에 따라 1213년 5월 28일에 잉글랜드 및 플란데런 무장병 700명과 수행원 수백 명, 많은 용병을 함대 수백 척에 태운 채 출진했다. 5월 30일 즈윈강 어귀에 이른 잉글랜드 함대는 해안가에 정박한 대규모 적 함대를 목격했다. 리엄 롱게스피는 프랑스 함대와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 몰랐기에, 처음에는 플란데런 함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정찰선을 보내 살펴본 결과 프랑스 함대임을 인지했고, 함선들이 거의 텅 빈 상태인 걸 알게 되자 즉시 공격해 정박해 있던 함선 300척을 나포하고 100척을 불태웠으며,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을 약탈했다. 다음 날 육지에 상륙한 뒤 담 시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자 남은 프랑스 함선들을 사냥하려 들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매우 격노했다. 그는 6월 2일 담에 도착한 뒤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구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잉글랜드 선박 무리가 프랑스의 남은 선박을 거의 마음대로 약탈하고 포획하거나 불태운 뒤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이를 갈았다. 이후 다수의 선원이 최근까지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푸아티에나 노르망디 출신인 점을 의심해 살아남은 선박을 불태우고 담 마을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필리프 2세는 여세를 이어가 플란데런을 대대적으로 침공해 지나가는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농민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다. 이후 자신이 공략한 플란데런 도시 주민들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대가로 3만 마크를 받아낸 뒤 파리로 귀환했다.

4. 이후

잉글랜드 함대는 나포한 배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존 왕은 이 엄청난 전과에 고무되었고, 1214년 2월 필리프 2세로부터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여기에 지난해 프랑스의 무자비한 침략을 보복하고 싶었던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가담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도 가담했다.

존은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 세력인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존 왕이 필리프 2세의 장남 루이 왕자와의 대결에서 고전하는 사이, 오토 4세, 르노,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에게 완패하면서,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