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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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 Arthur 1er de Bretag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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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르튀르(Arthur) | |
출생 |
1187년
3월 29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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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03년 이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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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브르타뉴 공작 | |
1196년 ~ 1203년 | ||
리치먼드 백작 | ||
1196년 ~ 1201년 | ||
아버지 | 조프루아 2세 | |
어머니 |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 |
누이 | 엘레오노르, 마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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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2. 생애
1187년 3월 29일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인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와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엘레오노르, 마틸드가 있었다. 이름인 아르튀르(Arthur)는 아서왕에서 딴 것으로, 조프루아 2세가 속한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아서왕 전설이 인기를 구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 랑그독 출신의 옥시탄어 음유시인 페이레 비달(Peire Vidal, 1175년경 ~ 1205년 이후)은 "그들이 브르타뉴에서 아서(Arthur)를 되찾았으니 기쁨을 놓칠 이유가 없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다만 그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 조프루아 2세는 1186년 8월 19일에 파리 궁정에서 병사했기에, 그는 유복자였다.119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국왕 탕크레디와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4살이었던 그의 조카이자 콩스탕스와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는 리처드 1세에 의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아르튀르가 성년이 되면 탕크레디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었다. 1196년, 콩스탕스는 브르타뉴 귀족 총회에서 9살된 아들 아르튀르를 공동 공작으로 세웠다. 이에 리처드 1세는 장차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던 자기 계획이 파탄났다며 불만을 품고, 콩스탕스에게 아르튀르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콩스탕스가 아들을 넘기길 거부하자, 리처드 1세는 그녀에게 바이외로 출두하라고 명령한 뒤, 1189년 콩스탕스와 결혼했지만 콩스탕스의 반대로 브르타뉴 공작이 되지 못해 불만을 품고 있던 체스터 백작이자 아브랑슈 자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에게 콩스탕스를 납치하라고 명령했다. 라눌프는 콩스탕스가 퐁토르송을 방문했을 때 납치한 뒤 텔레리에 있는 자기 성에 가뒀다. 콩스탕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튀르는 급히 브레스트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파리로 이동해서 필리프 2세의 보호를 받았고, 브르타뉴 성직자 및 귀족들은 콩스탕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브르타뉴 대귀족들이 인질을 인도하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이 인질을 데리고 오자, 그는 인질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온 귀족들까지 감옥에 가뒀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와 전쟁을 치르던 리처드 1세는 1198년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고 브르타뉴 귀족들과 화해했다.
그 후 파리 궁정에서 양육된 아르튀르에 대해 기원부터 1242년까지 프랑크족과 프랑스의 역사를 다룬 운율 연대기(Rhymed Chronicle) 작가 필리프 무스케스(Philippe Mouskes, 12세기 말 ~ 1282)는 "발간 머리의 신사였으며, 매우 잘생겼고, 순수하고, 정중하고, 교육을 잘 받았다"라고 평했다. 1199년 이전 브르타뉴로 돌아왔고, 어머니와 함께 공동 공작을 맡았다. 그러던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성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아르튀르 1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이며, 리처드 1세는 지난날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왕으로 세우겠다는 메시나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하지만 80세의 잉글래드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리처드 1세의 막내 동생인 존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푸아투와 아키텐의 앵글로-노르만 남작들은 엘레오노르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앙주, 멘, 투렌 남작들은 반발했다.
1199년 5월, 아르튀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접견한 뒤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경의를 표했다. 이후 앙주, 메인, 투렌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Guillaume des Roches, 1155년에서 1165년 사이 ~ 1222)의 중재에 따라 숙부와 화해했지만, 그 해 9월 말부터 다시 프랑스 국왕의 보호를 받기로 하고 2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그러나 1200년 5월, 필리프 6세는 존 왕과 협상한 끝에 걸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20,000 마크 상당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존 왕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및 아키텐 공국 등 유럽 대륙 영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하며, 존 왕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지참금을 위해 부르주, 이소둔, 그라카이 등 베리 영지를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르튀르 1세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결국 아르튀르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1201년 9월, 어머니 콩스탕스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의 단독 공작이 되었다. 반면에, 그는 어머니가 잉글랜드에서 소유했던 리치먼드 백작령을 물려받지 못했고, 이부 누이인 알릭스 드 투아르가 리치먼드 여백작이 되었다. 1202년 4월, 필리프 2세는 존 왕과의 평화 협약을 깨고 아르튀르를 다시 지원하기로 했다. 아르튀르는 필리프 2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고, 구르네앙브레이를 공략한 후 필리프 2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고, 필리프 2세의 딸 마리와 약혼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로부터 브르타뉴 공작, 앙주 백작, 멘 백작, 투렌 백작, 푸아투 백작으로 선포되었지만, 앙주, 멘, 투렌, 푸아투를 장악하려면 그곳에 주둔한 친 존왕 파벌을 물리쳐야 했다.
1202년 8월, 이제 15살이 된 아르튀르는 존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할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피난처로 삼은 루덩 인근의 미르보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존 왕이 급파한 브람버 제4대 영주 기욤 3세 드 브리우즈의 역습으로 격파된 뒤 생포되었다. 기욤 3세는 아르튀르를 팔레즈에 가뒀다가 다시 루앙 탑으로 이송했다. 그러다가 루앙 탑에서 돌연 실종되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 웨일스의 마감 마을에 위치한 마감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아르튀르를 붙잡아 한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부활절 전 목요일인 1203년 4월 3일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술에 취해 악마에 사로잡혀 자기 손으로 아르튀르를 죽이고 무거운 돌에 묶인 시체를 센 강에 던졌다. 한 어부가 그물에서 그를 발견하고 해안으로 다시 데려온 뒤 생트마리 뒤 프레 수도원에 비밀리에 묻었다고 한다.
- 잉글랜드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코번트리의 월터에 따르면, 아르튀르는 갑자기 사라졌고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코그스홀의 수도사 라울( Raoul de Coggeshall, ? ~ 1227)에 따르면, 루앙 요새 수비대장 휴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 1160년 또는 1165년 ~ 1243)는 존 왕으로부터 의회의 동의를 받았으니 아르튀르를 거세해 왕위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휴버트는 명령에 따랐고, 아르튀르가 거세된 직후 사망하자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생앙드레 드 구페른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했다고 한다.
- 프랑스와 브르타뉴 연대기 작가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지 15일 후 브르타뉴인들이 반에 집결해 렌 주교를 필리프 2세에게 보내 존 왕을 아르튀르 살해 혐의로 고발했고,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있는 존 왕의 소유물을 박탈했다고 기술했다.
- 캐나다 출신의 언론인이자 역사 소설가 토머스 버트람 코스테인의 <정복한 가족: 플랜태저넷 왕조의 역사>(The conquering family : a history of the Plantagenets)에 따르면, 존 왕은 1208년 아르튀르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자자 아르튀르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기욤 드 로슈(Guillaume des Roches)의 모든 영토를 압수하고 장남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기욤 드 로슈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려 했지만, 아내 모드 드 브리우즈가 자기 조카를 사악하게 살해한 자에게 자녀를 맡기지 않을 거라며 단호히 거부했고, 존 왕은 격분해 모드와 그녀의 아들들을 코프 성에 가뒀다. 기욤은 파리로 피신한 뒤 아르튀르 실종 사건에 대해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사실을 밝혔고, 얼마 후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아르튀르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위는 본래 그의 누나 엘레오노르가 물려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1202년 존 왕에게 생포된 뒤 1241년 8월 10일 브리스톨에서 사망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무력으로 장악한 뒤 브르타뉴 보안관에 콩스탕스의 3번째 남편이자 전임 브르타뉴 공작인 기 드 투아르가 콩스탕스 사이에서 낳은 장녀 알릭스 드 투아르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우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