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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발리올 왕조 초대 국왕 존 발리올 John Balli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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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존 발리올(John Balliol) |
이름 | 존 2세 드 발리올 (John II de Balliol) |
출생 | 13세기 중반 |
사망 |
1313년에서
1315년 사이 피카르디 |
재위기간 | 1292년 11월 17일 ~ 1296년 7월 10일 |
배우자 | 이사벨라 드 바렌(1279년 결혼 / 1291년에서 1296년 사이 사망) |
자녀 | 에드워드, 헨리 |
아버지 | 존 1세 드 발리올 |
어머니 | 갤러웨이의 데르보트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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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에드워드 1세의 간섭에 맞서려 했다가 폐위되었다.2. 생애
아버지 존 1세 드 발리올은 제5대 발리올 남작으로 스코틀랜드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잉글랜드 영주였고, 헨리 3세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어린 왕 알락산더르 3세의 후견인을 맡기도 했다. 어머니 데르보트길라는 갤러웨이의 영주 앨런과 헌딩턴 백작 데이비드의 딸 마거릿의 딸이다. 출생년도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코틀랜드 전문 역사가 리처드 D.오람(Richard D. Oram)은 그가 1249년에 출생했으며 잉글랜드에서 출생했을 거라 추정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발리올 가문은 정략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사이에 많은 토지를 축적했으며, 필리프 2세가 존 왕으로부터 노르망디를 탈취했을 때 다른 많은 노르만 귀족들과는 달리 영지를 그대로 유지할 정도로 프랑스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그의 어머니 데르보트길라는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1세의 손자이며 헌팅던 백작인 데이비드의 후손이었다. 이는 훗날 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존의 생애 첫 수십 년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현대 학자들은 그가 더럼 교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점을 근거로 더럼 교구에서 라틴어, 신학 등을 공부했을 거라 추정한다. 1278년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프랑스 내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다. 1279년 가장 강력한 잉글랜드 봉건 영주 중 한 명인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딸 이사벨라 드 워렌과 결혼했다. 이사벨라의 어머니인 뤼지냥의 앨리스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이복 형제였기 때문에, 이사벨라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사촌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1282년 투르앙비메우에 예배당을 세웠고, 1283년 말과 1284년 초 사이에 잉글랜드 왕실의 허가를 받고 프랑스를 방문했으며, 1289년 아미앵으로 가서 영지를 관리했다.
1286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가던 중 낙마해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알락산더르 3세의 외손녀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이들이 많았는데, 특히 알락산더르 3세의 먼 사촌이었던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1]와 존의 어머니 데르보트길라가 제일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로버트 브루스와 데르보트길라는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존의 장인인 존 드 워렌이 사절단으로서 회담에 참석한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그 역시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1290년, 당시 7살이었던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선박을 타고 이동했지만, 도중에 뱃멀미에 시달리다 급사했다. 이후 수많은 인사들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는데, 그 중엔 존도 있었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스스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들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스코틀랜드 왕위 요구자 13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존은 6월 15일에 직접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고 8월 3일에 다시 찾아와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고, 존은 3일 후에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갱신했다. 그는 11월 30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292년 12월 26일, 존은 이전에 합의한 대로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국에 종속된 국가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엔 더 이상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관이 없어서 각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고,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모든 법률과 선언을 무시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 행정부 내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임명했고, 존이 내린 결정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독단적으로 취소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모든 법적 소송은 존이 아니라 자기에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1293년 한 해 동안 최소 6차례나 존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던 1293년 중반, 파이프 백작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 맥더프라는 스코틀랜드 귀족이 에드워드 1세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속 재산을 물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존은 그 땅은 현재 스코틀랜드 왕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맥더프가 에드워드 1세에게 허락받았다고 밝히자, 존은 그를 투옥했다. 몇 달 후 석방된 맥더프는 에드워드 1세에게 존의 행동을 고발했다. 존은 즉시 런던 의회로 소환되었다. 존은 소환을 미루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런던에 가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으며, 맥더프에게 투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줘야 했다.
129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받기 위해 런던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잉글랜드 측 연대기들은 존은 회의에 참석한 뒤 3년간 자기 땅의 수입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지만,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지가 있던 존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에드워드1세는 프랑스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존에게 동일한 조치를 내리고 군대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존은 이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역시 에드워드 1세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그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95년 말, 존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쳤던 충성 맹세는 에드워드 1세가 무력으로 협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사절을 교환했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앙주의 이자벨과 자신의 장남인 에드워드 발리올 사이의 약혼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공동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지배를 놓고자신과 대립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존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존이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침공을 취소하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론하라며 존을 소환했다. 존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존이 잉글랜드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과 토지를 압류하라고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존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내분을 유도했다.
존은 에드워드 1세가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으로 타격을 입히기로 하고 컴벌랜드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브루스 가문과 추종자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베릭으로 진군했다. 베릭은 1295년 말부터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1296년 3월 육군을 이끌고 온 에드워드 1세에게 포위된 뒤 반복된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베릭에 입성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노섬벌랜드에서 온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베릭에 정착했다. 존은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든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여세를 이어가 던버 성을 포위했다. 당시 제8대 마치 백작 패트릭 던버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내인 마조리 코민은 존을 추종했고, 던버 성의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마조리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존은 소수 병력을 이끌고 던버 성으로 진격해 1296년 4월 27일 던버 전투에서 장인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그러나 단합력과 훈련이 부족한 스코틀랜드군은 크게 패했고, 마조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후 존은 몇 달간 저항을 이어갔지만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자 1296년 7월 10일 브레친 성에서 항복하고 모든 왕실 휘장에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존과 장남 에드워드는 생포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1299년 7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중재 덕분에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를 떠나 피카르디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프랑스 왕실은 이후에도 존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대우했지만, 1306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에 올랐을 때 즉시 인정했다. 존은 1313년에서 1315년 사이에 사망할 때까지 피카르디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가 정확히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일부 기록은 그가 당시 소유하고 있던 가이야르 성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기록은 엘리코트 성을 지목했다. 발리올 가문의 출신지인 발리올에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는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에드워드와 헨리를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를 얻기 위해 투쟁했으며, 둘째 아들 헨리는 1332년 12월 16일 스코틀랜드 아난에서 형에게 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인들을 대적하다가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