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칼리파 시대 (라시둔 왕조)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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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정치·국가원수 | <colcolor=#212529,#e0e0e0> 칼리파 |
수도 | 메디나 · 나자프 | |
경제 | 디나르 · 디르함 | |
역대 칼리파 | 아부 바크르 · 우마르 · 우스만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 하산 이븐 알리) | |
인물 | 알 카카 ·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 아므르 이븐 알 아스 | |
종교 | 이슬람 | |
문화 | 초기 이슬람 도검 |
라시둔 칼리파국 اَلْخِلَافَةُ ٱلرَّاشِدَةُ al-Khilāfah ar-Rāšida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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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만 재위기의 최대 강역[1] | |||||
632 ~ 661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동로마 제국 | 우마이야 왕조 | ||||
사산 왕조 | |||||
위치 |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 ||||
수도 |
메디나 (632~656) 쿠파 (656~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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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신권정치, 선거군주제 | ||||
국가원수 | 칼리파 | ||||
역대 칼리파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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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6,400,000km² (655년) | ||||
종교 | 이슬람 | ||||
통화 | 디나르 · 디르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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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시둔 칼리파 시대[2]는 이슬람의 초기 성립 시기, 즉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한 4명의 정통 칼리파[3]가 다스린 이슬람 제국의 시대를 가리킨다. 정통 칼리파 시대는 이슬람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나고, 제4대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암살당하게 되면서 결국 정통 칼리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에는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가 되어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시대가 열린다.2. 성장과 팽창
자세한 내용은 이슬람/정복 문서 참고하십시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제국은 중동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급격한 팽창과 성장을 이루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날 무렵,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이미 아라비아 반도에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이집트, 페르시아(이란), 레반트, 리비아를 아우르는 초대형 제국이라 할 만큼 성장했으며, 이들 영토는 훗날의 우마이야 왕조가 추가로 확장을 한 이후에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서 기능했다. 여기에 맞먹을 정도의 팽창을 이룬 중동의 제국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와 오스만 제국 정도를 빼면 전무하며,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까지 합치면 중동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정치
이 시대는 선거군주제 국가이기도 하다. 애초에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파이다.[4] 그런 만큼 이 시기의 정치 역시 무슬림 공동체 간의 협의와 합의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다만 가톨릭의 교황이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처럼 안정적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실제로 정통 칼리파 시대는 30년도 못가서 제4대 칼리파인 알리의 암살로 끝나기도 했으려니와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었을 때부터가 혈통으로 정할지 말지를 놓고, 논쟁이 많았는데 애초 부족 사회가 일반적이었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탄생한 배경상 안정적으로 선거군주제가 이어지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는데 이슬람교에서 예언자는 혈통이 아닌 알라(하느님)의 선택에 달렸다. 예언자가 알라의 선택에 달린 만큼 그 후계자인 칼리파 또한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실제로 무함마드의 후계자감으로 여겨지던 알리가 아부 바크르에게 밀려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허나 이런 분위기도 잠시 동안의 일이었으며, 혈연에 따라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무함마드 사후부터 있었다. 정작 처음에는 혈연에 따라 정하지 않았으면서 제2대 칼리파인 우마르 시대부터는 서서히 이슬람도 세속화되어 그 결과 우마르가 죽기 직전, 주변 인물들이 다음 후계자로 우마르의 아들를 삼을 것을 권해 우마르가 분노하게 된다. 특히 제3대 칼리파인 우스만이 칼리파가 된 것도 세속화의 상징이다. 우스만은 나름대로 이슬람에서 괜찮은 지위에 있었지만 지위에 비해 무함마드 생전이나 사후에나 이슬람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작았다. 그럼에도 그가 칼리프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슈라 집단이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을 내세운 알리보다 자신들처럼 상류층 출신에 입장이 비슷한 우스만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순수성 vs 세속화 및 칼리파 계승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은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5][6][7]
4. 군사
정통 칼리파 시대 이슬람 세력의 확장 원동력인 군사력은 주적이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는 정반대로 막강한 중장보병과 경기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메카와 메디나, 타이프를 중심으로 징집되었으며 오로지 무슬림만이 입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외에 확장 과정에서 개종한 정복지의 주민들이 무슬림군으로 입대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제국 군사력의 중추가 되었다.중동의 제국들이 대부분 중무장 보병을 육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달리[8], 무슬림 군대는 중장보병을 주축으로 한 보병전술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체인메일과 장검, 장창 등으로 무장했으며 궁수들의 사격과 기병대 돌격의 보조를 받아 돌격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궁수들의 사격을 보조하여 이들에게 적병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탱커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경기병 역시 무슬림 군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동방 국가들의 특징이었던 카타프락토이[9]는 없었다. 초기에야 동방 제국들과 같은 군사 귀족을 주축으로 하는 봉건 제도의 전통이 없었으니 당연했겠지만, 거대 제국을 일구고 나서도 한동안은 중무장 기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장기병을 주력으로 했던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이 훨씬 질낮은 아랍 군대의 경기병 전술에 속절없이 털려나갔으니, 중장기병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당연할 것이다. 무슬림 군대가 비로소 중무장 기병의 장점을 깨닫고 이를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시기는 수백년이 지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의 기사들을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무슬림들의 경기병 전술은 당대에 보기 힘든 군사적 혁신으로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병 전술 중 하나로 손꼽힌다. 경기병이긴 하지만 이들은 이전 중동 군대식의 기마궁수나 투창병과 같은 원거리 기병이 아닌, 검과 기병창을 들고 근접전을 수행하는 돌격기병들이었다. 이는 주로 마갑을 입힌 카타프락토이들이 돌격전을 수행했던 사산 왕조나 동로마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으며, 이들과 중보병진의 적절한 공조가 무슬림 군대의 주 운용 방식이었다. 이들은 특유의 기동성을 이용해 적의 측 • 후면 등을 공격하는데 능했으며. 동시기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던 카타프락토이들과 달리, 무슬림의 경기병들은 육성에 비교적 힘을 덜 들이고도 보다 빠른 기동성으로 적의 측 • 후방을 유린함으로서 경기병으로도 충분한 군사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경기병대 중에서도 툴리앗 무타하리카(طليعة متحركة), 즉 기동 근위대는 무슬림 군대의 최정예 기병대로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정복 전쟁의 주역이었다.
유목민족인 아랍인들의 군대답지 않게[10] 기마궁수들은 전통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경기병들은 근접전만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랍 유목민들에게 기마궁수로서의 전통이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기마궁수 자체가 애초에 훈련만으로 양성될 수 있는 병과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기마궁수를 운용한 문화는 처음부터 기마궁수의 풍습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군대의 주력 전술이 기마궁수가 되었던 경우이다. 비록 무슬림 군대는 후대에 정복전을 거치면서 기마궁수들을 군 편제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대부분은 주로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받아들인 현지 출신자들이나 이슬람권으로 유입된 튀르크 계열 유목민들이었다.
5. 역대 칼리파
보편 칼리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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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 3세 | 무스타파 4세 | 마흐무트 2세 | 압뒬메지트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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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뒬아지즈 | 무라트 5세 | 압뒬하미트 2세 | 메흐메트 5세 | |||
제29대 | 제30대 | |||||
메흐메트 6세 | 압뒬메지트 2세 |
}}} 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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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초대 | 아부 바크르 | 632년 ~ 634년 |
제2대 |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 | 634년 ~ 644년 |
제3대 | 우스만 이븐 아판 | 644년 ~ 656년 |
제4대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656년 ~ 661년 |
(제5대) | 하산 이븐 알리[11] | 661년 |
[1]
지도에 오류가 있는데, 카스피해 남안의 북부 이란 지역은 8세기에야 아랍 무슬림 군대가 완전히 점령한다.
다부이 왕조 문서 참고
[2]
라시둔
칼리파(الخلفاء الراشدون / al-Khulafā’u r-Rāshidūn)란 말은
아랍어로 정통 칼리파, 정당한 칼리파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3]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뒤를 이어
칼리파에 오른
하산 이븐 알리까지 포함하면 5명이지만 하산은 1년도 안 돼서
무아위야 1세에게 항복하고
칼리파 자리까지 양도하여 보통 포함하지 않는다.
[4]
이는
수니파의 주장이다.
시아파는 제4대 정통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혈족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을 초대
이맘으로 인정한다.
[5]
다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초기 역사에서의 칼리파 계승 방식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까닭에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참 모순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초기 수니파의 주장에 따르면 '굳이 무함마드의 후손이 아니라도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반 세습제)이지만 정작 후대의 수니파 왕조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습제였고,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이라크처럼 공화정이 도입된 나라가 생긴것은 거의 근현대에 와서의 일이며,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오직 알리와 그 후손만이!'(=세습제)이지만 정작 현재의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헌법에 마흐디가 강림하면 즉시 그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조항이 있다.
[6]
이러한 계승 문제는 참 골치아플 수 밖에 없던 것이 결국 전통과 교리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전통에 따르면 혈연에 물려주어야 하는데 교리에서는 그게 아니니. 심지어 칼리파는 정치 지위인 동시에 종교 지위이기도 했던것도 문제를 키웠을 것이다. 두 자리가 분리되어 있다면 이는 교리상으로 봐도 정치지위는 혈연 종교 지위는 비혈연으로 구분이 되기 때문. 하지만 선지자 무함마드부터가 정치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으며 두 자리를 분리하라고도 하지 않았으니 둘을 나눌 수 없었다.
[7]
이러한 문제는 이슬람 제국의 급팽창에 따른 문화 지체로 볼 수 있다. 원래 아랍인들은 사막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살던 사람이니 그들이 가진 부는 당연히 동로마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할 바가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스만 치세에 전통적으로 부유한 이집트를 점령한데다 사산도 거의 다 무너뜨렸다. 이 때가 무함마드 사후 겨우 10여년 만으로 심지어 도시의 가치를 모르던 초기 몽골 제국과는 달리 이슬람은 도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우마르 때 정복 후 병사들이 게을러진다거나 뚱뚱해진다는 등 세속화 문제는 최고 지배층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랬던 만큼 이슬람 제국은 장기간 통일 제국을 유지할 역량도 동력도 없었다. 결국 제국은 세워진 지 백년도 못 가 분열한다.
[8]
왜냐하면 고대 중동 제국들이 대부분
봉건
기사 비슷한 제도를 전통적으로 유지하고 있어서 대다수의 물자와 자원이 소수의 중무장 귀족 기병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아랍 해안가의 상업 도시들을 주축으로 성장했기에 봉건 귀족의 전통이 없었으며, 대신 도시의 시민들이 군대의 주축이었기에 중무장 기병이 아닌 보병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유사한 부분.
[9]
중갑기병
[10]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주축은 유목민이 아닌 상업 도시의 도시민들이었다.
[11]
1대 아부 바크르, 2대 우마르, 3대 우스만, 4대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