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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령, 영향권 등을 모두 포함한 강역 지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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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년 ~ 1489년 | ||
수도 |
쿠타이시 (1008 ~ 1122) 트빌리시 (1122 ~ 1490) |
|
국교 | 조지아 정교회 | |
인구 | 1254년 기준 240~250만여 명 | |
언어 | 중세 조지아어 | |
민족 | 조지아인, 알란, 압하스인, 쿠만 등 | |
성립 이전 | 압하지야 왕국, 이베리아 왕국 | |
멸망 이후 | 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 이메레티 왕국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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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은 서기 1008년 오늘날의 조지아에 해당하는 중세 유라시아[2] 왕국으로, 다비트 4세 및 타마르 여왕 같은 명군들의 지도 하에 1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침략으로 쇠락하다가 1489년경에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2. 역사
2.1. 건국 이전
건국 무렵인 서기 1000년경의 캅카스 일대
580년 이베리아 왕국이 사산 왕조에 완전 병합된 이래, 조지아는 사산 왕조와 무슬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지아의 기독교도들은 무슬림의 압제에 맞서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도들과 연대했고, 종종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칼리파들은 이런 기독교도들을 달래기 위해 이베리아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도 호족을 총독으로 임명하곤 했다. 그러던 9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가 잦은 내란으로 쇠락해지자 기독교도 호족들이 이 때를 틈타 세력을 불렸다. 그 중 아르샤쿠니 왕조 시절 귀족 가문이었으며 다윗의 후손을 자처한 바그라투니 가문이 두각을 드러내어 나중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건국했다.
한편, 바그라투니 가문의 방계로 알려진 아다르나세 1세는 이베리아 초스로이드 왕조의 통치자 아르칠리로부터 슐라베리(Shulaveri)와 아르타니(Artani)를 받는 대가로 그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초스로이드 왕자 네르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아쇼트 1세와 딸 라타브리아를 낳았다. 라타브리아는 아버지에게 토지를 준 아르칠리 왕의 아들 후안셰르와 결혼했다. 806년 후안셰르가 사망하자, 아다르나세는 딸을 통해 사위가 가지고 있던 재산과 토지를 받아냈다. 그는 훗날 바그라티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807년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은 아쇼트 1세는 아랍인들을 자신의 영지에서 몰아낸 뒤 중앙 이베리아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반격으로 잘 풀리지 않자, 타오-클라제티 일대로 후퇴한 뒤 자신을 이 지역의 공작이라고 선포했다. 813년 갈수록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지아 에미르들을 억제하려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 의해 이베리아의 대공으로 인정된 그는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 바크탕 1세가 지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아르타누지 성을 복원했다. 한편 아랍인의 거듭된 침략과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조지아를 재건하고자 그리골 칸츠텔리 일대에 수도원 공동체 설립을 후원하고 조지아인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는 걸 장려했다. 이후 이베리아의 정치 및 종교 중심지는 중앙 이베리아에서 조지아 남서부 타오-클라제티 지방으로 이전되었다.
그는 아랍인들이 점령한 조지아 영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 콜라, 아르타니, 자바헤티, 삼츠케, 트리에티를 포함한 주변 영토를 확보했다. 810년대 후반에 압하지야의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카케티아 그리골의 에미르와 맞붙어 크사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중부 이베리아에서 카케티아 그리골 세력을 축출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아르메니아 총독 칼리드 벤 야지드가 827/828년경 이베리아로 쳐들어와서 그를 중앙 이베리아에서 축출했다. 그는 니갈리 계곡으로 후퇴한 뒤 전열을 정비했으나, 830년 그곳 교회의 제단에서 배신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그의 유산은 세 아들 바그라트 1세, 아다르나세 2세, 과람에게 분배되었다. 세 사람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랍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한편 정교회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바그라티온 가문 일원들은 타오와 클라제티를 각자 나눴고, 타오 또는 클라제티 공작을 개별적으로 칭했다. 그러던 888년, 바그라투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은 타오 공작 아다르나세에게 이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왕국은 580년 사산 왕조에게 멸망한 이래 300년 만에 부활했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타오와 클라제티의 여러 바그라티온 가문 영주들에게 있었고, 이베리아 왕은 이름뿐이었다. 간혹 구르겐 2세 처럼 조지아의 통일을 꿈꾼 야심가가 등장하긴 했지만, 외세의 간섭과 내부 분열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68년, 타오 제10대 공작에 취임한 다비트 3세가 본격적으로 조지아 통일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타오와 클라제티 공작들에게 작위를 하사하며 많은 간섭을 하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 976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바실리오스 2세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토르니키오스가 이끄는 12,000명의 분견대를 파견해 바르다스 포카스가 이끄는 토벌대에 가담시켰다. 979년 3월 24일, 바르다스 포카스는 판칼리아 전투에서 바르다스 스킬리로스를 격파했고, 스킬리로스는 소수의 추종자만 이끌고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그는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준 공적을 인정받아 상당한 영토를 받았다. 이리하여 유프라테스 강 북서쪽에서 에르주름 지방을 거쳐 남동쪽의 무라드-수 상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978년, 다비트 3세는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독립한 조지아의 또다른 국가인 압하지야 왕국에 자신의 양자인 바그라트 3세를 군주로 앉혔다. 980년, 다비트 3세는 반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마나즈케르트 토후국을 공략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왕 숨바트 2세와 카르스 왕 무첼의 영토 분쟁을 중재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다. 이리하여 그는 클라제티를 제외한 조지아 대부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987년 8월, 바르다스 포카스가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카스에게 2,000명의 기병을 보내주는 한편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테스가 이끄는 바실리오스 2세 지지파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989년 4월 13일 포카스가 다르다넬스의 아비도스 전투에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반란군과 손잡은 것에 분노하여 칼데아의 요안니스 휘하의 강력한 군대를 조지아로 파견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990년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사망 시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줄 것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용서받고 쿠로팔라테스(Kuropalates)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일로 마음이 상했던 그는 양아들 바그라트 3세가 불순종을 일삼는 라티 공작을 징벌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자 자신을 습격하려고 그런다고 여기고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이자 이베리아 국왕의 아들인 구르겐 1세를 기습 공격했다. 구르겐 1세가 한 요새로 도망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바그라트 3세는 홀로 다비트 3세에게 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며, 자신은 복종을 거부한 라티 공국을 징벌하려 했을 뿐이지 그를 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다비트 3세는 오해를 풀고 그를 돌려보냈다. 한편, 그가 마나즈케르트 토후국을 공략하고 아제르바이잔에 습격을 일삼는 것에 분노한 아제르바이잔의 라바디드 통치자 맘란은 주변의 여러 에미르들을 설득하여 그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이에 맞서 아르메니아와 연합했고, 998년 맘란을 상대로 2차례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001년 초 성목요일 때 성찬식에 참석했다가 귀족들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즉사했다.
다비트 3세가 사망한 뒤, 그의 영지는 바그라트 3세에게 양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다비트 3세가 "제가 죽으면 모든 영지를 제국에 헌납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던 걸 상기시키며 다비트 3세의 영지를 제국에 귀속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는 자신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으며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건 억울하다며 거부했고, 이베리아 왕이자 그의 아버지 구르겐 1세 역시 아들을 지지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사무일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던 황제는 조지아인들과 마찰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보고, 바그라트 3세가 다비트 3세의 영지를 그대로 가지는 걸 인정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다비트 3세의 영지 일부는 제국에 귀속되었다.
이때 바그라트 3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쿠로팔레스 칭호를 받았고, 구르겐 1세는 마기스테르의 칭호를 받았다. 쿠로팔레스가 마기스테르보다 더 높은 칭호였는데, 이는 구르겐 1세가 아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려는 황제의 술책이었다. 그러나 구르겐이 아들이 자기보다 높은 직위를 가지는 걸 깨끗하게 인정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1008년 임종을 눈앞에 둔 구르겐 1세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직위와 재산을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바그라트 3세는 이 덕분에 타오 공국과 압하지야 전역을 석권하는 동시에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조지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건국과 시련
1008년 조지아 왕국을 건국한 바그라트 3세는 자신에게 복종하길 거부하는 카케티아 공국으로 쳐들어가 카케티아 공국의 동쪽 영토인 헤레티아를 황폐화시키고 대리인을 앉혔다. 그러나 헤레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리인을 쫓아내고 카케티아와 통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그라트 3세는 재차 원정을 떠나 헤레티아 반란군을 무찌르고 헤레티아의 합병을 완료했으며, 조지아 서부에 해당하는 이메레티 지역 귀족들을 복종시켰다. 뒤이어 카케티아 정복 전쟁을 단행해 1010년 완수하고 조지아 왕국의 영역으로 합병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을 "압하지야인, 란스, 카흐인, 카르트벨인의 왕"이라 칭했다.이제 그의 시선은 클라제티 공국으로 향했다. 1011년, 그는 클라제티 공작 숨바트 3세에게 파나스카르티 성에서 협상하고 싶으니 와달라고 요청했다. 숨바트 3세는 요청에 응해 그곳에 갔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트모그비 성에 갇혔다가 곧 처형되었고, 클라제티 공국은 바그라트 3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리하여 조지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숨바트 3세의 아들 바그라트 3세는 사촌 데메테르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난 뒤 클라제티 공작을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바그라트 3세에 맞섰으나 대세를 뒤집지 못했다.
그는 뒤이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전개했다. 1012년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조지아 동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아제르바이잔의 토후국 파드룬을 공격했다. 그는 란스를 점령하고 조지아의 속주로 삼고, 에미르 체다디드가 피신한 찬코르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요새가 며칠 만에 함락되자 체다디드는 항복했고, 그는 파드룬을 조지아의 가신으로 삼고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풀어줬다. 체다디드는 조지아 왕 뿐만 아니라 바그라트 3세가 아제르바이잔을 합병하지 않고 평화를 맺도록 설득한 귀족들에게도 수많은 선물을 제공해야 했다.
이렇듯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한 그는 조지아 정교회 진흥 정책도 추진했다. 총대주교청을 창설하고 베디아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교회를 세웠다. 특히 수도 쿠타이시에 건설된 바그라티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의 상징으로서 조지아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손꼽힌다. 그렇게 외치와 내치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던 그는 1014년 5월 7일에 타오의 파나스케르티 성에서 사망하고 베디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016년 12월 22일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5월 7일로 확정되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1세는 당시 13살 또는 18살밖에 안 됐고 어머니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가 귀족들의 섭정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섭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노회한 정치술을 발휘해 여러 귀족을 통제할 수 있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과거 바그라트 3세에게 정복당한 뒤 독립할 때를 노리던 조지아 동부의 카케티아 귀족들은 어린 왕이 통치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이 임명한 총독들을 인질로 잡고 카케티아 공국을 부활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의 요청에 응했다. 이리하여 카케티아 공국이 조지아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통치 첫해에 조지아 영토의 3분의 1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아버지가 사용한 호칭 중 란족과 카흐족의 이름을 삭제하고 "압하지야인과 카트벨인의 왕"만 써야 했다.
1020년, 아르메니아 왕 가기크 1세가 사망했다. 장남 숨바트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차남 아쇼트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쇼트는 1021년 아르메니아 북동쪽에 왕국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이에 그가 중재를 맡아 아니 지역을 숨바트 3세가 가지고 아쇼트는 조지아와 아바시드 칼리파테 지역 사이의 땅을 받는 조건으로 양측을 화해시켰다. 그러나 양측은 곧 사소한 일로 재차 갈등을 벌였다. 어느 날, 숨바트 3세가 아니로 가는 길에 쉬기 위해 남동생의 영역에 속한 샤티크에서 쉬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쇼트는 형이 조약을 위반했다며 분노했다. 아쇼트로부터 형을 치는 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때를 틈타 아니로 쳐들어가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숨바트 3세를 그에게 넘겨줬고, 그는 여러 요새와 아니의 주권을 가지는 대가로 숨바트 3세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를 조지아에 사실상 예속시킨 그의 다음 목표는 동로마 제국이었다.
990년, 바실리오스 2세는 반역자 바르다스 포카스를 도왔던 타오 공작 다비트 3세를 굴복시키고 그로부터 "제가 죽으면 모든 영지를 제국에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비트 3세가 죽은 뒤 후계자 바그라트 3세가 다비트 3세의 모든 영지를 상속받으려 했지만, 황제의 압력을 받고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조지아 영토를 제국에 헌납해야 했다. 그는 이 땅을 되찾기로 마음먹고, 1015/1016년 동로마 제국 국경을 넘어 여러 곳을 약탈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바실리오스 2세는 현지 지휘관들에게 조지아의 거듭된 도발에 응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을 지속적으로 침략했고 파티마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하고 불가리아 전역이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제 바실리오스 2세는 병력을 끌어모아 조지아 정벌에 착수했다. 여기에 파티마 칼리프 알 하킴 바르 암르 알라가 사망했고 뒤이어 칼리프에 오른 알리 아즈자히르는 아직 어려서 조지아를 적극적으로 도울 여력이 없었다. 조지아는 이제 파티마 왕조의 도움 없이 제국에 항전해야 했다. 양군은 타오의 바시아니 평원에서 처음 맞붙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올티시 마을에 후퇴했다가 곧 불태운 뒤 계속 이동하다가 시림니 마을 인근에서 후위대가 적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렸다. 1021년 9월 11일 양군이 재차 맞붙었다. 동로마 제국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뒀고, 조지아의 여러 장군이 전사했다. 조지아군은 삼츠헤로 퇴각했지만, 동로마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자바케티 일대를 황폐화하고 아르타니 시를 파괴했다. 적군이 삼츠헤로 접근하자, 그는 트리아트 지역으로 후퇴한 뒤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험준한 산악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적을 조기 섬멸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르타니로 후퇴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그는 적이 쉬고 있는 사이에 동로마 제국군의 만행에 복수하고자 조지아 주변 지역을 여러 차례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트라페준타 근교로 군대를 옮긴 뒤 조지아의 봉신 노릇을 하고 있던 숨바트 3세를 제국에 귀순시키는 등 조지아를 고립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던 1022년 아나톨리아의 스트라테고스 니키포로스 시피아스는 황제가 조지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느라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포카스 바리트라첼로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조지아 왕국과 내통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일을 눈치채고 두 반란 지도자에게 별도로 편지를 보내 양자가 서로를 불신하도록 조장했다. 이 작전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1022년 8월 15일, 시피아스는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암살했고,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지지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시피아스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자신 앞으로 끌려온 시피아스를 삭발시킨 뒤 안티고네 성으로 추방했으며, 공모자 대부분을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모반에 가담하여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된 2명의 왕실 인사 역시 처형했다.
황제는 모반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재차 조지아 원정에 착수했다. 1022년과 1023년 사이의 겨울, 양군은 바시아니 평원에서 재차 맞붙었다. 동로마 제국 소속 그리스군은 조지아군에게 격퇴되었지만, 키예프 루스에서 온 용병대가 조지아군을 몰아붙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조지아의 여러 영주와 장군들이 전사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장남 바그라트 4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3년간 인질 생활을 하게 했다. 또한 조지아는 14개의 요새를 내줘야 했고 다비트 3세가 가지고 있었으나 제국에 귀속된 영역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해야 했다.
1025년 12월 15일,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했다. 뒤이어 황위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8세는 바그라트 4세를 계속 붙잡아두려 했지만, 왕자는 이미 조지아로 돌아갔다. 새 황제는 조지아에 사절을 보내 "약속된 3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왕자가 조지아로 돌아갔는가?"라고 따지고 왕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시 데려가게 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고, 왕국 각지의 장정을 소집해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던 1027년 8월 16일, 그는 트리알레티 지역의 음킨바르니 마을에 들렀다가 돌연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베디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바그라트 4세가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10살 밖에 안 됐기에 어머니 마리암이 트리알레티아 총독 리파리트 4세, 카르틀리 총독 이바네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자를 멋대로 귀국시키고 전쟁을 벌일 태세를 갖추던 조지아를 아니꼽게 여겼다. 마침 조지아의 일부 귀족이 제국에 조지아의 내정에 관여해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이를 명목삼아 조지아와 전쟁을 벌였다. 아르타누지가 동로마군에게 함락되자 몇몇 귀족이 동로마 편으로 넘어갔지만, 대다수는 바그라트 4세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양자 모두 전면전을 벌이기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형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단독 황제가 되었을 때 이미 65세의 고령이어서 군대를 적극적으로 이끄기 곤란한데다 사라센과 페체네그족의 압박에 대비해야 했다. 조지아 역시 어린 왕 등극 후 어수선한 국정을 바로잡는데 몰두해야 했다. 그래서 양자간의 전쟁은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 그쳤다. 그러다 1028년 11월 12일 콘스탄티노스 8세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030/1031년, 마리암 왕태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찾아가 로마노스 3세와 협상한 끝에 아들이 조지아 왕으로 인정받고 바그라티온 가문 인사들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대대로 수여받았던 큐로팔레이트 칭호를 얻어냈다. 1032년, 그는 로마노스 3세의 조카이자 바실 아기로폴리스의 딸인 엘레니 아기로풀리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레니는 이듬해 사망했고, 그는 알라니아의 왕 도르골의 누이인 보레나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아들 게오르기 2세와 두 딸 알라니아의 마리아, 마리암을 낳았다.
1032년, 기오르기 1세의 막내아들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디미트리오스가 왕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러다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어머니 알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자기가 다스리고 있던 아나코피아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했다. 로마노스 3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고위 관직을 주고 바그라트 4세에 대적하게 했다. 그는 아나코피아를 되찾고 싶었지만 제국의 위세가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다. 그 대신, 645년부터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던 이베리아의 고대 수도 트빌리시를 탈환하려 했다. 1032년 가신인 리파리트 4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이 트빌리시를 포위하고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리파리트 4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질 걸 두려워한 그는 철수하게 했다.
1034년, 리파리트 4세는 아랍의 샤다디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의 침략을 아르메니아와 함께 격파했다. 뒤이어 1038년 다시 트빌리시를 포위해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조지아 귀족들이 그의 세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여 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설득했고, 그는 이에 넘어가 리파리트 4세에게 철수를 강요했다. 리파리트 4세는 이에 분노해 그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1039년, 디미트리오스가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강력한 용병대를 이끌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리파리트 4세는 즉각 그와 손을 잡고 그에게 대적했다. 그는 한때 수도 쿠빌리시까지 위험해질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1042년 디미트리오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반란군의 기세가 꺾인 덕분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할 수 있었지만, 리파리트 4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대항했다. 리파리트 4세는 토벌대를 상대로 숱한 승리를 거뒀는데, 특히 사시레티 전투에서 바랑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왕의 군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조지아 동부가 리파리에게 넘어가는 걸 허용해야 했다. 결국 리파리트 4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콘스탄티노스 9세 황제에게 중재를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리파리트 4세가 조지아 왕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되 므트크바리 강 남쪽 일대의 조지아 영토를 관장하게 했다. 이리하여 리파리트 4세는 조지아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로 우뚝섰다.
그러던 1048년 9월, 리파리트 4세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싸우라는 동로마 제국의 지시에 따라 아나톨리아로 진격했다가 카페트루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패하고 생포되어 이스파한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때를 틈타 라파리트 4세가 가지고 있던 조지아 동부 일대를 되찾았다. 그러나 리파리트 4세가 셀주크 술탄이 관대한 조건으로 풀어주는 덕분에 자기 영지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빠르게 역전되었다. 1049년 리파리트 4세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쿠타이시로 쳐들어오자, 그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압하지야로 피신했다. 그러나 리파리트 4세가 압하지야까지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여 3년간 그곳에 지내야 했다. 그 사이, 리파리트 4세는 바그라트 4세의 아들 기오르기 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을 맡았다.
1053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낸 그는 조지아로 돌아와 리파리트 4세와 전쟁을 벌였다. 7년간의 내전 끝에 전세가 바그라트 4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리파리트 4세의 추종자들은 1060년 주군을 체포하여 그에게 바쳤다. 왕은 리파리트 4세를 안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시키고 수도원에 강제로 들어가게 했다. 이로써 가장 까다롭던 귀족 리파리트 4세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그는 자신에게 반항적이던 귀족들을 잇따라 숙청해 왕권에 다시는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
1068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후 조지아를 침공해 요새화된 도시인 아할칼라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그가 군대를 이끌고 맞섰지만 패배했고, 셀주크 투르크에게 공물을 바치고 술탄을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조건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는 셀주크 제국의 위협에 맞서 긴밀한 협력을 모색했다. 그의 장녀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1065년 콘스탄티노스 10세 황제의 아들 미하일 왕자와 결혼와 결혼했고, 차녀 마리암은 동로마 제국의 고위 인사인 테오도로스 가브라스와 결혼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조지아를 떠나기 전에 트빌리시와 루스타비 요새를 조지아의 오랜 적수인 아란의 샤다디드 왕조에게 넘겼다. 알프 아르슬란이 떠난 뒤, 그는 두 요새를 되찾고자 사다디드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사다디드 왕조의 군주 파즈룬 2세 이븐 사브루가 3만 3천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지만, 그는 이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뒤이어 아니 시를 탈환하고 카르틀리에서 사다디드의 세력을 몰아냈다. 파즈룬 2세는 카헤티로 도주했다가 지역 통치자 아그사르탄 1세에게 체포되어 그에게 넘겨졌다. 그는 이오리 강 유역의 여러 요새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그를 풀어줬다. 뒤이어 트빌리시 요새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곳의 에미르로부터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었다.
1072년 11월 24일 바그라트 4세가 사망하고 아들 기오르기 2세가 뒤를 이어 조지아 왕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초기부터 암울했다. 1073년 니니아 크불리스제, 이바네 리파리티스제, 그리고 스바네티의 바르단 등 여러 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가 타협안을 마련했다. 귀족들은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그는 영지를 추가로 수여했다. 1073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조지아로 쳐들어와 카르틀리를 초토화시켰다. 알프 아르슬란은 카르틀리에 총독을 임명하고 돌아갔다. 이에 그는 반격을 개시해 총독을 무찌르고 카르틀리를 겨우 탈환했다. 또한 다비트 3세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양도한 이래 조지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분쟁의 근원이 됐던 타오 상류 일대를 동로마 총독 그리고리오스 파쿠리아노스로부터 공식적으로 돌려받았다. 이는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의 지속적인 공세에 직면한 제국이 조지아의 도움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제국은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하며 제국의 동쪽 국경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1076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가 조지아를 침공하여 여러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이후 1079년부터 대대적인 침공이 가해지면서 조지아 전역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다. 결국 그는 막대한 공물을 말리크샤에게 바치고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이후 조지아 동부의 카케티아 왕국을 복속시키기 위한 원정에 착수할 때 셀주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카케티아 요새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철수해야 했고, 그를 도우러 왔던 투르크 전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지아 각지를 약탈했다. 카케티아 왕 아그사르탄 1세는 말리크샤 1세를 찾아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겠으니 조지아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1088년, 대규모 지진이 조지아를 강타하면서 막대한 희생자와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가뜩이나 투르크인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파탄 지경에 놓여 있던 민심이 이로 인해 폭발 직전까지 이르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089년 아들 다비트 4세를 왕으로 세우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2.3. 황금시대
2.3.1. 다비트 4세
실패와 굴욕으로 점철된 치세를 보낸 끝에 불명예스럽게 퇴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지아 5대 군주로 등극한 다비트 4세는 파탄 지경에 몰린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먼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여받은 노빌리시모스, 쿠로팔라테스 등 작위를 거부해, 동로마 제국을 더 이상 조지아의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후 투르크인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해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재편성했다. 소수의 귀족과 왕족이 지휘하고 농민이 주축이 된 몇 개의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고, 이들을 주축삼아 투르크 유목민들이 세운 천막들을 기습 공격하게 했다. 농민들은 가족과 땅을 유린한 투르크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들었다.기습 작전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수십 개의 분견대가 잇따라 창설되어 그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투르크 전사들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유목민들은 산악 지대나 숲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을 해오는 적에 애를 먹었고, 피해는 갈수록 불어났다. 결국 견디다 못한 투르크인들은 조지아인과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투르크인들은 조지아를 더 이상 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에 정해진 공물을 정직하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이후에도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투르크인들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수많은 투르크인들이 조지아에서 쫓겨났고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의 터전에 복귀했다.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마을을 재건하고 농업 진흥 정책을 실시해 파탄 지경에 처했던 경제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그는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여 여러 귀족을 복속했다. 하지만 몇몇 귀족은 여전히 그에게 반란을 꾀했다. 1093년 오르벨리아니 공작 리파리트가 "다비트 왕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라는 루머를 퍼트리고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리파리트를 감옥에 가두었다. 2년 후, 리파리트는 충성 서약을 한 뒤 풀려나 트리알레티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파리트는 야심을 거두지 않고 재차 음모를 꾸몄다. 그는 첩보를 통해 이 사실을 간파하고 1098년 재차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했다. 리파리트의 아들 라트 4세가 1101년 사망하자, 그는 즉각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직할지로 삼았다. 자간 아불레티스제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도 반란을 꾸몄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사형이나 추방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영지는 왕실 소유로 귀속되었다.
그가 귀족들의 음모를 조기에 적발할 수 있었던 건 비밀 경찰 므스토바르니(mstovarni)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으로, 왕의 총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들은 대귀족들의 동태를 철저히 살펴 음모를 밝혀냈다. 또한 전임자들이 선택한 고관들을 해임하고 하급 귀족들을 중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중용해준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 결과 한때 조지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바그바시 가문 등 여러 가문이 몰락했고, 귀족들은 왕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렇듯 왕권을 강화하고 있을 무렵, 국제 정세는 조지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한때 중동 전역에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셀주크 제국은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한 뒤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여기에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벌어지면서 아랍권의 시선은 십자군 쪽으로 쏠렸다. 그는 이 때를 틈타 1099년 셀주크 제국에 공물을 더 이상 바치지 않고, 그 돈으로 군대와 기반 시설에 대거 쏟아부어 국가의 역량을 강화했다. 1103년, 그는 마침내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셀주크 제국에 빌붙었던 카케티아 군주 크비리케 4세가 사망했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그사르탄 2세는 너무 어려서 귀족들에게 정권을 위임해야 했다. 또한 백성들은 정교회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왕실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카케티아로 쳐들어가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카케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몇몇 카케티아 귀족들은 간자의 무슬림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자의 술탄은 1105년 조지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양군은 에르츠키에서 카케티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다비트 왕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 말이 자꾸 죽어 3번이나 말을 갈아타야 했지만, 네번째 말에 올라탄 뒤 적군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가서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간자는 이후로는 조지아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했다.
1110년, 샴쉬빌데 역시 조지아군에게 함락되었으며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온 무슬림군 역시 섬멸되었다. 1115년, 조지아군은 여세를 몰아 루스타비를 공략해 트빌리시를 무슬림 세계로부터 고립시켰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조지아에 위협을 느낀 인근의 토후국들이 셀주크 제국과 연합하여 트빌리시 구원 작전에 착수했으나,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다비트 4세에게 완패했다. 1122년 트빌리시가 항복했다. 그는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그곳을 조지아의 수도로 선포했다. 1123년에는 시르반 토후국의 절반 영토를 점령했고, 1124년에는 카스피해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 데르벤트를 공략하고 헤레티아 역시 복속시켰다. 얼마 후, 아르메니아 왕국 바그라투니 왕조의 옛 수도였지만 지금은 투르크족의 통치를 받고 있던 아니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응해 6만 대군을 이끌고 아니로 진군했고, 짧은 포위 끝에 아니를 탈환하고 자신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캅카스의 무슬림 권력은 파괴되었고, 조지아의 영토는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캅카스 전체를 뒤덮었다.
이러한 군사적 위업을 달성한 뒤, 그는 체제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조지아 교회는 귀족들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었다. 귀족들은 나이가 어리고 자격이 없는 아들들을 교회 서열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앉혔다.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귀족 출신 사제들은 교회에서 불법으로 정한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 반감을 품은 수도자들을 불러모아 루이부르니시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에 참석한 수도자들은 귀족이 교회의 인사에 간섭하는 걸 철저하게 배격하고 일탈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교직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그는 고문인 기오르기 츠콘디디를 조지아 대주교로 선임해 공의회 결의에 따라 교회 개혁을 단행하게 했으며, 교회 조직이 국가에 종속되도록 했다. 한편 겔라티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의 추앙을 받을 만큼 신실한 수도자들을 그곳에 배속시켰다. 겔라티 수도원은 왕들의 안식처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집필함으로써 조지아에 학풍이 일어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총대주교와 대수도원의 유력 인사들이 참여하는 다르바지(darbazi)를 구성했다. "억압받고 굴욕받은 자들을 변호"하는 취지로 설립된 이 기관은 한번 판결을 받은 자들의 항소를 심의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종의 대법원 역할을 수행했다. 왕은 이 기관의 수장을 맡아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한편, 그는 훗날 무슬림들이 조지아로 대거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군사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우선 충직하고 용력이 뛰어난 전사들을 모아 왕의 근위대인 모나스파(mona-spa)를 창설했다. 또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담당하는 수비대를 대폭 강화하고 조직화하여 중앙의 통제에 따르도록 했으며, 왕실 직속의 기동대를 별도로 갖췄다. 외적이 쳐들어올 때 수비대가 최대한 버티고, 기동대가 그쪽으로 출격해 요격하는 방식의 체계를 갖춘 것이다. 조지아군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여름에는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겨울에는 군사 작전을 꺼리는 걸 역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외교 정책에도 신경썼다. 처음엔 아르메니아 토후국의 공주 루수단과 결혼했다가 1107/1108년에 이혼하고 캅카스 산맥 북쪽의 강력한 부족인 오트로크 족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재혼했다. 오트로크 족은 우수한 전사들을 보내줘서 조지아군이 승승장구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이외에도 북캅카스 일대에 조지아 교회 건설을 후원했고, 현지 주민들과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장려했으며, 트란스캅카스에서 대 캅카스 산맥을 거쳐 키스캅카스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통제해 북캅카스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동로마 제국에 자신의 딸 카타를 시집보내, 무슬림 세력에 대항하는 양자의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
그는 말년에도 군사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1125년 1월, 이브라힘 이븐 솔리만과 이븐 수크만이 이끄는 무슬림군의 조지아 침공에 맞섰다. 5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조지아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다가오는 봄에 무슬림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격무에 시달리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날로 악화되던 건강은 이 시기에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36년간 조지아를 강대한 국가로 육성시킨 군주는 1125년 1월 24일 트빌리시 왕궁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세웠던 겔라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3.2. 데메트리우스 1세
조지아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다비트 4세 사후 장남 데메트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다비트 4세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웃 무슬림 통치자들은 다비트 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지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다비트 4세가 생전에 조지아군을 강력하게 구축한 데다 디미트리오스 1세 역시 역시 뛰어난 지휘관이었기에 모조리 격퇴되었다. 1129년 또는 1130년, 그는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시리반 토후국을 제압한 뒤 누이 루수단의 남편 미누히르 3세를 그곳의 지배자로 앉혔다. 이후 시르반은 조지아의 왕의 요구할 때마다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1130년, 알라트의 술탄 샤 아문 쇼크멘 2세는 아니를 조지아로부터 빼앗기 위해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섰지만 다른 전선에서도 적이 준동하자 아버지 대부터 조지아와 협력한 이븐 마흐무드에게 아니를 양보해야 했다.1139년, 그는 간자 토후국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간자 시의 도시 성문을 조지아로 가져왔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저항이 극심해서 도시와 주변 땅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 없었다. 간자는 이후에도 투르크 침략자들이 조지아로 쳐들어갈 때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다. 이무렵 이복형제 바크탕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음모자들을 체포해 모조리 처형하고 바크탕을 실명시킨 뒤 감옥에 보내 곧 죽게 했다.
1154년, 아니의 에미르 파크르 알딘 샤다드는 주군 살투크에게 딸을 아내로 삼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살투크 2세가 아니로 이동하던 중 미리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의 습격으로 사로잡혔다. 살투크의 아들들이 10만 디나르를 제공하며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살투크가 조지아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풀어줬다.
그런데 조지아에 돌아온 그는 장남 다비트 5세에게 폐위당하고 가레자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다비트 5세는 6개월만에 사망했고, 그는 1155년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후 또다른 아들 기오르기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뒤 가레하 수도원에 다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찬송가를 집필하다가 1156년 사망했다. 사후 젤라티 수도원에 묻혔고, 조지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5월 23일이다.
2.3.3. 기오르기 3세
1156년 조지아 왕국 9대 군주로 즉위한 기오르기 3세는 아버지 대에 조지아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침공했던 샤-아르멘을 선제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1161년 바그라투니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비트 4세 시절 조지아에 복속되었다가 디미트리오스 1세 대에 다시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아니와 드빈을 탈환하고 이바네 오르벨리 장군을 아니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에 여러 토후국 에미르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니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격파당했다. 이후 연합군에 가담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에르제룸의 알 말리크를 응징하고자 원정에 착수해 승리를 거두로 사로잡은 후 큰 몸값을 받고 석방했다. 뒤이어 1162년 8월 아르샤쿠니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드빈을 공략하고 드빈의 귀족 아나니야를 그곳의 통치자로 삼았다.1163년 초, 아란과 아자르바이잔의 통치자 일디귀즈가 이끄는 무슬림 연합군이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조지아군은 이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고, 무슬림군은 간자 요새를 공략하고 게가르쿠니크 일대를 황페화시킨 뒤 아니로 이동했다. 하지만 1166년 초 그가 반격을 가해 간자를 탈환하고 무슬림을 상대로 막대한 제물을 확보한 뒤 귀환했다. 1167년, 그는 하자르족과 킵차크의 침입을 받은 시르반을 도와주고 그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후 엘디구즈가 휴전을 제안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니를 샤다드 가문에 돌려줬다. 그러나 그는 1174년 다시 아니를 점령하고 이븐 마흐무드를 포로로 잡고 이바네 오르벨리를 그곳의 총독으로 삼았다.
1177년, 그에 대항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다비트 5세의 아들 뎀나는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조지아 동부와 남부의 대다수 영주들이 왕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여기고 그에 가담했다. 심지어 그동안 그의 지시를 충직하게 따랐던 이바네 오르벨리 마저 반란군의 편에 들어갔다. 그들은 트빌리시 밖에 나가 있는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는 트빌리시로 귀환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다. 반란군은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그가 민중의 호응을 얻고 공세를 개시해 반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뎀나와 이바네 오르벨리는 아르메니아의 로르헤 요새에 갇혔다. 왕실 군대는 반란군 영주들의 영지를 점령하고 로르헤를 포위했다. 결국 뎀나와 오르벨리는 항복했고, 그는 뎀나를 실명형과 거세형에 처한 뒤 감옥에 집어넣고 오르벨리 가문을 멸족시킨 뒤 그들의 토지와 부를 몰수했다. 뎀나는 감옥에 수감된 후 형벌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곧 죽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그는 자신에게 헌신한 이들을 고위직에 임명했다.
그는 북캅카스의 알란 부족 지도자 쿠르단의 딸 부르두한과 결혼하여 딸 타마르와 루수단을 낳았다. 아들이 태어날 가망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장녀 타마르를 왕위에 올리기로 했다. 1178년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선정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같은 해에 그와 타마르의 주도로 회의를 소집해 강도와 도적을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마련하고 도둑을 잡는 치안관들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 법은 13세기까지 유효했지만 강도는 오랫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교회의 압력에 따라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1184년 3월 2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한 뒤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3.4. 타마르
1184년 조지아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타마르는 처음부터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여왕의 성별에 문제를 제기했고, 그녀를 약한 상대로 여기고 자기들 입맛대로 부리려 했다. 조지아 왕국 6, 8대 군주 디미트리오스 1세의 장녀이자 그녀의 숙모이며 셀주크 제국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미망인이었던 루수단은 아직 10대 소녀였던 그녀의 집권이 정당하다며 귀족들을 설득했고, 그래도 반대하는 이들을 궁정에서 축출했다. 조지아 총대주교 미하일 7세 미리안니스제 역시 그녀를 지지해 백성들이 여왕의 집권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귀족들에게 큰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가 임명한 차차크 족 출신의 아미르스파살라리(당시 군사령관)을 포함한 외국인과 전직 농노 출신 인사들을 파면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귀족들은 이에 기고만장해 급기야 자신들이 장관을 임명하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이것마저 받아들이면 자신은 꼭두각시 신세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의 대표 쿠틀루 아르슬란을 긴급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아르슬란을 사면할 테니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권유해 겨우 진정시켰다. 한편, 자신의 집권을 옹호했던 미하일 2세 미리안니스제 총대주교의 권세가 왕권을 저해할 정도로 커켰다. 그녀는 이를 제어하기 위해 1185년 교회 인사와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소집해 미하일 2세를 파면하려 했지만, 평의회는 미하일 2세를 옹호하기로 결정하고 오히려 미하일에게 적대적이었던 주교들을 파면했다.
이렇듯 왕권 행사에 제약을 받기 일쑤였던 그녀는 급기야 결혼까지 간섭받았다. 귀족들은 류리크 왕조 출신의 유리 보골류프스키를 결혼 상대로 제안했다. 그녀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않자, 귀족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궁궐 앞까지 행진해 압력을 가했다. 결국 숙모 루수단의 권유를 받아들여 1185년 유리와 결혼했다. 유리는 노련한 군인이었지만 방탕했으며, 그녀를 우습게 여기고 조지아 왕권을 자기가 행사하려 들었다. 심지어 여왕을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학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신물이 났고, 왕권 행사에 제약을 가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총대주교이자 최고 대신이었던 미하일 2세 미리안니스제가 사망했다. 그녀는 최고 대신의 자리에 자신의 지지자인 안톤 그놀리스타비제를 임명했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하급 귀족들을 궁정 고위직으로 끌여들였는데, 특히 쿠르드족 출신 인사들을 대거 발탁했다.
1187년, 그녀는 귀족 평의회를 소집해 남편이 매일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동성애를 즐기며 성적 고문을 일삼으니 이혼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평의회는 이혼을 허가했고, 유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유리는 이에 원한을 품고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꾀했다. 1191년, 유리는 바르단 다디아니, 구잔 아불라니스제, 봇소 자켈리 등과 동맹을 맺고 조지아 남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녀는 감레켈 토렐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반란군은 트모그비와 에루셰티 전투에서 완패했다. 유리는 항복한 뒤 여왕에게 용서받았지만, 1193년 다시 반란을 일으켜 카케티 지방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캄베차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로잡힌 뒤 트빌리시의 루르지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남편을 축출하고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던 귀족들을 숙청한 뒤, 두번째 남편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했다. 1191년, 그녀는 알라니아의 왕자 다비트 소슬란을 남편으로 삼았다. 소슬란은 알라니아의 왕자 아다론과 다비트 4세의 딸 루수단의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유리가 이끄는 반란군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그는 명목상 아내와 왕좌를 공유했지만 실제로는 충실한 신하로 행동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mep'et'mep'e( 왕중왕)"이라 칭하며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표명했다.
이렇게 왕권을 다진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통치에 정열을 쏟아부었다. 1195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은 엘테네즈 토후국의 에미르 아부 바카르를 샴키르 전투에서 격파하고 샴키르 시를 함락했다. 1199년, 쿠르드족 출신의 형제 자카레와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는 샤다드 왕조로부터 아니 시를 탈환하고 그녀로부터 아니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이후 두 형제는 아니를 기반삼아 주변의 무슬림 토후국들을 잇따라 공략해 중앙 아르메니아 일대를 석권했다. 1201년 비진 시를 공략했고, 1203년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드빈을 공략했다.
룸 술탄국의 통치자 술레이만샤 2세는 조지아의 이같은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에미르들을 소집해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는 타마르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단순한 여왕"이라 부르면서, 그녀가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아내로 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여노예로 삼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타마르는 군대를 소집한 뒤 교회 발코니에서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가족과 교회를 수호하라고 연설했다. 1203년 또는 1204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은 슐레이만샤 2세를 상대로 바시아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206년 음하르그르젤리 형제는 그녀를 대신하여 카르스와 에르주름을 공략했지만 알하라트 공성전에선 실패를 맛보았다.
1207년 다비트 소슬란이 병사한 후에도 조지아의 확장은 지속되었다. 1209년 부활절에 아제르바이잔의 술탄 아르다빌이 아니를 습격하여 기도 중이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그녀는 음하르그르젤리 형제에게 아제르바이잔 응징을 명령했다. 형제는 아드발리 시를 파괴한 뒤 나흐치반과 줄파에서 마란드, 타브리즈 및 카즈빈으로 진군하면서 도중에 마주친 여러 정착지를 약탈했다. 이 원정으로 아제르바이잔은 큰 타격을 입었고, 타브리즈와 카즈빈의 도시들은 잇따라 그녀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녀는 원정에서 약탈한 재화를 활용해 아니를 재건하게 했다.
조지아가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1204년, 흑해 연안에 트라페준타 제국이 수립되었다. 그 나라를 세운 이는 그녀의 조카인 알렉시오스였다. 그녀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자리를 잡도록 상당한 지원을 해주는 한편,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이 패배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를 중동 기독교인의 수호자로 인식하도록 유도했다. 조지아 선교사들은 북 코카서스에서 활동했으며, 지중해 유역 전역에 수도원 공동체가 그녀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중세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불가리아, 키프로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그녀의 지원 덕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녀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의 전기를 기술한 바하딘 이븐 샤다드에 따르면, 살라흐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그녀가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에 있는 조지아 수도원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살라흐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같은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아크레의 주교 자크 드 비트리는 조지아인들이 다른 기독교도들과는 달리 국기를 당당히 보여주고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븐 샤다드는 타마라가 십자가의 유물을 얻기 위해 동로마 황제보다 더 많은 돈을 살라흐에게 제시했다고 기술했다.
그녀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조지아의 국력과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북쪽의 대코카서스 산맥에서 남쪽의 에르주룸, 북서쪽의 지시에서 남동쪽에 간자까지 이르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북부 및 중부 일대가 그녀의 통치에 순종했으며, 시리반 토후국은 종속국을 자처했다. 여기에 서쪽의 트라페준타 제국은 충실한 동맹국이었으며, 흑해와 카스피해, 데르벤트, 카스파리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212년에 조지아 북동부 프호비와 디도 고지대에서 독립을 꾀한 부족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3개월만에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에게 진압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기독교와 세속주의, 동로마 제국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조지아 문화가 번영했다. 조지아 정교회의 건축 양식이 재설계되어 일련의 대규모 돔형 대성당이 세워졌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지아 통치자의 교회 초상화는 동로마 예술을 모델로 삼았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페르시아식 문화도 가미되었다. 또한 중동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무역 거래를 꾸준히 이어갓다. 이는 조지아어와 아랍어로 쓰여진 당시의 조지아 주화에 반영되었다. 1200년경 그녀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의 한쪽에는 현지 버전의 동방 정교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녀를 "예수의 보호자"로 묘사하는 아랍어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한 기독교식 도덕과 가부장적 문화가 담긴 조지아 연대기는 계속해서 번성했고, 기사문학이 서방에서 전해지면서 기사도의 이상을 추앙하는 문학작품이 숱하게 등장했다.
그녀는 치세 말기에 아들 기오르기 4세를 공동 통치자로 앉히고 함께 통치하다가 1213년 1월 13일 수도 트빌리시 인근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에는 몰랐을 테지만, 그녀의 사망은 조지아 황금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2.4. 몽골의 침략과 왕국의 분열
타마르 사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4세는 조공을 바치길 거부하는 간자의 에미르를 토벌하고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는 등 황금시대를 이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1223년 1월 몽골 제국의 전위부대가 쳐들어오자 사기미 전투에서 맞섰으나 뜻밖의 참패를 당하고, 그는 중상을 입은 뒤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평민 출신의 여인으로부터 아들 다비트 7세를 낳았지만, 귀족들과 교회가 평민을 왕비로 들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그녀를 왕비로 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비트 7세는 사생아로 낙인찍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기오르기 4세의 누이 루수단이 여왕으로 등극했다.루수단이 집권할 무렵, 조지아의 상황은 다비트 4세가 개창한 뒤 타마르 여왕까지 이어지던 황금 시대에 비해 상당히 악화되었다. 관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물가는 급등하여 서민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특히 교회 주교들이 행상인 노릇을 할 정도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아니의 정교회 주교들은 예배를 주최하는 대가로 신자들에게 100트빌리시 드람(조지아 화폐 단위)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신자들이 돈을 내길 거부하거나 지불한 액수가 적다 싶으면 예배를 집행하지 않았다. 민중은 이에 신물이 나서 교회에 가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조지아 총대주교는 아니 성직자들과 아르메니아 신자들간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총대주교는 아니 교회를 엄중히 질책하고 주교들의 봉급을 3분의 1로 삭감했다. 그러나 주교들은 여전히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루수단은 갈수록 나빠지는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223년 룸 술탄국 에르주룸의 독립 통치자 투그릴 샤의 아들 기아스 앗 딘과 결혼했다.[3] 조지아 문헌에 따르면, 기아스 앗 딘은 루수단과 결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녀가 보낸 의복을 입고 십자가가 있는 깃발을 들어올렸다고 한다.
1225년, 호라즘 왕조 최후의 군주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군을 피해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했다.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고 호라즘 왕조의 잔여 병력을 규합한 그는 그녀에게 위협적인 편지를 보내 복종을 요구했다. 조지아 측이 단호히 거부하자, 그는 곧바로 출격하여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드빈을 공격했다. 조지아군이 급히 출동하여 가르니스 고지에 자리잡자, 그는 그곳 평원에 진을 친 뒤 적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조지아 사령관 이바네 아크할치헬리는 전사했고 형제 사리바는 생포되었다. 그 후 잘랄 웃 딘은 드빈을 철저하게 약탈한 뒤 반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던 아제르바이잔으로 귀환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1226년 3월, 잘랄 웃 딘은 조지아 동부 지역인 트빌리시를 공략해 철저하게 약탈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녀는 서부 조지아로 도망쳐 쿠타이시에서 할거했지만, 남편 기아스 앗 딘은 잘랄 웃 딘에게 귀순하고 이슬람교를 다시 받아들였다. 루수단이 아직 트빌리시에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시니 요새를 넘겨주고 공물을 바칠 테니 더 이상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이란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나자, 잘랄 웃 딘은 조지아를 떠나 이란으로 이동했다.
1226년 9월 잘랄 웃 딘은 반란을 진압한 후 조지아로 돌아와 전쟁을 재개했지만 카리와 아니스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이 흐라트로 이동하고 트빌리시에 소규모 병력만 배치하자, 조지아군이 즉시 반격에 착수하여 트빌리시를 탈환했다. 그러나 1227년 잘랄 웃 딘이 트빌리시로 돌아오자, 조지아인들은 트빌리시 전역을 불태우고 다시 후퇴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의 과도한 공물 요구에 지친 우미, 샤하르멘 및 샴의 에미르들은 조지아와 연합하여 잘랄 웃 딘을 물리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잘랄 웃 딘은 1228년 조지아를 침공하여 볼니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격파하고 1229년 흐라트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1230년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피해 쿠르드족의 영역으로 후퇴했다가 바시안 산에서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다.
1230년 쿠타이시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루수단은 수도 트빌리시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골군이 조지아로 쳐들어왔다. 잘랄 웃 딘의 연이은 공세로 파탄 지경에 처해있던 조지아군은 몽골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235년 몽골군은 간자를 점령하고 잔혹하게 학살한 뒤 샴코르로 진군해 역시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루수단은 다시 쿠타이시로 달아나면서 트빌리시를 불태우게 했다. 몽골군은 로르, 아니, 뒤마니스, 삼슈빌데를 점령한 후 조지아 영내로 깊숙히 쳐들어가 각지의 요새를 파괴했다. 그 결과 동부 조지아 일대가 몽골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다만 몽골군은 서부 조지아 일대를 공격하려고 리크 산맥을 넘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1239년,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을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몽골 제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1242년, 그녀는 신하 아센을 바투 칸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조지아 동부만 주둔하고 조지아 서부는 그녀가 통치하도록 내버려뒀다. 그 대신, 그녀는 매년 50,000골드의 공물을 바치고 조지아군을 몽골의 보조병으로 보내야 했다.
한편, 그녀는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7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해 사위인 술탄 카이쿠스로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 다비트 나린을 몽골 궁정으로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게 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던 1245년 사망했고, 귀족들은 2년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다비트 나린이 사망했다고 여기고 1247년 다비트 7세를 조지아로 불러들인 뒤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있었던 다비트 나린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었다. 나린의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조지아 왕실법에 따라 왕권은 나린에게 속하며 사생아인 다비트 7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비트 7세의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기오르기 4세는 다비트 7세를 왕으로 세울 의사가 있었다며 선왕의 유지를 받든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양측 모두 몽골에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몽골의 계승법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귀위크 칸은 이에 의거해 두 사람이 조지아를 동시에 다스리되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다비트 나린과 다비트 7세는 1247년부터 1259년까지 조지아를 함께 통치했다. 그러나 다비트 나린은 1259년 과중한 공물 납부와 몽골의 지나친 간섭으로 민생이 파탄나고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꼴을 보다못해 몽골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은 아르군노인에게 대군을 맡겨 그를 토벌하게 했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부 조지아로 후퇴해 쿠타이시를 요새화했다. 아르군노인은 동부 조지아를 장악한 뒤 서부 일대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에 버티고 있는 그를 상대로 고전했다.
1261년 조지아 동부를 다스리던 다비트 7세가 맘루크 왕조를 정벌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라는 훌라구 칸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몽골군의 침략을 받자 그에게 망명했다. 1262년 다비트 7세가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조지아 동부로 돌아갔지만, 그는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고 서부 조지아에서 국가를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몽골의 지배에 순응하는 다비트 7세가 다스리는 동부 조지아 왕국과 몽골의 지배에 끝까지 맞서는 다비트 나린이 다스리는 서부 조지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다비트 나린은 일 칸국의 위협에 맞서 경쟁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264/1265년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킵차크 칸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 칸국 내부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1269년, 그는 바라카 칸과 함께 아바카 칸에 대항했던 테구데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테구데르의 군대가 조지아의 주권을 위협하자, 그는 아바카 칸의 장군 시라문 노얀의 편을 들어 데구데르를 격퇴했다. 그러나 아바카 칸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도와줬던 걸 용서하지 않고 1270년대에 그를 징벌하고자 원정군을 두 번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몽골군에 상당한 피해를 안겼고, 결국 몽골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282년 4월,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있는 틈을 타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 2세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조지아로 축출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조지아의 속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다비트 7세는 1270년에 사망했고 아들 디미트리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 칸들에게 충성을 다했고, 일 칸국의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공을 수차례 세웠다. 그러던 1288년, 아르군 칸의 명령에 따라 카스피해 연안의 다르반트에서 봉기한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 칸국의 권신 부그하가 반역을 꾀했다가 발각당해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부그하의 아들은 그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르군 칸은 그도 역모에 가담했을 거라 의심하고 소환 명령을 내렸다. 조지아 총대주교와 조언자들이 소환에 응하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소환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르군 칸 앞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었고, 1289년 3월 12일 모바칸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조지아로 이송된 뒤 므츠헤타에 묻혔다.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성인으로 시성했다.
아르군 칸은 디미트리오스 2세를 참수한 뒤 다비트 나린의 동의를 얻어 나린의 차남 바크탕 2세를 동부 조지아의 왕으로 세웠다. 바크탕 2세는 재위 3년만인 1292년에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 2세의 아들 다비트 8세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칸의 신임을 얻고자 수도 트빌리시보다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1297년, 바이두 칸과 가잔 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바이두 칸을 지지했지만 가잔 칸이 바이두 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가잔 칸이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그는 아버지가 소환에 응했다가 어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가잔 칸은 진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동부 조지아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오셰테스는 시다 카르틀리 지방을 공격하여 랴흐비 강 계곡 일대를 정복했다. 그는 미틸레티 산맥에 숨은 뒤 자신을 추격하는 몽골군을 상대로 치카레에서 유격전을 전개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299년, 가잔 칸은 그를 조지아 왕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의 동생 기오르기 5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일 칸은 여러 원정을 치르면서 조지아군을 이끌 수 있는 성인 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302년에 다비트 8세의 동생 바크탕 3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그는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계속 항전했다. 1299년과 1301년, 쿠틀루샤가 이끄는 몽골군이 그를 토벌하려 했으나, 그는 산악 부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일 칸국은 협상을 제의하며 가잔 칸의 진영을 방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1304년 트빌리시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바크탕 3세에게 격퇴되어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동부 조지아 대부분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일 칸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308년 바크탕 3세가 죽자 그를 조지아 왕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자신의 아들 기오르기 6세를 몽골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한편, 그는 일 칸국의 경쟁 국가인 맘루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1305년 동로마 제국의 중재에 힘입어 예루살렘 십자가 수도원을 조지아 정교회로 복귀시켰다. 1311년 다비트 8세가 사망한 뒤 기오르기 6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렸기에 다비트 8세의 이복 동생이자 그의 삼촌인 기오르기 5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313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사망했는데, 정황상 기오르기 5세가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2.5. 왕국의 통합. 그러나 또다시 시련이 닥치다
1313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5세는 예전에 폐위되었던 경험이 있던 만큼 일 칸국과 가급적 화목하게 지내고자 노력했다. 1316년 울제이투 칸이 죽고 아부 사이드 칸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신을 칸에게 소개하기 위해 타브리즈를 방문하여 칸에게 충성을 맹세해 신임을 얻어냈다. 이후 몽골군과의 합동 작전에 참가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 결과 1316년 올제이투 칸 사망 후 일 칸국의 권신이 된 초반 노인으로부터 조공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이후 오랜 세월 조지아 각지를 습격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던 오세티아인을 공격해 3년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의 본거지인 고리를 함락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원정을 벌여 오세티아인들을 시다 카르틀리에서 모조리 몰아내고 코카서스 산맥 북쪽으로 이어지는 모든 산길을 통제했다. 한편, 그는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그동안 일 칸국은 조지아가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왕에게 불순종하는 귀족과 왕족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 칸국의 권신 초반 노인의 호의를 얻어냈기에 그들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귀족들, 특히 카헤티의 권세가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에 반발한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단시일에 토벌되었고, 이후로는 동부 조지아 어디에도 그에게 맞서려 들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반을 확고히 다진 그는 조지아 통합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70여 년전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이메레티 등 서부 조지아 산악 지대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 일 칸국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다비트 나린의 후예들은 이 시기에 내전과 귀족들의 불순종으로 지리멸렬해졌다. 특히 1329년 왕위에 오른 바그라트 1세는 너무 어려서 이 상황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고, 1330년 군대를 이끌고 서부 조지아로 진군했다.
지속적인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지친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서부 조지아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다디아니, 구리엘, 압하지야 및 스반 귀족들은 그를 찾아가 큰 선물을 바치고 복종을 표명한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바그라트 1세를 해치는 대신 쇼라피니로 보냈다. 바그라트 1세는 그곳에서 공작 노릇을 하다가 1372년에 자연사했다. 그는 뒤이어 오디샤, 압하지야, 구리아로 순행해 그곳 주민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1334년 그동안 조지아와 동떨어져 지내던 삼츠헤의 영주이며 자신의 삼촌인 사르기스가 사망하자, 그는 삼츠헤로 행차하여 사르기스의 아들인 쿠바레쿠바르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삼츠헤 역시 조지아에 편입되었다.
한편, 일 칸국의 혼란상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1327년, 아부 사이드 칸이 초반 노인과 두 아들을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아부 사이드 칸은 왕권 강화를 꾀했으나 1335년 사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아르파 케운 칸은 1336년 내전에서 패해 사망했다. 이후 일 칸국 각지의 군벌들이 7명의 황금씨족 출신 칸을 옹립하면서, 일 칸국은 사분오열되었다. 그는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몽골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모든 몽골군을 조지아에서 추방했다. 일 칸국의 잔여 세력은 동부 조지아의 지배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이렇듯 조지아를 통합하고 주권을 회복한 뒤, 그는 경제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때 조지아 도시들에서 무역 및 공예품 생산이 크게 발전했다. 중동과 북캅카스와의 교역 뿐만 아니라 유럽,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는 그동안 쓰이던 몽골 화폐를 계속 통용하되 조지아산 은화를 새로 주조해 국내 시장에 유통하게 했다. 중세 조지아 문헌은 이 은화를 가리켜 "기오르고울리 테트리(Georgauli Tetri)"라고 칭했으며, 1380년대에 출간된 법률집에선 "위대하고 훌륭한 기오르기 왕 시대의 은화"를 보상금으로 쓰도록 규정했다. 또한 관개 사업에 힘을 기울여서 침체되어 있던 농업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포도 등 각종 과일 제배 산업을 지원했다.
또한 외교 관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맘루크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예루살렘의 십자가 수도원이 무슬림에게 회교 사원으로 바뀐 사실을 전해듣고 맘루크 술탄에게 탄원해 그곳을 다시 기독교 교회로 바꾸고 조지아가 관리하게 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조지아 순례자들은 깃발을 펼친 채 "거룩한 도시"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한편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과도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트라페준타 제국 내 친 조지아 정파를 지원해 제국이 조지아에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했다. 또한 1332/1333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보낸 사절을 영접한 뒤 자신이 3만 명의 군인을 이끌고 십자군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1346년 기오르기 5세 사후 왕위에 오른 다비트 9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1348년 흑사병이 조지아 전역을 휩쓸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1360년에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바그라트 5세는 1362년 반란을 일으킨 몬태나 스바네스를 진압하고 자신이 신임하는 관료를 스바네스가 다스리던 영지의 관료로 앉혔다. 이후 추파니드 일대의 투르크인이 삼츠헤에 쳐들어오자, 그는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3일 밤낮으로 행군해 아락시스에 도착한 뒤, 포로들로부터 조지아군의 위치를 잘못 전해듣고 방심하고 있던 투르크군을 기습 공격해 패배시키고 추파니드로 진격하여 수많은 투르크인을 살해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삼츠헤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삼츠헤 공작 쿠바르쿠바레 1세가 사망하자, 그는 공작의 아들인 베카 2세를 삼츠헤 공작으로 임명하고 트빌리시로 귀환했다. 그러나 1365년 흑사병이 재발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처했다. 시디 아흐메드 올라트는 이 때를 틈타 샤키 일대를 장악하고 투르크 토후국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 왕국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으로 둘러싸인 상황을 만회하고자 친선 외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서방과 조지아 왕국간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트라페준타 제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가고자 바실리오스의 사생아인 엘레니 메갈리 콤니니와 결혼했다. 1365년 엘레니가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자 알렉시오스 3세의 장녀인 안나 메갈리 콤니니와 재혼했다. 또한 1370년 테살로니키 대주교와 2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대표단을 접견하고 137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수용하여 그들이 트빌리시와 아할치헤에 2개의 수녀원을 설립하는 걸 허용했다. 그 결과 코카서스 일대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수많은 시련에 직면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잘 극복하던 바그라트 5세였으나 곧 최악의 시련이 닥치고 말았으니, 바로 티무르의 침략이었다.
2.6. 티무르의 침략과 왕국의 혼란
1385년, 티무르가 파견한 군대가 타브리즈를 점령한 뒤 1386년 초 카르스와 에르제룸을 공략한 후 조지아가 장악하고 있는 코카서스를 노리기 시작했다. 티무르는 먼저 동부 코카서스에 습격대를 파견해 국경 지대를 휘젓게 한 뒤, 지하드를 선포하고 대군을 동원해 당시 조지아의 영역이었던 북부 아르메니아를 단숨에 공략했다. 티무르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삼츠헤 공작 베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하지만 바그라트 5세는 침략자에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공동 통치자로 삼은 장남 기오르기 7세를 삼츠베리 시로 보내 후방의 군대를 이끌게 한 뒤, 자신은 아내와 함께 트빌리시 요새에서 농성하기로 했다.1386년, 티무르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수십 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파르츠키 시 등 여러 도시를 며칠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킨 뒤 트리아레티와 사바라티아 일대로 진입하여 대다수 마을을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뒤이어 그가 농성 중이던 트빌리시 요새로 쳐들어갔지만, 방비가 워낙 잘 되어서 수십일에 걸친 공성전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티무르는 요새으로 향하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해 굶주리게 하고 적군이 왕을 구하러 오는 걸 막았다. 조지아 귀족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도주했고, 국왕의 가장 충실한 측근들만이 그와 함께 남았다. 티무르는 이후에도 요새를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1386년 11월 21일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침략군이 트빌리시로 진입했다. 이에 바그라트 5세는 수비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진입한 적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고, 양자는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그러다 구원군이 트빌리시에 접근해 티무르군의 후방을 노리자, 티무르는 일단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티무르는 구원군을 물리친 뒤 재차 공격한 끝에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트빌리시를 점령한 뒤 교회를 모조리 불태우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는 최후까지 사투를 벌이다 생포된 뒤 아내 안나와 차남 다비트와 함께 티무르에게 끌려갔다. 그 후 포로 신분으로 티무르의 원정에 따라가면서 조국이 침략자들에게 파괴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티무르는 카라이아 사막 지대로 이동한 뒤 한 에미르를 파견해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조지아 도시들을 파괴하게 했다. 트빌리시는 다시 황폐해지고 카르틀리 하류 일대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조지아의 종교 중심지였던 므츠헤타의 많은 교회가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다수의 사제, 수녀 및 주민들은 교회에 갇혀 산채로 불태워졌다. 에미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카헤티에서도 이같은 파괴 행위를 벌였다. 이렇게 조지아 대부분을 파괴한 뒤 귀환한 에미르는 티무르로부터 승리를 축하받은 뒤 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파괴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다만 장남 기오르기 7세는 조지아 서부의 산악 지대인 이메레티에서 독자적으로 잔여 병력을 규합하여 티무르에 대항했다.
바그라트 5세는 다비트 4세가 입었던 외투를 포함한 많은 선물을 티무르에게 바쳤고, 티무르는 이에 보답하겠다며 그와 안나 왕비, 다비트 왕자를 조지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자마자 이슬람교 개종을 취소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티무르는 1387년 가신에게 12,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조지아를 공략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의 장남 기오르기 7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의 매복 공격으로 섬멸되었다. 티무르는 이에 분노하여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가 트빌리시를 또다시 황폐화시켰지만,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조지아를 급히 떠나야 했다.
한편,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를 맡고 있던 알렉산드레 1세는 그가 티무르의 맹공에 대응하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1387년 조지아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쿠타이시는 기오르기 7세의 수중에 남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야, 압하지야, 스바네티 공작은 알렉산드레 1세의 합류 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1세는 이메레티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1389년 사망하고 아우 기오르기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1392년, 기오르기 1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바메크 1세와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이메레티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그는 아들 기오르기 7세에게 이메레티 공략을 맡겼다. 기오르기 7세는 이메레티를 공략해 조지아 왕국과 재결합했다. 기오르기 1세의 형제인 콘스탄틴 2세와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는 북캅카스로 도망쳐 발카르 일대에 숨었다.
1393년, 바그라트 5세는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쳤다. 조지아인들은 수많은 국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대왕(დიდი) 칭호를 부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7세는 즉위하자마자 티무르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티무르는 1394년 봄과 가을, 1399년 가을에 조지아를 침공해 평야 지대를 파괴했다. 하지만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계속 항전하는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티무르는 1400년 봄과 여름에 조지아를 2차례 침공하여 파괴를 자행했지만, 주민들을 산악 지대에 피신시키고 유격전을 전개하는 그에게 고전했다. 그러다 오스만 술탄국의 바예지트 1세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티무르는 전력을 오스만 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조지아와 휴전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바예지트 1세를 사로잡은 티무르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 승리를 축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403년과 1404년에 조지아를 연이어 공격했다. 이로 인해 700개 이상의 마을과 수많은 기념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결국 1404년, 그는 티무르 제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그 대신 기독교 신앙을 인정받았고 자치를 누리는 게 허용되었다.
이렇듯 티무르의 연이은 침공으로 조지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알렉산드레 1세의 동생 콘스탄틴 2세가 1396년 이메레티로 돌아와 많은 요새를 공략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자칭했다. 하지만 1401년 망그렐리아의 통치자 마미아 2세에게 찰라간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했다. 그는 이를 틈타 이메레티를 탈환하고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를 남부 카르틀리의 솜히티로 유배했다.
1407년, 기오르기 7세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세운 카라 코윤루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콘스탄틴 1세는 카야 코윤루가 코카서스로 영역을 확장하는 걸 막기 위해 쉬르반샤 이브라힘 1세와 샤키의 통치자 사이드 아흐메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412년 찰라간 전투에서 참패했고, 그와 동생 다비트, 쉬르반샤 이브라힘 1세는 생포되었다. 그는 포로가 되었음에도 오만하게 행동했다가 족장 카라 유수프에 의해 300명의 귀족과 다비트와 함께 처형되었다.
2.7. 망국의 길
1412년 카라 코윤루에게 살해당한 콘스탄틴 1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먼저 조지아에 깊숙히 침입한 카라 코윤루를 격파하여 조자아에서 몰아냈다. 이후 1412년에서 1415년 사이에 밍그렐리아 공국의 다디아니, 삼츠케의 자켈리, 압하지야의 쉬르바시제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그렇게 왕권을 드높이고 평화를 보장받은 뒤, 그는 외세의 오랜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지아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므츠헤타를 포함한 많은 도시, 수도원 및 대성당을 재건했으며, 이에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조지아 정교회 조직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조지아 수도원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렇지만 내치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1431년 로우리 지역을 공략하고 1434년 스바네티의 종주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1435년 오르벨 왕조의 베슈켄 2세가 수니크에 자리를 잡고 있던 카라 코윤루 족을 토벌하도록 격려했고, 베슈켄 2세가 승리를 거두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로우리를 영지로 하사했다. 또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민을 받아들였으며, 티무르 제국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6만 조지아인을 받아들이는 등 부족한 인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411년경 오르벨 왕조의 군주 베슈켄 2세의 딸 두란두크트와 결혼하여 두 아들 바크탕 4세, 디미트리오스, 딸 바그라티오니[4]를 낳았다. 1415년경 기오르기 7세에 의해 남부 카르틀리의 솜히티로 유배된 뒤 15년간 그곳에 억류되었던 디미트리오스[5]를 풀어주고, 알렉산드레 1세(이메레티)의 딸 타마르를 두번째 아내로 삼았다. 그는 타마르와의 사이에서 기오르기 8세, 다비트, 자알을 낳았다.
그는 강력한 귀족들이 각지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중앙 정부의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해결하고자 여러 귀족을 숙청했다. 이후 장남 바크탕 4세를 카헤티, 차남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 그리고 3남 기오르기 8세를 카르틀리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또한 장인인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조지아의 지역 최고 행정관)로 삼았지만 실권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통해 바그라티온 왕조가 조지아 전역을 통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440년, 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의 공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자한 샤는 그해 3월에 2만 병력을 이끌고 조지아를 공격해 삼쉬빌데 시를 파괴하고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했다. 카라 코윤루족은 수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조지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한 뒤 타브리즈로 귀환했다. 이 일로 그의 권위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그가 각지에 아들들을 공동 통치자로 배치한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무제한적인 왕권을 마음껏 사용하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더 나아가 경쟁자를 제치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자, 그는 자기가 살아있을 때 왕위 승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1442년 장남 바크탕 4세에게 양위한 뒤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원 서약을 하고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벨리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1445년 8월 26일에서 1446년 3월 7일 사이에 사망했다.
1442년 알렉산드레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바크탕 4세는 왕중왕을 자처하며 권위를 드높이고자 했지만, 이메레티와 카르틀리를 각각 맡은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귀족들도 각자의 주군을 추종했기 때문에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 자알 파나스카르텔리-치치빌리의 딸인 시티카툰 파나스카르텔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2년 후인 1444년 자식 없이 사망했다.
1444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지한 샤가 조지아로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우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조지아 남부의 아할치헤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지한 샤는 밤을 틈타 타브리즈로 철수했다. 이렇게 외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내부분열을 조정하는 데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샴츠헤 공작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3세의 아들 쿠바르쿠바레 3세를 새 공작으로 임명했지만, 쿠바르쿠바레 3세의 삼촌 아그부야가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실의 든든한 지원세력이었던 삼츠헤가 혼란에 빠지는 걸 막지 못했다.
1446년 12월 바크탕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메레티의 권력자 디미트리오스와 카르틀리의 권력자 기오르기 8세가 왕권을 놓고 경쟁했다. 그 결과 기오르기 8세가 디미트리오스를 밀어내고 조지아 국왕에 올랐다. 1451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그에게 사절을 보내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동의했지만 지참금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56,000두카트, 장신구, 고급 가구, 의복, 연간 지불료 3,000두캇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술탄국에 정복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스만 술탄국은 두 국가의 동맹을 경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치기 전에 조지아 서부 지역인 압하지야를 습격해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는 조지아 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카르틀리만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의 통제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특히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등 조지아 공국들은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 1447년 삼츠헤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아그부하 자켈리가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패배해 왕궁으로 피신했다. 삼츠헤 측은 내전에서 패배한 자를 보호해주는 왕국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1451년 아그부하가 병사하면서 양국의 긴장은 온화되는 듯했지만, 얼마 후 쿠바르쿠바레 3세가 삼츠헤 내 왕실 영지를 몰수하고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서 찾아온 성직자들로 구성된 삼츠헤 정교회를 독자적으로 세웠다.
삼츠회 정교회는 그와 조지아 총대주교 다비트 4세의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하고 그들이 선출한 주교를 총대주교의 직위로 격상했다. 이에 분노한 총대주교 다비트 4세는 사제들에게 삼츠헤 교회에 대한 예배 집전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삼츠헤 사제들을 파문했다. 삼츠헤 교회는 곧 재정위기를 겪게 되자 조지아로부터 독립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므츠헤타의 총대주교를 다시 받들었다.
한편,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디미트리오스가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조지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그는 이를 과시하기 위해 므츠헤타에서 다비트 4세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하고 1455년 콘스탄틴 1세의 손자 바그라트 6세를 이메레티의 통치자로 세웠으며,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콘스탄틴 2세를 자기 보호 하에 두었다. 이때 카스피해의 이슬람 세력권이자 조지아의 속국인 쉬르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을 공격해 짧은 공성전 끝에 쉬르반을 복종시켰다.
1456년,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이 조지아를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북부를 파괴하고 오르베티 요새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하산은 카르틀리를 파괴하고 무크란 시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외세의 위협이 갈수록 심해지자, 1459년 그와 삼츠헤의 지배자 쿠바르쿠바레 3세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던 1459년 9월 교황 비오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는 교황의 사절로부터 십자군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즉각 동의하며, 12만 대군을 동원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조지아에서 4만 명, 트레파준타 제국에서 3만 명, 아르메니아에서 2만 명, 삼츠헤에서 2만 명, 밍그렐리아에서 1만 명, 항구 도시들에서 30척의 배,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적대적인 우준 하산의 제한된 병력이 함께 할 거라 예상했다. 비오 2세는 삽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고무되어 그를 "페르시아의 왕"으로 칭하고 유럽 전역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무찌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서방 국가들은 십자군에 지극히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1460년 9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트라페준타를 포위 공격했다. 메흐메트 2세는 공격을 개시하기 앞서 조지아에 사절을 보냈다. 사절단 대표 오스트로비카의 콘스탄틴은 "만약 조지아군이 트라페준타에 단 한 명의 지원병을 보낸다면, 술탄께선 조지아를 침공하실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는 이를 두려워해 트라페준타 제국을 돕지 않았다. 트라페준타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다비드는 조지아의 구원을 기대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자 1461년 8월 15일 마침내 항복했다. 트라페준타 왕실은 대거 숙청되었지만, 다비드의 아내 엘리니 등은 조지아로 망명했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기오르기 8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했다.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발발하자, 기오르기 8세는 즉각 토벌에 나섰다. 1463년,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로 진군한 그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지원을 요렁했다. 쿠바르쿠바레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에 도착했지만, 전장에서 멀리 진을 치고 전황을 관망했다. 양군은 치코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오르기 8세는 카르틀리로 후퇴한 뒤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다고 판단된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한편 바그라트 6세는 조지아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기오르기 8세는 복수를 다짐하고 병력을 규합해 삼츠헤로 쳐들어가 그곳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 사이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이 그의 본거지인 카르틀리를 공격해 철저히 파괴했다. 기오르기 8세는 방향을 돌려 하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고, 카라 코윤루는 조지아 동부 일대를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쉬리반, 아란 및 모바칸 등 동부 일대는 조지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와 동시에, 쿠바르쿠발레 3세는 바그라트 6세의 군대와 함께 삼츠헤 탈환 작전에 착수해 성사시킨 뒤 기오르기 8세에게 협조했던 지역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1465년, 자객이 기오르기 8세를 죽이려 시도했다. 보좌관인 이오탐 제드구니제가 그를 대신해 자객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는 이오탐의 아들들에게 카르틀리의 여러 성채를 하사하고 이오탐에게 "카르틀리의 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는 이 자객이 삼츠헤에서 왔을 거라 짐작하고 아라그비 공국과 동맹을 맺은 후 삼츠헤를 다시 침공하기로 했다. 삼츠헤군과 조지아 정부군은 파라바니 호수에서 격돌했는데, 전투 자체는 정부군이 승리했지만 기오르기 8세가 섣불리 추격했다가 적에게 오히려 포위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의 조카인 콘스탄틴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군대와 합류한 뒤 철수했다. 그는 아할치헤로 끌려가 그곳에서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기오르기 8세가 아할치헤에서 옥고를 치르는 사이,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바그라트 6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기오르기 8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는 삼츠헤군의 도움을 받으며 카르틀리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걸 우려해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틀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카헤티로 이동했다.
카헤티 귀족들은 다비트보다는 그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보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 덕분에, 기오르기 8세는 다비트를 물리쳐 카헤티의 산악 지역으로 내쫓은 뒤 1466년 보드베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카헤티의 왕을 칭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양분되었고,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는 이 때를 틈타 조지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카르틀리로 이동한 뒤 세력을 갖추고 바그라트 6세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바그라트 6세는 기오르기 8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마침 카헤티의 몇몇 귀족들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기오르기 8세도 동의했다. 1467년, 바그라트 6세와 기오르기 8세는 서로 불복종하는 귀족 토벌을 도와주고 상호간에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기오르기 8세는 이후에도 조지아를 재통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1476년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레 1세는 카헤티에 군림하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바그라트 6세는 기오르기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콘스탄틴 2세와 전쟁을 벌였으나 쉽사리 토벌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평화 협약을 맺어는 방식으로 귀순시켰다. 그러는 사이, 카라 코윤루가 조지아를 잇따라 침략하여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급기야 1477년 카라 코윤루군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지만, 그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16,000 뒤카트의 공물을 지불하고 봉신을 자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78년 바그라트 6세가 사망하자, 아들 알렉산드레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러나 카르틀리와 북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틴 2세가 수도 트빌리시를 위협하자, 조지아 서부의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 구리아의 카하베르 2세, 압하지야와 스바네티아의 공작들이 거부하면서,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케브수레티와 투체티의 산악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트빌리시를 재빨리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 전역의 많은 요새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렇게 수도를 잃은 알렉산드레 2세는 고리로 후퇴했지만 1479년 그곳마저 공략당하자 쿠타이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는 콘스탄틴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 2세가 이메레티를 침공하도록 도왔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메레티 귀족들은 알렉산드레 2세에게 등을 돌렸고, 콘스탄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쿠타이시를 공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랏차와 레흐쿠미 산악 지대로로 피신했고, 콘스탄틴 2세는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의 충성을 받아낸 뒤 쿠타이시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삼츠헤를 정버하러 떠났다. 그 사이 산악 주민들과 동맹을 맺은 그는 콘스탄틴 2세의 군대를 상대로 수년간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3년, 콘스탄틴 2세는 삼츠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여기에 1484년 콘스탄틴 2세의 핵심 지지자로서 이메레티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이 때를 틈타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 탈환 작전을 개시해 쿠타이시를 손쉽게 탈환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략에는 실패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1485년 이메레티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치코리 전투에서 그와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게다가 1486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야쿠브가 카르틀리로 쳐들어오자,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1487년, 밍그렐리아 공작 라파리트 2세 다디아니는 콘스탄틴 2세에게 이메레티로 원정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장정들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산악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2세는 요새를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의 지배를 굳히려 했다. 1488년 야쿠브가 또다시 쳐들어왔지만, 콘스탄틴 2세는 알렉산드레 2세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이메레티를 장악할 걸 우려해 귀환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해 야쿠브를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야쿠브는 그들을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철수해야 했다.
1489년, 알렉산드레 2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랏차, 레흐쿠미 및 스바네티 산악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메레티의 여러 전략적 요새를 공략하고 쿠타이시를 탈환했다. 이에 진노한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한 뒤 카헤티, 이메레티, 삼츠헤 재정복을 위한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콘스탄틴 2세의 권력이 증가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지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콘스탄틴 2세는 평의회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 및 카헤티의 알렉산드레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약이 1491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서, 조지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의 3왕국과 5개의 공국으로 나뉘었다.
3. 역대 군주
3.1. 건국 이전
- 아다르나세 1세(바그라티온 왕조의 시조)
3.1.1. 타오-클라제티 공작
3.1.2. 타오 공작
- 다비트 1세(876년 ~ 881년)
- 구르겐 1세(미상 ~ 891년)
- 아다르나세 3세(891년 ~ 896년)
- 아쇼트 2세(896년 ~ 918년)
- 구르겐 2세(918년 ~ 941년)
- 바그라트 1세(941년 ~ 945년)
- 아쇼트 3세(941년 ~ 954년)
- 아다르나세 4세(945년 ~ 961년)
- 바그라트 2세(961년 ~ 966년)
- 다비트 3세(966년 ~ 1001년)
- 바그라트 3세(1001년 ~ 1008년)
3.1.3. 클라제티 공작
- 숨바트 1세(미상 ~ 889년)
- 다비트 1세(889년 ~ 943년)
- 바그라트 1세(889년 ~ 900년)
- 숨바트 2세(943년 ~ 988년)
- 다비트 2세(988년 ~ 993년)
- 바그라트 2세(988년)
- 숨바트 3세(993년 ~ 1011년)
- 바그라트 3세(1011년 ~ 1028년)
3.1.4. 이베리아 국왕
- 아다르나세(888년 ~ 923년)
- 다비트 2세(923년 ~ 937년)
- 숨바트 1세(937년 ~ 958년)
- 바그라트 2세(958년 ~ 994년)
- 구르겐 1세(994년 ~ 1008년)
3.2. 조지아 왕국(1008년 ~ 1259년)
- 바그라트 3세(1008년 ~ 1014년)
- 기오르기 1세(1014년 ~ 1027년)
- 바그라트 4세(1027년 ~ 1072년)
- 기오르기 2세(1072년 ~ 1089년)
- 다비트 4세(1089년 ~ 1125년)
- 디미트리오스 1세(1125년 ~ 1154년)
- 다비트 5세(1154년 ~ 1155년)
- 디미트리오스 1세(1155년 ~ 1156년)
- 기오르기 3세(1155년 ~ 1184년)
- 타마르(1184년 ~ 1213년)
- 기오르기 4세(1213년 ~ 1223년)
- 루수단(1223년 ~ 1245년)
- 다비트 6세(1245년 ~ 1247년)
- 다비트 6세 + 다비트 7세(1247년 ~ 1259년)
3.3. 1차 이국 분열 시대(1259년 ~ 1330년)
3.3.1. 서부 조지아 왕국
3.3.2. 동부 조지아 왕국
- 다비트 7세(1259년 ~ 1270년)
- 디미트리오스 2세(1270년 ~ 1289년)
- 바크탕 2세(1289년 ~ 1292년)
- 다비트 8세(1292년 ~ 1302년)
- 기오르기 5세(1299년 ~ 1302년)
- 바크탕 3세(1302년 ~ 1308년)
- 다비트 8세(1308년 ~ 1311년)
- 기오르기 6세(1311년 ~ 1313년)
- 기오르기 5세(1313년 ~ 1330년)
3.4. 1차 통합 조지아 왕국(1330년 ~ 1387년)
3.5. 2차 이국 분열 시대(1387년 ~ 1401년)
3.5.1. 1차 이메레티 왕국
3.5.2. 2차 동부 조지아 왕국
3.6. 2차 통합 조지아 왕국(1401년 ~ 1489년)
- 기오르기 7세(1401년 ~ 1407년)
- 콘스탄틴 1세(1407년 ~ 1412년)
- 알렉산드레 1세(1412년 ~ 1442년)
- 바크탕 4세(1442년 ~ 1446년)
- 기오르기 8세(1446년 ~ 1463년)
- 기오르기 8세 vs 바그라트 6세(1463 ~ 1465년)
- 바그라트 6세(1465년 ~ 1478년)
- 알렉산드레 2세(1478년)
- 콘스탄틴 2세(1478년 ~ 1489년)
[1]
트라페준타 제국,
알라니아 등.
[2]
현대의
조지아처럼 서아시아와 동유럽에 영토가 걸처져 있었으며 오늘날의 러시아령 캅카스 지역,
트라페준타 제국을 통해 간접 영유한
크림 반도 남단 지역 등 현대 조지아보다 유럽에 속하는 영토가 더 많았다.
[3]
이전 버전에선 가이스 앗 딘을 당시 룸 술탄국의 술탄 아들이라고 했는데, 실제 유럽 기록에서도 기아스 앗 딘을 셀주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아스 앗딘의 아버지인 투그릴 샤가 룸 술탄국의 12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아들이라 기아스 앗 딘도 룸 술탄국의 왕족이긴 하지만 투그릴 샤는 룸 술탄국의 술탄에 오른 적은 없다. 아마도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사후 그의 아들이 분할 통치도 하고 있고, 이 시기 투그릴 샤가 통치하는 소왕국에 가까운 에르주룸이 룸 술탄국으로 분류되다 보니 룸 술탄국 에르주룸의 샤(왕)인 그의 아들 기아스 앗 딘도 룸 술탄국의 술탄 아들로 오해되었거나 혹은 과장 선전을 위해 왕자로 알린 듯 하다.
[4]
훗날
트라페준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4세의 아내가 되었다.
[5]
1차 이메레티 왕국의 초대 군주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