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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7대 칼리파 سليمان بن عبد الملك | 술라이만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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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술라이만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
아랍어 | سليمان بن عبد الملك | |
영어 | Sulayman ibn Abd al-Malik | |
출생 | 675년 | |
사망 | 717년 9월 24일 (향년 42세) | |
존호 | 칼리파 | |
재위 기간 | 715년 2월 25일 또는 3월 11일 ~ 717년 9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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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7대 칼리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감행했다.2. 생애
675년경 메디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아브드 알 말리크는 쿠라이시 부족의 우마이야 씨족 일원이었다. 어머니 왈라다 빈트 알 압바스 이븐 알자즈는 6세기에 활약한 바누 압스 부족장 주하이르 이븐 자디마르의 후손이다. 684년 가족과 함께 메디나에서 반 우마이야 세력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시리아로 이주했다가 할아버지 마르완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자랐다.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아버지에 의해 필라스틴( 팔레스타인)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715년까지 팔리스틴 총독을 맡으면서 이 지역의 지배 부족인 야마니 족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 모스크를 건설한 야마니 종교학자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를 가정교사이자 수석 보좌관으로 삼고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한편, 그는 이라크 총독 알 하지 이븐 유수프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유수프의 정적들과 관계를 강화했다. 708년 또는 709년에 전 호라산 총독이었던 야지드 이븐 알 무할라브가 유수프를 피해 망명했을 때 피난처를 제공했다.
왈리드 1세가 야지드에게 상관을 거역한 죄로 막대한 벌금을 매기자, 그는 야지드를 대신해서 벌금을 내주었다. 또한 자신의 아들 아이유브를 족쇄에 채운 채 칼리파에게 보내면서 무할라브 일족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왈리드 1세는 야지드를 용서하기로 했다. 야지드는 자신을 지켜준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충성을 서약했다. 8세기의 이슬람 역사가 히샴 이븐 알-칼비에 땨르면, 야지드는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옷을 잘 입는 법을 가르치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으며 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필라스틴 총독으로서 라믈라 시를 건설하고 기존의 주도였던 룻드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는 오랜 기간 번영한 도시인 룻드에 추가로 개발할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서 명성을 구가하고 싶었던 그가 아예 룻드 근처에 신도시를 세우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룻드는 평지에 있어서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기에 이를 보완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라믈라는 파티마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도모할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남았다.
왈리드 1세는 칼리파로 예정되었을 때 아버지 아브드에게 그를 차기 칼리파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년에 약속을 어기고 아들 아브드 알아지즈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이던 715년 2월 25일 또는 3월 11일에 사망했다. 그는 많은 총독들이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없었고, 자신들을 후원해준 왈리드 1세의 아들이 통치하기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제압하고 칼리파가 되기로 마음먹고 숙청 작업에 착수했다.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첫번째 타겟으로 선정되었다. 무사는 이베리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왈리드 1세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서둘러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그는 왈리드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핑계를 대며 서두르지 말라고 서면으로 설득했지만, 무사는 이를 무시하고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뒤 죽기 이틀 전이었던 왈리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새 칼리파에 취임한 그는 무사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만 디나르를 벌금으로 매기고 즉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무사가 전 칼리파의 뜻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항변하자, 그는 뻔뻔스럽다며 무사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후 무사의 아들 압둘라도 체포되었고, 무사의 모든 친척들에게도 50만 디나르라는 새로운 벌금이 매겨졌다. 압둘라는 지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고, 그 후 모든 금액을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지불 직후 처형되었다.
무사의 둘째 아들 압둘아지즈는 형의 죽음을 전해들은 뒤 칼리프의 이름에 대고 기도하는 것을 중단했다. 이 일로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717년 세비야의 모스크에서 하비브 아부 우바이다가 이끄는 귀족 아람인들에게 피살당했다. 압둘아지즈의 머리는 그에게 전달된 후 무사에게 넘겨졌고, 당시 70세였던 무사는 두 아들을 잃어버린 것에 슬퍼하다 곧 사망했다.
그는 뒤이어 동방 총독들을 잇따라 숙청했다. 최대의 정적이었던 알 하지는 이미 죽었지만, 하지를 따랐던 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새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야지드는 알 하지의 추종자였던 아부 무슬림을 처단했다. 그리고 동방 정벌에 큰 공을 세웠지만 알 하지의 후원을 받았던 무함마드 이븐 카심 역시 신드 총독에서 해임된 뒤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기름을 바른 생가죽에 밀봉된 채 사막에 던져져서 질식사했다. 호라산 총독이자 트란스옥시아나의 정복자 이븐 쿠타이바 역시 알 하지의 추종자였으며 왈리드 1세의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자는 알 하지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에 숙청 대상이 되었다. 쿠타이바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채고 715년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직속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수급이 베어진 후 다마스쿠스로 이송되었다.
이렇듯 총독들을 대거 숙청한 그는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메카로의 전통적인 순례를 떠났다. 메카에 도착한 그는 산의 샘에서 도시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 공사를 벌이라고 지시했고, 메디나에 새로운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자신을 관대한 통치자로 포장하려 했지만,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으로 인해 여론이 오히려 나빠졌다. 한 번은 메디나에서 저녁 만담을 하던 중, 400명의 동로마 포로들이 끌려왔다. 그는 하산의 손자 압둘라를 불러서 자시했다.
"네가 힘을 발휘해 저 포로 중 한 명의 목을 베어라."
압둘라는 개인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원 중 한 명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단 한 방에 포로 한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어찌나 힘차게 휘둘렀는지 머리 뿐만 아니라 쇠깃도 잘랐다고 한다. 그는 이에 크게 기뻐하며 다른 포로들도 계속 베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400명의 포로들은 모조리 참살당했다. 당시에는 포로 처형이 일반적이기는 했지만, 칼리파가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포로를 학살했다는 사실은 무슬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나병 환자들이 목에 달린 방울을 울리며 지나갔다. 당시 나병 환자들은 이 방울 소리를 통해 자신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걸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야 했다. 그는 이 방울 소리를 거슬러한 나머지 저들을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여러 신하가 이를 뜯어말리고 나병 환자들을 분리된 마을로 이송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형제 마르완이 병에 걸려 죽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화를 계기로 그를 무자비한 인간이라고 여겼다.
716년 9월, 순례를 마치고 다마스쿠스에 돌아온 그는 왈리드 1세가 추진했으나 병사하면서 중단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9만 보병, 6,000 낙타 기병, 6,000 노새 기병이 집결했고,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온 500척의 함대가 마슬라마 이븐 알 말리크의 지휘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들은 중간에 막아선 적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공성전을 감행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마슬라마에게 수도의 시민 전체 몫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대를 조직하는 등 승리를 확신했던 마슬라마는 거부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의 결사적인 항전 때문에 좀처럼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해군 역시 그리스의 불을 앞세운 적 함대에 번번이 격퇴되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이 쉽게 이뤄지지 않던 717년 9월 24일, 그는 다비크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장남 아이유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아이유브는 717년 초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또다른 아들 다우드를 지명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는 다우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싸우고 있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그러면서 사촌이자 칼리파의 조언자인 우마르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가 인격과 능력이 뛰어나고 신실한 무슬림이라며 그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술라이만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혹여 자신의 형제들과 우마르 간의 분란이 생길 걸 우려해 형제 야지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를 우마르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하여 우마르는 우마르 2세로서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