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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
150년경 시절의 아르샤쿠니 왕조의 영토 | |||
54년 ~ 428년 (375년간) | |||
위치 | 아르메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알바니아[1] | ||
수도 | 아르타샤트, 바가르샤파트, 두인(다빌) | ||
국가 원수 | 왕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주요 군주 | 티리다테스 3세(287~330?) | ||
언어 |
고대
아르메니아어,
아람어, 파르티아어, 중세 페르시아어 |
||
종교 |
아르메니아 종교(
주신: 아라마즈드) → 조로아스터교(3세기)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301년 이후) |
||
종족 | 아르메니아인 | ||
성립 이전 |
아르탁세스 왕조 로마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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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
동로마 제국 사산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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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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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Armen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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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Արշակունի (아르샤쿠니)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조. 로마 제국과 이란 제국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 → 사산조 페르시아)가 한창 대립하던 시절에 세워진 파르티아계 아르메니아 국가로, 아르사케스 왕조의 방계인 아르샤쿠니 왕조가 통치하였다.
2. 역사
2.1. 험난한 집권과정
서기 50년경 로마와 파르티아의 완충 지대이던 시절의 영토
12년, 파르티아 샤한샤 보노네스 1세는 아르타바노스 2세를 상대로 내전을 치르다 불리해지자 아르메니아로 이동하여 아르탁세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티그라네스 5세와 에라토를 몰아내고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6년간 버텼지만, 18년 아르타바노스 1세가 아들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세우고자 침공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보노네스 1세는 로마에 지원을 호소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황제의 뜻에 따라 아르타바노스 2세를 파르티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 대신 로마가 지정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3세를 파르티아가 인정하기로 했다. 게르마니쿠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보노네스 1세는 시리아로 이송된 뒤 시리아 총독 실라누스 크레티쿠스의 감시하에 망명 정부를 구성했지만, 아르타바노스 2세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로마 정부가 킬리키아의 폼페이오폴리스로 강제 이주시키는 걸 피하려다 피살당했다.
34년 아르탁세스 3세가 사망한 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장남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강력한 군대를 맡겨 아르메니아로 진격하게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가 아르메니아 왕을 선임하는 것에 동의해놓고 또다시 아르메니아 왕위를 노리는 파르티아에 분개하여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베리아 왕국(현재 조지아)의 왕자 미트리다테스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에 이베리아인들이 호응하여 중앙 유라시아 출신의 유목민족들을 용병으로 기용하여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또한 비텔리우스는 제3 갈리카 군단, 제6 페라타 군단, 제10 프레텐시스 군단, 제12 풀미나타 군단에게 파르티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로마와 파르티아간의 전운이 감돌던 중, 아르사케스 1세가 35년경 돌연 사망했다. 하인들이 미트리다테스의 사주를 받고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리하여 미트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에 오르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또다른 아들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우고자 아르메니아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 및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그 사이에 비텔리우스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파르티아 영토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테시폰에서 티리다테스 2세를 왕위에 올렸다. 결국 아르타바노스 3세는 티리다테스 2세와 내전을 치러야 했고, 미트리다테스는 그 사이에 아르메니아를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 황제가 붕어한 후 새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미트리다테스를 폐위시켜 로마로 소환했다. 마침 내전을 수습하고 파르티아 전역을 장악한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이때를 틈타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에 앉혔다. 이후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만나 협상했다. 협상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고 오로데스의 집권을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를 섬겨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42년 오로데스가 사망하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에 복위시켰다. 당시 파르티아는 바르다네스 1세와 고타르제스 2세간의 내전으로 인해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가져가는 걸 막지 못했다. 로마 수비대는 아르메니아 수도 아르탁사타 인근의 고르니(Gornae) 요새에 주둔하여 미트리다테스의 왕위를 보장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입지가 여전히 불안하다고 여기고 위험인물로 간주된 인사들을 학살하고 백성을 폭압적으로 다스렸다. 결국 51년, 미트리다테스의 통치에 반감을 품은 아르메니아 백성들의 추대를 받은 이베리아 왕자 라다미스투스가 이베리아인들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하고 고르니에서 미트리다테스를 포위했다.
라다미스투스는 폴리오에게 뇌물을 줘서 게르니의 성문을 열게 하려고 했다. 폴리오는 이에 따르려 했지만, 카스페리우스는 강하게 반대하면서 카파도키아 총독 율리우스 파엘리그누스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폴리오는 결국 카스페리우스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문을 열어 이베리아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로마군의 배신으로 체포된 그는 가족과 함께 목이 졸려 질식사했다. 율리우스 파엘리그누스는 아르메니아 탈환을 위해 출정했지만, 도중에 계획을 바꿔 라다미스투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한편, 51년 파르티아 샤한샤에 등극한 볼로가세스 1세는 동생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탈자를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적의 미약한 저항을 가차없이 물리치고 아르탁사타를 공략한 후 동생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메디아와 히르카니아에서 아들 바르다네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다미스투스는 이베리아로 피신했다가 파르티아군이 돌아가자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뒤 파르티아인들에게 항복한 아르메니아 도시들을 엄벌에 처하고 많은 인사들을 처형했다. 이에 55년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추방하고 티리다테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로마는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이대로 장악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55년 초, 시리아 총독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는 프레텐시스 제10군단과 풀미나타 제12군단을 편성했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사령관 코르불로가 갈리카 제3군단과 페라타 제6군단을 재편성했다. 두 지휘관 모두 볼로가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아들 바르다네스 2세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고 있었던 볼로가세스 1세는 이에 응해 움미디우스에게 인질을 보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기를 고수했고, 58년 기병대를 보내 시리아 속주를 급습하면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와 로마군 사이의 전초전이 벌어진 후,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로 진격했다. 파르티아-아르메니아 연합군은 로마군의 침략에 맞섰지만 코르불로의 탁월한 지휘로 인해 연이어 패배했고, 티리다테스 1세는 59년 파르티아로 망명했다. 로마군은 헤롯 대왕의 후손이며 헤롯 아그리파 2세의 친척인 티그라네스 6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웠다. 이후 로마군이 겨울 숙영을 위해 시리아로 돌아가자, 티리다테스 1세는 아트로파테네에서 아르메니아 북부로 이동했다. 그러나 60년 봄 로마군의 압박으로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새 왕이 된 티그라네스 6세는 61년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파코로스가 다스리던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습격했다. 동방에서 일어난 바르다네스 2세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아르메니아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볼로가세스 1세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형제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정당한 왕임을 선언하고, 바르다네스 2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아르메니아로 향한 반격을 개시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모나세스(Monaeses) 장군을 파르티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군대와 합세하여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도록 했다. 티그라네스 6세는 티그라노케르타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했고, 파르티아군은 성의 보급로를 차단한 뒤 포위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티그라노케르타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코르불로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군대를 집결하며, 여차하면 메소포타미아를 직접 치려고 했다. 그러자 볼로가세스 1세는 코르불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이때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우는 걸 인정하겠지만, 즉위식을 로마에서 하는 게 어떠냐"
라고 권유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는 한편 모나세스에게 포위망을 푼 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한편 카이세니우스 파에투스 장군이 마케도니아 제5군단, 스키티카 제3군단, 풀미나타 제12군단을 이끌고 북방 전선에 도착했다. 그는 코르불로와 파르티아 간에 평화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공적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이를 무시하고 스키티카 제3군단과 풀미나타 제12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티리다테스에게 충성했던 아르메니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볼로가세스 1세는 즉각 반격을 가하여 파에투스를 격파하고, 아르사모사타 인근 란데이아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코르불로는 아군을 구하고자 달려갔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파에투스가 항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와 평화 협상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2개 군단을 무장해제시킨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이후 62년/63년 겨울에 다시 평화 협상이 재개되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코르불로의 제안대로 하자고 권했지만, 로마 당국은 패배한 뒤 협정을 맺는 걸 굴욕으로 여겨 거부하고 또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63년 봄, 코르불로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볼로가세스 1세와 티리다테스는 이번에는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코르불로 역시 적이 산악 지형에서 버틴다면 공략하기 매우 어렵고, 아르메니아인들이 티그라네스 6세보다는 티리다테스 1세를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이상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양자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는 란데이아에서 조우했다. 티리다테스는 로마군 진영에 이르러 왕관을 벗어 로마 황제 네로의 동상 앞에 놓고, 로마에서 개최되는 대관식에서 네로로부터 왕관을 돌려받기로 했다.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다. 티리다테스는 66년 로마에 도착한 뒤 네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서약했고, 그로부터 아르메니아 왕관을 수여받았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로마와 파르티아의 갈등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2.2. 짧은 번영과 트라야누스의 침략
티리다테스 1세는 네로에게 5,0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막대한 선물을 받고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뒤 수도 아르탁사타의 재건을 위해 숙련된 장인들을 대거 고용했고, 도시가 재건되었을 때 황제를 기리기 위해 '네로니아'라는 이름을 지었다. 또한 인근의 가르니에 있는 왕궁을 눈부시게 풍요로운 기둥과 기념물로 장식했으며, 로마식 목욕탕도 갖췄으며,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건설했다. 아르메니아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완충국이자 로마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동맹국으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72년 알란족이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침략하여 재물을 약탈했을 때, 볼로가세스 1세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일로 양국의 관계가 한동안 소원해졌던 적이 있었지만, 티리다테스의 위상에 별다른 타격이 가해지지 않았다.88년 티리다테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나투르케스는 파르티아, 로마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토목 공사에 힘을 기울였다. 아라차니 강과 메무라트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서쪽 연안에 므추르크(Mtsurk)를 건설하여 아르메니아의 무역과 공예 발전에 기여했다. 7세기 아르메니아의 주교이자 역사가 세베오스(Sebeos)가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시리아인 학자 마르 아바스 카티나가 이 도시에 살면서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저술했다고 한다. 또한 세베오스는 므추르크에 사나투르케스 왕의 궁전 폐허에서 왕궁의 문 앞의 돌에 새겨진 그리스 비문을 기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군주에 대한 연대기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메니아 역사학자 하코프 하마자피 마난디안(1873~1952)은 이를 근거로 사나투르케스가 수도를 므추르크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모세스 호레나치에 따르면, 그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숭배자였던 아브가르 6세의 뜻을 따라 기독교인을 박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고 유다 타대오를 죽였고, 아브가르 6세의 남성 자손 역시 처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톨릭 전승에는 유다 타대오가 레반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설교하고 뒤이어 페르시아에서 설교하다가 창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에서 전해지는 전승이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이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유다 타대오를 수호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사나투르케스가 110년 사망한 뒤, 파르티아 샤한샤 파코로스 2세의 아들 악시다레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13년, 파코로스 2세와 볼로가세스 3세 부자와 대립하여 크테시폰,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파르티아 서부 일대를 장악한 오스로에스 1세는 악시다레스를 폐위하고 파코로스 2세의 또다른 아들 파르타마시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이를 빌미삼아 파르티아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트라야누스가 아테네에 이르렀을 때, 오스로에스 1세의 사절이 그를 찾아왔다. 사절은 막대한 선물을 바치면서, 지난날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 티리다테스 1세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동의하에 아르메니아 대관식을 치렀던 것처럼, 파르타마시리스가 로마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를 병합한 트라야누스 시절 로마 제국의 영토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사절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114년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르타마시리스의 항복을 받아낸 뒤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했다. 뒤이어 115년 에데사와 니시비스를 공략했고, 116년에 루시우스 퀴에투스 장군을 선봉으로 내세워 파르티아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바빌론, 크테시폰, 셀레우키아가 함락되었고, 로마군은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나바테아인들이 세운 페트라 왕국까지 굴복시켜 아라비아 속주로 편입시켰다. 오스로에스 1세는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잠적했다. 일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바빌론을 방문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10년만 젊었더라면
인도까지 갔을텐데!"
그러나 파르티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으려던 그의 원대한 계획은 곧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볼로가세스 1세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의 보급로를 위협했고, 남쪽에서는 오스로에스 1세의 친척인 미트리다테스 5세가 기병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 섬, 유대 속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제2차 유대-로마 전쟁) 결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를 속주로 편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샤한샤로 선임했다.
117년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뒤, 새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정복했던 영토를 전부 포기하고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이때 볼로가세스 1세 역시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받았다. 서기 5세기에 활동한 기독교 계열 역사가 모세스 호레나치(Movses Khorenatsi)에 따르면, 그는 바르제사반(Vardgesavan)을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그하르샤파트로 개명했다고 한다. 이 도시가 현재 아르메니아의 4번째 도시인 에치미아진(Էջմիածին)이다. 136년 로마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왕 파라스만 2세가 코카서스 남쪽, 아르메니아, 메디아, 카파도키아까지 침략한 알란족과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응징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2.3. 로마와 파르티아의 아르메니아 쟁탈전
140년에서 144년 사이에 볼로가세스 1세가 사망한 뒤,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44년 에메사 황족 소헤모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당시 파르티아는 볼로가세스 3세와 오스로에스 1세, 미트리다테스 5세와의 내전, 알란족과 쿠샨 왕조의 침략에 시달리느라 아르메니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모든 내란을 수습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볼로가세스 4세는 161년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하여 소헤모스를 축출하고 아들 파코로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웠다.볼로가세스 4세는 여세를 몰아 시리아로 쳐들어가 히스파니아 제8군단 또는 데이오타리아나 제22군단을 섬멸했다. 당시 제위에 막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배다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동방 원정군을 맡겼다. 이후 충격에서 회복된 동방 로마군은 163년 루키우스의 부관이자 실질적인 지휘관인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의 지휘하에 아르메니아를 탈환하고, 소헤모스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뒤이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파르티아 본토로 쳐들어갔고, 164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휩쓸었다. 165년 또는 166년에는 셀레우키아, 크테시폰까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비슷한 시기에 메디아와 아디아베네도 로마 별동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철수 과정에서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 역병은 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 내내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안토니누스 역병'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진다.
이때 큰 타격을 입은 파르티아는 14년간 조용히 지내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직후 재차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소헤모스를 폐위하고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 볼로가세스 5세[2]를 왕위에 앉혔다. 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마르코만니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쇠약해졌고, 콤모두스가 또다시 전쟁을 벌이길 원하지 않았기에 파르티아의 이같은 행위를 용인했다. 다만 파르티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대부분을 잃었고, 하트라 시가 파르티아의 서쪽 국경이 되었다.
191년 파르티아 샤한샤가 된 볼로가세스 5세는 아들 호스로프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19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파르티아로 쳐들어가 크테시폰을 약탈할 때, 호스로프 1세는 세베루스에게 공물과 인질을 바치며 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 지내다가 215년 카라칼라 황제의 초대를 받고 찾아가다가 체포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에 분노하여 호스로프 1세의 아들 티리다테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카라칼라는 로마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봉기를 진압했다.
티리다테스 2세는 산악지대에 숨어지내다 217년 아버지가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메니아 왕을 자칭했고, 니시비스 전투를 치른 뒤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은 마크리누스 황제로부터 호스로프 1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돌려받고 아르메니아 왕위를 인정받았다. 그 후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하자르 족과 바슬라트 족을 물리치고 왕국의 북쪽 국경지대를 안정시켰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계급의 특권을 보장하고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했다. 그러던 224년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사산 왕조가 들어서자, 많은 파르티아 왕족들이 아르메니아로 피신했다. 그 후 아르샤쿠니 왕조는 파르티아 세력의 최후의 보루로서 사산 왕조와 적대했다.
2.4. 사산 왕조와의 항쟁
사산 왕조의 초대 샤한샤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의 잔여 세력이 집결한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티리다테스 2세는 로마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10여 년간 항쟁한 끝에 사산 왕조군을 몰아냈다. 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와 동맹을 맺고 사산 왕조를 협공해 상당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후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에 다브레즈(현재 타브리즈)시를 건설하여 사산 왕조의 지속적인 침략으로부터 동부 국경을 지키게 했다.이렇듯 사산 왕조로부터 아르메니아를 지킨 티리다테스 2세는 252년 사망했고 아들 호스로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258년, 사산 왕조의 제2대 샤한샤 샤푸르 1세는 아르메니아를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방비가 워낙 굳건하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의 견제도 심한 상황에서 무력으로는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호스로프 2세의 친척인 아낙에게 "왕을 시해하면 그의 지위와 재산을 그대가 갖는 걸 용인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아낙은 이를 받아들여 바그하르샤파트에서 호스로프 2세와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이에 분노하여 아낙과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아낙의 어린 아들 그레고리만이 보모 소피아와 예브타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아로 피신했다. 그 후 그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훗날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데 크게 기여해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샤푸르 1세는 호스로프 2세의 암살로 혼란에 빠진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아들 호르미즈드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호스로프 1세의 아들 티리다테스 3세는 몇몇 추종자를 이끌고 로마로 망명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는 30년간 사산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283년 카루스 황제가 사산 왕조를 침공하여 크테시폰을 함락하고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힌 뒤, 284년 바흐람 2세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서아르메니아는 티리다테스 3세가 통치하고 동아르메니아는 나르세스 1세가 다스렸다.
293년, 나르세스 1세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바흐람 3세를 폐위하고 샤한샤로 등극했다. 그는 찬탈로 인해 불안한 입지를 다지려면 지난날 로마 제국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296년, 사산 왕조군은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티리다테스를 몰아냈다. 이후 티그리스 강을 건너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제 갈레리우스에게 티리다테스 3세를 아르메니아에 복귀할 수 있또록 도우라고 명령했다.
296년 말이나 297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라에와 칼리니쿰 사이의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산 왕조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었는데도 적에게 공세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뒤늦게 시리아에 도착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티리다테스를 왕으로서 정중하게 대했지만, 갈레리우스에겐 말을 타지 말고 자신이 탄 병거 옆에서 달리게 하는 굴욕을 줬다. 하지만 그는 갈레리우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뉴브 전선의 고트 용병대를 모집한 뒤 다시 시리아로 오도록 하였다.
298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온 나르세스 1세의 사산 왕조군을 사탈라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나르세스 1세의 아내 아르세나와 다수의 후궁, 상댱량의 보물을 확보했다. 그 후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바빌론까지 진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더 깊숙이 진격하려는 갈레리우스를 제지하고, 나르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크세티폰을 돌려줄 테니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위하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나르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승락했고, 티리다테스 3세는 그 덕분에 아르메니아 전체의 군주로 등극했다.
2.5. 최초의 기독교 국가
301년, 티리다테스 3세는 기독교를 아르메니아의 국교로 확정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로아스터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였고 기독교는 박해대상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뒤집힌 것이다. 이에 대해 아가탄겔로스는 그레고리의 활약 덕분이라고 기술했다. 그에 따르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티리다테스가 아나히타 여신에게 감사 예식을 거행했다. 이때 하급 관료를 맡고 있던 그레고리는 "저는 기독교인이라 여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왕은 그의 행동에 마음이 상했는데, 누군가가 그레고리는 티리다테스의 아버지 호스로프 2세를 살해한 아낙의 아들이라고 밀고했다. 티리다테스는 분노하여 그레고리를 아르탁사타의 지하 감옥 코르 비랍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레고리는 그곳에서 13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몇년 후 흐립시메(Hripsime) 등 33명의 처녀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로 탈출했다. 흐립시메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티리다테스가 자신과 결혼하자고 제안했지만, 흐립시메는 단호히 거부했고 다른 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분노한 티리다테스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얼마 후 티리다테스는 사냥 도중에 갑자기 이성을 잃고 멧돼지처럼 행동하며 풀을 뜯어먹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호스라비는 오빠를 어떻게든 구하려 했지만, 명의로 소문난 의사들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조로아스터교 사제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꿈 속에서 감옥에 갇힌 그레고리만이 오빠를 치료할 수 있다는 음성을 듣고, 당장 지하 감옥에서 풀어주고 오빠를 구해달라고 청했다.
그레고리는 먼저 처녀들의 사체를 매장한 뒤 66일간 왕을 위해 기도하고 기독교에 대해 설교했다. 그 결과 티리다테스는 기적적으로 고쳐졌고, 여동생과 함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티리다테스가 301년 무렵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그레고리를 아르메니아의 첫번째 총대주교로 삼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레고리는 수도 바가르샤파트에 교회를 세우고 36명의 주교를 선임했다. 왕은 거의 모든 이교 사원을 파괴하고 우상으로 간주된 신들의 동상과 기록물을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이교도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티리다테스는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티리다테스 3세와 그레고리, 그리고 호스라비를 성인으로 시성했고, 6월 30일을 티리다테스 3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2.6. 사산 왕조의 거듭된 침략
330년 티리다테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호스로프 3세는 즉위 직후부터 시련에 직면했다. 북동부 아르메니아 통치자 사나투르케스 아르샤쿤은 왕위를 갈망했고, 남부 아르메니아 총독 아그드즈니크 브데쉬흐-바쿠르는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2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반란을 물리쳤다. 또한 분쟁 영지인 보르두니스와 마나바지아를 위해 서로 싸운 신하들을 해임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조치를 내렸다. 바체 마미코니안(Vache Mamikonian)이 왕의 명령을 그대로 집행해 보르두닝스와 마나바지아의 분란을 잠재웠다. 한편, 그는 사산 왕조에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매년 바치는 조건으로 샤푸르 2세와 화해했다.그러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떠난 후, 사나투르케스 아르샤쿤이 군대를 기습적으로 일으켜 에프탈의 지원에 힘입어 바그하르샤파트를 장악했다. 호스로프는 카고빗 지방의 다루운크 요새에서 농성했다. 마미코니안은 호스로프에 충성하는 장군들의 사병대를 모은 뒤 요새를 포위한 적군에 돌격해 격멸한 후 바그하르샤파트를 기습 점령했다. 그 후 왕의 군대는 오샤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반역자 사나투르케스를 처단했다. 호스로프는 오사칸 전투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바한 아마투니에게 오사칸을 영지로 하사했으며, 충성을 바친 다른 장수들에게 여러 영지를 하사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는 평온을 되찾았고, 호스로프는 토목 공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두인 시를 건설해 행정수도로 삼았으며, 호스로바케르트를 사냥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장소로 삼고 그곳의 숲을 벌목하는 걸 금지했다. 그러던 337년, 샤푸르 2세의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침공했다. 1개 부대는 므츠빈을 포위했고, 또다른 부대는 헤르자레반드를 통과하여 아르메니아 영역 깊숙히 침투했다. 바체 마미코니안과 바한 아마투니 장군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출전해 이들을 막아섰고, 양군은 반 호수 북동쪽 해변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은 참패했고, 사산 왕조군과 손잡은 다타베 일족은 처단당했다. 그 후 호스로프는 1,000명 이상의 군인을 거느린 신하들은 궁정에서 자신의 통제하에 생활하도록 해,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338년, 샤푸르 2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또다시 공격했다. 그해 3월, 바체 마미코니안이 수만 병력을 이끌고 샤푸르 2세와 격돌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고, 샤푸르 2세는 공세를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명장 마미코니안은 불행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훗날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339년 호스로프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티그라네스 7세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강력한 아리우스파여서 정통 교리를 중시하는 성직자들과 갈등을 벌였고, 지난날 샤푸르 2세를 상대로 수 차례 승리를 거두다 끝내 전사한 바체 마미코니안 이래로 군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미코니안 가문을 적대시했다. 347년 축일에 총대주교 브르타네스 1세가 소펜 교회에 들어가려던 자신을 막아서며 이단을 믿지 말고 신앙심을 개선하라고 충고하자, 부하들을 시켜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해 죽여버렸다. 또한 아르메니아의 주요 가문인 아르즈루니와 레슈투니 가문이 사산 왕조와 내통하고 있다며 역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고, 마미코니안 씨족에 속한 장수들을 해임했다.
이렇듯 잦은 숙청을 벌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약해지자, 샤푸르 2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그를 체포하고 양눈을 멀게 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로마군의 지원에 힘입어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싸웠고, 샤푸르 2세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티그라네스 7세를 풀어줬다. 티그라네스는 아들 아르사케스 2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난 후 조용히 지내다 358년 사망했다.
아르사케스 2세는 358년경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근위대장 플라비우스 아블라비우스의 딸 올림피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사산 왕조의 침략을 두려워했기에, 양국 중 한쪽을 지지하기 보다는 둘다 우호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한편, 그는 재위 초기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동료인 네르세스를 고문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당시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는 서로 전쟁을 벌이길 꺼렸기에, 아르메니아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틈에 군대를 강화하고 경제를 회복하고 토목 공사를 벌이는 한편, 아버지의 통치 기간 때 숙청되었던 이들을 재고용했다. 특히 바삭 마미코니안을 군대 사령관으로 삼아 군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마미코니안 씨족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였다. 또한 아르메니아 군대의 가장 강력한 전투 부대인 중기병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이들의 수를 늘리고 전투력도 강화했다.
353년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에 선임된 네르세스는 남부 아르메니아의 타론 지방에 있는 아쉬티샤트 마을에서 최초의 아르메니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여러 교회 규칙과 다양한 법률이 채택되었는데, 특히 이교 관습에 대한 엄격한 금지 조항이 채택되었다. 가까운 친척의 결혼, 장례식에서 음란한 행위를 벌이는 것, 신체 상해, 일부다처제 및 기타 이교 관습은 철저히 배격되었고, 이를 행한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또한 주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아르메니아어로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기로 했다.
이렇듯 아르메니아는 평온을 누리며 국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나, 아르사케스 2세가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한 것에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주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 토지를 빼앗았다. 또한 귀족들에게 철저한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했다. 그리고 카고빗 지방의 아르샤카반 시를 건설해 상업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는 이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포고문을 발표해 이 도시에 들어가는 자는 세금을 몇년간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주변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밀려들면서, 토지를 운영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358년, 네르세스는 왕에게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귀족들과 음모를 꾸몄다. 그는 왕이 부재한 틈을 타 아르샤카반 시로 쳐들어가서 그곳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3만에서 4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아르사케스는 이 소식을 듣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네르세스 일당과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고, 결국 왕은 신하의 권리를 존중하고 신하는 왕을 충실히 섬기기로 하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은 뒤 학살을 자행한 신하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또한 359년 티그라네스 7세의 또다른 아들 그넬이 반란을 꾀한다는 말을 믿고 그를 죽인 뒤 그넬의 아내 프란쳄(Phrantzem)을 아내로 삼았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에서 분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359년 샤푸르 2세의 10만 대군이 아마다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손실한 끝에 가까스로 함락시키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이사리아로 진군해 페르시아군이 더이상 침입하는 걸 막았다. 그 후 아르사케스 2세를 불러 아르메니아를 협공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로마의 공세는 서방의 부제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중단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토벌하려고 서진하다가 361년 11월 3일 킬리키아에서 사망했다. 이후 단독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363년 동방 원정을 단행하여 크테시폰까지 몰아붙였지만, 샤푸르 2세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도중에 적군이 내던진 창에 배를 찔러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며칠 만에 사망했다.
율리아누스 사후 황위에 오른 요비아누스는 샤푸르 2세에게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샤푸르 2세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일찍이 로마 제국이 뜯어간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사산 왕조의 영도하에 있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요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뒤 귀국길에 올랐다가 몇 달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샤푸르 2세는 6만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이때 메루즈한 아르츠쿠니, 바한 마미코니안 등 몇몇 아르메니아 장수들이 사산 왕조에 투항했고, 사산 왕조군은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하고 아르자네, 잉길리네, 므주르, 소펜 및 아킬리세네를 잇따라 함락한 뒤 아르샤쿠니 왕조의 역대 군주 영묘를 파헤치고 유해를 페르시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바삭 마미코니안은 아라랏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과 반역자들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성채와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해 사산 왕조군의 만행을 되갚았다. 그 후 사산 왕조는 4년간 아르메니아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정복하지 못했다. 이에 샤푸르 2세는 아스사케스 2세에게 평화 협약을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강대국인 사산 왕조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점점 더 많은 관료들이 사산 왕조 쪽으로 넘어가는 것에 부담을 느낀 아르사케스 2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367년 그와 바삭 마미코니안이 티즈본에 도착했을 때, 사산 왕조군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실명형에 처해졌고, 바삭 마미코니안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샤푸르 2세는 아르메니아의 주요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페르시아로 압송했으며, 기독교를 버리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자신에게 협조한 메루즈한 아르츠쿠니와 바한 마미코니안을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삼았다.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대체되었고, 기독교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조국이 무너지고 두 눈이 멀어버린 것에 심히 절망한 아르사케스는 369년 또는 370년 티그라네스 7세와 자신의 밑에서 관료로 일했던 아르메니아인 환관 드라스타마트가 감옥에 찾아왔을 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앗고 가슴에 꽂아 자살했다. 드라스타마트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아르사케스 2세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은 뒤 자신도 스스로 찔러 죽었다.
한편, 아르사케스 2세의 아내 프란쳄과 아들 파파스는 아르토게르사 요새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항전했다. 사산 왕조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데다 지형이 매우 험준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식량이 궁핍해지자, 프란쳄은 아들에게 로마 제국에 가서 원군을 청하라고 지시했다. 파파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포위망을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발렌스 황제에게 원병을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구원병을 쉽사리 보내지 못했다. 그러던 369년 초, 아르토게르사 요새가 2년간의 항전 끝에 끝내 함락되었다. 프란쳄은 페르시아 궁전으로 끌려간 뒤 적군 장병들에게 윤간당한 후 피살되었다.
370년, 고트족과 평화 협약을 맺어 다른 곳으로 군대를 돌릴 수 있게 된 발렌스 황제는 휘하 장군인 아인타이우스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해 파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에 즉위하게 했다. 아인타이우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영내로 들어오자, 메루즈한 아르츠쿠니와 바한 마미코니안의 폭정으로 고통받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봉기했다. 바한 마미코니안은 아들 삼벨 마미코니안에게 피살되었고, 메루즈한 아르츠쿠니는 페르시아로 피신했다. 파파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샤푸르 2세가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그는 로마로 재차 망명했다.
이후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에 돌아온 그는 371년 봄 테렌티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과 합세했다. 이후 로마-아르메니아 연합군은 사산 왕조와 반역자 메루즈한의 적군을 상대로 바가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메르주한은 슴바트 바그라투니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샤푸르 2세가 페르시아 동쪽 국경 지대를 침략한 이민족들을 막으러 바쁜 덕분에 전쟁이 몇년간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 왕위를 확고히 한 그는 국내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당시 아르메니아의 많은 토지가 수도원에 넘어갔고, 많은 처녀가 결혼을 거부하고 수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인구 증가율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부여된 거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군대에 분배하고 처녀들이 수녀가 되는 것에 제약을 두었다. 이에 총대주교 네르세스가 반발하자, 그는 네르세스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372년, 그는 네르세스를 잔치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네르세스는 중독 증세를 보이다 결국 사망했다. 그 후 파파스는 수녀원을 폐쇄하고 그곳에 있던 수녀들을 강제 결혼시키고 수도자들을 군대에 복무시켰다. 또한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를 몰수해서 국고에 충당했다.
한편, 네르세스의 뒤를 이어 총대주교가 된 샤하크는 파파스의 명령에 따라 카이사리야로 가서 서품을 받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아르메니아 주교들의 의해 서품받았다. 로마 측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파파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티그라네스 2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9만에 달하는 장정을 징집하여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수행케 한 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아르메니아 귀족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분열되었던 아르메니아 고원을 평정했다. 여기에 에데사를 포함한 로마인이 거주하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등 고압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파파스의 행보에 불안감을 품은 발렌스는 아르메니아에 주둔 중인 로마 수비대 사령관 테렌티우스에게 파파스를 암살하라고 명령했다. 374년 테렌티우스가 사산 왕조에 대항하는 원정에 관해 논의할 게 있으니 타르수스로 와달라고 청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음모를 눈치채고 도주하여 추격병을 뿌리치고 아르메니아에 복귀했다. 그러나 테렌티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음모를 이어갔고, 결국 파파스는 374년 또는 375년에 테렌티우스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피살되었다.
파파스의 뒤를 이어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른 바라다테스는 유모 밧 사하루니가 아르메니아 총사령관 무셰흐 마미코니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모함을 믿고 연회를 열어서 무셰흐를 초대한 뒤 암살자를 시켜 죽여버렸고, 밧 사하루니는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군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미코니안 씨족은 바라다테스와 밧 사하루니를 적대했다. 그러다 378년 8월 9일 바라다테스를 옹립했던 발렌스 황제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군에게 완패하고 전사했다. 마누엘 마미코니안 장군은 이 때를 틈타 379년 정변를 일으켜 밧 사하루니를 살해하고 바라다테스를 몰아낸 뒤 파파스의 두 아들 아르사케스 3세와 볼로가세스 3세를 공동 왕으로 옹립했다. 명목상으로는 두 왕의 어머니 자르만두흐트가 섭정을 맡았지만,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전권을 쥐었다.
마누엘은 로마 제국이 자기들이 세운 군주 바라다테스를 축출한 것에 분노하여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사산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샤한샤 아르다시르 2세는 기꺼이 원군을 보내주고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누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수비대를 적대시했고, 급기야 1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몰살했다.
아르다시르는 이에 격분하여 구마드 샤푸르(Gumand Shapuh) 휘하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르메니아를 침략하게 하였지만, 마누엘은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구마드 샤푸르를 죽였다. 바라즈가 이끄는 또다른 페르시아군이 투입되었으나, 마누엘은 이 역시 무찌르고 바라즈도 죽였다. 아르다시르는 포기하지 않고 마카한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을 공략했지만 곧 마누엘의 반격으로 참패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7년간 사산 왕조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2.7. 아르메니아 분할과 멸망
386년 사산 왕조의 침략을 연이어 격파한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사망했고 뒤이어 볼로가세스 3세도 사망했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아르사케스 3세에 충성하길 거부하고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푸르 3세는 군대를 파견해 아르메니아의 대다수 영역을 확보하고 호스로프 4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누이인 수르반두흐트(Zurvandukht)와 호스로프 4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아르사케스 3세는 서쪽으로 후퇴한 뒤 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동방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의 참칭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보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사산 왕조에 협상을 제안했다. 사산 왕조 역시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협상에 응했다.387년,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는 아킬리시네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로마는 아르메니아의 서쪽 일부를 할양받고, 나머지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가져가지만 완전히 합병하지는 않고 자치상태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는 이 조약 이후로 종전의 속국이나 번국 정도에서 자치령 정도로 격하되어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종속의 정도가 더욱 강해졌으며 아르샤쿠니 왕조의 권위는 떨어졌다. 또한 로마는 500파운드 가량의 금을 이란에 지불하기로 하였고, 이베리아에 대한 사산 왕조의 영도권을 인정하였다. 아르사케스 3세는 이 협정에 불만을 품고 호스로프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로마로부터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90년 사망한 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영토 마저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한편, 호스로프 4세는 사산 왕조의 꼭두각시로 남는 걸 원하지 않았고, 장차 독립하여 진정한 국왕으로 거듭나고 싶어했다. 왕위에 오른 첫해에 전 총대주교 네르세스의 아들인 사하크를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로 임명했고, 387년 훗날 아르메니아 문자를 고안한 메스로프 마슈토츠를 왕실 비서로 임명했다. 또한 많은 귀족을 이전의 고귀한 지위로 회복시키는 등 세력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392년 사산 왕조 샤한샤 바흐람 4세가 허락을 받지 않고 총대주교를 선임한 책임을 물어 그를 폐위시키고 브람샤푸흐를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선임했다. 그는 크테시폰 궁궐 내 감옥에 수감된 뒤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414년 동생이 사망한 후에야 풀려났고 415년에 사망했다.
브람샤푸흐는 전왕 때 왕실 비서로 고용된 메스로프 마슈토츠를 중용했고, 그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고안하는 걸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페르시아의 언어학자들을 초빙해 마슈토츠를 돕게 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아르메니아 문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살아남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특히 성경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확실히 익히고 외세의 모진 박해에도 꿋꿋이 버티게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사이를 중재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양국이 평화를 구가하는데 기여했다.
414년 브람샤푸흐가 사망한 뒤, 사산 왕조는 브람샤푸흐의 아들 아르탁세스 4세가 10살밖에 안 돼서 통치가 어렵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를 직할 통치했다. 그러다 422년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바흐람 5세에게 아르탁세스 4세를 왕위에 올려달라고 간청하자, 바흐람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르사케스 4세는 곧 귀족들의 인망을 잃었다. 아르메니아 역사가 라자르 파르페치에 따르면, 성격이 조잡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귀족들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총대주교 사하크는 귀족들에게 왕을 충실히 보필하자고 호소했지만,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바흐람 5세에게 아르메니아를 직접 통치해달라고 청했다. 428년, 바흐람 5세는 아르메니아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르탁세스 4세를 폐위하고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고 네스토리우스파 시리아인인 바르 키소를 마르즈반으로 세웠다. 이리하여 아르샤쿠니 왕조는 멸망했고, 아르메니아는 사산 왕조의 영토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이후 아르샤쿠니 왕조는 방계가 다스리던 아제르비이잔의 캅카스 알바니아에서 더 생존하다가 523년을 전후하여 단절되면서 미흐라니안 왕조로 대체되며 단절된다.
3. 역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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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왕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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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왕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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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투르케스 | 악시다레스 | 파르타마시리스 | 볼로가세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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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코로스 | 볼로가세스 2세 | 호스로프 1세 | 티리다테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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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로프 2세 | 티리다테스 3세 | 호스로프 3세 | 티그라네스 7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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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아르사케스 2세 | 파파스 | 바라다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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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로프 4세 | 브람샤푸흐 | 아르탁세스 4세 | - | }}}}}}}}}}}} |
- 1대: 보노네스 1세
- 폰토스 왕국: 아르탁세스 3세
- 2대: 아르사케스 1세
- 파르나바지드 왕조: 미트리다테스
- 3대: 오로데스
- 파르나바지드 왕조: 미트리다테스
- 파르나바지드 왕조: 라다미스투스
- 4대: 티리다테스 1세(트르다트 1세)
- 헤로데 왕조: 티그라네스 6세
- 4대: 티리다테스 1세(트르다트 1세)
- 5대: 사나투르케스(사나투르크)
- 6대: 악시다레스(아슈카다르)
- 7대: 파르타마시리스(파르타마시르)
- 로마 제국 속주: 트라야누스
- 8대: 볼로가세스 1세(바가르시 1세)
- 에메사 왕조: 소헤모스
- 9대: 파코로스(바쿠르)
- 에메사 왕조: 소헤모스
- 10대: 볼로가세스 2세(바가르시 2세)
- 11대: 호스로프 1세
- 12대: 티리다테스 2세(트르다트 2세)
- 13대: 호스로프 2세
- 사산 왕조: 호르미즈드 1세
- 사산 왕조: 나르세스 1세
- 14대: 티리다테스 3세(트르다트 3세)
- 15대: 호스로프 3세
- 16대: 티그라네스 7세(티그란 7세)
- 17대: 아르사케스 2세(아르사크 2세)
- 사산 왕조 속주: 샤푸르 2세
- 18대: 파파스(파프)
- 19대: 바라다테스(바라즈다트)
- 20대: 아르사케스 3세(아르사크 3세)와 볼로가세스 3세(바가르시 3세)의 공동 통치
- 21대: 호스로프 4세
- 22대: 브람샤푸흐
- 사산 왕조: 샤푸르 4세
- 23대: 아르탁세스 4세(아르타세스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