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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2:32:56

우마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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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8대 칼리파
عمر بن عبد العزيز | 우마르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
제호 한국어 우마르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
아랍어 عمر بن عبد العزيز
영어 Umar ibn Abd al-Aziz
출생 680년 11월 2일
사망 720년 2월 5일 (향년 39세)
존호 칼리파
재위 기간 717년 9월 24일 ~ 720년 2월 5일

1. 개요2. 생애3. 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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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8대 칼리파. 흐트러진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고 이슬람 신앙이 현지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했다.

2. 생애

680년 11월 2일 메디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마르완은 쿠바이시 부족의 우마이야 씨족 출신이며, 어머니 움 아심 빈트 아심은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손녀였다. 684년 가족과 함께 메디나에서 반 우마이야 세력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시리아로 이주했다. 685년 이집트를 탈환한 마르완 1세는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마르완을 이집트의 총독으로 세웠다. 그 후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냈다. 그는 이슬람교의 교리에 충실히 따랐다. 우마이야 왕조가 메디나를 탈환한 뒤 메디나로 돌아와서 하디스를 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검약한 삶을 살았다.

705년 아버지 마르완이 20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사망한 후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다마스쿠스로 불려와서 아브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한 뒤 메디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메카에서 매년 열리는 순례 행렬을 철저하게 경호했고, 메디나의 이슬람 법학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학자들의 공개 비판을 용인했다. 707년 왈리드 1세의 지시에 따라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를 재건하고 확장했다. 히자즈는 그의 관대한 통치 하에서 왈리드 1세의 신임을 받고 동방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알 하지 이븐 유수프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망명한 정치 및 종교 인사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알 하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왈리드 1세에게 읍소했고, 결국 712년 총독 직에서 해임되었다.

비록 해임되었지만, 그는 왈리드 1세의 총애를 여전히 받았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왈리드의 궁정에 머물렀으며, 715년 왈리드 1세가 사망했을 때 장례 기도를 드렸다. 뒤이어 칼리파가 된 술라이만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와 함께 주요 고문으로 삼았다. 716년 술라이만이 메카로 순례할 때 동행했으며, 717년 술라이만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르는 원정군을 지휘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의 다비크에 있을 때도 동행했다.

717년 9월 24일, 술라이만은 중병에 걸렸다. 술라이만은 전에 장남 아이유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아이유브는 717년 초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또다른 아들 다우드를 지명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는 다우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싸우고 있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그러면서 사촌이자 칼리파의 조언자인 우마르가 인격과 능력이 뛰어나고 신실한 무슬림이라며 그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술라이만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혹여 자신의 형제들과 우마르 간의 분란이 생길 걸 우려해 형제 야지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를 우마르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하여 우마르는 우마르 2세로서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그는 즉위식에서 민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아, 백성이여! 나는 칼리파의 책임을 떠맡길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 떠맡겨졌다.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을 칼리파로 추천한다면, 나는 즉시 물러날 것이며 너희의 결정을 지지하겠다."

하지만 민중은 한 목소리로 그 외에는 다른 적임자가 없다며 칼리파로 추천했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궁정에 도입했다. 하인, 노예, 하녀, 말, 황금 예복, 토지 소유지를 국고에 반납하고,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피다크의 정원[1]을 공동체에 환원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족들은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지에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고 상인들에게 그들의 상품을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다. 또한 각지의 관리들은 백성으로부터 뜯어낸 돈을 고스란히 바치면서 답례로 금과 은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러한 관행을 금기시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질서를 바로잡았다.

한편, 우마이야 관리들은 피정복민인 마왈리를 학대했다. 마왈리의 재산은 종종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몰수당했다. 게다가 본래 개종하면 내지 않아야 하는 지즈야를 계속 납부해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관행 역시 금지했다. 마왈리의 재산을 불법으로 몰수한 자를 엄히 처벌했으며, 개종한 마왈리는 지즈야를 납부하지 않게 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민중이 호응하면서, 악화 일로를 걷던 민심이 호전되었다. 또한 그는 중국과 티베트에 사신을 보내 그곳의 통치자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했으며, 이슬람 제국 치하의 현지 주민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선교 활동을 충실히 수행했다. 관리들이 개종 때문에 지즈야 수입이 급격히 감소한다며 불평하자,[2]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능한 한 많은 이가 무슬림이 되어야 하오. 그저 세금 징수원이 되려 하지 마시오."

우마르는 이슬람교의 저명한 학자들인 무함마드 빈 카브와 마이문 빈 메흐란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교사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대중에게 경건함, 끈기, 사업 윤리, 청렴 등을 가르쳤다. 음주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공공 장소에서 알몸을 드러내지 말고, 남녀가 혼욕하는 것 역시 금지했고, 자카트(자선용 세금)의 공정한 처분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란, 호라산, 북아프리카에서 운하, 도로, 여행자들을 위한 휴계소, 의료소를 건설하는 등 광범위한 공공 사업을 수행했다. 그는 쿠란을 아랍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한 최초의 칼리파이기도 했다. 718년, 그는 신드의 라자의 요청에 따라 쿠란을 고대 신드어로 번역하여 라자에게 보냈다.

그는 무슬림 사이의 정치적, 종교적 차이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금요일 설교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모욕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쿠란의 다음 구절을 읽도록 명령했다.
하나님은 너희에게 정의를 실천하라고 명령하셨다. 너희의 친척을 돕기를 즐기며, 외설, 악 또는 억압을 금지하여 너희가 그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라.
쿠란, 16장 90절.

그는 시아파 카와리즈파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카와리즈파 지도자 보스탐에게 서신을 보내 우스만과 알리의 칼리파 시대에 대한 공개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보스탐이 자신을 설득하면 기꺼이 회개하고 방식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에 보스탐은 사절 두 명을 보냈다. 이후 벌어진 토론에서 사절 한 명은 그가 옳다는 걸 받아들이고 카와리즈파를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사람을 박해하지 않고 본거지로 돌아가게 했다.

우마르는 전 칼리프 술라이만이 시작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718년 여름 안티오키아와 말라티아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후속 부대를 보내 원정군의 철수를 용이하게 했다. 이후에도 지하드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고자 동로마 제국의 국경 지대에 대한 연례 여름 습격을 계속했으며, 북부 시리아의 쿠나시라 영지에 거주하면서 여러 요새를 짓게 했다. 한편, 이븐 하팀 이븐 알 누만 알 바힐리 휘하의 군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파견해 그 일대에 피해를 끼치던 투르크인들을 물리치게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의 확장 역시 중단했지만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에 요새를 세워서 외적의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군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도시 나르본을 정복하고 요새화하기도 했다.

720년 2월, 우마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알레포 또는 쿠나시라 영지로 돌아가던 중 병에 걸렸다. 그는 720년 2월 5일에 마아라트 알 누만 인근의 다이르 시만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묻혔다. 사후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야지드 2세가 칼리파에 등극했다.

3. 후대의 평가

우마르는 이슬람 사료에서 진정으로 경건하며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 알 만수르는 우마이야 왕가의 무덤을 파괴하고 시체를 난도질했지만[3][4], 우마르 2세만큼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며 남겨 뒀다. 이후 바그다드의 역사가와 율법 학자들은 우마이야 칼리파들을 찬탈자로 간주했지만 그만은 정통 칼리파로 인정했다.


[1] 예언자 무함마드가 소유한 야자수 숲으로, 무함마드는 딸 파티마가 자기에게 유산으로 물려달라는 요구에 "내가 소유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의 사유지가 되었다. [2] 실제로 개종한 마왈리에게서 더 이상 지즈야를 걷지 않는 대신 마왈리 출신들의 땅을 국유화해서 나온 세금으로 어느 정도 정부 세수를 벌충했는데도 국방비가 줄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는 했다. [3] 사실 아무리 역성혁명 상황이라지만, 우마이야 왕족에 대한 숙청뿐만이 아니라 무덤까지 파괴할 정도로 가혹하게 대우한 건 우마이야 왕조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면은 있다. 분명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제일주의는 실책이 맞긴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 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 왔던 아랍인 제일주의 정책을 뒤집는 파격적인 개혁은 우마이야 칼리파들 중에서도 유달리 검소했던 우마르 2세 정도는 되야 시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무덤까지 파괴된 건 아랍인 우월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말도 되지만. [4] 물론 세속적 관점으로 보면 억울하다는 것이지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말은 된다. 애초에 아바스조가 반기를 들며 명분으로 든 것이 차별이니 뭐니 하는게 아니라 우마이야 조가 칼리프에 앉아있을 자격이 있냐는 정통성 프레임이었다. 아바스조의 논리대로라면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들은 모두 일개 찬탈자들일 뿐이고 따라서 찬탈자들의 왕릉을 파괴하고 시체를 난도질하는건 죄가 아니라 찬탈자들에 대한 응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