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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2:39:40

야지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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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12대 칼리파
يزيد بن الوليد بن عبد الملك | 야지드 이븐 알 왈리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제호 한국어 야지드 이븐 알 왈리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아랍어 يزيد بن الوليد بن عبد الملك
영어 Yazīd ibn al-Walīd ibn ʿAbd al-Malik
출생 701년
사망 744년 10월 4일 (향년 43세)
존호 칼리파
재위 기간 744년 4월 17일 ~ 744년 10월 4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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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12대 칼리파.

2. 생애

701년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왈리드 1세이고, 어머니는 이란 출신의 첩 샤이 아프리드(Shah-i-Afrid)였다. 이슬람 역사가 알 타바리는 그가 모계를 통해 호스로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고 기술했다.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났고, 친동생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와 함께 조용히 살았다. 어머니가 이란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그는 이슬람 교리대로만 생활해야 한다고 믿은 아랍 신학자들과 거리를 두고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무타질라 학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 때문에 후대 이슬람 학자들로부터 이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744년 4월 17일, 칼리파 왈리드 2세가 마르완 이븐 무하마드의 정변으로 피살되었다. 그 후 그가 마르완의 추대를 받고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그러나 찬탈 방식으로 등극했기에 인심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왈리드 2세의 급여 인상을 취소해 "안 나퀴스(an-Naqis: 감소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힘스 주민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통치자 알 압바스 이븐 알 왈리드를 축출하고 주변 도시들에 편지를 보내 왈리드 2세의 아들 중 장남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며, 그들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면 슈라를 소집해 가장 가치 있는 자를 선택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힘스의 소요를 전해듣고 사절을 보내 그들과 상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나서서 우리는 오직 왈리드 2세의 아들들만 따를 거라고 외쳤다. 사절은 이에 격분하여 그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요! 당신은 진실로 틀렸고 당신의 마음은 이성을 상실했소! 결국,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당신 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고아에게 재산을 주는 것만큼 용납될 수 없소!"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양측은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아미르 부족으로 구성된 아랍 분견대를 후바린으로 보내고 2개의 분견대에게 다마스쿠스 북쪽의 두개 통로를 요새화하게 했다. 또한 술라이만 이븐 히샴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술라이만은 지난날 왈리드 2세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채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왈리드 2세의 추종자들과 절대로 화해할 생각이 없었다. 술라이만은 힘스에서 다마스쿠스까지 가는 주요 도로인 아즈르 근처로 진군했다. 힘스인들은 이에 맞서 민병대를 결성해 공격에 대비했다. 이때 지휘관 마르완이 적군이 힘스에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의 경쟁자인 울 슈미트가 외쳤다.
"알라에게 맹세하노니, 이 자는 우리 모두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내부의 적이다!"

그러자 병사들이 분노하여 마르완을 공격해 마르완과 아들을 모두 죽였고, 두 사람의 머리는 창끝에 꽂혔다. 이후 아부 무하마드 알 수피안이 지휘하는 힘스군이 다마스쿠스로 진군하며 술라이만에게 "지금 있는 곳에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가 곧 너희를 맞으러 가겠다."라고 전했다. 양군은 아즈라에서 맞붙었다. 전투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 압달아지즈 분견대가 힘스 진영으로 침입해 진영 안에 있던 적병들을 모조리 죽인 뒤 적군의 후방으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힘스인들은 무차별 학살당하다가 야지드 이븐 칼리드 이븐 압달말리크 알 카스리가 중단시킨 덕분에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술라이만의 무자비한 학살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을 야기해서, 술라이만을 따르던 바누 자크완과 바누 아미르가 충돌할 뻔하기도 했다. 그 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야지드 3세 앞으로 끌려와 충성을 맹세했고, 야지드 3세는 지휘관들에게 돈을 주고 힘스로 돌아가게 했지만, 대다수 반란군은 다른 반란군의 진압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다.

내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왈리드 2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명망높은 이슬람 학자를 칼리파로 세우려 했다가 힘스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단했다. 다만 우르둔은 야지드를 인정할 수 없다며 버텼으나 술라이만의 군대가 주변 영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자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항복했다. 744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카와리즈파가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모술을 포위하여 주민들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받은 뒤 쿠르디스탄 산악 지대의 샤라주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농성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마르완 2세는 왈리드 2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야지라로 이동한 뒤 살해당한 칼리프의 원수를 갚겠다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군대 내에 있던 예멘인들은 시리아인들과 맞서기 싫어 밤중에 진영을 떠났다. 그러다가 야지드 3세로부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야지라 등 3개 주의 총독 직을 한꺼번에 주겠다는 제안을 담긴 편지를 받자, 마르완은 마음을 바꿔 야지드 3세에 충성을 맹세했다.

호라산의 상황 역시 총독 나스르 아븐 사야르의 가혹한 지즈야 수탈로 인해 민심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봉급을 갈취하고 예멘인들에겐 아예 지급하지 않는 조치로 인해 군심마저 흔들렸다. 이때 예멘인의 우두머리 유다야 이븐 알리 알 키르마니가 예멘 병사들의 대표로서 나스르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나스르의 북부 아랍인 측근들은 유다야를 당장 체포해 처형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상황이 너무 악화될 것을 우려해 거절하고 단지 메르브 성채에 가두었다. 하지만 유다야는 20일만에 탈출한 뒤 호라산에 은신하던 카라리즈파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아트로파테네에서도 야지드 3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발발했다.

이렇듯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하고 있던 744년 10월 4일, 야지드 3세는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에게 칼리파 직위를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얼마 후 마르완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이브라힘을 몰아내고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