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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03 20:36:02

쿠세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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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쿠세이르 이집트.jpg
해변 풍경
파일:쿠세이르 이집트 7.jpg
오스만 제국기에 지어진 쿠세이르 성채에서 내려다 본 구시가지

1. 개요2. 역사
2.1. 미오스 호르모스2.2. 중세2.3.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2.4. 19세기 전반의 번영2.5. 19세기 후반의 쇠락2.6. 20세기의 부흥
3. 갤러리
3.1. 쿠세이르 성채
4. 참고문헌


아랍어: القصير
영어: El Qoseir

1. 개요

이집트 동부 홍해 주의 도시. 사파가에서 남쪽으로 50km, 퀴나에서 동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후르가다, 샤름엘셰이크, 사파가와 함께 이집트 동부의 주요 휴양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약 4만명이다. 지명은 아랍어로 '짧은'이란 의미인 카시르 (قصير)에서 유래되었는데, 나일 강 유역에서 홍해까지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지명은 미오스 호르모스로, 과거부터 와디 함마메트를 따라 상이집트의 키프트와 홍해 연안을 잇는 대상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시가지는 작은 만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옛 도시는 북쪽 엘구나 (쿠세이르 엘카딤)에 위치했는데, 16세기의 재건 시에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19세기 초반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후원으로 쿠세이르는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 수에즈 운하의 개통 전까지 쿠세이르는 지중해권에서 히자즈 인도로 향하는 경유지로 번영하였다. 20세기에는 서쪽 산지에서 생산되는 화학비료의 원료인 인산염을 수출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조용한 휴양 도시로 변모하였다. 산호초와 각종 해양 생물을 볼 수 있는 해변 외에도 이집트 동부 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쿠세이르 구도심에는 옛 오스만 시절 성채와 모스크 등의 볼거리가 있다. 남쪽 60km 지점에 2003년 개업한 마르사 알람 국제공항이 있다. 이름은 마르사 알람 공항이지만 실제로는 쿠세이르와 마르사 알람 사이의 포트 갈립에 위치해 있다.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직항편이 있다. 주민들은 갈색 피부의 상이집트인과 검은 피부의 아다바 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자는 주로 선원으로 근무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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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토스 ( 키프트) ~ 미오스 호르모스 간 와디 함마메트 도로
파일:쿠세이르 유적 이집트 2.jpg
미오스 호르모스 유적

기원전 3천년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고대부터 와디 함마메트를 통해 이집트 주요부와 홍해를 이어주는 무역 도시였고, 인근 알 푸아키르 금광 덕에 각광을 받았다. 이집트 신왕국 하트셉수트가 기원전 1494년 푼트 (현 에리트레아 ~ 소말리아) 원정을 명했을 때에는 그 거점으로써 5척의 함대가 건조되어 2백명의 선원과 함께 출정하였다. 원정 함대는 이듬해 상아, 호박, 유향 등의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 이야기는 룩소르의 신전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시기 지명은 타우였다가 다우로 변하였다. 기원전 600년경 페니키아 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탐사했을 때에도 기항지로 쓰였던 것으로 추저된다. 다만 이후 혼란기에 방치되었던 도시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 '쥐들의 거처'란 의미인 미오스 호르모스 (Μυὸς Ὅρμος)로 재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북쪽의 필로테라 (사파가), 남쪽의 아이다브와 함께 홍해-인도양 무역의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2.1. 미오스 호르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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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와디 함마메트 노상의 요새들

기원전 2세기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쇠퇴와 함께 침체되었던 미오스 호르모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령이 된 후 인더스 강 하류와 구자라트, 말라바르 해안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며 발전하였다.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매년 120척에 달하는 상선이 인도로 출항했다고 한다. 서기 1세기 티베리우스의 치세에는 와디 함마메트에 로마 가도가 놓여 이집트 중심부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미오스 호르모스에서는 자기와 '노래하는 소년들'을 포함한 노예, 포도주 및 각종 귀금속을 인도와 동아프리카에 수출하였다. 그리고 비단, 향신료, 석재 등을 수입하였고, 이들은 6일 간의 낙타 운송을 통해 콥토스 (키프트)로 옮겼다. 콥토스와 미오스 호르모스 사이에는 포니콘, 페르수 등의 우물과 이집트 총독 마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유래된 막시미아논과 크로코딜로 등의 요새가 세워져 여정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파일:쿠세이르 이집트 유적 2.jpg
미오스 호르모스 유적지. 과거 주요 수출품이던 자기들의 파편이 보인다

콥토스에 모인 물품은 다시 나일 강의 수운을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였고 지중해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2세기 말엽 와디 함마메트 노선에 대한 유목 민족들의 습격이 심화되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로마 당국은 백인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하고 감시탑을 세워 빠른 대응에 나서는 등의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3세기 들어 미오스 호르모스 항은 모래의 퇴적으로 항구 기능을 상실하였고, 3세기 중반까지 와디 함마메트의 요새와 감시탑은 버려졌으며 배치되었던 병력도 철수하였다. 도시 역시 언덕 쪽으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4세기경 버려졌고, 남쪽의 베레니케가 대신 일대의 주요 항구로 기능했으나 그마저도 로마-인도간 교역이 쇠퇴한 결과 6세기에 버려졌다. 현재 미오스 호르모스 터의 지상에 남은 유적은 일부 기단부 정도이다. 다만 발굴을 통해 많은 인도와 중국 제품의 파편이 발견되었고, 근해에서는 65m의 깊은 물 속에 로마 시대 난파선 유구가 잠들어 있다.

2.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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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19세기에 지어진 쿠세이르 성채

16세기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술탄 셀림 2세는 이집트 총독 시난 파샤에게 명하여 일전에 버려진 아이다브를 대신하여 현재의 위치에 성채를 세웠다. 이로써 쿠세이르 시가지는 기존 위치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현 위치로 이전되었고, 현재 시내 중심부에는 그의 조각상이 있다. 17세기 들어 쿠세이르는 다시 이집트에서 메카로 향하는 순례객들의 경유지가 되었다. 다만 나일 강 유역에서 쿠세이르로 이어지는 와디 함마메트 길은 사막 지대라 베두인의 약탈 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평상시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다가 핫지 순례단과 같은 대규모 카라반 정도만이 지나갔다. 홍해 무역에 종사하는 얀부의 상인들 역시 순례단과 함께 왕래했다나 다시 히자즈로 돌아갔기에, 쿠세이르 도시 자체에는 상주하는 이가 적었고 가옥 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1784년에는 기근으로 인구가 줄었는데, 고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3.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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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경 프랑스 주둔군이 성채 내부에 세운 감시탑 (좌측)

1798년 여름 맘루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집트 북부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맘루크 잔당을 추격하며 상이집트로 남하하였다. 한편 맘루크 지도자 무라드 베이는 홍해 건너편의 제다와 얀부 일대의 부족들에게 '무함마드의 종교를 파괴하러 온' 한줌의 이교도에 대한 성전 동참을 청하였다. 이에 하산 베이 제다위와 1천의 히자즈 병력이 쿠세이르를 통해 상이집트로 향하였고, 맘루크 군과 함께 진군했으나 1799년 1월 삼후드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시리아 진격을 위해 수에즈에 주둔하던 나폴레옹은 그해 2월, 히자즈 병력의 추가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쿠세이르로 해군을 파견했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얼마 후 메카의 샤리프 하산이 이끄는 3천 병력이 상륙해 재차 맘루크 군과 연합했으나 3월 초엽 압누르 전투에서 벨리아르 장군의 프랑스 군에게 재차 패배하였다. 그러자 아크레에 있던 나폴레옹은 퀴나에 주둔하던 드지에 장군에게 이번에는 육상으로 쿠세이르 점령을 지시하였다.

따라서 벨리아르 장군 휘하의 프랑스 군은 사막을 횡단하여 5월 26일 쿠세이르에 당도하였고, 3일 후 성채를 장악하였다. 벨리에르는 성채에 1백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성벽을 두텁게 보강하였다. 또한 성채 내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대포를 배치했는데, 현재까지도 두 문이 남아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령 이집트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세이르 점령을 결심, 그해 8월 32척의 함대를 파견하였다. 더글러스와 폭스 전함을 중심으로 영국 해군은 성채에 3일간 무려 6천개가 넘는 포탄을 퍼부었지만 수비대는 항복하지 않았다. 다만 집중 포격으로 성문 주변의 성벽 일부가 붕괴하였다 그후 영국군은 쿠세이르의 식수원인 우물을 파괴하기 위해 두 차례나 상륙을 시도했으나 수비대가 맹렬히 대포와 머스킷을 쏘며 저항하자 후퇴하였고, 도중에 가져왔던 대포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공격이 실패하자 영국 해군은 철수하였고, 쿠세이르에는 2년간 프랑스 군이 주둔하였다.

1801년 영국군은 나일 강 하구에서 반격을 개시하며 후방 압박을 위해 5월에 재차 인도에 주둔하던 베어드 장군 휘하 6천 병력을 쿠세이르로 파견하였다. 중과부적이라 여긴 프랑스 군은 상이집트로 후퇴하였고, 영국군은 쿠세이르를 무혈 점령하였다. 그후 영국군은 10일 간의 행군 끝에 사막을 건너 퀴나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후방 압박은 6월에 카이로와 9월에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주둔군이 항복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802년 이집트 전역이 마무리 된 후 쿠세이르는 오스만 제국에게 인계되었다. 술탄 셀림 3세는 쿠세이르 성채의 보강을 지시하였다. 뒤어어 이집트의 재건을 맡은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쿠세이르 항구의 좋은 입지 조건에 기인하여 도시를 개발하였고, 1816년 9월에는 조정의 명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1차 사우디 국가에 대한 토벌에 나설 때에도 아들 이브라힘 파샤 휘하의 원정군을 쿠세이르에서 홍해를 건너 얀부에 상륙하게 하였다.

2.4. 19세기 전반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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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 지어진 관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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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내내 성지의 식량을 담당하던 구도심의 곡물 창고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조정과 맺은 협약에서 자치를 유지하는 대가로 아라비아에 곡식을 보급해주어야 했고, 오스만 술탄은 병사들의 급료와 샤리프 (무함마드 가문) 및 베두인 족장들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노상 안전을 보장하였다. 이집트에서 성지 메카 & 메디나에 제공하는 연간 곡식 (다지레)은 밀, 보리, 콩, 기름 등으로 구성되었고 18만 아르뎁 (3600만 리터)에 달하였다.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이 엄청난 양의 곡식의 집산지로 기존 순례단의 경유지이던 쿠세이르를 선정하였고, 베두인들과 조약을 맺어 와디 함마메트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물자의 이동과 교류가 활성화됨과 함께 도시에는 직접세 및 군역이 면제되었고, 따라서 주변 지역은 물론 얀부에서도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좋은 무역 도시라는 의미인 '반데르'라 불리게 된 쿠세이르는 금세 8천 인구를 확보하였고, 카이로 정부 직속인 베이 등급의 무하피즈 (총독)이 임명되었다.

카이로와 쿠세이르 사이에는 낙타를 탄 파발꾼이 5일만에 사막을 주파하며 왕래하였고, 시내에는 18명의 군인과 9명의 콥트교 성직자를 포함한 60여명의 공무원들이 배치되었다. 그들의 연봉 총합은 64 퍼스 (3만 2천 피아스터)였는데, 총독 혼자서만 16 퍼스를 챙겼다고 한다. 항구에는 돌과 나무로 지어진 방파제가 세워졌고, 해안 모래사장 일부도 매립되어 주거지 혹은 모스크 혹은 바자르의 부지가 되었다. 이집트와 아라비아 간 교역의 대부분은 쿠세이르에서 일어났고, 매년 3만의 순례자 (1만 2천은 메카행, 1만 8천은 귀국행)가 거쳐갔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숙박 시설도 여럿 생겼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도시 주변에 천막을 치고 머물렀다. 핫지 기간을 전후로 연중 9달 동안 이러한 순례 행렬이 이어지며 도시는 외부인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따라서 30개의 카페가 들어섰고, 순례 경유지에 걸맞지 않게 50명의 무희들이 있는 유흥가도 생겼다.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치세를 거치며 쿠세이르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처럼 다시 지중해와 인도양을 이어주는 무역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유럽 국가들이 희망봉을 도는 멀고 위험천만한 항해 대신에 나일 강과 와디 함마메트를 거쳐 쿠세이르에서 홍해-인도양으로 나가는 교통로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곡물 수송과 순례자 운송 외에도 한 달에 두 번 영국 국적의 인도행 증기선이 출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단거리 인도행을 택한 여러 유럽인들은 퀴나에서 5일간 낙타나 가마를 타고 쿠세이르로 향하였고, 이따금씩 영국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페르시아 외교관들이 왕래하기도 하였다. 항구에는 매달 수백척의 선박들이 왕래하였고 곡물 등의 각종 물자와 사람이 수송되었다. 이집트 정부 역시 유럽에서 건조되었고 유럽인 승조원을 지닌 8천 ~ 1만 5천톤급 선박 7척과 아랍 다우선 11척을 종종 배치했는데 이것도 부족하여 종종 민간 선박을 고용할 정도였다.

1850년 경에는 영국 회사가 인도와 이집트 간의 해저 케이블을 놓았는데 수에즈, 수아킨, 마사와, 아덴와 함께 쿠세이르 역시 경유하여 4-5명의 영국인 직원들이 상주하였다. 다만 얼마 안가 행해진 검사에서 케이블이 해저 산호석에 의해 손상된 것으로 판명되자 2년만에 해저 케이블은 거두어져 다른 곳을 지나게 되었다. 1858년에는 바다 건너편 제다에서 폭동이 벌어져 기독교도 학살이 벌어졌는데, 쿠세이르에서는 별일이 없었기에 진상 조사와 보복을 목적으로 파견된 영국 증기선이 머물기도 하였다. 그 무렵 번영의 절정을 누리던 도시에는 같은 해부터 반세기에 가까운 쇠락이 시작되게 된다. 이는 예고된 몰락이었다. 쿠세이르는 이집트의 중심인 카이로에서 멀었고, 지중해에서 나일 강과 사막을 건너는 여정 역시 번거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19세기 초부터 시나이 반도를 관통하는 최단 노선인 수에즈 일대로 관심이 주목된 상태였다.

2.5. 19세기 후반의 쇠락

파일:근대 쿠세이르 이집트.jpg
19세기의 쿠세이르

1858년, 운하 건설에 앞서 알렉산드리아 ~ 수에즈간 철도가 개통하자 순례객들을 포함한 홍해의 거의 모든 교통편과 물류가 지중해와 가까운 수에즈로 집중되었다. 카이로에서 400km 떨어진 쿠세이르 대신 100km 거리밖에 되지 않는 수에즈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 고객?을 상실한 쿠세이르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특히 사이드 파샤는 부친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쿠세이르를 선호한 것만큼 수에즈를 아껴 히자즈행 곡물의 저장고를 그로 옮겼고, 철도를 이용하려는 순례자들 역시 수에즈를 경유하게 하였다. 1860년에 이르면 핫지 철에도 오직 일단의 상이집트 출신 순례자들과 그를 따라다니는 구걸자들만이 도시에 왕래하였다. 이에 급속한 인구 유출이 벌어져 주민 수는 1500명으로 무려 80%가 넘게 격감하였고, 관리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쿠세이르의 비극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다.

쇠락이 지속되던 1863년 (부족의 해)부터 이집트에는 기근이 닥쳤고, 이듬해 국왕 이스마일 파샤는 곡물 유출을 막기 위해 관례적으로 행하던 히자즈로의 곡물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칙령이 갑작스럽게 공표되는 바람에 쿠세이르 항의 창고에는 이미 1만 1천 아르뎁의 곡물이 남아있었고, 그중 다시 나일 강을 따라 운송할 수 없는 옥수수 8천 아르뎁은 그대로 수출하고 남은 3천 아르뎁은 그대로 두어 6개월간 일대를 구휼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집트 동남부 지역의 식량 사정은 나아졌다. 하지만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긴 후 아라비아 방면 곡물 운송으로 연명하던 쿠세이르의 해운업은 그나마 남아있던 선박의 왕래마저 끊기며 완전히 붕괴되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주민들은 인근 농촌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였다. 비록 기근이 끝난 후 곡물 운송은 재개되었지만 더 이상 정부 차원이 아닌 축소된 규모였고, 떠난 인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집트의 곡물 가격은 더이상 이전처럼 낮지 않았기에 수송 단가가 올랐고, 여기에 관세가 매겨지면 인도와 이라크 등지에서 수출되는 다른 곡물과의 가격 경쟁력이 낮아졌다. 이렇게 아라비아 반도가 독점적인 수입처였던 이집트 대신 수에즈 운하를 통해 들어오는 타지역들의 곡물을 모색하게 되자 기존 이집트 곡물의 수출항이던 쿠세이르의 물류량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집트에 풍년이 들거나 기타 국가들의 곡물 가격이 오를 때에만 일시적으로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뿐이었다. 19세기 말엽 이집트 정부는 아라비아행 곡물을 단가가 오른 수에즈 대신 다시 쿠세이르에 저장하게 하며 도시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다만 쇠퇴한 곡물 수송의 경우처럼 곡물 저장 역시 과거의 13%인 2만 4천 아르뎁에 불과하였기에 큰 효과는 없었다. 저조한 경제에도 세금은 지속적으로 인상되었고, 각종 물자들이 사막로를 거쳐 운송되기에 다른 지역들보다 물의 가격 등의 물가도 말도 안되게 비쌌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의 작용으로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주민들이 속출하였고, 인구는 8백명까지 하락하였다.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쿠세이르에 머문 독일인 의사 칼 벤자민 클룬징어는 자신의 저서 '상이집트'에서 기근과 수에즈 운하가 도시에 가져온 파멸적인 영향을 언급한다. 그는 도시가 내부 불만에 휩쌓인 빈사 상태의 병자에 가까우며, 살거나 죽지도 못하지만 매년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9세기 말엽 수단의 마흐디 운동 시에 이집트 수비대가 배치된 것 외에 쿠세이르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였다. 가끔 수에즈 운하를 지나 남하하던 선박들이 보급을 위해 들리거나 이따금씩 얀부 항구로의 순례객과 곡식이 수송되는 정도가 전부였다. 도시 확장에 있어서도 1892년 셰이크 아불 하산 앗 샤즐리 영묘가 세워진 것 외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세워지는 일이 전무했고, 오히려 시가지는 항구 주변을 제외하고는 버려져 폐허로 변해갔다.

2.6. 20세기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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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엽 이탈리아 인들이 세운 성모 마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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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염을 항구로 수송하던 수레

한편 반세기 동안 쇠퇴하던 도시에도 희망이 찾아왔다. 20세기를 전후로 하여 세계적인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한 농산물 수요로 화학비료의 수요가 폭증하자, 그 원료인 인산염의 광산과 인접한 쿠세이르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1916년 이탈리아 홍해 인산염 회사가 채굴을 시작하였고, 그 수출항으로 부흥한 쿠세이르에는 인산염 창고와 가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이집트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왔기에 쿠세이르는 단번에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광산의 열기도 잠시, 인산염 부산물로 인한 오염과 가격 경쟁으로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대부분의 광산이 폐쇄되었다. 이집트 공화국 설립 이후 쿠세이르는 마르사 알람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집트 동해안에서 1만 이상 인구를 지닌 최남단 도시였고, 1975년까지 이집트 해안 경비대의 거점으로 남았다. 특히 남쪽 할라이브 분재으로 인해 21세기 이전까지는 수단 방면 국경 지대로 간주되어 긴장감이 맴돌았다.

1997년에는 아프리카 대륙을 구보로 횡단하려던 달리기 선수들이 제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침체되었던 쿠세이르는 1990년대 들어 샤름엘셰이크와 후르가다의 인파를 피해 조용하고 미개척된 바다를 즐기려는 다이버들과 피서객들이 찾아오며 관광 도시로 활성화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2000년 들어서는 할라입 지방이 확실히 이집트령이 되고 수단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안보 상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쿠세이르의 변덕스러운 운명은 식수원이 없는 홍해 항구들의 일반적인 흥망성쇠의 대표격으로, 심지어 수에즈 역시 운하가 있음에도 들쑥날쑥한 성장 과정을 보내었다. 현재에는 비록 사파가와 같은 큰 항구는 아니지만 쿠세이르에서도 인산 수출과 메카 순례객들을 수송하는 등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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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19세기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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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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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에 세워진 파란 모스크의 미나렛 (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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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 내부

3.1. 쿠세이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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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의 티켓값은 30 이집트 파운드이고,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4. 참고문헌

https://marsaalam.com/el_quseir/

https://books.openedition.org/cdf/5239

https://ar.wikipedia.org/wiki/%D9%82%D9%84%D8%B9%D8%A9_%D8%A7%D9%84%D9%82%D8%B5%D9%8A%D8%B1

https://ar.wikipedia.org/wiki/%D8%A7%D9%84%D9%82%D8%B5%D9%8A%D8%B1_(%D9%85%D8%B5%D8%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