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0왕조 제5대 파라오
람세스 6세 Ramesses VI |
||
|
||
람세스 6세의 벽화[1]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람세스 6세(Ramesses VI) | |
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40대에 사망했다)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2세기 경 (약 8년) |
||
전임자 | 람세스 5세 | |
후임자 | 람세스 7세 | |
부모 |
아버지 :
람세스 3세 어머니 : 이제트-타헴제트 |
|
배우자 | 누브케스베드 | |
자녀 | 람세스 7세, 아멘헤르켑세프, 파네펜켑트, 람세스 9세(추정), 이세트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9, 미라는 제3중간기 때 KV35로 이장되어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5대 파라오. 8년 2개월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신전이나 기념물 등에 새겨진 선대 파라오들의 이름을 지우고 제 이름을 대신 써넣어 자신이 지은 것처럼 만들거나 자신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을 세우는 데에는 매우 열심이었지만[2] 정작 외교나 내치에는 실패한 군주였다.람세스 6세 시대의 이집트는 가나안 일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아시아 쪽의 동맹국들과 봉신관계마저 청산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식민지와 동맹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던 교역품과 조공품들이 사라지니 안그래도 휘청거리던 이집트 경제는 폭삭 무너져내렸다. 한편 피람세스[3]의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상이집트 일대는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람세스 6세는 제 딸인 이세트를 아문의 여사제로 보내 이들을 감시토록 했으나 아문의 대사제인 람세스낙트가 테베를 중심으로 제 세력을 확장하는 건 막지 못했다.
2. 통치
2.1. 연이은 쇠락
람세스 6세는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고 불렸던 명군 람세스 3세의 아들이었다. 람세스 3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형제인 람세스 4세에게 돌아갔고, 람세스 4세가 죽자 그의 아들 람세스 5세가 왕위를 승계하며 람세스 6세는 또다시 밀려났다. 람세스 5세가 죽자 마침내 람세스 6세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기회만을 노리던 람세스 6세는 바로 파라오직을 쟁취하는 데에 성공하고야 만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테베를 방문해 오페트 축제를 열었고, 람세스 5세의 무덤을 짓는 인부들을 위로했다. 또한 자신의 딸인 이세트를 테베 카르나크 신전의 아문 대신녀로 임명해 자신을 대리해 테베 일대를 감시하도록 시켰다. 람세스 6세가 즉위 직후부터 이렇게 상이집트에 공을 들인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피람세스의 왕궁과 멀리 떨어진 상이집트는 점차 자치적인 행정구로 변해가고 있었고, 파라오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기 시작했던 것.[4] 게다가 인근 누비아 부족과 유목민들이 약화된 이집트를 침략하며 사회 분위기는 날로 흉흉해져만 가고 있었다.[5]재위 2년차 되는 해에는 선임 파라오인 람세스 5세의 무덤을 빼앗아버렸다. 람세스 5세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어느 후미진 곳에 묻어버렸고, 그를 위해 준비되었던 무덤은 람세스 6세가 대신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을 해버렸다. 물론 반발이 있었고 람세스 5세의 지지자들이 은연중에 비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람세스 6세는 그냥 밀어붙였다. 같은 해에 왕실 작업장인 데이르 엘-메디나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수를 120명에서 60명으로 대폭 줄였다.[6] 이후 데이르 엘-메디나는 규모와 질 면에서 모두 점차 하락했고 이집트 제3중간기가 시작되는 제21왕조 때, 더 이상 왕가의 계곡이 쓰이지 않게 되면서 버려졌다. 참고로 람세스 6세는 인부들의 수는 줄였지만 왕비의 계곡 등에 수많은 무덤들을 새로 신축하거나 보수하도록 시켰는데, 이는 결국 무덤 벽화나 부장품들의 질과 양을 대폭 하락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람세스 6세는 역대 파라오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자신의 조각상이나 이름을 새긴 건축물들을 짓는 데에 열심인 왕이었다. 그는 람세스 2세가 세운 거대한 신전에 자신을 묘사한 거상을 새롭게 세웠다. 워낙에 이 거상이 거대하고 화려했기에 토리노 파피루스 등에 이 조각상에 대한 언급도 나와있는데, 점토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금빛 로인클로스를 입고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로 만든 푸른 전투용 왕관을 썼고 호박금[7], 황금으로 만든 보석류들을 주렁주렁 걸친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매일 3번씩 향유와 향으로 곱게 씻길 정도로 파라오에 준하는 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매일같이 이 조각상에 대고 제사를 치렀다. 참고로 람세스 6세는 자신의 조각상에 이런 대우를 해주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8]그는 이외에도 곳곳에 자신의 입상이나 스핑크스 조각들을 세웠으며 곳곳에 자신을 본뜬 부조나 벽화들을 그리게 했다. 이같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조각이나 이름 남기기에 열을 올렸기에 람세스 6세는 제20왕조에서 람세스 3세 다음으로 많은 조각들을 남겼다.[9]
2.2. 권력 약화
람세스낙트 | 아문을 경배하는 이세트[10] |
아문 신관들이 워낙에 부유해지자 파라오는 그들에게 왕실 무덤 축조 공사에 돈을 기부하거나 신전 건립에 한손 보태라고 암묵적인 압박을 넣었다. 아문 신관들은 처음에는 이 명령을 따르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파라오의 명령을 태만하게 이행하였다. 람세스 6세가 지으라 명령한 신전과 사원들은 점차 버려졌고, 아문 신관들은 파라오의 명령보다는 제 사욕 채우기가 먼저였다. 아문 대사제 람세스낙트는 심지어 파라오의 것들보다도 거대한 무덤을 지었다. 심지어 람세스낙트는 자신의 장제전을 짓기 위하여 제17왕조,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의 신전들을 헐어 사용하는 패기를 부렸고, 이는 명백하게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였으나 안타깝게도 람세스 6세는 이를 제지할만한 힘이 없었다. 아문 대신녀 직과 아문 신의 아내에 임명된 그의 딸 이세트는 원래대로라면 아문 신관들을 견제했어야 했지만 이 두 직책은 제18왕조 때 폐지되었다가 람세스 6세가 부활시켰기에 힘도 권위도 없었다.[11] 아문의 대신녀 직은 신왕국 멸망 뒤인 제3중간기 때나 되어야 권위를 갖고 매우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
외적으로도 쇠락을 거듭했다. 람세스 6세는 가나안과 레반트 지방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모든 요새들을 빼앗기고 아시아 민족들에게 영토를 강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신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최후의 파라오였고, 후대의 파라오들은 다시는 시나이 반도와 인근 아시아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물론 가나안과 옛 아시아 일대에 대해 아예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는 꾸준하게 아시아계 소왕국과 도시들에게 교역을 하고 사절들을 보냈고, 특사를 보내기도 했다.[12] 그러나 이집트의 영향력은 이전과 비교해도 확연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아시아 지방의 이집트군 주둔지나 요새는 팔레스타인 남부나 해안 일대 극히 일부로 한정되었다. 아시아의 식민영토들이 모두 날아가버리면서 식민지에서 생산된 물품들에 크게 의존하던 이집트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안그래도 휘청거리던 이집트 경제는 이를 기점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3. 무덤
KV9의 통로 | KV9의 매장실 | 람세스 6세의 미라[13] |
참고로 KV9 무덤 공사는 의도치 않게 투탕카멘의 무덤을 숨겨주는 효과를 낳았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던 인부들은 바로 투탕카멘의 무덤 위쪽에 자신들이 거주할 마을을 지었다. 인부들이 이 위에 마을을 지으면서 설마 이 곳에 무덤이 있을까하면서 도굴꾼들의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 투탕카멘의 무덤이 1900년대까지 거의 멀쩡한 상태로[14] 남아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람세스 6세의 인부들이 지은 마을 덕분이었다. 반대로 정작 람세스 6세의 무덤은 정말 화끈하게 털려나갔다. 아무리 못해도 그가 죽은지 20년도 되지않아 KV9 무덤은 죄다 도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라는 오체분시당하고[15] 바닥에 나뒹구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람세스 6세의 미라의 참혹한 모습을 발견한 람세스 11세는 그의 미라를 다시 염했고, 제21왕조 시대에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합장했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합장된 람세스 6세의 미라는 결국 1898년 프랑스 이집트학 학자 빅토르 로렛이 발견했다. 미라를 부검한 결과 람세스 6세는 대략 40대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판명났으며, 상술한 것처럼 도굴꾼들의 만행 때문에 머리, 얼굴, 몸 곳곳이 찢어져 여러 조각으로 분리된 참혹한 상태였다. 같은 해에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람세스 6세의 무덤인 KV9를 정리했다. 이미 쓸만한 물건이나 황금 부장품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나마 람세스 6세의 미라를 안치했던 거대한 화강암 석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석관들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다가 2004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 고고학자들은 무려 250개에 달하는 석관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꿰맞추었고, 현재는 무덤 한가운데에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현재 KV9 무덤은 기나긴 입구 통로와 그 안에 새겨진 매우 화려한 부조, 벽화들 때문에 왕가의 계곡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무덤들 중 하나이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투탕카멘이 초라한 무덤에 묻혔는지 비교가 될 정도. 천장은 푸른색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벽화의 색들도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2021년 4월에는 그의 미라를 카이로 박물관에서 고대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옮겼다.
[1]
해당 그림은 람세스 6세의 무덤 KV9에 새겨진 부조를 현대에 들어 그래픽 복원한 것이다.
[2]
제20왕조에서
람세스 3세 다음으로 많은 수의 조각상들을 남겼다. 람세스 3세는 30년 넘게 통치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람세스 6세가 얼마나 조각상 세우기에 열심이었는지 짐작가능하다.
[3]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원정을 위해 지었던 신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하이집트 일대의
나일 강 삼각주에 위치해있다.
[4]
그와중에 람세스 5세의 지지자들이 람세스 6세의 왕위 계승에 반감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었다.
[5]
람세스 5세의 무덤을 짓던 인부들이 적들의 약탈을 두려워해 일시적으로 공사를 중단했다는 기록도 있다.
[6]
람세스 4세가 인부들의 수를 120명으로까지 끌어올려놓았다. 그러나 예술공들의 수가 너무 많아 지출이 막대하자 람세스 6세가 줄여버린 것.
[7]
금과 은의 합금.
[8]
당시
누비아의 고위 이집트인 관료였던 펜네(Penne)가 람세스 6세의 석상을 보살피는 데 드는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땅을 기부했다고 기록했는데, 람세스 6세는 이에 매우 만족해하며 쿠시 총독에게 펜네에게 상을 내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9]
람세스 3세는 아직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던 이집트를 무려 30년 넘게 통치했다. 그러나 람세스 6세 시대 이집트는 국력도 훨씬 약했으며, 재위기간도 9년이 채 못된다. 비교적으로 얼마나 람세스 6세가 많은 조각들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
[10]
람세스 6세의 딸로, 테베의 신관들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아문 대신녀직과 아문 신의 아내에 임명되었으나 두 직책 모두 제19왕조 때 없어졌다가 부활된지 얼마 되지 않아 힘도 권위도 부족해 실적을 낼 수 없었다.
[11]
오히려 이세트의 장제전 건설을 람세스낙트가 감독했으며, 왕의 무덤을 건설하는 인부들에게 보급품을 나누어주거나 인부들의 노동도 관리했는데 아문 대신관의 재정이 일부 들어갔기 때문이다.
[12]
그 증거로
아나톨리아의 해안이나 메기도 지방에서 람세스 6세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13]
턱과 입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아예 찢어져버린 모습으로, 파라오의 미라들 중에서도 상당히 보존 상태가 안좋은 편이다.
[14]
물론 아예 도굴이 안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파라오들의 왕릉과 비교해보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15]
미라를 싸는 붕대에는 보석류와 값비싼 장신구들이 곳곳에 끼워져 있었다. 이를 잘알던 도굴꾼들이 붕대를 푸는 과정에서 미라마저 뜯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