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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저주를 다룬 당시 신문 기사들 |
1. 개요
1922년 이집트에서 고대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팀이 하나둘씩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도시전설. '파라오의 저주'로도 알려져 있다.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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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가면 | 무덤에 걸려있던 봉인 |
그런데 하워드 카터와 그 후원자 카나본 경이 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한 이래,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의문사당하는가 하면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 투탕카멘의 저주'라 부르며 수 천년의 안식을 방해받은 파라오가 침입자들에게 내린 저주라고 수군거렸으며, 언론들도 이 '저주'를 대서특필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투탕카멘의 저주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
하워드 카터는 일꾼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천막 아래의 암반 밑에서 무덤 입구로 보이는 계단 층계 하나를 찾아냈다. 그런데 그날 밤 하워드는 작업을 마치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하인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코브라가 나타나 하워드가 기르던 애완용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평소 그 카나리아는 하워드 일행을 무덤으로 인도해줄 '황금의 새'로 불리고 있었다. 하인은 그 일을 두고 무덤을 가르쳐준 새를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1]가 잡아먹었으니, 오늘 발굴한 무덤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불길한 말을 했다. 하지만 미신을 믿지 않던 하워드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2]
2. "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는 저주의 문구가 무덤의 봉인에 히에로글리프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와 발굴팀은 동요를 막기 위해 몰래 석판을 치워버리고 작업을 계속했다.
3. 저주의 첫 희생자는 발굴팀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이었다. 발굴 당시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렸는데, 물린 곳이 심하게 부풀어 오른데다가 면도를 하다가 환부를 베는 바람에 덧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이 사망한 새벽 2시, 순간 카이로 전역에서 갑자기 5분간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같은 날에 영국에 있던 그의 애견도 구슬프게 울부짖다가 주인을 따라 숨졌다. 애견이 죽은 시간도 새벽 2시였다. 곧이어 카나번 경의 큰 아들도 죽었으며, 카나번 경의 친구는 나일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됐다.
4. 발굴에 참여했던 아서 웨이갈이 훗날 회상하기를, 카나본 경이 무덤에 들어갈 때 웃고 떠들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때 카나본 경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내 그에게 6주 간 살 시간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카나본 경은 6주 후에 죽었다.
5. 후일 투탕카멘의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왼쪽 뺨에서 다쳤다가 나은 상처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카나본 경이 모기에 물려 상처를 입은 위치도 왼쪽 뺨이었다!
6.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벽을 마지막으로 제거한 건축학자 아서 메이스가 카나번 경이 죽은 호텔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죽었으며,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왔던 방사선 의사 리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하워드 카터의 친구로서 투탕카멘의 관을 만진 미국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다음날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프랑스의 학자 조지 방디트도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죽었다. 1929년에는 하워드 카터의 개인 비서였던 리처드 베셀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리처드의 부친도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자살 전 그가 남긴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더 이상 이 공포를 견딜 수 없다. 왜 이걸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7. 1929년까지 발굴에 관여한 사람 중 11명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고, 무덤을 공개할 당시 참석했던 20명의 고고학자 및 관리, 기자들 가운데 13명이 그로부터 5년 내에 사망했다. 또 1935년에는 투탕카멘과 관련된 희생자가 21명으로 늘었으며, 이후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 중 사망자가 총 60여 명에 이르렀다.
8. 셜록 홈즈의 작가이자 저명한 유명인사 아서 코난 도일 경은 카나본 경의 죽음이 왕릉을 지키기 위해 사제들이 만든 '정령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주장은 언론에 특필되며 대중들에게 저주에 대한 공포를 심화시켰다.
9. 하워드 카터는 친구 '브루스 잉그램' 경에게 문진(文鎭)[3]을 선물했는데, 이 문진은 "내 몸을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에게 불과 물과 역병이 올 것이다"라고 적힌 풍뎅이 팔찌로 장식된 미라화된 손목과 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잉그램의 집은 불에 탔고, 다시 지은 이후에 또 홍수에 휘말렸다.
10. :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럽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미신 신봉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키지 궁전에 전시되어 있던 고대 이집트 미라를 치워버렸다. 수집가들은 가지고 있던 고대 이집트의 미라나 유물들을 대거 처분하기도 했다.
11. 1970년대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때 비행기 승무원 중 한 사람이 황금 마스크가 들어 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 카드놀이를 하면서 패가 나쁘게 들어올 때마다 상자를 걷어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황금 마스크를 호위했던 한 경찰관은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기도 했다.
2. "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는 저주의 문구가 무덤의 봉인에 히에로글리프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와 발굴팀은 동요를 막기 위해 몰래 석판을 치워버리고 작업을 계속했다.
3. 저주의 첫 희생자는 발굴팀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이었다. 발굴 당시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렸는데, 물린 곳이 심하게 부풀어 오른데다가 면도를 하다가 환부를 베는 바람에 덧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이 사망한 새벽 2시, 순간 카이로 전역에서 갑자기 5분간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같은 날에 영국에 있던 그의 애견도 구슬프게 울부짖다가 주인을 따라 숨졌다. 애견이 죽은 시간도 새벽 2시였다. 곧이어 카나번 경의 큰 아들도 죽었으며, 카나번 경의 친구는 나일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됐다.
4. 발굴에 참여했던 아서 웨이갈이 훗날 회상하기를, 카나본 경이 무덤에 들어갈 때 웃고 떠들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때 카나본 경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내 그에게 6주 간 살 시간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카나본 경은 6주 후에 죽었다.
5. 후일 투탕카멘의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왼쪽 뺨에서 다쳤다가 나은 상처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카나본 경이 모기에 물려 상처를 입은 위치도 왼쪽 뺨이었다!
6.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벽을 마지막으로 제거한 건축학자 아서 메이스가 카나번 경이 죽은 호텔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죽었으며,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왔던 방사선 의사 리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하워드 카터의 친구로서 투탕카멘의 관을 만진 미국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다음날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프랑스의 학자 조지 방디트도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죽었다. 1929년에는 하워드 카터의 개인 비서였던 리처드 베셀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리처드의 부친도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자살 전 그가 남긴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더 이상 이 공포를 견딜 수 없다. 왜 이걸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7. 1929년까지 발굴에 관여한 사람 중 11명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고, 무덤을 공개할 당시 참석했던 20명의 고고학자 및 관리, 기자들 가운데 13명이 그로부터 5년 내에 사망했다. 또 1935년에는 투탕카멘과 관련된 희생자가 21명으로 늘었으며, 이후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 중 사망자가 총 60여 명에 이르렀다.
8. 셜록 홈즈의 작가이자 저명한 유명인사 아서 코난 도일 경은 카나본 경의 죽음이 왕릉을 지키기 위해 사제들이 만든 '정령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주장은 언론에 특필되며 대중들에게 저주에 대한 공포를 심화시켰다.
9. 하워드 카터는 친구 '브루스 잉그램' 경에게 문진(文鎭)[3]을 선물했는데, 이 문진은 "내 몸을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에게 불과 물과 역병이 올 것이다"라고 적힌 풍뎅이 팔찌로 장식된 미라화된 손목과 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잉그램의 집은 불에 탔고, 다시 지은 이후에 또 홍수에 휘말렸다.
10. :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럽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미신 신봉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키지 궁전에 전시되어 있던 고대 이집트 미라를 치워버렸다. 수집가들은 가지고 있던 고대 이집트의 미라나 유물들을 대거 처분하기도 했다.
11. 1970년대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때 비행기 승무원 중 한 사람이 황금 마스크가 들어 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 카드놀이를 하면서 패가 나쁘게 들어올 때마다 상자를 걷어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황금 마스크를 호위했던 한 경찰관은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기도 했다.
3. 진실
1.
하워드 카터는 일꾼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천막 아래의 암반 밑에서 무덤 입구로 보이는 계단 층계 하나를 찾아냈다. 그런데 그날 밤 하워드는 작업을 마치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하인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코브라가 나타나 하워드가 기르던 애완용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평소 그 카나리아는 하워드 일행을 무덤으로 인도해줄 '황금의 새'로 불리고 있었다. 하인은 그 일을 두고 무덤을 가르쳐준 새를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가 잡아먹었으니, 오늘 발굴한 무덤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불길한 말을 했다. 하지만 미신을 믿지 않던 하워드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진실 -> 언론의 날조다. 하워드 카터가 애완용 카나리아를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나, 그냥 하인한테 맡긴 게 아니라 친구 미니 버튼에게 맡겼다. 미니 버튼은 이 카나리아를 잘 보관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다. 하워드 카터의 애완용 카나리아는 건강하게 잘 살다가 죽었다.2. "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는 저주의 문구가 무덤의 봉인에
히에로글리프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와 발굴팀은 동요를 막기 위해 몰래 석판을 치워버리고 작업을 계속했다.
진실 -> 이건 그냥 통째로 날조다. 저런 문구는 투탕카멘의 무덤 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애초에 저주하는 문구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저주가 부풀려지는 과정에서 창작된 문구다. 마리 코렐리라는 여자가 고대 아랍어 텍스트에서 그럴듯한 문장을 따와서 편지에 적은 뒤 언론에 투고했는데, 이 문장이 마치 실제 무덤에서 발굴된 양 와전되며 알려진 것이다.3. 저주의 첫 희생자는 발굴팀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이었다. 발굴 당시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렸는데, 물린 곳이 심하게 부풀어 오른데다가 면도를 하다가 환부를 베는 바람에 덧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이 사망한 새벽 2시, 순간
카이로 전역에서 갑자기 5분간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같은 날에
영국에 있던 그의 애견도 구슬프게 울부짖다가 주인을 따라 숨졌다. 애견이 죽은 시간도 새벽 2시였다. 곧이어 카나번 경의 큰 아들도 죽었으며, 카나번 경의 친구는 나일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됐다.
진실 -> 카나본 경은 발굴 당시에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1922년 11월에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고 최대한 빨리 와 달라며 특급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몸이 아파서 마음은 급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답장했다. 카나본 경은 몇 해나 거액을 후원하며 애타게 찾던 파라오의 무덤을 빨리 보고자 당시의 교통수준을 기준으로 대단히 빠르게, 3주 만에 이집트로 갔는데, 이때 안 그래도 나빴던 건강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 상처가 덧나 사망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게다가 이집트 고고당국으로부터 정작 그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여러 가지 원인이 겹친 상황이었기에 건강을 잃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결국 그는 그로부터 반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카나본 경이 새벽 2시에 죽었다는 것과 영국에 있던 애견이 똑같이 새벽 2시에 죽었다는 건 오히려 저주의 신빙성을 해치는 이야기다. 애초에 영국과 이집트는 시간대가 다르다. 또한 카이로에서 정전이 발생했다는 것 역시 전력 기술력이 미비한 1920년대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카이로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정전이 자주 발생하기로 악명이 높다.
카나본 경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를 받은 듯이 운이 나쁘기는 했다. 19세기만 해도 이집트 측은 발굴 기술이 없다며 유물을 찾아내면 절반 이상은 그 발굴단의 조국으로 가져가게 했었다. 게다가 이집트는 프랑스를 상대로 오벨리스크를 시계와 교환[4]했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 유물을 우습게 봤기에, 19세기에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었다면 대부분의 유물들이 지금쯤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시 이집트인들은 이슬람교와 무관한 고대 이교도의 흔적은 마음대로 하라고 할 정도로 유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이집트인들도 자국 문화재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투탕카멘의 모든 유물은 해외로 반출할 수 없었다. 카나본 경은 한때 발굴을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로 재정 상태도 안 좋았는데, 병든 상태에서 발굴 현장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이집트로 왔다가 유물은 못 가져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5]
4. 발굴에 참여했던 아서 웨이갈이 훗날 회상하기를,
카나본 경이 무덤에 들어갈 때 웃고 떠들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때 카나본 경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내 그에게 6주 간 살 시간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카나본 경은 6주 후에 죽었다.
진실 -> 아서 웨이갈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시점은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이미 널리 퍼진 시점이었다. 저주에 대한 소문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웨이갈이 언론의 입맛에 맞는 인터뷰를 해줬을 가능성이 크다.5. 후일
투탕카멘의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왼쪽 뺨에서 다쳤다가 나은 상처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카나본 경이 모기에 물려 상처를 입은 위치도 왼쪽 뺨이었다!
진실 -> 투탕카멘의 왼쪽 뺨에서 다쳤다가 자연치유된 상처가 발견된 건 맞다. 카나본 경도 왼쪽 뺨에 모기를 물린 건 맞다. 하지만 카나본 경의 시신은 이미 6개월 전에 묻혔기에 더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했다. 정확히 같은 위치에 물린거라면 모를까 그저 어렴풋하게 왼쪽 뺨에 상처를 입었다는 공통점만으로 저주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6.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벽을 마지막으로 제거한 건축학자 아서 메이스가 카나번 경이 죽은 호텔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죽었으며,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왔던 방사선 의사 리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하워드 카터의 친구로서 투탕카멘의 관을 만진 미국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다음날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프랑스의 학자 조지 방디트도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죽었다. 1929년에는 하워드 카터의 개인 비서였던 리처드 베셀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리처드의 부친도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자살 전 그가 남긴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더 이상 이 공포를 견딜 수 없다. 왜 이걸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7. 1929년까지 발굴에 관여한 사람 중 11명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고, 무덤을 공개할 당시 참석했던 20명의 고고학자 및 관리, 기자들 가운데 13명이 그로부터 5년 내에 사망했다. 또 1935년에는 투탕카멘과 관련된 희생자가 21명으로 늘었으며, 이후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 중 사망자가 총 60여 명에 이르렀다.
진실 -> 발굴 참여자 대부분은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카나본 경 말고도 발굴에 참가한 인원 일부가 연쇄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추측[6][7]이 있지만,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카나본 경과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1명이 되지만, 실제로 발굴 현장에서 일한 총원이 1,500명에 달했다는 점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7. 1929년까지 발굴에 관여한 사람 중 11명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고, 무덤을 공개할 당시 참석했던 20명의 고고학자 및 관리, 기자들 가운데 13명이 그로부터 5년 내에 사망했다. 또 1935년에는 투탕카멘과 관련된 희생자가 21명으로 늘었으며, 이후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 중 사망자가 총 60여 명에 이르렀다.
카나본 경과 운 나쁘게 사망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의 대다수는 모두 천수를 누렸다. 예컨대 발굴을 지휘했던 하워드 카터는 발굴 전까지는 평범한 고고학자였지만, 이 발굴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17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다 64살에 생을 마감했다.[8] 하워드 카터, 카나본 경과 함께 무덤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자 카나본 경의 딸이었던 레이디 에블린은 무려 78세까지 장수했다. 각주에도 언급됐듯이 투탕카멘 유물의 해외 반출을 막은 라우드는 이집트 정부에게 훈장을 수여받았다. 나머지 관련자들의 상당수 또한 이 저주가 무색하게 잘 살았다.
특히 첫 발견자 후세인 압델 라술은[9] 첫 발견자로 유명인사가 되어 훈장과 포상도 받았고, 성년기 이후로는 여관 및 식당 경영을 하면서 관광객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 일로 유복하게 살다가 2003년에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요절은 커녕 당시 이집트의 평균수명보다 30년은 더 살다 세상을 떠난, 장수를 했다. 그래서 라술 본인도 그 저주가 사실이라면 누구보다 더 먼저 무덤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져야 하는 거 아니냐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만족하며 살아왔는데 저주가 무슨 소리냐고 비웃으며 인터뷰했고. 아들인 모하메드도 투탕카멘 무덤 발굴 관련해서 부업을 하고있으니 이들 부자한테는 축복이라면 모를까 투탕카멘의 저주는 터무니 없는 웃음거리일수밖에 없다.
특히 무덤발굴팀의 총책임자 하워드 카터는 남은 평생 동안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말에 코웃음치고 살았으며 단순한 미신이라고 딱 잘라말하고 다녔다. 저주가 실재했다면 가장 먼저 죽었어야 할 사람이, 파라오의 '분노'를 대놓고 무시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20년 가까이 더 장수하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투탕카멘의 저주는 그저 한낱 미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8.
셜록 홈즈의 작가이자 저명한 유명인사
아서 코난 도일 경은 카나본 경의 죽음이 왕릉을 지키기 위해 사제들이 만든 '정령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주장은 언론에 특필되며 대중들에게 저주에 대한 공포를 심화시켰다.
진실 ->
아서 코난 도일은 말년에 심령론에 빠졌고 미신에 심취했다. 유명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 "당신의 탈출 기술이 몸을 에테르화하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거나 1922년
코팅리 요정 사건[10]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가 곤욕을 치렀다. 유명인사가 저주의 존재를 주장했다고 해서 진실인 것은 아니다.9. 하워드 카터는 친구 '브루스 잉그램' 경에게 문진(文鎭)[11]을 선물했는데, 이 문진은 "내 몸을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에게 불과 물과 역병이 올 것이다"라고 적힌 풍뎅이 팔찌로 장식된 미라화된 손목과 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잉그램의 집은 불에 탔고, 다시 지은 이후에 또 홍수에 휘말렸다.
진실 -> 이 이야기는 1925년 헨리 필드의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미 저주에 대한 괴소문이 퍼질대로 퍼진 상태에서 제3자의 입에서 나온 인터뷰이기에 신빙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저딴 불길한 문구가 새겨진 물건을, 상형문자를 해독할 줄 알았던 하워드 카터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이랍시고 줬을 리도 없다.10. :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럽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미신 신봉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키지 궁전에 전시되어 있던 고대 이집트 미라를 치워버렸다. 수집가들은 가지고 있던 고대 이집트의 미라나 유물들을 대거 처분하기도 했다.
11. 1970년대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때 비행기 승무원 중 한 사람이 황금 마스크가 들어 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 카드놀이를 하면서 패가 나쁘게 들어올 때마다 상자를 걷어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황금 마스크를 호위했던 한 경찰관은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기도 했다.
진실 -> 저주 같은 괴소문이 한번 퍼지면 아무래도 그 유물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투탕카멘의 유물들은 1922년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수십차례 해외 전시를 위해 여러 차례 옮겨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백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물 이동에 관여했다. 하지만 그 중에 불운한 일을 겪은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투탕카멘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로 겪은 불행이다. 이런 건 저주가 아니라
우연이다.11. 1970년대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때 비행기 승무원 중 한 사람이 황금 마스크가 들어 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 카드놀이를 하면서 패가 나쁘게 들어올 때마다 상자를 걷어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황금 마스크를 호위했던 한 경찰관은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기도 했다.
애초에 이미 고대 이집트부터 왕가의 계곡엔 도굴꾼들이 아예 터를 이루어 마을을 만들어 대대손손 도굴업을 할 정도였다. 무덤을 팠다고 저주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과연 이 도굴꾼들이 이렇게 무덤 근처에 대놓고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4. 저주성 문구?
"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라는 문장이 하도 유명해서 대중들이 투탕카멘의 무덤에 실제로 저런 문장이 쓰여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완벽한 날조다.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저런 문장은커녕 저주성 문구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파라오의 무덤은 저주를 걸어놓기에는 지나치게 성스러운 공간이었다.[12]마리 코렐리라는 여자가 고대 아랍어 텍스트에서 그럴듯한 문장을 따와서 편지에 적은 뒤 언론에 투고했는데, 이 문장이 마치 실제 무덤에서 발굴된 양 와전되며 알려진 것이다.[13]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한다거나 죽음의 날개가 어쩌고 하는 문구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하다못해 그와 유사한 저주성 문장 단 한 줄조차 발견된 적이 없다.
다만 무덤 침입자에 대한 저주의 문구 자체가 완전한 창작은 아니다. 특히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무덤, 특히 개인의 무덤들에서 이런 저주성 문구가 자주 발견된다. 제9왕조 시절 살았던 '안크티피'의 무덤에는 "... 이 관에 악행을 저지르는 통치자는... 헤멘(지역 신)께서 그의 봉물을 받지 않으시리라... 그리고 그의 상속자 역시 물려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저주가 쓰여있고, 제6왕조 시절의 무덤에는 "이 내 무덤에 들어가는 모든 자들에게... 불순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종말이 있을지어다... 내 그의 목을 새처럼 움켜쥘 것이요... 내 그에게 나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개개인의 무덤에 한정되며, 파라오의 무덤에서 저주성 문구가 발견된 적은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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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침입자에 대한 경고문[14] | 저주인형 | 누비아에 대한 저주 |
고왕국 시대 이후, 중왕국이나 신왕국 시대의 무덤들에서는 대체로 이런 저주성 문구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있다고 해도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나 "죽음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리라."와 같은 근사한 표현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며, 어떤 의사도 그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직설적인 위협으로 적혀 있었다. 그나마 가장 수위가 높은 것들도 센무트[15]의 무덤에서 발견된 "내 조각상을 손상시키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 시대의 왕을 따를 수 없을 것이며, 그는 무덤에 묻힐 수도 없을 것이다. 서쪽 묘지, 그의 삶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것들이지 우리가 아는 그런 '죽음의 날개' 같은 은유적이고 돌려말하는 단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저주에 심취했던 것은 맞다. 가장 유행했던 저주는 파라오의 적들의 이름을 조각상, 그릇, 벽돌 따위에 새긴 다음 부숴버리는 식의 저주였다. 고왕국 시대부터 신왕국까지 계속 치러진 유서깊은 저주 문화인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아시아권 국가들을 상대로 많이 써먹었다. 그냥 부숴버리는 것도 아니어서 부수고, 짓밟고, 찌르고, 자르고, 창으로 찌르고, 침뱉고, 상자에 넣어 불태우고, 물에 처넣어 흠뻑 적시고, 심지어는 오줌을 갈긴 다음에야 부숴버렸다. 그야말로 줄 수 있는 온갖 모욕은 다 주고나서 부숴버린 셈. 레반트와 소아시아, 중동의 여러 도시들이 이 방법으로 저주받았는데, 개중에는 예루살렘도 있었다.
5. 무덤 속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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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묘사하는 고대 이집트 무덤[16] | 실제 파라오의 무덤 |
애초에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무덤은 성스러운 공간이자 안식처였지, 도굴꾼들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테마파크가 아니었다. 무덤은 죽은 자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곳으로 지극히 신성하게 여겨졌다. 심지어 투탕카멘의 무덤에 매장된 파라오가 사냥하는 조각상에는 사냥감인 하마의 형상을 조각하지 않았다. 감히 파라오에게 맞서는 하마의 모습을 신성한 무덤 안에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 그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졌던 곳이 망자의 무덤인데, 무슨 흉악하기 짝이 없는 살상용 함정이나 무기를 그 안에 설치해두었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무덤에서 정교한 부비트랩은커녕 그 어떤 종류의 함정도 발견된 바가 없다. 이집트인들은 가짜 매장실을 만들어놓거나, 복도의 벽 뒤에 매장실을 숨기거나, 매장 직후 거대한 화강암을 굴려서 입구를 아예 봉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입구는 매장 직후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하나를 굴려서 막아놨다.[17] 어차피 도굴꾼들이 입구가 아닌 곳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는 바람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왕가의 계곡에는 가짜 복도를 파서 도굴꾼들이 매장실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단순한 차단이나 헷갈리게 만들기에 그쳤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너지는 바닥이나 굴러다니는 바위 따위는 없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할리우드에서 등장하는 그런 멋진 함정들을 설치할 때는 필수적인, 금속으로 만든 스프링, 기어, 석궁 같은 정교한 기술들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함정이 있었으면 인부들이 무덤을 만들 때 편하게 움직이기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공사 기간도 어마어마하게 늘어졌을게 뻔하다. 비밀 유지가 생명인 무덤 공사에서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방아쇠 타입의 트랩들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있다고 해도 모래와 먼지로 막히거나 삭아버려서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석궁 같은 팽팽한 활줄은 설치해봤자 며칠 만에 느슨해져서 효용을 잃었을 것이며 독을 발라놨다고 해도 몇 년 안에 독성을 잃고 분해되어 사라진다. 만에 하나 실제로 그런 함정들이 있었다고 해도, 수 천년은커녕 1~2년 안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전락했을 것이다.
다만 무덤 침입자들의 생명을 위협할만큼 위험한 경우는 있었다. 바하리야 오아시스의 무덤에서 발굴된 석관 바닥에는 적철석 가루가 8인치 가량 얇게 깔려있었다. 이걸 들이마시면 정말 고통스럽게 삶을 연명하다가 죽게 되는데, 이 적철석 가루 때문에 무덤 발굴팀은 일부러 방독면과 방호복을 갖춰입고 작업을 해야만 했다고.
6. 대중 문화에서의 투탕카멘의 저주
영화 < 미이라>[18], 부바 호텝, 만화 < 천체전사 선레드>의 카멘맨, 애니메이션 <미이라왕 투탕>, 과거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던 만화책, 웹소설 괴담 동아리, 우리나라 인형극[19]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전설이 서브컬쳐에 끼친 파급력은 헤아릴 수 없다.덧붙여 서브컬쳐의 미라 및 파라오 류의 캐릭터가 '저주' 스킬을 패시브 설정으로 지니게끔 지대한 공을 끼쳤고, 이게 미이라 시리즈를 통해 고착화된 뒤로는 이집트인 캐릭터는 죄다 괴인이나 오컬트 캐릭터로 등장하는 클리셰를 낳았다. 예를 들자면 만화 왕가의 문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초반부에는 아예 파라오의 저주를 직접 실현하고 다니는 악녀 아이시스가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
과학자 겸 소설가 이종호의 책자 "파라오의 저주"에 의하면, 이 도시전설의 유래는 카나본 경이 투탕카멘 발굴 관련 인터뷰를 특정 신문이 독점 계약한 것에 불만을 품은 다른 신문사라고 한다. 해당 신문사가 쓴 기사는 짧게 대충 쓴 기사였는데, 이게 워낙에 대박을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고, 정설처럼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마크 베이넌은 투탕카멘의 저주로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적어도 6명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게 살해당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펼쳤다.
7. 기타
- 1996년에는 이집트 박물관에서 투탕카멘 유물을 훔치려던 자들이 적발되어 구속되었다. 어떤 기자가 이들은 다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실패했다고 언급했다가, 저주라면 그들은 피를 토하고 죽었어야 하지 않냐는 경찰의 비웃음 섞인 면박을 받은 적이 있다. 엄청난 돈줄을 도둑맞을 뻔한 것에 분개한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 명으로 이들은 아직까지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다. 경비도 철통같아졌으나, 2011 이집트 혁명으로 어수선한 와중에 경비가 허술해지자 일부 유물이 도난당했다. 일부는 아직까지도 회수되지 못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또한 삼국유사 수로왕편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능인 수로왕릉 역시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 2024년 최신 연구 결과 방사능 물질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8. 관련 문서
[1]
코브라는 파라오의 이마에 장식된 신성한 동물이자 파라오의 적들을 잡아먹는 수호신이었다.
[2]
의외로 이 내용은 1922년 12월 22일자
뉴욕 타임스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3]
종이 쪽이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무거운 물건이다. 서진(書鎭)이라고도 한다.
[4]
해당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참고로 해당 시계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고장났다.
[5]
당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장 알 이븐 하지 라우드의 고집이 워낙 강했다. 참고로 그는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오귀스트 마리에뜨의 조수를 지낸 경력이 있다.
[6]
무덤에 잠들어 있던 수백년 이상 무덤에 자란
곰팡이가 세상 공기를 만나 퍼지면서 과한 양의 곰팡이들이 호흡을 통해 발굴단의 일원들을 감염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이 한때 정설로 받아들여져서 한국 TV프로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데,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생명에 위해를 끼칠 정도로 유독한 곰팡이는 이 세상에서 실존하지 않는다. 독성 물질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면
보톨리누스 정도를 꼽을 수 있지만, 그 정도면 들어가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열대
모기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추측도 있다.
[7]
사실 이집트 기후에서의 발굴업무가 그리 만만한 노동강도가 아니고 이런 환경으로 인한 건강의 악화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8]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자신도 죽을까봐 두려워서 공포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미쳐 죽었다는 썰도 있으나, 근거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9]
당시에 발굴 현장에서 일꾼들이 마실 물을 매일 항아리에 담아서 가져오는 일을 했었는데, 항아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땅에 조그만 구멍을 파다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윗부분을 발견했다.
[10]
1917년 코팅리 지방에 사는 두 소녀가 소위 "요정 사진"을 기고한 사기 사건. 후에 그 요정들은 단순히 잡지에서 오린 그림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1]
종이 쪽이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무거운 물건이다. 서진(書鎭)이라고도 한다.
[12]
파라오의 무덤에 묻힌 파라오의 사냥을 묘사한 조각상에는, 사냥감인
하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감히 파라오에게 맞서는 하마의 형상을 신성한 무덤 안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 그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졌던 곳이 파라오의 무덤인데, 대놓고 저주성 문구를 그런 신성한 곳에 적어놓을 리가 없다. 만에 하나 저주성 문구가 새겨졌다 하더라도 무덤 본관이 아닌 사람들에게 공개된 장제전이나 신전에 적어놨을 가능성이 더 크다.
[13]
마리 코렐리는 영국의 소설가로서 '뉴욕 월드' 잡지에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된 상상력 넘치는 편지를 쓴 이후 명성을 얻었다. 무덤에 침입하면 저주가 닥칠 것이라는 둥 이상한 소리들을 창작한 사람이 바로 이 여자다.
[14]
룩소르의 묘지에서 발견된 비문. 이 무덤에서 석재를 빼내가거나 함부로 옮겨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지키지 않으면 신들의 분노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15]
하트셉수트 여왕의 수석 건축가이자 왕실 고문.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는 가설도 있다.
[16]
정확히는
인디아나 존스 1에 등장하는
성궤가 묻힌 무덤이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왜곡이 대단히 심한 작품으로, 죽음의 신
아누비스를 판타지 괴물처럼 빚은 조각상이 튀어나오질 않나 수천년간 폐쇄되었던 무덤에서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코브라가 득실거리는 등 고증은 저 멀리 내던진 영화로 손꼽힌다.
[17]
공사 중에는 바윗덩어리에다가 나무 막대기를 고여놨다가, 공사가 다 끝나면 나무 막대기에 불을 붙였다. 바위를 지탱하고 있던 막대기가 타버리면 바윗덩어리가 자연스레 굴러떨어지는 방법이었다.
[18]
1932년판과 1999년판 모두 해당.
[19]
80년대
모여라 꿈동산 같은 어린이 드라마에까지 미라가 나와 발굴범들을 목 졸라 죽이는 것까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