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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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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스핑크스를 옆에서 바라본 모습. |
2. 역사
대스핑크스는 하나의 거대한 암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사막에는 끊임없는 모래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사암이 독특한 형태로 풍화되어 깎여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암석들 중 하나가 우연히 사람의 머리와 비슷한 형상이 되자,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예 기반암 전체를 깎아 거대한 스핑크스 석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아마 카프레가 이 스핑크스 석상의 주인이라고 여긴다. 가장 큰 이유는 대스핑크스를 만들 때 깎아낸 암석들을 잘라낸 벽돌들이 그대로 카프레의 장제전에 사용되었기 때문. 이는 대스핑크스와 장제전이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므로 카프레가 대스핑크스의 주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3]대스핑크스는 워낙에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이미 고대 이집트 내에서도 유명한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대스핑크스의 중요성도 점차 줄어들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닥치자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포함해 대스핑크스 역시 버려져 모래 속에 묻혀버렸다. 모래 속에 묻힌 대스핑크스가 다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500년 정도나 시간이 흐른 이집트 신왕국 시대였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어린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모래 위에서 거적을 깔고 잠을 자던 도중, 대스핑크스가 꿈에 나타나 '만일 나를 모래 속에서 꺼내준다면 너를 파라오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투트모세 4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스핑크스 주위에 쌓인 모래를 깔끔하게 치워주었고, 결국 투트모세 4세는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4]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4세는 이 이야기를 적은 '꿈의 비석'을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 세워주었다.[5]
고대 로마 시대에는 기자가 관광지로 개발되며 기자의 대스핑크스 역시 인기 많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때 이미 대스핑크스와 피라미드는 고대 유적 취급을 받았고, 로마 황제들은 순전히 흥미나 호기심 때문에[6] 대스핑크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스핑크스 주변에 높게 쌓인 모래를 치웠고 12m에 달하는 계단이 스핑크스의 앞발 앞까지 깔렸다.[7] 로마 시대에 기자를 방문한 대 플리니우스는 당시 대스핑크스를 방문한 후 느낀 자신의 소회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대스핑크스의 얼굴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대플리니우스 이후에도 대스핑크스는 여러 황제들과 로마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으나 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며 관심도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대스핑크스 근처에 건물을 세운 황제는 200년 경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였다. 로마가 완전히 몰락하자 대스핑크스는 다시 모래에 묻혔다.
스핑크스를 바라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집트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게 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딱히 지배층에게 테러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상 파괴주의가 성행했을 무렵은 이미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이슬람에게 빼앗긴 지 한참이 지난 뒤였고, ' 우상'이란 것에 훨씬 민감하게 여기는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지배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무사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냥 스핑크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이슬람 군주들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와 같은 이집트의 거대 조형물을 '옛 이집트 임금의 커다란 무덤' 정도로 생각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일부 개방적인 군주들은 선조들이 세운 것이니 뭔가 배울 게 있는 유적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대부분 군주들은 (현대의 문화재 보호와는 거리가 있지만) 나름대로 지켜주려고 하였다. 실제로 중, 근세의 극단주의자들이 이집트의 유적을 훼손하려다 발각되어 처벌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스핑크스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1800년대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나폴레옹이 직접 스핑크스를 보고 간 일도 있다.
18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현대식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비그리아 주도의 이탈리아 고고학팀이 스핑크스를 덮고 있던 모래를 파내어 대스핑크스의 가슴 부분까지 드러내도록 만들었고, 이후 조금씩 모래를 치우면서 대스핑크스는 마침내 지표면 위로 제 몸뚱아리를 드러내었다. 1857년에는 카이로 박물관의 설립자로도 유명한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펼쳐 대스핑크스의 모래 대부분을 깔끔하게 치웠다. 1886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가스통 마스페로가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서 발견한 '꿈의 비석'을 분석, 13번째 줄에 카프레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스핑크스가 아마도 제4왕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 결론내렸다.
1900년대 초의 스핑크스[8] | 전체 모습 | 얼굴 부분 |
3. 모습
얼굴 부분의 복원 추정 모습 | 수염 조각[9] |
현재 스핑크스에는 코가 없다. 학자들이 스핑크스의 얼굴 부분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코가 있었던 부분에 끌과 망치로 두드려 깨진 자국이 확연히 남아있었다고 한다.[10] 즉 자연적으로 풍화되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코를 부서 떨어뜨려버렸다는 이야기. 이집트학 학자 로버트 레너가 조사한 결과 이미 기원후 3세기에서 10세기 경 사이 즈음에 코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스핑크스의 코가 떨어져 나간 이유를 두고 온갖 잡설들이 판을 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소문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대포를 쏘아서 코를 맞혀버렸다는 것. 물론 근거는 전혀 없으며 사실도 아니다. 또다른 설에는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 신자인 맘루크들이 일부러 깨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였기에 스핑크스도 우상으로 여겨 얼굴 부분을 고의적으로 훼손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코 부분이 떼어져 나간 게 워낙에 눈에 잘 띄어서 그렇지만 사실 턱수염도 떨어져 나간 상태다. 다만 이 턱수염은 아직 남아있어서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턱수염 부분의 제작 연대와 나이를 조사한 결과 아마도 원래 스핑크스를 건설할 때는 없었고, 아마 후대의 파라오들이 따로 만들어서 붙였을 것이라고 한다. 1900년대에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것을 영국 고고학팀이 발굴하여 영국으로 가져가버렸다. 이집트 당국 측에서는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있다.
4. 기타
- 스핑크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을 바라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최고신으로 숭배하고 태양이 뜨는 동쪽을 생명의 방향이라 여겼기 때문. 일부 초고대문명설 학자들이 이 방향을 두고 '기원전 1만 500년 전 춘분에 사자자리가 뜨던 방향을 가리켰다!'고 주장했지만 묻혔다. 일단 고대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사자자리를 더 중요시했다는 근거도 없었을뿐더러[11] 굳이 그렇게 세웠다면 분명히 언급이 있을 텐데 그 어떤 문헌에서도 관련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른 한 설은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보다 2천 년 앞선 기원전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설이다. 스핑크스 근처에 있는 벽들을 보면 물이 흘러서 생긴 것 같은 침식 작용 흔적이 있는데 이 정도 흔적을 남길 만큼의 홍수나 큰 비가 이집트에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 년 전이기 때문. 그레이엄 핸콕 등이 초고대문명설의 일환으로 미는 주장이다. 침식 흔적이 특이하단 주장 자체는 지질학계 일각에서도 나오긴 했다. 핸콕이 그걸 좋다고 갖다 쓴 것.
- 그러나 벽의 표면에서만 침식흔적이 있기 때문에 벽이 세워진 이후에 침식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벽이 그렇게 오래 전에 세워졌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우선 이집트 지역에서 그렇게 오래된 문명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모래나 바람, 모세관 현상으로 빨아올려진 지하수 등이 만든 것이라는 해석들도 있다. 특히 핸콕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지질학자를 떠받들며 반박하는 학자들을 '이집트학 학자' 등으로 교묘하게 깎아내렸지만, 반박하는 학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지질학자들도 많다.
- 워낙에 유명한 석상이기 때문에 '혹시 저 아래에 무언가 비밀의 방 같은게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신비주의자인 스펜서 루이스나 에드가 카이스. 1930년대에 스핑크스 아래에 '기록의 방'이라고 해서 고대 아틀란티스의 비밀을 품은 방이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고, 레이다 등으로 스핑크스 밑을 샅샅이 탐색해본 결과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5. 관련글
[1]
흔히
쿠푸의 대피라미드로 오해하고 있다.
[2]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생명과 부활의 방향이라 여겼다.
[3]
심지어 일부 조사에서는 카프레의 장제전들 중 일부가 대스핑크스보다 더 일찍 지어졌다는 결과도 있다.
[4]
이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 공식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대의명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5]
이 비석은 카프레의 장제전에 달렸던 석제 문짝을 떼와서 만든 것이다.
[6]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이집트를 방문한 황제들도 있었다.
[7]
참고로 이 계단들은 1930년대의 발굴 작업 당시 모두 해체되었다.
[8]
오른쪽 머리 장식 부분을 보면 거의 아랫부분이 사라져버린 것을 볼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콘크리트로 떼운 것이다.
[9]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
[10]
콧구멍 아래부분과 콧등 부분 양쪽에서 끌로 돌을 깨내었다.
[11]
당시에는 사자자리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별자리의 모습이나 이름은 사람들마다 이름 붙이기 나름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