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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 |
영어 | Ancient Thebes with its Necropolis | |
아랍어 | مدينة طيبة القديمة ومقبرتها | |
프랑스어 | Thèbes antique et sa nécropole | |
국가·위치 | 이집트 룩소르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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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의 신전. 카르나크 신전과 함께 룩소르를 대표하는 신전이다. 여담으로 룩소르 신전은 일부가 성당을 거쳐 모스크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기에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적으로 기능하는 종교 시설로 손꼽힌다.2. 역사
고대 이집트 시절의 재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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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신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지 않지만 대략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기인 기원전 1400년 쯤에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 그 이래로 카르나크 신전과 함께 테베를 상징하는 신전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당시에는 '남쪽 성소'라는 뜻의 '이페트 레시트'라고 불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신에 대한 숭배가 중심인 카르나크 신전과 달리 룩소르 신전은 파라오의 왕권 강화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는 것.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들이 룩소르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가 처음 지을 때 지성소와 내부 광장, 다열주홀이 만들어졌고 후대에 건축광 람세스 2세가 추가로 탑문과 입구 쪽 광장을 덧붙였다. 다만 람세스 2세 외에도 수많은 파라오들이 공사를 진행했는데, 일례로 그 유명한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도 룩소르 신전에 조금씩조금씩 건물들을 덧붙였다.
이후 룩소르 신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을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사원들 중 하나로 기능하면서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과 함께 고대 이집트 종교의 쇠퇴, 그리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룩소르 신전은 점차 사람들에게 버려졌고, 나중에는 작은 콥트 교회가 사원 안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고 이슬람교가 새롭게 유입되자 룩소르 신전 유적 위에 모스크가 세워졌지만 딱히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고 그냥 점차 모래 속에서 무너져가는 유적 정도의 취급만 받았다.
1800년대에 이르자 무너진 잔해들과 그 위에 쌓인 모래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유적 전체에 높이가 15m에 달하는 거대한 언덕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대략 신전 유적 전체의 4분의 3 정도가 이 모래언덕에 묻혀있었던 것.[4] 이렇게 언덕 아래에 묻혀있던 룩소르 신전을 1884년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가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하기 시작했고, 이후 1960년대까지 꾸준하게 발굴이 이루어지며 몇 천년만에 다시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60년대에 이르자 이집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면서 국가적인 보호 관리에 들어갔고, 1975년에는 바로 옆에 룩소르 박물관이 세워졌다. 현재는 이집트와 룩소르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2013년 5월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룩소르 신전의 부조에 낙서[5]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장쑤성 난징에 사는 한 15세 중학생 딩진하오(丁锦昊). 알고보니 자금성의 물을 담아두는 청동 항아리에도 낙서를 하고 달아난 화려한 전적이 있다고 한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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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도 | 항공사진 | 뒤에서 본 사진 |
룩소르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단 우리가 룩소르 신전하면 떠올리는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은 '필론'이라고 부른다. 두께가 4.5m에 달하는 신전의 정문이며 이 문을 통해서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건축왕 람세스 2세가 지어 봉헌했고, 그래서 그 앞에 서있는 수많은 석상들 역시 모조리 람세스 2세를 묘사한 것들이다. 길이는 약 65m, 그리고 탑문에는 히타이트 군대와 맞서 싸우는 람세스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탑문 바로 앞 왼쪽에는 22.5m 정도 높이의 높다란 오벨리스크가 하나 서있는데, 원래는 양쪽에 한 개씩 쌍을 이루고 서있었다. 허나 1833년 프랑스 군대가 오른쪽 오벨리스크를 떼어가버리면서[6] 현재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오른쪽 오벨리스크는 현재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다. 오벨리스크 뒷편의 탑문에는 1m 정도의 받침대 위에 15.50m의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좌상 2개, 그리고 높이 7m의 람세스 2세의 입상이 양쪽에 2개씩 총 4개가 있었다.[7]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현재는 룩소르 신전을 상징하는 석상이다.
탑문을 지나 신전 경내로 들어가면 람세스 2세의 안뜰로 들어갈 수 있다. 안뜰을 둘러치고 있는 2열의 기둥들은 모두 사암으로 제작했고, 개수는 총 74개다. 기둥들 사이사이에는 '카'라고 해서 오시리스의 영혼을 상징하는 입상들이 서있다. 이 입상들은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하나를 제외하면 모조리 장밋빛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고. 다만 현재는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다. 탑문 뒷편 안뜰에는 테베의 주요 3신인 아문, 무트, 콘수를 위한 작은 성소도 마련되어있다. 투트모세 3세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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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호테프 3세의 탑문[8] | 내부의 성소 |
아멘호테프 3세의 탑문 뒤에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과 다열주홀이 나온다. 이 안뜰의 기둥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모방해 만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석주들이 2열로 나란히 서있고, 원래 이 안뜰을 감싸는 거대한 벽이 있었으나 모조리 무너져서 남은건 뼈대와 기둥 밖에 없다. 다열주홀도 마찬가지. 원래는 천장도 있고 벽도 있는 어엿한 건물이었으나 천장은 내려앉고 벽을 이루던 벽들도 모두 사라져서 기둥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다열주홀 바로 뒤에는 성소가 있었다.
가장 신성한 공간을 맨 뒤에 배치하던 고대 이집트 건축법에 따라서 성소는 룩소르 신전 맨 뒤에 박혀 있었다. 원래는 어둑어둑하고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황금과 온갖 귀금속들로 장식되어 있어 전성기 시절에는 꽤나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2개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맨 끝의 방에는 태양신 아문의 거대한 좌상이 놓여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기단만이 남아있다. 이후 이집트의 쇠퇴로 인해 로마 제국 시대에는 예배당으로 사용되었고, 로마 시대에 개조되면서 코린트식 기둥이 추가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곳에 파라오의 모습으로 묘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조도 있다.
4.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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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4]
다만 이 모래 언덕 덕분에 추가적인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고대 이집트 유적들이 땅 위로 드러나있었다면 도굴이나 석재를 떼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5]
丁锦昊到此一游. 해석하면 '딩진하오 왔다감.'
[6]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 황후가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기념품으로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는 후문이 있다. 오벨리스크가 프랑스에 도착하자 무려 20만에 달하는 관중들이 나와 오벨리스크가 운송되는 모습을 구경했다고.
[7]
맨 왼쪽에 있던 입상 1개는 프랑스가 가져가서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8]
지금은 외부의 벽이 모조리 무너진 모습이고 원래는 벽과 천장이 다 있는 탑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