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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3:15:31

심형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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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데뷔 이전3. 개그계 활동
3.1. 지상파 개그맨 - 전설 중의 전설3.2. 영화배우 겸업
4. 영화계 활동
4.1. 무모한 도전4.2. 과대망상4.3. 본격적으로 SF 영화에 뛰어들다4.4. '신지식인' 1호. 그러나4.5. 디 워 논란과 언플 및 마케팅4.6. 라스트 갓파더, 한계에 봉착하다
5. 몰락
5.1. 영구아트무비 도산5.2. 도덕성 타격5.3. 회사 자금 유용5.4. 국고 탕진5.5. 기사화된 그동안의 행적5.6. 반응5.7. 이 상황에서 디빠들의 반격5.8. 디빠 진영의 붕괴5.9. 시위의 달인5.10. 사태 수습을 위한 노력5.11. 차기작5.12. 개인파산 신청과 이혼5.13. 빚 탕감 결정
6. 어머니의 별세7. 재기 시도8. 코미디 복귀9. 마당놀이 진출10. 다시 사업가로

1. 개요

심형래의 생애를 적은 문서다.

2. 데뷔 이전

여의도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대의 직업교육과정에서 식품가공을 배우고 그 기간중 대학가요제에 나간것으로[1] 알려져 있다. 병역사항에 대한 언급은 99년에 출판된 자서전에서는 문선대에서 활동했었다고 했고, 군복을 입고 기타를 든 사진도 삽입되어 있는데다가, 개그맨 후배 김한국이 자신의 유튜브에서 "심형래 선배가 25사단을 복무기간 만땅 채우고 나왔다"(25사단정비대
제1내무반에 관물대에 심형래 명찰있었네요 1989년) 말했기 때문에 현역이라고 추정된다. 근데 김한국의 말로는 "형래형은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셋이서만 살았고 부친께서 일찍 돌아가신 편모 독자(부사망 독자)라 원래 당시 규정상 방위를 가야 하는데 징병검사관이 현역을 보냈다"는 드립을 쳤기에 방위인데 현역인 걸로 드립친게 아닌가 의심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부사망 편모 독자 사유는 일반 방위(15개월)와 다르게 6개월 복무였다.

3. 개그계 활동

3.1. 지상파 개그맨 - 전설 중의 전설

유머1번지 시절 '영구야 영구야' 코너 (1988년)
정말 천재적이에요. 옛날에 뭐 그렇게 파리 나와가지고 하는거 그 관찰력이라는게 내가 보고 정말 저분은 천재적인 바보다…
진중권[2]

1982년 KBS 제 1회 개그 콘테스트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연예계에 데뷔하였다.[3][4] 데뷔한지 1년만인 1983년, 심형래는 유머 극장의 꼭지 중 하나인 < 하룡 서당>에서 바보 제자 캐릭터로 출연, "난 잘 몰르겠는데요" 라는 유행어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5]. 이듬해인 1984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개그 캐롤 음반 <심형래 코믹 캐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시키면서 대한민국 코미디 음반 시장의 판도를 뒤바꿔놨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이 리즈시절이었는데 대히트를 친 개그 캐릭터로는 토요일 저녁마다 하던 유머 1번지 영구, 변방의 북소리, 내일은 챔피언 등이 있고, 일요일 저녁에 방영되던 쇼 비디오 쟈키의 파리, 펭귄[6]이 있다. 특히, 그가 창조한 영구라는 캐릭터가 유명하다. 심형래라는 이름보다 그의 닉네임인 '영구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 심형래의 영구는 70년대의 국민 드라마 여로의 등장인물 영구를 재해석한 캐릭터였는데 그야말로 대히트를 쳐서 원래의 영구를 아예 파묻히게 만들었다.[7]

전성기에는 코미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있었다. "바보 연기"[8] 몸개그에 능했던 심형래는 1980년대 중후반 방송계에서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의 뒤를 이어 최고의 개그맨으로 인정받으며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심형래보다 몸개그를 잘한다는 평이 난 개그맨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다.

심형래 본인이 OBS시절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전성기에 대해 한 말로 "위인 설문조사 3위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인데, 1980년대 후반 혹은 1990년대 초반에 한 신문에서 어린이 대상 여론조사를 했는데 질문이 "당신이 존경하는 위인은 누구인가?"였다고 한다. 당시 1위는 세종대왕, 2위는 충무공 이순신, 3위는 영구 심형래, 4위가 토마스 에디슨, 5위가 퀴리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연히 그 신문을 본 심형래는 큰 충격을 받고 "왜 이 중에서 나 혼자만 살아있는 사람이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심형래가 진짜 위인이 아닌건 본인 뿐만 아니라 사실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당연히 다 아는데도, 심형래의 인기가 하도 많다보니 어린이들이 8090시대 당시 극도로 흔하던 신문의 여론조사나 설문조사 등 뭔 조사만 하면 재미로 영구나 심형래를 미친듯이 써대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의 전성기 기간이나 어린이들에게 받은 인기 정도를 종합하면 21세기의 뽀로로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뽀로로는 전성기 시작 후 몇년만에 핑크퐁, 타요버스 펭수, 띠띠뽀, 티니핑 같이 수없는 1위 도전자들이 있었지만 영구는 10년간 1위 도전자가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론 당대 모든 만화캐릭터들조차 아무리 잘 나가도 영구보다 인기가 없었다.

심형래는 동료 개그맨들 속에 섞여있어도 언제나 분장이나 의상 면에서 더 웃기고 더 튀었다. 게다가 심형래와 같이 분하는 배우들이 일명 '심형래 바보 만들기' 식의 개그를 하면서 그의 캐릭터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주로 '문이 열려있다.→심형래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다.→심형래가 문을 닫고 오면 문이 자동으로 다시 열린다.→심형래에게 핀잔을 준다.' 식이나 무언가를 하면 항상 심형래만 고생시키는 이러한 패턴은 상당히 잘 먹혀서 순식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주었다.[9][10][11] 개그 콘서트에서 황현희 변기수가 보여준 '정상인 바보 만들기' 개그와는 정 반대인 셈이다.

개그맨 시절에는 장인정신이 있어서 항상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를 쓰지 않고 심형래 본인이 얼굴 메이크업을 다 했다고 한다. 바보 연기용 무대 의상도 까다롭게 본인이 다 고르다 못해 방송국 소품실에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면 자신이 동대문이나 종로 등지에서 사 와서 적당히 자르고 찢어서 리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같은 코너의 조단역 후배가 분장을 마음에 안 들게 하면 본인이 다 해주고 후배 개그맨들에게 직접 바보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을 만큼 의외로 꼼꼼했다고 하며, 바보 연기용 소품 테스트도 까다로웠다고 한다. 다 직접 써보고 음향과 비주얼을 고려해서 골랐다고 한다.

심형래의 코미디 스타일을 외국 코미디언과 굳이 비교한다면 시무라 켄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몸개그에 가깝다. 한국의 찰리 채플린 정도의 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 그가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플린의 무성영화적 몸개그는 사실 심형래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채플린 영화는 군사독재정권이 그의 반독재적이고 사회주의적 성향을 문제 삼아 수입을 금지했고 1989년에서야 수입되었다. 다만,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나 채플린 코스프레는 많은 연기자들이 했었다. 1970년대 이상한/ 이상해 콤비가 채플린형 몸개그로 인기를 끌었다.

여담으로 심형래의 코미디 스타일은 새터민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새터민들이 한국에 와서 접하는 개그콘서트 같은 것은 이해도 어렵고 웃음 코드도 다른데 1980년대 심형래 코미디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 블로그로 유명한 새터민 주성하 기자는 북한 주민들의 문화적 코드가 한국의 30~40년 전과 거의 같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북한 주민이 개그 콘서트 보면 웃길까?"

사실 심형래가 좋은 역할을 매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인기 개그맨 및 고참이라는 이유로 항상 자기가 가장 주목받는 역을 가져가거나 다른 개그맨들의 아이디어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단, 컬트삼총사가 컬투가 된 걸 봐도 알 수 있듯 아이디어를 잘 낸다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연기로 잘 살린다는 법칙은 없다. 코미디계 원조 아이디어 뱅크로 유명한 전유성이나 현재 코미디빅리그에서 아이디어 뱅크 역할과 받쳐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최성민 같은 인물들을 보면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그걸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별개의 재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것 하나만으로는 심형래의 인격이 크게 못나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심형래가 가장 주목받는 역을 가져간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골을 독식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듯이 가장 웃긴 사람이 가장 주목받고 웃기는 역할을 맡는 것도 당연지사이다. 이른바 아이디어를 잘 짜는 사람 vs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지만 무대에서 잘 살리는 사람의 대립은 개그계에서 사라지지 않는 논란거리다. 즉, 개그계 전체의 문제이지 심형래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의 개그계는 타 방송국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왔다는 이유로 감자골 4인방이 KBS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방송사 전속 출연의 개념이 굉장히 강했던지라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만 출연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활동할 수 있는 무대 자체기 매우 적었다. 덕분에 당시 개그맨들은 한정된 이권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이 상당한 편이었다. 즉, 여기서 벗어난 개그맨들이 대단한 것이지 심형래는 당시 개그맨 중에서 평범한 케이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창명[12]에게 군기를 못 잡은 유재석 김수용을 폭행한 일이 대중들에게 유명해서 개그계 똥군기의 주역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는데 이는 특이 케이스였다. 심형래는 업무적으로 후배들을 혹사시키는 경우는 많았어도 후배들에게 주먹이나 발을 내지르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녹화 중 애드립으로 갑자기 후배들의 뺨을 때리는 정도가 다였고, 이것도 일방적인 폭력이라기보단 심형래 특유의 몸개그 스타일 중 하나였을 뿐이다. 어쨌든 당시 개그계가 선배들이 후배들을 손찌검하는 것이 일상인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형래는 그나마 후배들에게 잘 해줬던 선배인 셈이다.

당사자 이창명이 훗날 밝히길 자신에게 가족오락관 출연 섭외가 들어왔는데 녹화날이 하필 "변방의 북소리" 녹화날과 겹쳤다고 한다. 콩트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 보다는 가족오락관에 출연해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 석자를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창명은 "변방의 북소리" 주인공 심형래에게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며 녹화에서 빠진 후 가족오락관 녹화를 하러 갔는데, 하필 같은 KBS 프로그램들이라 그야말로 심형래에게 딱 걸려버린 것. 이창명의 행동에 화가 심하게 난 심형래는 모든 개그맨들을 기수별로 집합시켜서 당장 이창명을 잡아오라며 호통을 쳤고, 잔뜩 쫀 채로 잡혀 온 이창명을 본 심형래가 이창명의 선배 김수용과 유재석에게 "따로 나가서 후배 군기 교육 좀 시켜!"라고 명령했는데, 사람 좋은 둘은 차마 이창명을 때리지를 못해 때리는 척 연기를 하다 이를 본 심형래에게 들켜서 분기탱천한 심형래에게 같이 얻어맞았다고 한다.[13]

이 사건으로 이창명은 선배들에게 완전히 찍혀서 KBS 개그 프로그램에 더 이상 출연하지 못했고, 본인을 써주지 않자 이창명은 MBC 개그맨 시험을 봤는데 하필 이 시험이 방송으로 생중계되어서 이창명은 KBS 희극인실에서 완전히 제명 당했었다고 한다. 이후 이창명의 부모님이 직접 선배인 김한국[14] 을 찾아가 제발 아들이 다시 개그맨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달라며 빌었고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김한국이 회의를 소집하고 이창명의 제명을 풀어줬다고 한다. 다만 이창명이 갖은 구설과 논란을 일으켜 방송 출연도 못 하고 평판마저 나락으로 떨어질 정도로 인격이 개차반이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져 지금은 "이창명이 가족오락관 사건 전부터 이미 뭔가 밉보일 짓거리를 하도 많이 해 심형래가 그때 폭발해서 참교육을 시켜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그래도 애먼 유재석과 김수용에게까지 체벌을 한 건 심형래가 명백히 잘못한 게 맞다.

1991년 SBS 개국 때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SBS로 이적했다. 위에서 적었다시피 개그맨들은 방송국 전속 출연의 개념이 심할 때라서 화제가 되었다.[15] 하지만 SBS에서 자리를 못 잡기도 했고, 당시 SBS가 수도권에서만 송출되고 지방에서 방송이 송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을 안 하고[16] 한 이적인지라 인기도 떨어졌기에 1992년 2월 KBS로 다시 이적했으며, 이 이적은 KBS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어서 심형래는 아침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SBS 디스와 KBS에 대한 회한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17] 심형래는 1994년 11월부터 1995년 2월 초까지 SBS <웃으며 삽시다>에서 방송된 ' 수퍼파워 김치맨'으로 SBS에 복귀를 했지만 이 코너가 본인의 마지막 SBS 코미디 출연작이 됐으며[18] 90년대 중반 KBS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일번지'에 주연급으로 등장하여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후 개그콘서트에도 출연했지만, 2000년에 몇 주 출연하다 말았고, 2000년대 초중반 복권추첨을 겸한 쇼 코미디 프로그램인 쇼 행운열차가 그의 마지막 TV코미디 커리어가 된다. 하지만 쇼 행운열차는 일요일 점심시간대에 방영되어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꽤나 마이너한 프로그램인지라 사람들의 기억 속엔 용가리 이후로 코미디는 은퇴한 줄 알고 있다. 물론, 복권을 주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간간히 심형래를 봤다.

3.2. 영화배우 겸업

이렇게 개그계를 섭렵한 심형래는 1984년, "각설이 품바 타령"을 시작으로 영화 배우도 겸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때는 김형곤이나 이주일 같은 동료 코미디언들도 이렇게 원맨쇼에 의존하던 영화를 찍던 시절이었다. 이런 원맨쇼 영화 중에서 김형곤이 주연한 대표작들은 "여자는 괴로워"와 동명의 코미디 코너의 극장판인 "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 있고, 이주일이 주연한 영화들은 "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등이 있다.

심형래는 1986년부터 김청기 감독과 함께 한 한국 어린이 영화에 한 획을 그은 SF물 " 우뢰매"의 에스퍼맨 역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우뢰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성된 특촬물로서 그때부터 SF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뢰매 시리즈는 꽤 성공을 거두어 총 9편이 나왔는데 관중 동원력이 탁월했던 그가 등장하지 않은 6편은 관중수가 크게 줄어 이후 시리즈에서 다시 복귀하기도 했다. [19]

우뢰매를 떠난 그는 1989년부터 남기남 감독과 함께 " 영구와 땡칠이", " 영구람보"를 비롯한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로 많은 어린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외에도 남기남 감독과 '따귀 일곱대' 등 어린이 영화 외적인 장르에서도 열연을 했고,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1988년 슈퍼 홍길동이라는 사극성 코미디 영화도 찍었다. 홍길동 시리즈는 7편까지 나온 나름 비디오물 중에서는 준수한 작품인데, 심형래는 1편만 찍었다. 사실 1편은 이경규, 조춘, 국정환 등 출연진이 의외로 빵빵한 작품. 2편 이후부터는 김정식이 심형래에게 바톤을 넘겨받았다.

"우뢰매"가 200만 관객이라는 얘기와 "영구와 땡칠이"의 관객 동원이 흥행 1위 등의 이야기들도 있으며, 심형래는 영화계에서 본인 영화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화 잡지들만 봐도 이런 양산형 어린이 영화는 영화 취급을 안 했음을 알 수 있다. 로드쇼는 1990년 1월호를 비롯하여 아예 영구와 땡칠이를 흥행 순위에 넣지도 않았지만, 스크린은 1990년 1월호에서 영구와 땡칠이가 서울관객 43만으로 로드쇼에서 1위로 선정한 서울무지개의 30만을 제치고 한국 영화 흥행 1위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1980~90년대 시대는 지금처럼 전산망 집계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관중 집계는 주먹구구식이었고, 그나마도 서울 지역에서만 제대로 집계되었지 지방 쪽은 집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추정치가 차이가 심하다. 이것은 높으신 분이나 영화계를 흔드는 조폭들의 세금 포탈로 악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와서는 이때의 이야기를 명확히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 단지 실시간으로 당시 상황을 체험했던 사람이라면 매 상영 때마다 극장이 터져나가라 자리를 채우던 꼬마 관객들의 모습이 기억날 거다.

게다가 당시 영구와 땡칠이를 비롯한 소위 어린이 영화는 일반 영화관이 아닌 어린이회관 같은 공공기관 위주로 상영을 했는데, 이는 어린이 영화라는 공공성을 생각해서 극장보다 문턱이 훨씬 낮고 대관료도 상당히 싸서 전략적으로 접근을 한 것이지 상영할 곳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 영화들과는 레벨 자체가 다른 영화 하얀전쟁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도 시사회나 상영은 호암 아트홀에서 했다. 역시 전략적인 접근이다.

그렇다고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회관으로 돌면서 상영하면 더욱 실제 관객수를 집계하기 어렵고 다른 상업 영화와 같은 라인에서 비교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영구와 땡칠이가 흥행해서 당시로써는 엄청난 수입을 올린 건 사실이다. 당시 이 영화를 지원했던 ' 대원'이 이 영화의 덕에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해서 대원 사장인 정욱은 지금도 심형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고, 감독인 남기남도 어느 호러영화 사이트와 인터뷰에서 "내 영화 인생에서 영구와 땡칠이만큼 돈 많이 번 적이 없어."라고 말할 정도다.

이렇게 심형래의 영화 출연작은 20여편이나 된다. 이 정도면 중견 영화 배우로 봐 줘도 무방하다. 지금도 30~40대의 추억의 영화로 심형래가 주연한 영화가 웬만하면 꼭 들어가며, 주인공이 영구가 아닌 작품도 무수히 많이 찍었다. 딱 한 번 코미디가 아닌 정극을 찍은 적도 있었는데, 그것이 1994년에 개봉된 ' 핑크빛 깡통'이었다. 여기서 심형래는 거지로 나오는데, 심형래 답지 않게 코미디 따위 일절 안 나오는 영화였다.

이제는 지나간 얘기지만, 이 상태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거나 은퇴하고 조용히 살았어도 문제는 없었다. 전성기의 심형래는 인기와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김연아급의 인기를 누렸던 연하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와 사귀었다는 부분만 봐도 답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에는 몇 년 간 연예인 소득 종합 1위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고, 재테크에도 힘썼다. 실제로 심형래 본인은 "강남에 빌딩이 몇 채나 되고 수도권에 알짜배기 땅이 몇 군데나 되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심형래는 1980년대 말 ~ 1990년대 후반까지, 강남에 대규모 유흥업소를 여러 개 운영했다. 다만 본인은 유흥업소 운영은 창피하게 보는지 자서전에는 쓰지 않았다.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도박만 멀리하고, 여러 토크쇼에 계속 나오거나, 고정 프로그램 몇몇을 잡거나, 연기 학원을 차려서 후학 양성에 힘을 써도 괜찮았다. 하물며 별다른 일 안 하고 가끔 방송에 얼굴만 비춰도 심형래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다. '개그맨 심형래'에게는 평생 대접 받으면서 적당히 본업에 열중하고 여유롭게 여가시간을 보내며 살아갈 기회가 넘쳐 흐를 정도로 참 많았다.[20]

4. 영화계 활동

4.1. 무모한 도전

그런데 그는 편안하게 생활 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을 하여 스스로 흑역사를 자초하게 된다. 특별한 준비나 보강도 없이 영화 감독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형래나 동료들이 하는 말을 긁어 모아 보면, 심형래는 사실 초창기 시절부터 어느 정도 영화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료 개그맨들의 캐스팅에서부터 시작해 코미디씬의 연출 등은 사실상 심형래가 전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형래의 경우 어차피 흥행가두를 달리고 있는 '내 영화의 엑기스는 나의 코미디 실력+스타성+개그맨 동료들'이라고 생각할 만도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러 흥행한 영화들로 돈도 많이 모았겠다, 남기남이나 김청기 등이 하는 영화 연출은 자신에게 있어서 쉬운 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심형래 외에는 많이 알려진 사례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영화계에서 배우가 손수 제작 내지는 감독을 한 역사는 의외로 유구하다. 한국 영화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나운규 윤봉춘, 전창근, 이금룡, 전택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단역 전문배우 손전(1910 ~ 1999)은 1951년부터 14년간 5편을 연출했다.

1950년대 ~ 60년대를 빛낸 신사풍의 미남 배우 최무룡은 <피어린 구월산>과 <지하여자대학>, <덫> 외의 총 16편을 연출했고, 김진규도 1967년작 <종자돈>을 연출하고 1971년에는 < 성웅 이순신>을 제작한 바 있다. 액션배우 박노식도 전성기 말년에는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나 <애꾸눈 박>, <용팔이 시리즈>의 일부 작품[21] 외의 액션영화들을 14편이나 연출했고,[22] 허장강도 1966년 <내청춘 황혼에 지다>를 기획했다.[23] 신성일도 1971년 <연애교실>을 시초로 감독을 맡아 총 4편을 연출했다.

그 외에 '얄개스타' 손창호는 1990년 <동경 아리랑>을, 조춘과 김유행은 같은 해 쌍라이트 형제 시절 <땡칠이와 쌍라이트>를 각각 제작했고, 전설의 여배우 최은희도 남편 신상옥처럼 영화 감독을 하여 <민며느리> 등 총 3편을 연출했다.

최근의 사례로는 2008년작 < 똥파리>를 연출한 양익준과 < 요술> 외 8편을 연출한 구혜선, 2013년에 톱스타라는 영화를 연출한 박중훈 등이 있다. 또 분야는 다르지만 연극계에선 변기종, 이해랑, 김동훈, 유인촌, 김성찬, 박광정, 송승환 등처럼 극단을 직접 차리거나 대표 내지 연출을 맡은 사례도 있다.

또한 코미디언 출신으로 영화감독 및 제작을 맡았던 경우도 여럿 된다. 대표적으로 선배 서세원 1986년 납자루떼를 감독했다가 쫄딱 망하고 나서 2001년, 조폭 마누라의 제작자로 잠깐이나마 성공했던 적이 있고[24], 이경규 본인이 직접 감독 및 주연을 맡아서 1992년에 야심차게 개봉한 복수혈전이 실패한 사례가 있다.[25] 이외에도 심형래가 나온 유머 1번지의 대표 코너 <내일은 챔피언>을 영화화한 전유성이나[26], <공포특공대>를 만든 김정식같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화 감독 경력은 이들의 커리어에서 흑역사로 남았다.

개그맨 출신으로 영화계에서 그나마 성공을 이룬 사람은 1990년대 SBS 개그 프로그램 좋은 친구들에서 '헐리웃 통신'이라는 코너를 맡았던 장진으로 볼 수 있다. 장진은 본래 구성 작가로 활동하다가 특채 개그맨으로 발탁되었는데, 그가 맡았던 코너 '헐리웃 통신'은 초창기 영화 패러디 코미디였으며, 바바리코트 차림의 장진이 한강다리 앞에 서서 '여기는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샌프란시스코입니다'라거나 남산 타워를 배경으로 '여기는 파리입니다. 에펠탑 아래서 칸 영화제 소식 전해드립니다' 따위의 멘트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하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후에 장진은 신춘문예를 통하여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하고, 나중에 작가, 감독, 제작자로 모두 대성공하였으며, 후배들을 키워내 소위 '장진 사단'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4.2. 과대망상

심형래의 과대망상은 이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는 때부터 눈에 띄었는데, 1990년대 초반, "사랑방 중계"라는 토크쇼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한 일반인 학부모가 "어떻게 그런 영화로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끌어모을 생각을 하냐?"고 하자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영화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 영화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감독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저질이란 식으로 면박을 주는 걸 보면 과거 악명 높았던 모 아줌마 단체가 연상되는데, 절대로 그 단체가 아니라 방청객으로 나온 한 학부모가 영구 영화를 본 자신의 아들이 영구의 어투를 흉내내며 다니기 때문에 심형래 영화가 매우 비교육적이라는 견지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연기자 바로 앞에서 그 얘기를 했던 사람도 어지간하긴 했다.

비록 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에 치이고 홍콩 영화에 채이는 암흑기이긴 했어도 그가 당시 만든 영화의 질에 비하면 심형래는 스스로를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류 영화계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심지어는 울먹이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아래에 언급되었듯이 실제로 인터뷰마다 충무로 영화를 무시하고 디스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물론 충무로 사람들이 심형래를 우습게 본 건 사실인데[27][28] 심형래의 언플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벌떼 같은 디빠들 때문에 귀찮아질까봐 공식적인 인터뷰에서는 아예 심형래를 존중해주는 척하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봉준호 감독은 "누구 말대로 이무기 나오는 영화 찍다가 망하는,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한국 영화 산업에 파탄을 일으킬 수 있는 대재앙이 안 일어나 천만다행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이를 보면 심형래의 영화 작업을 매우 비판적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형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디스한 적은 없으며, 이는 김조광수를 제외한 다른 충무로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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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는 이렇듯 자의식이 굉장히 강했으며, 학력위조도 서슴지 않았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수십 년간 주장하면서 '바보 연기로 유명한 개그맨이지만 실제로는 머리가 좋다'는 것을 은근슬쩍 어필했으나, 사실은 고려대학교 평생교육과정 단기 수료였을 뿐이었다는 게 학력위조 검증 열풍 때 밝혀졌다. 거기다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 한 번 한 것을 가지고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겸임 교수라고 자칭하고 다니다가[29] 서울대학교 측에서 이를 문제 삼자 "담당자의 착오였다."고 발뺌했다.

실제 최종 학력은 여의도고등학교 졸업으로, 고졸이다. 사실 이 부분도 미묘한 흑역사인데, 여의도고등학교 출신들은 심형래의 리즈 시절에도 동문 취급을 안했다. 1973년 개교한 여의도고등학교는 초창기 주간반과 야간반이 있었는데, 심형래는 야간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당시는 집안 생계나 학비 마련 문제 때문에 야간학교나 산업체 부설학교에 다니던 청소년들이 많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야간반 학생들은 동문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이 그저 텃세를 부리는 것에 불과한 짓거리에 가깝고, 사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대학 다니면 사회적 엘리트 취급이었을 정도로 진학률이 낮았으니 당시 기준으로 고졸인 것은 평범한 수준이기는 했다.

허나, 이후에 출연한 방송 등에서 오해 드립을 시전했지만 이미 자서전에 자랑스럽게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써 넣은 건 이미 전설이다. 영구아트가 도산한 현재, 어차피 이미지가 막장이 된지 오래전이라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심형래는 고려대학교 동문이 아니라 고려대학교 홍보대사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다.

이미 1980년대부터 심형래의 고려대 동문 드립은 아주 유명하였으며, 1999년부터 방송하기 시작한 개그콘서트를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고려대 연세대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동문대결을 했을 때 심형래도 자주 참가했다. 사실 고려대 측도 할 말이 없는 게 학력위조를 확인해줘야 할 학교 측이 나서서 오히려 심형래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한 번은 개그콘서트를 고려대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특별 초대손님으로 자랑스러운 선배라며 심형래가 나오기도 했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공식 행사에서 대놓고 말하는데 암 말도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력위조가 밝혀진 다음에 고려대는 "학부는 아니지만 고대에서 개설한 과정을 수료했으므로 넓은 의미의 동문으로 본다." 는 드립을 시연했는데, 당시 명문대학들은 돈을 벌고 유명인사들을 이용해 학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최고경영자과정, 평생교육원 등을 운영했다. 교육도 하지만, 수강자들을 자기 학교 인맥으로 묶어 동문의식을 심어주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중장년들이 서로 소통해 동업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가방끈 비슷한 것 하나 걸쳐주고, 학교는 수업료 받고 기부도 받고 유명인 홍보도 하고 했다.[30]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유명 연예인들을 학력과 상관없이 입학시키는 안 좋은 관행이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4.3. 본격적으로 SF 영화에 뛰어들다

그러다 심형래가 어린이용 영화가 아닌 헐리우드와 싸워 이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건이 생겼다. 영화 제작을 위해 강남의 빌딩을 비롯한 수도권의 알짜배기 부동산을 모조리 팔아버렸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 영구와 공룡 쭈쭈" 가 " 쥬라기 공원"과 같은 시기인 1993년에 개봉하며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흔히 " 티라노의 발톱" 이 " 쥬라기 공원"에게 신나게 깨졌다고들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쥬라기 공원은 1993년 7월 17일에 개봉되었고 티라노의 발톱은 1994년 7월 16일 개봉했다. 즉 쥬라기 공원이 1년 일찍 개봉했고, 실제로 쥬라기 공원과 맞붙어 망한 것은 '영구와 공룡 쮸쮸'였다. 이는 심형래 본인이 토크쇼에 나와서 밝혔던 사실. 영구와 공룡 쮸쮸 포스터를 붙여놓으니 바로 그 옆에 턱하니 쥬라기 공원 포스터가 붙더라… 라는 식으로 반 농담으로 이야기했다. 언제부턴가 티라노의 발톱이 쥬라기 공원과 얽혔던 걸로 와전되기 시작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독자로 하는 과학잡지 과학소년 1996년 12월호에 심형래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역시 티라노의 발톱이 쥬라기 공원에 의해 참패했다고 언급 되었다. 심형래 본인부터 헷갈렸던 듯한데, 심형래가 용가리 개봉을 앞두고 쓴 자서전에서 '티라노의 발톱은 쥬라기 공원에 밀려 대참패를 겪었다.'라고 썼다. 심지어 티라노의 발톱 시사회 맞은편에서 쥬라기 공원이 상영되었다는 대목도 있다.[31]

그래도 티라노의 발톱은 괴수물 매니아들에겐 꽤 컬트적인 인기를 모았다. 국내 호러영화 사이트 호러존에서는 티라노의 발톱에 별점 5개 만점을 매기기도 했다. 해외 매니아들 중에서도 괜찮은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덕분에 한국에서 중고 비디오를 팔던 한 사이트에서는 해외로부터 온 티라노의 발톱 비디오를 찾는 주문이 꽤나 많았던 적도 있다. 하긴 수공업으로 만든 공룡 모형은 열악한 조건에선 괜찮았던 건 사실. 줄거리 및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괴수물 치고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영화는 몇 안된다.[32]

티라노의 발톱의 처참한 실패를 맛본 이후 그는 특수효과와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크게 집착하게 된다. 토크쇼에 나와서 회상한 바에 의하면 공룡 쮸쮸는 애초에 제작이 잘못되어 양팔을 크게 펼치지도 못했다고 한다. 반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탄생한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은 훨훨 날아다니는 걸 보고 그래픽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쥬라기 공원에서도 스탠 윈스턴이 참여한 실사로 만든 움직이는 공룡 로봇이 꽤 많이 쓰였다는 점이다.

사실 공룡 쮸쮸와 티라노의 발톱 이후에 나온 '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 '파워킹' 또는 ' 드래곤 투카' 는 당시의 국내 수준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높은 퀄리티의 특촬효과는 물론 작품성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평을 받은 파워킹은 심형래가 제작만 했을 뿐 감독은 김청기였고, 적어도 감독으로서는 김청기가 심형래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드래곤 투카는 아무튼 당시 3DO 게임기를 수입하던 LG의 협찬을 받아 PC용 게임도 나오려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게임의 실제 개발은 당시 국내 굴지의 PC게임 개발사 중 하나였던 미리내 소프트웨어. 드래곤 투카 3D라는 이름이다. 터미널 벨로시티 같은 비행형 FPS로 추정된다. 하드코어게이밍101의 한국게임 소개 페이지에서

이후 심형래는 제로나인 엔터테인먼트[33]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특성상 자금이 빨리 바닥날 수밖에 없었고 해당 직원들은 라면을 먹어가면서 근근히 회사를 꾸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영화사 설립 뒤에 하도 처리할 일들이 많았던 나머지 심형래는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하도 많았다. 하루는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다시 나갈 때가 되어 가려고 하니, 그의 어린 딸이 나가는 그에게 "아빠, 다음에도 우리 집에 꼭 놀러 오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딸에게 아버지는 어쩌다가 놀러 오는 사람이지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인지가 안 되었던 것이다. 심형래는 꽤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이 말이 항상 마음에 많이 맺혔다고 한다.

4.4. '신지식인' 1호. 그러나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의 괴수 영화 고지라의 미국 리메이크 버전인 고질라(Godzilla, 1997)에 비견되는 한국형 괴수 영화인 용가리라는 영화로 272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뉴스에 뜨면서 다시 한 번 급관심을 얻게 된다. 1998년 당시의 달러 환율로 보자면 272만 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39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지상파 뉴스에서도 이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알고 보니 심형래의 언플질이었다. 모든 언론사에서 심형래를 찬양하기 바쁜 가운데 씨네21만 이것이 부풀려졌다고 보도했다. 이에 발끈한 심형래는 영구아트의 직원들을 보내 씨네21의 모 회사인 한겨레신문 사옥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도록 했다. 후에 영구아트가 망하고 나서 그 때 시위를 한 직원 중의 한 명이 한겨레신문사 기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계약은 영화를 다 만들고 맺는 게 아니다. 프로모션 동영상을 가지고 선계약을 맺는 건데, 물론 이 과정에서 실제 나온 물건을 보고 가격을 깎거나 계약 파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훗날 2011년, 심형래가 완전히 몰락하고 난 이후에 MBC PD수첩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용가리의 실질적인 계약금은 272만 달러가 아니라 180만 달러였고, 이 가운데에 150만 달러는 일본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심형래는 항상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재밌다."고 주장했는데, 고질라 자체가 미국에서 혹평을 받은 영화였음에도 용가리는 막상 나오자 막장 고질라보다도 훨씬 더한 개막장이었다. 당시 프로모션 동영상은, 떡밥 영상+EBS 교육방송 영어 강사들이 비명 지르는 흉내 내는 수준이었다.

괴수 영화 팬들 중에서는 그래도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말 그대로 괴수물 팬 입장에서는 X만한 전투기를 피해 달아나는 고질라 따위보다는 그래도 용가리가 낫다는 논리. 사실 괴수 영화 팬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특히 원조 고지라 시리즈 골수팬들은 미국판 고질라를 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단, 영화 완성도 자체가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디빠들은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할지도? 고질라의 작품성 자체야 개연성, 캐릭터성 등등 여러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막장이지만, 이 쪽에서 용가리가 고질라에게 할 말 같은 건 없다.[34]

거기에 용가리는 애초에 수원시의 지원을 받아서 제작했는데, 심형래는 이 용가리가 대차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수원시와 한바탕 시원하게 소송을 벌였다. 결과는 심형래가 신나게 두들겨 맞았고, 심형래는 그 결과 빚더미에 올랐다. 물론 디워의 흥행 수입으로 이 빚을 갚을 정도의 돈을 벌긴 했다. 이 빚을 모두 회수하는 데는 6년이나 걸렸다.


1999년 국민의 정부는 '신지식인 운동' 캠페인을 벌였고, 당시 정부는 이렇게 대한민국이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SF 영화 할리우드에 도전하는 심형래를 ' 신지식인 1호'로 선정하면서 심형래와 같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IMF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며 심형래를 터무니없이 치켜세워주었다.[35] 1999년 국정홍보처(당시 공보실)에서 제작한 CF에서 심형래가 말한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라는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심형래는 신지식인 1호로서 당시 연세대학교, 용인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 심형래는 자서전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 하는 겁니다』도 펴냈고, 이 때문에 그 동안의 영화 인생과 성공 실패담이 동시에 세상에 알려졌다. 실리콘으로 만든 공룡 인형 속에서 배우가 탈진해 쓰러진 에피소드나, 빚을 내가며 집을 팔아가며 돈을 모아 찍은 티라노의 발톱의 개봉일에 썰렁한 극장 입구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던 이야기나, 용가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특수효과 회사인 영구아트무비 등을 만든 일화 등이 알려지자 위대한 도전자로서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 동안 그를 비웃던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 그에게 호의를 가졌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시작한 용가리는 제작비에 걸맞지 않게 완전 개판이었고, 그의 기대는 유리처럼 처참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해외 판매용으로 다시 재편집을 해서 판매를 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결국 평생의 꿈이었던 SF 영화를 찍었지만, 첫 국내 개봉도 영 시원찮았고, 미국에서는 사기당하여 돈까지 날려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렌탈시장에 비디오를 내놨지만 한 번도 대여되지 않은 비디오로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에서는, 한때 대여점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진실은 모 대여점 체인업체의 SF 부문 극장 미개봉작 대여인기순위 1위. 여기에 미국 수출을 일본계 회사가 거의 다 하다시피 해서 주인공 이름이 일본 이름으로 바뀌는 등 이런저런 흑역사가 많다. 아직도 미국 괴수물 덕후들에게 물어보면 '일본 영화 용가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고 한다. 그나마도 용가리를 알고 있는 경우도 김기덕 감독의 1960년대 용가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은 용가리는 그냥 개망한 것이다.[36] 그나마 심형래가 용가리로 얻은 수익은 용가리 치킨의 대히트로 인한 것이다.

본인의 설명으로는 저작권 처리를 잘못하여, 해외에서는 아무리 판매 실적을 올려봐야 심형래씨 본인에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웬 애먼 변호사가 그 수입을 다 가져간다고... 이후로 ' 디 워'에서는 그 부분을 더 철저하게 체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삼형래의 변명이고 실제로는 저작권으로 돈이 나올 만한 작품이 전혀 아니라서 하나도 못 받는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4.5. 디 워 논란과 언플 및 마케팅

그 뒤에 그 유명한 ' 디 워'를 발표했고, 개봉 몇 년 전부터 언플에 입소문을 탄 덕에 관객수도 국내에서 어느 정도 얻었고, 호응도 그럭저럭 얻었지만, 호평 이상으로 악평도 많았다. 게다가 디 워가 끝난 뒤 마지막 장면에 아리랑 BGM을 딱 틀어놓고 세피아 톤 배경에 자신의 사진과 일대기 비슷한 것, 디 워로 세계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요지의 장면을 삽입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 본인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시켜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해외판에는 이런 것을 넣지 않았다.

요컨데 영화 감독으로써의 심형래는 좋게 말하면 위에 언급된 자서전 제목처럼 근성 가이, 나쁘게 말하면 감독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처럼 심형래는 영화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개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성 마케팅이나 언론플레이 능력은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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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온갖 고초를 겪어왔다고 주장하며 눈시울까지 붉히는 심형래

언론에 인터뷰할 때는 충무로로 대표되는 한국 주류 영화계가 자신을 무시하며 자신은 온갖 악조건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약자 드립을 시전, 뭇 영화팬들의 동정을 샀으나, 실제로 그는 언플질과 정치질로 한국의 그 어떤 제작자보다도 자금을 끌어오는데 성공적이었으며, 완성도와 미학성을 중시하는 영화 평론가들의 입김이 센 씨네21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그에 대해 실드와 호의적 보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약자가 아니라 투자금을 독식하는 강자였다.

이 외에 한국 국민의 정서에 걸맞은 애국심과 도전정신 및 기타 등등 감정적 심리를 자극한 효과가 있었는지, 디 워 대한민국에서 842만 6973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제작비가 300억원이라고 가정해도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의미는 없다. 심지어 심형래는 제작비가 700억원까지 들어갔다고 했고, 2009년에 나온 최종 정산으로는 322억원을 들여 약 170억원이라는 거액의 적자를 봤음이 확인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제작비 100억을 들여 275억원의 순익을 낸 것과 정말로 대조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정작 그 목표 시장이라는 미국에서의 흥행 성적을 보면 디 워의 거품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로선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1097만 7721달러를 벌어들이며 일단 한국 감독 영화로 최고 대박을 이뤘다고 주장하나, 이는 수치상의 착시현상이다. 먼저 이 영화의 미국 "배급"을 맡은 프리스타일사는 배급회사가 아니라 배급 대행 회사이다. 즉, 디 워의 배급을 판권을 "매수" 한 것이 아니라 "대행" 만 해줬다는 것.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디 워가 극장에서 흥행 실패를 해도 프리스타일사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수수료를 챙긴다. 참고로 프리스타일사의 "고객" 중에는 괴작 감독으로 악명높은 우베 볼도 있다. 순수하게 얻은 극장 수입은 단 400만 달러이며, DVD 및 부가판권 합쳐봐야 1000만 달러를 넘긴다. 그런데 현지 마케팅비 1500만 달러는 배급사인 프리스타일이 한 것이 아니라 심형래 측이 부담해서 결과적으로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이에 비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2007년 3월 9일에 미국에서 개봉하여 2007년 7월 12일까지 극장에서 220만 1923달러를 벌었고, 2004년 4월 2일에 미국 현지에서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238만 788달러를 벌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경우에는 2005년 3월 25일에 미국에 개봉하여 2005년 12월 8일까지 극장에서 70만 7481달러를 벌었으나, 이것은 미국 대행사가 완전히 영화의 판권을 사서 자신들의 돈 들여 마케팅을 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각각 220만 1923달러, 238만 788달러, 70만 7481달러의 순이익이다. 게다가 세 영화의 미국에서의 평가는 디 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호평이며, 극장도 작게 차려서 작은 홍보를 하면서 수익을 건졌기에 호들갑 떤 디 워와는 차원이 다르다. IMDb에 올라온 네 영화의 감상평만 봐도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세 영화는 호평하고 찬양하는 글들이 수두룩하지만, 디 워는 그런 거 없다.

이렇게 못 만든 B급 영화를 블록버스터 대작인 것처럼 포장하거나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영화 외적 방법으로 마케팅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팔아먹는 건 아주 능했는데, 그렇게 낚고도 손해를 봤다니 참으로 투자 대비 산출 효과는 막장 중 막장이다. 그래서 거품이 가라앉자 사기 혐의로 형사 고소를 당하는 등 여러가지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심형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기 혐의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갚을 의지는 있지만 돈이 없어 못 갚는 것이기에 사기가 아니라고 한다. 디빠들은 이런 결과글을 철저히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으로 자아위안을 했다.

4.6. 라스트 갓파더, 한계에 봉착하다

디 워가 어느 정도 성공[37]한 것처럼 보이자, 심형래는 뜬금없이 자신의 "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겠다며, 영구 영화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심형래는 항상 당시 한국 영화계의 유행이던 조폭 영화를 비난했고, 디빠들은 항상 심형래를 인용해 충무로를 비난해왔는데, 그 자신이 마피아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요, 내로남불임에 틀림없었다. 또는 심형래의 미국병은 중증이라서, 위의 "슬랩스틱"의 외국어 남용에서 보여준 것처럼, "마피아"는 조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나는 코미디로만 컨셉을 잡고 미화나 우상화는 안 했으니 상관없다고 여긴 듯 하다.

사실 1990년대 말 쯤에 심형래는 인터넷 영화로 저질 섹스&조폭 코미디 '조폭닷컴'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을 못 받았는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형래 팬들에게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폭의 덜떨어진 아들 설정은 라스트 갓파더의 것과 유사하다.

라스트 갓파더 대부를 패러디하고 말론 브란도 비토 콜레오네를 CG로 재현한다고 했지만, 다행히(?) 무산되었다. 아무리 패러디라 하더라도 돈 비토 콜레오네가 한국에 출장 가서 사생아 영구를 만들었다는 정신줄 놓은 막장 드라마스럽고 엽기적인 줄거리가 시작 전부터 논란을 자아냈다. 심형래의 입장에서는 불륜이 그저 쪽팔리고 마는 일의 하나로나 생각될지 몰라도, 미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가족 영화를 표방한 라스트 갓파더에서 초장부터 불륜이나 불륜에 의한 설정이 나온다는 것은 미국 본토에서 마치 종교 영화에 포르노 장면을 넣는 것과 마찬가진데, 이게 바로 심형래의 맛탱이가 가버린 정신상태였다. 가족주의 기독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이딴 걸 개봉한다면 미국에서의 한국인을 보는 이미지가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예측이 대충 가능한 상황.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바대로 다행히 초상권 침해 문제에 걸려서 좌초 크리. 말론 브란도의 유가족들이 저딴 걸 허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한 심형래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잘 보여준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덜떨어진 마피아의 아버지 역은 실사 배우인 하비 케이틀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 11월 29일에 예고편 티저가 나오자 반응은 의외로 호의 쪽에 가까운 분위기. 영구 시절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자신이 그대로 재현했다. 그리고 헐리우드의 명배우 하비 케이틀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에 이어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 같이 화면의 때깔이나 색감이 준수하여[38] 평작 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라스트 갓파더는 2010년 12월 29일에 공식적으로 개봉됐다. 일단 초반에는 황해 등의 여러 경쟁작들을 제치고 1위 입성, 이듬해 1월 첫 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 172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수성했다. 잠깐 박해일 김윤진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심장이 뛴다 등에 밀려 3위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주말이 되자마자 다시 1위 재탈환. 그러나 이내 좋지 못한 평가들이 줄을 이었고, 결국 손익분기점은 450 - 500만인데 최종 관객수는 254만 1603명으로 끝났다. 미국에서도 개봉했지만, 혹평과 함께 3주만에 스크린을 내리며 처참하게 망했다. 이는 연기파 배우 하비 케이틀 흑역사로 남을 듯. 일설에 의하면 그 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모두 성인용이라서 늦게 본 4살짜리 늦둥이 아이에게 보여줄 영화로 어린이용 영화를 찾고 있다가 그만 심형래에게 낚였다고 한다. 2011년 4월 1일에 개봉한 라스트 갓파더는 2011년 4월 21일까지 총 16만 4247달러 밖에 벌어들이지 못하며 처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이는 라스트 갓파더의 전체 흥행 수익의 1%밖에 되지 않는 수익이다. 미국에서 2억원도 못 벌었다고...

자국인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하는 애덤 샌들러의 코미디 영화들이 웃음코드가 다른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가 한국에서도 한참 유행이 지난 1980년대식 코미디로 미국에서 흥행을 기대했다는 것은 참으로 영구스러운 발상이었다[39].

그러나 한국에서는 의외로 어린이 팬들에게는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코미디로 회귀한 방향성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위 문단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점들이 너무 크고 강렬했을 뿐이다. 쓸데없이 할리우드를 끌어들이지 말고, 평소 하던 것처럼 개그맨 후배들과 동료들을 동원해서 저예산 가족용 코미디 영화를 찍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5. 몰락

5.1. 영구아트무비 도산

2011년 7월, 영구아트무비가 도산했다. 곧바로 부인 기사가 나왔으나 직원들이나 관계자들은 다른 증언을 했다. 전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증언. 원문-댓글 참조. 8월 30일, 심형래의 임금 체불에 대한 소식이 기사화되었다.

그리고 고등법원으로부터 "D-War 제작비 명목으로 일으킨 PF대출의 원리금을 갚으라" 라는 판결을 받았다. 기사 제목이 'D-War 심형래 빚더미... 250억 수입은 어디로' 다.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된 상태이나 여기서도 지면 심형래는 현대스위스저축은행에 25억원을 갚아야 한다.

또한 현재 심형래의 집과 회사도 모두 가압류 상태라고 한다. 기사 내용을 보면 채무액이 장난이 아니다. 이와 같은 폐업 쇼크에 스포츠서울닷컴 기자가 직접 영구아트무비를 방문해봤는데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고 황량 그 자체라고 한다. 기사내용. 그런데 심형래 측에서는 차기작 '유령도둑' 의 제작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사 제목부터가...

심형래와 김모씨가 공동 소유한 도곡동 타워팰리스[40]와 담보로 제공한 이모씨 소유의 압구정 현대아파트[41]가 경매에 부쳐졌으며 강서구 오곡동 소재 영구아트 본사[42] 역시 경매에 부쳐졌다,

10월 31일, 영구아트 본사 건물이 한 사업가에 의해 40억에 낙찰되어 팔렸다. 현재 이 영구아트 본사 건물은 재활용품 처리회사가 들어서 있다. 촬영장 및 부속 건물은 모조리 철거되었고 본관 건물만 남아 있는데, 본관 입구에 장식된 노란색 글씨로 "Yonggu Art"라고 씌어진 장식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43]

그렇게 심형래가 공상을 펼쳤던 총본산은 혹평에 걸맞은 쓰레기 처리장[44]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워팰리스는 감정가 53억원으로 시작한 1차 입찰에서 유찰되자 2012년 4월 25일에 최저 응찰 가격을 42억 4천만원으로 내려 2차 입찰에 들어갔지만 여기서도 또 유찰되어 다시 최저 응찰가 33억 9200만원으로 8월 8일에 3차 입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3차 입찰에서 어느 유동화전문유한회사가 40억을 주고 사갔다. 관련 기사.

2013년 4월 30일. 결국 보다못한 심형래의 선후배 개그맨 150여명이 집단으로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협박으로 얻어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자세한건 아래 참조.

5.2. 도덕성 타격

게다가 이와 같은 성 상납설, 정관계 로비설, 카지노 출입설이 기사화되었는데 이쯤 되면 심형래의 이미지는 회복 불능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2011년 9월 2일, 영구아트무비 직원 기자회견이 있었다. 여기서 이들은 정관계 로비설은 불확실하다 했지만 도박설, 횡령설, 총기 제작 등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전문. 또한 퇴직금, 임금 체불 진정서를 낸 사실을 밝히고 도박 및 횡령 혐의와 관련해 심형래 감독에 대한 수사를 의뢰할 계획을 밝혔다.

2011년 10월 18일, PD수첩에서는 영구아트 직원의 폭로가 나왔다. 전 직원의 인터뷰를 통해 "심형래가 술은 먹지 않았으나 여자는 좋아했다" 며 심형래가 자신의 네트워크 내에 있는 여자 400명의 연락처가 담긴 '여자수첩' 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자랑했고 회의 도중 회장이라는 인물과 전화 통화를 하며 대놓고 로비를 하는 등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이쯤 되면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셈이다.

2012년 4월 5일 회사 자금 22억원 횡령 혐의와 불법 총포 개조 혐의로 입건되었다. 기사.

위와 같은 사실로 인해 경찰청에서 압수수색을 했지만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2014년 심형래는 임금 체불로 영구아트 직원이 자신을 고소한 것에 대해 본인이 지시한 것이라 밝혔다. 회사가 경매로 넘어가게 되면 밀린 임금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기사. 다만 어디까지나 심형래 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진위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경매를 통해 넘어간 회사에 대한 금액은 임금체불자에 대해 우선변제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가 경매를 통해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경우[45]인데, 결국 영구아트무비는 폐업, 심형래 본인은 파산신청을 하여 빚을 탕감받은 상황이다. # 그리고 이후 채널A과의 인터뷰에서 "밀린 월급은 디 워 2 감독료를 받으면 갚겠다"고 말한 상황. 기사.

5.3. 회사 자금 유용

PD수첩에서 방영된 바에 따르면 영구아트 직원의 입을 빌려 '제로나인 엔터테인먼트', '영구아트무비' 는 페이퍼 컴퍼니에 불과하고 실제 존재했던 회사는 '영구아트' 뿐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문제는 공개된 회계 자료에 의하면 영구아트무비의 대주주는 영구아트, 그리고 영구아트와 제로나인 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는 심형래인데 영구아트가 영구아트무비와 제로나인 엔터테인먼트 등 두 유령회사 및 심형래가 '빌려간' 돈의 금액이 무려 112억 원에 달한다는 것. 현재 이 금액의 행방은 묘연하며 도산한 이후로 되찾을 길도 사실상 끊겼다. 게다가 위의 문단들에 나온 개인적인 탕진(도박, 여성) 이외에 심형래가 '줄 사람이 있다' 라며 직원에게 억대 이상의 돈을 받아간 적이 있다는 증언도 나온 실정이다.

5.4. 국고 탕진

2011년 9월 30일 국정 감사에서 밀어주기 특혜 의혹이 제기되었다. 콘텐츠 진흥원이 2009년 'OSMU 킬러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으로 2년간 총 7건의 제작 지원을 하면서 ' 라스트 갓파더' 에는 총 11억 8천만원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다른 제작에는 평균 5억 정도의 지원을 해주었는데 그 2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해당 기사.

자세한 기사는 참조 1, 참조 2.

5.5. 기사화된 그동안의 행적

국민일보에서 총정리한 심형래씨의 행적 전문이 있다. 까임의 봇물이 터진 듯 이 기사에서도 다른 기사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게 단지 억눌린 까임의 여파인지 진실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 지금까지 맹목적인 지지층에 의해 억눌려 있던 비판여론의 폭발력이 너무 강해 확인 안 된 사실까지 퍼지고 있는 듯하다. 이 기사 저 기사마다 조금씩 추가된 내용이 있고 없고 차이가 난다. 좀 시간이 지나야 진정되면서 밝혀진 사실마다 확실한 진실 여부가 정리될 듯.

그의 행적에 대해 한겨레21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 독선이라 평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 용가리 전후부터 현재까지의 행적이 나온다. 기사 부분 인용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심 대표의 태도에 대해 주변의 만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때마다 심 대표는 "왜 안 된다고만 하느냐.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니 못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심 대표 특유의 도전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말은 사실 직원들에게는 불통을 의미했던 것이다.

사실 심형래의 이런 면모는 그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개그맨 시절부터 개그와 행사를 우선해서 부르는 대로 방송에 출연하고 행사에 출연했는데 요즘처럼 미리 돈을 얼만큼 받겠다는 식이 없이 되는 대로 출연해서 돈을 떼먹히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초창기 영화를 만들 때에도 개그맨 선후배들을 스스로 캐스팅했지만 계약서를 쓰고 캐스팅하는 일은 없었고, 그저 사적으로 만나서 봉투에 넣은 돈을 적당히 주면 주는 것이고 안 주면 안 주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타 개그맨들 입장에서도 어쨌건 심형래 영화에 나와서 인지도를 높인 이후 이득을 꽤 봤다는 사람도 있으며, 동료 개그맨들을 불러서 술과 여자가 있는 화려한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고 하는데 심형래 본인은 이런 것으로 영화 출연에 관해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즉 스스로 사업체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업가적인 면모를 가지기보다는 여전히 방송에 나가거나 행사를 뛰는 것에 불과한 연기자의 가치관, 그리고 돈이나 계약에 대해서 철두철미하지 않은 구시대적 가치관을 그대로 가진 채 사업체에 뛰어들고 종업원들을 부린 것이 심형래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5.6. 반응

디 워 논쟁이 한창일 때, 디빠들과 키워를 벌였던 진중권이나 김조광수 같은 사람들이 요즘에 이 사람이 맞이한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너무 까지는 말라고 좀 감싸주라는 식의 말도 내뱉는다. 그러나 이거는 사실 부관참시다. 미학비평을 전공한 진중권은 디 워가 돌풍을 일으킬 때, 저게 엄청난 졸작이라고 제대로 비꼬았다. 물론 그때는 진중권이 비난을 받았지만, 요즘은 거의 다 저 내용을 받아들였다. 디빠만이 요즘에도 진중권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더구나 김조광수는 본인이 2011년에 만든,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로 성공을 거머쥔 사람이다. 이미 본인이 심형래보다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아무튼 김조광수가 굳이 심형래를 비난할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진중권과 김조광수가 내뱉은 주장은 아귀가 맞는다. 괜히 이상하게 말해서, 디빠들을 긁어댈 까닭은 없다.

2011년 10월 18일, PD수첩 방영 뒤 진중권은 트위터에 "심구라 또 나올 겁니다. 사기의 씨앗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죠. 문제는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릴 비옥한 토양, 뭐, 세계정복의 꿈으로 거국적으로 안 즐거웠잖아요. 걍 나라 돈으로 블록버스터 영화 두 편 본 셈 쳐요" 라고 남겼다. 참고로 이송희일 트위터에서 관련 사항으로 멘션을 남겼다.

5.7. 이 상황에서 디빠들의 반격

이 상황에서도 양비론을 써가며 심형래를 옹호하는 디빠들이 나온다. 심형래 씨도 문제지만 저 양심 선언한 직원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 디빠들의 주장이다. 그 논리는 이렇다. "한창 심형래가 부정을 저지를 때 양심 선언을 하고 폭로를 하지 월급, 퇴직금 못 받았으니까 배신 때리고 양심 선언을 한다" 이게 주된 논리다. 정말 밑도 끝도 없고 무엇보다 사회 생활에서 임금 체불 못 겪어본 어린 티가 철철 흐르는 철부지 소리라서 정말 말문이 막힌다. 임금체불이라는 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줄 수 있는 설명이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굳이 비슷한 것을 끼워맞추자면 고문이 이와 비슷한 경험이다.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직업으로 인한 수익으로 밥도 먹고 집 유지비도 마련하고(또는 집세도 내고) 전화요금도 내고 각종 비용을 해결해야 한다. 임금체불이라 함은 적어도 1개월 동안 밥도 못 먹고 길에서 잠을 자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모르니까 저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 월급을 벌기 위해 얼마나 피땀흘려가며 일했을지 생각해 보면 디빠들의 망언 중에서도 상 망언이다.

양비론으로 디빠가 아님을 자처하려 하지만 저 정신 나간 주장에서 디빠의 본질은 감출 수가 없다.

디빠 연령대가 취업과는 거리가 먼 미성년층이 대부분임을 생각하면 그들 입장에서 월급 못 받은 일은 용돈 못 받은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월급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노동의 대가이자 경제 수단이므로 용돈과는 엄연히 다르며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야말로 심각한 무지의 소산이다. 괜히 월급 체불 당한 근로자가 소송 걸어서라도 악착같이 월급 받아내는 게 아니다. 그들에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 심지어 가족이 없어도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한다.

직원들의 불리한 증언이 이어지자 직원들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주인을 배신했으니 지들이 살기 위해 주인을 물어뜯는다' 라는 극단적인 언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눈에는 영구아트 직원들이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아니라 어디 중세시대에서 납치해온 노예들로 보이는 듯.

5.8. 디빠 진영의 붕괴

아직까지도 심형래의 실드를 쳐주는 정신 나간 디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디빠들 사이에서도 심형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결국 심형래 팬카페가 해체되었고 카페 주인장은 '황우석의 지지자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라는 글까지 남겼다. 기사 이제 디빠 진영의 붕괴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이 운영하던 디워 팬카페는 이후 카페 매매를 통해 다른 운영자에게 인수인계되었고 기독교 카페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매니저는 카페를 운영하기가 귀찮았는지 또다른 사람에게 매니저를 위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매니저는 악기를 주로 다루고 판매하는 카페로 탈바꿈시켰으나 광고글이 대부분인 유령 카페가 되었다가 2016년엔 카이로프랙틱, 스포츠 마사지 등의 협회와 연관된 의학/의술 관련 카페가 되었다.

여담인데 디 워 개봉 당시 호러 전문 영화 사이트인 호러익스프레스[46]에서 디워가 아쉬운 게 많다고 평하자 디빠들이 몰려와서 엄청난 악플로 도배한 적이 있다. 우습게도 해당 사이트는 운영진들이 90년대 후반 사이트 이름이 호러존이었던 시절부터 꾸준히 심형래 영화들을 꽤 높이 평가하고 리뷰하던 곳으로 일부에서 악의적으로 심빠라며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곳[47]임에도 그냥 디워 하나만 안 좋은 평을 했다고 이런 추태를 벌였던 것이다. 아쉽다면서 여러 단점을 이야기한 것이지, 디워를 무조건 욕한 것도 아닌 리뷰를 했음에도 이런 것만으로 몰려와서 마구 악플로 도배하니 이 일로 이 운영진들도 정나미가 떨어져서인지 심형래 다음 영화들이나 소식은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여줬다.

그 후 어느 순간 새로운 디빠 진영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전의 디빠 진영과 다르게 4만명에 달했던 디빠들은 350명의 잔당들로 축소되었고 활동도 전혀 없다. #

이럼에도 여전히 옹호하는 의견도 보인다. 뭐 저렇게 투자 속이고 뭐하는 게 한국영화계 관행인데 건방지다고 심형래만 닦달했다느니 여전히 심형래만 억울하다는 투로 다같은 정신나간 어거지 양비론으로 옹호하는 의견이 인터넷 포털에서도 종종 보인다. 물론 투자자들을 속이고 직원들의 봉급을 체납한 건 절대로 정당화가 되지 않는다.

5.9. 시위의 달인

옛날에 용가리를 개봉했을 때 거짓말을 했다가 씨네21에서 이걸 알리려 했다. 그랬더니 심형래는 영구아트 직원들을 보내 시위를 하도록 시켰다.

"남동철 기자는 자폭하라!" 1999년 7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의 항의시위 2005년 기사.
"남동철도 기자냐?", "남동철은 자폭하라!" 1999년 7월 어느 아침, <한겨레> 사옥 앞마당에 50여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시위대 속에 간간이 보이는 피켓의 문구에서 이들의 불만과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용가리> 개봉을 앞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로 세간에 알려진 <용가리> 수출액에 의문을 제기한 남동철 기자의 보도에 반발해 항의의 뜻을 전하러 온 길이었다. 상황을 짐작한 <씨네21> 기자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위대를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왔다.

<용가리>는 1998년 칸 영화제 마켓에서 9개국 272만달러의 수출 계약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가 거액에 해외로 수출되는 일은 없었던 만큼 언론은 이를 앞다퉈 보도했고 이후 1년 동안 심형래 감독은 정부의 공익광고에 출연하는 등 시대의 영웅으로 추어올려졌다.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 라는 유행어와 '신지식인' 이라는 수식어도 그때 나왔다. 신문과 TV에 연일 보도되는 <용가리> 수출 관련 내용에 실수출액이 드러나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남동철 기자는 같은 마켓에 참여했던 영화인들과 영구아트무비를 취재하면서 애초 계약이 구속력이 없는 딜 메모였고 그 결과 일부 국가와는 최종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심형래 감독의 성과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언론과 정부의 냄비근성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썼던 거죠." 항의 방문한 직원들은 반론권을 얻고 철수했지만 그들의 풀 죽은 뒷모습은 남동철 기자의 마음에 아직도 무겁게 남아있다.

2011년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천국 11월호.

영구의 추억
허문영 - 전 <씨네21> 편집장 ・ 시네마테크부산 원장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던 심형래의 성공 신화가 허위의 도가니로 판명되는 최근의 과정을 지켜보며 해묵은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1999년 7월 5일 아침, 서울 공덕동에 있는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영구아트무비의 직원으로 구성된 50여 명의 시위대는 손팻말까지 준비해 <씨네21>을 규탄하는 요란한 구호를 외쳤다. 사태의 발단은 그 주에 실린 기사에 있었다. 이후 <씨네21>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 마켓실장으로 일하는 남동철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가 30억 원의 가격으로 해외에 수출되었다는 영구아트무비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로선 이런 의혹 제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 사회가 1997년 말의 외환위기가 몰고 온 충격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벤처 캐피탈이 한국 경제의 구세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용가리>의 엄청난 수출 성과는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심형래는 벤처 캐피탈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김대중 정부는 그를 신지식인으로 칭하며 방송 광고까지 제작했다. "못하니까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 라는 심형래의 모토는 당대의 정언 명령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충무로에서 떠돌던 이야기는 좀 달랐다. 영구아트무비가 맺은 계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MOU)[48] 에 불과하며 30억 원이라는 액수는 영화가 완성된 후 정식 계약 때 논의될 수 있는 수출가의 상한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수출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이 수출가는 영구아트무비 쪽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 전체가 영구아트무비에 완전히 속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 <씨네21> 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수석기자 김영진(현 명지대학교 교수)과 꽤 길게 논의했다. 우리의 결론은 <용가리> 개봉일(7월 17일) 전에 이를 기사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재 및 기사 작성은 남동철에게 떨어졌다. 남동철은 모든 분야에서 하루이틀 안에 일급의 글을 뽑아내 '기사 자판기' 로 불리는 전설의 기자였다. 그의 취재 결과 충무로의 소문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었다. 문제의 기사가 실린 <씨네21>이 발간되었고 분노한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이 몰려왔다. 이날의 시위대는 "남동철은 사과하라"고 구호를 외쳤고 인근 주민 한 사람은 <씨네21>로 전화를 걸어 "시끄러워 못 참겠다. 남동철이 누구냐. 빨리 나와서 사과해라"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 시위는 조선희 편집장과 남동철이 영구아트무비의 비교적 합리적인 간부 한 사람을 설득함으로써 마무리되긴 했지만 <씨네21>이 겪은 최대의 필화사건 중의 하나로 남았다. 이 기사가 심형래 감독이 자신에 대해 지닌 오해, 그리고 한국 사회가 그에 대해 지니고 있던 오해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런 의혹글이 올라올 경우 보통 반박글이나 반박 자료를 올려 의혹을 해소하려고 하는데 심형래 측은 그런 의혹은 해소하려 하지 않고 시위로 묻어버리려고 한 셈이다. 능력과 명분이 부족한 사람들의 최후의 땡깡과 다를 게 없다. 몰락조차 추잡하다.

5.10. 사태 수습을 위한 노력

폐업 사태가 터진 이후 잠적, 일본에서 목격되었다고 트위터를 통해 알려졌으나, 그 사이 귀국한 것인지[49] 채무 해결을 위해 강금실 변호사(전 법무부장관)[50]를 만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도산 후에 영구아트 직원들에게 수억원의 임금 체불 상태에서도 자숙은 못할 망정 2011년 10월 룸살롱에 출입하는 등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심형래 당사자는 별다른 해명이나 발표가 없다는 점이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다가 10월 20일에서야 한 언론과의 전화 통화에서 드디어 해명했는데, 역시나 억울하다는 소리만 할 뿐이다.

10월 31일 회사 자본 횡령 및 불법 총기 개조 혐의로 검찰의 소환 명령이 떨어졌고, 심형래는 12월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같은 달 3일에는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서 심형래는 자신이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의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했음을 인정하고 빠른 시일 내에 갚겠다고 진술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무역보험공사와 기술신용보증기금이 영구아트무비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낸 소송에서는 '심형래는 47억원을 원고 측에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외에도 미디어플렉스 등 심형래 영화에 투자한 업체와 투자자들이 낸 소송도 대부분 줄줄이 원고 승소 판결을 받고 있어서 심형래가 지불해야 할 채무액은 눈덩이 불어나듯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해를 넘긴 2012년 1월 18일에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2차 공판에서는 '4억여 원의 자금을 마련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체불된 모든 임금과 퇴직금을 갚겠다' 면서 선고일 연기를 신청했다. 하지만 저 액수는 직원들이 받지 못한 8억 9천만원의 절반 정도라 3차 공판 때까지 미지급 급여를 모두 지불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2012년 3월 27일 대법원에서 현대스위스 상호저축은행과의 대출금 소송에서 패소했다. 대법원 판결 확정이기 때문에 꼼짝없이 갚아야 할 처지. 은행 측에서 갚으라고 요구한 돈은 25억원 가량이다.

6월 16일 자 뉴스에서 심형래의 최근 근황이 공개되었는데, 디워 3D 버전 및 서부극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를 구상중이라 하며, 영화 관련 테마파크를 건설한다고 했다. 자기 말로는 중국과 일본에서 관심을 갖는다고...

6월 18일 자 뉴스에서는 아예 개드립을 시전. '디워로 아리랑을 알리겠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고 싶다나? 당신 도움 따윈 필요없어! 망상병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다.

위의 기사와 관련해서 JTBC와 심형래가 인터뷰를 가졌는데, 심형래의 생각에 대한 넷상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일단 월급 체납이나 총기 개조 논란 등에 대해 사과나 구체적 해명 따윈 없었으며(동문서답식의 변명)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듯한 사업 계획 등이 까였다. 특히 디워 3D 계획 같은 비현실성 계획이나 아리랑을 이용한 애국심 마케팅 등은 인터뷰 자체 내에서도 비판받았다. 그리고 심형래의 말과 달리 CJ 측은 어떠한 합의 내용도 없다고… 인터뷰에 대한 평 중 하나.

5.11. 차기작

본래 심형래 감독의 라스트 갓파더 후속작으로 가장 유력한 차기작은 '추억의 붕어빵'이었고 실제로 어느정도 제작도 진척된 것으로 보이나, 영구아트가 폐업함으로써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해진 상태다.[51] 현재는 2007년 자신의 최고 흥행작 디 워를 3D로 제작하려고 투자 받으러 다니는 것 같다.

그 외에 신현준과 함께 촬영하는 코미디 영화 '유령 도둑'도 있고, 디워 2도 기획단계, 영구아트가 폐업하기 전에는 '아이워너고홈'이라는 월남전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도 기획했었고, '콘돌'이라는 히어로 영화도 있었고, '용가리 2'까지 기획했었던 걸로 보인다.

2013년에도 빚은 130억에 달해 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디워 2를 통해 재기하겠다고 밝혔다.

5.12. 개인파산 신청과 이혼

2013년 1월 30일 서울중앙지법에 개인파산 신청을 했다. 관련 기사. 결국은 채권자들에게 거액의 피해를 냈을뿐만 아니라 자신도 망했다. 빚만 100억원이 넘는다.

2013년 3월 9일 법원이 심형래 감독의 파산 신청을 받아들였다. 관련 기사.

그리고 2011년 말, 영구아트무비가 도산하는 과정에서 부인 김모씨와 결혼 19년만에 협의 이혼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형래는 10살 연하 김모씨와 1992년 10월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았다. 관련 기사.

일부에서는 회사 부도 후를 대비한 위장이혼을 의심하고 있다. 관련 기사.

2013년 3월 26일. 심형래 본인이 면책 신청을 했으나 심형래의 회사 자금에서 본 사용 목적 이외의 채무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면책을 유보 또는 각하를 논의하고 있으며 심형래의 면책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으로 확정했다. 관련 기사. 다시 말하자면 회사 자금으로 순수하게 영화만 촬영하다가 이 지경이 됐더라면 법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심형래를 도와주겠으나 그게 아니기 때문에 법원은 심형래를 도와주지 못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심형래라는 인간이 단순히 영화만 개판으로 찍어서 돈을 주구장창 날린 걸로 끝났더라면 여기서 면책신청을 받아서 구제받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는 건 죄가 아니니까. 그러나 전술한 본 사용 목적 이외의 채무가 심형래의 발목을 아주 제대로 잡았다. 한마디로 심형래는 카지노만 안 갔어도 여기서 구제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대법원에서도 심형래를 도와줘서 효과가 있다고는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심형래의 면책신청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심형래의 면책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심형래의 빚은 대법원에서 적당히 조정하고 심형래는 차기작을 준비할 마지막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졌겠으나 심형래의 인격이 그렇다는 게 밝혀진 이상 이 마지막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만약 심형래가 영화감독으로서 무능하더라도 성격만이라도 성실했으면 마치 복면달호에서의 이경규의 포지션처럼 심형래는 투자자로 남고 실력 있는 감독을 영입해서 촬영하여 그럴듯한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화감독의 이름을 심형래로 걸고 실제로는 심형래보다 넘사벽으로 뛰어난 감독이 찍어서 심형래는 이름을 빌려주고 찍거나 다른 실력 있는 감독과 공동감독 체제로 간 뒤 그 밑에서 열심히 배운 뒤 빚도 갚고 영화감독으로서 좀 더 배우고 일석이조를 노려봄직했다. 그러나 카지노, 룸살롱 등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탕진했으니 법원의 논지는 "이 사람에게 돈 주면 빚 안 갚고 영화도 안 찍고 카지노에 갈 놈" 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3년 4월 30일날 열린 항소심에서도 그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심형래가 세운 증인 이씨는 "심형래 감독은 임금 지급을 위해 친인척, 대출 등을 통해 돈을 빌렸다. 뿐만 아니라 강원랜드에서 지인들을 즐겁게 해주고 1억 원을 빌리기도 했다" 라며 증언했다. 또한 심형래 측 관계자는 "심형래 감독이 항소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빨리 방송을 재개해야 직원들 임금 지불을 해줄 것 아니느냐 라고 밝혔고 그 와중에 심형래는 재판부에 심형래 방송재개와 관련한 KBS, SBS 공채 개그맨 150명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 탄원서도 진정성이 의심이 되는게, 방송계에서 위계질서 의식이 가장 강력한 개그계의 환경을 생각했을 때 이 '공채' 개그맨들의 탄원서를 어떻게 받아냈을지는 안 봐도 DVD. #[52]'유재석에게 똥군기를 잡으라고 명령을 한 적이 있다.''' 유재석은 연기로 하는 척만 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걸려서 유재석도 같이 똥군기를 당했다. 이것만 봐도 저 탄원서를 어떻게 받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2013년 6월경에는 이마트 에브리데이 같은 곳에서 행사를 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근황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5.13. 빚 탕감 결정

2013년 8월 9일 서울중앙지법 파산1단독 원용일 판사는 8월 7일 심형래의 면책(免責) 신청을 받아들여 170억여원의 금융권 채무에 대해 면책 허가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창의성이 중시되는 시대에 패자부활의 기회를 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라면서 "빚을 안고 사회에서 낙오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재기하게 도와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 라고 밝혔다. 이 결정에 대해 채권자들이 14일 이내에 항고하지 않으면 확정된다. 파산법 566조 5호에 따라 근로자의 임금·퇴직금 등에는 면책의 효력이 미치지 않지만 '영구아트무비' 전(前) 직원 43명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 등 8억 9153만원을 지급해야 할 책임은 심형래가 아닌 법인에 있기 때문에 이번 결정으로 심형래는 각종 채무에서 사실상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형사 책임은 별개다. 그 뒤 2013년 10월 11일에는 15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이후 한 영화계 관계자는 심형래가 어린이용 영화 제작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빚 탕감 결정 이후 미성년자와 클럽 룸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올라온 해명글에선 우연히 보게 되어 같이 사진만 찍었다고 나왔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심형래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지라, 그러한 해명글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만큼 심형래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 어느 정도로 막장인지를 보여주는 일화.[53]

2016년 12월 말쯤 세금에 시달리는 듯 하다.

6. 어머니의 별세

https://youtu.be/vtLr85z29Y8
유독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심형래는 뛰어난 효자였다. 빵빵한 재력을 자신의 여흥 뿐 아니라 모친을 돌보는 데도 아낌없이 썼다.

2014년 3월 그의 어머니는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어머니의 죽음에 그를 동조하는 상당수의 개그맨들도 추모하는 등의 안타깝께 여겼다. 아무리 반쯤 인간 말종 신세로 이미지가 추락한 상태라 해도, 적어도 그가 효자였다는 점은 거짓이 아니다 보니 이때는 그의 안티라도 대부분 그의 효심은 인정했다.

7. 재기 시도

그리고 2014년에는 디 워의 속편에 관한 이야기들을 언론에 풀더니만 급기야 비스타케이 호텔과 100억 원의 투자협약을 체결했다라 한다.

그런데 2014년 7월 21일, 네이버 영화의 '디워 2'의 리뷰란에 심형래가 글을 올렸다. 내용은
"안녕하세요. 심형래 감독입니다. 소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고 스릴 넘치고 액션에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노력하겠습니다. 특히 시나리오, 연출에 있어서 반성하고 전문 작가와 전문 감독과 협업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협업하겠습니다. 영화제작중이라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댓글은 일일이 남기지 못하지만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빠짐없이 모두 읽고 좋은 영화를 만들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낚시글일 수도 있고[54] 그 동안 영화만 못 찍어서 욕 먹은게 아닌지라….

게다가 연극을 통해 '세 번째 도전'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아래 "기타"에서 설명하는 사건사고들 말고도, '영구'라는 옛날 코미디가 지금도 먹힐지는 알 길이 없다. 이거랑 매우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남자의 자격에서 70~80년대 코미디계를 풍미했던 멤버들이, 과제로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 도전했다. 여기서 나름대로 열과 성을 발휘해 꽁트 형식인 코너 하나를 짜고, 그것을 후배 개그맨들과 당시 개콘 PD였던 김석현 앞에서[55] 보여줬지만, 바로 퇴짜를 맞았다. PD는 너무 옛날 스타일[56]이라 개그 트렌드가 변한 지금[57]으로서는 아예 안 먹힌다고 말했다. 결국 멤버들은 당대 인기 코너였던 분장실의 강선생님을 패러디한 '분장실의 이선생님'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참고로 '자연즈럽게' 같은 유행어 이소룡 흉내처럼 개인기를 많이 만든 이경규, 그 이경규와 듀엣으로 많이 활동한데다가 허리케인 블루처럼 유명 코너도 많이 해 본 이윤석, 국찌니빵에 '여보세요?', '밤 새지 마란 말이야!' 같은 유행어도 여럿 만든 김국진은 심형래랑 같이 움직이면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다. 게다가 저 셋은 꾸준히 방송에 손을 댔기 때문에 그나마 현재 트렌드를 조금이라도 알았다. 그런데 저런 세 사람조차도 바로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려고 한참이나 방송 세계를 떠난 심형래는 저 세 사람보다 현재 트렌드에 어두울 뿐이다. 물론 심형래가 진심으로 현재 트렌드를 잘 눈치채고 괜찮은 기획을 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찍은 영화를 보면 그런 기대조차 품기가 매우 어렵다.

중국 재력가에게 수백억원대의 거액을 투자받아 디 워 속편인지와 테마공원인지를 만든다고 한다. 기사 링크. 그러나 2018년까지 영화 속편과 테마공원 어느 쪽도 작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18년 4월 10일, 심형래가 디워2 연출을 안 하고 있다고 스포츠 경향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입장을 밝혔다. 연출은 맡지 않는다는 점에 제작을 하는 게 맞는지 의심을 받는 중.

8. 코미디 복귀

2014년 8월 20일, OBS 토크쇼 나는 전설이다 영구 분장하고 출연해서 개드립을 날렸다.
최양락 : 맛이 약간 간 거 같아요.
심형래 : 너도 파산 한 번 해봐![58]

유재석의 성공이 세계 4대 불가사의라고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카더라.[59] #

1960-70년대 악극 형식의 '돌아온 영구'쇼를 준비중이다. 기사.

파일:attachment/심형래/14012844_p.gif

포스터에 '전속출연'만 붙이면 변두리 나이트클럽 포스터다. 다만 같이 출연한 김세레나, 옥희[60], 조경수[61]는 1960 ~ 1970년대에 상당히 인지도가 있던 가수였다.

2015년 2월 21일, SNL 코리아 시즌 6의 첫번째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영화 및 감독직 관련으로 그 동안 해왔던 여러 망언과 행동에 대한 셀프 풍자를 하거나, 가장 자신있는 개그인 슬랩스틱 및 영구 연기 위주로 극들을 꾸며왔다.
"웃음이 많으면 경기도 좋아지는 것 같다. 옛날에 우리가 코미디를 할 때는 웃음이 많고 경기도 좋았다. ... 그런데 우리 사회에 ' 미투 운동' 등이 나오면서 개그를 하기도 어려워졌다. 개그나 유머를 하려고 해도 서로 경계하고, 무서워하게 됐다. 말을 하나 잘못하면 고소를 하고 사회가 무서워졌다. 살벌해졌다. 그래서 서로 대화가 끊기고 화합이 끊겨서 안타깝다." - '19금 버라이어티 심형래 쇼' 기자간담회

미투 때문에 웃기기 힘들다는 심형래, 그의 코미디를 거부한다

그러나 2018년에는 ' 19금 버라이어티 심형래 쇼'라는 타이틀의 공연을 만들었는데 공연 기자 간담회에서 ' 미투 운동'으로 인해 개그가 어려워졌다는 발언을 해 비판을 받았다. 그 후 티켓 판매 부진과 수익성 부족 등의 이유로 공연을 불과 3일 앞두고 전격적으로 공연을 취소하였다. 심형래쇼' 공연 3일 전 취소

유튜브에 심형래를 검색하면 장소를 가리지않고 행사를 뛰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그 행사 장소가 과거 심형래의 개그맨시절 명성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영상의 댓글 분위기에서도 "어쩌다 저런곳에서..."라는 동정의 뉘앙스를 심심찮게 보고 느낄 수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지금 그가 어느정도의 위치까지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2019년 6월 10일부터 코미디TV 스마일킹의 " 단군의 후예들"이라는 코너에 나오는 중이다. 진행자인 박승대가 권유했다고. 여기서 파트너 역할인 황현희가 심형래를 보고 자란 세대면서 간접적인 악연[62]이 있었다는 걸 알면 재미있는 조합이다. 이로써 2004년 '쇼 행운열차' 이후 15년 만에 방송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8월 8일부터는 OBS에서 '심형래의 별별장터'도 시작했다. 개그맨들과 악극 스타일로 꾸며 중소기업 제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6월 5일부터 녹화 방송울하는 MBN의 예능 보이스트롯에 예선자로 참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가왕이 된단 마리야~ 흑마라는 타이틀로 복면가왕에 출연했다. 놀랍게도 2라운드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뽐냈는데, 개그콘서트를 비롯한 지상파 개그 프로그램이 모두 폐지되어서 후배 개그맨들을 응원하고자 출연했음을 밝혔다. 정말로 상상도 못한 정체였기에 개그맨 패널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은 물론, 대선배의 방문을 반가워했다.

9. 마당놀이 진출

2018년 5월 4일부터 13일까지 마당놀이 뺑파게이트에 출연하게 되었다. 비록 사적인 부분의 이미지 실추도 겪고 영화제작자로서도 처절하게 망했을 지언정 코미디언으로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물인지라 그 역량으로 마당놀이에 참가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먹고 살기는 하고 있다. 배역은 김성환과 같이 황봉사 역이다. 내용이 황봉사가 심봉사인 척 해서 심봉사의 인당수 사건 보상금을 노리고 사기를 치려는 내용이다.

남자 출연진들이 필수요소급인데 심형래 이외에도 원래 마당놀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윤문식을 비롯해서 김진태, 김성환, 최주봉 등이 출연한다.

이 뺑파 게이트는 추석 특집으로 2018년 9월 24일부터 2018년10월 05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재공연한다. 윤문식은 빠진 채 심형래가 주연을 잡았다. 내용은 사극에서 벗어나 현대극 형식으로 탈바꿈했고 스토리 자체는 동일하다.[63] 다행히 이건 천성에 맞는 일로 돌아와서인지 흥행은 아주 잘되고 있다. 얼마나 초대박을 쳤는지 티켓을 못 사서 그냥 집에 간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본인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마당놀이의 특성인 관객들과 어울러져 논다는걸 봤을땐 최적의 작품이었다.

10. 다시 사업가로

2021년 대구 향토 외식업체 '삼정코리아' 창립 당시 홍보이사로 영입되었고, 첫 해에 '홍콩할매불닭발' 체인을 창업시키도록 한 후 2022년 본인의 이름을 건 양대창 구이전문점 '심형래의 불꽃 양대창'이라는 브랜드를 차렸다. 이들이 엄청나게 대박이 나면서 전국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두면서 성공하였다. #

대다수 대중들은 심형래가 쓸데없이 영화타령 하지 말고, 이 사업이나 잘 하고 가끔 몸개그 쇼나 뛰며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64] 대중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심형래가 이 사업을 말아먹고 다시 이전부터 미련을 못버린 영화계로 복귀해서 크게 말아먹는 것이다.


[1] 당시에는 대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부설 교육기관 소속이었던 심형래의 참가는 당연히 부정참가였다. [2] 방송에서 디워에 대한 평론이 화두에 오르자 한 말이다. 심형래가 개그맨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어 다른 영역으로 진출하려 하는 것 같다며 기타노 다케시같은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도 있지만 심형래는 그런 재능은 없다고 비평했다. [3] 전두환 정권이던 신인시절, 희극인 축구모임에 검사들과 수사관들이 갑자기 여러명 나타나서 상당수의 개그맨 선배들을 마약혐의로 마약검사하겠다고 찾아다녔는데, 후보선수로 벤치에 있던 심형래는 검찰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만 듣고 검찰청 행사 섭외를 하러 온 줄 알고 수사관을 붙잡고 "그 사람 말고 제가 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정신나간 놈인줄 알고 피했다는데, 심형래는 "제가 다 아는데 제가 가면 안될까요."라면서 따라다니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막 데뷔한 심형래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했기에 어떻게든 행사출연료를 받고 싶었다고 한다. [4] 참고로 당시는 아무런 증거 없이 막연한 소문만으로 연예인들을 검사나 형사들이 수사한 적이 많다. 현재는 위헌이라 안 되지만 1970~80년대에는 매일같이 일어나던 일이었다. 가수왕 조용필이 무고하게 대마초 혐의로 체포당해서 사흘간 고문까지 당하고도 몸에서 대마초 성분이 전혀 안 나와 무혐의가 되자 아무 보상 없이 풀려난 것도 모자라 방송출연 정지를 당해 극심한 중증 우울증에 걸렸었다. 자살충동까지 자주 들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검사와 형사가이 잘못해놓고 의혹을 받은 것만으로 연예인 책임이라고 거꾸로 방송국 간부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5] 최양락 밥묵자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회고하기를 처음에 심형래가 바보 연기를 하겠다고 아이디어를 냈을 때 동료 게그맨들은 심형래를 무시했다고 한다. 최양락을 비롯한 개그맨 동료들은 그전까지 대한민국 코미디 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그를 대중들에게 선보여서 미답의 길을 개척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는데 심형래는 이미 배삼룡, 이주일같은 선배 개그맨들이 뽑아먹을 대로 다 뽑아 먹은 바보 연기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 그러나 심형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자신만의 바보 연기를 선보였고 그 결과 데뷔하자마자 인기 스타가 되었다. [6] 파리와 펭귄은 일본 민방의 개그 프로에서 가져온 표절 캐릭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이 1960년대 중반부터 약 30여년간 지속되어온지라, 개그 표절이 딱히 심형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는 베른 협약 같은 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위반도 아니었다. [7] 1970년대 당대의 방송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방송사에서 여로를 틀어주려고 해도 5분짜리 클립영상이나 영화판 여로만 틀어줄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8] 의외로 연기하기 쉽지 않은 분야라고 한다. 느릿~ 느릿한 행동, 팔랑귀, 세월아~ 네월아 판단 늦은 모습을, 순발력 좋은 연예인들이 의외로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영화 라스트 갓파더 개봉 즈음 유재석이 본인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심형래와 함께 바보 연기에 도전했는데, 여기서도 바보를 연기해야 할 사람이 재빠른 상황 대처능력을 보이는 바람에 여러 차례 실패하는 장면이 나온다. [9] 이미 일본의 개그 프로그램 8시다 전원집합!에서 시무라 켄이 먼저 비슷한 기믹을 선보인 바 있었지만 심형래는 여기에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본인만의 독특한 리듬으로 갑작스럽게 상대의 뺨을 때리거나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요소를 섞음으로서 몸개그적인 면을 더욱 강화시키고 발음을 불명확하게 발음하거나 일부러 말을 더듬어서 바보라는 캐릭터 성을 명확하게 하여 본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는 개그 스타일을 완성,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10] 오히려 80년대 당시 시무라 켄을 표절해서 인기를 끈 대한민국 개그맨은 심형래가 아니라 선배인 이주일이었다. 이주일이 삽시간에 인기 코미디언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라 불리던 김경태가 연출해서 1980년에 TBC에서 방영한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제목부터 포맷, 심지어 방송 시간대 까지 시무라 켄이 소속되어 있던 더 드리프터즈가 주연한 8시다 전원집합을 모조리 카피해 온 것이었다. * 시무라 켄은 70년대 후반부터 프로그램의 에이스 역할을 도맡아했는데 이주일이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 맡은 역할들 역시 시무라 켄이 주연한 콩트를 카피한 것이었다. 심지어 1977년에 8시다 전원집합에서 시무라 켄이 카토 챠와 같이 정장을 입고 가짜 수염을 달고 나와서 음악에 맞춰 엉뚱한 춤을 추는 '수염 댄스'라는 콩트를 했는데 여기서 영향을 받아 이주일의 상징적인 개그인 '수지 큐'가 탄생한 것 또한 암묵적이긴 하지만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를 부정하기엔 복장부터 전체적인 컨셉이 너무 흡사하고 시기적으로도 시무라 켄의 수염 댄스가 2~3년 정도 더 앞선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기예를 중간에 펼치는 수염 댄스와는 달리 수지 큐는 그런 게 없었다는 정도. [11] 다만, 당시 우리나라는 베른 협약 같은 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위반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주일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을 통해 스타가 된 후에는 시무라 켄의 개그를 따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시청자의 예상을 뒤엎는 타이밍에) 실없는 소리를 툭하고 던져서 의표를 찌르는 약간 템포가 느긋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아무말 대잔치 스타일의 스탠드업 코미디 만담으로 개그 스타일을 바꾸어 활동했다. [12] 흔히 지석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김수용 이창명이었다고 해명했다. [13] 유재석, 김수용은 잘 알려진 반 똥군기 인사이다. 후배를 때리기는 커녕 꾸중도 잘 안한다. [14] 쓰리랑 부부가 인기를 끌면서 상당히 친근하고 순한 이미지를 쌓았고, 외모도 잘생기고 젠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형래보다 김한국이 무서운 선배로 유명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모든 방송사를 아우르는 군기반장으로 유명한 김정식 다음으로 무섭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그러나 마냥 후배들을 괴롭히는 속칭 똥군기의 주역은 아니었고, 잡을 땐 잡고 풀어줄 땐 풀어주는 전형적인 리더 스타일의 선배였다고 한다.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 술과 밥 잘 사주기로 매우 유명했다고... 이봉원이 큰 손으로 후배들에게 베푸는 습관도 다 김한국에게 배운 거라고 한다. [15] 당시 SBS는 심형래, 최양락, 김미화, 이봉원, 정재환, 박미선같은 타 방송사 개그맨들을 여럿 섭외하고 신동엽, 표인봉, 전창걸 등 재능이 보이는 사람들을 특채로 뽑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이들로는 안 된다고 판단하여 1992년 3월 제 1기 공채 개그맨( 김경민, 윤정수, 김경식, 정선희 등)을 새로 뽑았고 청춘행진곡 폐지로 설 자리를 잃었던 MBC 출신의 김창준, 김은태, 이현주, 이웅호를 영입했다. 그러나 SBS로 이적한 타 방송 출신 원로 개그맨들은 거의 대부분이 토사구팽되었다. 특히 MBC에서 이적한 사람들이 대부분 피해자가 되었는데 개국 때 이적한 정재환은 MBC 시절 잘 하지도 않던 콩트 코미디에만 집중 투입되다 보니 KBS 출신의 최양락과 이봉원, SBS가 직접 키운 신동엽, 김경식, 홍록기 등에게 밀려 용도폐기되었고 '청춘행진곡' 폐지 뒤 방송사를 옮긴 김은태는 비슷한 유형(작은 키)의 윤정수, 김경식 뿐 아니라 신동엽, 홍록기 등 자사 출신 신인급한테 밀려서 용도폐기되었다. [16] 물론 지방이라고 해도 중계유선방송으로 송출되는곳도 있었지만 아무튼 전국구 방송인으로써 메리트가 떨어진것은 사실이었다. [17] 이적해 온 개그맨들이 초반에만 반짝했을 뿐, 모두 용도폐기당한 상황을 보면 현명한 대처이긴 했다. [18] 당시 '웃으며 삽시다' 코너에는 심형래와 비슷한 키였던 김은태, 윤정수, 김경식 등이 고정 출연을 하고 있었다. [19] 사실 심형래가 안 나올 거 같았으면 심형래와 대등한 인지도의 배우를 캐스팅했어야 했지만, 우뢰매 6에서 심형래 대신 캐스팅했던 배우라는 게 당시에는 듣보잡이었던 한정호였다. 굳이 심형래를 쓰지 않아야 했더라면 김정식이나 이창훈 같은 심형래급의 네임드를 썼어야 했다. [20] 90년대 후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심형래가 홍보차 출연한 적이 있는데, 만만찮은 성격으로 유명하고 립싱크라는 이유로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컨츄리꼬꼬 god가 나오면 대놓고 방송 펑크를 내던 이소라였다. (실제로 그 후신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비가수 연예인들도 종종 나왔지만,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는 가수가 아닌 사람은 거의 안 나왔다.) 그런데 코미디언 출신의 심형래가 나왔을 때 이소라는 만면에 웃음이 넘쳐 흐르고 동경하던 톱스타를 대하는 듯한 올바른 태도로 잔뜩 덕담을 교환했다. 이것은 1969년 생인 이소라에게 심형래가 어떤 위상을 가진 연예인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 <방범대원 용팔이>, <돌아온 용팔이>. [22] 이 중 본인이 주연까지 한 건 총 12편이다. [23] 특히 그 둘의 아들 박준규 허준호가 모 토크쇼에서 한 말에 의하면 어릴 때 두 사람이 같이 크고 같이 사고치고 집안도 같이 망해서 더 친하다고 한다. [24] 서세원 조폭 마누라가 성공할 당시 D-WAR 때의 심형래가 보여준 것 처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엄청난 자만심을 방송에서 내비췄지만 이후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인수 과정에서의 안 좋은 일들, 탈세, 가정폭력 같은 사건들로 범죄 및 논쟁거리를 여럿 만들며 연예계의 흑역사가 되었다. 상세한 건 서세원/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 [25] 이후 이경규는 제작자로 포지션을 바꿔서 복면달호 전국노래자랑으로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26] 전유성은 '칙칙이의 내일은 참피온'의 흥행 실패 후 비디오용 어린이 영화 감독으로 전환했다. [27] 원래 영화계가 드라마나 방송 쪽을 본인보다 급이 낮은 곳들로 보고 인정을 안 할 정도로 자존심이 높은 곳이고, 어느 분야나 텃세라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일본 기타노 다케시도 코미디언 출신으로 처음 영화를 만들 때는 영화계에서 비웃었고 인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결과물, 즉 영화의 작품성으로 그런 편견을 깨고 인정을 받았다. [28] 충무로의 영화 제작자인 김조광수가 디 워 논란 때 쓴 글을 보면 대충 잘 나타나 있다. 자신들은 몇 년 동안 영화에 모든 것을 걸어도 적절한 투자를 못 받아 손 놓고 있는데 어디서 갑툭튀해서 B급 영화나 만들면서 온갖 언플로 돈을 끌어모았으니… [29] 당연하지만 '서울대 겸임교수'의 임용은 최소 박사학위는 있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심형래는 고졸이었으니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30] 그래서 해저물 때가 되면 교내의 신축 교양관, 산학관, 경영관 주차장에 대형승용차가 줄줄이 들어왔던 것이다. 사실 그 건물들과 거기 다니는 학생 장학금이 다 이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기부금가지고 조성한 것이다. [31] 다만 영구와 공룡 쮸쮸도 세트장과 공룡모형을 별도로 제작했기 때문에 티라노의 발톱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적지않은 제작비가 든건 사실이다. [32]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문서에 나오는 1978년 영국 괴수영화 환성의 섬 아트란티스도 줄거리로는 정말 티라노의 발톱과 차이가 있을까 날림이지만 여러 종류의 괴수 등장으로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는 꽤 수작으로 평가받듯이 괴수 등장 및 그 효과에 치중해서 줄거리적으로 날림이 되는 게 이 장르에 많다. [33] 제로=0, 나인=9. 즉 영구이다. [34] 더군다나 고질라에 사용된 CG는 상당히 수준급으로, 지금 봐도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용가리는... [35] 주의할 점은 당시까지만 해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미지가 컸고 아직 하술될 세상의 지탄을 받을 만한 짓거리들은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IMF 사태 때문에 국민들이 절망에서 일어서서 세계구급으로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성이 컸다. [36] 심형래가 용가리의 흥행 실패를 인정하고 비디오렌탈과 방송국에 방영권을 팔았다면, 그럭저럭 손실은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는데 용가리 2001을 재촬영하고 재개봉하면서 완전히 망해버렸다. [37] 말이 성공이지 위에도 자세한 사항이 나와 있지만, 이 영화는 실제로는 거액의 적자를 본 개망한 영화다. 800만 관객을 들였어도 그보다 더 퍼부은 제작비 때문에 흥행을 전혀 못 한 영화. [38] 솔직히 한국 영화 중 전체적인 화면의 질감, 색감까지 정밀하게 신경 쓴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39] 어떤 의미에서 보면 최소한의 시장 조사도 안 하고 돈만 때려부어서 대충 영화를 만든 것이라 볼 수도 있다. [40] 전용 면적 244㎡, 채권자 하나은행, 청구 금액 8억 8800만원. [41] 전용 면적 109㎡, 채권자 하나은행, 청구 금액 10억 2300만원. [42] 대지 6827㎡, 건물 면적 1655㎡, 감정가 37억 1646만원. [43] 원래 이 건물은 서울오곡초등학교가 위치했던 건물인데, 김포공항 바로 옆이라 항공기 소음이 너무 심했다. 결국 1990년대 후반 주민들을 공항동에 조성한 주택단지로 이주시켰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도 1999년 폐교했고 빈 건물로 남아 있다가 2000년대 초반 영구아트가 사들인 것. [44] 이 부지는 세원건설(이 이름을 쓰는 건설회사가 흔해서 특정할 수 없다) 혹은 SS리싸이클의 소유로 되어있는데, SS리싸이클은 재활용업체지만 업종이 '직물, 편조원단 및 의복류 염색 가공업'으로 분류된것으로 보아 의류 재활용업체로 추정된다. 다만 사람인의 정보를 보면 세원건설=SS리싸이클인것으로 보이며 의류뿐이 아닌 종합 재활용 처리장으로 보인다. [45] 법원은 구제 기관이 아니다. [46] 익스트림무비의 전신 [47] 그러나 디빠처럼 무조건 옹호한 게 아니라, 저예산 영화로 꾸준히 만들고 하던 여러 점으로 평가하던 곳이다. 참고로 남기남도 엄청 호평하던 곳이다. [48] 대통령 박근혜가 뻔질나게 해외 순방하다 돌아오면서 해외 순방의 성과로 매번 요란하게 과대 허위 포장하며 들고 오는 바로 그 MOU다. [49] 기사. [50] 저런 거물급 변호사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착수금으로만(이후 재판 비용은 따로 계산) 수억원을 내야 할 정도다. 그 돈이면 영구아트 직원들의 밀린 임금을 상당히 보전할 수 있는 금액이다. [51] 당시 영구아트 미니어처 관련 스탭이 폐업후 해당 작품 관련 미니어처 작업물을 |블로그에 공개한 바가 있다. [52] 거기다 이 인간은 과거에 [53] 그러나 사진 속만 보면 미성년자인지 성인인지 모르는 건데, 사진 한 번 찍어준 걸로 너무 지나치다는 사람도 많았다. [54] 일단 닉네임이 hyun****이고, 리뷰도 겨우 이거 하나 뿐이다. [55] 개콘 특성상 이렇게 새 코너를 만들면 다른 개그맨과 PD 앞에서 선을 보이고 검증받아야 한다. [56] 길고 긴 상황 속에 소소한 웃음을 유발. [57] 짧은 상황 속에 빠르게 치고 빠지는 굵직한 웃음을 유발. [58] 참고로 최양락이 나이는 4살 어리지만 데뷔로는 1년 선배다. 심형래가 82년 KBS 특채이고 최양락이 81년 MBC 데뷔라 기수가 얽힐일이 없어 나이로 위아래 정한 듯. [59]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당시 과거에 유재석에게 '넌 성공하겠지만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참아라'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재석의 성공이 불가사의라고 한 것이 본심인지 아니면 TV에서 개그맨들 특유의 웃기기 위한 허풍을 떨었던 것이며 또한 승승장구에서 했던 그 말이 본심인지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60] 이 분의 남편은 그 유명한 홍수환. [61] 그 유명한 조승우의 친부다. [62] 심형래가 KBS 희극인실에 기부한 안마의자에 황현희가 앉아 건방을 떨다가 선배들에게 찍혔다. [63] 그러니까 옷만 현대 의상으로 바뀌고 음악만 락밴드나 발라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64] 사실 심형래는 영화를 제외하고 사업 경험이 전무한 편인데, 개그 이미지를 사업에 접목시켜 활용하다보니 요식업 업종에서 잘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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