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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될 당시의 메리 셀러스트호를 묘사한 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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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선 미스터리 사건. [age(1872-12-0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많은 창작물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배의 이름은 Mary Celeste[1]인데 1980년대 일본 서적을 번역한 서적에선 '마리 세레스트'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나왔다. 브리건틴 형식의 범선이며 지금도 메리 셀레스트, 메리 셀레스테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사건의 전조
배에 단 깃발은 유니언 잭 문서에 서술된 영국의 민간 상선기(Red Ensign)다. 캐나다 식민지의 깃발로 사용되었고 캐나다/국기 제정 이전까지 캐나다 국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메리 셀러스트호의 초기 이름은 '아마존호'였으며 군함이나 어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역선으로 건조된 범선이었다.
이 배는 1861년에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의 스펜서 섬에서 조슈아 듀이스(Joshua Dewis)에 의해 건조되었다. 첫 번째 선장 로버트 맥렐런은 소유주 중 한 명의 아들이었는데 임명된 지 9일 만에 폐렴에 걸리고 첫 항해에 나서자마자 죽었다.[2] 다음 선장인 존 너팅 파커는 어선을 들이받았고 수리를 위해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수리 중 배 가운데에서 화재까지 일어났다. 캐나다에서 유럽으로 가는 첫 대서양 횡단 항해도 재앙 그 자체였는데 영국의 도버 해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고 결국 새 선장은 해임되었다.
시작은 좀 불길했지만 아마존호는 노바스코샤의 소유주들 하에 6년간 이윤을 남기면서 순탄한 항해를 했고 그동안 서인도 제도,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왕래하며 다양한 종류의 화물을 운반했다. 1867년 폭풍으로 좌초되었다가 구조받은 후 뉴욕의 리차드 하인즈가 1,750달러에 사서 8,825달러를 들여 수리하였다.
1868년 미국 선박으로 등록되었고 그 다음 해에 '메리 셀러스트'로 개명되었다. 소유권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은 J.H.윈체스터[3]였는데 배에 관련된 저주를 의식해서인지 이름을 바꿨으며 배의 밑 부분 일부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뱃바닥 부분에 구리판을 깔고 갑판의 선실을 길게 하는 등 배를 튼튼하게 개조했다. 이로 인해 배는 마스트 2개, 길이 103피트, 폭 25피트, 288톤의 대형 선박이 되었다.
이렇게 아마존호는 메리 셀러스트호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벤자민 브리그즈(1835~1872 ?)가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리 셀러스트호는 알코올 원액을 잔뜩 싣고 제노바까지 갈 계획이었다. 1872년 11월 7일 브리그즈 선장의 지휘 아래 메리 셀러스트호는 뉴욕을 출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메리 셀러스트호는 제노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메리 셀러스트호가 재난으로 침몰했거나 해적에 나포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3. 사건 발생
3.1. 배의 발견
메리 셀러스트호가 출항한 지 1개월이 지난 1872년 12월 4일[4] 대략 오후 1시경 영국 상선 디 그라티아호[5]의 조타수 존 존슨은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사이의 북 대서양에서 마스트 2개를 단 수상쩍은 범선 1척을 발견했다.디 그라티아호의 위치는 대략 북위 38°20', 서경 17°15', 포르투갈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그 배는 8km 정도 디 그라티아 호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배는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뱃머리의 삼각돛대와 앞 돛대의 스테이 세일만 펼친 기이한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다. 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 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배는 바로 메리 셀러스트호였다.
디 그라티아호의 선장 데이비드 모어하우스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알고 브리그즈 선장과 개인적으로 술도 마신 적이 있었다. 때문에 모어하우스 선장은 자기 배보다 앞서서 출발한 메리 셀러스트호가 어째서 아직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선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366m 정도까지 접근하여 2시간 동안 배를 세심히 관찰했다고 한다. 배는 항해 중이었지만 우현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항해하고 있었고 천천히 지브롤터 해협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조타석이나 갑판에 아무도 없었고 선원들은 배가 표류 중이라고 결론지었다.
디 그라티아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데보(Oliver Deveau)는 선원 몇몇을 이끌고 메리 셀러스트호에 올라탔다. 데보는 "배에 아무도 없으며, 배 전체가 완전히 젖어 엉망인 상태"라고 보고하였다. 갑판들 사이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화물칸에는 물이 1.1m 높이로 차 있었다. 작동 가능한 물 펌프가 하나 있었고 다른 2개는 분해되어 있었다. 구명정 1척이 사라져 있었으며 선원들이 매우 급하게 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배는 가라앉고 있지 않았으며 항해가 가능한 상태였다.
3.2. 배의 상태와 의문점
배 안에는 상당한 양의 물이 차 있었지만 여전히 항해에는 문제가 없었다. 물 펌프 3개가 꺼내어져 있었는데 2개는 분해된 상태었고 하나는 발견된 순간까지도 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다.선장의 항해일지를 제외하면 모든 서류가 사라져 있었고 항해일지는 11월 25일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배의 시계는 고장나 있었고 나침반은 부서져 있었으며 육분의와 경선의가 사라져 있었고 배의 유일한 구명정도 사라져 있었다. 배의 주 돛을 올리고 내리는 밧줄(peak halyard #)도 없었고 밧줄 하나[6]가 배에 아주 단단하게 묶여 있었는데 반대쪽은 물에 드리내려져 배 뒤쪽을 따라오고 있었으며 그 끝이 매우 해져 있었다.
화물인 알코올 통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중 9통은 비어 있었다.[7]
선원들의 개인용품들이 그대로 남았으므로 해적들이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어 보였다. 싸움이나 폭력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음식과 물도 항해하기 충분한 양이 모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어쨌든 메리 셀러스트호는 11월 25일 이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진 채 열흘 넘게 유령처럼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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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스푸너 브리그즈 선장 (1835~1872 ?) |
아내 사라 엘리자베스 콥 | 딸 소피아 마틸다[8] |
모어하우스 선장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에 동의하여 배를 예인했고 6일 후 지브롤터에 입항했다. 영국의 관료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억류했고 즉시 수사에 들어갔다.
3.3. 진상조사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가 배에 걸린 보험금을 노리고 한 자작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혐의는 곧 풀렸다. 그렇게 자작극을 한다고 하더라도 배를 팔아서 오는 이득보다 못했기 때문이며 아무리 자작극이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귀신처럼 없어질 수는 없었다. 미국과 영국의 항구에 브리그즈 선장 일행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당시 조사관 중 한 사람은 "메리 셀러스트호의 선원들은 디 그라티아호와 만나서 가볍게 술자리를 나누다가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으며, 디 그라티아호 선원들이 시체들을 바다에 처넣고 우연히 만난 것으로 위장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물론 디 그라티아호 측은 분노했고 "증거를 제시하라"고 반발했다. 그 어디에도 격렬하게 싸운 흔적은 없었고 모어하우스에 대한 수사에서도 돈이 그리 급하지 않았으며 빚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결국 디 그라티아호 선원들이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결론났지만 디 그라티아호를 의심하던 조사관은 죽을 때까지 그 의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디 그라티아호 승무원들은 그를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다국적으로 이뤄진 선원들이 각자 국적에 따라 다툼이 벌어져 반란이 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선원들은 독일인 4명, 덴마크인 1명, 미국인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수가 많은 독일인들이 의심받았지만 조사 결과 선원들의 반란 가능성은 없었다. 발견 당시 도끼 자국과 더럽혀진 칼,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지만 혈흔은 정말 약간이라 반란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었고 특히 내부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그 어떤 반란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브리그즈 선장은 선원들을 매우 엄격하게 선발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로만 골라 뽑았다. 1등 항해사 알버트 G. 리차드슨은 소유주 중 한 명인 J.H.윈체스터의 조카와 결혼했으며 오랫동안 브리그즈의 부하였다. 2등 항해사 앤드류 길링(1847~1872 ?)[10]은 뉴욕에서 태어난 덴마크인이다. 평선원 4명은 모두 프리지아 제도에서 온 독일인이며 볼케르트 & 보츠 로렌젠 형제, 알리안 마르텐스, 구티에브 구스찰이다. 선원들은 모두 베테랑이며 하나같이 성격도 유하고 범죄 전과도 없었다고 한다.
몇 달간의 수사 끝에 결론이 나왔는데 불명, 즉 '도저히 알 수 없음'이었다. 이렇게 원인 불명의 미제사건이 선상사고로 일어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한편 선주 측은 보험사를 통하여 모어하우스 선장 일행에게 구조비 5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4. 사건 이후
사건 이후 메리 셀러스트호에 탔던 선장과 선원, 선장의 가족들은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J.H.윈체스터는 사건 이후 배의 처분에 대해 고민했는데 메리 셀러스트호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윈체스터 빈터즈가 미국 보스턴에서 사고로 죽는 것을 본 뒤 그냥 처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배를 엄청난 헐값에 넘겼다. 이후 13년 동안 선주는 무려 17번이나 바뀌었고 그 때쯤 되어서는 배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메리 셀러스트호의 마지막 선장 길먼 C. 파커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운항해서는 도저히 이득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이 저주받은 배를 보험사기의 희생물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메리 셀러스트호의 저주는 아직 계속되었으니...
파커 선장은 부츠나 고양이 사료 같은 잡동사니에 과도한 보험을 붙여 배에 가득 싣고 고의로 암초에 부딪히게 했지만 결국 침몰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애매하게 부서져서 항해만 곤란하게 되자 이번에는 불을 질러 보았지만 타고 남은 잔해마저도 꿋꿋하게 물에 떠 있었다.
결국 파커 선장은 있지도 않은 화물을 더 추가해서 터무니없는 보험을 신청했는데 그만 덜미가 잡혔다. 파커는 500달러에 인양권을 팔았고 "다른 여타 물건들과 함께 술 125통, 청어 957통, 1천 달러 상당의 식기류가 적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배와 적하는 보험회사 5곳에서 34,000달러 상당의 보험에 들었다. 당시 외양에서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면 교수형이었고 증거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파커 선장의 재판은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배심원단 12명 중 5명은 사람을 사형대에 올려 죽이기를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배심원단은 일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점 때문에 인명사고도 없이 단순히 폐선을 침몰시킨 것만으로 사람을 사형시킨 자들이라는 시선을 받기 부담스러워했으며 스스로도 그런 일로 사형이라는 중형을 내리기 꺼렸다. 때문에 당시 이런 사기 범죄에 대해서는 배심원단이 유죄를 선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파커 선장도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3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후 메리 셀러스트호는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고 사고가 발생한 지 51년이 지난 1923년 바다에서 스스로 침몰할 수 있도록 해안에서 떠내려 보냈다.
미국에서는 메리 셀러스트호가 아이티 앞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추정한다.
5. 가설
이 사건을 두고 상당히 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나무위키에 서술된 가설들은 그 중 일부다.- 밧줄 하나가 단단하게 배에 묶여 있었고 반대쪽 끝이 심하게 해진 상태로 물에 빠져 끌려가고 있었으며 배의 유일한 구명보트가 사라졌기 때문에 선원들이 어떠한 응급 사태를 맞아 밧줄로 선체에 묶은 구명보트에 탔다가 밧줄이 끊어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배가 고속으로 항해한다면 그 힘에 의해 밧줄이 끊어질 수 있다. 이 가설은 2008년 한 TV 다큐멘터리의 조사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 가장 지지를 받는 가설은 모종의 이유로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두 구명보트로 옮겨탔지만 막상 배는 침몰하지 않았다는 설이다. 그 중 하나는 빈 드럼통 9개와 관련지어 화물로 실은 알코올이 폭발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붉은 오크로 만든 드럼통은 흰 오크로 만든 드럼통보다 액체를 쉽게 머금는데 메리 셀러스트에 실린 드럼통들이 그렇게 알코올 원액을 머금었다는 것이다. 오크통에서 기화한 알코올이 점점 새어 나와 화물칸을 가득 채웠으리란 의견도 있다. 그러고 나서 드럼통을 유지하는 철제 밴드가 서로 부딪히면서 마찰로 인한 순간적인 스파크를 만들어내어 이 알코올을 점화시키면서 폭발했다는 논리다. 실험에 의하면 에탄올은 워낙 낮은 온도에서도 불이 붙기 때문에 드럼통을 전혀 그슬리지 않고도 폭발할 수 있다고 한다(Wiese, 2005). 영어 위키백과 문서 참조 이 굉음을 듣고 브리그스 선장이 "아, 배가 폭발하는구나!"라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켰으나 메리 셀러스트호는 멀쩡하게 떠나가버렸다는 이야기. 혹은 오크통에서 기화한 알코올이 점점 새어 나와 화물칸을 가득 채웠고 화물칸을 열어본 선원들이 뿜어져 나오는 가스 연기와 스파크에 놀라 배가 곧 폭발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구명배로 옮겨 탔다고도 한다. 하여튼 그렇게 된 다음 구명보트도 침몰해 버리는 바람에 탑승자들도 사망하면서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2007년 스미소니언 TV 다큐멘터리에서 설명한 폭풍우로 인한 시기상조 배 포기론도 있다. 심한 폭풍우를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고 물 펌프 3개를 돌려 물을 빼기 시작했는데 펌프 2개가 이물질[11]에 막혀 고장났다. 이렇게 하면 물 펌프 2개가 분해되어 있었던 점을 설명할 수 있다. 물 펌프가 하나만 동작하고 있었기에 육안으로는 물이 얼마나 들어차 있었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워 결국 배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구명보트에 옮겨 타서 산타 마리아 섬을 향해 나아갔지만 결국 메리 셀러스트호는 멀쩡한 반면 구명보트는 가라앉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경도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는 항해용 정밀시계인 크로노미터(경선의)가 늦게 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실제 위치에서보다 훨씬 동쪽에 배가 있다고 오판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는 마지막 5일의 선장의 항해일지에 따른 배의 이동 경로를 제시하고 있다.
- 브리그즈 선장의 딸이 돌고래 구경을 좋아해서 메리 셀러스트호에도 돌고래를 구경할 수 있는 또 다른 갑판을 배 외곽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위에서 돌고래를 구경하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갑판이 부서지면서 전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설도 구멍이 있는데 아무리 돌고래가 신기하다고 해도 배의 모든 사람들이 갑판에서 구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광 크루즈선도 아니고 선원들이 돌고래를 어디 한두 번 봤겠는가? 그리고 웬만한 긴급 상황이 아닌 이상 당직을 서느라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상선사관들과 선원들은 꼭 있다.
- 또 다른 가설은 자메이카에서 1916년 어느 선원이 목격한 일화인데 자신이 메리 셀러스트호의 선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노인을 어느 술집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메리 셀러스트호는 항해하던 11월 말에 표류하던 꽤나 큰 화물선을 발견했는데,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은 병으로 다 죽었고 안에는 금괴가 가득 있었다"는 것이다. 어림잡아도 몇 톤은 돼 보여서 선장과 선원들이 대충 계산하니 1억 5천만 파운드[12]가 넘는 엄청난 거액이라 다들 기겁했다. 당연히 그 누구도 신고하자는 소리를 안 했고 다들 금괴를 나눠 갖고자[13] 메리 셀러스트호에서 내려 그 배를 타고 가기 위해 메리 셀러스트호의 화물인 알코올을 뜯어 소독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화물인 알코올 중 9통은 뜯겨져서 내용물이 비어 있었다. 하지만 금괴가 가득 실린 배에 소독만 하고 먹을 것이나 물은 죄다 놔두고 갔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인은 이 의문에 대해서도 답변했는데 그 배에도 통조림 등 먹을 것이 가득 있었고 물도 밀봉되어서 한동안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메리 셀러스트호를 포기하고 그냥 알 수 없는 일로 사람이 사라진 것으로 대충 꾸미자며 메리 셀러스트호를 놔두고 항해 도구들과 구명정을 챙겨서 빠져나간 뒤 각자 금괴를 나눠 가지고 흩어졌던 것이 이 사건의 실체라고 하였다.[14] 선원은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그럼 40년 넘게 당신은 뭘 하고 지냈느냐?"라고 물었다. 노인은 "알 것 없다."고 답하며 그냥 나갔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가설도 제법 신빙성이 있다. 금괴를 나르던 밀수선도 있었으며 승조원들이 전염병으로 전멸해 바다 위를 떠돌던 밀수선을 프랑스 해군이 발견한 사례도 있다. 사실이라면 가장 많은 의문점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가설이지만 맨 위에 있는 유력한 가설처럼 배의 상태가 의문의 사건을 꾸민 것 치고는 좀 과한 면이 있고 후일 사건의 외양에 딱 들어맞도록 만들어진 이야기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 1953년 북중미 어느 무인도에서 표류하던 프랑스 국적 선원들이 섬에서 해골을 발견했는데 해골의 헐거워진 옷에 꽂힌 이름표에 '벤자민 브리그즈'라는 이름이 쓰여 있어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게 진짜인지는 누구도 확증할 수 없었고 진짜라고 해도 그 벤자민 브리그즈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식량으로 실었던 빵에 핀 곰팡이가 선원들의 환각을 유발시켰다는 설,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설[15]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나 물을 죄다 두고 사라졌으니 외계인이 납치했다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SF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다. 외계인 입장에서도 인간을 납치하려고 지구에 왔으면 인간이 존재하는 게 확실한 육지로 가지 바다를 뒤지고 다닐 이유가 없다. 굳이 찾자면 심심해서 지구에 놀러왔다가 바다에 배가 보이길래 낚시하듯 납치했다는 설 정도가 있는데 역시 SF에서 많이 보이는 클리셰이다. 딴 인간들은 땅에서 사는데 얘네는 바다를 떠다니니 육지에 있는 애들이랑 다른 애들인가 하는 의문에 잡아갔다는 괴담도 있다.
1980~1990년대 일본 책자를 중역한 괴담집에서는 이야기가 더 덧붙여진다.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조리하다가 주방 담당이 뭔가 급한 일이 있어 조리하던 도중에 갑자기 놔두고 사라진 것인지, 조리하고 있던 음식이 그대로 주방에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면도하다가 급한 일이 있어 나간 듯이 수염이 엉겨붙은 채로 남은 면도날도 욕실에 있었고 항해일지에는 브리그즈 선장이 급하게 갈겨 쓴 "아내 사라가..."라는 부분이 마지막이었다는 내용이 있기도 했다.
6. 미디어에서
6.1.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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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하바쿡 제퍼슨의 증언〉
심령술과 각종 미스테리 현상에 깊이 심취했던 코난 도일이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저서한 단편 소설. 여기서는 백인에게 학대받으며 자라 백인종 자체를 증오하게 되어 20여 년간 은밀히 백인들을 살해해온 혼혈인이 흑인 선원들과 짜고 배를 북아프리카 해안지대로 끌고 간 다음 백인 선원들을 살해하고 텅 빈 배만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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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닭호 모험〉 (The Bird of Dawning)
존 메이스필드(John Masefield,1878~1967)의 소설. 중국에서 차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 차이나 클리퍼[16]인 블랙 곤트레드 호가 사고로 침몰하면서 구명보트로 옮겨탔던 승조원들이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장닭호를 발견하고 넘어가는데 이 배의 상황이 메리 셀러스트호와 거의 똑같다. 승조원들은 물이 다소 차긴 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면 항해가 충분히 가능했던 장닭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왔고 조사 과정에서 장닭호 선장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배를 버리고 선원들 데리고 가까운 육지로 밀입국했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조금 맥 빠지는 엔딩. 쌓아올린 긴장감에 비해서 굉장히 허술한 엔딩이다. 다만 그 부분을 넘어가고 본다면 표류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후반부 장닭호를 얻고 이렇게 된 이상 런던으로 간다를 시전해 영국을 코 앞에 두고 다른 차이나 클리퍼들을 제치고 1등으로 도착하는 모습은 박진감 넘친다.
6.2.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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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여객선 살인사건
소년탐정 김전일 소설판 2권의 사건.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을 배경에 깔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역시나 일본 작품이라서 일본 괴담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음식이 조리하다가 놔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설명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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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있는 레스토랑의 수수께끼'
명탐정 코난 애니메이션 방영분에서 이 사건이 언급된다.
6.3. 드라마
영국의 유명 SF 드라마 닥터후에서 1965년 6월 5일 방영된 "Flight Through Eternity"에서는 닥터 일행을 쫓아온 달렉들을 본 선원들이 겁을 먹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나온다.6.4. 영화
1978년에 만들어진 영국 괴수영화 워로즈 오브 아틀란티스 (Warlords of Atlantis)에선 1890년대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메리 셀러스트호의 선원들이 바다 밑에 있는 아틀란티스 제국에 납치되어 노예로 일하는 게 나온다. 한국에서는 〈환상의 섬 아트란티스〉란 제목으로 비디오가 나왔다. 연기나 줄거리는 허접하지만 수공업으로 만든 괴수들의 퀄리티가 상당하며 다양한 괴수들이 나오기 때문에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는 평가가 좋다.
6.5. 방송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12월 23일 방영분에서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여기선 보험사기와 위의 가설들을 깡그리 씹어먹고 "억울하게 죽은 흑인 노예가 배에 저주를 걸어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서 코난 도일이 <콘힐>이라는 잡지에 '제이 하버쿡 젭슨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사실로 믿어 백인을 증오하던 흑인이 배를 탈취한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 것에서 따 온 듯하다.서프라이즈는 2002년 9월 15일 역시 관련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위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당시 방송에 의하면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한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위의 사고설을 차용했는데, 다른 점은 역시 딸을 위해 전용 갑판을 만들었고 선원 2명이 수영 시합을 벌이는 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상어떼가 나타났고, 당황한 사람들이 전용 갑판으로 모였다가 갑판이 부서져 떨어져서 상어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살아남아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이 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나온 세계상식백과라는 책에서 제기되었는데 그 책에서는 '이 설은 아벨 포스디크라는 알려지지 않은 생존자의 증언이다'라고 한다. 책에 의하면 1913년에 런던에서 제기되었다고 한다. 앞에 나온 또 다른 생존자의 증언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다만 책에서는 증언에 오류가 있음을 들며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즉, 같은 방송이 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원래 이런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이니 과신은 하지 말자.
6.6.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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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 딘 호의 귀환
시간대와 배경이 이 사건과 거의 흡사하다. 오브라 딘 호가 실종되었다가 어느 날 항구 앞바다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채로 배만 떠밀려와[18] 조사에 나선다는 게 게임의 줄거리다. 게임의 주인공이자 플레이어는 동인도 회사 런던 사무실의 손해 평가사로서 보험 업무를 위해 사건의 전말을 밝히러 오브라 딘 호에 파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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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블루 판타지
본 유령선을 모티브로 한 '세레스트(セレスト)'라는 암속성 성정수가 등장한다. 낡은 기공정에 얼굴처럼 생긴 구멍이 뚫려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형태로, 선수에 여성 형태의 상이 붙어있다. 독기로 이루어진 안개를 내뿜고 다니며 '만난 상대의 죽음을 빼앗는 능력'이 있어 메인 스토리에서는 이 성정수에 의해 주민들이 모두 언데드가 된 마을이 등장한다. 이후 트라몬트 섬을 찾아온 주인공과 그랑사이퍼 일행에 의해 물러나면서 해결되었다. 애니판에서는 시즌 2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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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방주
이베리아의 함선 스툴티페라 나비스가 수십년 동안 실종된 상태였다가 등대 이베리아의 눈을 통해 아직까지도 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부에는 선원들은 없고 시테러들이 진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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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항로
본 유령선을 모티브로 한 함선 메리 셀러스트가 등장한다. 이 사건의 존재를 의식해서인지 괴담을 무서워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보험사기를 노리고 배에 불을 지른 일 때문인지 불에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설정도 존재한다.
7. 관련 영상
저주받은 '메리호'의 비밀|빨간토마토[19] |
의문의 죽음들 증발한 선원들 저주받은 유령선 '메리 셀러스트호'[20] |
8. 외부 링크
- 한국어
[1]
건조 당시에는 아마존호라 불렸다.
[2]
배에 올라탔다가 죽은 선장이 총 3명이나 된다.
[3]
오늘날에도 뉴욕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는 회사의 창업주다.
[4]
몇몇 기록에서는 5일, 해양시로 따지면 4일과 동일하고 애니메이션
김전일 시리즈인
유령선 살인사건에서는 1873년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5]
데이 그라티아(Dei Gratia)
#
[6]
앞서 말한 peak halyard일 수도 있다.
[7]
이 9통은 붉은 오크 나무제였고 나머지는 흰 오크 나무제였는데 붉은 오크로 만든 통들은 투과성이 강하기에 알코올이 휘발하여 가스가 밖으로 나오기 쉽다.
[8]
소피아(1870~1872
?)는 형제로는 오빠 아서(1865~?)가 있다. 오빠 아서는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여행을 할 수 없어서 할머니가 데리고 있게 되었고 소피아만 이 배에 탑승했다
#.
[9]
2018년 5월
한국 돈 값어치는 3,460만 원 정도지만 1872년 기준으로는 10억 원 이상이다. 물론 5천 파운드를 무조건 주는 건 아니었고 배의 손상 유무에 따라 보험회사에서 내주는 돈의 차이가 있는데 메리 셀러스트호는 배가 조금만 고치면 될 정도로 멀쩡한 수준이라 5천 파운드를 받았다고 한다.
[10]
사건 당시 25살이었다.
[11]
이전 화물에서 흘려져 나와있던
연탄 가루나 공사 후 남은 나무 조각 등. 바로 이전에 연탄을 싣고 있었고 최근에 배를 완전히 뜯어고친 적이 있었다.
[12]
2022년 기준으로 한국 돈으로 약 2392억원이니 150년 전에는 그야말로 2조원은 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13]
'그냥 금괴만 가지고 오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겠지만 메리 셀러스트호는 선주가 따로 있다. 항구에 오면 화물조사를 하니 금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14]
만약 메리 셀러스트호의 식량을 난파선으로 옮겼다면 당연히 보험회사에서 식량을 챙긴 뒤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추측할 수 있기에 현명한 행동이었다.
[15]
그러나 바르바리 해적 자체는 19세기 초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으로 아예 소멸해 버렸기에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선박 상태가 상당히 깨끗한 편이라 신빙성은 낮다.
[16]
중국에서 생산된 차를 영국으로 나르는 전문 화물선. 특히 작중 시점은 그 해 첫 나온 차를 가장 먼저 영국에 도착시키기 위해 모든 선장들이 혈안이 돼있던 상황이었다. 역시
홍차국
[17]
작중에서도 선실에 사람은 없고 토스트와 계란이 막 조리된 상태로 발견되자 메리 셀러스트호와 똑같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 사건보다는 일본에 흔히 알려진 괴담을 재현한 것이다.
[18]
단 메리 셀러스트호와 달리 시체 몇 구 정도는 있었다.
[19]
빨간토마토의 영상.
[20]
미스스한 이야기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