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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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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태후 원경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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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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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왕대비 인수대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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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대왕대비 자의대왕대비 혜순대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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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대왕대비 명경대왕대비 효유대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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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경세자빈
수빈 한씨 | 粹嬪 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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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조선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 昭惠王后
조선 성종조 왕대비
인수왕대비 | 仁粹王大妃
조선 연산군조 대왕대비
인수대왕대비 | 仁粹大王大妃
}}}}}}}}}
파일:소혜왕후경릉.jpg
경릉 소혜왕후 능침
출생 1437년 10월 16일( 음력 9월 8일)[1]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504년 5월 21일( 음력 4월 27일)[2]
(향년 66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경릉(敬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빈궁)
1455년 9월 16일 ~ 1457년 9월 29일
조선 왕세자빈 | 정빈·수빈
1457년 9월 29일 ~ 1470년 3월 3일
조선 인수왕비
1470년 3월 3일 ~ 1475년 4월 11일
조선 왕대비
1475년 4월 11일 ~ 1495년 2월 3일
조선 대왕대비
1495년 2월 3일 ~ 1504년 5월 21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청주 한씨
부모 부친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1400 ~ 1456)
모친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1403 ~ 1450)
형제자매 3남 6녀 중 6녀[4]
배우자 덕종
자녀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 ~ 1488)
장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1456 ~ 1482)
차남 - 성종(成宗, 1457 ~ 1495)[5]
종교 유교 ( 성리학) 불교
봉작 군부인(郡夫人)
→ 왕세자빈(王世子嬪)
→ 정빈(貞嬪) → 수빈(粹嬪)[6]
→ 인수왕비(仁粹王妃)
→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
전호 모자전(慕慈殿)
존호 인수자숙(仁粹慈淑)
휘호 휘숙명의(徽肅明懿)
시호 소혜왕후(昭惠王后)
}}}}}}}}} ||
1. 개요2. 생애
2.1. 세자빈이 되다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2.3. 아들 잘산군, 성종의 즉위2.4. 왕대비가 되다2.5. 인수대비의 여성관2.6. 연산군 즉위 이후2.7. 사후
3. 가계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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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昭惠王后 韓氏 소혜왕후 한씨 / 仁粹大妃 인수대비

한확의 딸로, 추존왕 덕종의 아내이다.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월산대군 성종의 어머니이다.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에 의해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고, 이후 덕종(德宗)으로 재추존되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존봉되었다. 이후, 성종의 뒤를 이어 손자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엔 자숙이라는 존호가 더해졌으나 최초에 받은 존호 그대로 인수대왕대비로 호칭되고 있다. 사후 연산군 때에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7]

남편이 의경세자에서 의경왕으로 추존되면서, 작위로서의 왕비(인수왕비)에는 있었지만, 왕비의 통상적인 의미인 '임금의 아내(중전)'로는 지냈던 적은 없었고, 거의 대비로만 지냈다보니 대중에는 소혜왕후보다는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8]

연산군 중종의 친할머니이고, 인종 명종의 증조할머니이며, 순회세자 선조에게는 고조할머니가 된다.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막내딸인 공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 윤씨의 시어머니이다.

2. 생애

2.1. 세자빈이 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문종 즉위), 수양대군(세조)의 장남 도원군(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양위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 왕세자에 봉해졌고 그녀 역시 세자빈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남편 의경세자 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결혼생활 5년 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군, 태안군주( 명숙공주), 그리고 훗날 제9대 임금인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이다.

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하지만 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한달밖에 안된 시점에 의경세자가 요절하였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빈궁 한씨는 21살이었다.[9]

세자빈 자리는 아랫동서 장순빈( 장순왕후) 한씨에게, 남편의 왕세자 자리는 시동생 해양대군( 예종)에게 물려주고 한씨는 '정빈(貞嬪)'이라는 빈호를 받아 4살이던 장남 월산군, 2살이던 태안군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자을산군을 데리고 출궁하였다. 훗날 정빈이 원경왕후 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자식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시부모인 세조 정희왕후 윤씨는 농담 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10]

2.3. 아들 잘산군, 성종의 즉위

수빈은 차남 잘산군 한명회의 딸과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자성왕대비(정희왕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종이 4살인 제안대군만 남기고 사망하자 권신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 자성대비의 지지를 받은 자을산군이 즉위하였다.

성종이 숙부 예종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남남인 백모와 조카 신분이 되었고, 이후 수빈은 아들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嬪)의 지위였다. 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면서 애매한 수빈의 지위에 관해 논의가 시작된다.

예종의 친자였던 제안대군 세종의 적7자인 평원대군의 봉사손(奉嗣孫)이 되면서 왕위와 영영 이별하였다.

2.4. 왕대비가 되다

처음에는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지만 1471년(성종 2년), 성종이 친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수빈도 대비가 되었다. 예종의 계비인 인혜대비( 안순왕후) 한씨와 인수대비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성대왕대비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법적으로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 밝았기 때문에 자성대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자성대비의 수렴청정 시기 한글은 알지만 한문에는 밝지 못한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시어머니 자성대비가 사망하자 조선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2.5. 인수대비의 여성관

대중매체에서는 흔히 권력 욕심 때문에 아들 성종을 들볶는 어머니로 나오지만 즉위 당시 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인수대비가 평소에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만큼 성종의 치세 동안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금승법(禁僧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이다.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폐비 윤씨 사사를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 본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윤씨의 폐위를 결사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윤씨의 폐위가 옳다고 밝히며 아들의 편을 든 것뿐이었고, 시어머니이자 성종의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역시 언문 교지를 직접 내리면서까지 성종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11]

그러나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폐비를 죽이는 데 주도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널리 퍼져있다. 성종 후궁 귀인 엄씨, 귀인 정씨와 결탁하는 한편 성종이 폐비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령한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다. 이 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이 따로 내관에게 윤씨의 동태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할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성종은 윤씨를 폐위시킨 이후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며 버럭 화를 낼 정도로 윤씨를 매우 증오했다.[12]

애초에 윤씨의 두 차례 폐비 위기는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의 주도였다. 나중에 폐비를 사사한 것도 신하들의 동정론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결단하여 진행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 성종을 참조.

2.6. 연산군 즉위 이후

1504년(연산군 10년) 1월 8일, 인수대왕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을 온 신하 박열을 통해 "내가 이미 늙었고 본 것도 많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饌)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육선(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를 전후로 대비의 건강이 위중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王)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 귀인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야사 중 이미 광분해 날뛰던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향해 뛰어가 머리 박치기를 하였고 그 충격으로 승하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에는 없는 단순한 야사에 불과하다. 깊어진 병세에 정신적 충격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일기에 안 올렸을 리가 없다. 연산군일기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은 명백하다.

일기에는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의 소생 안양군 봉안군의 생 머리카락을 잡고 인수대비에게 질질 끌고 가서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나와 있다.

이날 연산군의 깽판은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다.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 승하하였다. 연산군 갑자사화 이전엔 할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윤기견'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의 존재와 그 전말을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던지라 인수대비에게는 그야말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정정하던 노인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속히 건강을 해치거나 심하면 아예 세상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인수대비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손자 연산군이 직접적으로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이 일이 인수대비의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극에서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일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2.7. 사후

일설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가진 원한이 깊어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전호(殿號)는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나 지어올리는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보면 인수대비의 혼전(魂殿)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정황상 인수대비의 혼전으로 보이는 모자전(慕慈殿)에 연산군이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지위를 격하하여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연산군이 "대행대왕대비께서는 곤위(坤位)[13]에 계셨던 적이 없으니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맞지 않겠는가?"하고 하문하니 신하들이 연산군의 폭력적인 행동에 눌려있다가도 이것만은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유순은 "그건 주상전하 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14]라고 아룄다.

그러자 연산군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덕종보다는 높고 인혜대비보다는 낮게 행하라고[15] 분부하였으나 이것도 신하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결국 왕비의 예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상제(喪祭)를 단축하여 지내는 것을 밀어붙였고 반발에도 끝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상제를 단축하여 지낸 것은 연산군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종도 할머니 자성대비의 상제를 한 달로 단축해서 지낸 예가 있었는데, 보통 국왕이 상제를 단축하려 한 뜻은 상제를 빨리 끝내야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 딱히 인수대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혜대비의 장례 때는 13일 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인수대비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친할머니라고 조금 더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승하한 직후 상례를 의논할 때 왕세자빈의 예로 치르자고 한 것을 보면 연산군이 조모 인수대비를 격하할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 편집증이 의심될 정도로 계속 상제를 빨리 치러버리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에 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승하한지 2년 후인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 사태가 벌어져 연산군이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나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3. 가계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인수대비.jpg
파일:attachment/219.jpg
파일:attachment/인수대비_(6)_mimimi929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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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음력 9월 8일은 소혜왕후의 시아버지 세조의 기일이다. 이 때문에 소혜왕후가 인수왕비로 책봉된 1470년(성종 1년)부터, 그녀의 탄신 하례는 이튿날인 9월 9일에 올리게 되었다. [2]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한 바로 전 날이다. KBS 드라마 왕과 비 등에서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훗날 숙종의 비 인현왕후도 여기서 승하한다. [4] 언니 정선군부인 한씨 남편이 세종의 8남, 계양군이다. 그래서 동생 인수대비하고는 숙모와 조카 며느리사이다. [5] 봉호는 자을산군(者乙山君) → 잘산군(乽山君). [6] 태종 원경왕후 민씨의 세자빈 시절 호인 정빈과 겹친다는 이유로 수빈으로 개칭됨. [7] 친자매 간의 돌림자가 뫼 산山 자를 쓰는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이름이 0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다만 여타 추숭 왕비들과는 다르게 인수대비와, 조대비(신정왕후)는 생전에 대비로서 왕비의 지위를 실제로 누렸다. [9] 야사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자 이 말을 믿은 세조 형수의 무덤(소릉)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와 달리 단종 쪽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친 행위는 소문대로 실제 있었다. [10]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는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차남인 해양대군을 다음 세자로 지목했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 효종)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적장자 상속제가 사대부는 물론 민간 까지 널리 퍼진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때는 이런 종법을 어겼어도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임금들은 문종 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해양대군이 월산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군의 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5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해양대군은 8살, 월산군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비슷했다. [1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수대비가 윤씨를 가엾게 여겼을 리는 절대 없다. 본인부터가 웬만한 선비들보다 예법을 잘 알았고 성종과 자성대왕대비와 더불어 중전을 폐해야 하는 이유를 들며 폐비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12] 예를 하나만 들면 윤씨를 폐비시키고 사가로 내친 뒤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살게 하자 일부 관료들이 "아무리 그래도 국모였던 분이니 예우해주시는 게 어떨까요?"하는 의견을 내고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조정에 일자 불같이 화를 냈다. 성종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대신들이 "신들이 윤씨를 높이려는 게 아니옵고, 듣자니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하옵는데 그저 궁상이나 면하게 해 주려는 것이옵나이다."라고 변명해도 "그것이 정말로 가난한 게 맞긴 하냐?"라는 식으로 나왔으며 끝내는 "경들이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의 신하인가?!"라는 폭언까지 내뱉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폐위된 윤씨의 집에 도둑이 들자 범인을 색출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온 걸 보고 "지가 잘못해서 털린 걸 왜 나보고 난리냐? 그딴 논리면 나라에서 서울의 도둑맞은 집들은 다 고쳐줘야 하냐?"라고 비웃으며 무시하기도 했다. [13] 왕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다. [14] 인수대비의 남편인 덕종은 왕세자일 때 사망하였으니 당시에는 왕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으나,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는 이미 덕종이 조선으로 추존된 이후다. 그러므로 인수대비의 장례를 세자빈의 예로 치른다면 덕종까지 도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그렇게 되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대부터 족보가 꼬이게 된다. [15] 세자빈보다는 높고 정식 왕비보다는 낮게 치르라는 소리. [16] 덕종의 장인어른이자, 소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서원부원군이란 직책은 '국구(國舅, 장인)'의 자격이 아닌 반정으로 세조의 즉위를 적극 도왔기에 그 공로로 받은 것이다. [17] 혜경궁 홍씨의 경우에는 <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 고종 때의 일이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로 추숭되었으나 남편이 죽은지 100년, 헌경왕후가 죽은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 [18] 1983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원경왕후 역,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신덕왕후 역. [19] 채시라는 당시에 30대 초반으로 저 모습으로 나온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다. 드라마가 세조 때부터 시작해 무려 50년의 세월을 다루는지라 세조의 며느리 때였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 중년~노년까지 다루며 중반쯤 되면 세조가 승하하는데 이 때쯤부터 대부분의 출연 분량은 약간의 분장을 한 중년 모습으로 나왔다. 저 사진의 모습은 연산군이 장성을 한 후반부인데 긴 드라마다 보니(186부작) 후반부만 해도 분량이 꽤 되지만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은 편. [20] 이 사건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찬탈자로 격하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역모에 준하는 사건인지라 세조의 맏며느리인 인수대비로서는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작심하여 선비들을 제대로 족쳐내려고 하자 "죄없는 선비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더 이상의 사화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 [21] 실제로 연산군에 이어 보위를 이은 중종 역시 박원종, 성희안과 같은 반정공신들의 압박에 못이겨 첫번째 왕비였던 조강지처 단경왕후를 7일만에 내쳐야 했으며 그 후로도 신하들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다. [22] 전인화는 < 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지만 사실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2001년 SBS 드라마 <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덜 화제가 된 감이 있다. 물론 전인화 문정왕후 연기는 드라마가 끝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기였다. 바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뭬~~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