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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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 | 淑儀 洪氏 |
|||
숙의 홍씨묘 위치 | |||
출생 | 1457년 8월 23일( 음력 7월 25일) | ||
사망 |
1510년
10월 24일(
음력
9월 12일) (향년 54세) |
||
묘소 |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산 38-1 | ||
재위기간 | 조선 숙원 | ||
1490년 5월 25일 이전 ~ 미상 | |||
조선 숙용 | |||
1495년 1월 29일 이전 ~ 미상 | |||
조선 소용 | |||
1495년 이후 ~ 1506년 9월 28일 | |||
조선 숙용 (강등) | |||
1504년 ~ 1506년 9월 28일 | |||
조선 숙의 | |||
1506년 9월 28일 ~ 1510년 10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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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남양 홍씨 | |
부모 |
부친 - 홍일동(洪逸童, 1412? ~ 1464)[1] 모친 - 측실 노씨 |
||
배우자 | 성종 | ||
자녀 | |||
봉작 | 숙원(淑媛) → 숙용(淑容) → 소용(昭容) → 숙용(淑容) → 숙의(淑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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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의 후궁. 홍숙의(洪淑儀)는 중추부 동지사를 지낸 아버지 홍일동(洪逸童)과 문유질(文由質)의 딸인 어머니 남평 문씨(南平文氏)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성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성종실록(成宗實錄)』 14년 6월 12일),(『성종실록』 21년 4월 27일) 이후 숙용(淑容)으로 진봉되었다.[『성종실록』성종대왕 묘지문]슬하에 완원군 이수, 회산군 이염, 견성군 이돈, 익양군 이회, 경명군 이침, 운천군 이인, 양원군 이희를 비롯하여 세 옹주를 낳아 7남 3녀를 두었다. 성종의 여러 후궁 중 가장 다산하여 훗날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2. 생애
숙의 홍씨가 궁궐에 들어간 계기는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숙의 홍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궁중에 들어와 잔치를 구경하였는데, 이때 자산군(성종)이 숙의의 관상을 보고 " 이 아이의 관상이 남다르니 뒷날 필시 귀한 자식을 많이 낳으리라" 라고 하였다. 이어 다른 사람과 혼인을 금하도록 하였고, 더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에 들라 명하였다. 이에 숙의 홍씨가 선뜻 응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임금은 다시 입궐하라고 권하였다.
14세 되던 1470년(성종1년) 성종은 숙의에게 어의를 보내어 건강상태를 살펴보게 하였고, 또한 대궐에서 궁중의 법도와 왕실의 예절을 알고 익히도록 했다. 입궁한 지 2년이 지난 후, 성종은 숙의와 혼인하여 숙원(종4품)에 봉했다.(성종 왕자, 『선원속보 양원군 파보』)
다른 하나는 양반가 출신으로 궁인으로 입궁했다가 14세 때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1481년(성종12년) 숙원(종4품)으로 봉해지고 숙용(종3품)과 소용(정3품)을 거쳐 중종 때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대왕의 후예들-이웅구 저)
1490년(성종 21) 장녀 혜숙옹주가 혼인할 때, 혜숙옹주의 어머니인 홍씨는 종4품 숙원[2]으로 후궁 중 가장 낮은 품계였다. 홍씨는 어머니가 측실이기 때문에 양반으로 볼 수 없다.[3] 이 당시 성종은 혜숙옹주의 시아버지가 될 신종호를 불러, "옹주가 귀하게 자라서 시부모에 대한 예를 모르겠지만, (옹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예의를 가르쳐달라"고 말하였다.[4]
성종이 사망할 당시, 종3품 숙용으로 있었고 연산군 때는 정3품 소용으로 진급되어 있었는데, 아들 완원군이 갑자사화 연루되는 바람에 규례대로 직첩을 빼앗기고 폐출당할 뻔 하였다. 그러나 숙용으로 강등되는 정도로 멈췄으며, 나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다시 후궁의 예우를 받아 종2품 숙의가 되었고 자수궁에서 살게 되었다.[5]
3. 여담
- 그녀의 아버지는 홍일동이란 인물이고 대식가로 유명했다. 홍일동의 동생이 그 유명한 홍길동. 그러나 실존인물이었던 홍길동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과는 매우 다른 인물로, 전국구급으로 흉악했던 도적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7남 3녀라는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을 정도면 굉장히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을텐데도, 성종으로부터 숙용의 첩지만을 (소용, 숙의로의 진급은 성종 사후) 받은 이유는 모친이 측실 노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남평문씨의 3녀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서자라도 왕의 자식이면 왕비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양반 가문에서는 첩의 자식을 본부인의 자녀로 입적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세조때의 반정공신인 홍일동의 딸이니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고, 친정 집안 덕분에 후궁이 된 것이었지만, 결국 서녀였기에 양반이라 볼 수 없었고, 성종한테 사랑은 받았으나 신분때문에 결국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4. 가족 관계
- 조부 : 홍상직(洪尙直, ~ 1424)
- 남편 : 성종(成宗, 1457 ~ 1494)
- 장남 : 완원군 이수(完原君 李𢢝, 1481 ~ 1509)
- 차남 : 회산군 이염(檜山君 李恬, 1482 ~ 1512)
- 삼남 : 견성군 이돈(甄城君 李惇, 1482 ~ 1507)
- 사남 : 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 1488 ~ 1552)
- 오남 : 경명군 이침(景明君 李忱, 1489 ~ 1526)
- 육남 : 운천군 이인(雲川君 李寅, 1491 ~ 1555)
- 칠남 : 양원군 이희(楊原君 李憘, 1492 ~ 1551)
- 장녀 : 혜숙옹주 이수란(惠淑翁主 李秀蘭, 1478 ~ ? )
- 차녀 : 정순옹주 이복란(靜順翁主 李福蘭, 1486 ~ ? )
- 삼녀 : 정숙옹주 이여란(靜淑翁主 李如蘭, 1493 ~ 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