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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22:19:20

사할린 아이누

파일:1485877141_0_185ec4_68d23d8f_xxxl.jpg 파일:Sakhalin_Ainu_Man.jpg
위 사진 촬영자는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Bronisław Piłsudski).[1]

1. 개요2. 역사
2.1. 근대 이전2.2. 근대 이후
3. 언어4. 실존인물5. 창작물에서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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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사할린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아이누족의 분파이다. 이들은 현악기 톤코리와 미라 제작으로 유명하며 홋카이도 아이누 쿠릴 아이누와는 문화가 달랐다고 한다.

홋카이도 아이누들은 사할린 섬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레푼모시르 운 쿠루로 부르며 하나의 카테고리로 인식했다. 인접한 니브흐 퉁구스계 민족들과의 혼혈 때문인지 홋카이도나 쿠릴 지역의 아이누에 비하면 동양적인 외모를 띄고 있는데, 풍성한 수염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인들과 비슷하다.

현재 사할린 아이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사할린 거주자는 대부분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사할린 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역사

2.1. 근대 이전

아이누 문화가 형성된 13세기 이전에는 사할린, 홋카이도 동북부 지역, 쿠릴 열도에는 오호츠크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해양민[2]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사쓰몬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은 13세기 무렵 교역을 통해 혼슈의 철제 문화와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하여 아이누 문화를 형성했고, 이들은 교역품인 바다사자 해달의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북쪽과 사할린에 살던 원주민들을 복속하거나 축출하는 과정에서 사할린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거주하던 니브흐인[3]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니브흐인들은 몽골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 지역의 토산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몽골 황실은 이 지역의 사할린을 공격하여 만호부를 설치했다.[4] 몽골의 아이누 정복은 아이누 군장 공동체들의 단결과 종족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파일:Kuye.jpg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 3권, 쿠예(Kuye, 庫野) 남녀.

이후 청대에 사할린은 명목상 길림에 속해 있었는데, 당시 청은 사할린 아이누인들을 '쿠예'라고 불렀다. 사할린 아이누들은 청나라와 아무르강 유역의 소수민족들, 일본 사이에 껴서 교역으로 먹고 살다가 19세기를 맞는다.

2.2. 근대 이후

파일:V.M._Doroshevich-Sakhalin._Part_II._Group_of_Ainu_People.png
블라스 도로쉐비치(Влас Дороше́вич)의 «사할린(카트로가)» 151쪽 사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사할린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되었다. 1875년의 교환 조약으로 사할린은 일단 러시아에 넘어가고 일본 정부가 파견한 홋카이도 개척사의 주도하에 사할린 아이누 총 2,300여 명 중 800여 명이 홋카이도 북부의 소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876년 개척사의 에베츠 재이주 방침에 개척사와 사할린 아이누 사이에 마찰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1879년에 유행한 콜레라로 다수의 인명 손실을 냈다.

1905년 러일전쟁 강화조약으로 사할린 남부가 일본에 양도되어 홋카이도에 이주해 있던 사할린 아이누 대다수가 귀향을 선택했는데, 339명이 다시 옛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잔류자는 12명, 실종자는 15명으로 인구의 손실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40년 뒤인 1945년 남사할린 침공으로 소련이 사할린 전체를 재점령해 다수의 사할린 아이누가 홋카이도로 재이주하였다.[5]

3. 언어

언어는 아이누어 방언에 속하는 사할린 아이누어를 썼다고 한다. 현재 구사하는 이는 없지만[6], 쿠릴 방언과 다르게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자료가 남아 있기는 하다.

4. 실존인물

5. 창작물에서

6. 기타

1923년 홋카이도대학 조교수 사할린 아이누 코탄에 있었던 일들을 적은 내용이 있다.[9]

[1]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형이다. [2] 6세기에 이르러 아무르강 중하류의 말갈인들이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으로 진출했고, 그곳의 수주야(鈴谷) 문화과 융합하여 오호츠크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후 아이누의 확장으로 쿠릴 열도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까지 도달했다. 오호츠크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은 니브흐, 울치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3] 아이누는 이들을 스메렌 쿠르라고 불렀다. [4] 고려사》에 따르면, 1287년 동진골외국(東眞骨嵬國) 만호(萬戶) 테무르가 만군(蠻軍)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키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서 고려를 방문했다고 한다. [5] 당시 사할린에 살던 아이누의 수는 약 1,159명이었으며, 소련이 100명만 남겨두고 다 쫓아냈다. 남은 이들도 노인들만이 순혈 아이누족이었고, 나머지 연령대의 아이누들은 혼혈이거나 러시아인들과 결혼한 상태였다. 니브흐, 윌타 등 북사할린의 원주민들은 과거부터 러시아의 영향력을 짙게 받았고 대다수가 소련 국적이었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면 추방당하지 않고 잔류한 반면 사할린 아이누들은 일본의 영향권이던 남사할린의 원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처우를 받았다. [6] 과거 홋카이도 히다카 진흥국 사루 군에 살던 다흐코난나(Tahkonanna), 창씨명 아사이 타케(浅井タケ)라는 사할린 아이누 여성이 구사하였으나 그녀가 사망 이후 사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전에 언어 및 전승 문학 기록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스포일러] 타타르인과의 혼혈. [8] 폴란드인과의 혼혈 [9] 모바일로 보는 이들은 데스크톱 모드 설정 뒤 열람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