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ppe Raid(디에프 습격)
격파된 처칠 전차와 전사한 캐나다군, 그리고 좌초한 상륙정.
1. 개요
주빌리(Jubilee) 작전, 일명 디에프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8월 19일에 영국군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간 디에프에 상륙을 시도했던 작전이다. 본격적인 공격이라기보단 기습과 위력정찰이 주목적이었다.2. 발단
1942년 연합군 각국의 상황은 실로 영 좋지 않았다. 독일군은 청색 작전으로 볼가 강에서 소련군을 압박해서 스탈린그라드를 앞두고 있었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외곽까지 도달하였으며, 영국은 프랑스 전역의 패퇴에 이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승기를 잡았으나, 브리튼 섬의 보급선은 유보트에 의해 5월과 6월 사이에만 150만 톤의 화물선 피해를 입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거기에 북아프리카의 영국 제8군은 이집트로 후퇴해야만 했으며, 또한 일본군의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가 함락 당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윈이 폭격당했으며, 인도도 위험했다. 그나마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지만, 아직 몇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기에 미국이 승기를 잡질 못 한 상황이었다.다급해진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 아이젠하워에게 소련을 돕기 위해 유럽에 제2전선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거기에 1942년 3월, 영국 연합작전사령관으로 부임한 해군 준장 루이 마운트배튼 경[1]은 소규모 기습작전보다는 대대적인 침공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침체된 영국군의 사기를 진작할 필요도 있었고. 그리하여 제출된 여러 안이 반려된 가운데, 영국군 전투기의 전투반경 내의 프랑스 해안항구들을 공습하자는 안이 나왔다.
그 결과로 영국은 프랑스 해안에 설치된 독일군 방어진에 대한 여러 기습작전을 계획했고, 프랑스의 디에프 해변이 선택됐다. 영국으로부터의 거리가 병력수송에 알맞았고 공중지원을 받기도 쉬웠다. 또 원래 휴양지이자 작은 항구가 있어 상륙환경이 좋았고 추후 연계가 편리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연합군의 장기적인 목표는 유럽 대륙에 확고한 발판을 만들고 지상병력이 유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영불해협의 독일육군 방어태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영국군을 비롯한 영연방군의 상륙작전 역량을 총체적인 시험이 필요했다.
이 작전에 대해 연합군 총참모부나 영국군 일각에서는 계획이 어설프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당장 현대전의 기본상식인 정보수집도 부실했다. 블루 비치에서는 안벽의 높이를 몰라서 정작 상륙한 병력이 진출을 못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운트배튼 제독을 비롯한 작전 입안자들은 독일방어군보다 병력이 많고 기습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디에프 상륙작전은 1942년 6월 대규모의 기습 공격으로 계획되어 작전명은 루터 (Operation Rutter)라고 결정되었으며 7월 4일과 8일 사이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캐나다군이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소규모의 미 육군 레인저 대대도 있었다. 5월 20일 캐나다 제2보병사단이 공격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7월 7일, 훈련 끝에 잠정실시된 루터 작전은 악천후와 독일공군기들의 공격으로 폐기될 뻔했다.
하지만 마운트배튼 제독은 끈질기게 처칠 수상을 설득했다. 그리고 마운트배튼 경은 처칠 수상의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결국 처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서 작전은 재개되었고 주빌리 (Jubilee)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디에프 상륙작전은 마운트배튼 선에서 만들어진 단발성 작전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배경이 녹아있는 영국의 지중해 전략의 연장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2년이 되면 이미 연합군은 어느 정도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될지 (= 승리할지) 감이 잡힌 상태였다.[2] 당시 연합군의 포지션은 복잡했다. 미국은 이미 소련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영국에 인도, 이집트 등에 대한 식민통치를 접고 유럽 전선에 집중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일단 처칠부터 자국 식민지에 대해 간섭하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고, 인도와 이집트 통치를 지속하기 위해 제국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수에즈 운하 인근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이 때문에 지중해에서의 작전을 계속 펼치려는 영국에 대해 미국은 끊임없이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중해에서의 전쟁을 접고 칼레 등을 통해서 프랑스에 제2의 전선을 만드는 것을 원했다. 처칠은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무언가 액션을 취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나온 게 이 작전이었다.
단적으로 디에프에 상륙한 것이 미영 연합군이 아닌 캐나다와 영국육군[3]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작전에 성공한다면 영국으로선 전후 어느정도 입지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간섭을 줄이고 독자적 제량권을 늘릴 수 있고, 부차적으로 연이은 패배와 런던폭격으로 떨어진 사기를 보충할 수 있다. 반대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영국은 유럽 상륙의 어려움을 연합군에 각인시키는 한편, 작전을 요구한 미국에 부채의식을 안길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지중해에서의 군사작전을 지속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 2차대전의 결과와 종전 후 현대 국제정세를 알고 있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자존심싸움 때문에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 미친 짓'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2차대전 직전~개전직후의 세계 정세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2차대전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범세계적 영향력을 끼치는 식민제국으로써 패권국이자 열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서 민족주의-탈식민주의의 영향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식민제국의 입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이에 더해 2차대전 개전 직후 프랑스는 쉽고 빠른 리타이어, 영국 역시 독일의 공세를 독자적으로 견뎌내기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 이로 인하여 2차대전 중기에 이르면 영국과 프랑스는 열강의 지위를 상실하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열강을 중심으로 세계정세가 재편성되리라는 예상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독일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어 상황을 좀 수습한 이후의 프랑스)는 식민제국이자 열강으로써의 지위, 즉 '대영제국'과 '위대한 프랑스'가 최소한 미국이나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써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의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여기고 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반대로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서는 서로에 대한 견제와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세계를 주도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자신들이며, 노쇠한 구 열강국가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에 협력해 줄 필요는 없다는 공통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이 자국 캐나다의 젊은이들을 희생시켜가며 디에프 상륙작전이라는 무리수를 던진 것은 이것이 열강으로써 영국의 지위 유지에 필수적인 투자(희생)이라는 정치적 고려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발악은 아무 소용 없이, 전후 영국은 열강의 지위를 상실하고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2류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2차대전 당시, 그리고 종전 이후 60년대 무렵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국제적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열강의 지위,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세계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시도였고, 이를 위하여 종종 디에프 상륙작전 못지 않은 무리수를 두기까지 했던 것[4].
흔히 2차 대전을 바라볼 때 실수하는 점이 소련, 미국, 영국이 승리를 앞둔 1944년 정도에서야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엘 알라메인 전투가 끝난 1943년쯤에는 각국이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며,[5]단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추축국에 승리하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당시 이미 전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에게 달려있었고, 애초에 "식민 제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과 "부르주아지 제국주의 타도"를 기치로 성립된 소련에게 영국의 식민지 유지 따위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2.1. 디에프
디에프는 파리의 북서쪽 약 167km 지점 아르퀘 강 (江) 하구에 위치하며 전형적인 만입을 이루는 항구 도시다. 프랑스 지도와 스페인 지도를 겹쳐보면 스페인의 기푸스코아 주 에렌테리아 시와 겹치는 위치에 해당된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근처의 해변은 자갈 해변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어렵다. 그나마도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죄다 좁은 해변과 절벽이다. 이 해변의 건물은 왕립 해밀턴 연대가 상륙한 화이트 비치의 카지노이다.
이 두 장의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대적인 상륙작전에서 상륙지가 될 요건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래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이라도 제대로 배치하면 상륙하는 병력이 다 육편이 되기 딱 좋았다.
3. 전력구성
캐나다 제2보병사단의 지휘관인 육군 소장 J.H. 로버츠 장군이 상륙 병력의 지휘를 맡았고, 해군 사령관인 휴즈 헬럿(Hughes-Hallett) 제독, 공군 사령관인 트래퍼드 리맬러리 장군이 각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병크로 지상전 부대 지휘관이었던 로버츠, 맥노튼, 크리어 장군 중 어느 누구도 작전계획인 주빌리 (Jubilee)을 계획하는데 참여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계획은 캐나다 육군이 작전에 투입되기로 결정되기도 전에 미리 완성되어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3군 지휘부의 계급이 모두 동급인 소장인 데다 총지휘관도 없고, 셋 중 누가 선임인지 서열 정리조차 되어 있질 않았다.설상가상으로 작전의 주력인 캐나다 육군 제2보병사단은 실전경험이 전무한 부대였다. 이 부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직후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교전상대가 되어 버리자, 캐나다가 영연방의 본국인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자원병을 모집해서 긴급하게 대서양을 건너와 이동전개시킨 부대였고, 막상 와보니 공중전만 일어나서 할 일 없이 놀고만 있던 부대였다.
1942년 8월 디에프는 독일육군 제302고수방어사단 예하의 2,500여명으로 구성된 제571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비록 프랑스는 1942년 시점 독일군 모두가 부러워하는 탑 꿀빠는 지역이었지만 사실 1940년 7월 부터 계속된 영국 본토항공전과 바다사자 작전 준비로 생각보다 군기가 잘 유지 되고 있었다. 이 부대 역시 잘 훈련되었으며 바다사자 작전 준비로 얻은 실전경험도 풍부했고, 무장을 잘 갖추고 있었다. 또한 상륙지점마다 교묘하게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주요지점마다 잘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디에프 해변 근처의 수많은 해안 절벽의 동굴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독일 해군( 크릭스마리네)의 해안포와 육전대 병력도 여럿 존재하여 화력 또한 강력했다. 게다가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은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독일공군의 최대 라이벌 영국 공군과 직접 전투를 치르는 최전방 부대인 만큼 최정예였기에 지상병력에게는 위협적이었고 비행장도 디에프 근처에 있었다. 이러한 방어시설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미 요새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총지휘관인 J.H. 로버츠 장군은 이 작전은 식은 죽 먹기 (piece of cake)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1942년 8월 19일 1,005명의 영국 코만도, 50명의 미 육군 제1레인저대대[6], 캐나다 2 사단의 장병 4,963명을 포함한 상륙병력을 분산해서 실은 영국 함대가 영국 구축함 HMS 칼프 함을 기함으로 하여 디에프를 향하여 사우스 햄프턴(South Hampton) 항을 출발해 기습을 시작했다. 237척의 배와 상륙정, 6척의 구축함을 포함한 함대가 해안으로 접근했다. 하늘에서는 영국 공군과 캐나다 공군, 그리고 자유 폴란드군과 자유 프랑스군의 전투기, 폭격기가 작전에 참여했다.
3.1. 작전계획
5개 지점 공격이 목표였다.
영국육군 코만도가 새벽에 푸르빌(Pourville)와 퓌스(Puys)의 양쪽에 상륙한 후 디에프 해안에 정면 공격을 가해서 주요 해안의 방어진을 무력화하고 바랑지빌 (Varengeville)과 베르느발 (Berneval)의 장사정 해안포대를 주력부대가 상륙하기 전에 파괴한다.
30분후 캐나다 육군 제2사단이 디에프의 3곳의 상륙지점에 상륙해서 항구에 정박해있던 크릭스마리네의 함정들을 파괴한 다음 공중지원하에 사우스 서스캐처원 연대와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가 서쪽의 푸르빌 (Pourville)을, 캐나다 그리고 블랙와치 연대는 동쪽의 퓌스(Puys)를 공격해서 점령하고, 본대는 독일군 지역사령부가 위치해있다고 여겨지던 아르퀘스-라-바탈리를 포함한 시가지 남부를 점령해서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정보를 노획. 그 후 해변으로 후퇴한 다음 타고 온 상륙정을 타고 저녁 때의 조류를 이용해서 퇴각한다는 것이었다.
보다시피 어디까지나 기습, 위력정찰이었기에 전날밤의 공중 폭격은 전혀 없었다.
4. 전개
동틀 무렵 영국 공군이 디에프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미 육군 항공대의 B-17이 아베빌의 독일공군 비행장을 공격했다.4.1. 디에프 시 동쪽 해안포대(Yello beach)(괴벨스 포대)
전날 이미 영국 해군 소해정에 의해 청소된 해안을 따라 제3코만도부대와 미 육군 레인저 대대는 23척의 영국 해군 상륙주정 (LCP) 두 파로 나뉘어 옐로우 비치를 향해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 47분 해안에서부터 12km를 남겨두고, 크릭스마리네의 소형 연안선 5척과 3척의 호위함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증기포함 SGB5와 포격 상륙주정 LCF(L)1이 포격전으로 시간을 벌었고, LCF(L)1에서는 상륙병력만 모터보트에 태워 특공대들이 탈출하게 도왔으나 포격전 도중 하필이면 SGB5의 보일러와 무전기가 망가져 사격지휘도 항진도, 가까이 있던 구축함도 부르지 못했다. 독일 함대와 맞닥뜨리기 전에 이미 상륙주정 4척은 고장으로 돌아갔고 또 4척이 포격전 도중 파손되어 뉴 헤븐으로 향했다. 전투가 끝나자 8척의 상륙주정만 SGB5,LCF(L)1 근처에 남아있었고 지휘관들은 작전포기를 결심하고 돌아갔다.
나머지 7척의 상륙정은 전투 도중 뿔뿔이 흩어져 옐로우 비치로 그대로 향하고 있었다. 7척의 상륙정 중 LCP15가 첫 번째로 새벽 4시 45분 옐로우 1 비치에 도착했다. 포격 상륙주정 LCF (L)1에서 전투 직전에 상륙 병력을 싣고 나온 모터보트 ML346도 도착했다. 다행히 공격은 없었으나 절벽에 철조망이 처저 있었기에 별다른 도구가 없었던 병력들은 20분간의 사투 끝에 절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교회 탑에서 포대를 공격하기로 정하고 베르느발(Berneval) 교회를 향해 공격했다. 교회 근처에 도착하자 강력한 독일육군의 화력에 돈좌되었고 과수원을 통해 돌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근처 보리밭에 고립되고 말았다. 옐로우 1 비치에서 상륙한 병력은 탄약도 떨어지고 독일육군의 15cm 견인포의 포격이 시작되자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었으나 포대에 가까워서 첫 발은 천운으로 부대 뒤쪽에 떨어졌기 때문에 무사히 퇴각해서 상륙주정에 탑승한 뒤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고 돌아갔다.
후퇴한 옐로우 1 비치 병력들과 상륙주정 승조원
한편 나머지 6척 중 5척이 5시 15분 옐로우 2 비치에 도착했고 나머지 1척도 곧 도착했다. 120명의 특공대는 도착하자마자 독일군의 공격을 당했고 사다리가 없었기에 절벽을 손으로 기어오르는 도중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결국 베르느발로 향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독일군의 반격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5시 30분 독일 육군 제302사단 사령부는 비상경보를 발령하고 병력을 베르느발로 급파했다. 옐로우 2 비치에 상륙했던 병력들은 도주했으나 강력한 공격 끝에 수영으로 탈출하여 먼 바다에서 배에 탈 수 있었던 단 한 명을 제외하고 37명이 전사, 82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때 미 육군 레인저에서 에드워드 루스탈롯 육군 보병 중위가 전사해 유럽전선에서 최초의 미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LCP(L)
4.2. 디에프 시 서쪽 해안포대(Orange beach)(헤스 포대)
마찬가지로 전날 이미 영국해군 소해정이 청소해둔 해안을 따라 영국 육군 제4 코만도부대와 미 육군 레인저 대대는 제3 코만도가 이용한 상륙주정인 LCP보다 더 큰 상륙주정인 LCA를 통해 오렌지 비치로 이동했다.
04시 53분, 오렌지 2 해안에 LCA 4척이 해안에 접근하자 독일육군의 조명탄이 해안을 환하게 밝힘과 동시에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제3 코만도가 상륙한 옐로우 비치와 마찬가지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에 대비해서 미리 훈련한 제4 코만도 부대는 가죽조끼를 착용한 대원들이 철조망에 몸을 던져 그들을 발판삼아 뛰어 넘고, 다른 대원들은 코코넛 야자열매 섬유로 만든 깔개를 펼쳐 철조망을 넘는 방식으로 164명의 대원은 순식간에 해안도로로 진출해서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을 빠르게 제압했다. 선두부대는 병력을 이끌고 생 마게리트 마을 동쪽 교차로로 이동해서 적 증원에 대비해 매복했다.
한편 등대 불빛을 목표로 오렌지1비치에 상륙한 대원 87명은 협곡 오른쪽을 이용해서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C소대는 등대쪽으로 전진하면서 통신선을 절단하고 내륙 서쪽 포대를 향해 전진했다. 뒤이어 A소대가 도착해서 생마게리트의 오른쪽 측면을 지원했다. 특공대는 전혀 발각되지 않은 상태로 포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하였다. 그리고 작전시간까지 대기했다.
작전시간 35분 전, 호송선단을 향해 해안포가 사격을 시작하자 즉각 기습해서 대전차 소총으로 포대를 제압하고[7] 나머지 병력들은 저격해서 포대를 침묵시켰다. 미 육군 저격수 프랭클린 쿤스 상병은 이 전투에서 최초로 독일군을 저격한 미군 저격수가 되었다. 나머지 포대는 철조망 너머에서 박격포로 포대를 폭파시켰고 적 증원은 매복한 A소대에 의해 전멸했다. 6시 30분 공중지원하에 B소대가 건물을 제압하는 사이 F소대는 고사포 진지를 점령해 폭파시켜 제4 코만도는 최종적으로 목표인 6대의 헤스 포대를 파괴해서 목적을 달성했다. 또 10여 명의 사상자를 제외하고 전원 예정된 시간에 안전하게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전원 무사귀환한 제4코만도 부대와 영국 해군 상륙정 승조원들. 오른쪽 구석의 코만도 대원은 노획한 독일 육군의 전투모를 쓰고 있으며 왼쪽의 군복 바지 오른가랑이가 찢어진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른 코만도 대원은 카메라를 향해 작전이 성공했다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이 전투가 디에프 상륙작전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전투였다.
4.3. 동쪽 측면(Blue beach)
- 퓌스(Puys),베르느발(Berneval) / 왕립 캐나다 연대(로얄 연대)
왕립 캐나다 연대는 퓌스 (Puys) 해안에 상륙해서 해안을 점령하고, 그 주변의 포대 (롬멜 포대)의 독일군 대포를 노획 및 파괴한 후 대공 방어망을 없애는 것과, 디에프 항으로 공격할 에섹스 스코틀랜드 연대와 합류하는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퓌스 해안은 높은 절벽과 폭이 좁은 해안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5m의 높은 안벽[8]과 폭이 좁은 250m의 진출로로 이루어진, 여러모로 공격자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떤 함포사격 지원이나 공중지원 예정이 없었다.
결국 안벽을 넘을 수단이 없는 캐나다 연대는 밑에서 오는 족족 죽어나갔다.
556명의 병력이 3개 제파로 나뉘어 공격하기로 했으나, 상륙주정 (LCP)의 대오를 맞추느라 16분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독일군은 다른 지역에서 상황을 전파받아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자 황당하게도 너무 높은 안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안이한 정보수집 때문에 아무런 도구도 주어지지 않았다. 옐로우 2비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3개 제파는 오는 족족 안벽 위에 잘 구축된 기관총 진지에 막혔다. 11시 즈음 구조 LCA가 도착하여 그때까지 남아있던 소수의 생존자 구조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도 블루 비치에서만 LCA 4척이 침몰했다. 겨우 60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225명이 전사하고 264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영국으로 겨우 33명만이 돌아가는 비참한 결과를 남기고 전멸했다. 나머지 병력들은 행방불명되었다.
4.4. 서쪽 측면(Green beach)
- 바랑지빌(Varengeville), 푸르빌(Pourville) / 캐나다 사우스 서스캐처원 연대,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
캐나다 사우스 서스캐처원 연대가 상륙할 그린 비치는 푸르빌 (Pourville)이라는 디에프 서쪽의 작은 마을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스시에 강이라는 작은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퓌스 해안 (블루 비치)보다는 공격에 편했지만 연대가 상륙할 예정이었던 스시에 강 하구는 독일군이 대전차 장애물로 사용하려고 둑으로 막아두었으며, 해변의 양쪽은 절벽이었고 디에프 시로 향하는 길은 동쪽 절벽 뒤에 있었다.
서스캐처원 연대는 그린 비치에 상륙해 우익을 담당할 B, C중대는 푸르빌 (Pourville)로 진출해 서쪽 절벽의 적을 없애고 좌익을 맡을 A, D중대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 동쪽 절벽의 레이더 기지를 점령하고 그 뒤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가 후속으로 푸르빌 동쪽에 상륙해서 디에프 시에 상륙할 전차와 함께 생 오빈의 독일군 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해 동쪽 측면을 따라 전진하며 근방의 독일군 포대인 히틀러 포대를 같이 공격한 뒤 아르퀘스의 독일군 302 사단 사령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4시 50분, 어둠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병력이 푸르빌 서쪽 방면에 상륙하는 실수가 일어난다. 일부 상륙주정은 동쪽에 상륙했으나 소수였다. D중대는 푸르빌의 서쪽을 장악하고 서쪽 절벽 독일군 진지를 성공적으로 공격했으나 목표를 위해서는 푸르빌 동쪽에 2개 중대가 전개되어야만 했고, 따라서 스시에 강에 놓인 아페빌의 작은 다리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캐나다군은 다리를 건너려 했으나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는 숱한 시체만 남기고 후퇴했고, 하필이면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서쪽에 상륙했다. 거기에다가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의 상륙부대 지휘관인 알프레드 고틀링 중령이 또 하필이면 초장부터 저격당해 전사자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토니 로우 소령이 빠르게 대대 지휘권한을 넘겨 받았다.
카메룬 하이랜더 연대는 작전을 변경해서 독일군이 점령한 아페빌 다리가 아닌 또 다른 다리, 오우빌 다리를 건너려 했다. 독일군도 바보가 아니라서 302사단장인 헤스 소장은 단 한 명의 적도 오우빌 다리를 건너선 안 된다고 강한 명령을 내렸으며 하이랜더 연대가 오우빌 다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독일군 제1대대 자전거 소대를 비롯한 대전차 중대와 보병 소대가 집결해 있는 상태라 쉽게 돌파하기 어려워졌다. 그린비치 동쪽에서 합류한 서스캐처원 연대와 하이랜더 연대 일부는 절벽 동쪽의 레이다 기지를 공격했으나 매번 격퇴당했고 증강되는 독일군에 의해서 포위된 채 40%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해안으로 계속 후퇴하게 된다.
결국 지휘부가 작전실패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피해를 입었고, 드디어 연락이 들어와서 10시까지 버텨내기로 했으나, 후퇴 시간이 11시로 연기되는 바람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2척의 구축함이 엄호하는 가운데 6척의 구조 LCA가 잔존병력을 구출했으나 한 척은 전복되어 버렸고, 미처 구출되지 못한 100여 명의 병력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엄호하던 구축함 2척 중 한 척도 격침된다. 12시 15분 뒤늦게 남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LCA가 그린비치에 돌아왔으나 남은 병력이 보이지 않아 그냥 돌아오게 된다.
4.5. 정면공격(Red beach & White beach)
- 디에프 시 / 왕립 해밀튼 경보병대, 제14 캐나다 기갑연대 (캘거리 연대), 에식스 스코틀랜드 연대 (캐나다군), 몬트리올 수발총병연대(Les Fusiliers Mont-Royal), 영국 해병 코만도 'A' 부대
디에프 시는 주공이 있을 곳이었다. 그래서 영국군은 디에프 항구를 두 개의 상륙지점으로 구분하였다. 항구 왼쪽 (동쪽)을 레드 비치로, 오른쪽 (서쪽)을 화이트 비치로 명명했으며, 레드비치는 에식스 스코틀랜드 연대가, 화이트 비치는 왕립 해밀튼 경보병 연대가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에식스 스코틀랜드 연대는 항구와 도시를 점령한 다음 블루 비치의 로얄 연대와 만나기위해 동쪽으로 진격하고, 왕립 해밀튼 연대는 도시의 서쪽 지역을 점령한 다음 그린비치의 서스캐치원 연대와 만나 서쪽 돌출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또한 제14캐나다 전차대대 (캘거리) 소속 8대의 선도 처칠 보병전차는 화이트 비치에 상륙해서 그린비치에 상륙한 카메론 하이랜더 연대와 함께 생오빈 비행장과 아르퀘스의 독일군 사단본부 공격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통신장애와 기타 여러 이유 때문에 지휘부와의 통신이 제대로 안 되는 가운데, 다른 곳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05시 02분 구축함 (버클리, 브리스데일, 거스, 알브라이튼)4척과 1척의 포함 (로커스트)이 상륙주정들을 호위하며 디에프로 접근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해안타격을 펼쳐보기도 전에 오히려 독일군 해안포대들은 일제히 바다에 떠 있는 영국함대를 향해서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해 화력을 퍼부어야 할 영국함대는 대열이 흐트러졌고 상륙할 부대들의 진용까지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본진의 상륙에 대해 고민을 해야만 했는데 영국군은 작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게다가 영국군은 겨우, 고작 10분의 함포사격만으로도 주요 방어시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에 함포사격으로 정면의 3채의 건물만을 파괴한 채, 그 다음 디에프의 두 개의 돌출부를 공격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나마도 제대로 포격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영국공군기들도 방어진지와 콘크리트 벙커, 돌출부를 공격했으나 작전시간이 새벽이었고 역시 짧은 시간이였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러한 단시간의 함포, 항공지원이 끝나고 공군기들이 상륙군 보호를 위해서 연막탄을 투하했다. 이건 맨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뒤에 보이는 연기가 상당히 짙다. 이건 상륙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연막을 친 것인데, 안 그래도 새벽시간에 이루어진 상륙작전이라서 함대에서는 해안에서 뭔 일이 벌어지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통신까지 잘 안되는 상황이었으니 그냥 잘 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상륙주정들은 예정된 시각보다 3분 늦은 05시 23분에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에 도달했다. 최초상륙시 동시다발적으로 넓게 펼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독일 해안포대의 사격을 피해 무계획적으로 상륙했다. 다행히도 처음엔 독일군의 공격은 비교적 가벼워서 상륙주정들은 큰 손실 없이 병력과 장비들을 양륙할 수가 있었으나, 약 82m 거리의 해변을 달려 제1철조망을 절단하고 안벽을 넘으려했을 때부터 사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전투종료 후, 노획한 영국육군의 군납 맥주를 즐기는 독일육군 포병들
장병들은 안벽 위의 철조망을 넘어서 폭 200m의 해안로를 가로질러가야만 했는데, 함포사격과 공중지원이 워낙 단시간이었기에 독일군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그리고 상륙부대가 접근하자 언덕과 주택가의 지붕과 창문에서 기관총과 박격포를 쏘아댔다. 상륙병력들은 해변에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한 채 노출된 채로 죽어갔다. 측면 돌출부에서 가해지는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에 의해 큰 피해를 당했다. 특히 안테나를 세우려던 통신병, 지휘를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던 장교, 지원화기 사수, 공병 등 주요 직책을 가진 특수병과 인원들이 독일군 저격수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지나치게 짧은 지원과 전차 상륙지연으로 인한 화력부족이 원인이었다.
뒤늦게 10분이 지난 05시 33분과 38분, 9대의 처칠 전차를 탑재한 3척의 LCT (전차상륙정)가 디에프 항구에 나타났다. LCT에 탑재된 캘거리 연대 소속의 처칠보병전차들은 4파로 나뉘어 제1파 9대( 화염방사형 3대포함), 제2파 12대, 제3파 16대가 보병과 함께 해변에 양륙될 계획이었으나 전차 상륙이 지체되었다. 게다가 마지막 제4파가 연대의 나머지 전차를 양륙할 계획이었지만 나중에 제4파의 양륙은 취소되었다.
독일군은 해변으로 접근해 들어오는 LCT에게 공격을 집중시켰으나 그리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들어온 3척의 제2파 LCT가 양륙을 시도하는 동안 독일 육군의 집중 공격에 의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LCT-126과 LCT-145는 각각 3대씩의 전차를 양륙시킨 뒤 해변을 빠져나가다 피격당해 침몰했고 LCT-127은 양륙하는 동안 대부분의 승조원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당했으나 겨우 해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LCT-159와 LCT-163은 포탄에 맞아 좌초당했다. 30분후 해변으로 들어온 4척의 LCT 제3파도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LCT-124는 전차를 양륙하고 바다로 빠져나갔으나 결국 침몰했으며 LCT-125는 1대의 전차만 양륙시킨 뒤 해변을 겨우겨우 빠져나와 귀환했으나, 승조원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다. LCT-165와 LCT-166도 포격으로 겨우 겨우 전차를 상륙하는데 성공하고 빠져나갔다.
그나마 처칠 전차 총 30대 중 2대만이 가라앉았고, 전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 준다면 승산이 있어보였다.
LCT에서 상륙하는 처칠 전차. 초기형 Mk.1형이다.
그러나 전차들은 시내를 향한 돌격을 시도했으나 안 그래도 기동성이 좋지 않은 처칠 전차는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디에프의 자갈 해변에서 밍기적거렸고, 폭파공병 다수가 전사해 전차 장애물도 대부분 파괴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몇 대는 고장이 나거나 궤도가 나가서 해변에 그대로 선 채 고정포대가 되어야 했다. 초기형인데다 당시 기준이긴 했지만 처칠 전차 특유의 웬만한 대전차 포탄은 튕겨주던 떡장갑 덕분에 보병들이 밖에서 죽어나갈 동안 내부의 승무원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안전한 전차 안에 숨어 있다가 포로로 잡혔다. 캘거리 전차 연대에서는 13명 전사, 4명 부상, 나머지 157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딱 단 한 명만이 영국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전차가 멈춘 상태라면 가치가 급전직하한다. 그래서 상륙한 전차들은 필사적으로 전진을 시도했으나 제1파로 상륙한 전차 중 1대가 무한궤도를 잃었으며 1대의 화염방사 전차는 방사 연료탱크를 파괴당했다. 얼마 후 3대의 전차가 무한궤도를 손상당했으나 3대의 전차 (쿠거, 치타, 캣)는 자갈해변을 가로질러 성공적으로 안벽을 넘었다. 그에 이어 제2파 전차들을 탑재한 LCT들이 해변으로 돌입했고, 제3파는 왕립 수발총병 연대와 함께 들어왔으나, 하필이면 캘거리 전차대대장 앤드류 중령은 전투 초기, 수심 깊은 곳에 빠진 전차승무원들을 구하다가 전사했다. 간신히 안벽을 넘는 데 성공한 15대의 전차들은 전면에 있는 대전차장애물로 인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로 포격을 실시해서 토치카와 기관총좌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침 9시 이후 거세지는 독일군의 반격과 대전차포의 위협도 있었고, 탄약까지 고갈되어 결국 다시 해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병력 일부가 전사한 공병의 폭약통을 이용해서 방어선을 뚫고 시내로 전진해서 들어갔으나 저격수에게 저격당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화이트 비치에 상륙한 왕립 해밀튼 연대는 그나마 성공적이었다. 카지노 근처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총격전으로 해안가의 카지노 1층을 점거한 뒤, 경기관총을 거치해 독일군의 반격을 막아냈다. 이를 기회로 10여 명의 병력이 카지노에서 빠져나와 도심으로 진격했으나 대전차 장애물을 넘으려 할 때 적탄이 날아와 우회해야만 했다. 극장으로 가는 도중 몇몇의 소대와 합류해 극장을 점령했으나 강력한 독일군의 반격에 밀려서 탄약이 떨어지자 다시 카지노 쪽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퇴각하면서 18명의 병력은 전화 교환국으로 향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퇴각했다. 허나 이러한 분전들은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을 뿐 적을 제압할 수도 없었으며 애초의 작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도 아니었다.
시가지로 진출한 캐나다 육군
해군과 육군을 각각 나누어 지휘하던 휴즈-핼럿 제독과 로버츠 장군은 이렇게 생지옥으로 변한 해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각기 따로 명령을 남발했다. 이런 잘못된 명령으로 날이 밝아 온 07시경까지 예비병력의 축차적인 상륙은 계속 이루어졌고, 그 결과 해군의 상륙정들은 독일군의 요격에 막혀서 차례차례 침몰했다. 여기에 타고 있던 육군 장병들 대부분은 해안가에 가보기도 전에 물귀신이 되었고 그나마 상륙한 상륙정들도 불타올랐다.
그렇게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던 중 상륙한 병력 일부는 안벽 아래에 돌을 쌓아 여단 본부를 구축했다. 상황이 영 안 좋아 보였지만 해밀튼 연대에게서 들어온 '아군이 이미 디에프 시내로 진입했다.'라는 보고 덕에 여단 본부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소수병력이 해안 카지노를 점령하고 시내 근처로 진출했다는 보고가 아비규환 속에서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부는 다른 곳도 순조롭다고 생각하고 본부 구축함에게 강력한 적의 반격에 직면한 레드 비치로 몬트리올 연대를 지원하도록만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력한 독일군의 화력과 전의 상륙주정에서 발사한 연막 때문에 LCT 전차상륙정 3파와 몬트리올 연대 전체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했고, 예정된 상륙지점이 아닌 서쪽 절벽 아래에 상륙해서 고립되었다. 그나마 소수가 시내방향으로 향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포로가 되고 고립되는 등 상륙병력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본부 구축함에서는 독일군의 예상 외로 강력한 반격에 놀라 기습에 투입하려던 해병 코만도와 아까 파견하지 않고 남아있던 몬트리올 연대병력 일부를 화이트 비치에 증원하기로 한다. 아까 파견한 몬트리올 연대가 서쪽 절벽에서 고립된 것을 알지 못하던 지휘부는 코만도에게 서쪽 돌출부를 향해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짙게 깔린 연막 때문에 코만도는 해변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해변의 상황을 알지 못했으나, 처참한 상황을 보고는 그냥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짙은 연막 때문에 수신호를 보지 못한 몇몇의 상륙주정은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상륙했고, 상륙한 병력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다시 돌아온 코만도와 몬트리올 연대 병력 일부는 지휘부에 이 사실을 전달했고 지휘부는 9시 15분이 되어서야 작전의 실패를 인정했다. 원래부터 상륙의 목적이 기습 및 위력정찰이었으므로 10시에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최초에 수립된 계획상 병력을 투입시킨 후 해안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는 병력을 철수시켰어야 할 상륙정 대다수가 피격당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해안에 접안 한 상륙정들도 차례차례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그래서 그나마 살아남은 병력들도 작전을 마치고 귀대할 수단이 없어졌다. 그래서 11시가 되어서야 후퇴에 필요한 보트를 간신히 모을 수 있었고 이는 10시까지 후퇴하기로 전달받은 많은 병력들을 생지옥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날이 밝아 오면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전투기들이 후퇴하는 병력에 대한 필사의 엄호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루프트바페가 날아올라서 제공권을 장악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해협을 건너가 영국 본토 위에서 싸웠던 독일 전투기들은 짧은 체공 시간 때문에 작전제약이 많았으나 디에프는 독일공군의 홈그라운드로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영국공군의 요격을 피한 Do 217은 후퇴하는 상륙부대를 폭격하고 있었고, Fw 190 전투기들이 반격과 대공포화로 영국은 110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영국공군이 전쟁 중 하루에 입은 최고손실이다. 당시 영국 공군이 투입한 전투기의 대부분은 Fw190에게 열세한 성능을 보이는 스핏파이어 V형[9]이었고, 영국 항공전에서 독일이 가진 불리함까지 (그러나 독일은 당시 영국이 가진 불리함이 없었다) 고스란히 떠안고 싸워야 했으니 손실이 적으면 그게 더 대단한거기는 하다.
결국 11시 즈음 영국군이 탈출하고 오전 12시 30분경 탈출하지 못하고 해안가에 고립된 연합군들이 항복함으로써 디에프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캐나다 육군 포로
독일 해군 육전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
(전략)... 상륙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8월 20일, 라디오 런든은 프랑스 해안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이 영국인들에게 만족의 미소를 띄게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과 미군은 그 어디에서도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습니다. 이 병사들은 스탈린의 강요로 이 무모한 도전을 하게된 아마추어 전략가 처칠의 희생자들입니다. 라디오 런던이 혈기 왕성한 거인의 군대라고 보도한 캐나다군의 모습입니다...(중략)... 로이터사의 19일 보도에 따르면 디에프 상륙작전은 싸울 의지로 불타는 영국군의 사기를 드높여주기 위해서 실시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상륙작전이 그들의 계획대로 사기를 올려주긴 했습니다. 하지 그들의 의도와 달리 우리 독일군의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모든 군사적 상식을 무시하고 오직 정치적 의도로 이루어진 이 아마추어적인 작전에 영국과 미국은 2000명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습니다
디에프 상륙작전 실패를 보도하며 영국을 조롱하는 1942년 8월 26일 독일 선전뉴스 625호 방영분
디에프 상륙작전 실패를 보도하며 영국을 조롱하는 1942년 8월 26일 독일 선전뉴스 625호 방영분
연합군은 이 작전의 주요한 목적은 달성하지도 못한 채 큰 피해를 입었다.
1,500명의 독일군 중 311명이 전사하고 280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에 캐나다군에서만 총 4,963 중 916명이 전사했고 1,946명이 포로가 되어 사실상 전멸했으며, 코만도에서는 275명이 전사했고 미군 레인저에서도 3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영국해군에서는 구축함 1척과 상륙정 33척을 손실했으며 550명이 전사했다. 또한 영국공군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64대, 호커 허리케인 20대, 보스턴 폭격기 6대, P-51 머스탱(Mk 1) 10대로 총 110대를 잃는 동안 독일공군은 독일군의 주장대로라면 Fw 190 23대와 Do 217 15대로 총 38대를 잃어 적의 공군력 약화라는 목표도 완전히 실패했다. 물론 영국이 49개의 전투기 스쿼드런을 투입했지만 이 중 Fw190과 대등한 싸움이 가능한 스핏파이어 IX형은 4개 스쿼드론밖에 없었다는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도 없었던 목표이긴 하다. 결과적으로 방어가 잘 되어있는 항구를 점령해서 교두보로 사용하는 계획은 폐기되었다.
코만도 부대는 생 나자르 항구의 드라이 독 파괴 임무와 디에프 상륙작전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후 대규모 침투 작전은 자제하고 이후 분대~2인 1조 팀 단위의 소규모 침투, 파괴, 암살, 정찰임무로 전환한다.
6. 교훈
우선 영미연합군에게는 이 작전은 훗날 벌어질 큰 상륙작전에 대한 실전연습성격도 있었고, 여기서 벌어진 온갖 병크와 전훈은 철저히 연구돼서 이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는 거의 반복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과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당장 상륙작전뿐 아니라 다른 작전에서도 중요한 제공권 장악, 항공지원, 지원폭격 등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달았다. 상륙부대와 후방의 지휘부와의 소통과 연락문제, 해안 상륙 시 전차의 돌파 등 대책을 강구해 노르망디 성공에 큰 기여를 했고 디에프에서 죽은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을 살렸다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10]
노획한 처칠 전차를 살펴보는 독일육군 전차승무원들
반면에 독일군 역시 연합군이 유럽 본토상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대서양 방벽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더욱 더 많은 물자와 인력을 뿌려댔는데, 연합군이 그것보다 천지차이급의 대규모 병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로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디에프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1944년 9월 캐나다군 제2사단이 해방시켰다.
디에프에서의 교훈을 노르망디의 자만으로 잊어버렸는지 마켓 가든 작전에서 영국군은 무리한 작전공세로 공수부대를 날려먹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7. 이후 이야기
작전자체는 큰 실패지만, 이런 종류의 군사작전은 실패 여부를 떠나서 뒷이야기도 꽤나 많다.우선 발단 항목에 나온데로 영국은 이 작전이후 정치적으로 그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특히 유럽의 직접적인 상륙이 어려움을 깨달은 연합국은 비교적 약한 이탈리아군과 보급부족으로 허덕이는 아프리카군단으로 눈을 돌려 지중해와 아프리카전선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횃불 작전과 몰타 항공전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이집트 방어 성공으로 영국은 전후에도 수에즈 운하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프랑스처럼 승전국 말단이 아닌 대표로써 얄타회담과 UN창설 당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직접적 후속작전은 아니지만 실제 입안된 작전중에는 코만도를 상륙시켜서 파리의 광장에 불을 켜고 돌아오는 계획도 있었다 한다. 코만도의 초기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벌어진 망상인데, 디에프의 교훈으로 이런 망상은 사라졌다.
작전개시이전 "이 작전은 식은 죽 먹기 (piece of cake, 케잌 한 조각)보다 쉬울 것"이라고 발언했던 로버츠 장군은 이후 매년 8월 19일 누군가에게서 케잌 한 조각을 받았다.
나중에 훨씬 더 큰 규모로 시행되었고, 연합군이 승리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덕분에 연합군이 완벽하게 패배한 디에프 상륙작전은 대중매체에서 완벽하게 묻혔다.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밀덕들조차 노르망디에 관심을 갖지, 디에프는 뒷전이다. 간혹 나오더라도 간단하게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넘어가거나 배경으로 잠시 언급하는 정도. 1980년대 로렌스 올리비에가 내레이션을 한 고전 다큐멘터리 World At War에서도 노르망디 상륙 전편 앞부분에 5초간 잠깐 설명 나왔다.
다만 이 작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캐나다의 경우는 1994년에 2부작 다큐드라마를 만들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수석 조선기사 토머스 앤드루스 역을 맡은 배우인 빅터 가버[11]가 마운트배튼 제독으로 나오는데, 결과적으로는 미국, 영국의 수뇌부들의 실책을 고발하는 내용. 동쪽 측면 전투를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했다.
레온 유리스의 나치 전범 재판소설 7호 법정에서 주인공인 작가 캐시디가 미국인 출신의 영국 공군으로 이 작전에 참가했다는 설정이다. 피탄된 기체를 영국본토로 간신히 불시착했지만 한쪽 눈을 잃게 된다.
안네의 일기에서도 디에프 상륙작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큰 기대를 한 모양이다.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디에프 상륙작전과는 다른 것 같아.... 그때처럼 되진 않을...."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태평양전선을 다룬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짤막하게 패배한 것으로 언급이 된다.
맥아더가 인천 상륙 작전을 주야장천 밀고 나갔을 때 참모진이 그걸 반대하는 예시로 든 것이 디에프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의 상륙조건도 마찬가지로 매우 나쁘긴 했지만 다행히도 북한군은 독일군이 아니었다.
[1]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숙부,
IRA에게 잘못 걸려서 폭사당한 사람 맞다! 이 사람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 하나 때문에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참전용사들에게 영원히 욕을 먹고 있다. 이후 해군
원수로 진급,
인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그 곳에선 평판이 좋았다.
[2]
42년의 연합국은 당장은 추축국의 기습적인 개전과 맹렬한 공세, 그리고 전쟁 초반의 패착으로 인한 타격으로부터 충분히 회복하지 못하거나 국력총동원체제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등의 상황상 수세에 몰려 영 좋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미국+소련+영국/독일+이탈리아+일본의 양 진영 구도가 완성된 이상 총 국력의 압도적 우위를 기반으로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감은 잡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던 것.
[3]
캐나다는 당시 영국 자치령이었다.
[4]
당시의 이러한 인식은 거시적인 정치적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다루는 것도 아닌
안네의 일기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처칠의 연설과 영국의 전쟁상황을 전하는 라디오 뉴스를 주제로 (은신처의) 어른들이 대화 (토론)하는 것을 들은 안네는 "어른들은 영국이 모든 힘을 다해서 나치에 맞서 싸워 물리친 후 식민지를 비롯해서 자신들이 가졌던 기득권은 모두 스스로 내려놓고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른들은 정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소리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실제로 전후의 영국은 그렇게 해야만 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런 희생을 통해 겨우 서방진영 내에서 서열 2위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국의 입장을 기준으로 도리와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안네의 생각이 옳은 것이었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가 영국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했던 것이다.
[5]
대표적으로 카이로 회담을 들 수 있겠다.
[6]
지휘관
윌리엄 O. 다비 소령
[7]
아무래도
보이스 대전차 소총 을 잔해 혹은 해안바위 틈에 거치하여 포대 조작인원들을 하나하나 저격한 듯 보인다.
[8]
선박을 대기 위하여 항만에 설치하는 큰 벽, 크고 높은 선창 겸 방파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9]
영국은 49개의 전투기 스쿼드런을 투입했고 그 중 4개 스쿼드런만이 IX형을 보유하고 있었다.
[10]
실제로 이때의 교훈을 살려 만들어진게
퍼니 전차와 같이 후일 전문상륙장비로 진화하는 장비들이다.
[11]
미드
앨리어스의 여주인공 아버지역으로도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