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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어 폰 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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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초대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FM Fedor von Bock
파일:Fedor_Von_Bock.jpg
이름 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모리츠 알브레히트 프란츠 프리드리히 페도어 폰 보크[1]
출생 1880년 12월 3일
독일 제국 퀴스트린[2]
사망 1945년 5월 4일 (향년 64세)
나치 독일 홀슈타인
복무 독일 제국군( 프로이센 왕국군) (1898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1935년)
독일 국방군 (1935년~1945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청색 작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푸르 르 메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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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ahoy.tk-jk.net/FieldMarshalFedorvonBock.jpg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국방군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부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명성에 비해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독일군 지휘관이다. 하지만 1941년 겨울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소련군의 반격에 참패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이후 1943년까지 남부집단군 사령관을 잠시 맡았다가 해임된 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45년 히틀러 자살 이후 카를 되니츠의 정부에 참여 제안을 받았고, 되니츠 정부가 있던 함부르크로 이동 중 영국군의 폭격을 받고 가족과 같이 사망했다.

독일어의 외래어 표기법상 페도르가 아니라 페도가 정확하다. 어말의 R은 '어'로 표기하기 때문. 실제 발음도 마찬가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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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초기 이력

프로이센 왕국 융커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브란덴부르크 주의 오데르강변에 있는 퀴스트린(현재 폴란드의 코스친)이다. 아버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증조부는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서 근무했다. 어머니 쪽도 군인 귀족이었으며 외삼촌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4]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다. 게다가 오이겐 폰 팔켄하인이라는 외삼촌도 있었는데, 그도 1차 세계 대전 당시 기병대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군사 유년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언어에 재능을 보여 프랑스어는 유창했고, 영어, 러시아어도 꽤 잘했다고 한다. 17세에 포츠담의 제국 보병 근위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고, 1년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큰 키에 깡마르고 꼬장꼬장한 성격을 가진 데다가 고지식한 FM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번 새로 임관하는 소위들이나 부하들에게 "조국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은 그의 별명이 되어, 부하들에게 "순국 열사"라는 뜻의 "der Sterber"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는 "퀴스트린의 성화(聖火)"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905년 보크는 귀족 출신 아가씨인 말리 폰 라이히벤바흐와 결혼했고, 2년 후 딸을 낳았다. 그 후 보크는 고급 장교 기관인 베를린의 전쟁 아카데미에 들어가 일반참모 과정을 이수한 후 총참모부에 들어간다. 이후 발터 폰 브라우히치(히틀러 집권 초기의 독일군 총사령관), 프란츠 할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친구가 된다. 1908년 그는 중위로 승진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대위 계급이었다. 그는 제4 보병근위연대의 대대장으로 용맹을 떨쳐 독일 제국군 최고의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소령으로 승진하여 서부전선에 배속되었고, 카이저의 아들인 황태자와도 친구가 되었다. 종전 직전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킬 군항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설득했으나, 이미 독일은 전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독일은 패전한다.

어쨌든 그는 열렬한 왕당파였으며, 이런 성향은 바이마르 공화국시의 국방군 수뇌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정서였다. 다만 왕정 복고는 협상국 측에서 절대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방군은 겉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2.3. 전간기

2.3.1. 바이마르 공화국

베르사유 조약 에 의거해 독일군이 10만명으로 축소되었고, 사병뿐만 아니라 장교들도 대부분 퇴역하지만, 보크는 유능했기 때문에 군에 남았다. 1920년대 보크는 한스 폰 젝트를 돕는 국방군 내 비선 조직을 이끌어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군에 강제한 제한을 회피하면서 군의 전력을 확충시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였다. 이런 조직은 협상국 측에 고용되어 베르사유 조약의 이행 사항을 감시하는 독일인 감시원에 대한 암살이나 테러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군이 축소되어 히틀러 집권 전까지 대부분 영관급 장교에 머물렀던 다른 2차 대전 독일군 원수들과는 달리, 보크는 이미 1929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장성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지연, 혈연, 학연 모든 면에서 프로이센 정통 순혈 장교였기 때문이었다.

2.3.2. 히틀러 집권 초기

1934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히틀러에 대한 충성이 의심스럽던 여러 사령관이 해임되었으나, 보크는 제3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왕당파였고,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나치당과 성향이 비슷했으나, 대중 선동에 의존하는 나치는 혐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보크를 신임했고, 군의 원로였던 루트비히 베크, 총사령관 블롬베르크, 총참모장 프리치는 해임했지만 보크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보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위한 독일군의 진공을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진공도 지휘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2.4.1. 폴란드 침공

파일:external/1.bp.blogspot.com/bock.jpg
1938년, 상급대장 시절

1938년 보크는 독일 국방군 최종계급인 상급대장이 되어 있었다.[5]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보크는 북부집단군의 지휘를 맡아 비스와 강을 건넜다. 북부집단군은 게오르크 폰 퀴힐러의 3군, 귄터 폰 클루게의 4군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3군은 동프로이센에서 남쪽으로 진격했고, 4군은 독일 본토에서 폴란드 회랑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진격했다.

9월 10일 보크는 폴란드 민간인 마을으로부터 독일군에 대한 적대 포격이 있을 때, 민간 가옥임을 구분하기 불가능할 때는 가차없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북부집단군은 이걸 명분으로수백 개의 폴란드 마을을 불태웠다. 이 명령은 그의 사후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은 5주의 작전 끝에 성공적으로 끝났고, 보크의 부대들은 이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2.4.2. 프랑스 침공

폴란드 침공이 끝난 10월, 보크는 B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B집단군은 29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에는 3개의 기갑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B군집단의 작전 목표는 네덜란드- 벨기에를 유린하고, 이곳과 프랑스 북부에 배치된 연합국 부대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룬트슈테트의 A집단군이 아르덴 고원을 돌파해 연합군을 뒤에서 포위할 예정이었기에, B집단군은 연합군의 시선을 네덜란드와 벨기에 쪽으로 돌려놓는 일종의 미끼 역할이었다. 보크의 부대는 18군과 6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6군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지휘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역 부대가 된다.

보크 지휘하의 B집단군 휘하 제6군과 18군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각각 항복시켰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이끄는 A집단군은 아르덴 숲을 넘어 프랑스를 유린, 프랑스를 항복시킨다. 이는 보크가 이끈 B집단군이 북부의 연합국 부대들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크가 계획보다 빈약했던[6] 전력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제압하고 추가로 지원을 온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발을 벨기에 인근에 묶어버려 더 많은 연합군 병력이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휘하였던 제 18군은 파리를 함락시키며 본인 역시 함락된 파리를 방문해 휘하 병사들을 사열하는 영광을 누렸다.[7]

이 공적으로 보크는 원수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 항복 후 보크는 한동안 주둔군 사령관으로 프랑스에 머물게 되지만, 이후 소련 침공을 염두에 둔 보직이동으로 보크는 부대와 함께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게 된다.

2.4.3. 독소전쟁

2.4.3.1.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2월 2일, 보크는 히틀러에게 호출되어 소련 침공의 개요를 전달받았다. 보크가 맡고 있던 B집단군은 중부집단군으로 재명명되어 좌익이 북부집단군, 우익의 남부집단군과 함께 소련을 침공할 주역 부대가 되었다. 침공군의 세 갈래 중 가장 강력했던 중부집단군은 4군( 귄터 폰 클루게), 9군(슈트라우스), 2기갑집단( 하인츠 구데리안), 3기갑집단( 헤르만 호트), 그리고 공군의 제2항공전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보크가 짠 계획으로는 중부집단군은 원래 프리피아트 습지를 거쳐 모스크바로 닥돌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계획을 변경하여 스몰렌스크와 민스크에 포진한 소련의 서부 전선군을 포위 섬멸하고 이후 북부집단군을 조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소련군을 섬멸하지 않고 후방으로 도주시키면 나폴레옹의 몰락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히틀러의 판단 때문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보크가 지휘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소련군을 가볍게 물리치며 소련군 서부전선군이 포진한 스몰렌스크-민스크 방면으로 맹진격했다.

보크는 7월 3일에 끝난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 60만을 포위, 이중 30만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뒀고, 직후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60여만 명의 병력을 포위하여, 30여만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8월 5일)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버티고 있던 소련 서부 전선군의 대부분인 120만을 섬멸한 데다가 교통의 요지인 스몰렌스크를 점령했기 때문에, 보크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속행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중단시키고 일부 부대를 비교적 고전하고 있는 남부집단군으로 전출시키고, 중앙집단군 주력은 현 위치에서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전출된 제2기갑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후 저술한 회고록 <기계화부대장>에서 "그때 모스크바를 쳐야 했는데 안 쳐서 결국 전쟁 전체가 패전이 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인한 손실이 심해 공세를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키예프의 소련군을 놔두고 무리해서 모스크바로 진격했을 경우 측면이 노출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어쨌든 9월 하순까지 약 2달 간 중부집단군은 스몰렌스크에서 정지하고 부대 개편과 정비를 하고 있었고, 중부집단군에서 전출된 구데리안군은 남부집단군의 키예프 함락을 조공하였다.
2.4.3.2. 모스크바 전투
2달 간 개편을 마친 중부집단군은 제3기갑군( 한스-게오르크 라인하르트), 남방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제2기갑군과, 북부전선군에서 전출 편입된 제4기갑군( 에리히 회프너)로 10월 3일부터 다시 모스크바의 길을 더듬었다. 작전명은 태풍(Teifun). 보크는 나폴레옹 원정군의 참극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본격적인 러시아의 동장군이 오기 전인 11월 7일에 모스크바 점령을 완료해야 한다고 집단군 전체에 훈시했다.

구데리안군은 10월 3일 오룔을 바로 점령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이때부터 내린 가을 장마로 도로는 진흙창이 되었으며, 이는 무거운 기갑 차량을 돌파의 선봉으로 삼는 독일군에겐 재앙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계속 느려졌고, 더구나 이때부터 전선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군의 T-34 전차는 당시 독일군의 주력이던 3호 전차보다 월등한 성능으로 독일군 기갑 부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악천후에도 독일군은 브랸스크와 뱌지마에서 대규모 포위를 완료하고 모두 60만에 이르는 포로를 획득하는 등 선전했으나, 그동안 독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한 수비도 완강했으며, 독일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11월이 되자 날씨는 얼어붙고, 전차의 기동이 가능해서 독일군 지휘관들은 좋아했으나, 동복 및 동계 장비를 지급받지 못한 사병들은 추위에 시달리게 되어 전투력이 급감했다. 독일군은 전상자 외에도 수많은 동상 환자를 내어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하는 병사만 수만 명에 달하는 등의 참극을 빚었고, 전차나 트럭은 부동액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게 되는 등 피해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12월 4일, 독일군의 정찰대가 모스크바 중심부 30km까지 전진하여 크렘린의 첨탑을 망원경으로 본 것이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모스크바였다. 이에 맞춰 게오르기 주코프는 12월 초, 약 100만의 병력으로 모스크바 전면에서 공세로 나왔고, 헐벗고 지친 독일군은 이를 막아낼 수 없었으며 전선은 곳곳에서 구멍이 나버렸다.

결국 보크 휘하의 구데리안은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소련군에 포위되기 전에 자기 독단으로 후퇴 명령을 내렸고, 다른 부대들도 이를 따랐다. 히틀러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독일군은 충분한 동계 장비를 갖추고 휴식을 취한 소련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히틀러는 태풍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중부집단군의 여러 부대 지휘관들을 파면했고, 보크도 이때 해임되었다.
2.4.3.3. 블라우 작전
1942년 1월, 남부에서 비슷한 고전을 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남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그 뒤를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이었으나, 그는 곧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는 얼마 전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파면된 보크가 임명되었다.

블라우 작전을 입안 중, 5월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한 60~70만의 소련군의 5월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보크는 블라우 작전의 공세를 시작하려던 휘하 부대를 이용해 소련군을 기동 방어로 막아 냈고, 다시 역관광시켜 이를 패퇴시켰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6월에 블라우 작전에 앞서 남부집단군은 A/B 집단군으로 나뉘었고, 보크는 B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소련군을 분쇄하며 무인지경으로 러시아 남부 스텝 평원을 질주했다. 보크는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소련군 보로네즈 전선군이 독일군 측면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고 전진하려 하는 등, 좀 더 신중히 공세를 진행하려 했으나, 이는 히틀러를 노하게 할 뿐이었다.

히틀러는 7월 15일, 작전 진행 상황이 미진하다는 이유를 들어 보크를 해임하고 B집단군 사령관에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를 임명했다. 이 길로 바로 보크는 현역에서 은퇴하고, 자택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음모자들이 보크를 참여시키려고 했으나, 보크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사건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대숙청도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전황은 기울어져, 보크가 빈사 상태로 몰았던 소련군은 이제 독일군도 손 쓸 수 없는 괴물로 변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이게 되었다.

2.5. 죽음

1945년 5월 베를린은 소련군에 포위되었고, 히틀러는 자살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유언에 의해 카를 되니츠 제독이 새로운 독일 대통령에 취임하고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세워진다. 보크는 되니츠 정부에 합류를 요청하는 연락을 받고 차량으로 함부르크로 이동중 영국 공군 호커 템페스트의 기총 소사에 차량이 피격되었다. 차에 타고 있던 운전기사와 그의 가족 (후처, 양녀)는 모두 즉사했고 보크는 심한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다음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사망하던 순간, 평소 보크가 최고의 전략가라고 생각해온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게 독일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미 전세를 뒤집기에는 너무나도 늦고 말았다. 참고로 이를 야전에서의 전사로 보아야 할지는 서술이 엇갈리고 있다.

3. 평가

보크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고급 지휘관중 최고 원로급이었으며, 또 다른 원로급 지휘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마찬가지로 후배 군인 하인츠 구데리안 등이 주장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군사 이론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여 독일군 초기의 대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 프랑스 침공 이후 줄곧 동부전선에서만 활약했고 동부전선에서 은퇴한 후로는 다시는 기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이 활약했던 룬트슈테트나 귄터 폰 클루게에 비해서는 밀덕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주력이 중부집단군이었고,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았다는 것은 독일군 내에서도 가장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던 프로이센의 귀족 보수파 장교를 대표하던 인물로, 왕당파답게 나름대로 전통적인 기사도 정신이 있었던 듯, 독소전쟁 국방군 무장친위대가 벌이던 잔혹 행위에 소극적으로나마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남부집단군에 속한 6군의 사령관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유대인-정치장교를 포로로 인정하지 말고 사살하라는 소위 " 강조명령"을 내리고 이를 자기 부대뿐만 아니라 독일군 전체에 회람시키자 보크는 "미친 소리 마라"는 평을 했다고 한다.[8] 그런 덕분에 폰 보크가 지휘하던 시절의 중부집단군은 이런 일에 휘둘리는 정도가 매우 적었다. 구데리안은 자서전에서 이러한 보크의 판단에 감사를 표했다.

4. 주요 보직

5. 진급 일자

6. 주요 서훈 이력

7. 등장 매체

서든 스트라이크 4에서 국방군의 세 장군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나머지 장군은 하인츠 구데리안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세계 정복자 4에서 4성 전차장으로 등장한다. 싼 가격치고서는 나쁘지 않은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저렴하고 능력치가 좋은 메세에게 상대적으로 밀린다.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군 장성진 중 공격 5, 방어 3의 우수한 능력치로 등장하나, '신중함'과 '가혹한 지휘관' 특성을 가진 채로 나온다.[11]

위 게임의 모드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의 장성진으로 나오며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시, 군정청 지도자로 세울 수 있다. 아마 원역사에서 프랑스 주둔군 사령관을 지낸 것이 반영된듯 하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보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폴란드 루부스키에 주 코스트신나트오드롱 [3] 다만 영어로 된 다큐에서는 죄다 페도르로 발음하는데, 얘네들은 바그라티온도 바그레이션으로 읽을 때가 있는 고로 저정도면 애교 수준이다. [4] 베르됭 전투를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의 외동딸 에리카 폰 팔켄하인은 2차대전기 나치 독일의 장군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와 결혼하였다. 트레슈코프는 대표적인 반 히틀러 인사로써 나중에 보크를 회유하기 위해서 많은 시도를 하였다. [5] 원수는 미군과 같이 전시 상황에만 활성화된다. [6]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낫질 작전을 위해 A집단군으로 넘어가 전력이 많이 줄어 있었다. [7] 단 제 18군 파리 함락 기념 공식 퍼레이드는 프랑스가 항복을 발표하고 난 이후 이루어졌다. 보크는 파리가 함락된 당일 파리를 행진하는 18군 예하 병사들을 사열했다. [8]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보크는 라이헤나우와 계급만 같을 뿐 보직은 차이가 났으며 군 경력상으로도 까마득한 선배였다. 안 그래도 나치 추종자라 마음에 안 들던 후배 라이헤나우가 일개 군사령관 주제에 독일군 전체에 대고 작전에 도움도 안 되는 명령을 했으니 집단군사령관이던 보크나 레프를 비롯한 원로들에게는 하극상이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보크와 레프는 이 논리로 강조명령을 무시했다. [9] 보크는 되니츠의 요청을 즉각 수락하여 함부르크로 이동하던 중 영국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고, 차량에 동승한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10] 이날 아돌프 히틀러 베를린의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식전을 열어 프랑스 전역의 성공적인 종결을 기념하고, 육군과 공군의 장군 12명을 원수로 진급시켰다. [11] 신중함은 버프 특성이고, 가혹한 지휘관은 너프 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