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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과달카날 전선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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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과달카날 전역
영어: Guadalcanal Campaign, Battle of Guadalcanal
일본어: ガダルカナル[ruby(島, ruby=とう)]の[ruby(戦, ruby=たたか)]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전투
장소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섬
기간
1942년 8월 7일 ~ 1943년 2월 9일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
[[틀:깃발|]][[틀:깃발|]][[알렉산더 패치|]]
[[틀:깃발|]][[틀:깃발|]][[J. 로턴 콜린스|]]
[[틀:깃발|]][[틀:깃발|]][[로버트 곰리|]]
[[틀:깃발|]][[틀:깃발|]][[윌리엄 홀시|]]
[[틀:깃발|]][[틀:깃발|]][[프랭크 잭 플레처|]]
[[틀:깃발|]][[틀:깃발|]][[리치먼드 K. 터너|]]
[[틀:깃발|]][[틀:깃발|]][[존 매케인 시니어|]]
[[틀:깃발|]][[틀:깃발|]][[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모토 이소로쿠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햐쿠타케 하루키치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나구모 주이치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미카와 군이치
[[틀:깃발|]][[틀:깃발|]][[츠지 마사노부|]]
[[틀:깃발|]][[틀:깃발|]][[미야자키 슈이치|
미야자키 슈이치
]]
전력 보병: 60,000명 보병: 36,000명
피해 전사자: 7,100명
군함 29척 침몰
항공기 615기 손실
전사자: 19,200명
군함 38척 침몰
항공기 700여기 손실
결과 연합국의 승리
영향 태평양에서 연합군의 반격 시작

1. 개요2. 배경3. 양측이 지녔던 문제점4. 과정
4.1. 전역의 서막 : 툴라기 전투4.2. 미 해군 최악의 참패 : 사보섬 해전4.3. 본격적인 전투 돌입: 테나루 전투4.4.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하다 : 동부 솔로몬 해전4.5. 마타니카우 강에서의 2차례의 혈전 : 마타니카우 작전4.6. 시작된 일본의 수송 작전 : 도쿄 익스프레스4.7. 야간전에서의 일본군의 패배 : 에스페란스 곶 해전4.8. 일본군의 반격,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 : 산타크루즈 해전4.9. 미군에게 전역의 주도권을 넘기다 : 과달카날 해전4.10. 절망적인 일본군4.11. 다시 또 털린 미군, 하지만 이미 넘어간 승기 : 타사파롱가 해전4.12. 미군의 총공격4.13. 일본군의 철수
5. 전투 종료 이후6. 전투에 동원된 미 해군 전투서열
6.1. TARE 기동부대6.2. KING 기동부대
7. 전투에 동원된 미 해병대 전투서열8. 전투에 동원된 미 육군 전투서열9. 그 외의 이야기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pacificwar.org.au/guadalcanal7.jpg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
태평양 전쟁 당시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과 그 주변 섬, 해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국, 호주, 그리고 현지 원주민 연합군과 일본 제국 사이의 소모전이다. 전역의 결과 일본 제국이 패배하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일본 제국은 이곳서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패망의 불씨를 당긴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2. 배경

비록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자랑하던 정예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박살나는 참극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일본군이 압도적 우위라는 위치 때문에 방심하다가 참극 이후 비교적 우위라는 상황을 허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비록 연합군에게 칼자루를 하나 넘기긴 했어도 서태평양의 도서를 요새화한 일본이 태평양 전역에서 우세한 상황이었고 일본 대본영이 그나마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자들이었다면 재반격에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즉, 미드웨이는 1941년 겨울 계속 밀리던 소련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양, 질 모두 우세했던 독일군에게 최초로 패배를 안겨준 모스크바 공방전의 태평양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를 차지한 이후의 전략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진 끝에 호주와 미국 간 연락선을 차단하는 전략을 택했다.[1] 주 전략 목표는 동부 뉴기니 남쪽 지역과 솔로몬 제도 이남의 남태평양 상에 있는 섬들의 점령이었다. 전자는 호주로부터의 연합군 교두보를 없애고 호주 북부를 직접 위협할 수 있으며, 후자는 호주와 미국 사이의 지형지물을 차지하여 양국간 교통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 호주는 상국 영국의 요청에 따라 웬만한 장년층들이 다 징집되어 엘 알라메인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일본의 과달카날 요새화 징후를 보자 미국에게 SOS 신호를 칠 정도였다.

이를 위해 1차적으로 동부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될 미군 항공모함들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포트모르즈비 공략은 산호해 해전을 거치면서 좌절되어버렸다. 그리고, 미 항공모함 제거는 오히려 미군의 역습에 휘말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졌다. 앞서 수립한 전략 목표 수립을 위해선 정규 항공모함들로 구성된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해당 지역에 대한 제공권을 장악하는 게 그 조건이었는데 이에 필요한 항공모함기동부대, 그중에서도 당시 일본 해군 최정예였던 1항공전대, 2항공전대가 단 한번의 해전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의 정규 항공모함 4척 및 이들에 실렸던 함재기를 모두 잃었고, 조종사와 항공기 수리 인력도 대거 사망하였지만, 더 컸던 문제는 정규 항공모함 4척을 잃어버리면서 정예 항공모함 기동함대가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항공모함과 전함을 포함한 전반적인 해상 전력은 여전히 일본군의 우위였으나, 공세 및 기동 방어에 투입 가능한 수준의 항공모함만 따져보면 당시 미군과 사실상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은 동남아 방면 영국군을 섬멸시키기 위해 인도양 방면에 투입되어 전투에 불참했던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5항공전대를 필두로, 새로 재편성된 2항공전대의 준요와 히요까지 합세해 차근차근 주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면서 전진할 계획을 세웠다. 재편된 항공모함 기동부대에게 예전의 1, 2항공전대와 같은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급적 이들을 배제한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일본 제국 육군이 주 관할이던 동부 뉴기니의 경우, 뉴기니의 연합군 근거지였던 포트모르즈비에서 직선거리로 매우 가까운 부나-고나 지역을 공격하여 장악하였으며, 대본영은 이 여세를 몰아 육로를 통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다. 이 시도가 코코다 트랙 전투로 이어졌다. 해군이 주 관할이던 남태평양 지역의 경우, 작전에 필요한 제공권을 확보하려면 지상발진 항공기에 더 의존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일선지역에 비행장을 더 많이 가져야만 했다.

한편 미국과 ANZAC( 호주 + 뉴질랜드) 연합군은 미드웨이 해전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군이 전략을 바꿔 섬을 요새화하는 작전으로 넘어가면서 일단 숨을 돌릴 기회와 시간을 얻었으며, 훗날 일본군을 상대로 펼쳐질 반격 작전을 대비하여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943년에 접어들면 미국의 생산력이 저력을 발휘할 시점이라 1942년 후반부 6개월 간 ] 진주만 공습이나 산호해 해전처럼 전술적 패배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본격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lomon_Islands_-_Guadalcanal.png

이런 상황이 맞물려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대규모 해상 교전은 없었지만, 주요 섬들이나 요충지를 놓고 양측의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은 1942년 5월 과달카날 인근 툴라기 섬과 플로리다 섬, 그리고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툴라기에 수상 정찰기 기지를 설치한 뒤 7월에는 두 개의 설영대 2,800명[2]과 해군 900명을 파견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은 차후 연합군의 반격을 견제하고 해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항공기지로 활용할 목적이 있었다.

당연히 이 소식에 미국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룽가 곶에 비행장이 건설된다면 필시 제로센 일식육공 등의 긴 항속거리를 지닌 기종들이 배치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ANZAC 사이에 형성된 연결 라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연결 라인이 끊어진다면 ANZAC 지역은 고립되고 최악의 경우 일본군의 손에 떨어져 서태평양 전체가 일본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군은 서부 해안의 위협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6월, 연합군 수뇌부는 일본군이 비행장을 완성할 것으로 추정되는 8월 초순 이전에 미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육상전력을 투입, 과달카날을 탈취하여 훗날 벌어질 반격작전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

3. 양측이 지녔던 문제점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유럽 전선인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 방면 추축군의 경우는 거의 일본군 하나만 상대하면 되지만, 유럽 방면 추축군은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해 주요 추축군과 그런 추축군을 돕는 점령지역 괴뢰정부 군대 등등 너무 많은데다 일본은 인도네시아 방면 유전을 차지했지만 청야전술로 다 파괴되어 복구하지 않는 이상 석유가 부족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도 없었다. 반면 유럽 전선은 이미 프랑스를 넘어서 최후의 보루인 영국이 노출된 상황으로, 추축군이 영국 본토 상륙에 성공한 뒤 점령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서양에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 DC를 비롯한 동부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 조성된 병력이나 물자, 병기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평양 함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태평양 전선이 받은 지원을 15%로 명시했고, 이것은 태평양 함대가 엄살을 부린 것이라는 말이 정설로, 대개 실상은 30% 수준으로 본다. 즉, 유럽과 태평양에 배정된 물자의 차이는 추정 70%로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당시 유럽 전선은 독일군의 청색 작전으로 남동전선이 격화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롬멜의 2차 공세로 연합군이 이집트까지 밀려가던 중인 상태였다. 잘 알려진 무기대여법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시점으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의 경우 사실상 주력전차가 이때 공여받은 수백대의 75mm M3 리가 되어 버렸으며, 독일군을 괴롭힌 사막공군의 주력도 미국제 P-40이었다. 따라서 전력을 우선 투입시키는 유럽전선 상황이 이런 마당에 태평양 전선까지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기에는 아직 무기와 병력, 그리고 병력을 수송할 수송함도 모자랄 정도로 어딘가 모자란 것이 많은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해당 섬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다급해진 태평양 전선을 담당한 사령부에 의해 갑작스럽게 작전이 결정된 까닭에 제대로 준비된 것이 거의 없었다. 장비도 제1차 세계 대전 때 쓰던 스프링필드 M1903들 뿐[3]이고, 게다가 과달카날 상륙을 책임질 해병 제1사단은 6월 중순에 열심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었다. 원래는 상륙훈련을 받고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다급해진 미군이 그걸 취소시켜버리고 곧바로 출발시켰기 때문에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Operation Shoestring. 즉 '신발끈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자조했다.[4] 또한 과달카날 지역을 담당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육군 장성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맥아더 입장에서는 해군 놈들이 자신들 영역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뻔했고, 태평양 함대의 제독들도 "큰소리나 뻥뻥치는 밥맛" 정도로 여기던 맥아더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워싱턴의 수뇌부는 한참 동안 수군거린 끝에 과달카날을 태평양 함대 산하의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 지역으로 밀어넣는 것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다.

더불어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누굴 임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수면에 떠올랐는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당시 요양을 마치고 일선에 복귀 예정이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추천했다. 하지만 미국 함대최고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평소 눈여겨보던 로버트 곰리 제독을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는 킹 제독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고 말았다. 인사결정을 내리던 당시에는 곰리 제독은 해군 내에서도 꽤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으나, 실제 전선에서는 참모를 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격전지의 엄청난 부담감을 짊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고 해서 사정이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그저 자존심 대결 내지는 워싱턴에서의 정치질 정도였지만,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아예 내전 직전까지 갔던, 그냥 한 지붕 아래 사는 원수 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어떻게든 빨리 끝내기 위해서 중국에 있는대로 부대를 들이붓고 있었기 때문에 과달카날 쪽으로 돌릴 병력이 부족했지만, 애초에 과달카날이 공격당했다는 정보를 받아도 그 반응이라는 게 "해군이 비행장을 만들었으니 그건 그 쪽 소관이고 우리는 그 섬이 뭔지 알 바 아닌데?"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도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에도 통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과달카날이 미군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대본영 육군부는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섬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황당해했으며 그 전략적인 가치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달카날은 일본 항공력을 동원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가령 항속거리가 가장 긴 축에 속하는 영식함상전투기조차 과달카날에서 가장 가까운 기지인 라바울에서 날아와서 체공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 외 전투기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 같이 미국의 보급선단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력들은 사실상 왕복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드라마 영원의 제로에서도 관련된 장면이 나오는데, 가장 가까운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는 약 560해리, 약 1030km 정도인데, 라바울에서 출발해 8시간을 날아 과달카날까지 가고, 거기서 미군과 혈전을 펼치고 다시 8시간을 건너 라바울로 복귀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운 좋게 귀환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연료가 떨어지거나 피격당해 격추라도 됐을 경우는 운이 좋아야 섬에,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 속으로 직행이었다

게다가 과달카날에서 전투가 지속될 경우 병력과 물자를 보급해 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즉, 일본 해군에겐 과달카날은 전략상 중요한 지점인 것은 맞지만 확보도 어렵고 확보해도 유지가 어려울 곳에 무리해서 손을 뻗친 계륵같은 곳이었다.

4. 과정

4.1. 전역의 서막 : 툴라기 전투

1942년 8월 7일 알렉산더 밴디그리프트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 1사단 19,000명 중 15,000여 명이 과달카날에 상륙하고, 부사단장 윌리엄 H. 루퍼터스 준장이 지휘하는 나머지 4,000여 명은 각각 분산되어 툴라기, 가부투, 타남보고에 상륙했다. 당시 가용한 병력을 긁어모으다보니 해병 1사단의 3개 해병연대(1, 5, 7해병연대) 중 두개 연대(1, 5 해병연대), 2사단 예하연대인 2해병연대의 일부 대대, 1기습대대, 1낙하산대대 등 매우 잡다한 편성이었다. 상륙지원을 위해 미군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사전에 피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 등지로 증원되었다. 또 뉴헤브리디스에 작전지휘부가 설치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이동을 사전에 파악했으나 호주와 뉴기니의 포트모르스비 방어를 위한 병력으로 추정했다. 이후 툴라기 섬에 나타난 미 해군 군함을 보고나서야 미군이 공격해왔다는 것을 겨우 파악했다. 상륙전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격으로 수상 정찰기 15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가 필사적으로 저항한 까닭에 상륙 첫날 일본군 수비대 700명을 사살하는 동안 미군측도 144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한편 과달카날에서는 상륙하는 미 해병대를 본 일본군 설영대가 마타니카우 강변 정글로 도망치는 바람에 미군은 다음날 별다른 저항없이 무난히 진격하여 거의 완성되기 직전의 과달카날 섬 비행장을 점령할 수 있었다.

7일과 8일 이틀간 일본 해군소속 폭격기와 전투기가 긴급출격하여 수송선 한 척을 격침했다.

4.2. 미 해군 최악의 참패 : 사보섬 해전

그러나 9일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사보섬 해전이 치러졌고, 수송선단을 보호하던 해상경계부대가 패배했다. 이 사보섬 해전을 시작으로 그 뒤에도 양측의 수많은 군함이 가라앉아 그 결과 사보 해협은 아이언 바텀 사운드, 한글로 번역하자면 '쇠바닥 해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저곳에서 가라앉은 구축함 이상급 함선만 해도 30척이 넘어간다.

다행히 미군 항공모함이 먼저 철수했다는 것을 몰랐던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일찌감치 철수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최초 목표였던 미군의 수송선단은 무사할 수 있었으며, 이에 미군 수송선단은 날이 밝자마자 일단 잡히는대로 보급품들을 집어던지고 하루만에 철수해버렸다. 결국 과달카날 섬의 미군은 가뜩이나 출발할 때 시간 부족으로 60일치 물자밖에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인 보유물자는 더욱 줄어들었으며, 제공권과 제해권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과달카날 비행장의 미군은 매일 폭격기의 폭격과 연안에서 함포를 쏘고 가는 일본군 구축함 순양함에 시달렸다. 미군은 자조적인 의미에서 이를 '도조 타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물자와 부분적으로 재개된 보급으로 버티며, 간신히 해안에 내려놓은 1대의 불도저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장비와 자재를 활용해서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작업을 진행한 끝에 8월 18일, "헨더슨 비행장"(Henderson Field)을 완성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드웨이 기지에서 출격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했다가 기체가 피탄되자, 일본의 항공모함 카가에 자살공격을 시도하고 이후 바다에 추락하여 전사한 미 해병 비행대 급강하폭격기 부대 지휘관 로프턴 R.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비행장은 훗날 과달카날이 있는 솔로몬 제도가 독립하고 수도 호니아라가 과달카날 섬에 지어지면서 오늘날의 호니아라 국제공항이 된다.

비행장을 완성할 때까지의 미군의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 가저온 식량이 5일분만 남게 되자 일본군이 남긴 식량으로 하루 두 끼만 배급하는 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5][6] 일본군이 남긴 장비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일본군이 남긴 진지를 강화하는 도중에 일본군이 남긴 사이렌에서 일본기의 공습을 알리는 경보음이 들리면 일본군이 파놓은 대피호로 숨는 완전한 일본식으로 산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미군이 적에게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채 전투를 벌인 것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과달카날이 최후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4.3. 본격적인 전투 돌입: 테나루 전투

8월 13일, 과달카날이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본영은 원래 미드웨이를 공격할 목적으로 차출되었던 육군 제28연대에게 과달카날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이치키 키요나오(一木清直)[7] 대좌가 지휘하는 선발대 900명이 8월 18일 미 해병대의 교두보 동쪽에서 30km 떨어진 지점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이 합류하면 미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는 미 해병대의 규모를 2,000명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대본영의 오판이었다. 게다가 전쟁 초기 필리핀에 주둔한 2선급 장비를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승전을 거뒀으며, 일본군 자체에서도 미국과 영국군은 일본군보다 정신력과 필승의 정신이 부족해 총 겨누고 겁주면 알아서 항복한다는 주장을 거진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한 탓에 일본 군인들은 미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연합군이 전쟁 발발 직후부터 원주민과 민간인들의 지원을 받아 훈련을 시켜서 솔로몬 군도 여기저기 숨어있던 해안 감시원들이 일본군의 동향을 감시한 정보를 통해 구축함이 바삐 오가고 함포까지 쏘고 가는 것을 보고,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미 해병대는 즉시 정찰을 하여 일본군의 존재를 확인했다. 해안 감시원들은 400명쯤으로 주로 호주군, 뉴질랜드군, 탈출한 연합군 포로 출신, 그리고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태평양의 섬들에 연락망을 구축하여 전역 초반 정보가 부족했던 연합군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치키 지대는 상륙 직후 자콥 보우자(Jacob C. Vouza, 1892~1984)라는 해안 감시원[8]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놓고 고문을 가해 미군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입을 열지 않자 총검으로 양 팔, 얼굴, 목과 배를 찌른 뒤 과다출혈로 죽도록 내버려두고 떠나버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로 줄을 끊고 출혈 상태로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정글 속에서 무려 수 킬로미터를 달려 미군 방어부대에 일본군의 상륙 사실을 알렸으며, 그 공로로 미국 은성 훈장, 수훈무공훈장, 영국 조지 메달,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 등 각종 훈장을 받았고 1979년에는 기사작위까지 받았다( 관보링크).

아무튼, 이 사건으로 자신들이 미군에게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이치키 대좌는, 그대로 선발대 900명과 함께 해병대 교두보로 돌격했지만 일루 강 하구 지역[9]에서 철조망에 모래주머니까지 완비한 방어선을 굳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미군 M2 브라우닝 중기관총과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동원해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고, 예비대를 투입해 이치키 지대 후방을 포위, 섬멸전을 전개해 일본군은 결국 916명 중 126명만이 살아남고 모두가 전사했다. 또한 이치키 대좌는 다른 대대원들처럼 기관총 십자포화 앞에 산화했다.[10] 전투 후 일루 강 주변으로 악어들이 모여들어 시체들을 먹어치워서 사상자 집계가 정확하지 않았지만 미군 일본군 전사자를 800여 명, 일본은 770명 정도로 추정했다. 더불어 미군에게 ' 잽스도 별거 아니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효과까지 낳았다.

4.4.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하다 : 동부 솔로몬 해전

이치키 지대의 공격이 처참하게 실패하자 일본군은 남은 부대와 신병들을 더하여 6,000명 가량의 부대로 재편하고 과달카날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에서도 미드웨이 해전의 패장이었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을 다시 한 번 사령탑으로 앉히고, 새로 편성한 항공모함 위주의 제3함대를 보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오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격멸시키고 상륙작전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편 미국 태평양 함대는 항공모함 3척을 작전에 투입했지만 정작 유조선이 부족해서 공급할 연료는 남아도는데 작전 중인 군함들은 제때 연료 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 와스프가 급유를 위해 떠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작전 중인 항공모함은 겨우 2척 뿐이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항공모함 류조를 격침시켰지만, 엔터프라이즈가 폭탄 3발을 맞고 중파당했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내려준 스콜 덕분에 제5항전이 보낸 공습대의 시야가 방해되어 하마터면 저승길로 갈뻔한 엔터프라이즈는 이 기적적인 스콜 덕에 침몰까지는 면하여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의 전투는 어려워진 통에 결국 철수해 버렸다. 이로 인해 거의 성공적인 작전이 될 뻔했으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과달카날에 더이상 미국의 항공전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오판을 하여 제3항공함대를 철수시키는 바람에 일본군 상륙부대는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비행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 무렵 미국은 항공모함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엔터프라이즈가 빠진 뒤 8월 31일에는 새러토가마저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빅E의 뒤를 따라 진주만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이때 과달카날 방면에서 미 함대의 지휘를 담당하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중상을 입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월 13일에는 해병 7연대의 증원을 호위하기 위해 출장나왔던 와스프마저 순잠 을형 I-19의 어뢰에 얻어맞고 격침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각 항공모함에서 날려보낸 함재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난잡해진 지휘계통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창설한 것이 그 유명한 캑터스 항공대(Cactus Air Force)였다.

한편 8월 26일,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6,200명 규모의 제35여단에게 공격명령이 내려왔다. 하지만 지난 번 상륙작전 때 항공모함 부대가 일찍 철수하면서 심하게 데인 다나카 라이조 제독이 수송함 제공을 거부하여 결국 8척의 구축함을 이용해 4,200명이 상륙하고, 남은 부대(약 2,000여 명)는 오카 아키노스케 대좌의 지휘하에 31척의 목재 동력선을 타고 상륙하기로 했다. 문제는 구축함에 비해 목재 동력선은 느린데다가 방어에 너무 취약했다는 것이고, 또한 무사히 상륙한 본대와는 달리 오카 대좌의 부대는 미군의 지속적인 공습에 시달리면서 2,000명중 1,600명의 병력을 상실한 끝에 과달카날에 상륙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오카 대좌의 부대는 전멸상태나 다름없었다.

상륙한 일본군은 본대가 미 해병대의 주 방어선을 피해서 남쪽에서 기습하고 오카 대좌의 연대가 서쪽에서 지원하는 식의 양동작전을 계획했는데, M. A. 에드슨 중령이 지휘하는 제1기습대대를 주력으로 한 미 해병 정찰부대가 상륙지점을 급습했다. 상륙작전 전문가인 해병대인 만큼 본인들의 경험상 막 상륙해서 물자를 내려놓을 때가 가장 혼잡스럽고 취약한 시점이라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아내는 것도 모자라서 물자들을 모조리 털어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올 남쪽 방향에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번에도 반자이 어택을 감행한 일본군을 향해서 105mm 견인곡사포를 비롯한 중화기와 캑터스 비행대의 빠방한 지원을 앞세워서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계속된 일본군의 야간공격을 좌절시켰다. 이 전투에서 남쪽 능선은 일본군의 피로 물들었는데, 그 결과 "피의 능선(Blood Ridge)"이란 이명을 얻었다. 미 해병대에서는 당시 작전을 지휘한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에드슨 능선"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결국 가와구치 소장의 35여단은 70% 이상의 병력을 상실하며 전멸했고, 설상가상으로 미군에게 물자를 빼앗긴 까닭에 전원 아사 상태에 처했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가와구치 소장의 부하들 중 한 명이었던 와타나베 히사시키치 중좌가 지휘하는 와타나베 대대가 13일에 미군의 빠방한 포격을 보고 겁을 내 전투를 포기해 버렸고, 끼리끼리 모인다고 와타나베 중좌의 부하 장교들도 몽땅 비슷한 성향을 보여서 대대 전체가 도망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가와구치 소장은 와타나베 중좌에게 할복을 명령했다가 울고불고 하는 모습에 명령을 취소했다고 한다.

4.5. 마타니카우 강에서의 2차례의 혈전 : 마타니카우 작전

일본군의 본대는 본대대로 사정이 생겨서 9월 24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지만, 보조부대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9월 23일 헨더슨 비행장 서측에 총공격을 감행... 그나마 있었던 47mm포 개조 신포탑 치하는 유럽 전선에서는 "이걸 대체 어디다가 써먹냐?"고 불평을 듣던 M3 37mm 대전차포에게 털렸으며, 해병대는 해병대대로 새로 배치된 M1918 155mm 곡사포로 일본군 전차와 보병들을 박살냈다. (이거 오기 전까지 일본군 150mm포 2문에 고생했다). 다행히(?) 9월 24일에는 미군이 공격방향을 잘못 가늠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남쪽에 설치된 해병대 방어진을 돌파할 뻔했으나 곧 추가된 증원부대와 자발적으로 지원에 나선 육군 병력에 의해서 좌절되었으며, 9월 25일에는 보조부대를 박살낸 포병들이 남쪽으로 포격 지원에 나서는 바람에 완전히 털리며 이 전투를 지휘한 2사단은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다. 자세한 건 마타니카우 작전의 9월 1차 공세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11]

< 더 퍼시픽>에 나오는 룽가 전투가 바로 이때 벌어진 전투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4.6. 시작된 일본의 수송 작전 : 도쿄 익스프레스

35여단의 전멸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미 해병대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게 되었으며, 제17군 사령관 하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에게 제2사단과 제15사단, 총 20,000명의 병력과 각종 화포 80문, 치하 14대를 갖춘 병력의 지휘권을 부여하고 과달카날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35여단의 상륙 당시 큰 효과를 봤던 여러 척의 구축함을 이용한 병력 수송을 시작했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

한편 미 해군은 해병 1사단 예하 포병연대인 해병 제11연대를 과달카날에 배치, 포병세력을 증강시켰고 에스페란스 곶 해전이 끝난 직후 미 육군 아메리칼(AmeriCal = America + Caledonia) 사단의 제164연대도 과달카날에 배치하여 19,000명의 대병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유 화포는 100문이 넘었으며, 태평양 전선에서 중전차로 명성을 날리는 경전차 M3 스튜어트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오판으로 전차만 돌입시키는 바람에 수가 팍 줄어버렸지만 히든 카드로는 여전히 유효했다.) 무엇보다 헨더슨 비행장에 가용 가능한 항공 전력이 있었으므로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초반의 공격은 그리 큰 성과를 보지 못해서 해병 1개 소대가 낚시에 걸려서 단 한 명만 살아남고, 전멸한 적도 있었다.

4.7. 야간전에서의 일본군의 패배 : 에스페란스 곶 해전

다만 일본군도 이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지속적인 함포 사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고토 아리토모 소장이 지휘하는 함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서 남하했는데, 그곳에서 노먼 스코트 소장이 지휘하는 64기동부대에게 요격당했다. 당시 노먼 스코트 소장은 일본 함대보다 화력면에서도 우세였고, 먼저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초탄 발사에 고토 소장을 전사시키는 등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시작했으나 아군 구축함 2척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격을 중지하여 일본군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아오바 항목 참조.

12일의 실패와는 달리 13일에는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진입하여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14일에는 중순양함 초카이와 키누가사가 8인치 함포를 이용하여 확인 사살까지 가했다. 그 결과 활주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모든 비행기 및 항공유를 상실하는 등 헨더슨 비행장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악착같이 활주로를 보수하고, 멀쩡한 부품들을 골라내어 합쳐서 비행기를 재조립하고 무사한 연료 탱크에서 항공유를 뽑아내는 등 그야말로 눈물나는 노력으로 항공력을 어느정도 복구해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었다고 믿고 상륙작전을 진행 중이던 일본 함대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칠 수 있었다. 보급선이 간당간당하던 시절, 항공기보다 먼저 온 연료를 보험삼아 드럼통 같은데 넣어 숨겨둔 적이 있었는데, 상황이 좋아지자 잊어버렸던 것을 상황이 다시 안 좋아지자 다시 기억해내고 도로 찾아온 에피소드도 있다. 역시 저축해두길 잘했지.

게다가 10월 17일에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항공모함 USS 호넷의 함재기와 구축함 2척이 일본의 상륙지점을 기습해서 야포 50문, 탄약과 물자를 거의 다 날려버렸다. 특히 식량이 심각해서 타다남은 것까지 긁어모아도 2주일치밖에 남지 않았다. 야포 피해 역시 화력의 중핵이라 할만한 중포병의 손실이 컸다.

결국 하쿠다케 중장은 일단 상륙한 12,000명의 병력과 30문의 야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당초 중포를 앞세워 방어선 서측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부대를 본대와 보조부대로 나눈 후 서로 협격하는 작전을 채택했다. 문제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중포 화력을 벌충할 기습효과 달성을 위해 주공 방향을 정글이 우거진 남쪽으로 변경한 데서 불거졌다. 험준한 지형 특성상 화력을 지원할 산포와 박격포를 전장까지 이동시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포를 분해하여 병사들이 부품 하나랑 포탄 하나씩 가져가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병사들은 군장도 가뜩이나 무거워 죽겠는데 더 무거운 포탄과 부품까지 지고 가는 것은 무리여서 중도에 버렸기 때문에 최소한의 포병 전력마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 일은 훗날 임팔 작전에서도 재현된다.

설상가상으로 대본영이 제17군단에 파견한 참모가 그 유명한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 중좌였다. 그는 야간에 착검 돌격으로 반자이 어택을 하면 미군 따위는 발라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미 한 차례 미군의 화력을 경험해 본 가와구치 소장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항공정찰 사진을 받아든 가와구치 소장은 이대로 돌격하면 전멸이라고 주장하면서 작전에 반대했지만, 예정지점에 늦게 도착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당했다. 대체로 츠지 마사노부에게 반대한 것이 해임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가와구치 소장의 후임이었던 쇼치 대좌는 막 도착해서 과달카날의 지형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원래 가와구치 소장이 지휘하던 부대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엉뚱한 곳으로 돌격해버렸다. 더 가관인 게, 사령부에서는 가와구치가 파면된 줄도 몰랐다. 이 무렵 츠지 마사노부 중좌는 대본영에 '미군은 아직까지 눈치도 못채고 있음', '정글은 예상외로 얇기 때문에 진격에 문제없음', '미군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음', 그리고 문제의 공격 명령의 경우, '오늘밤은 승리가 확실하기에 내일은 무선으로 만세를 보낼 것임' 따위의 '전선 보고'나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총공격 명령이랍시고 내려진 것도 천우신조에 따라 일거에 비행장의 적들을 격멸하여 천황의 성지에 보답하라는 요상망측한 소리였다. 제2사단의 한 중좌는 저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듣고서 "이게 뭔 개소리인겨? 뭘 어쩌라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교의 작전 이해도부터가 이 정도인데 과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을지는... 애시당초 저런 얼토당토한 작전 지시를 이해하고 어쩌고 할 것도 없는 것이기는 했다. 거기다가 실질적으로 작전을 총괄해야 할 당시 17군 참모장이었던 미야자키 슈이치 소장은 일본군 특유의 좌관급 참모들의 독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FM스타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17군 참모들에게 '육대 전술교관같은 놈'이라며 실전알못이라고 뒷담화를 듣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뒷담화를 듣던 츠지 마사노부가 한다는 소리가 "그럼 버리고 가면 되지!"라고 해서 자기 인맥을 이용하여 윗선에 연락, 미야자키 소장을 본국에 버려두고 간 상태였다. 한 마디로 작전 수립체계도 개판이 된 상태에서 제정신도 아닌 인간 츠지 마사노부가 입안하여 내려진 작전이 제대로 미군에게 먹힐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반면에 남태평양 방면의 미군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당초 니미츠 제독은 해병대가 더 버틸 수 있도록 지원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달카날 사수는 시간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리 제독은 부임 당시에 부여받은 목표인 호주와 미국 서해안의 연결선 방어에만 과하게 집착하면서 전황이 변했음에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되는 병력과 물자가 있었고 피지 방어 임무가 미 육군에 넘어가서 뉴질랜드 3사단이 자유로운 상태이기에 이들에게 누메아 방어를 맡기면 아메리칼 사단을 과달카날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 결코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니미츠 제독의 시찰에 동행했던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이 후방에서 놀고 있는 많은 항공기들을 보고는 "안 그래도 유럽에 보낼 비행기도 모자라 죽겠는데 그쪽에서 이딴 식으로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이다!"라며 화를 냈고, 거기에 남태평양 해역군의 사령부인 누메아의 보급 혼란상까지 더해지면서 니미츠 제독의 심기를 제대로 긁고 말았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다면서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고, 진주만으로 돌아오자마자 킹 제독에게 인사 교체를 건의했다. 킹 제독도 곰리 제독의 능력 부족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전해듣고 있었기에 니미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곰리 제독을 해고하고 후임 사령관으로 윌리엄 홀시 제독을 임명했다. 부임하자마자 바로 과달카날 시찰에 나선 홀시는 앞으로의 전략을 기자들이 묻자 싸움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쪽발이 놈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겁니다!(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라고 외쳤고, 과달카날 주둔 미군에게 그야말로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부가 보유한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줬다. 이런 홀시의 부임에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야전병원에 누워 있던 병사들까지 뛰쳐나와서 만세를 부를 정도로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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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일본군의 반격,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 : 산타크루즈 해전

일본 해군도 이러한 지상공격에 발맞춰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들을 수장시키기 위해 제3함대를 파견했는데, 워낙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부족하여 5주만에 전선으로 복귀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이들과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의 함재기 부대는 경항공모함 즈이호와 정규 항공모함 쇼카쿠에 타격을 주었지만, 호넷이 대파되어 결국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발사한 어뢰에 처분되었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폭탄 두 발을 맞았으나 전투력과 항해력은 유지했고, 호넷의 함재기들을 수용한 후에 철수했다.

이 해전에서 입은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렉싱턴, 요크타운, 와스프에 이어 호넷까지 격침되면서, 미 해군은 엔터프라이즈가 복귀할 때까지 잠시나마 태평양에서 운용 가능한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미국 함대가 선보인 대공원형진과, 아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 요격까지 시도하며 방어에 나선 미 함재기들의 공격에 일본기들의 형편없는 내구력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바람에 많은 함재기들이 대량으로 격추당하여 노련한 조종사들까지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 전력 역시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대파된 쇼카쿠와 중파된 즈이호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멀쩡한 즈이카쿠까지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전선에 남은 항모는 함재기 대부분을 잃은 준요 한 척 뿐이었고, 일본군은 충분한 함재기를 준요에 보급할 능력을 상실했기에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필리핀해 해전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기동부대는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재건 중이던 전력을 빼내 기지 항공대로 투입하고 손실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재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4.9. 미군에게 전역의 주도권을 넘기다 : 과달카날 해전[12]

10월 27일 2사단의 패배 소식을 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하에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할 것을 건의했지만 대본영은 언제나 그랬듯이 육군 38사단을 추가 배치하여 다시 공격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대규모 수송부대와 전함이 중심이 된 핸더슨 비행장 포격부대가 출격했다.

이 무렵 과달카날의 미군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하에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미 주둔하는 지상군만 25,000명에 캑터스 항공부대는 P-38 라이트닝을 비롯한 188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1월 12일 일본 육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아베 히로아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11전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출항했는데, 당시 과달카날 근해에는 미군의 증원부대를 수송하기 위한 선단과 이들을 호위하기 위한 함대가 있었다. 일본 해군이 비행장 포격을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 함대가 출동하여 11월 13일 새벽, 첫 번째 야간 해전(제1차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의 11전대가 전함 기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미 해군 호위함대는 중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체인 미 해군이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한 아베 제독은 그만 허를 찔렸다. 미군 역시 전투에서 경험 부족을 드러내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이 전사하는 등 미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꼬리를 말고 물러난 건 일본 함대였다. 일본 함대 지휘관이었던 아베 제독은 자신이 승좌한 전함 히에이가 전투 시작과 동시에 난타전의 한복판에 휘말려버리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의를 잃고,[13] 휘하 함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결국 11전대는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2척을 잃은 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홀시 제독은 순양함 전대가 타격을 입어 해역이 텅 비게 되자, 전함 전대를 이끌고 있었던 윌리스 A 리 소장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미국의 최신예 전함인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임무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미 해군 함대는 북상하면서도 항공 작전을 위해 동남쪽으로 반복적으로 기동한 탓에 생각보다 과달카날에서 멀어져있었고, 그래서 수상함 함대는 14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반면 비행장 공격부대의 작전 실패로 일본군 상륙부대는 작전을 일단 취소했지만, 11월 14일 새벽, 상륙부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중장의 함대가 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해서 약간의 피해를 입혔을 뿐, 미군이 우려했던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되려, 날이 밝자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에게 반격을 받아, 중순양함 키누가사와 6척의 수송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2함대가 1차전에서 살아남은 11전대의 잔존 세력 및 미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송함 4척, 구축함 5척과 함께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날 밤 리 제독이 이끄는 제64임무부대가 곤도 제독의 함대와 조우했는데, 일본 해군 정찰기가 미국의 전함을 못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곤도 제독으로 하여금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 구축함들은 거의 전멸당했지만 그 대신 위협적인 93식 어뢰를 거의 다 소모시킨 덕분에 미군 전함들은 안심하고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우스타코타는 전력 계통에 문제가 생겨서 키리시마한테 두들겨맞게 되었지만 버티고 있었고, 거꾸로 워싱턴 쪽에서 반격하여 사우스다코다에 정신팔렸던 키리시마를 격침시켰다.[14] 남은 일본 중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이 워싱턴에게 반격을 가했지만 제64임무부대는 결국 일본 함대를 따돌렸고, 곤도 함대는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지는 못했지만, 일본군 수송선단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만한 미 해군 세력이 없다는 판단하에 철수하게 된다.(제2차 과달카날 해전)

하지만 아침이 밝자 캑터스 항공부대와 미 해병대의 포병들이 합작으로 일본군 수송선단을 전멸시켰고, 결국 일본군은 6,000명의 전사자와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0,000톤 중에서 단 5톤만을 건지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4.10. 절망적인 일본군

1942년 12월 27일.
(전략)
이 무렵, 오스텐 산에는 이상한 '생명판단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계점에 접근하고 있는 육체의 지탱가능일수의 통계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비과학적인 이 생명판단학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의 수명은 30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인간은 3주일.
누운 채 일어설 수 없는 인간은 1주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인간은 3일.
말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은 2일.
눈을 깜박이지 못하는 인간은 1일.
아아, 인생 50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제 22세로 끝장이 나려는가?
(후략)
- 미 해병대 1사단과 대치한 일본 육군 제38사단 가와구치 지대 보병 제124연대 기수 오비 야스오 소위의 일기[15]]

과달카날 해전에 맞춰서 미 해병대는 1개 대대를 투입해 서쪽 공세를 개시했다. 그동안 헨더슨 비행장과 그 주변 방어에만 집중하던 것을 벗어나 일본군에 대한 공세로 전환한 것이었다. 11월 12일 처음 교전한 공격부대는 12월 3일 헨더슨 비행장이 보이는 고지까지 진격해서 과달카날 동쪽의 일본군을 소탕했으며, 다른 부대는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일본군의 주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20,000명 정도가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야간에 구축함들이 물자가 든 드럼통을 약속된 장소에 내려놓고 가는 식(일명 쥐 수송)으로 보급받고 있었다.

4.11. 다시 또 털린 미군, 하지만 이미 넘어간 승기 : 타사파롱가 해전

일본 해군의 쥐 수송을 방해할 작전은 처음에는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킨케이드 제독이 북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부사령관인 라이트 소장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구축함 위주로 편성된 일본 해군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단종진을 형성하여 먼저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소장의 착오로 대처를 제대로 못하는 동안, 일본군 구축함이 근접해서 일제어뢰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일본 해군에게 또다시 발리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중순양함을 투입하고도 호되게 데인 미 해군은 일본 수상함대의 전투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의 쥐 수송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어뢰정과 캑터스 비행부대의 항공기를 투입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구축함을 이용한 일본군의 쥐 수송은 한동안 미 해군에겐 골칫거리이자 트라우마였다. 훗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경순양함을 투입하여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만(블랙켓 해협 해전), 이후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쿨라만 해전, 콜롬방가라 해전), 항공기와 어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동안 해상전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구축함이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 했으며, 이들 구축함이 일본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된 것은 레이더의 성능이 개선되고, 알레이버크 제독이 새 전술을 개발하고 나서부터였다.(벨라만 해전)

일본 해군은 12월 3일부터 11일까지 구축함을 이용한 물자 보급을 시도했는데, 낮에는 캑터스 항공부대의 항공기들이 날아와서 구축함들을 위협했으며 밤에는 어뢰정들이 불쑥 나타나서 기관총과 어뢰를 난사하는 형태로 보급을 방해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물자를 내려놓지 못했다. 심지어 미군 어뢰정의 기습으로 구축함이 격침당하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그만 구축함을 이용한 보급작전 자체를 취소해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작전(일명 두더지 수송)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잠수함 바깥에 드럼통을 매달아놓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다 위로 떠올려 내려놓는 식이었지만, 드럼통을 내려놓으려고 부상한 잠수함이 이미 파악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미군 어뢰정에게 격침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것도 중단되었다.

결국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서 드럼통을 자동으로 떼어내거나 작약(포탄이나 어뢰, 지뢰 등에 충전되어 그것을 폭발시키는 화약)을 제거한 어뢰에 보급품을 싣고 약속된 장소로 발사하는 식의 보급을 시도했는데 이 경우에는 오발이나 기타 몇 가지 변수로 인해 보급품들이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 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물자 보급을 위해 비싼 어뢰를 쓰는 것도 문제였다. 고로 이 작전도 중지되었다.

결국 충분한 보급품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기본적인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되었고, 동시에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글과 같이 인간이 생존하기 가장 어려운 지형에서 군부대가 이렇게 고립될 경우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는, 바로 위 목차의 도입부에 소개된 '생명판단학'을 다시 한 번 참조하자.

4.12. 미군의 총공격

11월 29일, 과달카날 전투 초기부터 작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1사단에게 휴식과 재정비를 위하여 호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12월 9일, 밴디그리프트 소장과 해병대 1사단은 호주로 떠났고, 아메리칼 사단의 알렉산더 패치 소장이 지휘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1월까지 꾸준한 병력 증강을 받았다.[16]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항공 작전을 수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뒤늦게 깨닫고[17] 뉴 조지아 섬의 문다(Munda)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에 대항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활주로 한복판에 일부러 나무를 심는 등 철저하게 위장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려 했지만, 12월 5일 미군이 이를 파악하고 다음날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을 진행하여 12월 말에 완성시키고 34대의 제로기를 배치시켰으나 다음날 새벽에 미군의 대규모 공습을 받아 26대가 파괴되는 큰 피해를 보고 남은 제로기들을 철수시키면서 비행장 역할을 포기해버렸다. 훗날 이 비행장은 반년 후 수레바퀴 작전[18]의 일환으로 뉴 조지아 섬을 침공한 미군에게 점령되었고, 비행장을 보수하고 난 뒤 솔로몬 항공 사령부까지 옮겨오면서 솔로몬 제도에서 가장 많은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최대의 항공기지가 되었다.

한편 미 지상군은 12월 17일부터 제132연대를 동원하고 75mm, 105mm, 155mm 곡사포와 캑터스 항공부대 소속 폭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오스텐 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작 600명뿐이었던 일본군 수비대는 1월 초까지 미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1월 14일 고립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대부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죽기로 결정했고, 오카 대좌가 이끄는 소수만이 탈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탈출한 이들은 경계 중이던 미군 병력한테 걸려서 전멸당했고, 23일에는 나머지 병력도 전멸당했다.

1월 16일 당시 과달카날에는 아메리칼 사단, 육군 제25사단, 해병 제2사단 등 총 48,0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패치 소장은 미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부 병력을 일본군 후방에 상륙시켜 퇴로를 차단시키는 한편,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서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1월 23일, 일본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코컴부나가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 제17군은 패치 소장이 지휘하는 미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대대적인 해상철수작전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모두 포로가 되거나 전멸당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4.13. 일본군의 철수

사실 일본군은 12월 31일에 열린 어전회의를 통해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 상태였다.[19] 이에 따라 1월 9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지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에게 1월 28일부터 철수가 완료되는 2월 초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철수작전을 기만하기 위하여 야노 중좌의 1개 대대를 파견하여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미 해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군이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대규모 수송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게다가 새로 교체된 육군 부대가 나타나서 역습을 가했다는 보고를 듣자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 해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이에 따라 증원군이 급파되었으며, 이들을 호위하고 일본군 수송선단을 저지하기 위해 기펜 소장에게 호위항공모함 2척이 포함된 함대를 주어 과달카날로 급파했다.

하지만 대서양에서 대잠작전만 수행해왔던 기펜 제독은 태평양 전쟁이 항공력 위주의 싸움이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중간에 예정보다 늦어질 것 같자 느려터진 호위항공모함을 떼어내고 다른 수상함들만 거느린채 과달카날로 급행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일본 해군 항공기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으며 최초로 야간공습을 당한 부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까지 남기게 되었다. 그래도 피해는 두들겨 맞은 것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아서 중순양함 시카고 1척을 잃고, 구축함 1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렌넬 섬 해전) 하지만 굳이 상실할 이유가 없었던 전력인 중순양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의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20]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일본군이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패치 소장에게 일본군의 대공세에 대비하여 현 지점을 사수할 수 있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미군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 일본 제17군은 약속된 지점에서 구축함에 승선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철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 철수는 3번이나 반복되었고, 그 사이 미군이 눈치챌 수 없도록 조명탄을 터뜨려 가면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리고 2월 7일 모든 일본군이 철수했다.

한편 분위기를 봐서는 쳐들어올 때가 됐는데 상황이 너무 잠잠하게 전개되자 미군은 당황했으며, 조심조심 전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2월 9일 과달카날의 서쪽 끝에 도달한 미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보고서야 일본군이 그 동안 왜 그 난리를 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모든 보고를 받은 패치 소장은 2월 9일 오후 4시 25분, 홀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고 그것을 기준으로 처절했던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도 연합군이 이기면서 부나-고나 전투 동시에 이뤄진 2개의 전역에서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전과 보고를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는 미군이 지상에서 일본을 맞아서 올린 최초의 승전"이라고 치하했다.

한편 일본군 대본영에서는 이런 패배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다면서 패배를 은폐하고, 다음과 같은 대국민 전과발표를 행했다.
과달카날에서 아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 세력을 맞아 심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군은 과달카날을 발판으로 삼아 한층 전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 국민들은 현실 파악이 힘들게 되었다.[21] 대본영은 이후에도 이어지는 패전을 승전으로 감추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조차 상황을 정리한 타나베 중좌의 보고를 받자 "정말로 그 정도까지 상황이 좋지 않은가? 나는 그 어떤 데서도 이런 보고를 듣지 못했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5. 전투 종료 이후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벌이던 때, 뉴기니 전역에서도 연합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격퇴(밀른 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하여 일본군을 동부 뉴기니 북쪽지역으로 몰아냈다. 유럽 전선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독-소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의 승리가 확정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판단한 연합국 수뇌부들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게 된다. 이 회담에서 태평양 전선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비록 기존의 유럽 우선 정책이 재확인되긴 했으나, 태평양 전선도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은 일본의 공세를 막는데서 그치지 않고,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에게 물자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던 시점이었다.

과달카날과 뉴기니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연합군은 위와 같이 후방 지원까지 확정되자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작전에 투입되었던 해병들은 밀림에서 여러모로 고생했기에 재충전의 의미로 호주에서 휴식기간을 거쳤다. 그렇게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태평양의 일본군 거점인 라바울을 목표로 한 거대한 반격 작전인 수레바퀴 작전(Operation Cartwheel)이 수립되었으며, 1943년 전반기 동안 전력을 축적한 연합군은 1943년 6월말부터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서태평양 일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하던 바로 그때,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반격을 막고 여차하면 다시 공세에 나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에, 동남아시아 점령지를 배후에 둔 동부 뉴기니에는 육군 병력을 증원하고, 솔로몬 제도 중부 지역에 비행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여력이 충분했던 덕분에 피해를 복구하고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본군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 전역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피해를 복구할 힘이 없었다.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항공전력이 극심한 소모를 겪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항공전력의 손실과 약화는 단기적으로는 과달카날 전투 이후,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행동에 큰 제약이 되었다. 일본군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여 남서태평양 해역에서 무리한 요충지 공략을 시도할 때마다 되려 피해를 입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뉴기니의 와우 공략전,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호 작전 등이었고, 그 와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미군의 항공공격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 항공전력 몰락의 가속화로 이어졌다. 과달카날 전투 기간인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 동안 일본 해군은 892대의 일선 항공기를 상실했다. 더 큰 문제는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의 손실이었다. 일본군의 승무원 손실은 1,881명에 달했다. 이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입은 승무원 손실 121명[22]의 15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소수 정예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과달카날에서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전력 소모는 과달카날 전투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계속된 공방전으로 일본군은 7,000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1943년 후반 즈음에는 미국의 전시공업체제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일본이 미국의 본격적인 공세를 맞게 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그간 누적된 손실로 인해 이미 전면적인 붕괴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과달카날을 기점으로 미-일간 항공전력에서의 격차는 항공기의 수량과 승무원의 기량 양쪽 모두에서 절망적인 수준까지 벌어졌다. 여기에 더해서 30만톤에 이르는 수송선 상실로 인하여 이미 한계에 달했던 전시 경제 역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과달카날 전투로 명예 훈장 수여자가 5명이나 나왔다. 제1사단장 밴더그리프트, 에드슨 능선 전투(피의 능선 전투)의 에드슨 기습대대장과 바실론 하사, 제1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베일리 소령(사망), 제2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앤서니 카사멘토였다.

이 전투 이후 과달카날이라는 글자와 남십자성이 들어간 사단 패치가 만들어져 장병들이 부착하게 되었다.

장교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는데 '과달카날 마피아'라고 불리며 잘나가게 되었다. 고참병들 역시 다른 해병사단들을 만들기 위해 전출을 가서 핵심 전력이 되었다.

6. 전투에 동원된 미 해군 전투서열

☆: 제1차 과달카날 해전 참전
♤: 제2차 과달카날 해전 참전
●: 침몰

6.1. TARE 기동부대

6.2. KING 기동부대

7. 전투에 동원된 미 해병대 전투서열


8. 전투에 동원된 미 육군 전투서열

9. 그 외의 이야기

파일:attachment/과달카날 전투/g259446a.jpg
번역하면 '홀시 제독 가라사대 "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다!" 제군이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그 노랭이 개자식들을 죽이는데 일조하는 셈이다.' 라고 쓰여져 있다.


[1] 이 전략의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 문서 초반부와 산호해 해전 참고. [2] 이들 중 대다수가 강제징용당한 조선인이었다. [3] 이는 HBO제작 드라마 퍼시픽에도 언급되는데 상륙 및 거점지 확보하는 해병대들에게는 틀딱이 쓰던 총 주고 육군에게는 신상인 개런드 소총 총을 주냐며 투덜거린다. [4] shoestring에는 신발끈 말고도 '빠듯하다', '아슬아슬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허리띠를 바싹 조이다' 쯤으로 보면 된다. 한때 미국에서 Europe on a Shoestring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이 인기를 끌었는데, 책 제목을 번역하면 '존나 저렴하게 유럽 여행하기'라는 뜻이다. [5] 이 상황은 미드 < 더 퍼시픽>에도 나왔다. 밥을 먹으러 갔더니 식당 메뉴가 '아침 - 쇠고기 없는 쌀밥(그것도 인디카를 자포니카처럼 삶아서 죽도 밥도 아닌 그 무언가), 점심 - 치킨 없는 쌀밥, 저녁...(이하 생략)', 그나마 식기에 담긴 밥에는 구더기가 꾸물꾸물... 이걸 본 해병대원의 불평에 취사병의 대답이 걸작이다. "고기라고 생각하고 드십쇼. 다음!" [6] 드라마의 과장적인 요소로, 로버트 레키의 원작 자서전에 의하면, 실제로는 생쌀을 먹다가 바구미가 나왔던 일화가 있는데 이를 각색한 듯 하다. 사실 노획한 물자에는 쌀 말고도 생선도 있었는데, 일본군에 제대로 된 냉장설비도 없던 때라 생선이 상하는 바람에 냄새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서 안 먹었다고... [7] 루거우차오 사건 무다구치 렌야(당시 연대장) 휘하의 대대장이었는데, 그의 대대에 소속된 중대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어서 잠깐 실종된,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병사였다. [8] 영국 연방 솔로몬 제도의 원주민 경찰관 출신으로 25년 동안 복무 후 1941년에 원사로 은퇴했으나, 그해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발발하면서 해안 감시원으로 재입대했다. [9] 단, 미 해병대 지도에는 테나루 강이라 기재되어 있어서, 테나루 전투로 기록되었다. [10] 군기를 불태우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거짓이다. 기관총 앞으로 돌격하는 바보짓으로 자살한건 반쯤 맞지만… [11] <더 퍼시픽>에 나오는 룽가 전투는 10월의 2차 공세때 벌어진 전투다. [12] 일본 측에서는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고 부른다 [13] 게다가 벤슨급 구축함인 USS래피가 난전과 야음을 틈타 히에이에서 10m거리까지 접근하여 대공기관포로 함교를 긁어버렸다. 어두운 밤에 난전이 벌어지고, 함교가 쑥대밭이 되자 일순간 쇼크를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장교들이 대공포에 벌집이 되어서 함교가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4] 이건 과달카날 해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키리시마의 자충수였다. 그리고 일본 해군의 야간전 전술에 큰 허점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15] 《과달카날》 398쪽, 고미카와 준페이 [16] 해병대 1사단이 떠나고, 과달카날에 남아있었던 미군 병력만으로는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펼치는데 있어서 부족했다. 그래서 12월 중에는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에 제한적인 공격만 할 수 있었다. [17] 일본기들의 주요 발진기지는 라바울과 부갠빌 섬의 부인 기지 등이었는데 이들 기지에서 이륙후 과달카날에 도달하면 체공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A6M 같은 사기적인 항속거리를 가진 전투기로도 이 판국이었다. [18] 과달카날과 부나-고나 전투 이후 펼쳐진 후속 작전으로 1943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벌인 남서태평양(맥아더),남태평양(홀시)의 합동공세전역이었다. 이 전역의 최종 목표는 남태평양의 일본군 거점이었던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맥아더군은 파푸아 북부 지역에 강습한 후 후온 반도를 통해 글로세스터 곳 전투를 벌이고 뉴브리튼 섬 서부를 점령했다. 한편 홀시군은 솔로몬 제도의 중북부 거점이었던 뉴 조지아 섬과 부갠빌 섬(일부 점령) 일대를 장악한 후, 라바울 외곽의 섬들을 점령했다. 1943년 후반 미군의 전략 변화로 개구리뛰기가 활성화되자, 라바울 외곽을 포위한 채 작전이 종료되었다. 이후 맥아더군은 목표를 돌려 1944년 4월, 필리핀 탈환을 위한 징검다리로 서부 뉴기니 지역의 거점인 홀랜디어에 침공했고 9월까지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 한편 수레바퀴 작전때 전개된 홀시군을 비롯한 그외 잔류 미군 전력들은 순차적으로 호주군과 교대하면서 일선으로 재배치되었고, 종전때까지 호주군이 잔당 소탕을 하게 되었다. [19] 이때 일본군의 17군 사령부는 철수명령을 예상하지 못해서, 상부의 명령이 도착하자 참모장인 미야자키 슈이치 소장이 퇴각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했지만 결국엔 철수했다. [20] 이 일을 계기로 상부에게 단단히 찍힌 기펜은 이후 전투에서 사실상 열외(...)되었다. 하지만 홀시 제독도 나중에는 이것보다 몇 갑절이 넘는 바보짓을 했다. 그런데 레이테 만 해전에서 홀시의 행보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레이테 만 해전 문서로. [21] 물론 본토 폭격까지 이뤄지고, 고학력자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징집하는 추세로 가자, 소수는 일본이 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22]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항공기 손실은 327대였다. [23]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명예 훈장 추서 후 플레처급 구축함 함명으로 명명됨 (DD-793). [24] 평속 약 30노트 [25]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 [26] 그나마 2대 중 1대는 어찌어찌해서 도망갔다. [27] 그리고 과달카날 전투와 임팔 작전에 모두 투입되고도 생존한 병사가 있었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나마 과달카날이 임팔보다는 나았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임팔이 과달카날보다 더 끔찍했다. 과달카날은 적어도 비행기와 배의 싸움이라 병사들이 직접 전투에 나설 일이 적었기에 '상대적으로' 고생이 덜했지만, 임팔은 배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결과적으로 적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공격해오는데 일본군은 오로지 알보병만으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과달카날은 수송선이나 잠수함으로 어떻게든 보급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임팔은 가져간 보급품 외에 추가 보급을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달카날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임팔 전선에 투입된 15군 예하 사단들 중 31사단은 사단장 15군 사령관에게서 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독단적으로 전선 이탈 및 퇴각을 명령했을 정도다. 이게 일본군 내 항명 사건 제1호다. [28] 이는 당연하게도 당시 일본의 지도자가 도조 히데키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럽 전선의 소련군은 미군에게 무기대여법으로 대여받은 물건들에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이름을 따서 '루즈벨트'라고 불렀고(예: 스팸 = 루즈벨트 소시지), 일본군은 영국군과 관련된 것을 당시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따서 '처칠'이라고 불렀다(예: 영국군 물자 노획품 = 처칠 급여). [29] 로빈 후드에서 따온 것이 맞다. [30]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의 항공기 버전과는 형식명만 같음. [31] 일본군의 만행들의 임팩트가 하도 강해서 덜 알려진 감이 있으나, 미군과 호주군 역시 일본군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으로 포로 학살을 자주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