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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06:58:13

마셜-길버트 공습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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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s-Gilberts raids

1. 배경2. 진행3. 의의 및 후일담

1. 배경

진주만 공습 이래 아직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반격은 고사하고 공격받고 있는 필리핀 및 서태평양 지역에 대한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태평양함대의 붕괴로 인해 미국의 모든 전쟁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사실상 일본군이 치면 얻어맞는 상황이었다.

새로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런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태평양함대가 사실상 괴멸된 상황이지만, 남은 전력으로 어떻게든 반격을 가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전쟁의 주도권 문제였다. 이것이 가장 핵심인데, 개전 이래 모든 전쟁은 일본군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전투는 일본이 시작했고, 미군이 선공을 한 사례는 없었다. 니미츠는 어떻게든 일본군의 작전계획을 어그러트리고, 미군에게도 전장 선택과 공세 역량이 있다는 걸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군의 사기 문제였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군과 국민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비열한 기습에 대해 전미가 분기탱천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달랐다. 작더라도 미군이 전투에서 이겼다는 명백한 발표를 할 정도의 성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셋째, 진주만 공습의 보복 문제였다. 백악관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서 빨리 일본 본토를 공격하라고 군 수뇌부를 달달 볶는 중이었다. 일본 본토 공격에 대한 부담감은 매우 컸지만, 적어도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남태평양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격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태평양함대는 전함은 단 한 척도 없는 상황이었지만[1], 대신 항공모함 2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Battle 360°에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다. 공습의 목적은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에 대한 거부조치 였고, 이를 위해 활주로, 연료 저장고, 탄약고, 그리고 대공포대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은 현재 시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당시엔 그에 대한 공포가 횡행했으므로 이에 대한 예방조치를 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2. 진행

태평양함대는 항모 및 호위함을 둘로 나누어 TF 8과 TF 17로 편성했다. TF 8은 윌리엄 홀시 중장의 지휘하에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배속되어 마셜 제도를, TF 17은 프랭크 플레처 중장(2번 항목)이 지휘하는 항모 요크타운이 배속되어 길버트 제도를 각각 공습하기로 하였다.

작전은 1942년 2월 1일 결행되었다. 두 기동부대의 공습[2]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TF 8은 콰잘레인을 중심으로 그 인근 환초들의 일본군 기지를 공습했다. 이 공습으로 카토리급 연습순양함 카토리가 소파되었고, 보조선박 3척이 격침, 소해함 1척이 중파, 항공기 15기가 격추 내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미군은 SBD 돈틀리스 6기를 잃었다.

TF 17은 성과가 미미했는데, 지상에 주기된 일본기 3기를 파괴하고 시설에 경미한 손해를 주었으나 대신 SBD 돈틀리스 3기, TBD 데버스테이터 4기를 잃고, 순양함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 1기를 추가로 잃었다.

현지 부대의 보고를 받은 대본영은 즉시 남방작전을 지원하던 함대를 일부 차출, 추격하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판단하에 이를 취소한다.

3. 의의 및 후일담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가 없고, 주목할 가치도 별로 없는 소규모 공습이었다.

그러나 이 공습을 통해 미군의 항모기동부대는 귀중한 실전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동시에 언제든지 일본의 방위선을 뚫고 펀치를 먹일 수 있다는 걸 입증하였다. 실전 경험의 의의는 상당했는데,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이 일소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항모기동부대 뿐이었고 이들은 후에 벌어질 일련의 전투의 핵심 전력으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량을 길러낸 전투 중 하나가 마셜-길버트 공습이었다. 공습 후 진주만에 귀항한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과 비행대원들은 영웅의 환대를 받았으며, 비록 미 본토에의 영향은 이후에 있었던 둘리틀 공격대가 훨씬 컸으나 진주만의 해군 장병 및 간호사, 육군 장병들에게 있어서의 사기진작 효과는 이 공습도 결코 작지 않았다.

반면, 대본영은 외곽 방위선의 섬 몇 개가 자그마한 공습을 당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 공습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 자신이 진주만에서 격멸하고자 했던, 그러나 끝내 살아남은 미국의 항모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구상한 전쟁주도권을 부술 위협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공습 규모가 너무 소규모여서 야마모토의 우려는 주변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나, 둘리틀 특공대가 도쿄를 공습함으로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미 항모부대의 반격과 도쿄 공습의 여파는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진다.


[1] 좀 무리한다면 가장 빨리 항행가능상태로 응급수리된 콜로라도급 전함 메릴랜드를 긴급투입할 수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수리가 되지 않아 전선에서 굴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2] 함재기에 의한 공격 외에도 순양함 및 하위함선의 포격 또한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