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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17:39:44

구레 군항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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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외곽[1]에 정박하던 중 미 해군 함재기에 공습당하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1. 개요2. 배경3. 공습
3.1. 7월 24일3.2. 7월 28일
4. 결과
4.1. 피해를 입은 군함4.2. 생존함
5.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극우 유저들의 왜곡6. 대중매체

1. 개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일본의 4군항 중 하나인 구레 항에 남아있던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잔존 전력을 말살하기 위한 미-영 연합군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대규모 공습이다.

이 공습이 결정타가 되어 전쟁 후반까지 겉보기엔 세계 제 3위의 해군력을 유지는 하던[2] 일본 해군의 수상함대는 사실상 소멸했다.

한편 큰 활약을 한 미 해군은 본인들의 입김을 미군에서 단단하게 굳힌 반면 미합중국 공군[3]은 쓸모가 없으니 이전처럼 육군과 해군을 보조나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육해공군의 파벌 싸움에서 공군이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2. 배경

1945년 7월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일본 제국 해군 중장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4]이었다. 오자와 제독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전력을 보존하여 패전 후를 대비하려고 했고 항전파들은 남은 수상함을 모조리 해안 요새로 활용하여 본토 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양측은 목적은 다르지만 어쨌든 함대의 출항을 막는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보급 및 수송 목적으로 움직이는 소형함들을 제외하면 일본의 모든 대형함들은 항구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움직이고 싶어도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매우 투덜거리며)[5] 깔아 놓은 기뢰밭을 돌파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당장 대형함을 움직일 연료도 바닥나 있었다.

연합함대 최후의 전력이 그렇게 안전한 구레 군항에서 숨어있는 걸 본 미 육해군 수뇌부는 골치 아파하면서도 후일 있을 일본 본토 상륙전에서 일본 해군이 방해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사전에 미리 연합함대의 전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미 구레는 3월 19일에 대규모 공습을 받은 바 있었는데 이때는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남은 전력을 다한 결사적 저항을 했다. 실제로 1945년 3월 19일 제1차 구레 공습 당시 일본은 대규모 카미카제는 물론 N1K-J 시덴으로 구성된 정예 요격기 부대까지 출동시켜 결사적으로 구레항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미군도 항공모함 CV-13 프랭클린이 대파되고 함재기 부대가 큰 피해를 입는 등 손실이 많았으며, 항구 폭격 자체는 실행되었지만 생각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45년 7월의 시점에서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카미카제의 소모로 더 이상 띄울래야 띄울 전투기도 없었고 그나마 남은 잔존 기체들은 본토 결전을 대비하여 출격을 극도로 자제하는 실정이었다. 반면 미군의 전력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화되고 있었다.[6]

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해군 대장 윌리엄 홀시 제독은 휘하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동원하여 구레를 공격하기로 했다. 미 해군은 해군 중장 존 S. 매케인 시니어 제독[7]이 지휘하는 TF38을 동원했고 영국 해군도 3함대에 편입된 TF57에 속한 항공모함 3척인 HMS 포미더블, HMS 인디패티거블, HMS 빅토리우스를 동원했다. 이 공격은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일본 본토 공격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편 홀시의 함대에는 영국 태평양 함대가 동행하고 있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자국의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윈스턴 처칠 루즈벨트 생전에 담판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는데, 미국 해군 입장에선 "아니, 우리가 잽스 애들 다 패죽여놔서 할 것도 없을 텐데, 와서 대체 뭐 하려고?" 수준의 취급을 받았다.[8] 때문에 홀시는 영국 함대 사령관에게 오사카 시코쿠에 일본군 함대 및 기지가 있으니 그쪽을 처리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고 영국군 사령관은 그 정중한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구레 공습에서 빠지게 된다.

3. 공습

3.1. 7월 24일

1945년 7월 24일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말 그대로 하늘을 까맣게 메운 미 해군 함재기들이 구레항으로 몰려들었다. 이 날 미 항공모함 부대가 띄운 소티는 무려 1,747소티로 그야말로 가공할 물량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대규모 항공모함 항공대 공습은 전례가 없었다. 진주만 공습 때 일본군의 1, 2차 공격대의 총 소티가 350소티였으니 다섯배에 가까운 소티를 날린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일본 해군의 전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항공 전력은 미약한 데다가 출격 자체를 꺼리는 상황이었고 대공포도 태부족인 데다가 레이더도 당시 일본군의 기술력 덕분에 능력이 바닥을 달리던 상태였다. 이에 더해서 선박 수리 시설과 등 항구 자체를 대공 방어할 필요성 때문에 대다수의 함정에 설치된 대공포까지 대부분 철거해서 육상 진지로 이동한 상태였으므로 이번 폭격의 주요 목표인 대형함들 중에 그나마 대공 사격이 가능했던 건 사실상 중순양함 아오바 정도였다. 그래서 이세처럼 주포 고각을 최대로 올린 후 3식 통상탄을 마구잡이로 발사하는 것이 대공 사격의 전부인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아오바는 대공 화기를 증설하고 군항의 얕은 곳에 정박해서 대공포 진지로서 나름대로 준비되었지만 이건 배의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 해군이 해상 대공포 진지로 활용한 경우였다. 구레 군항에는 그 외에도 전손 판정을 받아 대공 포대로 개조된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가 있었고 대공 화기를 떼어내지 않은 항공모함 카츠라기가 있었지만 아무리 대공 화기를 충실히 갖추었다고 해도 너무나 열세였다.

당연하게도 이런 식으로는 공습에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큰 목표였던 항공모함 아마기가 집중적으로 폭격을 얻어맞고 대파당했고 아마기의 함장 히라츠카 시로 대좌는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려야 했다. 뒤이어 항공순양함 오요도도 폭격 당했다. 사실상 기함 역할을 한 두 함선이 얻어맞는 동안 구레 항의 나머지 대형함들도 신나게 폭탄 세례를 받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대형함들은 공습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했고 항구 주변에 도배된 기뢰 때문에 도주조차 할 수 없었다.

운류급 항공모함 2번함 아마기와 3번함 카츠라기, 이세급 전함 이세와 휴우가, 공고급 순양전함 3번함 하루나, 아오바급 중순양함 1번함 아오바, 생존 구축함들, 그리고 러일전쟁[9] 때 쓰다 예비역으로 짱박혀 있던 걸 급하게 꺼내온 구식 장갑순양함 이와테 이즈모까지 모조리 다 공격당했다. 그나마 수심이 얕아서 완전한 침몰은 면했지만, 대부분은 착저 상태로 상부 구조물만 을씨년스럽게 수면 위에 내놓은 상태였고 일부는 아예 전복된 상황이었다. 휴우가는 살아남았지만 27일에 좌초함으로써 함생을 끝냈다.

같은 시각 영국 해군은 오사카 항을 공격해 호위항공모함 카이요와 700톤급 호위함 2척을 격침시키고 단 4기의 항공기 손실만을 입었다.

3.2. 7월 28일

24일의 대공습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한 미 해군은 항공 정찰 결과 의외로 다수의 대형함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추가 공습을 준비했다. 사실 24일의 공습으로도 대형함들은 대부분 중파 내지 대파되고 구획 일부가 침수된 상태였지만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 때 격침 당한 전함들을 대부분 되살린 자신들처럼 일본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은 미군처럼 대형 함선들을 건져서 수리할 능력도 기술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미 필수 자원도 바닥난 상태였다. 상술했듯 전쟁 기간 내내 3번이나 대파당하고도 돌아온 전함도 아니고 중순양함급인 아오바도 수리를 못해서 기동 불능 상태의 해상 대공포 진지로 전용될 정도였다.

28일의 공습은 그나마 중요 전력이었던 이세, 하루나, 아오바에 집중되었다. 이세는 16발, 하루나는 8발의 폭탄을 맞고 완벽하게 격침됐으며 아오바도 4발의 폭탄을 맞았다. 뒤이어 24일에 화를 면한 항공모함 카츠라기도 2,000파운드 폭탄을 맞고 중파당했고 이미 대파된 아마기도 확인사살로 폭탄을 맞았으며 오요도도 폭탄 4발을 더 맞고 전복되어 격침되었다. 그러나 아오바가 아직 안 죽었다고 판단한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육군 항공대 B-24 폭격기 79대를 추가로 투입했고 이들은 아오바에게 4발의 폭탄을 더 먹여서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B-24 2기가 격추되고 14기가 피격되는 피해를 입었는데 정황상 아오바가 격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대부분의 대공포가 철거된 데다 B-24와 싸우지도 않은 하루나가 B-24를 격추했다고 주장함으로서 마지막까지 추한 꼴을 보였다.

4. 결과

1945년 7월의 일본은 1941년 12월의 미국과는 다르게 이 피해를 복구할 여력이 전무했다.[10]

이 대공습으로 항공모함 1척[11], 전함 항공전함 3척[12], 중순양함 2척[13], 경순양함 1척[14], 장갑순양함 2척[15], 보조함 2척[16], 잠수함 1척[17]을 상실하고 306기의 항공기 손실과 392기의 항공기 손상을 입은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군함들도 손상을 입어서 출격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마지막 남은 대형함은 대파 당한 채 요코스카에서 정박 중이던 일본 해군의 마지막 전함[18] 나가토와 철저하게 은닉된 항공모함 준요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본토 상륙에 맞설 해상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여 고정 포대 역할이라도 할 만한 배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만주 작전에서 함경북도 청진 쿠릴 열도 소련 해군이 몇 척 안 되는 전투함과 중소형 상륙 함정들로 상륙 작전을 펼칠 때 이에 대응할 군함이 없었다. 과거의 일본 해군이었다면 정말 쉽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냥 굴욕이다.

순양함급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로 이 공습으로 토네와 아오바, 오요도가 모두 날아가면서 중순양함은 고사하고 일본 본토에 순양함이 단 한 척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해외로 눈을 돌리면 싱가포르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가 있긴 했지만 이들도 손상을 입어 이동불능 상태로 고정 포대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도 구축함급으로 내려가면 전투가 가능한 생존함이 몇 척 남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아카츠키급 구축함 히비키와 일본군 최고의 강운으로 유명한 카게로급 구축함 유키카제가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각각 소련 대만에 배상함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그 밑의 체급이었던 해방함 등 중소형함은 다수가 살아남았는데 어차피 대규모 해전 상황에서는 쓸 데가 없었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잠수함들은 어느 정도 건재했지만 주 전력인 수상함대가 이미 전멸한 상황에다가 대서양에서 유보트를 지겹도록 상대하고 온 미 해군의 대잠 전력이 충실했기 때문에 큰 변수는 아니었다.[19]

이 공습은 사실상 일본에 해군이 따로 존재할 이유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패전 당시에는 100만에 달하는 해군 장병들 대다수가 육상과 항공대로 돌려져 있었고 따라서 일본 육군에서 계속 육해군을 합쳐 통합군을 만들어 버리자고 제안하는 것을 해군이 거절할 명분이 이 공습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패전시까지 해군은 이 제안을 거절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4.1. 피해를 입은 군함

4.1.1. 전함 항공모함

파일:external/www.ibiblio.org/g351726.jpg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일본 전함 중에서는 최고의 수훈함인 공고급 순양전함 최후의 생존함. 대부분의 군함들과 마찬가지로 부포와 대공 화기 대부분이 철거되어 육상으로 옮겨진 상태였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6월 22일에 직격탄 1발[20],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맞았으나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7월 28일에는 8발의 폭탄을 맞고 확실하게 격침.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24일과 28일의 명중탄이 20발인데 명중탄과 지근탄의 기준이 미국과 달랐기 때문에 생긴 차이.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1821029b.jpg
휴우가와 함께 세계에서도 둘 뿐인 항공전함.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2발을 맞았고 7월 24일의 공습에서는 폭탄 4발을 맞아 함장을 포함한 50명이 전사했으며 28일의 공습에서는 16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 당했다. 2번 포탑에 3식탄이 장전된 채로 격침되었기 때문에 포탄 제거를 위해 허공에 발포한 것이 최후의 포격이었다.
파일:external/ww2db.com/ship_hyuga7.jpg
80-G-490239, US National Archive, 출처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0발을 맞아 함장을 포함한 204명의 전사자를 냈고 27일에 좌초되면서 격침.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amagi02.jpg 파일:external/ww2db.com/ship_amagi1.jpg 출처
[21]
7월 24일의 공습으로 500파운드 폭탄과 2,000파운드 폭탄에 맞아 대파되었고 아마기의 함장 히라츠카 시로 대좌는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려야 했다. 28일의 공습에서 폭탄 여러 발을 추가로 맞은 후 29일 오전 10시에 옆으로 쓰러지며 격침.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fullryuho.jpg
류호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3월 19일의 1차 구레 군항 공습에서 폭탄 3발과 로켓탄 2발을 먹고 Total loss(전손. 全損)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항공갑판과 엘리베이터, 보일러가 파손되어서 작전용으로는 완전히 사용 불능이 되었다. 그러나 4월 1일 도크에서 침수로 들어온 물을 빼냈고 다시 띄우긴 했으나 수리할 가치가 없다고 판정되었다. 이후에는 폐선으로 간주되어 그냥 정박해 있었으며 7월 24일과 28일의 구레 군항 공습에서는 이미 무력화된 상태라서 거의 공격 받지 않아서 살았다.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은 셈이 되어서 위의 사진과 같이 남아 패전 후 스크랩. 덕분에 전후 생존함이라 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전의 공습에서 진작 항공모함의 기능은 상실되어서 별 쓸모는 없었다.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full-katsuragi.jpg
다른 배와 달리 대공 화기가 철거당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저항할 수 있었다. 24일에 500파운드 폭탄 1발, 28일에 2,000파운드 1발을 먹고 13명의 전사자와 12명의 부상자 발생.

추가로 구레항에서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 아소도 폭격으로 화재가 나서 추가 공정이 불가능해졌고, 당시엔 이미 전력에서 이탈한 구식함이었지만 카와치급 전함 셋쓰(摂津)도 공습으로 자초되었고, 인양 후에도 추가적인 공습을 받아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4.1.2. 순양함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image05aoba.jpg
저승에서 3번이나 살아 돌아와 마지막까지 구레를 수호하던 일본 본토 최후의 중순양함. 일본에 귀환한 중순양함은 아오바와 토네 2척이지만 토네는 구레에서 도망간 데다 일본군 공식 기록에 경순양함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논외이다. 생존한 중순양함이라면 타카오 묘코가 있지만 이들은 싱가포르에서 대공 포대가 된 후 영원히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아오바는 정말로 일본 본토 최후의 중순양함이었다.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1발을 먹고 착저. 7월 28일의 공습에서는 함재기로부터 폭탄 4발, B-24 폭격기 편대로부터 폭탄 4발을 더 먹고 후미 부근이 절단되면서 격침되었다.

다른 군함과 달리 착저 이후에도 미군과 일본군 모두 침몰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28일에 중요 목표물로 선정된 이세, 하루나와 달리 대공 전투가 가능했기에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공습에서 미 해군과 육군항공대가 연속 공격을 가한 것도 구레 군항 공습 중 유일한 사례이며 이 날을 끝으로 대공 전투가 가능한 일본 해군 수상함 전력은 사실상 전멸했다.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TonerAttack.jpg
아오바와 더불어 살아서 돌아온 유이한 중순양함이지만 일본군은 끝까지 경순양함으로 분류했다. 3월 19일의 공습 이후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시의 섬으로 이동했으므로 구레 군항에 정박한 군함은 아니다.

7월 24일에 9대의 함재기의 공격으로 폭탄 3발을 맞고 착저하고 28일에 본격적인 공습을 당해 격침되었다.
파일:attachment/구레 군항 공습/Oyodo_cruiser_capsized_1945-00001.jpg
연합함대 최후의 기함.

3월 19일의 공습으로 폭탄 3발, 7월 24일의 공습으로 폭탄 4발을 먹었고 28일에 폭탄 4발을 더 먹은 후 12시에 완전히 전복되어 침몰.
파일:external/ww2db.com/ship_izumo6.jpg
문서상으로는 1등순양함(중순양함)이지만 사실은 구식 장갑순양함이었다.
파일:external/ww2db.com/ship_iwate5.jpg
이즈모와 마찬가지로 문서상으로만 1등순양함인 장갑순양함이었다.

여기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3척이 추가로 격침되었다. 건조 중이던 센토쿠급 잠수항모 4번함 I-404는 화재가 너무 커서 끝내 침몰했다.

4.2. 생존함

구레에 있던 대형함들은 모조리 개박살났지만 경항모 호쇼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 오래 전에 군함으로서의 수명이 끝난 류호, 중파된 카츠라기 정도가 생존했지만 이들 모두 군함으로는 쓸모가 없었다. 이외 중소형함들은 상당수가 살아남았으나 어차피 바다로 나가 봐야 격침당할 운명이었고 그걸 빼도 애초에 나갈 연료도 없었다. 일본이 계속 저항하면 추가 공습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원폭 두 발을 맞고 그 전에 항복했다.

전후 생존함들은 파손이 심각하여 항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명한 소수를 제외하고 일본 해군이 귀국하는 구 일본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수송하는 것과 패전과 함께 쓸모없어진 기뢰 제거 등을 수행하기 위해 바로 해체되지 않고 상당기간 유지됐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해군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후 처리가 완료된 뒤 스크랩 처리되어 해체되었고, 일부는 전쟁 피해국에 배상 명목으로 공여되어 함명을 변경한 뒤 사용되었다.

5.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극우 유저들의 왜곡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 呉軍港空襲'이라는 문서명으로 구레 군항 공습을 서술하고 있다. 다만 영어 위키백과와 차이점이 있는데 영어 위키백과는 구레 군항에 가해진 전체적인 공습을 다루는 문서를 만든 다음 1945년 7월의 구레 군항 공습 1945년 3월의 구레 군항 공습을 각각 다른 문서로 분리해 서술하고 있는 반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3월의 공습과 7월의 공습을 모두 '呉軍港空襲' 문서에 포괄해 서술하였다.

여기에 대해 일본군이 어느 정도 전과를 거둔 3월 공습을 같이 서술하여 일본군이 나름 잘 싸운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서술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있다. 하지만 3월에 공습을 했든, 7월에 공습을 했든 어차피 구레에 가해진 대규모 폭격이어서 같은 문서 내에 서술해도 무방한 것도 사실인 만큼 이 부분은 문서를 읽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呉軍港空襲 문서 서술에는 주요한 특징이 있었는데 '大破着底(대파착저)', '転覆(전복)', '浸水擱座(침수각좌(침수좌초))'라는 말이 남발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문서 기준으로 2008년 2월까지만 해도 대파착저라는 말이 남발되었으며[22] 이후 침몰로 바뀌어 서술되긴 하였지만 2017년에 어떤 이용자가 침몰을 죄다 대파착저로 고쳐 놓는 일도 있었다.[23] 굳이 침몰을 대파착저, 전복, 침수각좌로 기입하고 바꾸는 의도가 무엇일지는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결국 침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서술인 것이다.

여기서 대파착저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파착저는 선박이 '대파'에 해당하는 타격을 입어 선저가 바다 밑바닥에 닿을 만큼 가라앉았으나 바다가 깊지 않아 선박의 일부가 해수면 위에 남아있는 상태를 뜻한다. 즉, 천해(얕은 바다)에서 가라앉으면 '대파착저'가 되는 것이고 선박의 높이보다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가라앉으면 '침몰'이 되는 것이다. 결국 대파착저는 그냥 침몰이며, 소위 말하는 '킬 카운트'에는 당연히 침몰로 기록된다. 굳이 따지자면 침몰되었다고 쓰면 되지, 굳이 대파착저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는 셈이다.

대파착저와 침몰을 구분할 실익이 없지는 않다. 첫 번째로는 인양 및 재활용의 난이도 문제이다. 얕은 바다에 가라앉은 대파착저 쪽이 훨씬 난이도가 낮다. 일단 육지에 가깝고, 작업자들이 선박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침몰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의 대표적 사례가 진주만 공습 당시 착저한 콜로라도급 전함 4번함 웨스트버지니아로, 결국 살아남아 레이테 만 해전에 참전하여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니시무라 함대를 증발시키는 것에 기여한다. 정작 미합중국 해군은 웨스트버지니아를 'sunk' 취급했다. 침몰로 처리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는 군함에게 요구되는 일부 능력, 특히 전투 능력의 유무다. 대파착저든, 침몰이든 자력으로 항해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사실상 선박으로서의 의미는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배와 선원이 모두 수장되어 어떤 행위도 없는 침몰 상태와 달리 대파착저의 경우 해수면 밖의 구조물이 기능하면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일부분이나마 수행할 여지가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강구트급 전함 2번함 마라로, 마라는 한스 울리히 루델의 폭격으로 침몰했으나 수심이 얕은 군항 내에서 침몰했기에 대파착저 상태가 되었다. 선수부가 박살난 마라는 항해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3번 포탑과 4번 포탑은 여전히 가동되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 내내 12인치짜리 인민의 불벼락을 갈기며 끝까지 분전했다.

원양에서 침몰하는 것보다 대파착저하는 편이 일반적으로는 더 좋다. 인양하거나 재활용하지 않더라도 착저한 군함을 그대로 고정포대, 방공포대 등으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 티르피츠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이다. 티르피츠는 작정하고 모래톱 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하필 떨어진 게 지진폭탄 톨보이라서 모래톱이 패여 전복되고 말았고 야마토는 목적지인 오키나와로 가기 전에 미군의 항공어뢰 세례를 야무지게 먹고 침몰한다. 작정하고 시도하는 대파착저도 어렵기 때문에 전복 혹은 침몰 위기에 처한 군함을 가까스로 대파착저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도 함장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콜로라도급 전함 4번함 웨스트버지니아도 이런 경우인데, 배가 전복될 것 같자 함장이 자침 명령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자침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튼, 대파착저는 그냥 침몰이지만 앞서 언급한 실익에 해당되는 경우라면 '침몰(대파착저)'라고 기입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1945년 7월 기점에서 이에 걸맞은 일본 제국 해군 함정이 구레 군항에 있었는지는 심각한 의문이 있다. 1945년 8월 15일에 태평양 전쟁이 끝났는데[24] 7월에 이미 박살난 군함을 어떻게 써 먹을 시간 자체가 없다. 이 시점이면 미국은 트리니티 실험으로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끝마치고 나서, '일본 어디에 원자폭탄을 떨궈야 더 맛깔나게 히로히토가 고개를 숙일까?' 라고 생각하던 시점이며 일본 제국은 이미 총기, 탄약, 연료 같은 기본적인 물자도 없어서 1억 총옥쇄니 뭐니 하며 민간인들에게 죽창을 쥐여주고 있었다( 결호작전). 민간인들이 결호작전에서 쓸 만한 개인 장구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개막장 상황에 처했던 당시 일본 제국에게는 군항에 착저한 대형 군함을 수복해 써먹을 능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 따져보면 대파착저 자체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군항 내에서 공습을 맞아 '대파착저한' 이유는 미합중국 해군에게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가장 기본인 연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25]. 군함은 대양에 나가 적 해군과 싸우고 제해권을 확보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작전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수심이 얕은 항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항공폭탄 얻어맞고 가라앉은 것이다. 대파착저는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분전의 상징이 아니라 제해권 상실과 연료 부족이라는 무능의 상징인 것이다.

여러 지적이 있었는지 2021년 8월 기준으로 呉軍港空襲 문서에서는 침몰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6. 대중매체



[1] 에타지마(江田島) 코요(小用)항 [2] 일본 제국 해군은 이미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을 대거 상실하며 전쟁 우위를 잃어버렸고 이후 과달카날섬을 둘러싼 지독한 소모전을 마지막으로 공습도 포기하고 수세로 몰렸으며 미군의 공격 속에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 해전으로 남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수상함대 주력도 박살난 데다 급기야 '일본 해군의 자랑'이라 불렸던 야마토급 전함마저 오키나와 특공으로 잃었다. 즉,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구레 군항에 정박했던 함선은 아직 기동 가능하거나 수리 중, 심지어 건조 중이던 함선들이었으나 이들마저 이 공습으로 고철이 되었다. 이후 일본 해군은 수상함대를 거의 잃고 육상기지에 전개한 해군항공대와 육전대만 전력으로 보유하는 사실상 전투불능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3] 당시에는 육군항공대이기는 하였지만 독자적인 군대로 독립하기 위해 성과를 내려는 중이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경쟁자인 해군이 치고 나가며 공군으로 독립을 못 하게 하려는 낌새가 보이니 문제가 생겼다. [4] 이 사람은 대장 이상으로의 승진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5] 기뢰 살포는 육군 항공대 자체의 소관이 아니라 미국 해군 측의 요청으로 진행한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는 '이거 할 시간에 일본 도시를 하나라도 더 박살내야 한다.'라며 투덜거렸다. [6] 이때 즈음엔 F6F 헬캣, F4U 콜세어, P-38 라이트닝, 그리고 P-51 머스탱과 같은 최신 기체들이 배치되어 태평양 상공을 장악하던 상태였고 B-29 같은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도쿄 대공습과 같은 악몽이 실현되던 때였다. [7] 2008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할아버지다. 매케인 집안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4대가 다 해군에 복무했다. [8] 틀린 생각도 아닌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장에서 영국은 1941년 후반-1942년 초 남방 작전으로 일본군에게 한 번 거하게 털린 뒤 1944년까지 전투 행동 일체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 당시 기준으로도 40년 전이다. 21세기로 치면 베트남 전쟁 때 쓴 무기를 꺼내서 쓴 꼴이다. [10] 1941년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전함을 노렸고 반격을 할 수 없도록 항공대도 같이 두들겼다. 그러나 정작 치명적인 수리 시설이나 특히 연료 저장시설은 그냥 내버려 둬서 재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줘 버리는 실책을 저질렀고 특히 이소로쿠 연합함대장의 우려대로 가장 중요했던 미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들이 없었던 관계로 이들이 훗날 미군이 태평양의 재해권을 되찾는데 일등공신이 되는 빌미를 제공해 버렸다. 반면 구레 군항 공습의 경우 우선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일본 해군의 항모들이 먼저 털려나간 데다 이후 과달카날이나 필리핀 해전으로 인해 함선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특히 야마토급 전함의 격침은 해상 전력의 완벽한 손실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치명타를 가했다. 게다가 대본영의 병신짓으로 인해 수많은 제로센 에이스들과 함선 승조원들이 모조리 전사했고 인적 자원의 손실을 메꾼답시고 본토에서 지원 사업에 열중하던 기술자들까지 징집해 버린 까닭에 생산은커녕 보수 유지와 관리도 엉망이었고 기술자들이 다 전쟁터로 나가 버렸으니 일반 평민들이 이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당연히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군의 공습이 시작된 후에는 공장 시설까지 모조리 파괴되었고 원자재는 아예 수급조차 되지 않았으니 미군과 같은 복원력은 불가능했다. [11]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 [12] 이세급 전함 이세와 휴우가,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13]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14] 아가노급 경순양함 오요도. [15] 이즈모급 장갑순양함 이즈모와 이와테. [16] 제2호형 해방함 제4번함과 제30번함. [17] 센토쿠급 잠수항공모함 I-403. 단, 이건 폭탄/어뢰/로켓으로 인한 직접 격침이 아니라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여 격침된 것이라 집계에서 자주 빠지기도 한다. [18] 미카사가 있었던 관계로 나가토가 일본 해군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전함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미카사는 전노급이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기념함 신세였고, 그러므로 "전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정규 전함"은 나가토가 끝이었기에 사실상 마지막 전함이라고 봐도 된다. 당장 대전 말에 모든 전함을 상실했다고 알려진 크릭스마리네도 엄밀히 말하자면 도이칠란트급 전함 하노버와 슐리지엔이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하노버는 포적함이었고 슐리지엔도 해전에서의 가치는 0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도 전력으로 집계하지 않았다. [19] 단, 이 잠수함들 중 하나가 이후 전쟁이 끝나기 직전 딱 한 번 일을 터트리기는 했는데 그게 바로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이다. [20] 7발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지만 지근탄 포함인 듯. [21] 참고로 3번째 사진은 공습 직후의 모습은 아니고 패전 후인 1946년 아마기를 스크랩 처리할 당시의 모습이다. 다만 공습 이후 일본은 좌초된 함선들에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상황이므로 사실상 공습 직후와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22] 참조. [23] 참조. [24] 쇼와 옥음방송 기준. 일본 제국의 항복 문서 조인 기준으로는 1945년 9월 2일이다. [25] 2011년 12월 일본에서 제작, 개봉된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 아부라가 나인다(연료가 없다).' 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 제국은 고질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심지어 당시는 무츠가 살아 있던 시점( 과달카날 전역)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긴 했어도 아직 일본 제국 해군이 제대로 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