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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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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 서명의 순간[1]

1. 개요2. 발단3. 내용과 회피방법4. 반응 및 평가
4.1. 너무 가혹하다4.2. 충분치 않다4.3. 총평
5.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6. 조약의 파기7. 잔재들8. 기타9. 만평10.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Treaty of Versailles / Traité de Versailles / Friedensvertrag von Versailles

베르사유 조약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9년 6월 28일에 조인하고 1920년 1월 10일에 발효되어, 독일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시행하게 만든 강화조약이다.

파리 강화 회의 도중에 완료되었으며[2] 협정은 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고, 1920년 1월 10일 공포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연맹의 탄생과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제재 규정을 포함한다.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제재에 관한 내용은 승전국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이 패전국인 독일 제국에서 이어진 바이마르 공화국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무자비하게 뜯어내려 한 조항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 조항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엄청난 양의 전쟁 보상금 요구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장해제[3]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영국 프랑스 등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유약한 조약은 독일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버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실상은 국가 수뇌부와 국민들 간의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해 독일인들의 엄청난 분노와 증오를 촉발시키고 또 다른 끔찍한 전쟁 원인만을 초래하였을 뿐이었다. 이 조약에 이를 갈던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을 수립한 뒤 1935년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 및 대대적인 독일의 군 재무장을 추진하였고 조약으로 인해 강제로 비무장지대화되었던 라인란트에는 훗날 독일 국방군이 입성하게 된다.

2. 발단

1918년 9월 독일 제국 군부가 사실상 패전을 내각에 알리고 11월 11일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협상국은 독일의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간주하고 독일 제국군을 뒤쫓아 독일 국경을 돌파해 라인 강 지역까지 추격하고 영국 해군은 휴전 후 협상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독일 항구 기뢰를 부설했다. 1919년 초부터 본격적인 협상인 줄 알았는데 거짓이고 사실상 항복 후 요구조건을 명령하고 관철시킨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반발했지만 이미 반항할 여건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수용한다.[4] 승리한 협상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씨가 마를 때까지' 쥐어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래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은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 프랑스의 주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에 대해서도 배상하라'고 나서면서 3백 억 마르크가 2천 억 마르크로 치솟게 되었다. 한편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이상인 국제연맹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엿보았고, 결국 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연맹에 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의 바람과는 달리 국제연맹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국제기구로 전락하고 만다.

3. 내용과 회피방법

파일:German Empire lost territory.png
독일 제국이 상실한 영토
540,857㎢ 에서 72,070㎢ 를 상실하여 468,787㎢ 로 줄었다. 잃은 영토는 약 13%.[5][6]
베르사유 조약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실 이 조약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또한 그 당시에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 GCSE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대단원 하나를 "Was Treaty of Versailles Fair?"(베르사유 조약은 공평했는가?)라는 문장으로 대표하고 있다.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과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 20억 달러(= 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기 불능을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전쟁으로 인한 부채 상환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 부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스는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에 못 받고 영국과 프랑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 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협상국 정치인들을 비판했다.[26]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러나 위와같은 꼼수로 매우 철저하고 정교하게 피해갔고, 효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협상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 병력은 많으나 예비 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 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 정권이 들어선 소련과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2선으로 물러난 나사우급 전함 헬골란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끝낼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이[27]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보유를 금지하고 해군 규모 역시 대폭 축소하면서 독일 해군은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졌고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 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다. 결국 독일 해군은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 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재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치가 집권해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근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노한 독일 국민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침공 같은 삽질이 없었더라도 다시 한 번 1차대전급 대전쟁을 만들었을,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를 불러온 엉터리 조약이었다.

4. 반응 및 평가

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의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 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해럴드 조지 니컬슨 남작(Sir Harold George Nicolson, 1886~1968)[28]
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었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Too punitive for conciliation, too lenient to keep Germany from recovering).
헨리 키신저[29]
1882년 한미조약을 체결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생각이나 하였겠냐마는 왜놈이 휴지로 썼고, 1856년 파리조약 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꿈이나 꾸었으리오마는 러시아가 휴지로 썼은즉, 소위 평화조약은 일변 휴지로 쓰며 일변 만드는 것이요, 억만세 무궁토록 두어두고 쓰는 것은 아니로다.
1919년 7월 8일, 한인신문 신한민보에 익명으로 투고된 사설 "세계평화에 대하야, 조약을 휴지로 쓰려…"[30]
파일:attachment/베르사유 조약/b0041991_48af02a0d1a74.jpg
조르주 클레망소: 희한하군! 어디서 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만평 # : 우는 아이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보고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과, 제목인 "peace and future cannon fodder"(평화와 미래의 총알받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장래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어정쩡한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벽에 기댄 채 우는 아이 위에 '1940 CLASS'라 쓰여 있는데,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고 베르사유 조약 당시 어린아이였거나 청소년기를 보냈던 이 당시의 독일인 대다수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후에 나치 독일군이 되어 침략전쟁과 학살의 주역을 맡았다.

참고로 저기 서 있는 세 명은 각각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리고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 총리이다. 이 세 사람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시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3인으로, 영미권 역사 교과서 등 문서에는 "The Big Three"라는 칭호로 불린다. 이 "The Big Three"라는 칭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비슷하게 재연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었을 때 각각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서 만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및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때 두 명과 만났으나 포츠담 회담 전에 사망하였고, 그 자리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가져갔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중간에 정권이 바뀌어 얄타 회담 때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자리는 클레멘트 애틀리가 매꿨다.

당시 맨앞에 서 있는 조르주 클레망소는 본국에서도 "The Tiger", 즉 호랑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릴 정도로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강했던 정치인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는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프로이센 왕국 이전으로, 즉 독일이라는 나라를 17세기처럼 여러 조그만한 게르만계 소국들로 해체해서 연합하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하려 했으나, 여러 측근들의 반대와 설득 끝에 그 생각을 철회했다. 하지만 클레망소 자신도 꽤나 강경한 요구를 들고 나왔는데, 그 중 결국 비무장지대가 된 라인 주위 80-100km 영역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프랑스와 독일의 직접적인 국경을 없애려는 요구, 단치히를 폴란드에 귀속시키려는 요구 등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없었고 독일을 전략적으로 써먹고 싶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 의해 제지되었다. 프랑스는 국민적 감정에 좌우되어 자국 정치인들에게 강경한 요구를 한 것인데, 애초에 복수심으로 협상을 하면 안 된다. 정치가는 정치를 감정으로 하면 안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은 물론 이를 강제하려면 민족감정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적대지역에 군대를 장기간 파견하며 통치해야 하는데 승전국이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치는 아니었다. 훗날 배상금을 둘러싼 루르 점령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 뒤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서 있는데, 당시 영국 여론 역시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할 정도로 아무리 험악했다고 해도 지리적으로 도서국가인데다 국토와 국민들이 입은 피해가 대륙국가인 프랑스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적은 이상 로이드 조지는 클레망소처럼 아주 강경한 조약은 내세우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 수뇌부는 독일을 어느 정도 복구시켜 영국 경제 회복에 이바지해 주기를 바랬다는 설도 있다. 일단 전쟁 전에 독일은 영국의 2번째로 중요한 무역국이었고, 그런 나라가 망하면 안 그래도 전쟁으로 여러 문제가 발생한 영국 경제에 도움을 주긴커녕 전쟁 전보다도 못할 정도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31] 또한, 로이드 조지는 한창 불안해지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와 근접한 독일을 경제적으로 살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방패로 쓴다는 계획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모두가 알다시피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앙숙이었다.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엄청난 보상을 받을 터인데 영국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강력해지는 것도 딱히 바랄 일 없다는 것은 로이드 조지가 프랑스의 것보다 덜 강경한 조약을 들고 나온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인데, 윌슨주의로 유명한 미국식 이상주의자로, 절대군주제 노선이 전쟁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여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중서부 유럽의 제국들을 해체하고 수십개의 단일 민족 공화국으로 유럽을 분할하면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공조로 더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동맹국에 항복 조건으로 전제군주제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체제 변혁을 제외한 부분에서 독일을 심하게 대하면 나중에 다른 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한다. 하지만 그 중 항해의 자유와 민족자결주의, 국가간 비밀 조약 폐기 등의 이상주의적인 조항은 당시 해양 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32]

우드로 윌슨은 그나마 배상금 문제를[33] 제외하면 독일을 온건하게 대하자고 주장하던 사람이었고, 국제연맹도 사실상 그의 14개조 평화원칙 중 통과된 얼마 안 되는 조항 중의 하나다. 하지만 결국 미국 상원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저지하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결국 미국은 국제연맹 아이디어를 내고도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제연맹은 1929년까지는 그럭저럭 분쟁들을 꽤나 잘 해결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여러 국가가 민족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 노선을 타면서 사실상 1930년대에는 본디 목적을 상실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미국이 국제연맹 결성에 참가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미국의 부재가 국제연맹이 반쪽 짜리로 남아있던 큰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백일 공세의 여파로 독일이 확실히 수세에 몰리자(종전 몇 개월 전), 윌슨은 독일에게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제시했으나 독일은 거절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강경한 태도를 나타내자, 독일은 뒤늦게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기대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꽤나 강경했고,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조약의 대부분을 작성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피해도 적게 입은 데다 본토에 공격은 전혀 받지 않았다.

상위 세 명에 대한 정보 출처는 영국 옥스퍼드 Oxford University Press 에서 편찬한 GCSE 역사 "20th Century History for Cambridge IGCSE"[34] 헨리 키신저가 집필한 <세계질서>에 있다.

사실 전후 회담에 참석한 국가 정상은 저 위의 세 명 외에 한 명이 더 있는데 바로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백발에 콧수염을 기르고 맨 뒤에 서있다. 원래는 The Big Three가 아니라 The Big Four라고 하는 쪽이 옳으며 1차대전에 대해서는 그렇게 서술한 쪽이 더 많다. 이쪽은 독일 처벌에는 별 관심이 없고 1915년에 삼국 동맹에서 편을 바꾸면서 영국과 맺은 런던 밀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유한 미수복 이탈리아 지역( 쥐트티롤, 달마티아 등)에 관심이 더 많았기에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된 삽화에서는 중요하게 나오지 않을 법 하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1차대전에 기여한 바가 적기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유고슬라비아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하고 무엇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조약의 당사자도 아니었을뿐더러 그의 이상주의적 원칙에 입각해 비밀 조약과 같은 것을 극도로 혐오했기에 이탈리아의 주장은 완전히 묵살되며 이스트리아 반도 쥐트티롤은 챙겼지만 결국 달마티아는 유고슬라비아가 들고 갔다.[35] 이에 오를란도 총리는 회의장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고 귀국 후 고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실각했다. 자신들의 승리를 빼았겼다고 여긴 이탈리아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이후 파시즘의 태동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의 원동력이 되었다.

4.1. 너무 가혹하다

당시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자 재무성의 일원이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협상국 지도자들의) 역겨운 언행을 참을 수 없다'면서 사표를 던졌다. 그 직후 펴낸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케인스는 전쟁배상금 개념 자체를 비난했다. 나중에는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로 일어났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물배상액 가치 평가에 이견을 보이자 채무 불이행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 강을 넘어 바이마르 공화국 경제 심장부 루르 지역을 침략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생산수단 볼모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조치를 시행하는데, 철도와 광산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액수의 상환액이 채워질 때까지 무상으로 양도할 것을 강요했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맞섰고 바이마르 정부에서도 못 본 체 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를 파괴하고 프랑스-벨기에군에 사보타주한 죄목으로 독일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처형하자 미국, 영국은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채무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타국을 침략하고, 점령지에서 평시에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총살하는 것은 승전국이 좋아하는 국제법이나 정의는 밥말아먹은 행위였다.[37] 결국 프랑스-벨기에군은 국제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하고 본전도 못 찾은 채 철수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의 발호에 영향을 주게 된다. 승전국이 단지 승전국이라는 이유만으로 패전국에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대하는 데서 이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4.2. 충분치 않다

베르사유 조약의 경제 조항은 독소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내용이어서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발췌본》( 윈스턴 처칠 지음) 한국어 번역판 p17
프랑스의 경우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조약 내용이 너무 관대하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이런 조약이 어디있는가?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동안의 휴전협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분노를 터트렸다. 포슈가 미래를 내다본 훌륭한 전략적 안목의 실례인데, 제2차 세계 대전은 그의 말대로 정확히 20년 64일 후에 발발했다.

위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는 정 반대의 시각을 가졌으나 둘 다 내린 결론은 똑같았다.

포슈는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돌려받았으나 실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빈약한 상태와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을 통찰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인란트를 프랑스가 점유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와 바이마르 공화국이 1:1로 싸울 수 없다는 점과 라인란트 대신 협상국에서 내세운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이 허상에 불구하다는 점과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군에 대한 제약이 허접한 수준임도 통찰했다. 즉, 20년 전부터 나치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 침공의 결과를 어느 정도 들여다봤다는 소리. 한동안 국내에서는 포슈의 '20년 휴전' 발언을 "협상국 내부에서조차 베르사유 조약이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이 많았다"는 사례로 인용되었는데, 실제 포슈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해석한 셈. 덤으로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그 본인이 베르사유 강화 회의의 의장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내용이 '관대하게 망가지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실각하는 등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수행력을 결딴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결단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38] 오스만 제국[39]처럼 나라를 몇 개로 쪼개버리는 게 가장 좋기는 한데[40]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이른바 ' 라인 강 이서(以西) 공화국' 등의 건국을 추진하였으나, 정부 수반에 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등으로 실패하였으며, 결국 당시 협상국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을 쪼개는 데 구 독일 제국령에 속해있던 탄자니아, 카메룬, 나미비아 등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식민 지배권 박탈과 알자스-로렌 지역의 프랑스 할양, 북부 슐레스비히의 덴마크 반환, 폴란드의 분리독립, 라인란트의 비무장지대화 등으로 식민지나 독일과 인접한 지역의 영토를 찢거나 일부 지역에 대한 제제를 내리는 선에서 그친 것도 여기에서 기인되었다.

그렇게 독일은 분단되지 않았고, 비록 패전 후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이라는 굴욕을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광대한 영토와 인구[41] 그리고 제국 때 양성한 과학, 기술, 인재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흥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착취와 강매로 이루어지는 경제 구조를 가져 국력 향상에 한계가 있는 협상국에 비해,[42]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내수와 기술 발전 위주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20년 뒤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독일 입장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협상국의 조건은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증오를 가져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4.3. 총평

삼니움 전쟁 당시였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다투던 삼니움은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가두어 수많은 로마군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때 로마군 포로의 처우를 놓고 삼니움 부족장이 고민을 하던 와중에 부족장의 아버지가 "포로를 모두 처형해서 로마의 힘을 약하게 만들든지, 깔끔하게 모두 풀어줘서 로마로부터 호의를 얻고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는) 약소 세력들에게 강력함과 관대함을 보여주던지." 확실히 정할 것을 조언했으나, 족장은 조언을 따르지 않고 모욕은 모욕대로 주고 포로는 풀어주는 방식을 택했다.[43] 덕분에 로마는 전력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었고, 모욕을 당하고 풀려난 로마 군단병들은 한층 더 복수심에 타올라 죽자 살자 싸웠으며 삼니움은 멸망하게 되었다.

결국 앞서 언급된 키신저의 평가와 같이 독일을 끝장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독일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조약으로 남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야기한 것이다.

이런 엉성한 처리에는 주요 협상국 3국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최대 피해자[44]로, 전 국민이 대독 강경론을 펼쳤고,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은 그 자신도 독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을 뿐더러 프랑스 전체의 압박으로 인해 독일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전쟁 당시 독일과 싸우며 받은 막대한 피해와 그를 바탕으로 얻은 협상의 주도권을 고려해볼 때, 케인스가 주장한 대독 유화론의 가장 큰 걸림돌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배상금 문제뿐만 아니라 영토 문제에 있어서도 극단적이었는데, 라인 공화국 건립이나 자르 지역 할양 문제를 주장한 것에서 그러했다. 조약 이후 클레망소 수상은 1920년까지 재임하다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너무 많이 양보해 라인 강 일대에 대한 프랑스의 오랜 숙원을 못 이뤘다는 이유로 낙선할 정도로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증오는 극심했다. 즉 프랑스가 저렇게 나가는게 이해는 가는 셈. 그러나 그만큼 성과를 거두어, 알자스-로렌 지역, 토고, 시리아, 레바논, 자르 탄광 지역 15년 소유권, 메소포타미아 지역 석유 50% 등을 얻으며 나름대로 수혜국으로 거듭났다.

반면 영국은 유화론과 강경론의 중간위치였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은 재무장관 출신으로 케인스와 똑같이 독일의 상황과 경제적 여건 등을 거의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으며 배상금 문제 역시 독일이 지금 영프가 주장하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는 케인스의 주장처럼 유화책을 쓰지 못했는데, 로이드 조지 수상이 지난 총선에서 독일에게 배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얻어내겠다는 공약을 써서 역대 최다 표를 얻었다는 정치적인 문제와 프랑스 등의 압박 때문이었다. 군사적 문제에 있어도 강경했다. 프랑스와 함께 주도적으로 독일의 군축에 앞장섰으며 무난하게 합의를 이끌었다.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유화적이었다. 프랑스의 무리한 요구를 막고 라인강 점령 기한을 축소하며 독일 측 대표들과 합의를 하려 했다. 그러나 가장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오히려 독일을 끝장내려 했던 프랑스보다도 판단을 잘 내리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이번 조약의 수혜는 나미비아, 탄자니아, 뉴기니 섬 북동부 지역 등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과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 지역 등을 얻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와 프랑스, 영국보다는 독일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는 똑같이 강경했다. 침략국들이 불순한 의도로 전쟁을 시도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또한 그들 스스로 주장한 이상-국제연맹 14개 원칙들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타협하여 독일 문제를 마무리지으면서 위선적이고 현실에 순응했다는 격렬한 비판에 시달렸다.[45] 다만 전반적인 기조는 매우 유화적인 편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같이 경제적인 이유라기보단 외교적인 이유였다.

이탈리아는 국가의 숙원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왔으나 오를란도 이탈리아 수상이 영어를 못해서 회의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미국에게 물먹으면서 회의에서 실패를 거두었다. 마지막에 승전국의 모든 합의를 엎으려 한 것을 제외하면 독일에 관해서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5.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

독일은 결코 협상국이 요구한 배상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라인란트 비무장화, 독일 대양함대 요구, 메멜과 폴란드 회랑의 동부영토 상실은 독일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베르사유 조약과 1차 세계 대전 휴전 협정에 서명한 독일 대표단은 11월의 배반자들이라는 멸칭이 붙으며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었다. 또한 전후 혼란을 틈타 독일의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단이 1월 봉기를 일으키며 사회를 더더욱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대한 배상금을 갚으려 했지만 경제는 날로 악화되어 1922년 말 디폴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분노한 벨기에와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최대 공업지대 루르 지방을 강제 점령하였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이런 행동은 독일인들을 더더욱 자극해 급격히 극좌우 세력들과 배후중상설이 자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독일 내부 공산당 세력과 극우 세력이 자라기 시작하자 독일 내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이 나서서 대규모 재건 계획을 시행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달랬고, 후에 캘빈 쿨리지 정권에 이르러서는 ' 도스 안(Dawes Plan)'이라는 것을 내놓아 독일의 배상금을 경감시켜주기도 하였다. 미국이 어느 정도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1921년 4월 27일 런던에서 배상금을 66억 파운드(= 330억 달러 = 1,320억 마르크)[46][47]로 확정하고, 1924년 도스 안과 1929년 ' 영 안(Young Plan)'을 통해 조정되었다.[48]

그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빌려주고 순차적으로 첫해 10억 마르크에서 시작해 매해 20억 ~ 25억 마르크(= 4.73억 달러) 전후한 금액을 59년간 갚도록 책정했다(이렇게 하면 1,210억 마르크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제적으로는 매해 10억 마르크대를 납부했고 이를 제안한 찰스 도스(Charles Dawes)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즈음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제연맹에 복귀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일에 적대적이었던 프랑스의 반대[49]로 매번 절충안들이 적시를 놓치거나 배상금 조정폭이 대폭 줄어들곤 했다. 결국 외화유출이 지속되고, 독일 중앙은행이 이에 화폐 찍어내기로 대응하면서 아직 초인플레이션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급격한 폭의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었다.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국민 경제 불안정 →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며 배후중상설과 반프랑스 감정이 확산되는 등 여러모로 사회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는데 결정타가 터졌다.

6. 조약의 파기

1920년대 중반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나마 미국이 제시한 도스 안덕에 루르도 돌려받고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시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된 독일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집권층의 오판에 따른 적절한 연정(+ 나치당의 힘을 총동원한 각지에서의 강경한 시위와 선거 유세)을 통해 기어이 집권에 성공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은 무효이니 독일은 배상금을 낼 필요가 없으며 재무장을 하겠다는 주장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결국 1935년 3월 16일 독일이 징병제 도입과 공군 확장을 골자로 한 재군비 선언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으로 파기하고 영국이 이를 공인함으로써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삽질로 기록되는 영국-독일 해군조약[50][51]과 폴란드를 주적으로 가정한 육군 기동훈련에도 영국 대사와 무관들이 참관했으며 이는 동맹국인 프랑스를 경악시켰다. 뒤이어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국방군을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에 진주하며 베르사유 조약을 완전히 끝장내버린다. 이때 영국은 아예 프랑스에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에 대해 무력 대응과 제재를 가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전했으며 폴란드는 1934년 3월 2일부 발효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라인란트는 본래 독일 땅이었다며 1921년 프랑스를 돕기로 규정한 방위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가장 큰 관계자였던 프랑스는 동맹국들의 통수와 독일 국방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강경 대응을 포기해버리고 만다.[52]

한편, 히틀러의 의견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동안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배상금을 깎아주는 유화책으로 진정시키려 했지만[53] 이 시점에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한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경제 파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산화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54] 영국과 미국이 우려한 독일의 공산화는 면하긴 했지만 연합국이 공산당을 경계하는 사이 그들의 시선을 피해 더 무서운 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독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걱정한 공산화보다 더 끔찍한 나치즘으로 폭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연합국이 이들의 위험성을 깨달았을때는 이런 유화책을 실시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관대해야 할 때는 가혹하고, 강경해야 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20년에 걸친 어리석은 외교로 마침내 결국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다.[55][56]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독일 국방군이 접수했고, 그 후 행방은 묘연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제 1차 콩피에뉴 휴전 협정을 작성했던 포슈 장군의 객차도 이때 나치 독일로 끌려가서 전쟁 말미에 박살이 나 버렸다. 박물관에 승전 기념으로 전시되어 있던 그 객차를 휴전 협정 조인을 기념하여 조성된 휴전의 숲으로 끌고 가 똑같이 프랑스의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57]

결국 어떻게 보면 2차 대전 발발을 위한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된 셈이 되었다. 만약 온건파 말대로 과도한 배상금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나치당 같은 급진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거고, 강경파 말대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작살내놓았다면 나치가 정권을 잡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테지만,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탓에 독일 민중의 반발심은 있는 대로 이끌어내면서도 전쟁 수행 능력까지 억제하지 못한 최악의 자충수가 되어 유럽은 다시금 6년간의 극심한 병화의 길에 빠져들게 되었다.

7. 잔재들

하지만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또 패배했다. 승리한 연합국은 향후 세계 질서를 감안해서 베르사유 조약처럼 아주 가혹한 규정은 두지 않았으나[58] 독일을 재기 불능에 빠뜨릴 종전 조약을 맺기로 하고, 이 조약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된 사항 중 일부를 약간 적용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관계로 금전 문제와 영토 분할 문제를 뺀 나머지 조항에 대해서는 서로 서독 동독을 대규모 침공에 대한 방패막이 겸 우군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실상 폐기했으며, 단지 배상금 항목만 상징적으로 남게 되었고, 또한 전후에 미국이 나서서 마셜 계획으로 유럽[59]의 경제 재건에 막대한 원조를 해줬기 때문에 승전국들은 달러화의 영향권에 강하게 편입되면서 배상금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문제가 된 배상금의 경우, 2010년 10월 3일 독일 정부는 1차 대전의 전쟁 배상금을 유로로 전부 갚았다고 발표했다. 참조기사 무려 92년 만이었다. 사실 배상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전후 50년대에 배상금은 모두 채권으로 냈고, 일부 채권의 만료 시점을 통일 이후로 잡은 것이고 또 사실 냉전 문제로 이미 잊혀진지 오래인 문제라 굳이 갚지 않아도 되는 배상금이었다. 프랑스, 영국, 미국 그 어떤 나라도 독일은 이제 자신들의 든든한 우방으로서 함께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이지 옛 적국 독일 제국이 아니라고 이미 생각했기에 독촉하지도 않았다.

8. 기타

9.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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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 3월 7일 월요일까지 우리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시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추신: 우리가 전쟁에 이겼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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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먹어야 할걸?" 4대 열강제 평화조"". 가격은 한 알에 수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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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대형 대포를 겨누며) 당장 그 뿔달린 모자를 벗지 못할까! 우리가 비무장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는 거냐!

10. 같이 보기



[1] 등 뒤의 모습만 보이는 독일 측 서명자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식민지 장관이던 독일 중앙당 소속 요하네스 벨이다. 이외에 당시 외무장관이자 훗날 총리를 역임하는 헤르만 뮐러도 독일 대표로 조약문에 서명했다. [2] 단, 독일 제재 안건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다루어 지지 않았다. [3] 최소 한도로 필요한 군사력만 보유 가능, 프랑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라인란트 지역에 대한 대규모 비무장지대 형성 요구, 독가스, 항공기 등의 신무기 개발 금지 등. [4]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불복종하려 했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 빌헬름 그뢰너 장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에게 '동부 국경은 방어하고 폴란드는 쫓아낼 수 있지만 서부 전선에서 압도적인 열세'라고 하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5] 이 때도 영토 손실이 컸지만, 27년 뒤 더 많은 영토를 상실한다. [6]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은 357,592㎢ 로 독일 제국의 66%, 바이마르 공화국의 76% 수준이다. [7] 베르사유 조약의 가장 큰 논란이자 독일이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긴 항목. 애초에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이 시작한 전쟁도 아닌데 독일의 수뇌부에게만 책임을 묻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협상국도 내심 이를 인정하긴 했는지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킨 세르비아 전쟁배상금 요구를 동맹국이 거부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8]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네덜란드에서 인도를 거부했다. 나머지 인사들의 처벌도 흐지부지 되었다. [9] 한마디로 독일이 가진 식민지를 승전국들에게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 제국의 식민지는 승전국들이 거의 다 가져갔다. 다만 알자스-로렌 지방과 달리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은 독일 입장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준이어서 딱히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알자스-로렌 지역은 다시 뺏어갔지만 독일 제국 시절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탄자니아, 나미비아, 뉴기니 동북부 지역까지 갈 수 있는 여력이 없기도 했겠지만, 나치 독일에서 식민지에 미련이 남아있었으면 레벤스라움처럼 '옛 식민지들을 되찾자!'라고 말할 텐데 그런 말조차도 안한 걸 보면 그냥 옛 식민지에 대해서 관심없는 게 맞다. [10] 여기에는 포즈난 봉기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1]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문서 참조 [12] 단치히 주민 80%는 독일계라 차마 폴란드에 넘기지 못하고 국제연맹 자유도시라는 명목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는 것으로 했지만 그래도 철도와 우편은 폴란드 쪽에 맡겼고 또 원래 폴란드 분할 전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실상 폴란드 영토 취급이 되었다. [13] 이후 1923년 루르 점령을 틈타 리투아니아가 기습적으로 메멜을 점령해 합병했다. 그랬다가 1939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게 메멜을 반환하라고 최후통첩을 날린 후 다시 메멜을 합병하지만, 1945년에 독일이 소련에 밀려 동프로이센을 내어주고 후퇴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에 넘겨 준다. 물론 이때의 리투아니아는 독립국이 아니라 소련에 강제병합되어 그 구성국 리투아니아 SSR이 되어 있어서 실제로 이곳을 집어 삼킨 건 소련이었지만, 그래도 이때 땅 주인 명의를 리투아니아 SSR로 해 놓은 덕택에 훗날 노래 혁명으로 소련에게서 독립할 때 이 지역을 영토로 할 수 있었다. [14] 독일 경제의 핵심 공업지대인 라인 강 동쪽 지류 루르 지방이 포함된다. [15] 달러로는 330억 달러. [16] 전비조달을 위해 참전국들은 자국의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그런 상황에서 패전국인 독일의 화폐 가치 저하는 안 봐도 비디오였고(승전국은 1914년 기준 30~50% 절하, 패전국은 70%까지 가치가 떨어졌다.) 애초에 1919년 당시 금 기준으로 못박아놨다. [17] 현물 배상도 가능해서 주로 독일에서 많이 나는 석탄으로 배상했다. 석탄 외에도 목재, 각종 금속 광석, 철도용 침목, 전신주, 가축 등으로도 배상했다. [18] 이 조약으로 아스피린, 질소 비료 등 독일 제국과 독일인 명의의 기술 특허를 상당수 잃게 되었다. [19] 이렇게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독일군(당시 국가방위군)은 남은 10만명을 부사관 장교 위주로 해서 정예군으로 육성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정예군으로 군복무한 군인들은 훗날 독일 국방군에서 간부들로 활약한다. [20] 명목상으로는 폐지했지만 사관학교는 교관이 직접 생도를 방문하여 교육하는 방법으로, 참모본부는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다른 행정부서로 쪼개서 위장전입시키는 편법으로 존속하면서 모두 회피한다. [21] 이 조항도 소비에트 연방과 비밀 협정을 맺어 농업용 트랙터 등의 이름으로 전차를 개발하고, 기관단총도 전후 폭동등을 우려하여 소요사태 발생시 그것들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용으로 보유하면서 전부 회피한다. 또한 총열제한도 있었는데, 이건 기병총으로 등록해서 모두 회피하고, 또 대공포등 여러 무기들은 1918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금지기술은 아얘 해외에 유령회사를 세워서 대놓고 회피한다. 무엇보다 중기관총을 개발하지 못하니까 편법으로 경기 관총을 만들었다. 실제로도 중기관총보다 경기관총이 다음에 일어날 전쟁에서 더 효과적인 무기였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협상국이 의도했던 무기 개발 금지로 독일군의 힘을 더 약하게 만들자라는 이 방침은 편법으로 전부 무효화 되거나 더 치명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22] 소련이 왜 독일의 전차 개발에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1차 대전때 러시아 제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먼저 탈주한 전적 + 공산주의 국가였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소련도 기갑 부대 창설을 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전차 제작 기술과 그걸 대규모로 운영할 군사적 능력이 되지 않아 서로 도운 것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전차를 못만드는 독일과 전차를 만들어도 되지만 기술이 없는 소련이 서로의 이득에 따라서 서로 도운 것. 독일은 소련 땅에서 지원받아 전차를 만들고 훈련 시켰으며 소련은 그것을 보고 배웠다. [23] 그러나 로켓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다. 독일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24] 또한 전투기개발이 금지된 회사들은, 경주용 비행기를 개발해 사실상 비행기를 만들고, 맘만 먹으면 전투기개발도 가능했다. 그러나 1935년 히틀러가 아예 파기를 선언하면서, 아애 대놓고 연구했다... [25] 하지만 이 조약은 나치 독일 오스트리아 합병하면서 깨지고, 다음 해에는 뮌헨 협정으로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도 독일에 합병되면서 완전히 유명무실해졌다. [26] 실제로도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금은 미국의 투자로 가능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이렇게 준 미국발 단기 자금이 빠져나가자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치당이 득세한다. 모두 케인스의 예측대로였다. [27] 하지만 영국은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독일 함선을 두고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반대로 청년학파 이후 대형함이 거의 없어 독일의 함선을 탐내던 프랑스는 이 자침에 땅을 쳤다. [28]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했었고, 이후 현대 외교 이론의 고전이 된 '외교론'을 저술하였다. [29] 이 말은 나중에 국무장관 시절에 평가한 것이다. [30]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순권(1886~1941)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31]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베르사유 조약의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준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32]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우드로 윌슨은 이상주의자로 유명하지만 그가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미국 입장에서는 다소 합리적이고 유리한 이상이지만 영국에겐 굉장히 불리한 사상으로, 영국이 그냥 심기를 건드려져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대영제국 존속에 매우 중요한 요소여서 그런 것이고, 윌슨이 그냥 생각없는 이상주의자라서 주장한 것은 아니다. 색부호 전쟁 계획을 보면 알겠지만, 미국이 상정한 각 국가별 전쟁계획 중 가장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공들인 계획은 다름 아닌 영국을 겨냥한 적색계획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33] 실제 미국 역시 제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에게 배상금을 부과하자는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에 일정부분 동의했다. [34] ISBN 978-0-19-913636-0 [35] 그나마 1920년에 유고슬라비아와의 라팔로 조약으로 자다르를 받긴 했다. [36] 물론 미국이 받은 피해와 영국이 받은 피해는 프랑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기는 한 것도 어느 정도 이 의견이 나오는데에 이유가 되기는 하였다. [37] 게다가 당시 독일은 사실상 무장해제된 상태여서 국제 여론은 프랑스와 벨기에에 더 나쁘게 돌아갔다. [3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독일인이 24% 헝가리인이 20% 체코인이 13% 폴란드인이 10% 우크라이나인이 8% 등. [39] 오스만 제국 - 튀르크인(쿠르드 포함)는 45% 아랍인이 35% 아르메니아계 기독교인이 17% 나머지 유대인 등. [40] 실제로 당시의 독일 제국 소르브인과 같은 소수민족이 있긴 했으나 주류민족인 독일인들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독일은 옛날부터 단일민족국가라는 자부심 때문에 민족주의가 유독 강한 지역이었고, 오스트리아 합병 때도 둘 다 같은 독일계 민족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여론이 양국간 합병을 적극 지지했다. 그래서 협상국도 독일을 쪼개기는 커녕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을 걱정해야 했다. [41] 1919년 기준 6,000만명으로 러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42]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근대화 직후와 20세기의 국력 차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본토 성장이 정체된 상황이었다. 2차대전 직전 영국의 GDP는 2,600억달러. 프랑스는 1,800억달러에 불과한 반면, 독일은 프랑스의 2배. 영국의 1.3배인 3,500억달러에 달하는 GDP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국과 프랑스는 초기 근대화와 식민지 확보를 통해 뽑아낸 국력으로 계속 우려먹는다고 봐도 될 정도. 반면 독일은 당장의 식민지 확보보다는 본토의 국력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다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지속적으로 국력을 성장시켜왔고, 그나마 있는 식민지를 협상국이 몽땅 빼앗은 결과 오히려 식민지에 들어갈 비용을 모조리 본국 경제 재건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피를 봤음에도 20년 만에 다시 세계대전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할 정도로 독일의 국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43] 멍에 아래를 통과하는 관례로 허리를 굽혀 멍에를 통과하는 동안 양 옆에 도열한 삼니움족 병사들은 로마군에게 상당한 모욕을 던졌다. [44] 당시 프랑스군 140만명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45] 제2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은 미국보다는 프랑스와 영국의 지분(기여도)가 더 높은 것도 한몫했다. [46] 이 금액은 1921년 초의 전쟁 배상(10억 마르크 + 수출액의 1/4인 3억 마르크 = 13억 마르크)으로 빚어진 인플레이션에 의해 달러 - 마르크화 환율이 급등하던 시절의 것이다. 환율은 전쟁 전 1달러당 4마르크 대, 전쟁 중 9마르크이던 게 전후 47마르크를 거쳐 1921년 연말에는 1달러당 330 마르크로 올라버렸고, 기어이 1922년 말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달러당 8,000마르크가 되었다. 그래서 골트마르크로 환산하면 2,690억 마르크가 되고, 대략 10만 톤의 순금과 맞먹게 된다. [47] 1921년의 1달러는 2024년 가치로 17.52달러이므로 확정된 배상금은 2024년 가치로 무려 5606억 달러, 한화로 약 672조 72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2024년 IMF 통계 기준 한국 GDP(약 1조 7610억 달러)의 32%에 육박하고 독일 GDP(약 4조 5911억 달러)의 12%를 넘기는 수준이며, GDP 순위 세계 27위 태국의 총 GDP(약 5489억 달러)보다도 크다. 당연히 거의 100년 전인 1925년 기준으로는 독일 GNP의 1.23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마셜 플랜에 든 돈이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1870억 달러(약 224조 4000억 원)이며, 동일본 대지진 피해액이 3600억 달러,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누적 피해액이 7000억 달러다. [48] 총액으론 도스 안보다 13% 탕감되고 59년 할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59년 동안 빚 갚으면서 노예질 하라고?"라는 반응으로 안 그래도 인기 없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나노 단위로 까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이걸 두고두고 이용해먹었다. [49] 전술할 총평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무조건 프랑스의 탓만 하기는 어렵다. 수십 년 간 이어진 독일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프랑스 내부의 반독 감정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더욱이 끔찍한 참호전으로 반독감정이 극대화된 젊은 세대는 1920~1930년대로 넘어가면 3040세대, 즉 핵심 유권자이자 오피니언 리더에 해당하는 연배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1차대전 서부 전선 대다수 전투는 프랑스 땅에서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치인들이 함부로 대독 유화책을 주장했다가는 목이 남아나기 어려웠다. [50] 1935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 전력 비율을 100:35로 승인한 것을 외교적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개전 전까지 35는커녕 20도 못 채웠다. 아돌프 히틀러의 허세에 놀아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에리히 레더는 Z계획을 통해 해군력 확대를 간절히 원했다. 1939년 9월 개전 직후 레더는 이제 독일 해군은 멋있게 죽는일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51] 이로 인해 무솔리니는 영국이 스트레사 동맹을 파기했다고 여기고 히틀러와 연합한다. [52] 본래 히틀러는 만약 프랑스가 강경 대응을 하면 다시 돌아온다 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53] 미국 상원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로잔 회의에서는 200억 마르크인 48억 달러까지 깎아주려고 했다. [54] 적어도 1차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공산화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의 1월 봉기로 한때 공산 정부가 세워지기도 했고 그 이후 공산당이 매 선거마다 10%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55] 프랑스는 자신들이 한 행동에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마지노 선을 구축하지만, 정작 독일군은 마지노선과 벨기에 방어선 사이의 아르덴 숲으로 마지노선을 우회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립국이었던 베네룩스 3국으로 강력한 조공을 보내 프랑스군을 낚은 건 덤 [56] 사실 프랑스는 벨기에 방면에도 마지노 선을 그으려 했지만 벨기에가 반대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벨기에에 요새를 지어주기로 했는데 그것이 에반-에마엘 요새다. 문제는 그 요새를 지은 회사 중에 하필 독일 회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요새의 내부 구조는 독일군에 모두 제공되었고, 결국 전투 첫날 공수부대 85명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점령당한다. 기록된 점령 시간은 30시간이지만, 사실상 공수부대의 성형작약탄에 의해 포탑과 벙커, 출구가 파괴된 요새에 수비 병력이 갇혀 있었던 것에 가깝다. [57] 콩피에뉴 휴전의 숲에는 독일의 국가 수리를 칼로 찌른 알자스 로렌 기념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포슈의 동상이 있었으니 독일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을 프랑스에게 가한 샘이다. [58]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완전히 미국과 소련의 지분이 압도적이다. 프랑스는 중간에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북아프리카와 영국에서 항전했던지라 지분이 별로 없었고, 영국은 자국 본토는 사수했지만 나치 독일을 상대로 고전을 해 전후 제국을 해체할 정도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후 처리는 미국과 소련에게 달린 것이다. [59]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 파시즘 국가 스페인국, 소련의 압박 때문에 알아서 거부한 핀란드를 제외하고 웬만한 유럽 국가들에 전부 대규모 원조를 해줬다. [60] 정확히는 1파운드는 순금 113 그레인 (1그레인은 0.06479g이다), 1달러는 순도 90% 금으로 25.8 그레인이었다. [61] https://www.archives.go.jp/ayumi/kobetsu/t08_1919_01.html [62] 이때는 반대로 나치 독일과 비슷한 위치(영국을 뺸 대부분의 유럽 점령, 영국 점령 실패, 러시아 원정 갔다가 깨지고 와서 멸망했다.) 있었던 국가가 프랑스 제국이었고, 반대로 강대국이지만 상대편보다 국력이 딸렸던 국가가 지금의 독일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63] 다만 루마니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러시아령 베사라비아를 합병하는 것을 인정했고 전쟁 배상금 역시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루마니아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철저히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에 예속시키고, 말 그대로 루마니아를 완전히 쥐어짜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64] 파일:kang19e137.png [65] 하지만 프랑스에서 간신히 주력군을 구출해낸 영국은 진심으로 독일이 프랑스 함대를 접수하여 영국을 침공할까봐 걱정한 나머지 프랑스 함대를 공격한다. 당연히 비시 프랑스는 극대노했고 영국과 단교한다. 훗날 독일이 바렌츠해 해전과 비스마르크 추격전 등으로 완전히 주력함이 박살나자 프랑스 함대를 노렸지만 프랑스 해군은 협정 위반에 자침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