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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0:10:11

에반-에마엘 요새


1. 개요2. 시초3. 장점
3.1. 탁월한 위치선정3.2. 튼튼한 방어력3.3. 충실한 무장
4. 단점
4.1. 과도한 기대4.2. 네덜란드로부터 나오는 요새의 힘4.3. 원거리 및 자유선회 화력의 부족4.4. 상부공격시 무대책4.5. 전투 준비가 안됨
5. 함락6. 동료 요새들7. 벨기에의 방어전략 실패8. 전후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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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반-에마엘 요새(Fort Eben-Emael / Fort d'Ében-Émael[1])는 1932년에서 1935년까지 벨기에 독일국과의 국경 지역에 만든 요새이다. 작은 마지노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프랑스 침공 작전 초기에 독일군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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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초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본래 독일 - 프랑스 국경뿐만 아니라 프랑스 - 벨기에 국경 사이에도 지어질 계획이었다. 이는 만일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침공하는 상황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지난 번 전쟁처럼 프랑스 북부의 영토가 함락당해서 여러가지 문제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군은 마지노 선 안에서 버티면서 프랑스 영토는 대부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벨기에 - 독일 국경지역 중 독일 측 지역인 라인란트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만일 독일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더라도 벨기에가 대응할 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인해 나치 독일은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 국방군이 해당 지역에 다시 진주했으며, 벨기에의 코 앞에는 다시 독일군이 있게 되었다. 그 동안 프랑스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자 벨기에는 중립국을 다시 선언하면서 프랑스와의 군사적 협력 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렸다. 하지만 1차대전 때 경험에서 보듯이 중립국 선언 따위는 나치 독일이 무시하면 끝이고 그러면 벨기에는 침략으로 인하여 멸망하는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벨기에는 양다리를 걸치기로 결심했다. 일단 중립국 선언은 걸어놓은 채로 프랑스에게 어차피 재정 부족으로 프랑스 - 벨기에 국경에 마지노선을 추가 건설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서 우리가 뚫리면 골치가 아플 것이며 프랑스 북부 영토가 다시 함락될 것이라고 외교적 교섭을 벌였다. 결국 벨기에의 국운을 건 요구인 마지노선 추가 연장 거부건은 결국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벨기에가 중립국 선언을 다시 번복하고 애초부터 벨기에 - 독일 국경지역에 프랑스군을 미리 대량으로 주둔시켜서 확실하게 독일군을 막아내야 하는데 프랑스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던 벨기에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전쟁이 더 빨리 터진다고 이런 요구를 무시해버렸다. 독일군이 쳐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중립국 선언은 파기되니까 그 때가서 프랑스군이 벨기에 영토로 들어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속으로 전진하는 독일군을 상대로 프랑스군이 벨기에 영토 내에서 방어선을 만들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고 그럴거면 벨기에야 망하건 말건 간에 그냥 프랑스군이 자기네 영토 안에서 방어선을 든든히 하는게 더 현실적이라는 상황이 발생한다. 벨기에가 한 어설픈 양다리 외교책이 가진 모순이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벨기에는 프랑스군이 벨기에 영토에 확실한 방어선을 만들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벨기에 - 독일 국경에서 독일군을 1차적으로 막아낼 목적으로 에반-에마엘 요새를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도 벨기에를 별로 신뢰하지는 않아서 마지노 선 서쪽 끝에서 도버 해협까지 벙커 지뢰 철조망 참호를 혼합한 야전용 임시 방어선을 프랑스 국경 근처에 일렬로 깔아놓게 된다.

3.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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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10일 시점의 에반-에마엘 요새 배치도

작은 마지노 선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요새 자체는 튼튼했다. 그래서 벨기에 정부는 에반-에마엘 요새가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더라도 최소 1일은 버티리라고 예상했다.

3.1. 탁월한 위치선정

요새의 위치는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생각을 많이 하고 요충지에 제대로 설치하였다.

전략적으로는 벨기에 - 독일의 좁은 국경선 지역이 넓어지는 위치의 북쪽 경계지역이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유리병에서 병목을 통과해서 병이 넓어지는 지점이라고 보면 된다. 밀집한 침략군이 이제 산개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포진해서 적에게 포탄을 날려주기 딱 좋은 지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중립국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지역과 엄청나게 가깝게 붙어있다. 마스트리흐트 지역은 네덜란드 본토에서 남쪽으로 반도처럼 돌출한 돌출부이며, 바로 이 돌출부를 통과하거나 점령하지 못하기 때문에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세운 슐리펜 계획이 교통망 부족과 통로 협소로 초장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이 아예 막나가는 선택을 해서 네덜란드까지 침공하는 바람에 향후에는 해외에서 긴급물자를 제3국을 통해서 수입하는 길을 아예 막는다는 답없는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마스트리흐트 돌출부 때문에 에반-에마엘 요새를 동쪽과 북쪽에서 공격하는 길이 막혀버리고 공성포를 이용한 포격도 상당히 제한을 받게 되며 실수라도 조금 하는 순간 네덜란드 영토에 포탄이 떨어지는 막장상황이 만들어지므로 외교적 문제가 매우 커지게 된다.

이미 에반-에마엘 요새가 위치한 곳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리에주를 감싸는 요새를 건설할 때의 요새 설계자인 앙리 알렉시스 브리알몽(Henri-Alexis Brialmont) 독일 제국군의 도하작전과 이동 및 수송작전을 방해할 거점으로 별도의 요새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정한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략적 위치가 좋으므로 적군이 요새를 완전히 근접포위하기도 곤란할 뿐더러 다른 벨기에 영토와 분리당해서 원거리 포위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인접한 네덜란드 영토를 통해서 밀수도 가능하고 알베르 운하를 통해서 보급도 가능해지는 등 방어측에 유리한 점이 많다.

전술적으로도 언덕지형을 선택하고 알베르 운하로 보호받는 곳이었다. 오각형의 화살촉같이 생긴 요새 형태는 동쪽은 산을 깎아서 만든 절벽 아래로 흐르는 알베르 운하와 앞서 말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 때문에 접근불가 상태고 북쪽은 가장 면적이 좁고 높이가 높으며 역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 때문에 거기까지 우회하기 힘들어서 역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

그나마 서쪽이 조금 낫긴 한데 이쪽도 방어선 앞에 해자를 깊이 파놓았고 북쪽에서 절반까지는 해자에다가 운하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들인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고도도 높은데다가 애초에 방어선에 접근하기 전에 개천을 하나 더 건너야 하므로 이쪽에서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에반-에마엘 요새로 육상접근을 하려면 남쪽이 유일한 방향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럴 거 같아서 해자, 벙커를 비롯한 방어시설이 가장 밀집해있는 지역인지라 이쪽 루트로 공성을 하면 엄청난 희생만 날 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위치상으로만 본다면 공성전이 매우 곤란한 요새였다.

3.2. 튼튼한 방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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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지하통로에 집결한 수비병력

위치가 절묘한 곳에 있는 요새라도 공성포를 비롯한 대규모 포격을 해서 박살내놓는 전술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에 대비해서 요새의 대부분의 시설은 최소한 40m 이상의 깊이에 지하터널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지상에는 평균 1.5m의 두께를 가진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지고 철판으로 보강된 포탑, 벙커들만 존재했다. 이런 지상 시설물들은 모조리 지하로 통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전투 중에는 밖에 나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포탑과 벙커, 포곽들의 구조물도 전투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 장시간 사격시 발생하는 소음이나 유독가스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짐으로서 장시간 전투시에도 요새 수비병이 쉽게 지치지 않는다. 이런 조치를 한 이유는 1차대전 당시의 리에주 요새 공방전에서 요새 수비병이 요새에 장착된 각종 화기를 사용할 때 환기시설과 방음시설의 부족으로 인해 포연과 유독가스가 요새 내부에 가득차고 소음도 심해서 호흡이 곤란하고 명령의 전달이 어려울 지경이라 제대로 전투하기가 어려웠다는 전훈을 반영한 조치였다.

여기에 더해서 1차대전때 자주 사용된 독가스 공격에 대비해서 제독시설과 환기시설을 확충해놓았으며 환기구도 포격으로는 맞추기조차 어려운 알베르 운하쪽 벼랑에 있으므로 산소가 부족해지는 문제도 없었다.

내부 시설도 충실해서 안에 병원, 막사, 식당, 급수, 통신, 발전시설등이 모두 있으며 모든 거점에 연락망이 갖추어져 있고 탄약고 및 지휘소와의 연결도 충실했다. 요새가 포위당하게 되면 요새 내부에 거주, 생활, 편의시설이 모자라서 요새 수비병이 장기간 버티기가 곤란했다는 1차대전의 전훈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리고 요새 자체가 큰 언덕이므로 지하 시설물의 높이가 지하수층보다 한참 높기 때문에 마지노 선의 일부 구간에서 나타나는 침수, 악취, 누전등의 문제가 없었으며 장기간 버티는 게 이론상 가능했다.

병력도 정원이 1200명으로 벨기에가 생각한 방어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3.3. 충실한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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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에마엘 요새의 벙커형 기관포곽

남북으로 750m, 동서로 600m의 크기에 전체 방어선 길이는 8km 인 요새에 17개의 벙커와 4개의 포곽, 64개의 거점을 가지고 있었다.

해당 거점을 방어하는 무장도 120mm 포 2문, 75mm포 16문, 60mm 대전차포 12문, 36정의 기관총이 있었다. 기관총은 7.62mm급 탄환을 발사하는 FN M30 기관총 11기와 맥심 기관총 24기로 구성된다.

이 정도면 면적에 비해 무장을 많이 갖추어놓은 셈이다. 특히 요새포인 120mm와 75mm는 외부 포격이 가능해서 요새 주변의 교통로를 적군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무기들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탐조등 15기를 요새 상부에 설치해놓았으므로 야간 전투도 가능했다.

4. 단점

하지만 실전에 돌입하자마자 허우대만 멀쩡한 요새가 되어버렸다.

4.1. 과도한 기대

그 당시의 요새는 보통 2가지로 만들어진다. 조금 싸우다가 포기하는 정찰 거점과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제대로 된 방어 거점이다.

여기서 요새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은 후자였다. 정찰 거점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날아갔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방어 거점은 설령 스펙상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적군을 물고 늘어져서 지연이라도 해주는 식으로 밥값을 어느 정도 했다.

문제는 돈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고 정찰 거점쯤 되는 요새에게 방어 거점의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물론 임무에 맞게 강화는 하지만 거기서 거기다. 이런 식의 어쩡쩡한 요새가 사실상 제3의 존재로 다수 존재한다.

불행히도 에반-에마엘 요새도 이런 어쩡쩡한 요새에 들어간다. 목적은 독일군 전면침공 최소 1일 저지지만 그거 하려면 제대로 된 대형 거점급 요새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안되면 에반-에마엘급 요새를 2 - 3개 인접해서 건설함으로서 서로 연계를 하는 방식으로 만들던지 말이다.

애초에 이 문제는 1차대전 극초반인 벨기에 침공시기에 자국인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가 제대로 증명해준 적이 있다. 당대 최강의 요새 소리를 들을 정도의 거점으로 12개의 소형 요새가 중앙 요새와 연계된 대형 요새였고 4만명이 필요했으며 개전시 벨기에군 2만5천명이 주둔했지만 독일군의 침공에 일주일을 버티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때보다 기술력이 높아진 시기에 꼴랑 에반-에마엘 요새만으로 1일 버티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4.2. 네덜란드로부터 나오는 요새의 힘

에반-에마엘 요새의 위치 선정의 상당부분은 네덜란드령 마스트리흐트 돌출부를 믿고 한 것이 크다. 따라서 독일이 네덜란드를 공격하지 않아야 그 방어력이 성립되는데 나치가 그럴 리가 없었다.

슐리펜 계획의 실패 중 상당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지 않은 데 있었고 이미 계획 원안부터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흐트 돌출부 정도는 점령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나치 독일도 군사적으로는 네덜란드를 1차대전 때처럼 놔둘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네덜란드는 벨기에보다도 군사력을 제대로 육성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쓸만한 병력은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있었고 특히 마스트리흐트 돌출부같은 곳은 본토 남동쪽 끝자락인지라 방어가 불가능하다시피해서 일단 침공이 들어오면 후퇴했다가 나중에 탈환하거나 협상으로 되찾아 올 지역으로 선정할 지경이었다.

덤으로 에반-에마엘 요새는 사실상 독립 요새나 마찬가지라서 주변 거점이 없다시피 했고 그나마 있는 거점들도 감시초소나 마찬가지라서 유사시에 포기하고 수비병들은 에반-에마엘 요새 내부로 피난하는 구조였다. 즉 네덜란드 방향의 공격은 전혀 상정하지 않은 채 독일 국경에 홀로 뚝 떨어진 요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독일이 전면침공을 가해오면 에반-에마엘 요새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시달리면서 얼마 버티지 못하게 된다.

4.3. 원거리 및 자유선회 화력의 부족

요새의 각 거점에 설치된 화력은 충실하였으나, 대부분의 화력들이 정해진 위치로만 포구를 돌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위에 나와있는 포구 돌아가는 게 심각하게 제한된 포곽식 벙커같은 게 대다수였다는 이야기다.

이게 뭐가 문제인가 하면 방어선이 돌파되거나 하면 살아남은 거점이 있어도 포구를 그 쪽으로 못돌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떤 방어선을 담당하는 벙커가 하나 날아가기라도 하면 그 쪽은 방어화력이 없는 사각지대가 되어 버린다.

이걸 보충하려면 포구가 자유롭게 돌아가는 화력이 필요한데 그건 요새 주포인 120mm 2문 밖에 없고 그나마도 원거리 사격에 특화된 것이라 근거리 사격에는 부적합하다. 요새에 육박전이라도 제대로 걸리는 순간 매우 힘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거리 화력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120mm 2문이 진정한 화력의 전부고 선회반경이 크게 제한된 것까지 따지면 75mm 몇 문이 추가되는데 이거 다 합해봐야 독일군이 지나가는 통로를 얼마나 막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적이 공성전을 걸어올 경우 이들 화력들도 요새로 몰려오는 적군에게 포격하느라고 바빠서 교통로 방해같은 것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에반-에마엘 요새의 주목적인 독일군 진격 방해는 못하게 되고 잘 해봐야 전략적으로는 별 쓸모 없는 개별적인 요새 방어전만 수행하게 된다.

4.4. 상부공격시 무대책

그래도 요새에 대한 지상공격은 최소한 그 쪽 방향을 바라보는 벙커나 포탑이라도 먼저 박살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게 쉽게 함락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리 위. 즉 하늘쪽 방어가 문제였다. 후술하겠지만 공수부대라도 낙하해서 요새 머리 위로 들어오는 순간 답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낙하시 대공사격으로 잠깐 방해하는 것 외에는 타격을 입힐 방법이 별로 없게 될 뿐더러 공수부대가 요새 구조물인 벙커나 포탑의 사각에 붙어있게 되면 기관총 몇 정 외에는 그걸 떼어낼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발사한 총알도 엄폐물 때문에 적에게 맞지도 않는다.

애초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대로 된 요새들에는 구포 박격포를 설치해서 공중으로 포탄을 발사해서 요새 머리 위에서 작렬시킴으로서 치명적인 파편세례를 요새 구조물에 달라붙은 적군을 상대로 날리게 되는데 에반-에마엘 요새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에 요새 밖으로 보병을 내보냄으로서 요새 구조물에 달라붙은 적군을 제거할 준비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애초에 요새 머리 위로 나가는 통로도 원래 비상구에 가까워서 엄청나게 한정되어 있었고 유사시에 대규모로 병력을 보낼만큼 넓지도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미 전간기때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 머리 위에 철조망이나 지뢰도 설치 안해놓았다. 그래서 공수부대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4.5. 전투 준비가 안됨

요새 수비병 정원은 1200명이었으나 이들 중 200명은 요새 유지에 필요한 군의관, 기술자, 조리병 등으로 구성된 비전투인원이고 나머지 1000명은 2개조로 나뉘어서 1개조는 요새 안에서 숙박하고 다른 1개 조는 5 - 6km 떨어진 마을에서 숙박하며 1주일마다 교대하므로 실제 전투인원은 500명에 불과하였다.

그래도 훈련이라도 제대로 되었다면 다행이겠는데 일부 장교와 부사관을 제외하면 징집된 예비군에 불과하였으며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인원 전원이 포병으로 간주되었기에 적 보병과의 근접전투에 필요한 기본적인 보병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개전 직전에 벨기에가 전쟁 터진다는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체제로 전환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실제 전쟁에 돌입하자 요새 인원은 65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것도 6km 떨어진 곳에서 다급하게 230명을 추가로 요새에 충원한 결과였다.

5. 함락

파일:40BEbenEmael3.jpg
1940년 5월 10일 에반-에마엘 요새 공략전

이후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고, 1940년 5월 10일 새벽 4시경에 독일 공수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약 30여시간 후 11일 정오경에 점령되었다. 그것도 단 85명만이 강하해서 점령했다. 반면 방어병력은 650명이다.

요새 남쪽에 5개소의 대공기관총 진지가 있었으나 단 한 기의 DFS 230 글라이더도 격추하지 못하고 제일 첫번째로 점령당했다.

게다가 완전점령까지 걸린 시간도 사실 허수였다. 공수부대가 포탑과 벙커를 성형작약탄으로 박살내는 순간부터는 요새는 사실상 함락된 상태였고 독일군 본대가 와서 포로가 될 때까지 요새 수비군이 요새 내부에 갇혀있었던 것에 가깝다.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목적은 하나도 달성 못한 것이다.

독일 공수부대의 본격적인 활약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 국방군은 에반-에마엘 요새를 비롯한 북부전선을 프랑스 침공의 단순한 조공이자 양공 (Feint)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1940년 5월 서부전역 당시 독일군의 진짜 주공은 중부전선의 룩셈부르크-아르덴 숲-스당을 잇는 축선을 따라 계획되었다. 독일 공수부대의 에반-에마엘 강습 역시 연합군이 독일군의 주공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준비된 치밀한 기만책 중 하나였다.

6. 동료 요새들

벨기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방어력 향상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반-에마엘 요새가 건설되던 1930년대에 리에주 시가지 주변의 구식 요새 8개소를 복원하고 에반-에마엘 요새를 포함한 4개의 현대식 요새를 건설하긴 했다. 리에주 시가지 서쪽의 구식 요새 4개소는 1차대전 당시에 완전히 파괴되어 복구가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리에주라는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는지라 에반-에마엘 요새가 리에주의 북북동쪽에 설치된 것을 제외하면 모조리 리에주의 동쪽에 설치되는 바람에 유사시에 독일군의 전면공세를 얻어맞기 딱 좋았고 서로간의 거리도 상당히 떨어진데다가 북쪽의 에반-에마엘 요새와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진지라 서로 연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덤으로 지형적인 방어요소까지 크게 모자랐다. 그래서 그나마 공략에 독일 공수부대라도 투입되는 바람에 이름이라도 알려진 에반-에마엘 요새와는 달리 독일군의 정공법에 당해서 함락되면서 제대로 이름도 알리지 못하고 끝났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리에주 시가지의 동쪽에 위치한 3개소의 신형 요새는 남쪽부터 탕크레몽 요새(Fort Tancrémont), 바티스 요새(Fort Battice), 도뱅 노이프샤토 요새(Fort Aubin-Neufchâteau)다. 수네 르무상 요새(Fort Sougné-Remouchamps)도 계획은 잡았으나 시간과 자금과 인력부족으로 간단하게 그려진 설계도로만 남았다.

이들 요새들은 바티스 요새만 120mm 요새포를 보유하고 나머지는 75mm 요새포만 보유하므로 바티스 요새만 다른 요새들에게 지원사격이 가능한데다가 이들 중 어떤 요새도 에반-에마엘 요새에 지원사격을 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에반-에마엘 요새는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형조건에서도 에반-에마엘 요새와는 달리 지하에 매설되고 포탑과 포곽만 노출된 요새라는 것 빼고는 유리한 점이 전혀 없었으며 탕크레몽 요새는 미완성이라서 작업자 통로를 통해서 요새 내부로 침입하기 쉬웠고 바티스 요새의 현장 지휘관인 보비(Bovy) 소령은 심장병이 있어서 입원중이었으며 도뱅 노이프샤토 요새는 탄약이 부족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결국 전쟁이 터지자 5월 21일에 도뱅 노이프샤토 요새가 탄약부족으로 항복했고 바티스 요새는 5월 10일 새벽 4시 반에 아픈 몸을 이끌고 요새로 돌아온 보비 소령이 새벽 6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는 불운을 겪었으나 주변 요새를 120mm 요새포로 지원사격하면서 버티다가 5월 22일에 항복했다. 탕크레몽 요새는 작업자 통로를 통해서 진입하는 독일군과 싸우다가 5월 29일에 항복했다.

이들 요새들은 에반-에마엘 요새와는 달리 독일군과 전면적인 전투를 진행했으나 독일군이 공성포와 폭격기등을 쉽게 조달해서 공격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서로 지원해주기가 곤란했으므로 쉽게 포위당하고 분단된 후 독일군의 주력이 우회해서 지나간 후에 포위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요새들이 분전한 시간은 에반-에마엘 요새보다 길었고 독일군의 피해도 있었으나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며 그냥 쉽게 포위 및 분단당한 후에 사실상 방치당한 후 최전선이 벨기에 후방 방면으로 한참 전진해버린 후에 포위군이 요새를 하나씩 각개격파하면서 항복을 종용한 결과였으므로 전투 자체도 전략적이건 전술적이건 간에 거의 무의미하였다.

7. 벨기에의 방어전략 실패

에반-에마엘 요새가 독일 공수부대에게 한순간에 당하는 바람에 여러가지 비판을 당하는 상태이지만 벨기에의 다른 요새와 비교해본다면 그래도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꼭 필요한 중요 방어 위치에 건설된 요새라서 가치는 충분했다. 다른 벨기에의 요새와는 달리 나치 독일군이 정예부대인 독일 팔시름예거(Fallschirmjäger)에게 특수 제작한 성형작약탄까지 쥐어주면서 공수낙하시켜서 빠르게 함락시키는 조치가 에반-에마엘 요새에 집중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벨기에의 방어전략은 크게 국립 요새지대(Réduit national)로 대표되는 거점을 요새로 둘러싸서 방어하고 운하와 하천 방어선을 활용하고 대전차호를 파며 최악의 경우에는 해안지대로 물러나서 최후의 방어를 하는 일련의 방어대책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중요 거점이자 교통의 요지인 안트베르펜, 리에주, 나뮈르에는 도시를 둘러싸는 요새지대를 만들어놓았으며 각각 안트베르펜 요새지대, 리에주 요새지대, 나뮈르 요새지대라고 불렀으며 모두 도시 중심가를 둘러싸는 형식으로 요새를 원형으로 배치해놓았고 나치 독일군이 밀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리에주 방면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현대식 요새를 추가로 3개소를 설치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벨기에라는 국가 자체가 성립 당시부터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영토 침공 야욕에 시달렸기 때문에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 방면 침공, 리에주는 독일 방면 침공, 나뮈르는 프랑스 방면 침공에 대응하는 형태로 요새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특성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면서 이젠 독일의 침공에 대한 방어특화로 성격을 고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관성처럼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요새지대는 각각 포위공격을 당해도 버티기를 할 생각으로 만들어진 바람에 서로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벨기에 영토 내부에 한 줄로 이어진 방어선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군이 쉽게 각각의 요새들을 포위해버리고 주력이 우회해서 통과하는 한편 포위군은 공성포같은 중화기를 동원해서 요새를 하나씩 무력화해버리면서 들어간 비용과 노력에 비해서는 전략적인 쓸모가 적었다.

그나마 리에주 요새지대가 독일군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리에주 전투에서 1914년 8월 5일부처 8월 16일까지 버틸 수는 있었지만 뫼즈강을 방어선으로 삼지 못하고 도시만 원형으로 둘러싸서 방어하는 요새지대가 쉽게 포위당한 후 요새 자체의 구식화된 부분으로 인해 쉽게 중앙부 요새가 무력화당하고 일선의 개별요새가 각개격파당하는 비극으로 전투가 패배로 마무리된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전반적인 방어체제의 정비와 요새의 재건 및 근대화개수가 필요했으나 전간기의 평화를 즐기다가 대공황의 물결에 휩싸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요새들의 상당수는 1차대전의 파괴 및 그 이후의 방치로 인해 반쯤 폐허가 된 상태에서 독일군의 침공위협이 높아진 상황에 놓인다.

이미 1927년에 발행된 보고서에서 뫼즈강 동편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해야 한다는 권고가 나왔으나 벨기에 국가 예산의 위기로 인해 에반-에마엘 요새를 제외한 모든 요새의 보수, 근대화, 건설작업이 지연되었고 1933년에 와서야 간신히 예산을 조달해서 탕크레몽 요새, 바티스 요새, 도뱅 노이프샤토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시기가 늦은데다가 벨기에의 작업속도도 느려서 나뮈르 요새지대가 프랑스 방면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중점적으로 방어하는 식의 답없는 형태를 고치지 못했다던지 안트베르펜 요새지대는 구식화된 채로 사실상 방치해놓았다던지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리에주 요새지대도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기본 구상은 새로 신설된 3개 요새가 미니 마지노선처럼 일종의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지만 요새 자체의 설계는 기존의 고립된 거점을 수비하는 요새의 개념이었고 그나마 시설 자체도 작아서 방어선 형성은 커녕 요새 자체의 수비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1차대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뫼즈강 자체를 방어선으로 이용하는 벙커 배치가 크게 부족해서 에반-에마엘 요새를 빼고는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결국 프랑스 침공 개전 시기에 벨기에의 요새들 중에서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며 전략전술적 요충지 위에 탄탄하게 만들어져서 나치 독일군이 우회해서 지나가는 것이 곤란한 진정한 요새는 에반-에마엘 요새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군이 정예부대인 독일 팔시름예거(Fallschirmjäger)에게 특수 제작한 성형작약탄까지 쥐어주면서 공수낙하시켜서 빠르게 함락시키는 조치가 필요해졌고 오늘날까지 에반-에마엘 요새의 이름이 남게 된 것이다.

8. 전후

나치 독일이 에반-에마엘 요새를 함락한 후에는 나치 독일군의 군사적 우월성을 보여 주는 선전용 전시물 겸 군대 막사와 장비 수리소로 사용되었으며 V1을 생산하는 지하공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제 요새들은 나치 독일 신무기를 시험하는 표적용으로 사용되었다.

연합군이 에반-에마엘 요새를 탈환한 후에는 벨기에군이 요새 내부의 통신선을 제거하고 군대 물품을 저장하는 시설로 활용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변화로 인해 요새의 활용도가 떨어졌기에 곧 반쯤 방치상태가 되었으며 도굴꾼이나 불법 침입자들이 요새 시설물의 일부를 뜯어가기도 했다.

1986년부터 민간 비영리 단체들이 에반-에마엘 요새의 개방을 벨기에 정부와 벨기에군에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 임시허가를 받은 후부터 관광 목적으로 조금씩 요새의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2002년에는 역사적 방어지로 선정되었으며 관광명소로 개발되었다. 여행사에 의해서 유럽 패키지여행 중에 벨기에 지역을 여행한다면 들를 확률이 매우 높은 곳이다.

현대전으로 접어들며 전쟁의 양상과 패러다임도 크게 바뀌고 냉전으로 동서독 국경으로 전선이 옮겨가며 중요성이 떨어져 더 이상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서류상의 소유자는 여전히 벨기에군이다.

9. 여담

에반-에마엘 요새의 건설을 독일 회사에게 맡긴 탓에 설계가 유출되어 쉽게 함락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요새와 접한 운하의 건설에 독일 회사가 참여했던 일이 와전된 것으로, 에반-에마엘 요새의 건설에는 독일 회사가 관여하지 않았다.[2]


[1] 프랑스어의 외래어 표기법상 에반-에마엘(에바네마엘)이 정확하다. 프랑스어의 발음 체계상 Ében의 n이 Émael의 É를 잇는 연음이 되기 때문이다. 즉, 에방-에마엘이 아니라 에바네마엘. 외래어 표기법상 붙임표(-) 표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에바네마엘로 읽는 게 가장 정확하다. 발음 듣기 [2] Simon Dunstan. 2005. Fort Eben Emael The key to Hitler's victory in the W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