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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9-11 21:52:42

21개조 요구



1. 개요2. 전개
2.1. 요구내용2.2. 중국정부의 대처2.3. 파리평화회의
3. 결과

1. 개요

일본 제국 제1차 세계 대전 위안스카이 북양정부에 제출한 21개조의 강압적 요구사항.

2. 전개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연합국으로 참전하고,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동반도 일대를 공격, 점령한 후 산둥성의 독일이권을 접수하였다.

1차 대전중 일본군 산둥성 침공로
파일:p0792.jpg
녹색:중립지대, 황색:영국조차지, 자주색:독일조차지, 화살표:일본군 진격로

2.1. 요구내용

1915년 1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5호 21개조의 요구를 하게 되는데,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호는 산둥권익에 대한 내용으로, 독일이 산둥에서 갖고있던 모든 영토와 권익을 물려받고 산둥성과 그 주변 해역을 남에게 넘기지 않으며 산둥에서 제남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윤허하고 산둥성의 주요 항구를 일본의 허락 없이 개항하지 않는다.

2호는 남만주와 동몽골에 대한 조항이며 여순, 대련과 남만주, 안봉, 길장철도를 99년간 조차.임대하고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위해 토지를 제공하며 광산채굴권을 허여한다. 또 일본의 허락 없이 타국에 철도부설권을 넘기지 않으며 차관을 들이지 않는다. 필요할 경우 정치,재정,군사에 대해 일본의 고문과 협의해야 한다.
3호는 한야평공사[1]의 합판에 대한 내용이며, 한야평공사를 양국의 합판 형식으로 운영하며 일본의 허락없이 권리와 재산을 처분하지 않으며 동공사의 승인없이 한야평공사의 관할에 속하는 광산을 채굴하지 않는다.

4호는 타국에게 중국연안의 항만및 도시를 빌려주거나, 떼어주지 않는다.

5호는 권고사항이며

중국정부의 정치, 재정, 군사에 일본인을 고문으로 초빙하며 경찰에 일본인을 배치하고 일본과 합작병기창을 설립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으며 중국남부의 철도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복건성의 철도, 광산, 항만의 설비에 필요한 자본을 필요로 할때 일본과 협의한다 등이다. [2]

즉, 일본은 서구열강이 서로 박터지게 싸우느라 중국에 눈돌릴 경황이 없는 틈을 타 배짱 좋게 21개조를 내밀어 중국을 통채로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2.2. 중국정부의 대처

1915년 1월 18일에 가토 외상이 중화민국 외교총장 루정샹에게 21개조를 제출했는데, 조항 하나하나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들어줄 경우 일본의 보호국 내지는 식민지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중국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요구내용을 외부에 흘려 열강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이게 먹혀서 미국, 영국등이 크게 반발하며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은 경과를 지켜보다가 5월 7일 5호 항목을 뺀 나머지 조항을 중국정부가 수락하던지 아니면 전쟁을 할건지 고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당시 북양정부의 수장이었던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서구열강이 전쟁 중이라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중국이 아직 일본에 맞설 힘이 부족하다 여겼기에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틀 뒤인 5월 9일에 이 요구를 승낙하고야 말았다. 국민들은 이 날을 국치기념일로 정하고 중국정부를 비난하며 일본상품의 불매운동을 벌였다. 또한 21개조 요구는 훗날 5.4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3. 파리평화회의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전승국 21개국이 모여 전후의 처리를 놓고 평화회의를 하게 되는데, 중국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승전국 입장에서 중국 내에 설치된 열강의 조차지를 포기 및 반환하며, 관세자주권을 승인하고 일본이 전쟁중 빼앗은 영토와 권익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 등 열강의 중국에 대한 권리의 포기와 21개조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한 달여만에 참전해 독일을 산둥 반도에서 쓸어버리는등 큰 활약을 한 일본에 비해 전쟁이 다 끝날 무렵에 비전투병을 파견해 전과가 미미했던 중국의 발언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일본을 밀어주기로 비밀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런 열강의 암묵적인 지지와 전쟁의 지분을 앞세운 일본의 요구는 대부분 다 수용되었고 중국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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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주요 전승국 정상.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3. 결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의 민중들이 분노하여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고, 이게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대되자 결국 중국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의 조인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날로 폭주하던 일본의 침략야욕을 어느 열강보다 경계하던 미국은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여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고,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산동성의 옛 독일의 권익을 돌려주는 등 21개조의 대부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23년 직예군벌의 수령 차오쿤은 영미의 지지와 민심을 확보하기 위해 21개조 요구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1] 당시 중국최대의 철강기업 [2] 자세한 조항 내용은 위키백과 참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