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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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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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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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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주요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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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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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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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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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G. 설버그상[1]
제40회
( 1967년)
앨프리드 히치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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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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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앨프리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506 Hollywood Blv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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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앨프리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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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7013 Hollywood Blv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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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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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955년)
2대
(1958년)
3대
(1959년)
4대
(1961년)
5대
(1962년)
애거서 크리스티 빈센트 스태릿 렉스 스타우트 엘러리 퀸 얼 스탠리 가드너
6대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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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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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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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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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딕슨 카 조지 하몬 콕스 조르주 심농 베이너드 켄드릭 존 크리시
11대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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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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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4대
(1973년)
15대
(1974년)
제임스 M. 케인 미뇽 G. 에버하트 존 D. 맥도널드 저드슨 필립스
앨프리드 히치콕
로스 맥도널드
16대
(1975년)
17대
(1976년)
18대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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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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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앰블러 그레이엄 그린 대프니 듀 모리에
도로시 B. 휴스
나이오 마시
애런 마크 스타인 W. R. 버네트
21대
(1981년)
22대
(1982년)
23대
(1983년)
24대
(1984년)
25대
(1985년)
스탠리 엘린 줄리언 시먼스 마거릿 밀러 존 르카레 도로시 솔즈베리 데이비스
26대
(1986년)
27대
(1987년)
28대
(1988년)
29대
(1989년)
30대
(1990년)
에드 맥베인 마이클 길버트 필리스 A. 휘트니 힐러리 워 헬렌 매클로이
31대
(1991년)
32대
(1992년)
33대
(1993년)
34대
(1994년)
35대
(1995년)
토니 힐러먼 엘모어 레너드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로런스 블록 미키 스필레인
36대
(1996년)
37대
(1997년)
38대
(1998년)
39대
(1999년)
40대
(2000년)
딕 프랜시스 루스 렌델 엘리자베스 피터스 P. D. 제임스 메리 히긴스 클라크
41대
(2001년)
42대
(2002년)
43대
(2003년)
44대
(2004년)
45대
(2005년)
에드워드 D. 호크 로버트 B. 파커 아이라 레빈 조셉 웜보 마샤 멀러
46대
(2006년)
47대
(2007년)
48대
(2008년)
49대
(2009년)
50대
(2010년)
스튜어트 M. 커민스키 스티븐 킹 빌 프론지니 제임스 리 버크
수 그래프턴
도로시 길먼
51대
(2011년)
52대
(2012년)
53대
(2013년)
54대
(2014년)
55대
(2015년)
사라 파레츠키 마사 그라임스 켄 폴릿
마거릿 메이런
캐롤린 하트
로버트 크레이스
로이스 덩컨
제임스 엘로이
5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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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대
(2017년)
58대
(2018년)
59대
(2019년)
60대
(2020년)
월터 모슬리 맥스 앨런 콜린스
엘렌 하트
제인 랭턴
윌리엄 링크
피터 러브시
마틴 크루즈 스미스 바바라 닐리
61대
(2021년)
62대
(2022년)
63대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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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5대
(????년)
샬레인 해리스
제프리 디버
로리 R. 킹 마이클 코넬리
조앤 플루크
캐서린 홀 페이지
R. L. 스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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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000><colcolor=#fff> KBE
앨프리드 히치콕 경
Sir Alfred Hitchcock
파일:hitchcock.jpg
본명 앨프리드 조셉 히치콕 경
Sir Alfred Joseph Hitchcock
출생 1899년 8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식스주 레이던스톤
(現 잉글랜드 런던 월섬포레스트구 레이던스톤)
사망 1980년 4월 29일 (향년 80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벨에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작위 기사[2]
직업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활동 1919년 1980년
신체 170cm
학력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
가족 배우자 앨마 레빌 (1926년 결혼)
딸 패트리샤 히치콕 (1928년생)
종교 가톨릭[3][4]
서명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bff080da94a2f5ccaf30392c93fb1cb.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촬영 기법 및 특징4. 작품 목록
4.1. 무성 영화 시기4.2. 유성 영화 시기4.3. 할리우드 흑백 시기4.4. 컬러 시기
5. 일화6. 평가7.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 출신의 영화감독.

서스펜스의 거장,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명감독이다.

2. 생애

1899년 8월 13일 런던 출생. 부모는 양계와 과일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으며, 가톨릭 신자였다. 후에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걸작 스릴러 영화들을 만든 감독답지 않게, 어렸을 때는 무척 겁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공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아빠의 심부름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아빠의 쪽지를 전해 받은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히치콕 감독을 감옥에 10분 정도 가두었다고 한다. 아빠의 장난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실제로 그는 경찰 외에도 달걀과 자동차 운전을 무서워했다.

1913년 성 이냐시오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런던 시의회가 설립한 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아버지가 숨져 전신회사에 기술자로 입사했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의 소개로 런던 백화점 광고 회사로 자리를 옮겨 광고를 기획하고 사보에 삽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의 미술학과에 입학해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다. 미술 공부는 그에게 연극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해주어 틈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고 영화 관련 잡지를 탐독했다. 이때 그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한다. 훗날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이, 공포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latimes.com/63695814.jpg
젊은 시절 모습.누구세요?
처음 영화사에 들어간 히치콕 감독은 타이틀 작가, 미술감독 등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앨마 레빌을 처음 만나 훗날 결혼한다. 1922년 시모어 힉스와 함께 단편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를 처음 공동 감독했고, 같은 해 〈13번〉이란 빈민층의 생활을 다룬 코미디 영화를 감독 및 제작했다. 후자는 실패했다. 이후 1925년 〈기쁨의 정원〉을 내놓으며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한다.

그는 1926년작 〈하숙인〉으로 평론과 흥행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 된다. 이후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 39계단〉, 〈 사보타주〉, 〈젊음과 순수〉, 〈사라진 여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특히 1929년 발표했던 자신, 그리고 영국 영화사상 첫 유성 영화 〈 협박〉은 그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서 명성을 다지는 첫 시작이었다. 이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그를 불렀지만 히치콕은 이를 거절한다. 1940년 〈 레베카〉로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덧붙이면 레베카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됐다.

히치콕 감독은 할리우드와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스릴러 및 서스펜스 걸작들을 쏟아냈다. 〈의혹의 그림자〉, 〈 오명〉, 〈다이얼 M을 돌려라〉[5], 〈 이창〉, 〈나는 결백하다〉, 〈 현기증[6],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을 거쳐, 1960년 스릴러 영화의 영원한 걸작으로 꼽히는 로버트 블록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 사이코〉를 세상에 내놓는다. 〈사이코〉는 절묘한 촬영술과 완벽한 음악의 활용 등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참고로 영화 속에 등장한 거금 4만 달러가 히치콕 감독이 여러 번 언급한 맥거핀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이 세 작품은 1958년부터 60년까지 불과 1년 주기로 나왔다.

되돌아와서, 한편 1955년부터는 TV 프로그램 〈히치콕 극장〉에서 자신이 직접 사회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6년에는 추리/미스터리 소설 잡지인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을 내기도 했는데, 그는 잡지가 얼마 가지 않아 폐간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수준 높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1997년에 해난터라는 출판사에서 딱 2권 내고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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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까지 히치콕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이후 〈마니〉, 〈황옥〉, 〈찢어진 커튼〉 같은 영화들이 별 성과를 못 거두면서, 나이가 들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프렌지〉를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 1976년 77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영화인 〈가족 음모〉를 만드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0년, 그는 만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히치콕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

3. 촬영 기법 및 특징

히치콕이 쓴 여러 편집과 촬영 기법은 당대에는 비교할 데 없이 독특하고 새로웠으며, 히치콕 이후엔 액션 영화고 공포 영화고 일반 드라마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작품에서 재생산되면서 잘 쓰이고 있다. 이를 히치코키언(Hitchcockian)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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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에서 쓰인 이른바 현기증 기법(Vertigo effect).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렌즈를 줌하면 발생하는 영상효과로[7] 화면 가장자리는 그대로인데 화면 중앙은 멀어져보인다. 반대로 트랙인/줌아웃을 하면 화면 중앙이 가까워 보인다. 이 기법은 〈 죠스〉, 〈 폴터가이스트〉, 〈 이벤트 호라이즌〉,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 라이프 오브 파이〉, < 공작>,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 헤어질 결심> 등 후대 영화에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거나 인물을 강조할 때 쓰인다. 1950년대 영화의 혁신성이 지금도 유효한 것. 영향을 받은 영화 목록

또한〈현기증〉에서 쓴 카메라 360도 회전 기법이 한국 드라마 〈 질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쓰이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심심하면 한국 드라마에서 써먹는 기법이 되었을 정도. 그 외에 〈 이창〉, 〈 현기증〉, 〈 싸이코〉 등에서 쓰인 관음주의적 주관적 시점의 쇼트, 이동 쇼트의 과감한 사용, 오버 헤트 쇼트 등, 현재 영화제작 관련 전공자에게 영원한 연구과제논문이 나오고 있다.

〈로프〉에서, 단 한 번의 커트 없이 롱테이크 원샷으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8] 배우들은 거의 연극작품 수준으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의 동선을 다 외워야 해서 세트 촬영이었어도 난이도가 높은 연기였다.

이런 영상적인 테크니션적인 탁월한 부분만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능력에서도 탁월함을 보이고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는데, 맥거핀이 대표적인 예.

그 외에 상업 영화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온갖 실험적인 시도를 한 감독이기도 하다. 1944년작 〈구명 보트〉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명선 한 척 위에서만 진행된다든가, 〈 이창〉처럼 아파트 한쪽 면을 실내 세트에 만들어놓고 (심지어 세트에 가구까지 배치했다고 한다)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걸 보는 영화라든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컷으로 가는 영화를 만든다거나 등.

하지만 이런 독특함과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전성기 시절에는 평론가들에게 그다지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흥행 영화 잘 만드는 감독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히치콕을 추종하고 히치콕 스타일을 본인 영화에 접목시키려 했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히치콕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걸 '히치콕/트뤼포'란 책으로 내면서 히치콕에 대한 평가가 바뀐다. 장면 하나 하나를 히치콕이 어떻게 만들어냈고, 어째서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가, 하는 서술을 담아냈고 그제야 히치콕의 생각과 연출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명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어 2016년 개봉했다.

앞서 말했듯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흥행감독이나 상업 영화나 찍는, 작품성은 형편없는 감독 등 여러모로 평론가에게는 큰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타계 이후 거의 영화의 신이라는 불멸의 칭송을 받고 있다. 특히 장면 장면마다 다른 영화에서 오마주가 되곤 하는데, 〈 사이코〉의 샤워신은 여러 영화에서 패러디된 것은 물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신마다 샤워신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새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데에도 한몫했다. 다만 지금 〈〉를 보면, 와이어가 보이거나 인형이라는 티가 좀 나긴 한다. 그러나 적절히 필름에 새의 이미지를 그려 넣기도 해서 현실감을 살렸고, 당시에는 큰 이슈가 된 특수효과였다.

유명한 히치콕 빠가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드 팔마의 초기작에 자주 인용되는 장면 역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 <드레드스 투 킬> 초반부에서 유명한 미술관 장면은 <현기증>,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난도질 살인 장면명은 <사이코> 또한 누벨바그의 감독들에게는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도살자(Le Boucher)〉(1970)를 비롯한 '스릴러 3부작'은 대놓고 히치콕에게 바칠 정도였으니.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남긴 그의 발언은 그야말로 고전이 되었다. 트뤼포와의 대담집 ' 히치콕과의 대화'는 훌륭한 히치콕 영화 해설서다.
"나는 삐걱거리는 문소리로 서스펜스를 자아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운 거리에서 죽은 고양이와 폐물들이 나뒹구는 것보다, 밝은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 있습니다.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알려드릴게요. 네 사람이 포커를 치러 방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네 사람 모두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단지 놀랄 뿐이죠. 그러나 나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남자가 포커판이 벌어지는 탁자 밑에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포커를 하고, 시한폭탄의 초침은 폭발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의미한 대화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죠. 관객은 '지금 사소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 거란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요.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게임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죠. '차나 한잔 하지.' 바로 이 순간 관객의 조바심은 폭발 직전이 됩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서스펜스'라는 겁니다."

빈틈없고 재빠른 영화 촬영도 히치콕의 특징 중 하나. 히치콕은 영화 촬영 전에 영화 전체를 콘티로 만든 후, 콘티와 단 하나의 차이도 없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때문에 현장에서의 수정 같은 게 없어 영화 촬영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런 촬영은 배우들은 철저히 감독의 부품이 되어야 하는 식이라 배우들에 따라선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몇몇 배우에게만 상의를 하거나 의견을 물었다.

이런 식의 촬영은 묘하게도 히치콕이 제작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편집권한은 감독이 아니라 제작사에게 있기 때문에 제작사에서 히치콕의 완성품에 불만을 가지고 영화를 재편집하려고 시도해도, 재편집에 쓸 장면 같은 게 히치콕의 촬영 필름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히치콕의 빠른 촬영 스케줄은 제작사 측이 투자 부담을 더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단, 이 스타일 자체가,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의 히치콕에게 다른 인기감독들보다 제작사 측이 제작비를 약간 덜 준 부분들에 의해 생겨났다는 평가는 항상 있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성비쪽으로 추구하여 가성비 최대를 추구하는 방식인, 미리 머리속으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려보는 방식을 사용해 스스로를 진화시켰다는 평가.

당대 미녀 배우들을 발굴하고, 주인공 삼아 촬영하기를 즐긴 감독이기도 하다. 특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미모를 가졌지만, 남자 주인공이 호감이라도 보이면 단칼에 거절할 것 같은 차가운 이미지의 금발과 푸른 눈의 배우들을 좋아했는데, 이에 대해 어린 시절에 가톨릭식의 엄격한 금욕주의 교육으로 억압되고 플라토닉한 부부생활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던 히치콕의 성욕이 표출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부인인 앨머는 갈색 머리를 가진, 지적이고 기가 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영화 속에도 은근슬쩍 앨머로 대표되는 지성적인 여성들을 주인공 남성의 동반자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삽입하기도 했고, 말기엔 딸이 그런 여성들을 연기하기도 했다. 잉그리드 버그만(버그만은 발굴한 게 아니지만)을 주연으로 여러 영화를 찍었고, 순진하고 공주 같은 이미지로 주로 통하던 그레이스 켈리[9]의 숨겨진 매력을 발굴해내기도 했으며, 〈 현기증〉을 통해 킴 노박의 관능미를 발산하게 했다. 후반기에 발굴한 티피 헤드런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와 마니의 여주인공으로는 호연.

4. 작품 목록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무성 영화 ]
[ 유성 영화 ]
[ 컬러 영화 ]


4.1. 무성 영화 시기

4.2. 유성 영화 시기

4.3. 할리우드 흑백 시기

4.4. 컬러 시기

5. 일화

6. 평가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거듭 감상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더 배울 만한 게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21]
히치콕 감독의 영향은 현대영화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다. 히치콕은 명암대조가 심한 조명을 선호하는 필름 느와르 장르가 할리우드에 뿌리내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히치콕의 영향력은 로만 폴란스키, 쿠엔틴 타란티노, 심지어 < 매트릭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 영화학자 마크 랭거

상술했듯 서스펜스의 거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현대 영화 제작자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 그리고 영화사 최초의 스타 감독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 극장 간판에 얼굴이 실린 최초의 감독이다. 그 전에 감독이 극장 간판에 실린 사례는 없었다. 감독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던 1950–60년대 한국에서도 영화가 개봉할 때 대대적으로 이름을 내세워 홍보했다.

각종 영화 매체나 평론가, 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영화감독을 뽑을 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감독 중 한명이기도 하다. 최고의 영화감독 순위에서 1위를 벗어난 설문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로 1위 고정이다. 영국의 영화지 <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2012년 평론가들과 감독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조사에서도 히치콕 감독이 역대 최고의 영화 감독 1위에 선정되었다. 참고로 2위는 '영화 혁명가' 장뤽 고다르, 3위는 '시민 케인을 만든 천재' 오슨 웰스. 전체 리스트 여담이지만 오슨 웰스는 "나는 히치콕 숭배를 결코 이해하지 못 하겠다. 그의 영화는 이기주의와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텔레비전 쇼 같다." 라고 말하며 매우 냉소적으로 히치콕을 평가했다. #

7. 기타

그가 하던 여러 말들은 영화사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있다.
"나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답니다. 그는 오로지 카툰만 그리지 않아요? 만약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곳은 할리우드지."[22]

자기가 만든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영화에서 그를 찾아보는 것도 잔재미이다. 〈새〉에서 애견 2마리를 데리고 말없이 가게에서 나오는 신사라든지, 트렁크 가방을 들고 바삐 달려가는 세일즈맨이라든지, 창문을 청소하는 청소부, 경찰관, 지나가는 사람. 별의별 카메오로 나온다. 단,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을 찾는 것에 몰두할까봐 영화 초반 10분안에 나온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그런거지 본인이 연출, 제작한 모든 영화에 100퍼센트 다 나온 건 아니다.(초창기 흑백영화 중에서는 등장인물이 적은 단편도 있어서 까메오 등장 여지가 없던 적도 있다.) 10분 넘어서도 못찾으면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자.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에 후보로 엄청 오르고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1968년 공로상을 받았을 뿐이다. 아카데미의 굴욕. 이런 거장의 진면목을 한 번도 못 알아봤다는 거니까 굴욕 맞다. 히치콕 본인도 이걸 마음에 담아서인지 공로상을 받을 때 "쌩큐!" 한마디하고 얼른 내려갔다는데,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짧은 수상소감이다.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 의상 디자이너 이디스 헤드와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1924년작인 〈하얀 그림자〉의 경우, 필름이 소실되어 히치콕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만 떠돌다가, 2011년에 뉴질랜드 필름보관소에서 필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필름보관소 사이트에서 동영상을 업로드하여 일반 네티즌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현재는 DVD 판매로 바뀌었다. 밑에서 2번째 항목 참고

2012년 〈 사이코〉를 기획, 촬영 그리고 후에 호평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 〈 히치콕〉이 개봉하였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이자 조감독이었던 앨마 러바일의 노고 또한 재조명한다.[23] 안소니 홉킨스가 히치콕, 헬렌 미렌이 앨마, 스칼렛 요한슨 자넷 리, 그리고 제임스 다시 안소니 퍼킨스로 분하였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서포터로 알려져 있다.

봉준호 감독이 레딧과의 인터뷰 중 받았던 질문인 “최후의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 5인.” 중 한 명으로 뽑혔는데, 질문을 받을 당시 기준으로는 유일한 고인이다.[24]


[1] 공로상격의 상 [2]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 2등급이므로 기사 칭호(Knighthood)가 훈장 서훈과 동시에 붙는다. 사망하기 세 달 전 서훈 명단에 올랐다. 유명인들이 받은 기사작위는 대부분 'Knight Bachelor'라는 것인데, KBE는 이보다도 한 단계 격이 높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 [3] K.V. Turley, " The Man Who Knew His Faith: The Catholicism of Alfred Hitchcock", 「National Catholic Register」, 2020.2.12. [4] Peter T. Chattaway, " A Cranky Catholic", 「Christianity Today」, 2006.7.25. [5] 그의 유일한 3D 영화이다. 21세기에 3D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3D로 찍은 작품이다. 놀라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보다 입체경이 약 60여 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무성 영화 시절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이 3D가 본격적으로 광고에 적극 활용되던 시기였는데, 지금과 달리 눈의 피로가 워낙 심하고 2D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대중화되진 못했다. 〈다이얼 M을 돌려라〉 역시 개봉 직후 금방 2D로 상영되었다. [6] 이 영화는 2012년 영국 영화 협회가 발간하는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전 세계 846명의 영화평론가, 감독, 시나리오작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영화 조사에서, 1962년부터 2012년까지 50년 동안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오슨 웰스의 〈 시민 케인〉을 누르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7] 그래서 트랙아웃/줌인(Track-out/Zoom-in) 또는 돌리 줌(Dolly zoom)이라고 불리며 후자가 더 많이 쓰이는 단어다. [8] 영화상의 시간은 끊김이 없지만, 실제로는 한 번에 촬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영화의 기술상 필름이라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10분 넘게 연속으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10분쯤 될 때마다 각 배우들이 돌아가며 자연스러운 내용상의 이유로(술을 가지러 가거나 다른 물건을 가지러 간다거나 하면서) 카메라 쪽으로 다가가 카메라를 완전히 가려버려서 화면을 까맣게 만들어 촬영을 멈추고,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필름을 갈아 끼운 다음 그 상태 그대로 촬영을 이어갔다. 그걸 붙여서 연속촬영처럼 보이게 한 것.〈로프〉를 자세히 보면, 약 10분 주기로 배우가 카메라로 다가 오고, 화면이 깜깜해진 다음 0.1초 정도의 어색한 끊김이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화면을 가리는 배우 등 뒤에 있는 다른 배우들의 위치도 조금씩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물론 당시 관객들은 영화만 보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9] 그녀는 이런 이미지가 먹혀들어 모나코의 대공비로 간택되었다. [10] 두 작품 모두 미완성작 [11] 히치콕 장편 영화 중 유일하게 유실된 영화. 독일에서 개봉된 후 영국 배급사 내부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으며 개봉되지 않았다가, 〈The Lodger(하숙인)〉의 흥행으로 1927년 5월에야 개봉되었다. 흥행 성적 역시 좋지 못했다. 훗날 히치콕은 이 영화에 대해 '끔찍한 것'이라 회고하며, 자신 역시 이 영화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 영화 협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는 영국 영화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유실된 작품을 다시 찾기 위해 BFI 75 Most Wanted라는 리스트를 공개했는데, 이 영화는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영화 역사가들의 성배'라고 강조했다. [12] 첩보물의 시초격으로 여겨지는 영화다. [13] 1944년에〈 Aventure Malgache〉 〈Bon Voyage〉과 함께 미국 재무부 의뢰로 제작한 전시 선전용 단편 영화. [14] 히치콕 본인이 실패작이라고 인정한 영화. [15]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 [16] 1934년 동명작을 제임스 스튜어트, 도리스 데이 주연으로 셀프 리메이크 [17] 여성들을 강간 살인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에 대한 스릴러 영화이다. 한국영화 〈 살인의 추억〉과의 차이점이라면, 초반에 이미 범인이 누군지 나온다는 점. [18] 예를 들어, 영국 정보국에서 지시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처음 만난 남녀공작원이, 정부가 지정한 사람을 며칠 동안 찾다가 그로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 남자주인공이 그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때 갑자기 여주인공이 울며, "나는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근데 그런 당신이 사람을 죽이려 계획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사실 나도 그렇소. 미안하오."라고 말한다. [19] 비대한 몸집과 알려지지 않은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20] 이게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다. 처음부터 원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개연성을 부여한 수준의 각본을 의도했다고 한다. [21] 영국의 영화지 < 사이트 앤 사운드>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 [22] 영국 기자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시는 게 어떤가요?"라고 물은 질문에 무덤덤하게 저 한 마디만 했다. 여러가지로 해석되겠지만, 보통은 '여긴 유명세와 달리 할리우드일 뿐이야. 뭘 기대했어?'라는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23] http://www.telegraph.co.uk/culture/film/film-news/9832084/Mrs-Alfred-Hitchcock-The-Unsung-Partner.html [24] 나머지 4명은 케빈 더 브라위너, 지미 페이지, 김연아, 마틴 스콜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