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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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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초기
1.1. 출생의 비밀1.2. 생명의 위협 속에서1.3. 즉위
2. 거란의 침공과 내정 정비
2.1. 거란 성종의 2차 침공과 목숨을 건 피난길2.2. 김훈·최질의 난 진압2.3. 동여진 해적 방어2.4. 초조대장경판 발원2.5. 장인 감축과 농업 장려 2.6. 칠대실록 편찬2.7. 고려 군현제의 확립2.8. 3차 침공과 금교역 전투 승리, 그 후
3. 전후 행보

1. 출생 및 초기

현종은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태조 신성대왕의 8남인 안종 왕욱과 천추태후의 여동생[1]이자 경종(제5대)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의 소생이다.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지만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였다. 부계와 모계 모두 종실의 혈통이라서 그나마 나았던 것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였다. 대표적으로 신라 효공왕(제52대)이나 고려 말 우왕(제32대)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으나, 현종과는 달리 전대 군주인 진성여왕 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보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둘 다 비참한 끝을 맞이하였다. 현종의 혈통 자체는 태조의 직계였기에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던 탓에 정통성이 크게 떨어졌으며, 서너 살 즈음에는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현종
안종 태조
세조
위숙왕후
신성왕후
김억렴
헌정왕후
대종
태조
신정왕후
선의왕후
태조
정덕왕후

어쨌든 현종은 혈통상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외증손자이고, 또한 구 신라 김씨 왕실의 외손자이며, 유력한 대호족 황주 황보씨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태조의 적자이자 경순왕 김부의 백부 김억렴의 외손자였고, 어머니는 태조의 적손녀이면서 외손녀였다. 즉, 태조 왕건의 유전자를 부계에서 1/4, 모계에서 1/4(=1/8+1/8) 도합 1/2만큼 물려받았으니 유전적으로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현종의 이런 아쉬운 정통성은 당시 천추태후 김치양의 견제로도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목종은 후사가 없어 그가 사망하면 현종이 매우 보위에 가까웠다. 천추태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현종을 신혈사에 보내버린 뒤 누차 살해를 시도했다. 이런 노골적인 차별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종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고려 황실, 신라 왕실, 고구려계 호족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현종의 저 어마무시한 혈통이 사생아라는 커다란 단점 때문에 다 깎여버린 셈.

다른 예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들 수 있다. 현종과 마찬가지로 사생아로 태어난 김치양의 아들은 현종과 같은 정통성이 없었고, 태후가 실각하자마자 6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다.

참고로 안종은 936년~94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 태조의 나이는 61~67세다. 현종은 992년생이다. 즉 안종은 49~56세 때 현종을 낳았다. 따라서 태조와 현종은 할아버지-친손자 관계임에도 115살이나 차이가 난다. 현종은 태조가 죽고 49년이 지나서야 태어났다. 모계로 따져도 헌정왕후가 26살 때 현종을 낳았으나, 헌정왕후는 아버지 대종이 약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태어났으며, 대종이 태어날 때 태조의 나이 또한 57~60세 전후가 된다.

1.1. 출생의 비밀

현종의 아버지 왕욱 왕건의 8번째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즉, 현종의 친할머니)는 신라 경순왕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였다.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합주(지금의 합천)의 군수를 지냈던 태위(太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고, 성은 이씨라고 적은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족기》기록도 있다. 해당 서책은 현전하지 않고 《 삼국유사》에 인용된 내용인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안종 왕욱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한 사론이 맞으며, 신성왕후는 김씨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은
"김관의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 정언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
고 했다. 《고려사》에는 태조의 후궁 중 한 명으로 합주 사람 이원의 딸인 후대량원부인 이씨가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량원부인에 대해서는 《 고려사절요》 및 《 동국통감》에 이름만 등장한다. 하여튼 이래저래 족보가 꼬인 현종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현종은 고려 황실과 신라 왕실의 핏줄을 모두 가진 매우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현종이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가 일단 숙부와 조카라는 근친 관계였으며 심지어 정식으로 혼인도 안한 상태에서 사통을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고려 황족들은 정권 초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복남매끼리 혼인할 정도로[2] 근친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숙부-조카 간의 관계 자체는 큰 문제라고는 볼 수 없었다. 고려의 여러 임금들 역시 과부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고, 애초에 고려 문화권에선 재가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헌정왕후가 선왕 경종의 왕후이자 현 임금인 성종의 여동생으로서, 고려 왕실 내에서도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정식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삼촌과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왕의 왕후가 숙질간의 근친상간으로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현실에 구현된 셈.

덧붙여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가 서로 숙질관계인 점 때문에 친척 관계가 무척 꼬인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기 때문에 현종이 대량원군이던 시절 재위하던 왕들과의 관계가 심히 복잡하다.

먼저 성종의 경우 모계로는 어머니 헌정왕후가 성종의 친여동생이기에 성종의 외조카이지만, 부계로는 아버지인 안종이 성종의 숙부이기에 성종의 사촌동생이 된다. 목종은 더 복잡한데 모계로는 어머니가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이여서 목종의 이종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로는 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항렬인 사촌누나이고,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된다.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은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훗날의 일이지만 사촌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태조의 손자인 실제보다 한 세대 더 내려간 태조의 증손자 항렬로 취급된 셈. 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정작 현종의 아들들이자 후계자인 덕종, 정종은 원성왕후 김씨, 문종은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원평왕후까지 합쳐서 이 세 명은 신라 왕족 출신의 공주 사람 김은부의 딸들로, 거란의 2차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갔던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길에 공주에서 당시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김은부의 첫째 딸이 현종의 의복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현종이 왕후로 책봉하니 이 사람이 원성왕후이고, 나중에 남은 두 딸도 모두 왕후로 들이니 모두 친자매들이다.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드라마틱하다.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작은아버지이기도 한 왕욱 집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빨리 가서 알아보라 하여 연유를 알아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놀란 성종은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보내는 것이니 애태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왕욱을 멀리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보내기에 이른다.[3]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산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면서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4]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종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헌정왕후가 이듬해 별궁 보화궁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빙성을 따지자면 당대의 1차 사료인 현화사비의 신빙성이 더 높다...가 더 합리적인 추론이겠지만, 현화사비는 그 내용이 (특히 친부 왕욱 관련해서) 《고려사》와 차이가 많이 나서 다소 신빙성을 의심받긴 한다. 안종(고려) 문서 참조.

현종은 출생 후 1년 정도만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성종이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현종)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성종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부모없이 자라는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내려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위 내용을 색다른 시각으로 각색해보면, 헌정왕후가 타계하고 궁궐 내에 끈이 떨어진 대량원군이 궁궐 밖으로 내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막말로 성종 입장에서는 현종이 향후 제위 계승 문제에서 문제만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기 때문. 성종 본인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다음 왕위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에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성종 입장에서 보면 현종은 후계 구도를 망쳐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현종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도 되겠지만, 출신이 사생아라 잡음이 많겠고 친부를 알려주지 않아야 혼란이 오지 않을 테니 이 역시도 끌리는 선택은 아니다. 다 떠나서 친부랑 같이 살게 하는 것이 인륜적으로 맞기도 하고. 특히 유교적 질서를 지향했던 만큼 부자관계를 억지로 끊어놓는 행위는 더더욱 싫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 상봉에 성공했다. 이때 왕욱은 왕순에게 제왕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먼 훗날 그 말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부자 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5세였을 때 병사하고 만다.

1.2.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한 순간에 아버지를 잃은 뒤 홀로 지내던 현종에겐 슬퍼할 새도 없이 또 불행이 닥쳤다. 친부의 사망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외삼촌 성종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경종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친다.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현종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보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현종이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한 뒤 양주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 임금의 서자로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인 '신혈소군'(神穴小君)으로 부르게 하고 이후로도 그를 암살하고자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고려사》 권93, <열전>6, -채충순-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암살시도에 훼방을 놓았다. 목종은 자식이 없어 본인이 죽으면 남은 태조 왕건의 적자에게서 태어난 핏줄은 대량원군 하나뿐이라 갖은 수를 써가면서 대량원군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왕건에겐 비록 자식이 많긴 했지만 후궁이 아닌 왕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들은 왕건 사후의 고려 초기 피튀기는 황위쟁탈전으로 하나하나 대가 끊겨 첫째 혜종부터 일곱째 대종까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사실상 목종이 마지막이었고[5] 여덟째인[6] 안종의 피를 이어받은 현종이 가장 계승 순위가 높은 상황이었다.[7]

또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津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만화 판본에서는 서둘러 현종을 숨긴 뒤 진관이 지하실이 답답하지 않냐고 걱정하지만 현종은 오히려 조용해서 공부하는 데에는 좋다고 한다.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내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내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내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 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경종 후비, 헌애왕태후'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현종은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보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등극하기 전 잠룡 시절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ruby(一條流出白雲峯, ruby=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가 백운봉에서 솟아나
[ruby(萬里蒼溟去路通, ruby=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니
[ruby(莫道潺湲巖下在, ruby=막 도 잔 원 암 하 재)] 바위 밑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지라
[ruby(不多時日到龍宮, ruby=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잖아 용궁까지 다다르게 될 물이니
<시냇물>(溪水).

[ruby(小小蛇兒遶藥欄, ruby=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ruby(滿身紅錦自班斕, ruby=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니
[ruby(莫言長在花林下, ruby=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 말하지 말라
[ruby(一旦成龍也不難, ruby=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으리.
<작은 뱀>(小蛇).
(《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조에 따르면 2번째 시 <작은 뱀>을 지은 곳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유배되어 있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파일:external/img.ezmember.co.kr/2_1306210103.jpg
진관사

보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제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 본래는 진관내동, 진관외동 이렇게 따로 있었으나, 2007년 은평뉴타운이 조성되면서 구파발동과 함께 통합되었다. 즉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관련영상 진관사의 건물들은 화재로 여러차례 소실과 중건이 반복되다가 6.25 전쟁때 3동을 뺀 나머지가 완전히 박살나고 1964년에 재건된 모습이 위의 사진이라 고려시대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3. 즉위

이리하여, 1009년 2월 3일,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 강조 목종을 '나라를 양보했다'는 뜻의 "양국공(讓國公)"으로 강등하여 폐위하고 법왕사로 내쫓아 버렸다. 대량원군은 본궐 연총전에서 즉위한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오른 현종은 등극하자마자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100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의 정변으로 강제로 옹립됐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내세운 임금의 권위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 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당시 현종의 의도와 주체 여부에 대한 논쟁은 강조의 정변 문서를 참고할 것.

그 후 문무 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다.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월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짐이 외람되게 조업(祖業)을 이어받아 삼가 큰 기반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강(封疆)을 통치하고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건곤지도(乾坤之道)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년) 경술년

2. 거란의 침공과 내정 정비

2.1. 거란 성종의 2차 침공과 목숨을 건 피난길



그러나 보위에 오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현종 2년, 거란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 것이다. 침공의 명분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북송과의 통교를 저지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침공을 받아야만 했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2차 침입 때는 거란 성종이 무려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였던 강조300,000명의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했다. 초반엔 강조의 고려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통주 대전에서 대패한 강조는 그대로 거란군에게 붙잡혔다가 이후 처형당했고, 30만 고려군들 또한 전사자만 무려 3만명이나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신해 2년(1011)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주(契丹主)가 개경(開京)에 들어가 태묘(大廟), 궁궐, 민가(民家)를 불살라서 모두 탔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묵었다.
- 거란군이 개경에 들어와 태묘 등을 불태우다 (고려사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契丹)의 군주가 경성에 들어와 태묘(大廟)·궁궐·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날에 왕이 광주(廣州)에 머물고 있다가 두 왕후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요탄역(饒呑驛)까지 가서 이내 찾아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며 3일간 머물렀다.
- 거란이 개경을 점령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결국 이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처음으로 외적들에게 함락되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된다.

파일:현종의 피난길.png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나라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복이 아닌 항전의 뜻을 굳힌 현종은 몽진을 결정했다.
정축 왕을 호종하던 여러 신하가 하공진(河拱辰) 등이 잡혔다는 것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 뿔뿔이 도망쳤으며, 오직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채충순(蔡忠順),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만이 떠나지 않았다.
-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도망치다 (고려사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3일(음) 정축(丁丑))
○정축.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가 거란(契丹)의 진영에 이르러 군대를 돌리라고 간청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이를 허락하고는 곧이어 하공진 등을 억류하자, 호종하던 여러 신료들이 하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놀라서 두려움에 떨며 흩어져 달아났다. 오로지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만은 떠나지 않았다.
- 하공진, 고영기가 거란에 철군을 요청하러 갔다가 억류당하다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2년 > 1월(1011년 1월 3일(음) 정축(丁丑) , 1011년 2월 8일(양))>
○무인. 왕이 광주(廣州)를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 머물렀다. 지채문(智蔡文)이 아뢰기를, “호종하던 장사(將士)들이 모두 처자식을 찾는다는 핑계로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어두운 밤에 간사한 적들의 도적질이 발생할까 염려됩니다. 청하건대 표식을 장사들의 관모에 나누어 꽂아 이로써 변별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를 따랐다.
- 적도들과의 구별을 위해 호종하는 군사들의 관모에 표식을 달게 하다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2년 > 1월(1011년 1월 4일(음) 무인(戊寅) , 1011년 2월 9일(양))>
○기묘. 유종(柳宗)이 아뢰기를, “양성(陽城)은 신의 적향(籍鄕)으로서 여기에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청하건대 그곳으로 행차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마침내 행차하였다. 밤에 유종과 김응인(金應仁) 등이 왕명을 조작하여 어마의 안장을 뜯어 고을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날이 밝아오자 현의 아전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유종과 김응인 등은 또한 두 왕후를 각자 그 고향으로 보내고 호종하던 장수와 병졸들을 해산시켜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상황에 대비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왕이 지채문(智蔡文)에게 자문을 구하자 지채문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군주와 신하가 도리를 잃어버리고 뜻하지 않게 재앙을 당하여 이와 같이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셔야 하는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짓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장군(將軍)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행렬이 사산현(蛇山縣)을 지날 때, 지채문은 여러 기러기들이 밭에 내려앉은 것을 보고는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기러기들이 놀라 날아오르자 몸을 돌려 올려다보며 활을 쏘았으며, 화살로 명중하여 떨어뜨렸다. 왕이 크게 기뻐하자 지채문은 말에서 내려 기러기를 들고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 어찌 도적을 염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웃으며 안심하고 칭찬하였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렀을 때, 유종과 김응인 등은 아뢰기를, “신들이 청하건대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마련한 뒤 영접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도망쳤다.
- 유종과 김응인이 왕을 속이고 달아났으나, 지채문은 성심껏 왕을 보필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5일(음) 기묘(己卯))
현종(顯宗)은 채충순(蔡忠順)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고, 얼마 후에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兼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 채충순이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왕이 광주(廣州)에 머무르니, 수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두려워 흩어져 도망하였으나, 오직 채충순은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전임되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
- 채충순이 거란 침입으로 남행하던 현종을 호종하여 공신에 책봉되다 (고려사 권93 > 열전 권제6 > 제신(諸臣) > 채충순)
○중랑장(中郞將) 지채문(智蔡文)에게 토지 30결(結)을 하사하였다.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도적을 피하다가 먼 길 위에서 곤경에 빠졌을 적에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라고 하였다.
- 왕을 성심으로 호종한 공로로 지채문에게 토지를 하사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2월 미상(음))
2월, 〈왕이〉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지채문(智蔡文)에게 토지 30결을 하사하였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하며 먼 길을 갔는데, 호종하던 신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오직 지채문만이 온갖 풍상(風霜)을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너며 말고삐 잡는 수고를 사양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송죽[松筠]의 절개를 지켰다. 참으로 빼어난 공적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혜를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현종이 공주에서 지채문의 호종 공적을 포상하다 (고려사 > 권94 > 열전 권제7 > 제신(諸臣) > 지채문)

그러나 정작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현종과 두 왕후[8]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지채문 혼자서 지켜낸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때 항전을 주장한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 이야기인데, 다만 3차 침입 때 전군을 지휘하는 위치까지 오른 것을 보면 "어딘가에 파견되어 방어선을 지휘한 것 아니냐?" 는 설이 지배적이다. 물론, 강감찬 정도되는 거물이 진짜로 현종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충신 강감찬의 포지션은 지채문이 차지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혼자서 현종을 지켜낸 지채문보다 강감찬이 후세에 더 알려진 것은 몽진을 수행하는 것 만큼의 급박한 임무를 맡아서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9] 현실적으로, 왕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신하를 문하시중까지 승진을 시키고 배향공신까지 올렸을리도 없다. 물론, 지채문도 이때의 공으로 크게 출세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장군이 아닌 중랑장 정도의 계급이었고, 후에 후손들이 멸문을 당했기 때문에 지채문의 존재감이 크게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간 현종의 몽진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유. 적성현(積城縣)[10] 단조역(丹棗驛)에 이르자 무졸(武卒)인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장차 행궁을 범하려고 하니, 지채문이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적도가 달아나 흩어졌다가 다시 서남쪽의 산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지채문은 또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날이 저물어서야 왕이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는데, 어떤 아전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못들은 척 하자 아전은 성을 내면서 장차 변란을 일으키고자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河拱辰)이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연유로 왔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아전이 말하기를,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잡으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니, 김응인과 시랑(侍郞) 이정충(李正忠), 낭장(郞將) 국근(國近) 등이 모두 달아났다. 밤에 적들이 다시 이르자 시종하던 신료·환관(宦官)·빈첩[嬪御]들이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오로지 현덕왕후(玄德王后)와 대명왕후(大明王后) 두 왕후와 시녀 2인, 승지(承旨) 양협(良叶)·충필(忠弼) 등만이 시종하였다. 지채문이 혹 나갔다가 혹 들어오면서 임기응변하자 적도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을 통해 빠져나갈 것을 청하고 직접 어마의 고삐를 잡아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도봉사(道峯寺)에 들어가니,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며 채충순도 연이어 도달하였다. 지채문이 아뢰기를, “지난밤의 적들은 하공진이 아닐 것으로 의심되니, 신이 가서 뒤를 쫒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갈 것을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지채문은 아뢰기를, “신이 만약 군주를 배반하여 말과 실상이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저를 주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허락하자, 즉시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다. 국근은 말하기를, “저의 옷과 행장을 모두 적들에게 빼앗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은 말하기를, “너는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으니 머리를 보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소로 가던 중이라 지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들의 변란에 대해 상세히 말하며 이에 대하여 힐난하니, 과연 하공진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의 패전한 군대가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하공진이 거느리고 있던 군졸이 20여 인이었는데, 지채문은 마침내 그 군졸들을 데리고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들이 탈취하였던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획득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지채문은 하공진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과 함께 가면 왕께서 분명히 놀라 동요하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조금 뒤에 오십시오.”라고 하고 이후 홀로 나아갔다. 충필이 절의 문 앞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들어가서 지 장군(智 將軍)이 왔다고 아뢰자 왕은 기뻐하며 문 밖으로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지채문은 아뢰기를, “신이 적들이 탈취하여 숨겨둔 것들을 찾아내었는데, 실로 하공진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공진과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하공진과 유종을 불러 보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 창화현의 이속들이 왕의 일행을 해하려 하였으나, 지채문이 물리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1년(1010년) 12월 29일(음) 계유(癸酉))
○신사. 공주(公州)에 머물렀다. 절도사(節度使)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이하며 아뢰기를, “어찌 성상(聖上)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리와 눈을 맞아가며 이러한 극한 상황에 이르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라고 한 뒤 이어서 의복·허리띠·토산물을 올리니, 왕이 기뻐하며 받아들여 옷을 갈아입고 토산물을 호종하던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렀는데, 역리(驛吏)들이 모두 도망가고 수라간[御廚]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김은부가 음식을 때에 맞추어 가져와서는 아침저녁으로 나누어 대접하였다. 왕이 지채문에게 말하기를, “현덕왕후(玄德王后)는 임신한 상태이기 때문에 멀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본관(本貫)인 선주(善州)가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앞서 논의한대로 고집하였으나, 왕은 말하기를, “형세 상 어쩔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왕후를 보냈다.
〈왕이〉 여양현(礪陽縣)에 머물게 되자 장수와 병졸들이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 지채문은 아뢰기를, “성조(聖祖, 태조)께서 통합하시던 때에 공이 있는 자에게는 비록 조금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셨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바야흐로 험난한 고비를 넘기기 위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있으니, 마땅히 먼저 넉넉하게 상을 내려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아 현안지(玄安之) 등 16인을 중윤(中尹)으로 삼았다.
- 공주에서 김은부가 왕을 성심껏 모시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7일(음) 신사(辛巳))
임오.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야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는데,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옛 백제(百濟)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겨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가서 묵었다. 이날 저녁에 조용겸이 왕을 머물게 하여 옆에 끼고 위세를 부리고자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흰 깃을 관모에 꼽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아왔는데, 지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게 하자 적들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함께 말을 타고 역의 청사(廳事)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채문은 지붕에 올라가 묻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이와 같이 하는가. 유승건이 왔는가 안 왔는가.”라고 하였다. 적들이 말하기를, “왔다.”라고 하자 다시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라고 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너 역시 누구냐.”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다른 말을 하니 적당이 말하기를, “지(智) 장군이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하기를, “네가 친종(親從) 마한조(馬韓兆)로구나.”라고 하고는 이윽고 왕명으로 유승건을 불러들였다. 유승건은 말하기를, “당신이 나오지 않으므로 나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유승건을 불러 어가 앞으로 데려가자, 유승건이 울면서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조용겸이 한 짓입니다. 신은 알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왕명을 받들어 조용겸을 불러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유승건은 밖으로 나와 도망쳤다. 왕이 양협(良叶)에게 명하여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도록 하였는데,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지채문은 꾸짖어서 그만두게 하고 이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움직이게 하였다가 이후에 전주로 되돌려 보냈다.
- 조용겸이 왕의 일행을 억류하려 하였으나, 지채문이 저지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8일(음) 임오(壬午))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넘어 신변의 위협을 받기 일쑤였다. 임진왜란 때 똑같이 몽진했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라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선조가 나서서 설득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하여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해결되었다.

임금의 몽진에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의 태도가 이처럼 다른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현종 당시 고려는 지방분권에다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11]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통일 신라 말기에 호족들이 득세했다는 구절과 함께 조선 태종이 실시했던 사병 철폐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다만 이때의 상황들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신라 말이나 고려 말은 이미 수십년간 중앙정부가 막장이 되면서 토호들이 스스로 나라나 다름없는 세력을 쌓고 수천명의 군대를 보유했을 만큼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는데, 목종 재위 말기가 혼란했다지만 그 지경까지 갔다고 볼 만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목종을 폐위한 병력도 원래는 중앙군이었기도 하고. 현종을 위협했다는 아전도 호위 금군이 겨우 50명에 불과했으니 자기 가병만 가지고 임금을 위협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임용한. <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현종의 일행을 보고
“임금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라며 거만을 떨었다.[12] 현종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라고 외치게 했다.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이면서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이 공격해오는 위기를 맞는다. 당연하지만 고려의 호족들은 사병을 보유했으므로 조금 전 현종을 욕보인 아전과 연관된 군대라고 추정된다.

이 공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경종(제5대)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제6대)의 2비 문화왕후(당시 천추태후는 황주에 유배중)와 시녀 2명, 승지 몇 명만 남았다.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때 임신중이었다![13]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했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했다. 그 다음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앗겼던 안장을 되찾아왔다.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契丹)의 군주가 경성에 들어와 태묘(大廟)·궁궐·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날에 왕이 광주(廣州)에 머물고 있다가 두 왕후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요탄역(饒呑驛)까지 가서 이내 찾아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며 3일간 머물렀다.
-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2년 > 1월 > 거란이 개경을 점령하다 (1011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 1011년 2월 6일(양))

현종의 몽진은 이처럼 고난에 고난을 거듭했고,[14] 심지어는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다. 온갖 반란에 휘말리고 고초를 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도중에 도와준 사람이 나주 백성들과 공주 절도사인 김은부 딱 1명이었다고 한다. 어찌나 고마워했던지 현종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딸 3명 모두를 왕비로 삼았다.

현종이 공주를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한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曾聞南地在公州,仙境玲瓏永未休。
到此心情歡樂處,群臣共會放千愁
일찍이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경의 영롱함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렇게 마음 즐거운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모여 온갖 시름을 놓아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수도 개경이 거란군에게 함락되고 거란군은 개경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는데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이었다.[15] 하공진은 오히려 자신이 거란주와 만나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뒤 고영기와 함께 사신이 되어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났다. 당시에 현종 일행은 창화현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마주쳤다. 이때가 실로 고려 역사상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당시 거란 선봉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10여리에 불과했다. 좋게 잡아도 4~5km밖에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만약 붙잡혔다면 인조가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직접 조아렸던 삼전도의 굴욕 프리퀄이 되었을 것이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났다. 그리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현종은 이미 그 밖까지 벗어났다고 속였다. 그러자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 국왕의 친조(직접 황제를 알현함)를 조건 삼아 하공진을 인질로 잡고 퇴각했다. 훗날 성종은 하공진을 회유하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는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붙잡혔고, 이때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거란 땅에서 처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하공진을 죽인 후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하공진은 현종이 몽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후에 현종은 하공진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에 추증했고, 영정을 그려 제사지냈으며, 진주성에 추모비도 세워줄 만큼 대우해 주었다.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번개처럼 기습하여 적에게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0,000명을 격살한 귀주 별장 김숙흥의 대 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 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000명, 포로 3,000명,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500명, 탈환인 1,000명,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000명, 탈환 1,000명, 마지막 혈전인 "애전 전투"에서 사살 1,0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들의 거의 모든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었고,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포로는 물경 30,000명에 달하였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였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정호의 《동여도》에 의하면 평안북도 영변군 곽산군 북쪽에 '애전현'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한다. 거란 군사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맞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애전에서도 거란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곧 거란주가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다. 대거란 제국 황제의 친위군이었던 만큼 꽤 많은 정예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 전투에서 성종의 친위군을 상대로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힘이 다한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과 동시에,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 수천 명의 병력으로 곽주를 탈환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여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후퇴시켰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적군을 격살하는 동시에 3만에 달하는 포로를 구출해낸 양규의 공적은 정말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엄청난 전공인데 전근대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는 고려가 제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마저 마련해 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은 군사로 징집되거나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의 분전 덕분에 대 거란 외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성종 야율융서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의 게릴라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후방이 포위되는 위기까지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 그냥 물러날 수 없으니 입조를 수락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허겁지겁 물러났다.

거란 입장에서 양규를 무시해 버리면 보급로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도망갔던 고려 귀족들이나 문신들, 무신들, 병사들이 갑자기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다. 고려의 주전파들이 도망을 갔다고는 하나 현종은 여전히 무사했다. 거기에 양규가 아직 배후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고려의 신민 모두가 들고 일어날 것은 불 보듯 자명했기에 한반도 지리를 잘 모르던 성종과 거란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에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판국이었다.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정예군과 싸우다가 전멸하고 말았지만 거란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다. 게다가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으나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흥화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습격했다. 정성의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이 여진을 이끌고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현종은 지채문의 활약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으며,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피로가 매우 누적된 상태였고, 양규, 김숙흥 등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공진이 전라도 남쪽에도 고려 땅이 수천리는 더 있어 현종이 얼마든지 더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며 속여 결국 거란군이 물러나게 한 것은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이다.

전쟁이 끝난 후 양규는 그가 행한 대 활약에 걸맞은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썼을 만큼 예우했는데 원래 천자의 조서는 임금이 대략 내용만 지시하고 실제 글을 쓰는 신하(한림학사)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양규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현종이 직접 글을 썼다. 현종은 이외에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행할 때나 공신을 치하할 때 직접 문서를 작성했는데, <현화사 비문>이나 당시 기록으로도 현종은 자애롭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규의 업적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니 《고려사》에서도 직접 현종이 작성했다고 강조했다.

이 조서의 내용은 죽을 때까지 양규에게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수신전의 기원이 되는 '구분전'이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을 장군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는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었다. 뒷날 고려 최전성기의 명군이었던 문종(제11대)은 두 영웅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이후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임금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사실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거란의 2차 침공은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속에서도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로인한 엄청난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을묘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논어(論語)』에서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지 못한데 임금이 어찌 풍족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최근 전쟁 때문에 백성들이 농사일을 잃고 길가에 굶어죽은 시체가 너무나 많으므로, 백성의 이와 같은 형편을 생각하니 어찌 내가 홀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상식대관(尙食大官)에게 명하여 반찬수를 줄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 왕이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3년(1012년) 2월 17일(음) 을묘(乙卯))

하지만 현종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겠다 하여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고려 역사상 건국 이후 최초로 수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고려는 점차 피해를 수습함에 따라 힘을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허수아비 젊은 왕이었던 현종은 진정한 고려의 군주로서 본격적으로 통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현종과 고려의 앞에는 아직도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다.

2.2. 김훈·최질의 난 진압

2차 여요전쟁이 끝난 이후 현종은 다가올 거란과의 일전에 대비해서 군사력을 키우고 나라를 정상화 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현종의 치세 때 또 하나의 중차대한 반란이 일어나게 되니, 바로 거란의 제3차 침공을 대비하던중에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 그것이었다.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군비 확충으로 인해 나라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결국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 할 전시과에 문제가 생기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김훈과 최질의 반란사건은, 현종이 집권하던 재위기에 일어난 군사반란으로서 대략 150년 정도 먼저 첫 번째 무신정권이 세워졌으나 약 4개월만에 무너진 사건이었다.

우선 반란의 핵심 주모자인 김훈 최질은 2차 여요전쟁(1010년) 때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른 고위 무관들로, 김훈 강조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같은 좌우기군 장군인 김계부, 이원, 신녕한과 더불어 기습공격을 하여 거란군을 잠시 퇴각시킨 바 있는 인물이었고, 최질은 통주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통주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행영도통판관 노전[16]과 그와 함께 온 합문사 마수를 홍숙과 함께 억류한 뒤 항전을 주장하여 같이 있던 방어사 이원구, 부사 최탁, 대장군 채온겸, 판관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건히 지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질은 여요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와중에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17]가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것에 반발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즉,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무신들이 문관직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백관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정책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의 2차 여요전쟁의 거란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커다란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여요전쟁의 거란 침입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1년차(1010년)에 벌어진 일로 그러니까 반란 4년 전의 일이었다.[18]

참고로, 이로부터 불과 2년 뒤에 요나라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미 거란의 2차 침공이 끝난 직후부터 거란과의 산발적인 충돌과 전투들을 계속 벌이던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년 ~ 1011년, 3차는 1018년 ~ 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8년까지의 전간기에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는 피해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힌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빼앗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사실상 전시상황임에도 월급이 안 나와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버린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여 불만이 폭발한 무신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자신들의 월급을 빼앗아간 문신들을 채찍으로 두들겨팬 뒤 귀양을 보내버리고 일종의 무신정권을 세웠다.[19]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이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현종에게 요구했는데 현종은 살기등등한 이들의 협박에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덕분에 김훈과 최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만드는 한편, 어사대(御史臺)와 삼사(三司)를 각각 금오대(金吾臺)와 도정서(都正署)로 바꿔버리면서 권력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현종이 전 화주방어사였던 왕가도( 이자림)[20]이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 무신들을 모두 서경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에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해버린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숙청해버리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하면서 고려사 최초의 무신정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21]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비중이 적은 사건이다.

어쨌든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뒷수습만큼은 잘 했다. 원래대로라면 반란을 저지른 만큼 삼족을 멸해버려도 모자란 사건이었지만 주살한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을 하지 않았으며,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이는 군인들이 고려를 위해서 활약한 공을 인정해주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도, 그들이 무력으로 왕(현종)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처벌하여 앞으로의 폐단을 막는 일도 왕조 시절 임금으로서 겸했던 것이다. 이는 직전에 바로 전대의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까지 현종이 직접 겪어봤던 것을 생각해보면, 필요한 선에서 반란의 주모자들과 그 주변 관련자들에게 정말로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현종은 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크게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0,000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 것 아닌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리스크가 꽤 클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종은 요나라와 산발적으로 전쟁을 벌여야 했고, 결국 해당 조치의 리스크가 큰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런 조치를 안 취했을 경우엔 오히려 2차 무신반란의 가능성마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현종이 이런 대책을 취했고, 기존 문신들도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훗날 이런 교훈을 완전히 잊어서 터졌던 것이 의종 시절 경인년에 일어난 2차 무신정변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현종의 재위 기간 중에 일어난 흑역사이며 오점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문제있는 정책을 택하였고 문신들이 무신들의 월급이라 할 수 있는 영업전을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정책을 방치해버린 현종 본인의 실계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해당 정책을 고안하고 집행했던 문신들의 역량 부족도 또한 비판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무신들이 문신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던 것이고 현종까지 폐위하지는 않았던 덕분에 정변의 도중에도 문신들을 죄다 죽이지는 않고 - 구타만 한 다음에-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고 무신들이 현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강조의 정변 당시 목종의 사례처럼 왕을 죽인 다음 새로운 허수아비 군주를 옹립하거나 무신정변같은 최악의 상황까지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정변의 진압 이후 신하들은 현종에게 더욱 더 충성하게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김훈·최질의 난 문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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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여진 해적 방어

현종은 거란 뿐 아니라 여진과의 전쟁에서도 고려를 지켜야 했다.[22] 거란이 육지로 침략했다면 여진은 바다를 통해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들은 동여진의 포로모타부(蒲盧毛朶部)로 포시에트만에 있는 발해의 항구를 이용하여 고려의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특히 동여진 해적의 동해안 침략은 이미 목종대부터 시작되었다. 1005년(목종 8) 동여진이 등주(登州)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등주를 비롯한 동해안 북부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침략했을 가능성이 크다. 목종은 동여진의 등주 침략 이후 동여진 해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축조하였다.
1) (목종) 8년(1005)에 진명현(鎭溟縣)에 성을 쌓았다. 510칸이고, 문(門)은 5개이다.
2) 금양현(金壤縣)에 성을 쌓았다. 768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3) 곽주(郭州)에 성을 쌓았다. 787칸이고, 문(門)은 8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5개, 차성(遮城)은 2개이다.
4) (목종) 9년(1006)에 용진진(龍津鎭)에 성을 쌓았다. 501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5) 구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1507칸이고, 문(門)은 9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41개, 차성(遮城)은 5개, 중성(重城)은 168칸이다.
6) (목종) 10년(1007)에 흥화진(興化鎭)과 울진(蔚珍)에 성을 쌓았다. 또 익령현(翼嶺縣)에 성을 쌓았는데 348칸이고 문(門)은 4개이다.
7) (목종) 11년(1008)에 통주(通州)에 성을 쌓았다. 등주(登州)에 성을 쌓았는데 602칸이고, 문(門)은 14개, 수구(水口)는 2개이다.

《고려사》 권82 <병지>(兵志) -성보-(城堡)의 기록이다.

이러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대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다. 현종은 즉위년(1009)에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진명현의 입구에 정박시켜 동북의 해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곧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면서 동여진 해적에 대해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거란과의 혈전이 한창 중이던 현종 2년(1011) 8월,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고 다음해인 현종 3년(1012) 다시 동여진 해적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등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청하현·영일현·장기현에 대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고려군이 막아냈지만,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계속되는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의 성보 축조로 이어졌다.

현종은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자, 같은 달 청하(淸河)·흥해(興海)·영일(迎日)·울주(蔚州)·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동해안 북부에 집중적으로 축성하였던 목종과 달리 현종은 동해안 남부에 축성하였다. 이는 그만큼 동여진 해적이 남부 동해안까지 위협적으로 침략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당시 개경·서경과 함께 고려의 3경(三京) 중 하나였던 신라의 옛 수도 경주가 침략당한 만큼 고려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방비에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이에 현종은 대대적으로 수군(水軍)을 양성하고, 이를 지휘할 도부서(都部署)를 설치하였다. 도부서는 동계의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와 북계의 통주도부서(通州都府署)·압강도부서(鴨江都部署), 그리고 동남해를 관할했던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있었다. 현종이 즉위한 해에 바로 75척의 함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종 대부터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과 함께 수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종은 수군을 계속 증강시켰고, 그 규모는 현종 10년에 이르러 무려 수백 척에 이르렀다.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매우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의 대응으로 더 이상 동해안을 침략할 수 없었던 동여진 해적은 우산국과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고려의 방비가 효과를 보았던 방증이다.

그 결과 우산국은 여진족 해적에 의해 초토화되어 많은 우산국인들이 고려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산국의 피해는 150여년이 지난 의종대까지 복구되지 못하였다. 의종 11년(1157) 김유립을 보내 울릉도의 거주 가능성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이에 김유립은 촌락의 흔적이 있지만 사람이 살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동여진 해적은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 이키 섬(壹崎島)을 비롯한 규슈(九州)의 북부지역과 하카타 만(博多灣)을 공격하였고 이후 한반도 남해안으로 도주하였다. 일본측 기록에 해적선들이 섬에 숨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나온 이 섬들이 동해안의 울릉도인지, 남해안의 다도해인지 주장이 엇갈린다. 현종 10년(1019) 해적선 8척을 포획하여 일본인 259명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1012년 경주 공격에 실패하였던 동여진 해적이 세력을 재정비한 이후 감행하였던 것이었다. 관련영상

2.4. 초조대장경판 발원

성종 대 팔관회는 유교정치를 추구하면서 다채로운 의례 내용 등이 간소화되었고, 법왕사 행차 등만이 남았었다. 이와 달리 현종은 신라계이지만 태조 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즉위과정 상에 있었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또 거란 침입에 대한 대응을 위해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고 민심 통합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태조가 행했던 팔관회 복설은 이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한정수: 고려 현종~정종 대 팔관회(八關會)의 정비와 그 의미, 한국사연구회(KCI 우수등재), 2021』
불교를 국가운영에 적극 활용한다는 것은 유교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민인에 대한 적극적인 보시布施를 장려함으로써 민인의 지지를 기대하였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기층민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한편 기층민의 신앙과 관련된 산천이나 산악山嶽 등 여러 신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존숭하였다. 이것은 토착신앙을 적극 인정하는 것이며, 토풍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기층민의 정서와 신앙을 존숭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긴요한 일로 보인다.
『이병희: 고려 현종대 사상과 문화정책, 한국중세사연구(KCI 등재)』
적의 침입으로 황도 개경이 함락 당해버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지나, 이제 막 숨을 돌린 고려의 나이 어린 사생아 군주는 지방의 호족들을 제압하기에 앞서 민심의 이반부터 다스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1011년(현종 2년) 부처의 법력을 통해 불안에 빠진 나라의 신민들을 안정시킨 뒤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목적 하에 《초조대장경》이 발원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 최초의 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000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고려 회화의 수준과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북송에서는 억불 정책이 지나쳐 많은 불교 경전을 불태워버렸는데 나중에는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으니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불교 문화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세계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북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북송의 것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전 세계 두 번째의 한역 대장경으로서 고려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그 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의 인경본만이 전하고 있다. 대마도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둑맞았으나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 기관에서 인출본을 꽤나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상당한 수의 《초조대장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팔만대장경》도 이 《초조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한편 광종 때 벼락을 맞아 무너졌던 경주시 황룡사 9층 목탑을 현종 때에 이르러 다시 세우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진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5. 장인 감축과 농업 장려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에서는 먹는 것을 최우선으로 꼽았으니, 이것이 진실로 부국강병을 위한 도(道)이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사람들의 습속이 가볍고 사치스러워져서 본업을 버리고 말단만을 좇아 농사짓는 법을 알지 못한다. 여러 도의 금기방(錦綺坊)·잡직방(雜織坊)·갑방(甲坊)의 장인[匠手]들은 모두 선별하여 감축하고 이들로써 농업에 나아가게 하라.”라고 하였다.
- 각 도의 장인의 수를 감축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3년(1012년) 3월 미상(음))
〈현종(顯宗) 3년(1012)〉 3월 하교(下敎)하기를, “홍범(洪範) 8정(政)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근래 인습(人習)이 경박하고 사치스러워져서 본업(本業)를 버리고 말업(末業)을 좇아 농사에 대해 알지 못하니 여러 도(道)의 금기방(錦綺坊)·잡직방(雜織坊)·갑방(甲坊) 장인들을 모두 조사해 인원을 감축하고 농업에 종사시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농상의 장려를 하교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3년(1012년) 3월 미상(음))

현종은 또한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서는 농업이 우선이라 판단하여 여러 수공업 장인들을 감축하고 감축된 장인들을 모두 농업에 종사시키도록 하였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 조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대 현종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2.6. 칠대실록 편찬

2차 여요전쟁 때 개경이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고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기록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현종 4년(1013년) 9월 감수국사 최항 등으로 하여금 《7대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덕종 3년(1034년) 황주량에 의해 완성되었다.

2.7. 고려 군현제의 확립

고려 6대 왕 성종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명군 중 1인으로, 고려의 향직 제도를 개편하고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난립하는 호족 세력을 견제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이러한 성종의 지방 정책을 이어 나간 현종은 그 혼란스러웠던 거란과의 전쟁 와중에 내치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치적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손에 꼽는 것이 바로 이 무렵까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1018년(현종 9년)[23] 전국에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을 두어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임금의 권한을 강화시킨 후 드디어 체계적인 군현제를 확립하였다. 성종 시기 12목을 설치하면서 파견했던 12명의 지방관 수가 이때에 이르러 116명까지 확대되었으니, 이는 곧 고려 지방 제도의 완성이었다.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던 현종은 각 군현 호장(戶長) 등을 비롯한 향리들의 정원(定員)을 규정하고,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억눌린 호족 세력을 어르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써 그 자제들에게 과거(科擧)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1022년에는 지방 향리 세력에 대한 호칭을 전면 개정하면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기나긴 전쟁을 극복하면서, 현종은 그 와중에 정치 세력들을 잘 다스리고, 쿠데타를 극복하고,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셨겠지만 고려 시대의 본격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한 것이 현종입니다. 자기가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해봤잖아요. 왜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요? 제도가 정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요. 지방을 관리가 아닌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다스렸으니까요. 그래서 (현종은) 지방제도 정비하고, 관리들을 보내고, 정치세력을 수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의 치세에, 그리고 전쟁 중에 해내요.
임용한. <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24][25]
이렇게 함으로써 5도 양계 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 - 목(牧) - 도호(都護) - 군(郡) - 현(縣) = 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이 완비되었다.

2.8. 3차 침공과 금교역 전투 승리, 그 후

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송(宋)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거란(契丹)이 해마다 침략한다고 알렸다.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성스러운 위세를 빌어 지혜로운 계략을 보이고자 하므로, 혹시 위험한 때에 이를지 모르니 미리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 송에 구원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다 (고려사 현종(顯宗) 6년(1015년) 미상(음))

반거란 정책을 구사했던 고려는 2차 침입 이후에도 거란을 견제할 목적으로 계속해서 북송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특히 1015년에는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요나라와 우호 맹약을 맺은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고려는 북송의 지원 없이 거란의 재침공에 혼자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26]

그렇게 1018년(현종 9년) 거란의 동평왕(東平王) 소배압이 황실 최정예 기병으로 이루어진 10만의 대군을 앞세워 다시금 고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제는 민심을 어루만지고 왕권을 튼튼히 하면서 고려의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난 현종과 강감찬을 필두로한 고려군이 거란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다만 현종 본인도 의도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강감찬을 사령관으로 하는 주력군을 모두 북쪽으로 보내 거란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적장 소배압은 고려군의 공격을 감수하면서 그대로 진격하여 개경 100여리 밖까지 접근해온 것이었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2차 칩입 때처럼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방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 저곳에 배치해둔 별동대를 계속 보내 요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자주(慈州) 내구산 전투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진에서는 시랑 조원(趙元)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다. 기록에 따르면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10,000여 명을 참획(斬獲, 베거나 사로잡음)했다고 한다.
(1019년)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300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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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고려군은 또한 동북면의 병사 3,300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했다. 동북면(현재의 함경남도)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명 ~ 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는데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당시 호랑이 늑대와 같은 맹수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가졌다. 또한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해당 지역은 수시로 소규모 교전이 발발했고, 조선시대에는 툭하면 예방전쟁으로 레이드를 뛰고 다니던 동네다.[27] 군대에서 실전경험만큼 병력의 질을 높이는 훈련은 없다. 그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 동북면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은 체격이 좋은 북방 유목민족이 사실상 공존하는 지역이다 보니 근대 신장조사에서도 다른 한반도 지역보다 평균신장이 클 정도로 체격요건도 좋았다. 화기로 전쟁하는 현대에도 병사의 체격이 튼실하면 전투력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가지게 되는데, 하물며 개개인의 신체스펙이 현대전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냉병기 시대의 전장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지역의 병력 따위와 비교하기가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

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0,000명의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 / 위협하였다.

이렇듯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소배압은 2차 여요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 근처의 신은현(新恩縣)까지 도착했다. 사실 이것이 어리석은 선택은 아닌 게 요동 방어선을 우회한 거란에게 발해가,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군에게 조선이 각각 이렇게 패배를 당한 예가 있었다. 익히 아는 《삼국지》의 촉한도 등애의 산을 통한 우회기동에 무너졌고, 프랑스도 나치 독일에게 이런 방법으로 점령당했다.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신유일(辛酉日)에 소손녕(蕭遜寧)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경성에서 100리 떨어진 곳이었다. 왕이 명하여 성밖의 민호(民戶)를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와 청야(淸野, 적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도록 들판을 치움)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소손녕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찰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회군(回軍)하겠다고 알리고는 몰래 후기(候騎) 300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왕이 군사 100명을 보내어 밤을 틈타 기습해서 그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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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1019년 1월 3일}}}
그러나 고려의 현종은 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었다. 송악산 산성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거란의 재침을 대비해 만든 요새였다. 그 외엔 마치 포격이라도 맞은 듯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새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 병력들뿐이었다. 청야전술에 군량 보충이 막히고, 젊은 임금이 수도에서 결사 항전하니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다. 거란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배압은 꾀를 내어 수하 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의 통덕문으로 가서 개경을 수비하고 있었던 고려군에게 "이제 우리 철수합니다."하고 을 쳤다. 물론 그렇게 뻥을 쳐서 안심시킨 후에 몰래 척후병 300명을 보내 개경에 잠입시켰다. 즉, 개경의 방비를 소홀히하게 한 뒤 척후병을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다.

하지만 거란군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회심의 작전마저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열기 위해 잠입시킨 척후병 300명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 황해도 금천군)에서 고려군 100명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것은 현종이 군사를 쓸 줄 알았다는 이야기인데 기병은 돌격과 공격에도 자주 사용하지만 제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기습이다. 기병이 야간이든 아니든 기병의 기동력으로 기습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거 유목국가들이 자주 쓰던 방식이며, 역대 중국 국가도 여러모로 골치를 앓은 적이 있었다. 당장 한나라 당시에도 흉노의 약탈에 힘들게 쌓은 장성도 무용지물이었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이는 사실 무시무시한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군사수가 부족한 쪽에서 별동대를 움직일 때는, 소위 말하는 뻥카를 위해서라도 별동대의 규모를 키워놔야 상대가 수적 우위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렇게 300명 잡는 곳에 100명을 보낸다는 것은, 100명이 300명에게 이기느냐 지느냐를 떠나서 고려 측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행위로, 전략적인 불리함을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훗날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1388)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전 병력을 전방으로 보낸 고려의 개경 수비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몇 천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시성 전투, 귀주성 전투, 진주 대첩, 행주 대첩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만약 고려의 이 정예 100명이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이다. 300명 상대로 100명을 보내는 것 자체도 전략적 손해인데, 그 100명이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 100명은 일반 병사가 아닌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정예 중 정예인 병력으로 봄이 바람직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배압의 군대는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보급선마저 단절된 상태인데 개경의 방비 또한 철통 같았으니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하여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이것만으로도 현종이 심리적인 전술로써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개경에는 군사도 적었고, 무엇보다 산성이라기보다는 수도이면서 행정의 핵심인 평야성인지라 적에게 일단 포위당하면 병자호란 남한산성 때와 마찬가지로 수비측이 더 고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배압의 목적이 현종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인데 오히려 현종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소배압과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누가 이기나 끝장내 보자!"라는 식으로 강감찬이 보낸 추격 부대가 올 때까지 성 안의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싸운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국왕이 몽진하지 않고, 수도 개경에 남아서 항전을 택한다고 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용기백배하여 같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하니 백성들이 급하게 민병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소배압의 요나라 정예군은 사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란군 자신들은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현종과 고려 백성들의 항전 의지였고, 굳게 닫힌 개성 성문과 성벽뿐이었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28]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현종은 금교역 전투에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 전술적 승리를 거둔 끝에 적들의 사기를 꺽었고, 결과적으로는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의 귀주 대전은 이미 이긴 전쟁에서 적들을 몰살시켜 앞으로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버린 포위섬멸전이었다. 물론 포위섬멸전이었지만 당대 최강의 기병 군단을 보유한 거란군을 상대로 벌인 대회전이었고, 전투의 변수가 고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면 충분히 반대의 결과가 나올수 있는 상태였다.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저는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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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을 하였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의 주력군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귀주 대전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귀주 대첩은 현종 10년(1019) 2월 1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대승리를 이끈 명장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1019년 2월 5일로 현종이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맞이했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현종이 임시로 지은 누각에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머리에 꽂아주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현종은 강감찬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 開國男) 식읍 300호'
에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의 호를 내렸다.
파일:강감찬 장군에게 금꽃을 꽃아주는 현종대제.jpg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고려는 이렇게 승리의 기쁨을 누린 후 1년여간 3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에 매진했다.

이후 현종 11년(1020) 2월에 현종은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라고 해도 대승을 거둔 이후의 상황이니 당연히 발언권에서 고려가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말이 좋아 사대지, 거란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힘도 명분도 없었다. 제국의 최정예 부대가 귀주에서 대파되었기 때문에 이미 최강대국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되었고 이 전투로 인해 북송을 비롯한 여진도 "어? 거란은 무서워 보였는데 고려가 이겼네? 잘하면 우리도 이길지도?"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즉 거란의 형편상 내정을 안정시켜야 하는 문제가 우선시되었기에 고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 승리한 현종이 도리어 거란에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제스쳐를 취했던 것은 하루빨리 기나긴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한 평화주의적 실리 외교로 평가된다. 이제 천하는 아비규환의 전란 상태가 아니라는 선언을 현종이 주도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거란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북송에 당당히 어필할 수 있었고, 이는 곧 동북아 국제질서의 균형자라는 고려의 대외 위상 격상으로 이어졌다. 주도적인 외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고려는 나라가 더욱 부강해졌음은 물론 북송과 암묵적으로 연대하여 거란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챙긴 것이었다.

실제로 고려는 거란이 요구했던 강동 6주를 넘겨주지 않았고 현종이 거란에 입조를 하지 않음에 따라 거란에 항복하지도 않았다. 또 북송과의 잠시 단교를 선언했지만 물밑에서 교류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북송도 고려에게 귀주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해서 찬사와 감사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요나라가 고려 원정에 실패함으로써 군사·경제적으로 침체 되었기 때문에 북송도 당분간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현종이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위신을 떨친 셈이었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고작 27세였으니, 이후로도 거란이 고려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거란은 사실상 고려의 완전 병탄과 강동 6주 영토를 포기했다. 1차 침공 당시 요나라는 고려를 완전 병탄할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스처가 미리 있었으면 2차 거란의 공격부터는 애초에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요나라의 입장에서는 사대까지는 아니라도 고려가 중립적 입장만 표현했어도 당면 상대인 북송을 버려두고 고려를 먼저 선제공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의 주장. 하지만 앞서 언급했 듯 북송은 고려와 서로 1전어치의 군사적 도움도 주고받지 않았고 무엇보다 2차, 3차 침입 때의 요나라는 강동 6주 탈환이라는 목표가 분명 있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면 전략적 요충지인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무리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외교로 단순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또한 귀주대첩 이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전후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거란의 침공으로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어서 곤궁해지자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면서 전후 피해 복구에도 큰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현종(顯宗)〉 10년(1019) 4월 동주(洞州) 관내 수안(遂安), 곡주(谷州) 관내 상산(象山)과 협계(峽溪), 잠주(岑州) 관내 신은(新恩) 등 여러 현(縣)의 경우, 민(民)이 거란의 병사로 인해 곤궁해졌으므로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였다.
- 거란의 침략에 피해를 입은 주현에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10년(1019년) 4월 미상(음))

학계는 고려-거란 전쟁에서 고려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금교역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군주 현종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병력을 나누어 거란의 우회 기동에 대응한 강감찬의 전술과 수도 일대를 청야하여 거란의 전략을 맞받아친 현종의 전술은 모두 거란의 움직임을 조기에 읽고 전방과 후방 사이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고 여겨진다. 즉 귀주대첩은 단지 전방에서의 교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고려 후방에서의 정보전과 방어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가운데에서 거둔 성과이다. 현종이 청야전술을 통해 개경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거란의 전장주도권을 빼앗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유리한 전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임지원: 귀주대첩과 현종의 청야전술, 2021』
이상의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전방의 고려 군세와 별개로 후방에서의 입체적인 작전 전개가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특히 개경 방어전에서의 청야전술 결단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기까지 현종의 역할이 매우 주효하게 작용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위 귀주대첩으로 회자되는 마지막 고려-거란 전쟁은 강감찬이란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얻어낸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쟁의 전체적인 판세를 조망하며 완벽한 작전 전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치한 현종의 결단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결과였던 것이다.

3. 전후 행보

3.1.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

대거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만주 지역의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다. 연이어 탐라국이 공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의 추장이 찾아왔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이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 스페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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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또 일찍이 거란이 “우리와 서하, 고려는 연달아 중원을 공격하여, 서하는 관서(關西)를, 고려는 등주(登州), 내주(萊州), 기주(沂州), 밀주(密州) 등을 취할 것이다.”라고 한 주장을 들었습니다. 또 (거란이) 말하기를, “고려는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어 이 같은 여러 주를 오래 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고 걱정되니, 단지 병사를 풀어 산동의 관청과 민가의 재물을 크게 약탈하여 가버리고 우리(거란)는 하동의 36주군을 차지하면 황하를 경계로 삼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오래되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말이 실현되면, 신은 조정 또한 제어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이 이와 같이 중국을 엿보고 있는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니 신은 (지금 같은 상황이) 끝내 오랫동안 이어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릇 고려가 여러 차례 표를 올리면서 조공하기를 바라고 조정은 끝내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려 거란을 섬기게 되면 (고려가) 거란의 쓰임이 되는 원인이며, 거란이 가르치는 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의 조공을 허락한다면 바로 고려의 뜻을 이루어주는 것이니, 반드시 거꾸로 우리의 쓰임이 되고 거란이 어떻게 고려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고려가 비록 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거란은 고려를 꺼리고 있는 것을 누가 알까 합니다.}}}
천성 3년(1025)에 거란은 언제나처럼 고려를 정벌하였고, 같은 해에 조정은 이유(李維)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고려가 거란의 군대 20만을 죽이니 한 마리의 말도 돌아온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은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면서 감히 전쟁을 더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반드시 거란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도움을 구할 수 있으니, 신이 헤아려 보건대 거란은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된다고 의심을 하게 되어 끝내 모든 무리를 다해 (송을 향해) 남하하지 못하게 되어 이것만으로도 중국의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시행하는 데에 의심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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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又嘗聞契丹議曰, “我與元昊·高麗, 連衡攻中原, 元昊取關西, 高麗取登·萊·沂·密諸州.” 又曰, “高麗隔海, 恐不能久據此數州, 但縱兵大掠山東官私財物而去, 我則取河東三十六州軍, 以河爲界.” 臣聞此久矣, 萬一果如此說, 臣謂朝廷亦無以制之.

外寇如此窺中國, 因循日過一日, 臣不知終久如何. 夫高麗累表乞貢奉, 朝廷終不許, 遂決志事契丹, 所以爲契丹用也, 契丹所敎無不從. 朝廷若能許高麗進貢, 正遂其志, 則必反爲我用矣, 契丹何能使之耶. 臣熟知高麗雖事契丹, 而契丹憚之.}}}
天聖三年, 契丹常伐高麗, 是年, 朝廷遣李維奉使, 高麗殺契丹兵二十萬, 匹馬隻輪無回者. 自是契丹常畏之, 而不敢加兵. 朝廷若得高麗, 不必竢契丹動而求助, 臣料契丹必疑高麗爲後患, 卒未敢盡衆而南, 只此已爲中國大利也, 亦願陛下行之無疑.
- 《속자치통감장편》 권150의 "거란의 침략에 방비해야 한다는 추밀부사 부필과 한기 등의 상언과 방책" 중 일부
거란은 많은 국력이 소모된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는 거란의 정책 기조가 팽창주의에서 내치 위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거란은 패전으로 인한 국력 손실을 보강해야만 했지만, 송과는 전연의 맹으로, 고려와는 전쟁 종결로 인해 그 나라들 방면으로는 팽창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대외 팽창이 좌절된 결과, 거란은 내지 개간을 통해 농업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으며, 도종 때에 이르면 사실상 유목 국가에서 농업 국가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농업 생산의 확대는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거란은 재정 부족 타개를 위해 송에게 세공(歲貢)의 증액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한 송의 재정 부담은, 훗날 송이 금과 연합하여 거란을 공멸했다가 도리어 금에게 수도가 함락되어 남송을 건국하는 과정의 먼 요인이 되었다.[29]

반대로 고려는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에서 당대 최강 요나라를 꺾은 강대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는데, 저 멀리 발해 북단에 위치했던 철리국, 불내국, 동흑수국으로 대표되는 동·북여진의 여러 나라들은 물론 탐라국 우산국 외 일본 규슈 등지의 지방 세력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균형자로 거듭난 고려는 북방의 거란, 중원의 북송과 나란히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요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심지어 현종의 삼남 문종대에 이르면 거란에 조공을 바쳐 왔던 서여진마저 고려에 귀부하였으니, 귀주대첩 이후 고려가 최전성기로 돌입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확실한 이익을 모두 취한 것이다.
이 달에 이작인(李作仁)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契丹)에 가서 번국(藩國)이라 칭하며 공물(貢物) 바치기를 예전처럼 할 것을 청하고, 또 구속되어 있던 거란인(契丹人) 지라리(只刺[剌]里)를 돌려보낼 것을 (알렸는데, 그는) 억류된 지 무려 6년이었다.
- 고려사 권4 > 세가 권제4 > 현종(顯宗) 11년 > 2월 >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다
또한 전쟁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 즉, 사대관계를 복구하였다. 이는 양국이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의 성격은 조공국으로서 침략해 온 종주국을 방어하는 식이었기에 고려가 거란측으로부터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보받고 거란에게 사죄하는 식으로 양국간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30] 다만 전쟁 승리를 바탕으로 높아진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반영되어 실질적으로 고려는 거란과 송을 등거리에 두는 외교관계를 추진했다. 즉, 해당 조공-책봉 사대관계는 명목적이였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국익에 손해가 예상되는 거란의 요구는 고려가 당당히 물리칠 수 있었다.[31] 실제로 전쟁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복구함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약 반세기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송나라와 고려 양국 모두 서로의 필요성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접촉은 계속 유지하였다.[32]

3.2. 거란 견제와 흥료국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1014년에 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을 막은 이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송나라에 연호를 요청하면서 송나라에게 황제 존호 사용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다.

한편 현종은 요나라에 대한 추가적 공세로 발해부흥운동 국가인 흥료국의 건국을 틈타 압록강 동쪽을 공략하였으나 곧 실패하면서 흥료국의 지원 요청도 묵살하였다.

현종 재위 20년차인 1029년 거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거란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발해 유민들이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를 거점으로 독립을 시도한 것이다. 동경 요양부는 옛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곳으로 발해의 영토였다. 주동자 대연림(大延琳)은 《 고려사》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33]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갈수록 거란의 탈취와 강압적 통치가 심화되면서 동경 시민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연림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동경의 지방관들을 체포·제거한 후 통제권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곧이어 국호를 '흥료(興遼)', 연호[34]를 '천흥'(天興)이라 하고 나라를 건국했다. 이 때부터 흥료국과 고려의 접촉이 시작되는데 1차 연락은 1029년 9월 흥료국의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이 고려에 와 건국을 고(告)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고려사》 < 곽원 열전>에는 같은 해에 거란도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흥료국과 거란의 요청을 두고 현종이 고심하고 있을 무렵 당시 형부상서( 조선의 형조판서)·참지정사[35] 곽원이 현종에게 거란을 공격할 것을 주청했다. 곽원은 고려 조정의 대표적인 강경파였는데, 흥료국과 거란이 싸우는 틈을 타서 북진하여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른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조정의 3인자급이던 곽원은 꿋꿋히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고 결국 일으켰다고 한다. 정식 인가를 받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당시 고려의 군사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또한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으며 고려가 군대를 얼마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고 《고려사》 <곽원 열전>에는 단지 그 결과만 두 글자로 기록하였다. '불극'(不克, 이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곽원은 이 군사 행동의 실패로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얼마 안가 1029년 11월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마찬가지 《고려사》의 기록 부재로 이때 거란의 반응 역시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대연림은 9월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북진 책임자 곽원은 11월에 죽었으니 고려의 북진은 아무리 길어도 2~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급박하게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요사》에서는 흥료국이 건국되자 거란이 고려에 사람을 보내 협조를 부탁하는 한편 보주에 발해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를 파견한 후 대비하여 격퇴했다고 나온다. 즉, 거란도 흥료국이 일어난 틈을 타 고려가 침공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다는 뜻이다. 보주로 보낸 하행미에 의해 막혔다는 것을 보면 곽원은 보주를 공격하였고, 목적도 여요전쟁 중 빼앗긴 보주의 탈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란은 1015년 압록강을 건너 보주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의 전초 기지로 삼았는데 이 곳은 요동 한반도를 잇는 데다가 거란, 여진, 고려 등 3개 세력의 경계에 절묘하게 걸쳐있어 고려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보기에 상당히 껄끄러운 지역이었다. 이 때 곽원이 보주 공격을 실패한 뒤로 고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이 쪽 방면으로는 북진을 시도하지 않다가 예종 시기인 1117년에 금나라 요나라와 발해 유민 고영창이 세운 대발해를 차례로 제압하고 요동을 차지하면서 아직 요나라 영토로 남아있던 내원과 보주가 고립되자 금나라, 요나라와 협상을 통해 두 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보주 혹은 포주의 명칭이 '의주'로 바뀐 것도 이 때부터이다.
가을 9월 ○거란의 동경 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을 보내어, 건국(建國)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대연림은 발해(渤海)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데, 거란을 배반하여, 흥요(興遼)라 국호를 정하고 천흥(天興)이라 건원(建元)하였다

겨울 11월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郭元)이 졸(卒)하였다. 곽원은 성품이 청렴하고 문사(文詞)를 잘하여 대성(臺省)의 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리의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자중(自重)하지 않아서 이작인(李作仁)과 친밀하게 지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난하였다. 흥요국(興遼國)이 거란을 배반하기에 미쳐서 몰래 아뢰기를, “ 압강(鴨江) 동쪽 경계에 있는 을 거란이 차지해 막고 있습니다. 지금 가히 거란의 보루(堡壘)를 이제 기회를 엿보아 취할 수가 있습니다.”하니,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이 모두 상서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곽원이 고집하고 군사를 보내어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부끄럽고 분하게 여긴 나머지 등창이 나서 졸하였다.

2차는 1029년 12월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36]이 동여진(東女眞)과 북여진(北女眞)을 이끌며 거란과 전쟁을 시작했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걸(乞)했다. 《고려사》<최사위[37] 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대연정의 요청을 받고 여러 보신(輔臣)(조정의 고위직을 맡았거나 나이가 많은 신하)을 소환해 의논했다. 당시 문하시중 최사위는 "저(彼)들이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만 우선은 방어만 하자."며 의견을 올렸고 현종은 채택하여 지원을 불허(不許)한다. 특이하게 《고려사》 <현종 세가>나 <유소 열전>에는 대연정의 요청을 불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5차에 걸친 요청 중 유일하게 대연정의 요청만 현종의 답변을 기술했는데 곽원의 군사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와 현종이 직접 답했을 수도 있다. 곧이어 같은 달 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 判兵馬事)[38] 유소[39]를 최전방에 파견해 급변 상황을 대비하게 했다. 이 때부터 흥료국이 거란의 남부를 차지했음으로 잠시 고려와 거란 간의 연락은 단절됐다.

3차는 1030년 1월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 고길덕(高吉德)이 고려에 와 표문(表文: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바치며 장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고려사》 <현종 세가> 원문 기록에는 '걸사'(乞師)라 했다. 4차는 1030년 7월 흥료국의 행영도부서(行營都府署) 유충정(劉忠正)[40]이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보내 표문(表文)을 바치며 구원을 요청했다. 5차는 1030년 9월 영주자사(郢州刺史) 이광록(李匡祿)이 도와달라고 왔으나 그가 고려에 있는 사이 흥료국이 망했고, 이광록은 고려로 귀화한다. 이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동경 수복을 축하했고 거란은 '발해투주'(渤海偸主) 곧 '발해의 훔친(가짜) 군주'로 정황상 대연림을 의미하는 듯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다시 연락이 될 것이라고 사신을 보내 알렸다.
겨울 12월 ○흥요국의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이 동북 여진을 이끌고 거란과 서로 공격하면서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였다. 왕이 보신(輔臣)들과 의논하니, 시중 최사위와 평장사 채충순(蔡忠順)이 말하기를, “전쟁이란 위태로운 일이어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다만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봉수(烽燧)를 삼가 사세의 변동을 볼 뿐입니다.” 하니, 왕이 따랐는데, 이때부터 길이 막혀 거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 유소(柳韶)를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출사(出仕)함)시켜 진(鎭)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때 흥요국이 원병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소를 보내어 방비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는 곽원과 같이 전쟁을 시작하자는 파로서 유소, 왕가도 등 출병하여 거란의 성을 쳐부수자고 주청한 신하들도 있었고, 최사위와 같이 수성에 집중하자는 비둘기파와 서눌, 황보유의 외교로 풀자는 신하들도 있었다. 현종의 직접적인 의중은 어땠는지 알기가 힘들지만 처음 대연림이 병사를 요청했을 때 내부적으로 논한걸 보면 마음 한 켠에는 북진을 시도하려는 의지도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곽원 열전>이나 타 기록을 보면 조정은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기류가 우세했고, 현종 또한 크게 호응은 하지 않았던 듯. 곽원은 틈을 타서 의주를 탈환하자고 주장했지만 반대가 심해 독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고 거란도 이를 예측해 발해인 하행미를 보내 대비하고 있어 막아냈다고 한다. 결국 북벌 책임자였던 곽원은 부끄러움에 등창이 나서 세상을 떠난다. 이후 현종은 대연정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며 수비적 태도로 돌아선다. 이는 고려의 내부 사정도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흥료국에게 도움을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기는 1019년 여요전쟁이 끝나고 정확히 10년이 흐른 시기였는데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고려라는 국가가 완전히 회복되는데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여요전쟁 동안 고려는 30만, 20만 대군을 계속 출정시켰고 백성들의 피로도가 높았다. 이는 거란도 마찬가지로 40만, 10만 대군을 계속 출진시키며 국력을 소비했고 흥료국과 같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됐으니 현종은 재차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부담을 가졌을 수밖에 없었을 것.

대공사도 문제가 됐을 수 있는데 고려는 개경의 나성을 짓기 위해 20년을 썼다. 나성을 짓는 동안 인부들이 크게 고생하여 현종이 부담을 줄여준 기사가 남아있으며 나성 완공 후에는 조세를 걷지 않았을 정도였다. 또한 북방에 수많은 진(鎭)과 성(城)을 설치했는데 진과 성을 세웠으면 군대가 주둔해야 한다. 군대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고 그들을 보조해줄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장기 거주를 희망하거나 강요된 군인과 보조 인원들은 가족이나 친지를 데려올 것이고 이들이 또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하여 1029년에야 겨우 이런 공사들이 끝을 보았는데 곧바로 인력을 쭉쭉 소모하는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10년 동안 국력을 회복했어도 손실이 컸을 것이다. 이외에도 흥료국과 거란의 체급 차이도 한 몫 했을 텐데 고려 입장에서야 1번 몰살시켜 본 거란이 싸울만하겠으나 동경 요양부와 그 근처 지역만 끌어모은 흥료국은 어차피 거란의 상대가 안됐다. 고려 입장에서는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승패가 뻔한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거란 또한 흥료국 건국 후 고려의 개입을 크게 경계하여 겉으로는 고려에 사정을 설명하며 협력하자는 뉘앙스를 보내면서도 실제로는 고려의 침입을 대비하여 의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의주와 내원성은 예종 대인 1117년 3월에 탈환된다.

이후 흥료국은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고려는 거부하였고 이후 거란에 멸망당한다. 1차 지원 이후 더이상 지원하지 않은 것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전쟁을 벌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선택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발해 부흥운동과는 별개로 고려의 북진정책 기조는 그대로 이어져서 고려라는 왕조 자체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기도 하고.

거란족의 침입 외에도 여진의 침입이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종 10년(1019) 4월 ○ 병진(丙辰)에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선 8척을 잡아 적이 약탈한 일본 남녀 259명은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보내어 그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출처 : 《高麗史》 권5, 무진 19년(1028) ○ 여름5월에 여진이 와서 평해군(平海郡, 慶北 蔚珍)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적선(賊船) 4척을 추격해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
출처 : 《高麗史》 권5

그 뒤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요의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사》에는 1030년부터 1033년에 이르는 3∼4년 동안 약 740명의 발해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고 전한다. 대연림이 고려에 수 차에 걸쳐 원군을 청했던 사실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역사 의식이 일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란의 남부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여진과 발해인들도 거취에 여러 패턴이 나타난다. 우선 1029년에는 여진 총 500여 명이 배 40척을 타고 3번이나 고려를 공격했는데 고려는 이를 모두 격퇴했다. 거란인 조올(曹兀)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귀화했고 여진 족장 쾌발(噲拔)이 자기 부족 200호를 데리고 귀화했다. 반대로 1030년에는 동여진이 5차례에 거쳐 말 수십 마리, 선박 7척, 검과 창, 철갑 수십 개, 화살 180,000개를 바쳤다. 근데 이렇게 많은 조공품을 들고오면 고려 입장에서는 천자국으로의 자존심은 세워지지만 동시에 하사품을 그만큼 맞춰서 줘야되기 때문에 은근 피곤했을 것이다. 실제로 3대 정종은 말 700마리와 토산품을 조공하러 온 여진에게 은제 가구, 비단, 베 등을 일일이 하사했다. 이런 것이 조공'무역'.

또 거란 수군 장교 대도(大道)와 이경/이향(李卿/李鄕)외 6명이 귀화하였다. 이경/이향은 '대도리경' 또는 '대도이향'이라고도 읽으며 대도, 이경으로 2명의 발해인이었다는 이야기와 대도이경(대도리경)이라는 1명의 발해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나름 고위 수군 장교로 보이는데 《고려사》에는 이 때부터 고려로 귀화하는 발해인이 대폭 증가했다고 기록했다. 아울러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는 담비 가죽을 바치고 현종에게 책력을 요청해 내려주었는데 책력을 내려주는 것은 연호를 세우는 것과 동일하게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해가(奚哥)족과 발해인 500여 명도 귀화했고, 서여진 27호도 귀화했으며, 여진 130명이 말, 병기를 바치고 발해인 50명도 귀화했다. 현종이 타계하고 태자 덕종이 즉위한지 1년차인 1031년 7월 흥료국을 도왔던 발해감문군(勃海監門軍) 대도행랑(大道行郞), 발해제군판관(渤海諸軍判官) 고진상(高眞祥), 공목(孔目) 왕광록(王光祿) 등 20여 명이 고려로 와 모두 귀화했다. 즉, 흥료국의 실패는 여진의 일시적인 노략질 증가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반대로 소동을 겪은 해가족, 여진족, 발해인, 거란인들이 현종 대를 지나 덕종 대까지 계속 귀화해오고 조공을 바쳐 고려의 존재감을 굳건히 해준 측면도 있었다.

3.3. 도성제 완성

고려사》 < 왕가도 열전>에 따르면 고려의 법궁 만월대는 태조가 창건한 후 광종 치세에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이후 개경은 궁성과 궁성 밖 정부기관을 둘러싼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이 나성은 태조가 궁예의 신하일 때 지은 발어참성이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장에 따르면, 나성과 송악성은 다른 곳이며 송악성은 발어참성이라는 견해와 <대동여지도>에서 송악산 동쪽에 고읍(古邑)으로 표기된 ‘송악(松岳)’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반드시 나성=발어참성이라는 공식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개경의 나성은 방어성으로서는 범위가 작아 적의 침공에 함락되기 쉬웠다. 그래서 현종은 고려-거란 전쟁 이후 재위 2년, 1011년 8월 원래의 나성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재건축해 높이를 더 올린다. 재위 5년, 1014년 1월, 불탔던 궁궐을 다시 지었다. 태조 대부터 현종 재위 초까지 정전(正殿)이었던 천덕전(天德殿)( 인종이 대관전(大觀殿)으로 개칭)은 제2정전으로 삼고, 제1정전으로 회경전(會慶殿)( 인종이 선경전(宣慶殿)으로 개칭)을 새로 지었다.

이후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설치, 재위 20년째인 1029년 8월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 올린다. 훗날 개성현 백작이 되는 참지정사 왕가도가 이 대공사를 직접 담당했고 장장 21년 동안 공역이 이어졌다.

산과 평지, , 개경 시가지를 모두 둘러싼 이 새로운 나성은 이후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기관만 감쌌던 기존 나성과는 다르게 개경 대부분의 범위를 감쌌으며, 이는 수도의 방어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도성은 나성 → 황성 → 궁성 순으로 이어지는 천자식 도성제를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평지에 인공적으로 직사각형 구조를 가지는 중국 왕조와는 다르게 고려는 자연을 최대한 파괴하지 않은 형식으로 지어 중국과 차별되는 도성 체계를 구축했다. 이에 더해 현종은 개경 주변 13개 지역을 묶어 경기(京畿: 천자의 서울을 둘러싼 지역이란 의미)를 설치하였는데 '경기'는 곧 오늘날 경기도의 기원이다.[41][42]

현종이 정비한 도성제는 이후 14세기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후손인 우왕 대에 나성에 내성이 추가로 지어지긴 했지만 왕조의 극후기에 지어졌으니 고려 역사에 큰 영향은 없는 셈. 심지어 후대 고종 최우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도 고려궁지에 현종이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 다시 지었다.

황도 개경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도 서경 장락궁에도 황성을 쌓아 개경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천자의 도성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이를 통해 할아버지인 태조 왕건의 뜻을 계승하여 서경을 제2수도로 우대하는 정책 기조를 이어나갔다.

《고려사》 <악지> -속악- 부분엔 현종이 지은 나성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속악, 즉 우리말로 된 노래라 《고려사》 편찬자들은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하였던 것인데, 제목은 <금강성>(金剛城)이다. 나성이 금강과 같이 튼튼하다고 칭찬하는 뜻이며, 부연설명으로 '혹자는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갔다가 다시 개성에 왔을 때 지은 노래라고도 한다.'라고 해뒀다.

3.4. 현화사와 현화사비 건립

고려의 왕립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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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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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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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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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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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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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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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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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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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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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사중수


전쟁을 끝낸 현종은 1017년 황도(皇都) 개성부(開城府)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를 지었는데 영취산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현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이다. 현종은 원찰(原刹)을 세워 사생아인 본인을 낳아 힘들게 살다 죽은 부모 안종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었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성목장공주와 원정왕후의 영정을 모셨다. 현화사비 기록에 현종은 사찰을 완공하자 직접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었다고 하며 아마 우리말로 가사를 쓴 향가인 듯한데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금으로 만든 종을 달아 현종이 직접 종을 치기도 했다고 하며 신하 11명에게도 완공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쓰게 해 나무판에 새겨 법당의 바깥에 걸게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현화사에 배치됐던 대장경에 대한 기문은 천수현 후작 강감찬이 썼다.

이 사찰은 현종이 지은 절인 만큼 고려 황실이 중시하는 절 중 하나가 되어 불교 교종 계열의 대사찰로서 한국 불교사에 이름이 남았으며, 역대 군주들은 자신이 밀어주는 승려를 현화사의 주지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인종 대에는 고려 중기 최대의 권신인 이자겸이 자신의 아들 의장을 현화사 주지로 넣은 흑역사가 있는데 이자겸의 난 당시 의장이 현화사의 승병을 이끌고 만월대를 습격해 신봉문(神鳳門)[43]을 쓰러뜨리려 했다. 의종 대에는 현화사가 매우 확장되는데 의종 대 별궁인 청녕재가 이 곳에 세워졌으며 승려들은 의종에게 아부하려 바빴다고 한다. 고종 대에는 안종, 현종, 강종 세 임금의 영정을 보관했다.

유적 현화사지가 남아있다. 현화사비, 돌다리, 7층 석탑(9m. 탑 위의 장식까지면 족히 10m), 석불의 잔해 등은 여전히 외롭게 서있다. 사서에 기록돼 있는 건축으로는 장흥원(長興院), 청녕재(淸寧齋), 동각(東閣), 서각(西閣), 금종보(金鐘寶), 봉래전(蓬萊殿), 숭경전(崇慶殿), 금당(金堂), 진전(眞殿), 법당(法堂), 중미정(衆美亭) 등이 있다.
파일:현화사비.png
현화사비 유적 사진.

현화사비는 현종이 현화사를 왜 창건하였는지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교적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하단은 큰 거북이 상이 비석을 바치고 있다. 비석 뒷면에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기록에는 이를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베풀고, 부모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열었다고 전하며 또한《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 3본의 《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인판(印板)을 새겨 현화사에 두었으며, 특별히 ‘반야경보'(般若經寶)라 부르며 길이 모든 지방에 인시(印施)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신 상단엔 현종이 직접 “영취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영취산에 있는 대자은현화사의 비석명문)이라고 전서체(篆)로 썼으며, 이 사실은 《 고려사》에도 보인다. 비신 앞면은 원비명(原碑銘)으로 주저(周佇)가 짓고, 채충순(蔡忠順)이 썼으며 뒷면은 채충순이 짓고 썼다. 주저와 채충순은 《고려사》 <열전>에 기록됐을 만큼 이름난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주저는 송나라 온주(溫州)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다.

현화사비의 내용을 보면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에 대한 당시 고려 사람들의 평가는 중국 최고의 임금인 요순에 비유하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거의 신격화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현화사비에는 부족한 고려 초의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가령 《고려사》에 없는 안종의 시호와 능호가 남아있는데, 원래 사천에 있던 능은 효릉이었으나, 이후 금신산이란 곳에 묻어 건릉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정확한 위치도 나오지만 《고려사》에는 효릉 능호는 나오지 않고, 건릉의 위치도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 헌정왕후의 칭호가 대왕태후(大王太后)라 돼있는데 이는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다. 현종이 태황태후로 추존한 사실이 없는 셈. 헌정왕후가 만월대 내 별궁 보화궁(寶華宮)에서 죽은 사실이나 붕어(崩于)했다는 표현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성종이 후계자 목종에게 제사의 대리를 맡긴 것이나 헌정왕후의 능묘 조성을 위한 도감(都監, 임시 기관) 설치 사실은 모두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에게는 헌정왕후와 사통 전 이미 아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종의 누나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현종이 누나가 있다는 사실은 《고려사》에 없다.

현화사비에서는 자국을 '인방'(仁邦), '청방'(靑邦), '일방'(日邦)이라 불렀고, 북송은 고려를 '대방'(大邦)[44]이라 불렀다. 해동 천자인 현종을 성상(聖上), 만승(萬乘)에 거주하는 인왕(人王)으로 표현해 북송 천자와 대등하게 표현했다. 여기서 '만승'은 천자의 별칭이고, '인왕'은 '천신이 보호하는 사람들의 왕'이란 뜻으로 불교식 표현이다. 선대 임금을 부를 때 '묘호 + 대표시호 + 대왕'으로 불렀으며, 더 줄여서 '묘호 + 대왕'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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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전액(御書篆額)[45]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임금께서는 지극한 어짊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셨고, 순임금께서는 크신 효성으로써 나라를 교화하셨기 때문에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고 역사책에 빛나고 계십니다.

이후에 중하주(中夏主)[46]는 물론 여러 후왕(侯王) 등 모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들로서 누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자취를 잇고 유풍을 떨쳐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어짊을 닦되 어짊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였고, 효성을 행하되 효성이 온전하지 못하여서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일으킴에 있어 처음과 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서 대부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심오하여서 계승하기 어렵고, 어짊과 효성의 도가 광대하여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도를 본받으며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우리 성군(聖君) 뿐이십니다.

성상(聖上)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봉양하려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빠뜨림이 없었고, 왕위에 오르신 후에는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추존의 예를 거행하고 종묘에 모시는 의식을 갖춤으로써 예법에 정해진 절차 이미 모두 다 행하였지만 그래도 성상의 효심에는 부족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취하고 착한 일을 행하고 참된 가르침에 참여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사찰을 짓고 돌아가신 영혼을 천도하시었습니다.

이로써 정토에 갈 수 있는 공덕이 늘어나고 하루 빨리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게 하여 아버님과 어머님의 자애로운 사랑에 보답하고 부처님들의 서원을 이루게 하시었으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황고(皇考)[47]이신 안종 효의대왕(安宗 孝懿大王)께서는 태조의 친자(親子)로서 인방(仁邦)[48] 본지(本枝)이신데, 예(禮)·악(樂)·시(詩)·서(書) 등에 마음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시었으며 온화하고 겸손하신 태도를 몸에 갖추셨으니 진실로 왕자(王者)의 재능을 가지고서 고인(古人)의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의 말년인 계사년(성종 12, 993) 겨울에 "못된 거란"[49]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영토에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니, 이웃 군대가 가까이 옴에 우리의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성종대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한 적들을 물리치러 나아가셨습니다.

출발하시기 앞서 중추부사급사중(中樞副事給事中) 최숙(崔肅)을 보내 선지(宣旨)를 전하니:

“지금 이웃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朕)이 직접 무리를 인솔하여 그 군대를 물리치러 나아간다. 경도(京都)에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군(君)은 가족들을 이끌고 잠시 남쪽의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 어려움을 피해 있다가 변방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행차를 돌려 돌아오라”[50]

라고 하신 뒤 내알자감(內謁者監) 고현(高玄)을 선배사(先排使)로 삼아서 어조(御槽) 안마(鞍馬) 의복(衣服) 비단(匹帛) 주식(酒食) 은기(銀器) 등과 그곳에서 사용할 토지와 저택, 노비들을 하사하시고 호위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곧바로 사주(泗州)에 이르셨는데, 성상께서는 함께 모시고 가면서 문안을 더욱 지성으로 하시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서 갑자기 병이 드셔서 낫지 못하시고 통화[51] 14년 병신년[52] 7월 초7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시었습니다. 얼마 후에 장례치를 땅을 점쳤는데, 사주(泗州)의 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성종대왕께서는 곧 군사를 돌이키시고 다시 평안을 되찾으셨습니다. 서로 잘 지내기로 하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고, 이로서 군인과 백성들이 다시 근심과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안종대왕을) 다시 서울로 맞이할 겨를이 없다가 갑자기 돌아가심을 듣게 되었으니, 작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카로서 애통함을 다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을 갖추고 조정의 조회를 쉬는 예를 행하였으며, 장례에 부조하는 물건을 정해진 제도 이상으로 하였고 (임금께서) 슬퍼하시는 마음은 잠시도 그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상에게 본궁(本宮)으로 돌아와 머무르도록 하면서 깊이 위로해 주셨고, 이후의 돌봄도 매우 간절하셨습니다.
황비(皇妣)[53]이신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께서는 대종대왕(戴宗大王)의 따님이고 성종대왕의 둘째 누님이셨습니다.

왕문(王門)의 후예이고 본종(本宗) 출신이셨지만 검소함은 대련(大練)을 따랐고, 아름다움은 금련(金蓮)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안종대왕과는) 난새와 봉황의 짝처럼 서로 잘 어울리고, 거문고와 비파의 소리처럼 서로 조화되었습니다. 여공(女功)과 부도(婦道)는 여유있게 하였고, 여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해로하지 못하고 황고(皇考)에 앞서서 돌아가셨습니다.

순화[54] 4년[55] 늦봄에 갑자기 병에 들자 성종대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병을 물으시고 아침저녁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명의를 보내어 거듭 치료하게 하고, 좋은 약초를 보내어 달여 마시게 하였으며, 또한 왕실의 보물을 사찰에 희사하고 낫기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여 기도의 효험도 없이 그해 3월 19일에 대내(大內)의 보화궁(寶華宮)에서 붕어(崩于)하셨습니다.[56]

성종대왕께서는 지친(至親)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마음을 크게 애통해 하시며 '이미 주어진 수명을 다하여 편안히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누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종대왕(穆宗大王)께서 당시 잠룡(潜龍)[57]으로 있었는데 감호를 맡게 하여 삼사청(三司廳)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諸宮)의 비빈(嬪妃)과 문호양반(文虎兩班)[58]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 앞에서 발상(發喪)하게 하였습니다. (상례 기간 동안) 아침과 오후에 음식을 올릴 때에는 늘 직접 참여하셔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곧 재상을 시켜 책문(冊文)을 올려 시호를 헌정왕후(獻貞王后)로 하였고 또 태복감(太卜監)에게 명하여 땅을 골라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과연 경성(京城) 간방[59]에 길지를 얻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습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며, 장례를 치를 때에는 재상과 근신들을 모두 차출하여 도감(都監)을 만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셔서는 책문(冊文)을 올려 황고(皇考)를 안종 헌경효의대왕(安宗 憲景孝懿大王)이라고 하고 황비(皇妣)를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라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어머님의 능은 가까운 곳에 있어 다시 옮길 필요가 없지만 아버님의 효릉(孝陵)은 먼 곳에 있어 계절마다의 제사를 천리 먼 곳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게 하였으니 능이 왕도(王都)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무덤을 열 때에는 중추부사 추충좌리공신 대중대부 수상서이부시랑 상주국 수안현 개국남 식읍 300호 사자금어대(中樞副使 推忠佐理功臣 大中大夫 守尙書吏部侍郎 上柱國 守安縣開國男 食邑 三百戶 賜紫金魚袋) 윤징고(尹徵古)를 파견하였고, 영구를 모시고 올 때에는 추충진절위사공신 금자흥록대부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청하현 개국백 식읍 700호(推忠盡節衛社功臣 金紫興祿大夫 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 上柱國 淸河縣開國伯 食邑 七百戶) 최침(崔沈)을 여러 차례 보내어 영구를 감호(監護)하게 하였습니다.

(영구가) 서울에 도착하자 법가(法駕)를 엄숙하게 갖추고 동쪽 교외에 행차하여 받들어 모시고 임시로 귀법사에 빈소를 마련한 다음 직접 백료들을 이끌고 서울 동북쪽 약 30리에 있는 금신산(金身山)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은) 푸른 까마귀가 길함을 고하고 흰 학이 경사를 알리는 곳으로 그림을 살펴보면 산과 강의 흐름이 만나는 곳이고 점을 쳐보면 음양의 이치가 부합하는 곳이었습니다.

장례 치를 날짜를 정하고 (장례는) 처음과 마찬가지의 의식을 갖추어 행하였습니다. 애통함으로 (성상의) 몸은 잘리고 무너지는 것 같았고, 감동하여 하늘과 땅 역시 슬퍼하였습니다. 천희[60] 원년인 정사년[61] 4월에 건릉(乾陵)에 장사지냈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에 급하지 않은 일을 중단하고 농사가 바쁘지 않은 때를 살펴 능에서 가까운 영취산(靈鷲山)에 이 절(현화사)을 창건하였습니다. (이곳은) 여러 산봉우리들 사이에 산세가 되돌아 감싸안는 곳으로 서울 가까이에 있으면서 세상의 시끄러움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절을 짓는 일은 대단히 힘들어서 위엄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그 일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시어 추충좌리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삼사사 상주국 청하군 개국후 식읍 1,000호(推忠佐理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 守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判三司事 上柱國 淸河郡 開國侯 食邑 一千戶) 최사위(崔士威)를 시켜 별감사(別監使)로 삼았습니다.

재신 최사위는 사람됨이 청렴·공평하고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며, 밖으로는 인자함이 드러나고 안으로는 범행[62]을 닦아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들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였는데, 명령을 받은 이후 집에서 잠자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올바로 되도록 헤아렸으니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모두 다 그의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른 산에서 나무와 돌을 가져오지 않고, 할 일 없는 사람들만을 부린 끝에 세월이 흘러 4년만에 완성하였으니, 법당과 불전은 높고 엄숙하여 도솔내원(兜率內院)과 같고 형세는 두루 갖추어져서 급고독원(給孤獨園)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별도로 전각을 만들어 성상 아버님과 어머님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게 하였는데, 두 분의 성용(聖容)을 이곳에 봉안함에 이르러서는 예를 갖추어 황고(皇考)껜 영문(英文), 황비(皇妣)껜 순성(順聖)이라는 휘호(徽號)를 더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님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옛날과 지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63]
표(表)를 올려 공사가 끝났음을 아뢰자 난가[64]가 직접 행차하셨으니 용안(龍顔)에는 즐거움이 가득하였습니다. 두 눈동자(重瞳)로 두루 살펴보시며 마음에 흡족해 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 둘러보며 세속세계가 아니라고 찬탄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들르셔서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갈 생각을 잊으시고 계시다가 조(詔)를 내려 ‘이 절을 이끌 사람은 반드시 고승으로 하여야 한다.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대중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 하시고, 드디어 삼천사(三川寺) 사주(寺主)인 왕사(王師) 도승통(都僧統) 법경(法鏡)에게 이곳에 머무르며 대중을 이끌고 법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 전지(田地) 100경(頃)과 노비 100명, 소와 말, 공구(供具) 등을 시납하여 상주[65]에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사주(寺主)인 왕사 도승통께서는 일승(一乘)의 법장(法匠), 대교(大敎)의 종사(宗師)로서 참된 가르침[眞乘]을 완전하게 깨닫고 불성(佛性)에 두루 통달하여서 후학들을 가르쳐 (불교의) 깊은 가르침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사방의 학도들이 태양처럼 받들며 구름처럼 모여들어 채 1년이 되기 전에 1,000여 명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성상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 아름다운 곳에 많은 승려들이 모였으니, 참된 가르침을 모은 대장경을 구하고 봉대(蜂臺)의 성사(盛事)를 기록하여야 한다’고 하시고 특별히 사신을 뽑아 사유를 자세히 기록한 후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어 깊고 너른 바다를 건너게 하여 멀리 중국에 조회하여 대장경을 요청하는 표를 올렸습니다.

천자께서 그 표문을 보시고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10행의 한조(漢詔)를 내려 칭찬하시고, 대장경 한 질을 보내어 도와주시었습니다.

그 조(詔)에 이르기를 ‘경(卿)은 대방(大邦)[66]을 맡아 조상의 공업을 계승하고서 난해(蘭陔)의 봉양을 잃어버림을 생각하고 바람과 나무의 때가 어긋남을 슬퍼하며 사찰을 크게 지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내고 공손하게 표문을 올려 대장경을 요청하였으니 순수한 효성은 아름답게 여길만하고 정성을 다한 것은 칭찬 받을만하다. 바친 물건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특별히 나누어주라고 명령하니 마땅히 총애와 은총을 느끼고 보내는 것을 삼가 받으라. 이제 특별히 경(卿)에게 대장경 한 질과 (대장경을 포장하고 쌀) 상자, 휘장, 금옥(金玉) 등을 보내니 받도록 하라. 비록 좋은 인연을 돕는 것이지만 효성의 감동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불전과 불상에는 안팎으로 향과 등을 공양하고, 대장경의 경전들은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소리가 늘리게 하라. 복을 심고 좋은 일을 선양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 성군(聖君)의 효행의 공덕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본받으면서 중간에 그침이 없었다고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이 모두 이루어짐에 좋은 돌에 이를 새기고 커다란 비를 세워 후대에 전해지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특별히 윤지(綸旨)를 내려 신에게 문장을 짓도록 명령하시니 신이 재주가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였고 임금님의 명령을 끝까지 받들지 않는 것도 신하의 정성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문장은 이미 조아(曺娥)의 비송(碑頌)에 미치지 못하고 문(文)과 질(質)을 맞추는 것은 육기(陸機)의 부언(賦言)에 어그러집니다. 얼굴이 두꺼운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면서 다만 그 일을 기록하되 있는 사실을 기록할 뿐입니다. 명(銘)으로 운을 맞추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의 성군으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계셨으니,
도(道)와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仁)과 효(孝)로 백성을 교화하셨네.
순임금은 효성으로 다스리고, 요임금은 어짊으로 다스리니
윗사람은 실천하고 아랫사람은 순박하며, 풍속은 두텁고 풍속은 아름다웠다. (其一)

뒷사람이 계승함에 모두 그 다스림을 생각하니
비록 어질고 효성을 하였지만 끝까지 한 사람 드물었다.
처음에는 실천하여도 중도에 그만두니
책에서 아름답게 칭송함을 듣지 못하였다. (其二)

오직 우리 밝은 임금 옛 성현을 스승삼아 정사를 베푸시니
요임금을 따라서 풍속을 보살피고 순임금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시네.
그 덕을 닦음에 조상을 잊지 않았으니
지극한 효성에 사람들이 귀의하고, 지극한 덕에 하늘이 돌보시네. (其三)

무엇을 성인이라 하나. 덕으로 선정(善政)을 베풀고
윗사람을 편안히 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조상을 높이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
자비로 만물을 기르고 효성은 모든 행실에 으뜸이니
우리 임금의 하시는 일 여기에 다 갖춰져 있네. (其四)

왕위에 오르시고 늘 부모의 은혜 생각하니
추존(追尊)의 예절 갖추고 의호(懿號) 높이 올리셨네.
개장(改葬)을 함에는 현침(玄寢)을 견고히 갖추었다.
유전(儒典)을 이미 받들었으니 부처의 가르침 어찌 따르지 않으리. (其五)

영취산 아래에 형세가 으뜸이니
안개 빛은 계곡에 빛나고 산은 연이어 들판을 둘렀다.
터를 살펴 정사(精舍)를 세우니
산천의 주인을 얻고 경전은 중국에서 왔다. (其六)

빈번히 대장경을 펼치고 거듭하여 용이(龍頤)를 움직이시니
사부대중에 가르침을 전하고 설법은 온종일 이어진다.
복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두루 미치고 이익은 신기(神祇)에도 미치니
한 사람의 효성을 모든 백성이 따라 하도다. (其七)

부모님의 사랑은 갚아도 한이 없고
부처님의 서원은 실천함에 쉴 때가 없네.
착한 일을 행하면 부처님이 찬탄하시니
교화는 먼곳까지 미치고 행적은 유현[67]에 두루 빛나네. (其八)

생전에 보답함은 황천을 감동시키고
사후에 명복을 빌면 황천에 미친다.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면 조상의 업적이 길이 이어지리라.
공덕은 두텁게 될 것이고 효성도 이보다 큰 것이 없다. (其九)

복을 심는 땅이니 여기가 곧 좋은 밭이라
추모의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일 없도다.
세월이 흘러 바다가 마르고 골짜기가 변하여 평평하게 되어도
우리 임금의 효성은 만대에 전해지리라. (其十)
천희(天禧) 5년 신유년[68] 가을 7월 갑술 초하루의 21일째 갑오일에 세우다.[69]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 신(臣) 정진(定眞), 비서성저후(秘書省抵侯) 신(臣) 혜인(慧仁) 신(臣) 능회(能會) 등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유격장군(游擊將軍) 신(臣) 김저(金佇)가 왕명을 받들어 비석의 덮개를 새겨 만들다.
고려국 영취산 대자은현화사비 음기
추충진절위사보국공신 흥록대부 검교태위 수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겸태자소부 상주국 제양군 개국후 식읍 1,000호(推忠盡節衛社輔國功臣 興祿大夫 檢校太尉 守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兼太子少傅 上柱國 濟陽郡 開國侯 食邑 一千戶)인 신(臣) 채충순(蔡忠順)이 선지(宣旨)을 받들어 짓고 쓰다.
신이 성인의 지극한 가르침을 들으니, 유교의 경전에서는 뜻을 기르고 부지런히 닦으면 정교(政敎)가 잘 된다고 하였고,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마음을 경건하게 하면 복록(福祿)을 얻게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 바 서로 삼교[70]의 으뜸이라고 하지만 서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참된 이치를 안으로 깨달으면 교화의 공덕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어짊과 효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므로 선생[71]께서는 ‘효는 덕의 근본으로서 가르침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선왕들은 효성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 가르침은 엄하지 않아도 잘 이루어졌고, 그 정치는 무섭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서 천하는 평화롭고 재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교에서도 또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이야기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책의 내용과 같아서 다시 번거롭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와 불교의 두 가르침에서 모두 효성을 으뜸으로 하였으니 효성은 지극한 것이고 그 공덕은 두텁습니다.

또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업(業)의 쌓임으로 인하여 사람들 중의 왕으로 태어나고, 국토를 거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며 혹은 먼저 수호를 받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지금의 성상께서는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여 사람들의 왕(人王)으로 태어나셨으니 청방[72]를 다스리면서 그윽한 덕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만승[73]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어짊을 베풀어 도덕이 빛나고 효성으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기꺼이 모시고 팔방(八方)의 사람들이 즐거이 섬기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옛날과 지금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른 바 신령스러운 앎이 선왕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금의 임금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 과인(寡人)[74]이 처음 대보(大寶)에 오른 이래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건릉(乾陵)이 사주[75]에 있어 제사를 드리기에 조금 멀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어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로소 지난 정사년[76] 4월 중에 길일을 택하여 인타리산(因陀利山) 아래의 좋은 땅으로 옮기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제 능 동쪽 가까운 곳에 산과 물이 감싸고 도는 형세로서 산들이 앞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고, 삼나무와 소나무가 푸른 자태를 보이며 날카로운 바위 사이에 울창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으니, 넓이는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을 세우기에 알맞고 높이는 계단을 놓기에 적당하다.

바람과 볕을 끌어당기고 구름과 안개를 밀어내니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이제야 드러난 곳으로서, 마치 신인이 오랜 세월 감추어 두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신성한 임금의 오늘의 요구에 응하여 드러낸 것이니 (이곳에) 들어와 사용하여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아름답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림과 같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관리와 백성들의 복일 뿐 아니라 신성한 임금이 기뻐하시는 바였습니다.

곧바로 이 신비로운 곳에 이와 같은 큰 가람 하나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으니 부모님을 천도하여 명복을 빌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임금님의 살피심에 부합하여 일방[77]에 복을 가져왔으니, 북조(北朝)에서 거듭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여 무기를 감추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78]

사찰을 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고 불상의 모습도 갖추어지자 다시 절 안 서북쪽에 별도로 진전[79] 한 곳을 지어 임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 헌경영문효의대왕(安宗 憲景英文孝懿大王)과 돌아가신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그리고 돌아가신 누님인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원정왕후(元貞王后) 등의 진영을 봉안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서 살아계실 때에 못지 않기를 빌었으니 이는 부처님과 하느님의 은택을 기원하면서 또한 돌아가신 분들이 복을 내려주실 것을 바란 것이었습니다.
경신년[80]10월중에 이르러 임금님의 어머님의 고향인 황주(黃州)의 남쪽 지역에서 진신사리가 출현하여 빛을 내며 허공에 떠서 빛나는 감응이 있었고, 또한 임금님 아버님의 산릉 근처에 있는 보명사(普明寺) 안에서 다시 부처님의 어금니가 출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의장을 갖추고 직접 교외로 나가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어금니를) 궁궐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그 깊은 경건한 마음에 불가사의한 감응이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 절에 7층 석탑[81] 하나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 하나와 사리 50알을 봉안함으로서 귀의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어서 또 신유년(현종 12, 1021) 4월 중에 상주(尙州) 관할하에 있는 중모현[82]에서 다시 사리 500여 알이 출현하여 허공에 떠서 빛을 내는 일이 있으므로 근신인 중추부사 상서우승(中樞副使 尙書右丞) 이가도[83]를 그곳에 보내어 맞아 오게 하고 성상께서 다시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습니다.

과연 흰색과 붉은색으로 각기 광명을 내었습니다. 이에 그중 50여 알을 나누어 이 절로 가져와 주존불의 가운데에 안치하고 소상을 만들어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밖의 나머지는 모두 가져다가 내전도량[84]에 안치하고 임금님께서 공양하셨습니다.
또다시 영험과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처음 이 절을 만들 때에 강당의 터를 파낼 때에 그 안에서 문득 검은 수정 구슬 한 알을 줍고, 그 뒤에 다시 지난 경신년에 금당의 터를 닦을 때에 다시 자수정 구슬 하나를 주워 주존불의 백호 사이에 안치하였는데, 이 일들은 서로 부합하고 상응하는 것으로서 영험을 찬탄하여야 합니다.

또한 지난번에 사신에게 종이와 먹 값을 들려 중화[85]에 보내어 사유를 아뢰고 대장경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송나라에서) 특별히 대장경 한 질을 보내면서 (종이와 먹) 값으로 가지고 간 물건들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 다시 우리의 바람에 따라 채색물감 2,000여 량(兩)을 보내라는 (북송의) 선지(宣旨) 덕에 이 절의 불전과 법당, 진전 등을 모두 법도대로 채색하고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86]
이미 금종과 법고를 만드는 일이 완성되자 (성상께서는) 난가[87]를 타고 군신들과 함께 예를 갖추어 행차하시어 함께 종을 치시고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직접 조곡(租穀) 2,000여 석(碩)을 시납하셨고, 여러 신하와 양반들도 각기 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시납하여 별도의 금종보(金鍾寶)를 만들어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궁원[88]들도 (성상의) 큰 효성을 본받아 각기 전지(田地)를 헌납하여 (사찰을 완성하는) 훌륭함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발심하고 서원하시어 나라의 발전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매년 봄 4월 8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륵보살회[89]을 개설하였고, 또한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 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 다시 매년 가을 7월 15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타(彌陀) 도량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장인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시어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과 3종류의 《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목판을 새겨 이 절에 비치하고 별도로 '반야경보'(般若經寶)를 만들어 널리 이들을 인쇄하여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검교태부 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檢校太傅 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인 최사위[90]가 지난 번 별감(別監)을 맡은 이래로 세심하게 마음을 다하여 이 큰 원을 이루고자 하여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하여 사찰에 머무르면서 힘써 지휘하고 직접 감독하여 꼼꼼하게 만들고 장식과 꾸밈도 두루 갖추어 조금도 빠뜨림이 없으니 성상의 뜻에 그대로 부응하며 현명한 생각을 의지할만 하다고 생각하여 시중(侍中)을 더하여 주시고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이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성조도감사[91]인 예빈경(禮賓卿) 황보유의[92]와 부사(副使)인 전전중소감(前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 장작소감(將作少監) 이영(李英), 예빈소경(禮賓少卿) 용운(龍運), 판관(判官)인 중추일직 형부낭중 겸어사잡단(中樞日直 刑部郞中 兼御史雜端) 안홍점(安鴻漸), 녹사(錄事) 4인인 신호위장사(神虎衛長史) 이휘좌(李徵佐), 내사주서(內史主書) 백사효(白思孝), 소부승(少府丞) 최연가(崔延哿), 상서도사(尙書都事) 이성자(李成子), 그리고 도관사[93]인 좌가도승록(左街都僧錄) 대사(大師) 광숙(光肅)과 부사(副使)인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언굉(彦宏),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석진(釋眞), 판관(判官)인 우가승정(右街僧正) 성보(成甫) 및 승기사(僧記事) 2인과 속기사(俗記事) 5인, 지리업[94]의 삼중대통(三重大通) 정웅(鄭雄), 중대통(重大通) 김득의(金得義) 등에게도 각기 은택을 차등있게 베풀어 마음을 같이 하여 공덕을 함께 이름을 기억하고 믿음과 정성을 다함을 표창하셨습니다.
(성상의) 지극한 서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니 그 훌륭한 생각을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인 주저(周佇)에게 명하여 먼저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서 행이부상서 참지정사(行吏部尙書 參知政事)인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를 쓰게 하신 후 곧바로 훌륭한 장인을 시켜 글씨를 새겨 끝마치자 비석을 세울 때에 직접 왕림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행차하여 직접 보시고 ‘나의 뜻에 거의 부합되어 나의 마음이 매우 즐겁다’고 하시고 친히 비석 위에 오르시어 직접 붓을 휘두르셨으니, 비석의 전액(篆額)은 물론 ‘왕이 전액을 쓰다'(御書篆額) 네 글자 역시 성상께서 직접 쓰셨습니다.

성상께서 붓을 휘두르심에 용들[95]이 구름과 물 속에 움츠리는 것 같고, 성상의 마음 쓰심에 거북이[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석의 귀부(龜趺)를 가리킴]도 반드시 그 영광에 감동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행차를 따른 많은 관료들이 모두 절하여 (성상의 글씨를) 보고서 다함께 만세[96]를 외치며 우러러 찬탄하였습니다.

진전에 성상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존영을 안치할 때에는 성상께서 직접 시책[97]을 지어 예를 행함으로써 직접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어 반드시 명계에까지 통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울러 성상께서 직접 진전에 대한 찬문을 지어 전각 안의 동쪽과 서쪽 벽에 쓰게 하시고, 진전을 노래한 시는 나무판에 써서 진전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셨으며, 별도로 성상께서 지으신 시를 나무판에 써서 법당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여 다 함께 길이 전하여 두루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효성이 황천에 감응하고 도덕이 성스러운 시대에 비치는 것이니 실로 훌륭하신 군주의 문장으로 금으로 된 바닥에 금을 굴리는 소리이고, 훌륭하신 성인의 말씀으로 옥으로 된 거리에 옥을 굴리는 소리일 뿐 아니라 세속을 떠난 신인이 높은 산에 오른 감흥을 이야기하고 덕 높은 승려가 깨달음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서 예전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고 오늘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각기 진영에 대한 찬문을 바치도록 하셔서 모두 진전 안쪽의 벽에 쓰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진전을 노래한)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진전 바깥의 회랑에 걸어두게 하였는데, 재상과 추밀, 한원[98]과 윤위[99], 봉각[100]의 뛰어난 인재와 현인, 학자 등 모두 21인의 것이었고, 또한 이 절의 완성을 축하하는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법당 바깥에 걸어두게 하였는데, 44인의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구절을 처마 밑에 배열하고 좋은 문장을 창문 사이에 늘어 놓은 것이니 아름다운 비단이 함께 빛나고 아름다운 구슬이 비추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말과 풍속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일을 찬미하고 생각을 서술한 것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시경》에서 ‘찬탄함에 부족함이 있어 노래하고, 노래에 부족함이 있어 손과 발로 춤춘다’고 이야기한 뜻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으시고 이어서 신하들에게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바치도록 하니 모두 11인이었고, 이들을 모두 나무판에 서서 법당의 바깥에 걸게 하였습니다.

이는 구경오는 사람들이 모두 각기 자신이 익힌 바에 따라서 아름다운 뜻을 알게 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다만 걸려있는 시들을 보고서 노래한 뜻을 알게 하여 아름다운 소리가 두루 퍼져서 훌륭한 다스림이 완성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장경에 대한 기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강감찬[101]에게 짓도록 명령하셨고, 금당의 기문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최항[102], 종명(鐘銘)은 중추사(中樞使) 이공(李龔), 진전의 기문은 한림학사(翰林學士) 곽원(郭元), 숭경전(崇慶殿)의 기문은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 김맹(金猛), 현화사를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주저(周佇), 진전을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충(崔冲), 봉래전(蓬萊殿)의 기문은 치사한림학사승지(致仕翰林學士承旨) 손몽주(孫夢周)에게 각기 짓게 하시니 각자 훌륭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다함께 깊은 진리를 담아서 저 부처님의 교화의 방법을 서술하고 우리 임금님의 도덕의 가르침을 찬탄하였습니다.
모두 벽에 걸어 두어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바인데, 그 자세한 것은 이미 색깔있는 비단에 기록하였고, 그 나머지는 찾아서 이제 듬성듬성한 삼베에 적었습니다. 이에 신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비의 뒷면에 (음기로) 적게 하시니 붓놀림의 둔함은 홍두깨를 잡은 것 같고 학식의 모자람은 벽을 뚫고 있는 것 같은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외람되이 밝은 명령을 찬(撰)받았으니 오직 정성을 다하여 좋은 문장의 나머지를 주워서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고자 바랄 뿐입니다. 군자들이 두루 살펴본다면 감히 저의 하는 바가 어찌 (성상의) 영명하심을 더럽히는 황송스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태평[103] 2년 임술년(현종 13, 1022) 가을 10월(相月) 어느 날에 삼가 적다.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인 신(臣) 석정(釋定)과 진속비서성지후(眞屬秘書省祇侯)인 신(臣) 혜인(慧仁), 지후(祇侯)인 신(臣) 능회(能會) 등이 선지(宣)을 받들어 새기다.

3.5. 홍경사 건립

고려의 왕립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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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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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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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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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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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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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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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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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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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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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사중수

현종은 현화사 말고도 안종 한 사람만을 위한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 절이 바로 왕립사찰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이다. '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어 홍경사의 기원을 알 수 있으며,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서북면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이 주도하여 지었고, 절은 약 200여 칸으로 안에 약 80여 칸 크기의 휴게소가 있어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했다고 한다.

비석은 안종을 '선황'(先皇), '황고'(皇考)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현종을 '성상'(聖上)이라 높히고 현종의 명령을 '선지'(宣旨)라 했다. '성상이 나라를 다스린지 18년째 되는 해(聖上御國之十八載)'라 하여 비석을 세운 날짜를 기록할 때 북송의 연호보다 현종의 재위기간을 먼저 적어 자주성을 드러냈다.

천안 홍경사에도 현화사비처럼 봉선 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었다. 봉선 홍경사 갈기비의 내용을 보면 현화사비처럼 현종과 해동공자 최충, 당대 명필인 백현례를 비롯한 고려 사람들의 생각를 알 수 있는데 현종은 5세때 돌아가신 아버지 안종을 항상 그리워했던 것 같다. 번역블로그글

3.6. 국가 제도 정비

거란과의 전쟁 이후, 현종은 드디어 지방 세력들을 정리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후 고려의 여러 제도를 완비하여 국가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다. 고려는 광종 성종이 중앙집권의 토대를 다진 이래 현종 문종의 치세를 맞아 완전한 통일제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과거에 겪었던 위기와 고난을 바탕으로 같은 구제법을 마련했다.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는데 이는 이후 문종 대에 사형수 삼심제로 이어진다. 또한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 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다.

전란 중에 이미 5도 2계를 구축하고, 향리 정원제, 향리 공복제, 주현공거법 등을 실시하여 지방 세력 규제 및 중앙집권 강화책을 진척시켰으며, 이외에도 감목양마법, 나성 축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전쟁에 대비함으로써 평화의 시대를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훌륭한 제왕들이 그렇듯, 현종은 능력있는 신하들을 계속해서 기용하였고 채찍과 당근을 병행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강감찬 열전>[104]

3.7. 문화 양성 및 팔관회 부활

현종은 그동안 여러 환란 속에 엉망이 된 고려의 문물을 전면 재정비해, 향후 100년간 고려가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황주량의 주도로 황실의 기록인 《 고려실록》을 재편찬했고, 《 팔만대장경》의 원본으로서 고려 불교문화의 정수인 《초조대장경》을 간행했으며, 교종 대사찰로 유명한 현화사의 건립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중 팔관회는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써 최항의 권유에 따라 다시 개최한 것인데, 대내적으로는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관을 견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천자국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국가 중흥책의 일환이었다.
현종대에 송과 여진 사람이 고려로 귀부, 내조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고, 탐라가 고려의 영토로 귀속하여 황제국皇帝國체제[105]를 갖추게 된 것이 팔관회 행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고려가 현종대에 복구한 팔관회를 이후부터 불교 행사이면서 동시에 정치·외교적 의미를 띤 국가 행사로 격상시켜 치렀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현종대에 대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고려가 누린 국제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구산우, 고려 현종대의 대거란전쟁과 그 정치,외교적 성격, 역사와 경계 74』
한편 팔관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 영웅들과 국가의 번영 또한 기원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 뿐 아니라 유교 진흥에도 힘썼는데 설총에겐 홍유후, 최치원에겐 문창후 등의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한반도의 유학적 전통의 맥을 짚고, 고려가 유학적 정치를 지향하는 국가임을 강조한 조치였다.

국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훌륭하게 대처했고,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도 훌륭했는데 후계( 왕흠, 왕형, 왕휘) 군주들 모두 명군들로 평가받는다.

3.8. 붕어

고려사》 사서엔 '1031년 여름 4월 을사일. 왕이 편찮았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5월 신미일 현종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태자 왕흠(王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6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현종의 아들인 왕흠(王欽)은 크게 슬퍼했고 [106] 고려 대부분의 국민들도 상복을 입거나 공무를 중지할 정도로 슬퍼했다.
○갑술일(甲戌日)에 왕이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복(成服)하였으며, 백성들은 검은 관을 쓰고 소복(素服)하였다. 6월○병신일(丙申日)에 선릉(宣陵)에 장사지냈으며, 뭇 신하들은 공무를 중지하였다.

송나라, 요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현종의 죽음을 애도했다.
을유일.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등 27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을미일. 동여진의 장군 대완사(大宛沙)와 이라(伊羅) 등 58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 철리국(鐵利國) 임금 무나사(武那沙)가 약오자(若吾者) 등을 보내 담비 가죽을 바쳤다. ○ 송나라의 태주(台州 : 지금의 중국 저장성 린하이현) 상인 진유지(陳惟志) 등 64명이 왔다.

향년 38세로 22년간 재위했는데 《고려사》 <현종 세가> 마지막에는 현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배움에 민첩하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글씨를 잘 썼다. 또 시문(詩文)과 사장(辭章)을 좋아해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다 기억했다.

태자가 시호를 '원문'(元文),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으며,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선릉(宣陵)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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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언니 [2] 동서양을 통틀어 근친혼의 사례는 꽤 많지만 남매간의 결혼은 고대 이집트와 고려 이전의 신라 왕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금기시되었다. [3] 아마 신라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 김춘추와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벌인 퍼포먼스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들의 재혼을 성종에게 허락받기 위한 퍼포먼스를 벌인 것 같은데, 성종의 반응이 예상과 달라 큰 낭패를 보게 된 정황으로 보인다. [4] 이는 무우수 나뭇가지를 붙잡고 석가모니를 낳은 뒤 일주일만에 명을 달리한 마야부인의 설화와 유사하다 [5] 1남 혜종은 흥화궁군과 태자 왕제를 낳았으나 태자 제는 요절했는지 기록이 없고, 흥화궁군은 광종에 의해 숙청되었다. 2남 태자 태는 후손이 없었고, 3남 정종의 외아들 경춘원군은 위의 흥화궁군과 함께 숙청되었다. 4남 광종은 경종과 효화태자를 낳았으나 효화태자는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고, 경종은 목종을 낳았으나 목종의 후손이 없었다. 5남 문원대왕은 외아들 천추전군이 있었으나 후손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고, 6남 증통국사는 기록이 아예 없다. 7남 대종은 효덕태자, 성종, 경장태자 3명을 낳았으나 효덕태자는 요절했고 뒤의 둘은 아들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8남 안종의 아들인 현종에게 계승 순위가 주어진 것. [6] 다만 어디까지나 그 신분 상으로 8남일 뿐, 태어난 순서로는 거의 막내일 가능성이 크다. [7] 사실 태조 왕건의 후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왕건의 아들들 중 후손이 기록된 아들들은 (기록 순서대로) 11남 원장태자, 13남 수명태자, 14남 효목태자, 15남 효은태자, 16남 원녕태자가 끝인데, 원장태자의 아들인 흥방궁대군과 원녕태자의 아들인 효당태자는 별 기록이 없고, 수명태자의 아들인 홍덕원군은 딸(목종의 부인)은 있었으나 아들은 없었다. 효목태자의 아들은 출가했다. 효은태자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으나 그전에 본인이 반란 혐의로 처형당해서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즉 이러나 저러나 목종의 후예가 없다면 현종이 제일 유력한 계승권자였다. [8] 1비 원정왕후, 2비 원화왕후 [9] 그래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강감찬을 비밀리에 거란으로 사신을 보내어 기만책으로 '우리 고려가 너네 거란에게 친조를 하겠다' 라는 장면을 넣었다. [10] 경기도 연천. [11] 광종때부터 과거제도가 시행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지만 아직 시작 단계였고 호족의 자식들이 계속 관직을 세습하고 있었다. [12]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달리 지방 호족으로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13] 다만 임신중이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소생의 자식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를 보면 이때 임신한 아이는 유산했거나, 태어나기는 했는데 너무 일찍 죽었거나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 [14] 심지어는 신하인 유종과 김응인은 왕명을 빙자해 왕의 안장을 뜯어내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거 때문에 추궁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왕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 후로 두 사람이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듯. [15] 다만 이 《7대 실록》의 완성은 제9대 덕종 때 이루어졌다. [16] 다만 노전이 덕종 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충선왕 즉위년에는 그와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 #이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셋처럼 큰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 [17] 참고로, 장연우는 거란의 2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고 있을 때 현종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대부분 도망치던 와중에도 끝까지 현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낸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18] 다만, 관련 기록이 실린 고려사 원문을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4년 전부터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4년 뒤에 재정 문제가 발생하자 난이 일어난 시기에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주장한 것으로 바라볼 가능성도 있다. 특히 관련 기록에도 언급되었듯이, 이미 무신의 관직 상승 제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최질과 김훈을 비롯한 무신들이 여요전쟁 직후라서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았다고 해도 저렇게 정책이 주장된 시점에 반발을 했으면 모를까, 문신들의 저런 움직임을 무려 4년이나 놔두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19] 1014년 음력 11월 김훈, 최질, 박성(朴成), 이협(李協), 최가정(崔可貞), 임맹(林孟) 등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채찍으로 마구 구타한 뒤(...) 현종으로 하여금 그들을 귀양보내도록 만들었다. [20] 이 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그는 말단 관리부터 시작하여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자림 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왜 이름이 이씨인데 왕무숭의 아버지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자림의 본명은 이가도(李可道)로 청주 이씨지만, 현종 치세에 개경의 나성 축조를 총괄하여 마무리한 공로로 출세가도를 밟게 되면서 사성정책으로 국성을 하사받아 이가도에서 왕가도(王可道)가 되었다. 왕가도는 성종 시기에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로 문관이 되었으며 성종, 목종, 현종, 덕종 4대 임금을 섬겼고 현종 치세에 큰 활약을 하여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또한, 왕가도의 장녀 원질귀비는 현종의 후궁, 차녀 경목현비는 덕종의 제2비라 현종과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21]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 연회의 고사를 차용한 것이었다. [22] 발해를 구성하고 있던 여진 민족은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나라로 나누어져 각각 고려와 거란에 복속했고, 그 나머지 부족들은 양국 사이에서 대세를 저울질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23] 거란의 3차 침공이 발발한 그 해 (귀주대첩 1년 전) [24] 임용한 교수는 저서인 전쟁과 역사에서도 현종을 대단히 뛰어난 명군이라고 극찬했다. [25] 이전에는 성군이라 평가했다 했으나, 직접 KBS 머니올라 채널에 나와 자신을 희생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운 훌륭한 군주를 그저 착하기만 했던 이미지의 성군으로 이해하는 것은 엉뚱하게 미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인식은 오히려 난세를 평정한 지도자였던 현종에 대한 평가를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 [26] 4차 전쟁기에도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송의 군사원조를 요청했으나, 송은 거란과 맺은 ‘ 澶淵의 盟’을 지킨 지가 오래되어 이를 들어 줄 수 없으며, 도리어 고려가 거란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高麗史 권4, 顯宗 6년 11월, 7년 정월, 권94, 郭元傳.) - <고려 현종대의 대거란전쟁과 그 정치 · 외교적 성격, 구산우, 역사와경계 2010, vol., no.74, pp. 85-127 (43 pages)> [27] 임진왜란의 발발로 조선이 이러한 동북면에서의 예방전쟁 여력을 상실한 것이 후금의 세력 확대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였다. [28]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을 비유적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29] 안주섭,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30] 현종대 고려-거란 관계와 외교 의례 (최종석, 동국사학, 2016, vol., no.60, pp. 1-42 (42 pages));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31] 고려 현종대의 대거란전쟁과 그 정치 · 외교적 성격 (구산우, 역사와경계, 2010, vol., no.74, pp. 85-127 (43 pages)) [32]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 (안주섭, 명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33] 《요사》에 따르면 동경사리군(東京舍利軍) 상온(詳穩) [34] 《고려사》는 대연림의 연호를 '천흥'이라 했지만 《요사》는 '천경'(天慶)이라 기록. [35] 중서문하성의 차관. 문하시중의 2단계 아래다. 중서문하성은 고려 정부 조직 중 최상위 정치 기구이다. [36] 《고려사》 <최사위 열전>에는 대연림이 대연정을 태사에 임명했다고 한다. [37] 문하시중. 작위는 청하현 개국남(淸河縣 開國男) → 청하현 개국백(淸河縣 開國伯), 시호는 정숙공(貞肅公). [38] 서북방의 군단장. 서북면과 동북면 두 판병마사가 있었다. [39] 곽원 사후 참지정사에 오른 인물로 정융진(定戎鎭), 위원진(威遠鎭), 흥화진(興化鎭) 설치를 주도한 인재이다. [40] 목종의 충신이던 유충정과 같은 이름. 목종의 충신 유충정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강조의 정변 이후 생사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유충정이 목종 시해 후 고려를 떠나 옛 발해 영역으로 돌아가서 살다가 20년 후 흥료국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 [41] 현종의 셋째 아들로서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종은 고려의 제2수도였던 호경(→서경)에도 '경기'를 설치하여 천자국의 도성제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42] 또한 천자의 별칭으로써 ' 성황'(聖皇: 성스러운 황제)이라는 칭호를 기록상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이 문종때이다. [43] 만월대의 두번째 대문.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위봉, 영봉과 함께 세 '봉'(鳳)자 돌림 대문 중 하나다. [44] 대국(大國)과 같은 뜻으로 소위 작은 나라에 조공을 받는 큰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여진국(女眞國) 완안부(完顔部)가 고려를 '대방'·거란을 '대국'이라 부르며 섬겼는데 고려가 송나라에 형식적으로나마 사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전성기 송나라가 오히려 고려를 '대방'으로 칭한 점이 흥미롭다. 훗날 북송은 완안씨(完顔氏)에게 멸망당하고 그 후신인 남송은 완안부를 상국으로 섬기는 제후국이 되니 전자를 '정강지변'(靖康之變), 후자를 '소흥화의'(紹興和議)라 한다. [45] '임금이 전서체로 제액을 썼다.'란 뜻이다. 이 네 글자 또한 현종의 어필이다. [46] '중하'는 중국 전통적 천자국을 이르는 말이다. 굳이 중하의 황제라 칭하지 않고, 중하주라고 낮추어서 표현했다. [47] 황제의 아버지. '고'는 족보상 아버지쪽을 말한다. [48] 어진 나라. 고려를 의미. [49] 당시 거란에게 사대하고 있음에도 일개 적국으로 간주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50] 다만 이 내용은 《고려사》 기록과 상반된다. 자세한건 안종(고려) 항목 참조. [51] 統和 : 거란 聖宗의 연호, 983~1011까지 사용. [52] 성종 15, 996년. [53] 황제의 어머니. 비는 족보상 어머니 쪽을 말한다. [54] 淳化 : 송나라 태종의 연호, 990~994까지 사용. [55] 성종 12, 993년. [56] '붕어'는 천자의 죽음에만 쓸 수 있지만 현종은 어머니에게도 썼다. [57] 후계자를 비유하는 말. [58] 혜종의 피휘를 위해 무를 호라고 썼다. [59] 艮方 : 동북쪽 방향. [60] 天禧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 1017~1021년까지 사용. [61] 현종 8, 1017. [62] 梵行 : 불교 신자로서 지켜야할 착한 행실. [63] 공자가 말한 역사 최고 성군이라는 말 [64] 鑾駕 : 임금의 수레. [65] 常住 : 사찰의 일상적인 운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경비. [66] 특이하게 북송이 고려를 대국으로 칭했다. [67] 幽顯, 저승과 이승. [68] 현종 12, 1021. [69] 현화사비는 2년에 걸쳐 장기간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 三敎, 유교·불교·도교. [71] 先生, 공자(孔子)를 가리킴. [72] 靑方 : 靑은 동쪽을 가리키므로 靑方은 동쪽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73] 萬乘, 천자를 의미함. [74] 이라는 표현을 놔두고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칭했던 것에서 보듯이 현종 스스로는 대단히 겸손하였다. 다만 고려 사람들이 현종을 매우 존경해서 치켜세운 것일 뿐이다. [75] 泗州 :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 [76] 현종 8, 1017년. [77] 日邦 : 日邦은 해뜨는 나라라는 뜻으로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78] 《고려사》에서도 확인 가능한데 전쟁을 끝냈다는 말이다 [79] 眞殿 : 국왕과 왕비 등의 진영을 봉안하는 건물. [80] 현종 11, 1020년. [81] 지금도 존재한다. [82] 中牟縣 : 현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과 모서면 지역. [83] 李可道 : ? ~1034. [84] 內殿道場 : 궁궐 안에 둔 사찰. [85] 中華 : 북송을 가리킴. [86] 송나라는 고려와 현종을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 매우 존중하고 배려하며 저자세 외교를 하였다. [87] 鑾駕 : 임금이 타는 수레. [88] 宮院 : 황족들이 거처하는 곳. [89] 彌勒菩薩會 : 미륵보살에게 기도하는 모임. [90] 崔士威 : 961~1041. [91] 成造都監使 : 현화사 창건을 담당한 임시관청인 成造都監의 책임자. [92] 皇甫兪義 : ? ~1042. [93] 道官使 : 현화사 창건에 참여한 승려관원인 道官들의 책임자. [94] 地理業 : 풍수지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95] 비석의 이수(螭首) 부분에 새겨진 용을 가리킴. [96] 천자에게만 쓸 수 있는 환호의 표현이다 조선의 군주에게는 천세라고 외쳤다. [97] 諡冊 : 시호를 올리는 책문. [98] 翰苑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 [99] 綸闈 : 황명을 짓는 제조원誥院의 별칭. [100] 鳳閣 : 중서성中書省의 별칭. [101] 姜邯贊 : 948~1031. [102] 崔沆 : ? ~1024. [103] 太平 : 거란 성종(成宗)의 연호, 1021~1030년까지 사용. [104] 강감찬처럼 능력있는 신하들을 계속 기용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현종 본인이 고려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일했고 결국 82세에 세상을 떠난 강감찬보다도 3개월 일찍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05] 다만, 전기 고려시절에 정말로 황제국이라는 목적 의식이 존재하였는지는 학계내에서 논란이 존재한다. 더 자세한 설명들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조. [106] 《고려사》 원문 기록: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애림(哀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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