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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3:14:15

하진(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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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대장군(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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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fff> 후한의 대장군
하진
何進
작위 신후(愼侯)
관력 낭중 → 호분중랑장 → 영천태수
→ 시중, 장작대장, 하남윤 → 대장군
성씨 하(何)
이름 진(進)
수고(遂高)
출신 후한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생몰 기간 ?[1] ~ 189년 8월 25일

1. 개요2. 생애
2.1. 백정에서 대장군까지2.2. 건석과의 갈등2.3. 하진의 우유부단2.4. 원소의 자작극 작전2.5. 십상시의 난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후한 말기의 대장군이자 외척.

자는 수고(遂高)로 하태후의 이복오빠, 하묘의 의붓형,[2] 아버지는 하진(何眞)이다.

2. 생애

2.1. 백정에서 대장군까지

하진은 형주 남양군 완현 사람으로 원래는 백정이었는데, 그의 이복누이가 환관들에게 뽑혀 영제의 후궁으로 들어간 다음에 황후가 되자 뒷배경으로 그도 벼슬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이 때문에 현대에는 낙하산 인사라는 인식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낭중'이란 말단 보직으로 시작한 관직 임용부터 정권 장악까지 최소 15년 이상 걸렸다는 점에서 보면 낙하산 인사라기보단 고속 승진에 가깝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하진은 9급 공무원에서 국무총리까지 가는데 15년 정도 걸렸다고 보면 된다. 행정 조직이 현대에 비해 치밀하지 못했고 전근대 시대 전제군주제 국가에선 군주의 의사만으로 최고위직에 낙하산 인사도 가능했음을 생각해보면 진짜 벼락 출세까진 아니란 것. 물론 현대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초고속 승진인 건 맞는다.

이렇게 된 경위가 있다. 하진은 백정으로서 신분은 한미했어도 그동안 도축업을 통하여 만만찮은 돈을 모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누이동생 하태후가 큰 키의 미인이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한쪽의 욕심을 채우면 다른 쪽의 욕심을 채우고 싶어하는 동물이듯이 하진은 부를 만만찮게 채우자 이번에는 권력을 채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진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잘 부탁한다며 십상시들에게 뇌물을 주야장천 갖다 바쳤다. 이때 로비로 상당한 돈을 들였는지 하씨 일족이 낙양으로 이주했을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로비의 보람이 있었는지 하진은 십상시 중 한 명이자 자신과 동향 출신인 곽승과 연줄이 닿았고 결국 누이동생을 입궐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영제의 측실로 들여보내는 데에 성공은 했으나 어느 왕조의 궁중들이 다 그렇듯 외척은 경계대상이었다. 게다가 하진은 천민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진은 궁궐에서 더욱 경계대상이 되었고 더욱 업신여김을 당했다. 이 때문에 하진은 십상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지하게 애썼고 그래서 정권 장악을 하기 위해 십상시들과 친해져야 했다. 그리고 십상시들과 친해지기 위해 무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소모했다.

180년 누이동생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수도의 장관인 하남윤으로 승진한다. 그렇게 하남윤으로 지내다가 184년 장각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군 진압의 총지휘를 일임받고 대장군으로 봉해진다. 이건 영제의 의지에 의해 하진이 대장군이 된 것인데 능력은 둘째치고 영제는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을 대장군으로 삼으려 했고 그러한 영제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 하진이 대장군이 된 것이다. 사실 능력으로 따지면 당대의 명장 황보숭이 대장군으로서는 더 적합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진영의 인사들은 뇌물을 바쳐 고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반란에 속수무책으로 쳐발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조기진압에 실패한 이유이기도 한데 결국 반란이 확대되어 자신들의 무능력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환관들은 당고의 금 사건을 이후로 파직되어 금고에 처해지거나 수배되어 있던 청류파 당인들을 사면하여 기용하게 된다.

하진은 이를 전후로 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환관들에게 죽게 생긴 청류파 인사들을 몇 차례 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하진이 반란 진압의 총책임자라는 대권을 맡게 된 것은 하진이 당시 정권과 청류파와의 관계를 조율할만한 인물로 여겨졌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하진은 이 이후로 점차 청류계 사이에서의 명망을 더욱 넓혀 갔고, 이를 바탕으로 해 환관들에게 내세워진 얼굴마담이라는 정치적 태생에서 벗어나 오히려 환관들을 압박하는 위치로까지 성장한다.

이런 점을 봤을 때 하진은 , 돼지나 잡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역량을 보였다고 봐야 한다. 상당히 뛰어난 정치감각을 타고났던 듯 하다.

수경주에 의하면 벼슬하기 전에 백이, 숙제의 사당이 있는 수양산에서 비석 두 개가 있는데, 하남윤 진도(陳導), 낙양령 서순(徐循), 처사 소등(蘇騰) 등과 함께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장군이니 만큼 그 휘하의 병력이 전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정예병인 금군이었는데 이 금군은 나중에 하진이 사망한 이후 동탁이 훔쳐갔다가 손견 에게 초토화당했다.

2.2. 건석과의 갈등

청류파를 두둔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으나 이로 인해 환관들과의 알력이 커져 간다. 영제의 총애를 받던 중상시 건석은 환관이면서 당시 중앙군이었던 서원팔교위[10]의 수장을 겸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이 서원팔교위 수장의 권한이 심히 막대한지라 대장군인 하진도 원칙적으론 그 아래에 속했다.

또 건석이 평소부터 하진을 깔보고 싫어했기 때문에 189년 영제가 죽자 선수를 쳐서 하진을 불러들여 죽인 뒤 작은 아들 유협을 옹립하려 한다. 하지만 건석의 부관 사마 반은이 하진과 친했기 때문에 하진을 영접하면서 눈짓으로 위험을 알린다. 눈치 빠른 하진은 그대로 말을 타고 자신의 군영으로 도망쳤고 영제의 부고가 발표될 때까지 병을 핑계대며 궁에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하진의 친조카이자 영제의 큰아들 유변이 황제로 옹립되었고 누이동생은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고 자신은 녹상서사를 겸임하며 정권을 틀어쥐게 된다.

정권을 잡은 하진은 본디 청류파를 중심으로 한 모여지는 나라의 여론이 하나같이 환관들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건석에게 죽을 뻔한 사건 이후로 환관들에 대한 불신이 강해져 십상시들을 주살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를 감지한 청류 소장파의 필두이자 건석의 부하였던 중군교위 원소 역시 평소부터 환관 세력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진에게 접근해 십상시들을 도모하자고 끊임없이 부추긴다.

이에 솔깃해진 하진은 원소를 중용하게 되고 청류파 중에서도 특히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원소가 하진과 손잡자 원소의 넓은 인재풀에 있던 고급 브레인들이 대거 합류하여, 그 위세는 더욱 강해졌다.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었으나 십상시와는 앙숙이었던 원소와 하진이 손잡은 것에 더욱 불안해진 것은 하진을 죽이려 했던 건석이었다.

건석은 중앙군인 서원팔교위의 수장이었으므로 금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하진을 도모할 계획을 꾸미지만 건석을 제외한 십상시들은 이에 대해서 따로 의논한 결과 '우리들이 키운 하진이니 잘 구슬린다면 화해할 수 있을 것'으로 입이 모아졌고, 오히려 건석의 행동을 하진에게 모조리 일러바친다. 결국 건석은 분노한 하진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중앙군은 하진의 편제하로 들어갔다.

2.3. 하진의 우유부단

이 과정에서 하진의 핵심 측근으로 격상된 원소는 하진에게 십상시를 주살하고 환관을 모두 정권에서 축출할 것을 진언한다. 마침내 하진은 원소의 계책에 대해 하태후와 의논하지만 태후는 "황가의 세세한 일을 사인들과 논할 수 없다."며 거절하자, 하진은 이를 거스르기 어려워 죄질이 극심하고 제멋대로인 몇몇 환관들만 단계적으로 주살하고자 한다. 이때부터 하진은 우유부단해지기 시작한다.

우선 원소는 하진과는 생각이 크게 달랐다. 원소는 환관이 황제의 측근을 차지하고 모든 황명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이상 기존의 환관 체제를 모두 뒤엎지 않으면 반드시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진을 계속 쪼아댔지만, 사실 후한에서 환관들이 정권을 잡은 지가 오래되어 수십년간 궁궐을 관리한 사람도 있고, 지방 장관에 임명되어 해당 지역에서부터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던 경우도 매우 많아, 안팎으로 그 카르텔이 공고한 상태였고, 태후에 대한 환관들의 엄청난 뇌물 공작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특히 이복누이 하태후의 의붓동생 하묘와 하태후의 생모인 무양군은 환관과 가까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에게 뇌물을 받고 매수되어, 태후에게 항상 환관들을 두둔하는 말을 했기에 하태후는 하진을 의심하게 되었고 환관들을 더욱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또한, 하진 본인 역시 환관들의 그늘 아래서 출세했던 만큼 그들에게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원소와 환관들 사이의 압력에서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일단 하태후가 반대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는데, 하진이 비록 보정대신으로 섭정을 맡아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당시 보정 체제의 성격상 섭정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태후의 재가는 필수적이었는데, 기본적으로 환관 및 탁류파를 지지기반으로 거느리고 있던 하진이 청류파에게 어느 정도 줄을 대긴 했지만 신참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태후의 반대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행동을 벌이는 것은 보정대신으로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하진 입장에서는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2.4. 원소의 자작극 작전

그러자 원소는 하진에게 새로운 타협책을 제시했다. 지방의 군대를 소집해 수도로 진군하게 하며 태후 및 환관파 관료들을 협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정확히는 수도에 인접한 맹진(孟津)[11] 항 일대 지역을 흑산적의 약탈로 꾸미며 방화하고, 이에 맞춰 외부의 장군들인 군벌들을 소집하게 해 계엄령 수준의 비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왜 흑산적의 소행으로 꾸민 것이었냐면 흑산적의 포섭에 영제와 십상시가 깊게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수도 근방에서 벌어진 흑산적의 습격 및 방화행위[12]를 통해 십상시들이 주도한 대(對) 흑산적 유화정책이 실패였음을 이유로 들어 탄핵한다는 것.[13]

원소의 계략은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보정대신인 하진은 태후의 재가가 없는 단독행동으로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깎아먹지 않는다.
2.) 십상시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하태후는 하진이 직접적으로 거스르지 않더라도 십상시의 파직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를 위해 자국민을 학살한 뒤 전국에 계엄령을 내려 정치적 이슈를 조성하며 십상시를 죽인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하면서 진상을 은폐하겠다는 작전이다. 노식 진림 등을 필두로 해 군사 요직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는 반대가 제기되었지만 하진은 끝내 이를 듣지 않고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인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탁의 집권을 불러오게 되었다.

사례교위로 임명된 원소는 작전의 총 지휘자가 되어 되어 외부 군대의 소집을 감독했는데,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동탁은 관중에 주둔했고, 왕광은 태산으로 떠나 강노수 5백을 징발해 돌아왔으며, 동군태수 교모는 성고에 주둔한다. 맹진 일대의 방화는 정원(丁原)에게 일임했고, 정원은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했으며, 사례교위였던 원소는 하남윤 왕윤과 함께 수도의 정보를 통제했다.

2.5. 십상시의 난

맹진의 불길은 수도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맹진 일대의 소식을 접한 백관들은 모두가 겁에 질려 환관을 주살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유독 하태후만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지체되자 하묘는 환관들과 화해하자고 하진을 설득한다. 십상시와 결탁해 권력을 잡은 배경이 있는 만큼 이 문제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던 하진은 십상시를 모두 몰아내기보다는 어떻게든 환관 체제의 존속을 원했기 때문에 다시 머뭇거리게 된다.

하진이 변심하면 가장 먼저 역적으로 지명될 것이 뻔한 원소로서는 이제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원소는 이미 계책은 완성됐고 이미 모든 형세가 드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결단을 지체한다면 하진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원소의 간곡한 설득에 마침내 하진도 원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에 원소는 가절을 받으며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가절을 받자마자 원소는 더욱 초강수로 나서 늑장을 부리는 동탁을 강하게 재촉하는 한편, 황실의 경호대를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해 태후와 환관들의 신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대놓고 노골적인 자세를 보였다. 결국 하태후는 마침내 백기를 들어 고위 환관들을 모두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본래 하진과 친했던 환관들만 궁궐에 남아 일을 보게 했다.

이에 환관들이 일제히 하진한테 가 하진한테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눈물로 읍소하자 하진은 또 마음이 흔들린다. 원소는 하진에게 이들의 죄상을 밝히고 법에 따라 모조리 처결할 것을 세 번이나 거듭 간언하지만 하진은 끝내 원소의 말을 듣지 않는다.

빡친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사칭해 모든 주에 공문을 보내 환관들의 친속을 모조리 잡아들여 심문하라는 지시를 내려 환관측의 반격을 봉쇄하려 했으나, 하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상시들이 손을 썼고 하태후를 통해 전부 복직된다.

이에 하진은 십상시들을 죽이려하였으나 하태후의 조서로 궁으로 유인한 십상시들에게 기습당한다. 이때 상방감 거목에게 살해되었다.

하진을 살해한 직후 십상시들은 친(親) 환관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해 도성 장악을 시도하지만 하진 살해를 알게되어 분노한 원소 등의 반격을 받아 모조리 살해되고 만다. 하지만 원소가 황궁 장악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이 이전부터 세력을 키워왔던 동탁이 시류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신변을 확보했으며 한나라의 실권을 틀어잡게 된다. 동탁의 집권으로 인해 명분과 방향성을 잃은 한나라는 그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사실상 잃게 되고 이후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3. 평가

사실 하진과 십상시의 대결은 당시로서는 하진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으며 거의 다 잡아놓은 상태였다. 처음부터 원소 말만 잘 들었어도 십상시를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 원소의 의견을 듣기는 들었는데, 하필이면 이게 지방의 군벌을 스스로 불러들이자는 자폭성 계책이었다. 결론적으로 들어야 할 충고는 안 듣고 듣지 말아야 할 충고는 받아들인 셈.

하지만 후한의 환관제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막장이었던 것이 사실이고,[14] 수십년간 권력을 잡아왔던 환관들의 세력은 이미 안팎으로 그 뿌리가 깊었다. 또한 당시 낙양의 중앙군은 바로 얼마 전까지 환관인 건석의 통제하에 있었다. 특히 환관의 그늘에서 출세했고 환관을 경외하고 있던 보정대신 하진이 태후의 반대까지 무시해가며 단독으로 환관 제거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었기에 원소의 처음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지방 군벌들을 불러들이자는 차선책으로 타협했던 것. 하지만 이는 후한 멸망의 근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환관 일당을 전부 숙청하고 한나라의 체제를 아예 대대적으로 개혁한다는건 처음부터 하진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어마어머한 일이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15]

물론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이후에 후한의 환관들이 전횡을 한 것처럼 외척의 전횡을 할 우려도 없지는 않으나, 하진은 청류파 지사들과 사이가 좋았으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고 사족들이 이를 갈던 간신 십상시들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대부분의 충의지사들도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 뒤의 외척 전횡 가능성은 당시까지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16][17]

하진이 원소 말 듣고 군벌을 불러들인게 망책이라는 평을 받게 된게 결과적으로 동탁의 집권을 불러왔기 때문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동탁이 집권할 수 있었던 계기는 하진이 선택한 계책이 원인이 아니라 하진의 암살로 인한 정계, 군부의 공백이라는 변수가 결정적이었기에 하진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막연히 평가할 수가 없기는 하다. 하진의 계획대로 제대로 돌아갔다면 겨우 3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낙양에 진입한 동탁이 하진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뭘 해볼 수 있을리 만무하고 결국 하진의 의도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뿐이니까. 하다못해 동탁도 하진이 없는 틈에 가장 먼저 당도하고 발빠르게 여포를 회유하여 정원을 해치우고 그의 군대와 하진의 군대를 흡수하여 집권할 수 있었다. 동탁이 늦었거나 빨리 와도 발빠르게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한편 원소와 타협한 계책이 완전히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원소는 파직된 십상시들의 죄상을 밝혀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세 차례에 걸쳐 논의를 했지만 하진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이는 하진이 우유부단했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지만 하진에게도 분명 이유는 있었다. 하진이 십상시를 경외하긴 했으나 십상시가 하진에게 은인이라거나 불쌍하다거나 해서 봐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평소 하진이 십상시 숙청을 두고 고민했었던 이유는 그가 여동생 하태후의 치마폭 아래서 권력이 나오기에 하태후의 지지가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는 외척이라는 하진의 포지션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 유일무이한 정치적 자산인 하태후가 힘을 실어준 덕에 하진이 조정의 1인자로서 탁류, 청류파와 중신들에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하태후 빽 없이는 어떤 정당성도 없는 것이 하진이었다.[18]

원소나 하진이나 장기적으로는 십상시를 숙청해야 한다는데는 어느 정도 이해가 일치해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숙청하냐는 것. 당시 십상시 일파가 조정에 형성한 카르텔이 워낙 공고했고 태후까지 포섭해 놓았기에 십상시 탄핵은 하진에게선 리스크가 큰 도박이었다. 불과 20여년 전에 하진과 같은 외척이었던 대장군 두무와 협력자인 재상 진번이 환관을 숙청하려다가 역공당하고 살해당한 뒤 관련자들이 떼죽음당한 시범 케이스도 있었다.[19] 이런 선례가 하진을 망설이게 했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결국 하진은 살해당했기에 노식의 조언대로 좀 더 과감했으면 어떨까 싶지만 말이다.

그래서 하진은 동업자이자 브레인인 원소에게 하태후의 십상시 비호를 거두고 십상시를 탄핵할 수 있는 명분, 즉 십상시에게 구워삶아진 하태후도 도저히 실드를 못치고 물러설 만한 명분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소가 내놓은 계책이란, 십상시 탄핵 분위기를 조성하고 탄핵 명분을 얻기 위해서 자작극을 벌여 수도 인근의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조의 서주 대학살과 비견할 만한 악행이다.

하진은 그런 계획을 구현해낸 원소와 여기에 열광하는 청류파 인사들을 똑똑히 지켜봤고, 그런 원소를 국정 파트너로 삼아야 했으니 내내 휘둘릴 것이라고 판단하며 두려움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진의 행동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원소의 행동에 제동을 걸면서 기세를 꺾고, 자신의 기존 지지기반이었던 십상시와 탁류파에겐 목숨을 구해줬다는 생색을 내고, 원소와 급진파의 행태에 질린 온건파를 흡수하고, 향후 중앙정계에 어느 정도 지분을 갖게 될 정원과 동탁 등에게도 우위를 점하는 1석 4조의 포석이니 꽤 괜찮은 전략이었다. 거기다 조등이라는 선례까지 있으니 나쁘진 않은 작전이었다. 본인이 허무하게 암살되기 전까진...

이에 원소는 즉각 공문서를 위조해 하진의 명령을 사칭하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십상시를 배제하고 하진과의 관계에서만 봤을때 이는 원소의 자충수에 가까웠으며,[20] 결과적으로 하진의 행동 역시 원소의 견제라는 측면에서만 볼 경우 나름대로 유효했다. 물론 하진을 암살한 뒤 황궁을 장악하고 쿠데타로 정국을 뒤집으려던 장양의 수를 간과한 채 십상시는 이미 재기불능이라고 여긴 것은 치명적인 패착이었지만...삼파전 팽글팽글

허무한 죽음 때문에 폄하되기 쉽지만, 적어도 암살되기 직전까지 '하진을 중심으로 해서 십상시를 몰아내고 정국을 개혁해서 안정시킨다'는 흐름이 청류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합의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원소와의 사이가 상호 견제에 가까웠다곤 하나 결국 십상시 숙청 이후의 지분을 얼마만큼 가져가는지를 두고 대립한 수준이었지, 둘은 명확한 공동목표를 갖고 있었고, 하진이 죽기 전까지 한 배를 탄 파트너였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하진열전>의 말미에 "지혜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권세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우유부단하고 아랫사람들의 아첨에 약했기 때문에 간악함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려고 해도 정도가 구부러져 이를 이룰 수 없었고, 결국 하늘이 그를 패망케 해 애꿎은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는 준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21]

일반적으로 미디어에서의 하진은 무능 높으신 분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상의 하진은 그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능력과 인덕을 갖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지 시세를 읽고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내리는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결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삼국지 컨텐츠에서 묘사되는 수준의 어리석은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조금 부당한 측면이 있다. 막판의 모습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이것 또한 절대 다수의 삼국지 미디어가 후한의 멸망과정은 간략하게 생략하고 이후 등장하는 영걸들의 활약에 초점에 맞추어져있어 하진 또한 후반의 실책들이 부각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으나, 한나라 말기의 난세는 대장군 지위 하나만 가지고 헤쳐나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노련한 정치가들과 군인들마저 죽어나가는 시대에 정치, 행정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던 백정 출신 외척이 대장군으로서 나쁘지 않았다는 걸 보면 결국 살아남지는 못했더라도 정치 쪽에 재능이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 사람에게 조금의 결단력이 더 있었더라면, 삼국지는 시작도 안하고, 후한은 좀 더 왕조를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진 집권 당시만 해도 그는 전 군을 통솔하는 최고사령관인 대장군이었기에 삼국지의 주요 군웅들 중 천하를 호령했던 조조, 유표, 원술, 원소 등은 하진의 일개 부하장수에 불과했고, 유언, 유우, 유대, 손견 역시 하진보다 아래 급의 관료들에 불과했었으며, 동탁 공손찬은 변방의 군벌이었고, 유비 마등은 아예 이름없는 유협 정도에 불과했다. 차후에 천하를 종횡하며 삼분하는 삼국지의 영웅들마저도 이 당시엔 대장군 하진의 일개 수하에 불과했기에, 그가 굳건히 정권을 유지하며 후한이 이어졌다면 이들은 그냥 일개 장수들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다만, 하진은 환관과 외척, 청류/탁류파로 구성된 기존의 정치 구도를 크게 바꾸려 들지 않는 보수적, 타협적 성향을 가진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본인 성격 문제 이전에 하진은 황후의 오빠라는 것에서 권력을 얻은 것이므로 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에는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썩을대로 썩은 한나라 체제를 과감하게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것. 즉, 구시대적 한계를 가진 인물이라 암살당하지 않았다 한들 이 인물이 할 수 있는 일은 협상가로서 기존 구성원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나라가 유지만 되게 놔두는 정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평시라면 모를까 하진의 집권기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민생이 피폐했고 민중의 불만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후한은 통치 시스템의 붕괴 때문에 멸망 위기로 치닫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근본적인 개혁 없이 환관과 중신들 사이를 오가며 구체제만 유지해봐야 국가의 멸망과 난세를 막을 수 있겠느냐는 평가도 존재한다. 근본적 개혁 없이는 조정만 근근히 유지하는, 솥에서 천천히 삶겨져 죽어가는 시한부 인생 개구리 꼴 밖에 못되는 격인 것.

또한, 하진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우유부단함이고, 실제 이 인물의 행적을 보면 강한 결단력으로 단숨에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해버리기보다는 원만한 조정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인물이기에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어보이는 측면이 많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하진의 우유부단함은 하진 자신의 파멸과 한나라 조정의 붕괴를 불러온 하진 최대의 과오라는 기존의 평가에는 다소 결과론적인 측면이 있음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진의 우유부단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오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십상시를 제거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고, 결국 십상시의 반격으로 자기 자신이 살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지만, 실제론 하진의 살해가 하진 자신의 정치적 오판 이상으로 십상시들이 저지른 정치적 자충수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 십상시들이 또라이 같은 원소를 제어하고 있던 하진을 죽여버리면 그 쌩또라이가 날뛸 줄 모를 정도로 정치적 판단이 안 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후한의 정치적 갈등 국면을 보면 십상시를 중심으로 하는 환관 세력[22]과 지방 호족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한 청류파[23] 세력은 극히 적대적인 관계였고, 본래 황제를 등에 업은 환관 세력이 오랜기간 청류파를 탄압하다가 황건적의 난 진압과정에서 청류파가 군사력을 확보하면서 세력구도를 역전시켜 그들이 증오하는 환관 세력을 숙청해버리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하진은 청류파의 지지를 받는 동시에 환관 세력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환관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군사력과 정치력을 확보한 청류파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있는 유일한 방패가 바로 하진이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이 제거당한 뒤 원소 등 청류파의 역습으로 환관 세력이 완전히 몰살당하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3일이다. 당시의 십상시에게는 청류파의 군사력에 저항할 힘이 말 그대로 전혀 없었고, 이전부터 청류파가 하진에게 환관 세력의 철저한 숙청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오직 하진의 정치적 균형감각과 안배에 기대어 목숨과 세력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환관 세력의 상황이었던 것.

물론, 갈등 상황에서 그 상황의 모든 구성원이 항상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한다는 보장은 없고, 따라서 십상시가 비합리적인 돌발 행동을 벌이는 상황을 사실상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도 하지 않다가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한 하진에게 실패한 정세 판단의 궁극적인 책임이 돌아가는 것 자체는 당연하다. 하지만 하진 역시 단순히 우유부단하게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것이라 보기에는 하진의 입장에서 십상시가 자신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라 판단할 근거가 분명 있었다는 것.

결국 이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을지언정 황제와 태후의 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십상시로써는 하진을 제거하여 청류파를 와해시키고 황실의 권위에 기대어 정권을 재장악하는 도박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보고 충분히 실현 가능한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하진의 판단 실책에 중점을 두어 이 문제를 해석할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반대로 "현실 권력의 기반인 군사력을 이미 청류파가 장악한 상황에서 물리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황제와 황실의 권위에만 기대어 정권을 재장악하겠다는 시도는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만한 상황이었다고 보고 십상시의 난은 하진으로써는 상식적, 합리적 수준에서 예측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돌발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하진의 파멸 원인은 스스로의 우유부단이나 판단 실수보다는 불운한 우연에 가깝다고 해석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하진의 입장에서 "십상시와 환관 세력을 제거한다"는 것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당위를 가진 목표였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일단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 서술자들은 대부분 지식인 혹은 사대부의 관점, 즉 환관 세력과 적대적이었던 청류파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했기에 환관 세력을 철저히 숙청하고 배제했어야 한다는 것을 당위로 보고 이 당위를 실천하지 못한 것이 하진의 실책이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주류적 관점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아무리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려고 애써봤자 후한을 다 말아먹어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것이 십상시와 환관 세력이라는 점 자체는 도저히 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주류적 관점에 더욱 힘이 실리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한나라의 역사 전반을 보면, 환관 세력은 단순히 '나라를 파탄에 빠트리는 악의 집단'이 아니라 이들 역시 후한의 정치권력구조를 이루는 실질적인 한 축이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나라의 정치구도는 기본적으로 환관 외척, 사대부라는 세 세력간의 균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중앙정부(조정)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친위세력인 환관과 외척이었고, 환관과 외척은 조정(중앙정부) 내에서의 주도권을 서로 뺏고 뺏기며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였다.[24] 반면 사대부 세력은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전국의 지방 유력자를 기반으로 하는 특성상 다소의 부침이 있다 하더라도 기반 자체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함을 가지고 있었고, 향거리선제를 통해 지방 유력자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을 중앙정부로 꾸준히 올려보내고 있었다. 특히 나름의 등용 과정을 거쳐 발탁되는 특성상 사대부 중에서 중앙정부에 진출한 이들에게는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기량은 기대할 수 있었기에 국정 운영을 책임질 '실무진'을 공급하는 것은 주로 사대부 계층의 역할이었고, 동시에 지방(향촌)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기술적 한계 속에서 지방에 대한 조정의 영향력과 상호작용을 유지하는 것 역시 이들의 역할이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외척과 환관이 양대 당파로써 중앙정부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며 서로 견제하는 역할이고, 사대부 호족 계층은 실무관료나 지방자치체로써 양대 당파 모두와 영향력을 주고받고 견제/협력하며 국가를 유지하는 일종의 균형이 이루어졌던 것. 물론 이런 균형 안에도 많은 모순과 한계,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균형 속에서 한나라(특히 후한)은 수백년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후한 말의 혼란상 역시 어린 나이의 황제가 즉위했다가 요절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군주제의 축인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고, 이로 인해 3대 세력간의 균형이 무너져 환관 세력이 견제없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 바에서 기인한 면이 아주 크다.

결국 위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하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인물이 보여준 정치적 비전은 외척이면서도 청류파(사대부)의 지지를 받고, 환관들과도 타협의 여지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다는 면모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3대 세력의 균형 위에 성립한 한나라의 기존 체제를 복구한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하진을 구(舊) 시대적 한계를 넘지는 못한 인물로 보고 잘 해야 구(舊) 시대의 질서를 복원하여 나라를 유지하는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며, 새로운 체제와 질서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하면 그건 분명 정확한 분석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수백년간 이어진 체제의 모순을 개혁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유능한 정치가 수준의 인물이 아니라 세계사에 이름을 새길만한 위인의 영역이다. 또한 위에서는 한나라 체제가 이미 썩을대로 썩어 회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장 후한 말의 혼란상 자체가 "수백년간 유지되어 온 한나라의 체제 자체가 완전한 한계에 봉착한 결과물"인지, 아니면 "시스템 자체는 아직 유효하지만 그 시스템이 원칙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당대를 살아가던 하진 등의 시각에서 판단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고[25], 따라서 3대 세력간 상호 견제-균형 체제의 부활이 만약 정말 이루어졌을 경우 이것이 한나라를 어느 정도까지 회복시킬 수 있었을지 역시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구(舊) 체제의 복원에 성공한다는 것은 곧 멸망의 위기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는 것이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업적이며 역사상 대부분의 멸망한 국가들은 이걸 못 해서 결국 망한 것이다. 하진의 행태를 볼 때 구 질서의 복원을 통해 쇠락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고, 그래서 이게 성공해서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냐 아니냐가 문제인 상황에서 "구(舊) 체제의 복원을 지향했을 뿐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니 대단치 않은 인물이다."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하진은 과격한 개혁을 요구하던 청류파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이 때의 청류파 과격파들의 염원이었던 탁류파를 철저히 배제한 청류파의 중앙정계 주도권 장악은 결국 이루어졌다. 조조의 집권기를 거쳐 위나라~서진 시대에 이르면 청류파 사대부 호족 세력이 문벌귀족으로 자리잡아 국가의 중앙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환관과 외척은 후한 시절에 비하면 훨씬 보조적인 입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이뤄낸 문벌귀족 위주의 권력독점 구조가 한나라의 체제보다 국가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가 않았다. 권력을 독점한 청류파 출신 문벌귀족들은 처음에는 체제를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듯 보였지만 너무나 빠르게 타락해서 후한말 못지않은 막장을 금방 도래했다.[26] 설령 옳은 명분을 내세운 세력이라 해도, 한 파벌이 실질적인 권력을 대부분 독점하는 체제는 구조적 문제가 생기기 쉽다. 하진이 이런 권력과 체제의 본질까지도 이해하고 있었을 정도로 정치적 식견이 높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걸 계산하고 한 행동이라면 흔히 받는 평가를 훨씬 상회하는 안목이다.

종합하자면 하진은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낙하산 외척이라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의외로 능수능란한 균형감각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다시 재평가되는 추세다. 애초부터 아무리 외척이라 한들 무능하기만 한 인물이라면 꼬장꼬장한 청류파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특히 청류파의 아이돌 격이자 후일 하북의 1인자로 올라선 원소 정도 인물의 협력을 받을 리가 없다. 실제로 하진은 부드럽게 정국을 운영하며 각 세력들을 잘 조정해 스스로의 실력으로 지지를 얻어내 보였다. 조금만 더 안정적인 시대에서 권력을 잡았다면 황실을 그럭저럭 유지하는 괜찮은 인척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아포칼립스로 치닫는 후한 말기에 필요한 과감성이 없는 신중한 인물이었다는 게 아쉬운 부분이다.

4. 가족 관계

환관 쪽에 붙었던 하진의 의붓동생인 하묘[27]는 하진 사망 직후엔 일단 군사를 이끌고 원소와 함께 환관들을 조지러 가긴 했는데, 평소 해왔던 짓 때문에 하진의 속관이자 부장이었던 오광[28] 등 하진의 부하들에게 하진의 암살에 관여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아 살해당한다. 하진 형제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이후에 동탁은 하씨 일족을 멸하고 하진의 계모 무양군까지도 죽여버린다. 또 이미 죽은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고 길가에 내버리고 나중에 하태후와 그의 조카인 소제를 폐위한 다음 죽여버렸다.

남은 하진의 혈족은 하진의 아들 하함과 하함의 아들 하안 뿐이었는데 하함도 죽었는지 하함의 아내 윤씨는 어린 아들 하안을 데리고 조조와 재혼했고 하안은 자연스럽게 당시 최고의 권력자 조조의 양자가 되어 위나라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나중에 조조의 딸 금향공주와 결혼해서 조조의 사위가 되었지만 나중에 조상의 심복이 되었다. 그러나 249년 사마의 고평릉 사변으로 반역자로 몰려 그 일당과 함께 멸족되고 말았는데 참 불운한 하씨 집안이다. 다만 하안의 어머니 윤씨가 조정에 간언해 본인과 하안의 아들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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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생인 하태후가 155년생이므로 둘의 터울이 아버지와 딸 수준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140년대 후반~150년대 초반생일 것으로 보인다. [2] 하진의 계모이자 하태후와 하묘의 친모인 무양군은 원래 주씨 성 가진 남자의 아내였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주묘를 낳았다. 이후 무양군이 하진의 아버지와 재혼했는데, 이때 주묘를 데리고 들어가서 주묘는 의붓아버지에게 하씨 성을 받아 하묘로 개명했다. 무양군이 재혼한 하씨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하태후이다. 즉 하태후에게 하진은 이복 오빠, 하묘는 이부 오빠인 것으로 하진과 하묘는 의붓형제이지만 혈연이 아닌 것이다. [3] 화척이다. [4] 재가승이다. [5] 피차별집단이다. [6] 노비 소작농의 중간쯤이다. [7] 특히 현대처럼 바로바로 현금계산을 하던 것도 아닌 시대라 상당 기간 동안 자본이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 [8] 예를 들어 한의 개국공신인 번쾌의 예를 보더라도 지역 명사인 여공이 개 잡는 백정 출신인 번쾌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보통 이는 큰 딸은 양아치, 작은 딸은 백정에게 시집보낸 여공의 기이한 행태와 사람을 알아보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자주 소개되지만, 사실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백수 건달 깡패짓이나 하고 놀고 먹던 파락호이기는 했지만 학문이나 검술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정장(250호가 모인 정(亭)의 장, 즉 촌장이나 동장 정도)이라는 벼슬을 자신의 힘으로 얻을 정도는 되었던 유방이나 (소백정이나 돼지백정보다는 자본 규모가 작아도 할 수 있는 개백정이기는 했지만) 일단 해당 지역에 자리잡은 자영업자였던 번쾌 정도면 지역 유력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것. 즉 남자 쪽이 좀 쳐지는 결혼이라고 여겨지기는 했어도 아예 지역 유지가 자기 딸을 천민에게 시집 보내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한참 뒤인 송나라 시대긴 하지만 수호전 노지심과 시비가 붙었다가 죽게 되는 푸줏간 주인인 정도도, 동네에서 꽤 돈을 많이 벌고 부유하여 위세를 떨쳐 돈 많은 어르신이라는 대관인이란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진짜로 백정이 마냥 천민에 차별당하는 위치였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9] 노식 해임건이 있지만 그건 환관과 연루된 일인데다가 곧 복직된다. [10] 중앙군이었지만 실제론 거의 환관의 친위대였다. 다만 수장 아래 속한 여덟 교위 중 조조, 원소는 각각 독립 세력이 되는데 순우경은 원소 휘하에 들어간다. [11] 황하 유역의 포구 [12] 실상은 원소가 벌인 자작극이었지만 말이다. [13] 기록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정확한 파악이 어려우나 공손찬이 쓴 찬표소죄상(=원소의 죄상을 밝히는 표)을 중심으로 보면 윤곽이 드러난다. [14] 물론 후한의 환관제는 그 나름대로는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근본적으로 한나라의 권력구조는 <중앙정부+황제>와 <지방정부+호족>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향거리선제에 의하면 지방의 호족이 중앙관료가 되게 되었고 자연스레 관료도 호족에 가까운 편이다. 황제 입장에서는 이를 놔둘 수 없으니 두 가지 방안을 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관료 중 일부랑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관들을 측근으로 삼는 것이다. 전자는 대게 관료들 중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세력이 있는 자가 되므로 관료세력 중 일부를 황제의 편으로 만들고 후자는 환관은 찬탈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호족들과 가까운 것도 아니니 자연스레 황제의 편이 된다. 그래서 후한 말 정치는 현대 대한민국 정치에 비교하자면 외척과 환관은 서로 번갈아 집권하는 양대 정당의 역할을 했고 호족 출신 관료들은 종종 캐스팅 보트를 쥐는 군소정당이나 말 그대로 관료조직, 또는 시민단체나 언론등과 같이 직접 집권하지는 못하지만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국 황제는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 번갈아가며 힘을 실어주고 중용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통제했고, 그리고 이런 외척과 환관을 수족으로 삼아 관료들을 견제하고 통제했다. 문제는 외척은 구외척(전 황제의 외척)과 신외척(현 황제의 외척)의 대립이라는 문제가, 환관은 무능과 부정부패라는 문제가 있었고 하진이 활약하던 영제 말은 이 환관들의 문제가 심각하던 때였다. [15] 군권도 없는 환관을 제거하는 게 왜 그리 어렵나 싶겠지만 사실 환관을 제거한다는 건 곧 황제에게 대든다는 것과 같이 취급받을 수 있어서 그렇다. 상술했다시피 환관은 황제의 친위세력이기 때문. 반대로 원소와 원술이 순식간에 환관을 제거한 것처럼 정말로 맘먹고 나서면 제거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대체 원소와 원술이 후한에 대해 속으로 어떤 맘을 품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16] 그리고 청류파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외척의 전황이 더 나았는게 외척들은 전횡은 부려도 청류파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환관은 두 차례에 걸쳐서 청류파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기 때문이다. [17] 무엇보다 환관과 외척의 득세가 한나라의 체제 내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번갈아 득세하며 서로를 견제함을 전제로 하던 것인데, 후한 말기의 문제는 환관 세력이 완전히 독주하여 계속 득세한 끝에 결국 폭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31] 즉 후한 체제 내에서 정치적 균형을 회복하려면 일단 외척 세력의 힘을 키워 환관 세력의 견제가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 때문에라도 청류파와 하진이 손을 잡았던 것. 이렇게 세력을 회복한 외척 세력의 성장이 또 도가 지나쳐 외척의 전횡을 불러올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생각할 문제인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인 사람이 밥을 보면 일단 배를 채우려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모습을 보고 "너 앞으로도 맨날맨날 그렇게 먹어대면 비만된다"고 말하는건 별로 의미가 없다. 이런 조언은 그 사람이 일단 배를 채운 뒤에 해 줘도 충분할 것이다. [18] 다만 그렇다고 하태후나 십상시도 완전히 각자 도생할 수도 없는데 하태후 소생의 소제가 황제가 된 것에는 하진의 힘이 작용한 만큼 하태후 자신의 지지기반은 하진이었고 십상시 역시도 하진 사후에는 하태후에게 달라붙어 목숨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신세가 영 좋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하진 밑에는 자신들을 죽이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하진이야말로 그나마 자신들의 명줄을 조금이라도 늘려주고 있었다. 하진이 하태후 말이면 꼼짝도 못하니 그 하태후에게 들러붙은 자신들을 자기 손으로 어찌 할 수도 없지만 반대로 아랫사람들이 폭발하지는 않을 정도로는 힘이 있기 때문, 물론 원소가 내놓은 계책을 하진이 받아들인 만큼 이들도 결국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겠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는 하태후가 비판받아야 한다고 봐야 한다. 어차피 십상시는 지는 해였고 십상시를 처벌하라는 목소리가 많아진 이상 쓸모없어진 십상시들을 버리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 십상시가 반발해도 오빠인 하진과 그 부하들을 동원하면 끝, 거기다 그 십상시의 권력을 하진과 자신이 나눠먹으면 금상첨화. 물론 하태후 역시도 환관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환관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또 그녀의 인척들이 장양과 엮였으니 더 그랬겠지만 그 결과 십상시들에게 하진이 죽고 하진이 죽자 뒷배가 없어져 동탁에게 아주 간단하게 쫓겨난 뒤 비참하게 죽었으니 결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십상시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쫓아내야 했다. [19] 두무 역시 황후의 인척이자 보정대신으로써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진과 거의 비슷한 포지션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원래 한나라의 체제가 그렇다. 이 문서에서도 여러번 설명된 것처럼 외척과 환관은 황권의 두 축이었기에 특히 황제를 지키는 중앙군의 군권은 외척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어린 황제를 보호할 보정대신의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면 특히나 '지금 이 황제가 아니면 자신의 위치가 보장되지 않는' 외척이 가장 적절했던 것. ( 환사황후 두씨는 어차피 영제의 친모가 아니었으니 그런 외척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만약 반란으로 황제가 교체될 경우 현 황제의 계모인 태후의 지위도 당연히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다른 황자의 생모나 그를 후원한 다른 후궁이 태후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다- 그러니 태후의 입장에서는 친자식이 아니라도 자신이 옹립한 황제를 지켜야 하고, 실제로 말년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환사황후 두씨지만 영제는 그녀에게 자신을 옹립한 공이 있다고 여겨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하진과 두묘 모두 황후(태후)에게 배신당해 환관 세력의 역습으로 살해당했다는 점까지 공통점이 있고, 심지어 영사황후 하씨의 이복오빠에 불과했던 하진과는 달리 두묘는 두황후의 친아버지였으니 이건 더 심한 것 아니냐 싶은 일이긴 하지만 이 역시 당시 궁정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필연성이 있다. 항상 궁정에 머물러야 하는 황제나 황후에게 환관이란 곧 수족이자 눈과 귀이며 입이기도 했던 것. 무슨 소식이건 환관을 거쳐서만 접할 수 있고, 뭘 하건 환관들을 거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처지였으니, 그만큼 환관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던 것이다. [20] 이전까지 원소는 합법적이거나 최소한 보정대신 하진의 비호 아래 합법을 가장한 형식으로 행동했으며 하진과의 의견 대립도 타협으로 해결했지만, 이 경우는 여론만 믿고 대놓고 월권 행위를 하면서 하진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당시의 추종 열기만큼은 대단했겠지만 말이다. [21] 능력과 지위 그리고 권세도 충분함에도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랫 사람에 말에 휘둘려 개혁에 실패하고, 결국에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함으로써 죄 없는 백성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는 평가로 보인다. 즉 개혁을 외면한 능력 있는 높으신 분이라고 하면 쉬을 것으로 보인다. [22] 환관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을 탁류파라고 한다. [23] 반(反) 환관이다. [24] 외척과 환관은 기본적으로 황제 개인의 신임을 기반으로 권력을 가졌기에 황제의 신임을 잃거나 황제가 교체되면 쉽게 세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예로, 황제가 즉위하면 처음에는 황제의 친위세력으로써 외척에게 힘이 실리지만 시간이 흘러 황제 스스로 자기 사람을 만들면 '황제가 신뢰하는 사람'인 환관 세력으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고 외척은 힘을 상실했다가,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 전 황제가 신임하던 환관들은 급속히 세력을 잃고 새 황제의 외척에게 권력의 축이 옮겨가는 식이다. [25] 현대인의 판단 또한 이후 이어지는 역사적 결과를 알고 있기에 판단에 영향을 받는 결과론적 시각이 될 수밖에 없다. [26] 문벌귀족들의 타락은 이미 위나라 조예 때부터 점점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낮아서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진나라 시대에는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다. [27] 하진의 아버지는 과부 무양군과 재혼을 했는데 이 과부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 하묘로 원래 성은 주(朱)씨라고 한다. 하씨 성을 쓰며 자라긴 했지만 혈연적으로 완전한 남남이었다. 하진은 이 계모와 그 자식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듯 하다. [28] 유비의 처남이자 촉의 장수였던 오의의 족제 오반의 아버지다. [29] 사실 황건란이 터져서 대장군부가 정신없이 바쁠 시기이긴 했다. [30] 다만 어차피 몇년 지나지 않아 동탁이 집권하게 되면서 후한 조정의 권위가 박살이 나기 때문에 그리 오래 쫓기는 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러나 유비 역시 황건적 토벌에 뛰어들면서 다른 명사들과 안면을 트고 차근차근 명성을 쌓아 올렸기에, 여기에 끼지 못하고 계속 도망생활을 했다면 반동탁 연합군때 조조와 함께 참가하지 못했거나, 하더라도 그저 일반 잡졸 취급받았을 확률이 높다.


[31] 당고의 금 역시 완전히 득세하여 폭주한 환관 세력-탁류파-가 그나마 자신들을 견제하려던 청류파마저 일소하고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