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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수뇌부 | |
천공장군(天公將軍) 장각(張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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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장군(地公將軍) 장보(張寶) |
인공장군(人公將軍) 장량(張梁) |
태평도 교주
천공장군(天公將軍) 대현량사(大賢良師) 張角 장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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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 <colbgcolor=#FFFFFF,#1f2023> 천공장군(天公將軍) 대현량사(大賢良師) |
종교 | 태평도(太平道) |
성씨 | 장(張) |
이름 | 각(角) |
생몰기간 | ? ~ 184년 |
고향 | 기주(冀州) 거록군(鉅鹿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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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漢末乘間竊發
한나라 말 틈을 타서 몰래 발동하여,
號稱太平道人
태평도인이라 칭하여 불리었다네.
豈爲儒冠誤我
어찌 유학을 배운 것이 나를 그르쳤겠나?
居肰首裹黃巾
거연하게 머리에 누런 두건을 둘렀다네.
한나라 말 틈을 타서 몰래 발동하여,
號稱太平道人
태평도인이라 칭하여 불리었다네.
豈爲儒冠誤我
어찌 유학을 배운 것이 나를 그르쳤겠나?
居肰首裹黃巾
거연하게 머리에 누런 두건을 둘렀다네.
중국 후한 말기의 인물로 후대 도교의 원류 중 하나가 된 태평도의 창시자이자 교주.[1] 영제 때 세상이 혼란하자 주술이나 부적, 영수(靈水)[2] 등으로 병을 고치는 요법(療法)으로 민심을 모아 수만 명의 신도들을 바탕으로 조직화하여 184년 후한 왕조 타도를 기치로 거병함으로서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다.
2. 생애
기주 거록군[3] 출생으로 장보, 장량이라는 두 동생과 함께 농민들을 규합하여 이끈 농민군을 황건적이라 불렀는데 이는 머리에 노란 두건을 걸쳤기 때문이다. 워낙에 거대하게 자라난 집단이라 순식간에 8주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세력을 넓힌 장각은 대현량사(大賢良師)이자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자칭[4]하였으나 장량이 행림장, 연주 등에서 패하고 장보가 광녕군으로 도망오자 크게 분노했다. 결국 장각이 184년 병사하면서 황건적은 주준, 노식, 황보숭 등의 활약에 패하여 진압되었다. 이때 병들어 죽은 장각은 무덤이 파헤쳐져서 관은 부서지고 머리가 베였으며 잘린 목은 낙양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 비록 난은 1년만에 진압되었지만 황건적은 후한의 행정을 완전히 마비시켰는데 이후 황건적의 잔당들이 몇 년에 걸쳐 대규모로 봉기하고 치안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이를 해결할 중앙군이 무력한 가운데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벌들이 대두하여 중국 전토를 할거하게 되었다.3. 기타
-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 타도"를 목표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중국의 왕조들은 신흥 종교에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중국은 19세기 말까지도 여러 종교 반란[5]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를 경계하고 있고, 그리하여 1990년대 신도수를 1억명까지 확장했다고 주장하던 파룬궁도 중국 정부의 대탄압으로 중국내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6] 이 뿐만 아니라 가톨릭, 불교, 개신교, 이슬람교 등의 대형 기성 종교들도 일정한 규제를 받고 있다.[7]
- 《 삼국지연의》에서는 원래는 과거 시험에 떨어진 수재로 약초를 캐며 살아가고 있다가 남화노선( 장자)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태평요술서라는 것을 받고 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장각이 남화노선을 만났다는 전설은 있기 때문에 완전히 근거없는 창작은 아니지만 삼국시대에는 과거 시험이 없었으므로[8] 고증에는 크게 어긋나는 설정이다.[9]
-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태평요술서를 얻은 후 주화입마했다. 혹은 약간의 미화가 들어가서 한낱 도인으로 인민을 구제하기엔 힘이 부족해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명이 붙기도 한다. 토탈 워: 삼국에서 묘사된 모습이 후자로 해석한 사례로, 다 죽어가는 병자에게 약을 먹여보지만 살려내지 못해 결국 약그릇을 집어던지고 먹구름에서 빠져나오는 햇빛을 움켜쥐는 트레일러가 인상적.
- 《 삼국지평화》에서는 손씨 성을 가진 학구의 제자가 되어 의술을 배우다가 집의 노모를 돌보기 위해 휴가를 청했지만 손학구는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며, 장각은 손학구로부터 명방을 전수받고 천하의 병든 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들에게 재물을 요구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후 사람들을 치료하고 제자를 모아 그 수가 불어나면서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 현재 중국 현지에 장각의 묘가 남아있다. 일단은 중국 당국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놓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비석에는 "한중산왕묘"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따로 장각의 무덤이란 안내판이 있다. 그러나 전혀 관리가 안 되어 있어서 영상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표지판 하나 있는 수준. 역사에서 보면 흔한 반란 주동자 & 사이비종교 교주라, 저 영상 제작자 말처럼 사실 무덤이 남아있는 것조차도 후한 대접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1]
그러나 오늘날 도교의 원류는 장각의 태평도가 아니라
장로(삼국지)의
오두미도이다. 태평도는 당대에 황건적의 난 실패로 인해 탄압을 받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잔당들이 오두미도에 흡수당하는 결말을 맞이하여 태평도 자체는 삼국시대를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봐야한다.
[2]
신비스러운 효험이 있는 물.
[3]
현
허베이 성
싱타이시.
[4]
천지인 원리를 이용했으며 그의 동생들인
장보와
장량은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 되었다.
[5]
청나라 말기에는 종교 반란이 매우 많았다.
태평천국을 비롯하여
무슬림,
백련교도, 천지회(天地會),
의화단 등등이 종교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때문에
청나라는 약화되어 결국 망했다.
[6]
이 때문에
반중국적인 인사들이나 서방에서는 파룬궁 측이 동정을 받고 있다.
[7]
중국에서는 교단 차원의 적극적 포교나 해외교류는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받는다.
[8]
과거 제도는
수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정형화되어 정착하였다. 한나라 시대의 관료선발제도는
향거리선제라고 해서, 지방관이 그 지방의 여론을 보고 적당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 다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지방관 역시 향거리선제로 선발된 경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9]
지방에서 과목에 따라 효렴, 수재 등을 천거해 시험을 거쳐 등용되는 과정은 한나라 때도 있기는 했다. 다만 피휘 문제로 장각이 살던 후한 말에는 수재가 이닌 '무재'로 불리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