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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29:44

프랑스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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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제2차 세계 대전2.2. 전후 프랑스의 핵개발 결심2.3. 샤를 드골 대통령의 핵개발 계획2.4. 미국과의 타협2.5. 핵무기 개발 이후
3. 같이 보기

1. 개요

작전명 "푸른 날쥐(Gerboise Bleue)"를 비롯한 프랑스 핵무기 개발사를 다룬 문서.

2. 역사

2.1.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프랑스의 핵과학자들은 핵분열 현상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핵분열을 통해 생겨나는 에너지의 산업, 군사적 이용과 관련된 특허를 출허했다. 그리고 라울 도트리를 위시한 정부 인사들은 퀴리 부부와 협의하여 원자로를 건설하고 우라늄과 중수를 확보했다. 그러다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이렌 졸리오퀴리 부부와 프랑스의 정보 요원들은 확보한 중수를 은닉하고 나치가 프랑스의 핵과학 지식을 확보하는 것을 방지했다.

프랑스가 주권을 잃은 후, 미국에서 맨해튼 계획에 합류한 프랑스의 과학자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베르트랑 골드슈미트 단 한 명 뿐이었다. 한스 할반, 코왈스키, 쥘 게론, 피에르 오제 같은 이들은 캐나다에서 이뤄지는 핵개발 계획에 참여해 몬트리올 연구소에서 일했다. 퀴리 부부는 조국에 잔류해 연구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병행했다. 이들 모두 핵과학과 플루토늄 추출, 핵 재처리, 핵분열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석학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연구를 하던 이들은 핵과학의 중요성을 어떻게든 자국(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 정부)에 알리려 했다. 때마침 드골이 1944년 7월에 캐나다를 방문하자, 몬트리올 연구소에 있던 과학자들과 베르트랑 골드슈미트가 샤를 드골과 면담을 가졌고 이 때부터 드골은 핵과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2. 전후 프랑스의 핵개발 결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샤를 드골은 전쟁이 끝난지 몇 달도 안 되었던 1945년 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였다. 드골은 곧 물러났지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핵개발 의지를 알고 있었던 미국·영국· 캐나다는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방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남부 부르고뉴의 중앙 고원지대인 Massif Central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는 행운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독자 핵개발 의지를 더욱 굳혀준 사건이 1956년에 있었는데, 제2차 중동전쟁이 그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작전은 이스라엘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었으나, 소련이 개입해 ' 이집트에서 얌전히 철수하기 vs. 핵로켓 쳐맞고 개털리기'라는 조건을 들이댔고 미국까지 소련에 동조하자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1]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미국이 영불 양국의 안보에 대해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자 양국은 동맹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나마 핵개발 시점에서 영국은 그 당시 원폭과 수폭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 양산체제에 돌입한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점점 뒤쳐지고 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정신이 프랑스에 팽배했고, 결국 일을 내고 만다.

결국 프랑스는 겨우 십수년 전에 자기네 땅을 강점했던 적국이자 웬수였던 서독에게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르고, 비자금 20억 마르크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에서 서독이 프랑스에 비밀리에[2] 핵 기술과 돈을 지원한다면 핵개발후 프랑스의 핵 전력에 대한 서독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계약이 성사되려는 찰나, 알제리 전쟁의 종전을 계기로 집권한 드골 대통령이 그 계획을 취소시킴으로서 프랑스의 단독 프로젝트로 남게 된다.

계약이 취소되자 당시 서독의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곧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하지만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독일의 독자 핵개발은 용납되기 어려웠고, 대신 서독은 미국의 단거리 전술핵과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대량배치하고 훗날 핵개발에 성공한 프랑스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것으로 이를 해결해야 했다.[3]

2.3. 샤를 드골 대통령의 핵개발 계획

한편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드 골은 NATO를 미국-프랑스-영국의 3강 체제로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프랑스가 핵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또한 드골의 집권 초기인 1958년에는 NATO 사령관 로리스 노스태드 미군 대장을 접견해서 프랑스 영토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의 위치를 보고하라고 요청하자 사령관은 "다른 각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는 곤란하다"며 망설였고, 이에 드골은 각료들에게 잠시 나가도록 지시한 후 단 둘이만 남은 상태에서 "자, 이제 말해보시오"라고 재차 요구했다. 하지만 노스태드 사령관은 "죄송합니다. 제 직책상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일화

이러한 일들을 겪은 드골은 그 어떤 수단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독자적인 핵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골은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핵개발을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핵우산을 제공하려는 미국에 대해) "미국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서 뉴욕을 희생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든지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해주지는 못한다."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 드골.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핵개발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유엔, 미국, 소련 등이 반발하면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정치현실주의로 인한 국제정치판의 법칙은 이번에도 맞아 떨어졌다. 후대의 북한, 이란, 이스라엘, 인도, 중국, 파키스탄에서도 그 예를 알 수 있다.

거기에다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대불 외교/경제 고립 전략은 프랑스의 핵무장과 자국에 대한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을 바라던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 특히 서독이 프랑스의 편에 남아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면서 무력화됐다.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작전 암호명은 "푸른 날쥐(Gerboise Bleue)".

핵실험 직후 샤를 드골 대통령은, "위대한 프랑스 만세! (Vive la France!)",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국력, 물량을 비추어 보았을 때 소련이나 미국에 맞먹는 핵전력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비례억지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일단 어떤 국가가 프랑스와의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프랑스가 핵공격을 받는다면) 프랑스 국민들의 몰살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상대국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핵을 쏟아부어 '최대한 많은 적국의 인간을 길동무로 끌고 가겠다'는 식의 무서운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대에도 상대적으로 약소한 나라가 강대국에 대하여 취하고 있다. 양안관계에서의 대만이 대표적인 예시. 쉽게 얘기하면 "넌 날 죽일 수 있고 난 널 죽일 수는 없지만 대신 너의 팔다리는 자르고 갈 수 있다" 라는 메세지로 보면 된다.

이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높기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으나, 이 전략을 세운 당사자인 프랑스나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시 주된 전장이 될 서독으로서는, 핵무기가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인류문명이 멸망할 전면적 핵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국-소련 양대 초강대국에 강요함으로서 이들이 유럽전선을 무대로 핵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제안한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하면서 프랑스의 핵전략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맥나마라도 "유연한 대응 그딴 거 없고 그냥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유연반응전략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전술핵을 한 발 사용하면 미국도 한 발 사용한다. 소련이 두 발 사용하면 미국도 두 발 사용한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도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으므로, 이러한 핵전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는 장거리 전략핵의 사용가능성을 줄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허나 동시에, 이는 미국-소련 수뇌부가 전술핵사용을 결단하는데 따르는 부담감을 크게 낮춰주는 부작용이 있다. '핵을 사용하면 미국과 소련도 끝장이야. 그러니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핵은 최대한 자제해야지'가 아니라 '핵무기 사용을 '안전한' 유럽전선에 국한시킬 수 있다면, 전술핵 몇 발 쯤은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나?'로 상황이 바뀐다는 것.

당연하게도, 이는 유럽 국가인 프랑스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4]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미군 장성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NATO에서 탈퇴하고[5] 드골의 핵개발에 반발한 미국이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실상의 독자노선을 취하게 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유럽에서 걷어내고, '위대한 프랑스'의 휘광 아래에 전 유럽을 보듬으려는 드골의 야심과도 일맥상통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현재에도 프랑스의 외교노선 방향과 일치한다.[6]

열혈 프랑스 민족주의자 드골은 또 다시 말하길...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드골의 고집은 좀 다른 방향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바로 독일( 서독)과의 관계 개선. 드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협력 국가가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독일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은 프랑스-독일 관계 문서에 나와 있다.

2.4. 미국과의 타협

결국 이 팽팽한 갈등은 미국 민주당 정권과 프랑스 드골 정권이 모두 끝난 1969년에 끝난다. 정권을 잡은 미국 공화당 리처드 닉슨 정권은 프랑스의 그 고집에 질려서(…) 결국 프랑스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어차피 프랑스가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이상, 차라리 도와주고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한 것. 당시 프랑스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하나의 목표를 맞출 수 있는 여러 개의 핵탄두"[7](MRV)를 탑재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맥마흔 법에 의해 기술의 해외이전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기술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는 그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만 짚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미국측 기술자가 범법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미국에게 이전받은 MRV기술을 바탕으로 한단계 더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MIRV(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 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해 1985년에 실전배치된 M4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 프랑스가 자신들의 측정장치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핵실험 회수를 줄여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아예 핵탄두를 들고 와서 직접 핵실험을 하라고까지 제안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이건 또 거절했다. 대신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프랑스의 무루루아 섬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에 여러가지 지원을 했지만, 끝까지 전략핵잠수함에 대한 기술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해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략핵잠은 해군의 보물이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도 외부 지원 없이 자체개발에 성공한다.

당시 프랑스의 한 관계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발전시켰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영국-캐나다 3국의 우라늄공급통제협정으로 핵개발을 저지당할 뻔 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2.5. 핵무기 개발 이후

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받은 이후로도 1970년대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던 한국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판매하려 시도하고, 이후 이라크에 핵발전소와 재처리시설을 수출하는 등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표명하곤 했다.[8]

그 외에 이스라엘의 핵개발도 프랑스의 핵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국내외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9]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대신,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 땅에 자신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고, NATO군에서는 탈퇴했으나 유사시 프랑스군이 NATO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비밀리에 허락했다.

프랑스의 100% 순수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진 force de frappe(핵타격군)은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MRV 개발과 몇몇 부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엄연히 자체기술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상/수중배치 핵탄두와 그 발사체까지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면 영국은 SLBM체계 개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결국 미국의 폴라리스, 트라이던트 II 미사일을 구입해서 운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틀어졌고 미국은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프랑스의 핵개발 예산은 한 때 국방예산의 25%에 이르렀을 정도이며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 목소리로 조국의 핵무장을 외쳤다.[10] 그 대가로 프랑스군의 재래식 전력은 정체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11]

미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위해 자국의 핵전략도 고쳐주었으며, 그외에도 미군의 유럽 배치를 허락하는 등 많은 걸 양보했다.

냉전은 끝났고,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했고 이 비밀을 마침내 발견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는 곧 묻혔다.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

하지만 미국 내의 불쾌한 여론이 반영되었는지 미국판 고질라는 90년대 프랑스의 핵 실험 때문에 도마뱀이 변이되어 생기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 원작 고지라의 출처가 암묵적으로 미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남쪽에서 왔다는 설정) 조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

프랑스 뉴스 웹사이트 익스포저와 프린스턴대 등의 공동 연구 결과, 1960∼90년대 남태평양에서 진행한 핵실험으로 약 11만명의 현지 주민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됐다고 보고했다. #

3. 같이 보기


[1] 물론 공갈을 잘 치는 흐루쇼프의 허세도 철수 요인 중 하나였지만 소련의 위협보다는 놀란 아이젠하워가 영프를 갈궈댄 게 더 컸다. 그런데 이때 흐루쇼프가 생각한 것이 "아, '느그 수도 내가 핵으로 다 부실거임 ㅅㄱ'를 하면 다 겁먹어서 나한테 기는구나."여서 이후로도 몇번 공갈을 더 치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든가...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가 '대소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온건하다'는 이미지가 형성되면서(아이젠하워는 사령관 출신이다) 졸지에 민주당의 노선이 호전적으로 변화하여 존 F. 케네디의 강경정책이 등장하고, 영국과 프랑스 양국 역시 자국이 가지고 있던 독자적 열강으로써의 지위를 상실하였음이 명백해짐에 따라 새로운 국제정치적 영향력의 열쇠인 핵개발에 극히 집착하게 된 것. [2] 서독의 재무장은 바로 1년 전인 1955년에야 허락되었고, 징병 재개는 1956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보다 더한 핵무장계획이 비밀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한편으로 1970~80년대 서독에서는 자국에 배치된 미군 핵을 반대하는 반핵 운동이 엄청난 규모로 일어났다. 결국 1987년 미소가 동서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미사일을 함께 해체하는 데 합의하고서야 끝났다. [4] 당시는 대만으로 피난한 중화민국이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UN의 상임이사국이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UN 가입도 못하고 있었다. [5] 전시에는 협조하기로 했다. [6] 사실 프랑스의 이런 외교적 반골 기질은 굉장히 오랜 전통이었다. 프랑스는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가톨릭 신앙보다 실질적인 국익을 더욱 중요시하여 개신교 세력은 물론 이슬람 세력과도 손을 잡고 같은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하기 바빴다. 마치 같은 제1세계 진영이지만 국익이 따라준다면 제1세계와 척지는 것도 마다않고 제2세계, 제3세계와도 손을 잡는 현대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다. [7] MRV는 60년대 탄도미사일의 부족한 정확도를 보완하기 위해 하나의 목표에 다수 핵탄두를 맞춰 파괴정확도를 높이는 유도기술로 각각의 독립된 목표물을 다수의 핵탄두로 맞추는 기술인 MIRV(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와 비교하면 한단계 낮은 단계의 기술이다. MIRV 기술은 70년대 미국도 처음 보유했던 당시 최신예기술로 이 기술의 프랑스 이전은 제한되었다. [8] 프랑스의 기술지원으로 건설되고 있던 이라크의 핵시설은 1981년 이스라엘 공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9] 아예 1960년대 프랑스의 핵개발이 처음부터 이스라엘과의 공동개발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다수의 유대계 기술자들이 프랑스의 핵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이 데이터를 그대로 가지고 이스라엘로 귀국해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핵무장을 완료한 것이 바로 프랑스의 핵실험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0] 당시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드골 사임 이후에도 드골주의 성향이 강했다. [11] 특히 총기가 그 절정을 찍었는데, 1980년대까지도 2차대전 수준 MAS-36이나 MAS-49, MAT-49 같은 물건들이 현역으로 굴러갔다. 당시 프랑스보다도 훨씬 가난하던 한국도 늦어도 70년대에는 전후방까지 M16A1으로 교체된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