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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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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스라엘과의 핵무기 개발 협력 의혹3. 해체

1. 개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야욕은 1948년에 시작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우라늄 광업 및 산업 무역을 감독하는 선구자인 SAAEC(South Africa Atomic Energy Corporation)에 위원회를 위임한 후 시작되었다. 1965년 미국 자회사인 Allis-Chalmers Corporation은 20MW의 연구용 원자로 인 SAFARI-1을 약 90%의 HEU 연료와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 당국에 전달했다. 1967년 남아공은 플루토늄 성능을 추구하기로 결정하고 자체 원자로 SAFARI-2 원자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원자로는 606kg의 2% 농축 우라늄 연료와 5.4톤의 중수를 사용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국제제재와 외교적 고립이 심해진 남아공 정부는 전 세계로부터 강력한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의 결과로 모잠비크 앙골라가 독립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남아공과 이웃해 있는 모잠비크의 독립세력은 인종차별로 인해 고생하는 남아공의 흑인들을 지지했다. 남아공 바로 북쪽에 있던 로디지아 역시 1973년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후 내전 상태에 빠저 이윽고 흑인 게릴라가 승리해 짐바브웨로 탈바꿈 했다. 남아공의 백인정권은 인근 흑인국가들이 공산 게릴라와 손잡고 침공해올 것을 두려워 했으며 이에 핵개발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우라늄 광석을 국내에서 채굴할 수 있었으며 공기역학적 노즐 농축 기술을 사용하여 무기급 재료를 생산했다. 1969년 한 쌍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과학자 한 명이 버밍엄 대학교에 본사를 둔 파키스탄의 핵 기술자인 술탄 마흐무드 (Sültan Mahmoud) 와 만나 우라늄 농축에 관한 연구 및 독립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남아공과 파키스탄 과학자들은 버밍엄 대학교에서 연료를 풍부하게하기 위해 공기 역학적 제트 노즐 공정을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1970년대에 국가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핵 기술에 대한 충분한 경험을 얻기 위해 미국 정부의 PNE(Peaceful Nuclear Explosions)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남아공은 1980년대에 핵무기를 개발했다. 프로그램이 종료될 당시 남아공은 핵탄두 6개를 완성했고 다른 1개는 제작 중이었다.

2. 이스라엘과의 핵무기 개발 협력 의혹

이스라엘의 핵개발과 남아공의 핵개발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77년 이스라엘은 남아공 우라늄 50톤에 30g의 삼중 수소를 거래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RSA-3 및 RSA-4 탄도 미사일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1977년 해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남아공은 이스라엘과 군사 기술의 양도 및 최소 6개의 핵폭탄 제조를 포함하는 협정에 서명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에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고 실험결과를 공유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미국의 VELA 위성에 탐지되어 양국이 핵개발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유명한 벨라 사건이다. 미국은 뒤늦게 알아 차렸지만 남아공이 이스라엘과 협력한 만큼 남아공을 제재하면 이스라엘도 제재해야 해서 1986년 양국간 조약으로 제3국에 핵기술 유출 안하는 대가로 사실상 파키스탄처럼 암묵적 인정을 해줬다.

3. 해체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은 앙골라의 쿠바군이 나미비아를 위협하면서 남아공에서 대표되는 공산주의에 유리한 도미노 이론의 위협을 두려워했다. 198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쿠바와 앙골라와 함께 앙골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쿠바 군을 철수시키고 나미비아를 독립시킨다는 삼국 간 협정에 서명했다. 이러한 안보적 위협을 해결하고 나서 핵무기의 제거는 세계의 안정과 평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며, 지역 및 국제 정치에 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자진 폐기하기로 결정하면서 남아공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것을 문제로 보았고 그는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공개했다.

남아공은 1989년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모든 핵탄두(완성된 6개 및 제작 중인 1개)가 해체되었고 미국 주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리 슈바르츠(Harry Schwarz) 대사가 핵 확산 금지 조약에 가입했다. 1994년 8월 19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4년 8월 19일 조약을 체결한 후 핵탄두 6개가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확인했다. 그 결과 IAEA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 프로그램이 평화로운 사용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199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 핵무기 지대 조약 (펠린다바 조약이라고 함)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최초의 구성원 중 하나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또한 1996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