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5%; min-height: 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word-break: 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야코뷔스 헨리퀴스 판트호프 | 헤르만 에밀 피셔 | 스반테 아레니우스 | 윌리엄 램지 | |
<rowcolor=#cd9f51> 1905 | 1906 | 1907 | 1908 | |
아돌프 폰 바이어 | 앙리 무아상 | 에두아르트 부흐너 | 어니스트 러더퍼드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1912 | |
빌헬름 오스트발트 | 오토 발라흐 | 마리 퀴리 | 빅토르 그리냐르 | |
<rowcolor=#cd9f51> 1912 | 1913 | 1914 | 1915 | |
폴 사바티에 | 알프레드 베르너 | 시어도어 윌리엄 리처즈 | 리하르트 빌슈테터 | |
<rowcolor=#cd9f51> 1918 | 1920 | 1921 | 1922 | |
프리츠 하버 | 발터 네른스트 | 프레더릭 소디 |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 | |
<rowcolor=#cd9f51> 1923 | 1925 | 1926 | 1927 | |
프리츠 프레글 | 리하르트 아돌프 지그몬디 | 테오도르 스베드베리 | 하인리히 오토 빌란트 | |
<rowcolor=#cd9f51> 1928 | 1929 | 1930 | ||
아돌프 오토 라인홀트 빈다우스 | 아서 하든 | 한스 폰 오일러켈핀 | 한스 피셔 | |
<rowcolor=#cd9f51> 1931 | 1932 | 1934 | ||
카를 보슈 |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 | 어빙 랭뮤어 | 해럴드 클라이턴 유리 | |
<rowcolor=#cd9f51> 1935 | 1936 | 1937 | ||
장 졸리오퀴리 | 이렌 졸리오퀴리 | 피터 디바이 | 월터 호어스 | |
<rowcolor=#cd9f51> 1937 | 1938 | 1939 | ||
파울 카러 | 리하르트 쿤 | 아돌프 부테난트 | 레오폴드 루지치카 | |
<rowcolor=#cd9f51> 1943 | 1944 | 1945 | 1946 | |
조르주 드 헤베시 | 오토 한 | 아르투리 일마르 비르타넨 | 제임스 B. 섬너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8 | ||
존 하워드 노스럽 | 웬들 매러디스 스탠리 | 로버트 로빈슨 | 아르네 티셀리우스 | |
<rowcolor=#cd9f51> 1949 | 1950 | 1951 | ||
윌리엄 지오크 | 오토 딜스 | 쿠르트 알더 | 에드윈 맥밀런 | |
<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
글렌 시보그 | 아처 마틴 | 리처드 싱 | 헤르만 슈타우딩거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
라이너스 폴링 | 빈센트 뒤비뇨 | 시릴 노먼 힌셜우드 | 니콜라이 세묘노프 | |
<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알렉산더 R. 토드 | 프레더릭 생어 | 야로슬라프 헤이로프스키 | 윌러드 리비 | |
<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
멜빈 캘빈 | 존 켄드루 | 막스 페루츠 | 줄리오 나타 | |
<rowcolor=#cd9f51> 1963 | 1964 | 1965 | 1966 | |
카를 치글러 | 도러시 호지킨 | 로버트 번스 우드워드 | 로버트 샌더슨 멀리컨 | |
<rowcolor=#cd9f51> 1967 | 1968 | |||
만프레트 아이겐 | 로널드 조지 레이퍼드 노리시 | 조지 포터 | 라르스 온사게르 | |
<rowcolor=#cd9f51> 1969 | 1970 | 1971 | ||
디릭 바턴 | 오드 하셀 |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 게르하르트 헤르츠베르크 | |
<rowcolor=#cd9f51> 1972 | 1973 | |||
크리스천 베이커 안핀센 | 스탠퍼드 무어 | 윌리엄 하워드 스타인 | 에른스트 오토 피셔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1975 | ||
제프리 윌킨슨 | 폴 플로리 | 존 콘포스 | 블라디미르 프렐로그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1978 | 1979 | |
윌리엄 립스컴 | 일리야 프리고진 | 피터 데니스 미첼 | 허버트 찰스 브라운 | |
<rowcolor=#cd9f51> 1979 | 1980 | |||
게오르크 비티히 | 폴 버그 | 월터 길버트 | 프레더릭 생어 | |
<rowcolor=#cd9f51> 1981 | 1982 | 1983 | ||
후쿠이 겐이치 | 로알드 호프만 | 에런 클루그 | 헨리 타우버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
로버트 브루스 메리필드 | 허버트 애런 하우프트먼 | 제롬 칼 | 더들리 로버트 허슈바크 | |
<rowcolor=#cd9f51> 1986 | 1987 | |||
리위안저 | 존 찰스 폴라니 | 장마리 렌 | 찰스 피더슨 | |
<rowcolor=#cd9f51> 1987 | 1988 | |||
도널드 J. 크램 | 요한 다이젠호퍼 | 로베르트 후버 | 하르트무트 미헬 | |
<rowcolor=#cd9f51> 1989 | 1990 | 1991 | ||
시드니 올트먼 | 토머스 로버트 체크 | 일라이어스 제임스 코리 | 리하르트 로베르트 에른스트 | |
<rowcolor=#cd9f51> 1992 | 1993 | 1994 | ||
루돌프 마커스 | 캐리 멀리스 | 마이클 스미스 | 조지 앤드루 올라 | |
<rowcolor=#cd9f51> 1995 | 1996 | |||
파울 크뤼천 | 프랭크 셔우드 롤런드 | 마리오 호세 몰리나 | 로버트 컬 | |
<rowcolor=#cd9f51> 1996 | 1997 | |||
해럴드 크로토 | 리처드 스몰리 | 존 워커 | 폴 보이어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1999 | ||
옌스 스코우 | 월터 콘 | 존 포플 | 아메드 즈웨일 | |
<rowcolor=#cd9f51> 2000 | ||||
앨런 히거 | 앨런 맥더미드 | 시라카와 히데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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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Frédéric Joliot-Cur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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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 Jean Frédéric Joliot |
출생 | 1900년 3월 19일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사망 | 1958년 8월 14일 (향년 58세) |
프랑스 제4공화국 파리 | |
직업 | 물리학자 |
모교 | 파리 대학교 |
수상 |
노벨 화학상 (1935)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946) 휴즈 메달 (1947) |
배우자 | 이렌 졸리오퀴리 (1926년 ~ 1956년, 사별) |
자녀 |
엘렌 랑주뱅졸리오 피에르 졸리오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물리학자.2. 생애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이자 과학자인 이렌 졸리오퀴리의 남편이다. 결혼 전 본명은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Jean Frédéric Joliot). 퀴리 일가에 대한 상당한 팬이어서 퀴리 연구소로 들어왔고 마리 퀴리의 제자로 들어왔고, 얼굴이 잘 생겨서 퀴리 연구소에서도 미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과 결혼하면서, 스승을 존경해 그의 성을 후대에도 남기고 싶다는 이유로 아내가 남편 성을 붙이는 프랑스의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자신도 아내의 성을 붙였다.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부인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탔다. 마리가 노벨상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 언론은 "남편 잘 둬서 노벨상을 받았다"며 이렌을 깠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에는 이렌과 함께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이때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프랑스어 위키나 야사에 따르면 당시 졸리오퀴리는 과학자로서 능력을 살려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위해 지하 무기 제작일을 했는데, 던지기 전에 불을 당길 필요가 없이 병 안에 섞어놓은 황산으로 깨지자마자 알아서 불이 붙는, " 졸리오퀴리 칵테일이라 불린 업그레이드판 화염병을 개발했다고 한다.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정계에 몸 담으면서 구설에도 오른 사람이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핵의 군사적 사용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도 중요한 서명자 중 하나로 참여했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고 스탈린 정권의 실체가 알려진 이후 탈당하였지만, 어쨌든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미국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당시 핵의 무기화로 인한 위험(특히 장기간에 걸친 방사능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풍자적 표현으로써 '(핵무기의 피해를 입은 사람 중에서) 운이 좋은 소수는 즉사할 것이고, 그보다 운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오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 대해 '어찌되었건 사람의 죽음을 행운이라고 볼 수는 없다' 라고 하며 불쾌감을 표시한 정도가 아니라 해당 표현을 문제삼아 서명을 거절했다가 그 표현이 삭제되자 서명했다고 할 정도로 매우 강력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보면, 풍자나 비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지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후에는 프랑스 원자력청 장관까지 지냈으며, 이렌이 죽은 후 2년 만에 방사성 피폭으로 인한 간손상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