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의 언어 분포 지도[1] |
본디 프랑스라는 국가는 국민국가가 아닌 봉건국가였으며 중앙과 소통할 때 외에는 자기 고장에서 무슨 언어를 쓰건 관여하지 않았으나, 프랑스 혁명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래로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가 만연하면서 지역문화를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그 탄압과 그에 대한 반발이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생기는 문제이다.
2. 역사
프랑스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을 건국한 프랑크족은 프랑스어는 커녕 라틴어도 모르던 게르만족이었다. 그런데 북방의 살리 프랑크 부족이 서로마 제국 말기에 영내 정착을 허용받는 대신 로마군에 전선방어를 위한 병력을 제공하면서 이 살리 프랑크 부족의 전투족장들이 로마군의 지휘를 받기 위해 현지의 민중 라틴어를 익힌 것이 원시 프랑스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살리 프랑크 부족이 옛 갈리아 땅에서 왕국을 세우고 패권을 확립하고 존속해나가던 시절에도 살리 프랑크 부족에게 복속된 게르만 부족들 중에서는 여전히 게르만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을 뿐더러, 브르타뉴를 위시한 켈트족들도 켈트어를 많이 썼다.프랑크인들이 로마화되어 민중 라틴어를 익힌 역사는 라틴인은 커녕 북방 켈트인들보다도 훨씬 짧았기 때문에 언어문화는 수백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본국과도 가까우며 교류도 압도적으로 많던 남쪽의 지중해 연안에서 훨씬 더 발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과 함께 민중 라틴어는 본격적인 분기점을 맞이한다.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가 수백년에 걸쳐 천천히 영토를 수복한 이베리아 반도의 중서부의 로망스어는 분기되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의 조상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막아낸 프랑크 왕국에서는 라틴어 기준으로 봤을 때 '틀린' 문법과 발음을 강요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프랑크인들의 로망스어가 매우 많이 엇나가서 현대 프랑스어의 직계 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로망스어의 원조인 라틴인들과 켈트인들이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프랑크식 변종 로망스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프랑크인들이 모여살던 북방 일드프랑스와 기타 게르만 부족들은 프랑크식 로망스어를 쓴 반면 남부는 계속해서 원래 쓰던 말을 썼다. 이를 나중에 단테 알리기에리가 오일어와 오크어라고 칭하게 된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오크어가 프랑스어의 지방 사투리인게 아니라 프랑스어가 오크어에서 파생된 프랑크식 변종 사투리인 것이다.
그러나 1200년대 초에 벌어진 남부 카타리파 세력의 독립기도와 온갖 내전(알비 십자군) 와중에 영주국들은 프랑크인들에게 무력으로 밟혔고, 프랑크인들은 남부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유언어 사용을 규제하기 시작하면서 1539년 8월 10일에 프랑수아 1세와 그 막료들에 의해 제정된 빌레르-코트레 칙령(L'ordonnance de Villers-Cotterêts)[2] 제110조·111조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프랑스어만을 쓸 것을 의무화했다. 그 예외도 있었는데 가톨릭에서 주로 쓰이는 라틴어같은 경우가 있었다.
1626년에는 프랑스의 언어의 용법·어휘·문법을 정비하는 정부 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가 창설, 주로 프랑스어 사전을 출간하거나 프랑스어 내에 섞인 타 언어의 흔적을 말소하는 업무를 맡았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서는 혁명정부에서 자유, 평등, 우애를 주창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적 기운도 고양되면서 지방의 다수 언어를 탄압하고 언어의 자유에 관련된 법도 철회하는 모순을 보인다. 당시 자코뱅의 일원인 앙리 그레구아르가 "2500만명의 프랑스인 중,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프랑스인은 300만명 밖에 없다"고 한탄했는데, 프랑스어가 모든 프랑스인의 언어여야 하고 그 이외의 언어는 용납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이미 프랑스 혁명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0년대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방침과 노력으로 지방 주민의 초등교육 보급으로 인한 문맹 퇴치율이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고, 공용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불이익이 커지자 지방 언어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언어 관련 법의 개정으로 인해 지방 언어는 서서히 부흥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도 높아졌기 때문에 결국 1992년 프랑스 정부는 공화국 헌법의 언어 관련 법규를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라고 개정했다. 1994년 「Loi Toubon」[3]이라는 법 제정으로 인해 프랑스 국내의 소수 지방 언어의 지양과 탄압을 가속화하는 중이다.[4]
3. 배경
독일어권에서는 표준 독일어를 강요하지 않아도 대개 표준어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5] 여러 어휘들을 새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상황이 다르다. 오일어는 켈트 로망스어가 프랑크 왕국의 지배층인 프랑크족이 쓰던 프랑크어와 언어 접촉을 겪으며 분리된 언어인 반면,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은 갈리아 내에서도 로마 제국의 지배를 가장 오래 받은 켈트 로망스어의 원조이다.[6] 이 지역이 로마에 편입된 것은 기원전 121년으로 살리 프랑크족의 서로마 제국 편입(기원후 368년)보다도 480년이 빠르니, 일드프랑스 표준어보다 프로방스 지역의 방언 역사가 오히려 더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준 프랑스어를 끌어오지 않아도 표현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남프랑스에서는 트루바두르를 비롯해 일드프랑스 지역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언어와 문학이 발달했다.4. 논쟁
1999년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유럽 각국이 참가하고 있던 유럽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ECRML)에 참여하였으나 프랑스 국내의 강경파가 반발했고 프랑스 헌법위원회도 지방 언어의 보호는 헌법위반이라고 단정하는 바람에 비준을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지방 언어의 사용 확대를 반대하는 자들의 의견으로는 지방 언어를 인정하면 프랑스의 발칸반도화, 즉 프랑스의 국가적 분열을 낳는다며 반발했고 지방 언어의 사용 확대를 기대하고 찬성하는 자들의 의견으로는 지금 당장 (지방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의 고령화로 인해 얼마 못가 사멸해가는 데다가 지방 언어의 역사를 통해 현대 공용 프랑스어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최종적으로 이 논쟁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개입으로 중지되었으며, 시라크 대통령은 조직화한 지방 커뮤니티에서는 지방 언어의 사용에 대한 권한을 약속하는 한편, 비준 자체는 프랑스의 정신적 통일을 저해한다며 반대했다. 2019년 현재 EU 가맹국 중에서 유럽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ECRML)을 비준하지 않는 나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뿐이다.
5. 기타
2010년대에도 프랑스 헌법에 지방 언어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법규는 남아 있기 때문에 프랑스 내 좌·우익 가리지 않고 해당 법규를 비판하고 있고, 일부 지방주의자들은 2개 국어 도로 표지판의 프랑스 표준어 부분을 반달하는 등 프랑스 당국의 지방 언어의 탄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이러한 프랑스의 문화(언어·문화예술)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는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앞서서 강력하고 단일한 힘을 갖추고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억압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6. 관련 문서
7. 참고 자료
[1]
브르타뉴 지방·
알자스 지방을 제외한 노란색과 녹색 그리고
노르만어권 지역이
오일어 지역,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사용지역을 제외한 붉은색 지역이
오크어 지역이다.
[2]
총 192조로 이루어진 칙령으로 주요 내용은 행정·사법 용어로
라틴어를 금하고 프랑스어를 쓸 것과, 정확한 인구 통계를 낼 목적으로 모든 국민은 각 교구의 교회에 출생·결혼·사망 신고를 의무적으로 할 것, 직공 연합이나 노동 조합 형성을 금한다는 것 등이었다.
[3]
프랑스 미디어 내에서 공용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법.
[4]
사실 이 법안의 경우 지방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목적보다는 프랑스 대중매체에서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의 남발을 막기 위한 목적이 주였다.
[5]
이는 일본이 근대학문을 번역해 올 때 새 한자어를 만든 것과 같다.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
[6]
애초에 저 지역 이름
프로방스부터가 라틴어로
속주를 가리키는 "프로빈키아(Provincia)"가 변한 것인데,
로마의 속주가 하나 두 개가 아닌데도 유독 저 곳만 "속주"라고 부른 이유가 알프스 이북 첫 속주여서 그냥 "속주, 속주"하던 게 굳어진 것이다. 정식 명칭은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건너편 갈리아 속주 -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인 거주지였다가 로마가 점령한 "갈리아 키살피나"에 대응)였다가, 식민도시 나르본을 개척한 이후에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바뀌었다.
Gallia Narbonensis(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영어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