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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 대만의 기적 | 라인강의 기적 | 영광의 30년 | 기록 시대 |
1. 개요
영광의 30년 (Les Trente Glorieuses)은 1945년에서 1975년까지 30년간 프랑스의 경제적인 호황기를 일컫는다. 한마디로 프랑스판 라인강의 기적. 시작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그리고 끝은 1973년 1차 오일 쇼크로 널리 여겨진다.오늘날 프랑스 경제의 중추가 되는 자동차 산업이나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콩코드, TGV, 항공우주산업 등이 이 시기의 산물이며 1964년에는 1870년 이후 처음으로 영국의 본토 GDP를 뛰어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해당 명칭는 프랑스 인구학자 장 푸라스티에가 1979년, 본인의 저서 "영광의 30년, 아님 1946년에서 1975년간 보이지 않은 혁명?"에서 처음 사용했다. 또한 푸라스티에 본인은 해당 명칭을 1830년 7월 혁명이 성공한 3일 ( 7월 27일 ~ 7월 29일)을 "영광의 3일 (Les Trois Glorieuses)"에서 기인했다.
2. 상세
이르게는 1944년부터 샤를 드골과 프랑스 임시정부는 미국의 뉴딜 정책에서 영감을 받은 지도주의적 경제체제를 천명하여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을 통해서 전후 복구를 해 나가게 된다. 1940년대 프랑스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는데, 프랑스의 GDP는 전쟁 이전의 40%까지 추락한 상태였고 늦게는 1948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배급제를 시행해야만 했다. 따라서 1940년대 프랑스는 르노와 같이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에 부역한 기업들에 대한 처벌도 겸하여 많은 기업들을 공영화했고 CGT와 같은 노동조합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히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또한 외교적으로도 경제복구에 1946년에는 레옹 블룸을 미국으로 보내서 전시부채 탕감을 요청하는 한편 프랑스 시장을 대가로 높은 금액의 마셜 플랜 지원액도 받아냈다. 또한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복구 때 했던 것과 같이 독일로부터 공업시설과 자원을 뜯어내 프랑스 전후 복구에 사용하는 '모네 계획'도 입안해서 자를란트를 자르 보호령으로, 그리고 루르 공업 지대를 루르 국제 통치령으로 분리하는데도 성공했다.
1946년 5개년 계획에서는 1950년까지 1929년 대공황 이전의 생산력을 회복하고 1952년까지 1929년 생산량의 125%를 이룬다는 목표를 세워 철강, 석탄, 시멘트와 전기 생산에 주력을 다했다. 이 시기 마셜 플랜 지원은 가히 필수적이었는데 프랑스 프랑의 가치를 폭락시키지 않으면서 그 많은 개발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 시기 경제복구는 성공을 맛보긴 했으나 급격한 복구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겪어 1948년까지 명목상 임금은 3배로 뛴 반면 실제, 실질 구매력은 1/3토막이 나 다른 전후 복구시기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은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고통 받아야만 했으며 1947년에는 대규모 파업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힘겹게 시작한 전후 복구였으나 1952년 뚜껑을 열어보니 기존 5개년 계획의 거의 모든 목표치들이 달성되거나 뛰어넘은 상태였으며 영국과 서독이 1954년까지 배급제를 시행한 한편 프랑스는 1949년에 벌써 식량배급제를 중단해도 될 정도로 복구가 성공적이었다.
경제가 본궤도에 오른 1950년부터는 급격한 성장을 겪으며 1950년에서 1975년간 노동자의 구매력은 170% 증가, 그리고 민간소비량은 175% 증가했다. 이 시기의 상당기간동안 프랑스는 완전고용상태에 있어 오히려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부족한 인력을 충당했으며 위 구매력 증가에서 보여지듯이 프랑스인들의 삶의 질은 매우 높아졌다. 또한 1차 세계대전기부터 2차 세계대전기까지 30년 가까이 정체세였던 프랑스의 인구도 출산율이 2명대 후반~3명대 초반으로 올라갔고, 출생아 수도 60만명대에서 80만명대로 올라감에 따라 19세기 후반부터 골칫덩어리였던 인구정체 현상을 단박에 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1945년 종전 직전에 프랑스 인구는 4000만이 채 안 되었던 것이 1975년에는 5260만 명으로 대략 30%가 늘어났다. 물론 이 당시에 한국과 중국, 인도를 비롯하여 자식 다섯은 기본으로 낳던 타 국가들의 인구증가율과 비교해보면 초라한 수치이지만, 어쨌든 오랜 고민을 해결해준 셈이다.
또한 금본위제도 하 대미국수출이, 그리고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와 유럽 공동체와 같은 유럽 경제 통합 기관들에 창설국으로 참가해서 대유럽 수출량 증가 또한 겪어 경제개발에 수혜를 보았다.
사회적으로는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돼서 파리(프랑스), 코트다쥐르와 로렌과 같은 경제중심지들의 도시들은 가파른 인구 성장을 겪은 반면 농촌인구 유출로 공동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먹고 사는 게 나아지니 대중문화와 소비생활도 자연스럽게 풍요로워졌다. 문화생활에 투자할 여윳돈이 생긴, 이제는 중산층이 된 프랑스의 노동계급은 여행이나 여가를 대규모로 즐기면서 시트로엥, 르노 같은 자가용 자동차나 대규모 관광객 수용을 위한 TGV 같은 대중교통 인프라도 확충됐고, 민간 시장에선 우리에게도 익숙한 많은 프랑스제 패션, 소비제 명품들이 이 시절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1] 국민생활이 전반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소수 상류층의 전유품이었던 각종 고급 소비재 명품이나 고급 식문화, 연극, 무용, 예술 같은 취미도 더욱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프랑스 대중문화는 세계적 경제 패권을 쥔 미국,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일본 같은 비서구권의 대중문화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자체적인 경쟁력을 키울 자산과 여건이 되었다.
이렇듯 급격히 오르는 삶의 질과 경제성장의 시기였던 만큼 이 시기를 살아온 많은 현 프랑스 중장년층은 여전히 이 시기를 그리움을 가지고 바라보며 현대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시기로 여겨진다.
3. 관련 문서
[1]
물론 사실 프랑스 국내에선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프랑스제 명품은 외수용이란 인식이 있었지만 어쨋든 50-60년대 이 시절 유럽 전체가 먹고 살만해지면서 '고급 프랑스제'란 상품 이미지를 적극 개발한 프랑스제 명품들이 크게 성장한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