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다루는 문서2.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분명 물적, 인적 피해는 유럽전선이 더 컸으나 유럽전선은 전쟁으로서 참혹했을지언정 어느 정도 말과 문화가 통하는 지역이었고, 최소한 영국이라는 대륙내 현지자원을 활용 가능한 동맹국이 하나는 있었으며,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보여준 참극은 소련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면서 가장 많이 경험하였지, 미군은 절멸수용소 등 그 잔재를 보았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가 적기 때문이다.그에 반하여 태평양은 일본군과 미군 모두에게 지나치게 넓고 발 디딜 곳 없는 바다가 가득 찬 곳이었고 그로 인해 미군도 어마어마한 물량과 국가역량을 퍼부어서야 보급이란 걸 할 수 있었고, 개전 초기 제대로 후방 기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곳이 멀리 떨어지고 당시에는 군사력이 부족했던 호주뿐이라, 대외 전쟁이란 걸 시작한 20세기의 미군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보급 그 자체를 걱정할 정도로 가혹한 전장이었다.[1]
양 진영의 심각한 문화 장벽또한 전쟁을 잔혹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언어 장벽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사상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양 측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복이라는 개념이 배제된 채 서로가 처절하게 그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기 위한 절멸전이었다. 거기다가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면서 보여준 민간인을 고기방패로 쓰거나, 시체에 부비트랩, 일본군 부상병이 자폭하려 드는 등의 참상들을 최전선에서 몸소 겪으면서 그 비인간성에 더 학을 떼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을 당한 미군도 같이 미쳐 돌아가서 일본군의 머리를 삶아 살을 발라서 해골을 전리품으로 삼는 등, 일본군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짓까지 했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과 해병대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 더 퍼시픽>을, <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 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2.1. 열악한 지역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고 기후와 문화권도 비슷한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매우 덥고 습한 기후에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 환경과 위험이 도사리는 요소, 험준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걸 넘어 아예 천만 광년은 떨어진 곳들이었다. 더더욱 최악이었던 것은 야밤에 포탄은 둘째치고 모기까지 잠자던 양측 군인들의 수면을 방해하였다는 것이며, 심지어 병까지 옮겨댔다.후일 일견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베트남이나 미군이 전쟁을 치른 지역 중 가장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조차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 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격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든 거래를 하든 해서 조촐하게나마 전투의 피로를 풀 파티를 벌이거나 매춘부를 통해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 건 미군과 일본군 할 것 없이 진흙과 말라리아, 그리고 만연한 이로 인한 전염병 뿐이었다.[2]
그리고 현지 장기 거주자나 원주민인 경우 노하우를 알기에 버틸 만하지만, 정글을 처음 접해 보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 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스콜로 인해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늪, 뻘로 인해 전투화는 언제나 습기가 차 있고 전투복은 진흙으로 인해 축축하여서 체온을 빼앗은 건 일상이었다. 화룡점정으로 열대 기후와 습한 환경 서식에 최적화된 곤충이자 인간에게 병을 옮기는 모기와 피를 빠는 거머리 등등 해충과 독거미, 독사, 병원균 등 위험한 생물들이 득시글거렸다.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자살해 버리는 장교가 나오며[3],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 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고 태평양 전역을 뛴 해병대와 육군은 부상을 입으면 해상에 있는 병원선에 실려가 쾌적하게 쉴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글과 전염병이 없는 전장도 있었지만, 이런 전장 역시 끝없는 자욱한 안개가 낀 망망대지와 잡초와 늪 뿐인 전장 환경에 북극권의 엄청난 추위까지 도사리고 있었다. 사할린과 슘슈 섬, 현재의 북한 지역 등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이 맡게 된 지역의 경우에는 빽빽한 냉대림과 높은 산맥이 기다리고 있는데다 여름에도 적당히 서늘한 환경 때문에 정글 못지않게 모기가 기승을 엄청 부렸다.[4] 만일 몰락 작전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면 일본 본토의 폭염과 대설, 산악 지대, 화산, 문화 차이 등이 미군이 연승을 거두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장애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2.2. 열악한 보급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아무리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아들에게 본토에서 구운 초콜릿 케이크까지 수송해주는 미군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에서 자체 보급도 어느 정도 되고 있었기에 미군의 여유로운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 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ㆍ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5]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빵 한 조각, 휴지 한 장조차 전부 보급선에만 의지해야 했던 전장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이다.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보급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6]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 계획 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 전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으며,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 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까지 보급에 의존해야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게다가 1942~19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꺾기까지는 항상 수세에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에 의해 수송선단의 보급계획에는 항상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 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이렇다보니 전쟁 초에는 동남아시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유럽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는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 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애초에 육군보다 보급 순위도 밀려서 개전 초에는 사용하는 제식 소총부터 일본군 99식 제식 소총과 별로 다를 거 없는 스프링필드였고, 보급 사정이 나빠지면 식량 보급이 안 되어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남기고 간 쌀과 간장 같은 생소한 식재료만 가지고 상당 기간 배식을 해야 했어서, 타군에 비해 굶주림이 일상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해병대 병사들이 기회가 되면 육군 보급품을 훔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기록도 존재한다.[7]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일본군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 뜀뛰기 작전'에 의해 건너뛴 섬에 남겨져서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식량확보를 위해 둔전, 사냥 및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 본영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이었다.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건빌 전역처럼[8] 전 병력의 1/3 이상이 아사한 곳도 존재하였다.
2.3.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독일 국방군은 인종주의에 찌들었지만, 일단 영국인과 미국인[9]에 대하여는 그저 전쟁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일 뿐, 유태인 등 자신들이 열등 인종으로 분류한 집단들과 달리 우선 절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화권에 어느 정도 공통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하다 보니, 비인간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를 상기시킬 수 있는 극적인 이벤트 등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달라 일선의 병사들 간 제대로된 소통이 불가능했던 태평양 전장에서는,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이 맞붙고있던 동부전선과 동급으로 서로 야만성의 극치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10]또한 헤이그 협약을 통한 교전권의 개념과 제네바 조약을 통한 '포로, 비전투원 및 민간인의 지위'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서양문화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일본군의 문화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패색이 확실하면 발악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교전수칙을 따라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 국방군과 달리, 일본군은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냥 개죽음, 남은 가족은 강간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당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거나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항복하는 척하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들었다. 간단한 예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도키노 사쿠라)>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다. 본국에서 적국의 아군 포로들을 위해 식품이나 의약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야사에 따르면 모노폴리 보드 게임에 탈출 장비를 숨겨 보내서 포로를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포로에게도 보드 게임과 의약품 정도는 제공해줬다는 소리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잡히면 뭔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개전 초기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자신들의 가족이 본토에서 '불명예자의 가족'으로 멸시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전쟁 후기에는 미군도 일본군 못지않은 잔혹성을 보이면서[11] 그러한 귀축영미의 이미지가 일본군의 머릿속에 굳어져 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온갖 참상이 발생했는데, 일본군은 정식 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한다든가[12]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극한 상황에서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그 잔인성은 다른 식인들과 동일시할 수 없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다. 오죽하면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태는 동시대의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는 것이다.[13]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연합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민간인들 역시 이를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로 받아들였다.[14] 그렇기에 대전 후기에 이들을 집단 자살하게 만들거나, "패배하여 똑같은 처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을 위해서 희생하라!"라는 식으로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일본인들[15]과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은 인간성을 유린당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상당했다.
더군다나 점령군인 일본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대규모 식민지를 장기간 경영한 경험이 없어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몇백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대학살 수준의 탄압만 한 탓에, 대부분의 식민지에 무작정 그렇게 대한 것이다. 사실 원래 식민지배 과정은 처음엔 유화적으로 나가서 동화를 시키고, 그 뒤에 독립운동 등이 벌어지면 강경하게 제압을 하는 것으로 가는 케이스가 많았는데, 일본의 식민지배는 그 반대로 처음엔 강경하게 통치를 하다가, 이에 빡친 피식민지인이 반발을 하자, 그 뒤에 유화적으로 통치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니 다시 강경 모드로 바꾼 뒤에도 피식민지인의 독립운동 열기를 잠재우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피식민 국가가 독립을 하였다., 참고로 식민지배에서 식민지인들이 대규모로 저항 활동을 한 번 벌이면 최소한 100년은 잡고 제압해야 한다. 저항활동을 총칼로 때려잡고 나서도, 저항에 참여했던 식민지인들이 "우리 그때 대단했지!" 식으로 생각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16]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숫자의 원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착취당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지금까지도 90세 이상의 원주민은 잽( 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하기 바쁠 정도로 일본의 평판은 악화되었다.[17]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일부 덕장들이 지배했던 인도네시아나 부건빌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원주민들은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군, 영국군, 호주군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해서 도왔을 정도다. 예를 들어 과달카날에서 해안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관보 링크.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일본군이 죽여서" 살기 위해서 억지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2.4. 이성의 증발
당시 일본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괴물로 그리고 있다. |
더군다나 당시 일본군은 특유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부비트랩과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매우 자주 저지르는 막장 집단이었고, 비록 전쟁 포로 생환율은 유럽전선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생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하다 보니, 미군 역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상정 외로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여기에 미군 소대장ㆍ중대장 등 지휘관들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휘하 부대에 "항복하거나 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쪽바리 같은 인간 이하에게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미군들의 전투의지를 더 고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 역시 사정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여서, 기존에 존재하던 사이비 무사도에 따라 포로로 잡히는 걸 수치로 여긴다든가, 일본군 대본영의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우리들이 무너지면 본토에 있는 가족들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할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말도 통하지 않고, 비록 일본군 스스로에 의해 조장되었다고는 하나 미군 내에서도 손꼽히는 특유의 호전성과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 해병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저 귀축영미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공포심 하에 더더욱 잔혹하게 죽을 때까지 싸웠다.[18]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에서는 고대의 전쟁터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산 채로 해부하거나, 생체실험과 같은 맨정신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미친 행위까지 대놓고 버젓이 저지르고, 미군 포로에 대해 처참한 대우를 하면서 바탄 죽음의 행진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전쟁 포로들이 끔찍하게 숨졌다. 거기다가 종종 기록으로도 발견되지만, 일본군 장교들이 미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 등은 그 참상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아사하거나 아사하기 직전에 섬을 탈환한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등 태평양 전역의 부족한 보급 문제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 학대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거기다가 민간인을 부비트랩으로 사용하고, 미군의 의무병조차 사살하거나 부상병과 자폭시키는 등, 일본군의 비이성적인 행보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기만 하였다.
당시 미국 언론에 실린 중국인과 일본인의 인종 구별법. 반일 시위대가 일본인뿐만 아닌 동맹 국가인 중국인들까지 공격하자 미국 언론에서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골상학적 방법을 배포하며 '자성'을 촉구했다. 중국인은 장두형 두상 등 보다 더 '백인스럽다'고 설명하는 반면 일본인은 납작한 코와 단두형 두상과 두드러진 광대뼈 등 더 '아시아적'으로 분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속 중국인은 당시 중화민국 경제부장관 웡원하오이며, 일본인은 수상 도조 히데키다. |
미군이 일본 본토에 접근할수록 일본군의 행각은 꺾이기는커녕, 일반적인 총검 돌격을 넘어 더 끔찍해졌고 심지어 기계화되었다. 대전차 자폭병부터 시작해서 자폭 잠수함[19], 자폭선, 자폭 창병, 자폭 잠수부, 자폭 비행기, 오키나와 등 점령지 민간인을 이용한 부비트랩,[20] 자폭 전차, 유인 대함 미사일 등이 그것으로, 전과 자체는 잘 올리지 못했으나 그 방식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미군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21],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성을 상실하자 일본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은 일선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만연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포로 학살이 잦았으며, 이에 대한 기록과 대표 증언인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포로를 살해한 적 있음을 실토하는 전 미 해병 참전 군인의 증언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22] 심지어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포로를 심문을 위해 후방으로 이송하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병대원들이 전투 도중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전원 학살한 기록도 있으며, 웨이크섬에서의 포로학살의 보복임을 천명했다.[23] 태평양 전쟁을 다룬 실화 바탕의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 포로를 받지 않는다는 묘사가 나오며, 오키나와 전투를 다룬 화에서는 항복하는 일본군들을 망설이지 않고 즉각 사살하는 장면도 나온다.[24] 역시 실화 기반 소설 바탕의 작품인 씬 레드 라인에서는 분노한 미 육군 병사가 일본군 포로를 구타하다가 결국 쏴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더군다나 전쟁 후반부에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의 야전 지휘부에서 포로는 필요 없다고 명령하며 일본군에 대한 박멸을 지시한 기록조차 남아있고, 이를 미군 상층부가 제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정도로 빈번했을 정도로[25][26]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만 위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전쟁으로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거기다가 일본군을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로 보고 있던 일선 병사들이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떼어내거나,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기념품으로 챙기기도 하였다.[27]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적개심이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쳤고, 그 결과 도쿄대공습 같은 통상적인 전쟁이라면 상상도 못할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28], 결국 파일럿들이나 폭격병들이 공감능력결여 증세를 호소하며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인종주의적인 논리도 작용했는데, 최소한 같은 백인종끼리 싸웠던 서유럽 전선과는 달리 일본군은 황인종이었고[29], 일본군 역시 1930년대 이후로 국수주의 기류가 들끓고 개전 이후 '귀축영미' 등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펼쳐온 여파로 대다수의 병사들이 백인, 흑인으로 이루어진 연합군 측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보기 일쑤였기 때문에 태평양 전선에서는 양측 모두 서로를 인종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싸웠던 것이다.
비단 미군 뿐만 아니라 호주군[30]도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에 극심한 증오를 품고 포로 포획을 거부하거나 포로를 학살하는 등의 보복행위를 빈번하게 자행했다.[31] 알려진 사건 중 하나로는 코코다 트랙 전투 중 붙잡은 일본군 포로 대 여섯명을 산채로 총검으로 찔러 학살한 사건이 있다.[32][33]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사건을 목격한 호주군 병사는 "전쟁중이었으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느꼈다"고 증언하였다.
2.5. 일본군 스스로의 문제
일본군 역시 전쟁 초기의 성공에 의한 오만과 군국주의 교육 하에 이루어진 인종주의 교육관에 의해 야만성이 높은 군대였다. 특히 식민지의 주민으로서 2등 시민 취급이라도 하였던 한국인과 대만인에 비해 중일전쟁 점령지의 주적인 중국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더 처참하여, 난징 대학살 및 100인 참수 경쟁 등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패색이 짙어질수록 이들의 야만성과 광기의 정도는 더더욱 심각해져갔다.심지어 전쟁 후반부의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나치 독일이 수용소에서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34] 점령지인 하얼빈에서 731부대를 운영하면서 중국인과 러시아인 임산부를 상대로 혹은 갓난아기와 아기 엄마를 같이 생체실험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일본군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려는 극우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다. 일본 극우세력 중에는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해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백인의 압제, 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멘 정의로운 성전(聖戰)'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으며 현재까지도 어그로를 끌고 있다. 1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이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이며, 한 독일인 기자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참배를 하던 일본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 독일인 기자에게 욕을 했다.[35]
[1]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식수 공급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지만, 가성비가 엉망이었을 뿐이지 전체적 전장 보급 자체에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2]
미군도 이러한 점을 감안해 가장 가까운 우방국 호주에서 휴양할 병력들을 보냈고, 때마침 호주도 태평양전쟁과 서부전선 일부에 투입될 정도로 남자들이 많이 차출되었기에 이 시기는 초여초 상황이었기에 미군의 휴양을 엄청 환영했다고 한다.
[3]
르벡이라는
퀘벡 출신의
캐나다인 장교다.
코만도 출신으로,
디에프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던 엘리트 장교로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환경의 가혹함을 견디지 못해 샤워 중에 권총으로 머리를 쏴 버린다. 그리고 이 모습을 상관에게 반항한 벌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로버트 레키가 보게 된다. 다만 이건 픽션이고 실제로는 부상을 입었고, 펠릴레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
[4]
소련군은 함경도 청진시에 들어와서야 그나마 문명 지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5]
물론 돈을 주고 구입했다. 대가 없는 징발은 강제징발이 아닌 그냥 약탈이다!
[6]
이런 동네에서 원주민과 척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우생학에 빠져 이러한 관계를 등한시했기에
미군이 '적당한 원조+일본군으로부터 보호'만 약속해도 원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고, 덕분에
미 육군과
미 해병대는
일본 육군에 비해 정보력에서 항상 우위에 설 수 있었다.
[7]
실제로
더 퍼시픽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기반으로,
과달카날 섬에
미 육군이 상륙하자
미 해병대 병사와 간부들이 미 육군의 보급품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8]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9]
영국계로 출발하고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던 만큼, 독일처럼 순수하지는 않지만
앵글로색슨족 역시 고대
게르만족의 한 일파로서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10]
유럽 전선의 아비규환은
서유럽 전선이 아닌
동유럽 전선에서 벌어졌다.
냉전 당시 자유진영의 적국이었던
소련이 겪었던 참상에 대해서는 자유진영이 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다가
소련이 무너지고 과거 소련 측 기록들이 기밀해제되면서 그제서야 동유럽 전선도 태평양 전선 못지않은 아비규환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11]
물론
일본군의 잔혹성에 격분해 더 잔혹해진 면이 크지만, 상술했듯 열악하고 처참한 환경의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니 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일본군과
미군 모두 마찬가지로, 양측 모두 더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장소는 더 가혹한 환경의 전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2]
독일도
말메디 학살이나 유대인들을 이동시키면서 낙오하는 자들을 굶겨죽이거나 쏴죽이는 등 참상이 벌어졌다.
[13]
그 악명높은
임팔 작전의 생존자 출신 포로가 다치바나 요시오를 구타하면서 "그
무타구치 렌야도 식인하라고는 안 했다 이 또라이야!"라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결국 다치바나 요시오는 인사불성 상태로 처형된다.
[14]
더군다나
미 해병대 특유의 호전성으로 인한 시체 훼손 등에 대한 자료는 그런 프로파간다를 가속시키기에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안줏감이었을 것이다.
[15]
일본군 위안부는
식민지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자국민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지 출신에 비해 처우가 조금 나은 정도였다.
[16]
이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할 당시 온갖 회유와 협박을 끊임없이 했음에도 결국 실패하고,
알제리가 독립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7]
한 일화로 어떤 일본인이 이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원주민 노인들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것에 신기해서 어떻게 기미가요를 잘 부르냐고 묻자 노인들이 그렇지 못하면 죽었다고 말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8]
참고로 동시기 지구 반대편에서의
독소전쟁에서는
독일과
소련도 상대방이 자국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국민과 국가를 결집시키기 위해 비슷한 프로파간다를 벌였으나, 문제는 국민들과 군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속인 일제의 상황과는 달리 이 쪽의 프로파간다는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나치즘 사상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소련군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진짜로 상대국의 남성들은 학살했고 여성들은 강간했고 그 결과 독일인 200만 명, 소련인 2000만 명이 사망했고 1000만 명이 넘는 소련 여성이 강간 피해자가 되었다. 포로의 경우도 나을 것이 없어 독일에게 잡히면 57%의 확률로 사망했고, 소련에게 잡히면 굴라크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평생 시달려야 했다. 일제와 다르게 거짓은 없었으나 차리리 그게 훨씬 더 나은 끔찍한 상황에 두 국가의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고, 민간인들은 각각
국민돌격대와
파르티잔이 되어서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19]
사실 자폭 잠수함 자체는 다른 나라에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타국의 것은 일정 거리까지 잠수부가 조종한 후 탈출하는 식의 위험성은 높지만 생환 가능성이 있는 방식이었으나, 일본의 것은 생환 가능성이 없었다.
[20]
결호작전과 관련된 일본 측의 문헌을 보면 미군이 본토에 상륙했을 때 일반적인 무기들뿐 아니라 죽창이나 부엌칼까지 사용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21]
전쟁 초창기에는 비록 적이었으나 일본군에게 연민을 가져 독일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포로 생포를 시도하거나 일본군 부상병을 치료하며 호의를 베푸려고 한 병사들도 있었으나, 일본군이 항복하는 척 하다가 자폭하거나 가까이 다가온 미군 의무병을 몸속에 숨기고 있던 무기로 죽이는 등
배은망덕하고 잔혹한 만행을 밥먹듯이 저지르자 미군은 일본군에 대해 조금의 연민과 자비도 갖지 않게 됐고, 이후 일본군 포로를 살해하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등의 보복행위가 매우 빈번해졌다.
[22]
비단 문서 기록 뿐만 아니라 일부 영상물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미 해병이 아직 숨이 붙어 있은 일본군 부상병들을 참호나 토치카에서 끌어낸 뒤 그들을 포로로 잡는 대신 처형하는 충격적인 내용의 영상물이 그 중 포함되어 있다.
[23]
Stanley Coleman Jersey "Hell's islands: the untold story of Guadalcanal
[24]
바로 다음에는 항복한 일본군 포로를 무장해제 시킨 뒤 총살해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25]
Niall Ferguson, "Prisoner Taking and Prisoner Killing in the Age of Total War: Towards a Political Economy of Military Defeat", War in History, 2004, 11 (2): p.150
[26]
미군의 일본군 포로학살에 관한 기사이다.
#
[27]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 이는 전후에 참전용사가 사망한 이후, 유산 정리를 하던 자손들이 우연히 이 '기념품'을 발견하고선 기절초풍해서 경찰을 부르는 촌극도 있었다.
[28]
전쟁의 승패 혹은 작전의 성공과는 별개로, 아무튼 대규모 민간인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자행했으니 정상인이라면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며 그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실제로 일부 지휘관이나 폭격병들은
PTSD에 시달리기도 했다.
[29]
미국은 1960년대까지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연상시키는
흑백 분리 정책을 시행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도 독일계, 이탈리아계와는 달리 일본계는 수용소에 가둬버리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발동하는 등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인종차별 기조가 매우 강한 나라였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 미군 수뇌부는 장병들에게
짐 크로우 법에 의거하여 외국에서도 흑백분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몇몇 영국 술집에서 대놓고 흑인 장병들만을 받아들인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다만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가 발동된 데에는 이적 행위가 적었던 독일계, 이탈리아계와는 달리 꽤 많은 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긴 했다. 미국 정부도 처음부터 일본계들을 잡아넣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돌아가는 나라에서 이적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까지 단지 그 사람들과 같은 혈통이라는 것만으로 수용소에 가둔 것은 사실이기에 현대 미국에서는 이를 자신들의
흑역사로 치부하고 있으며, 실제로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30]
호주군과 함께 참전한 뉴질랜드군도 일본군 포로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파게 한 뒤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학살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 역시 일본군의 포로 학대에 대한 보복으로 촉발된 일이었고 학살에 참여한 뉴질랜드군 병사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31]
Mark Johnston, Fighting the enemy: Australian soldiers and their adversaries in World War II
[32]
https://www.irishtimes.com/news/australians-killed-japanese-pows-ex-general-claims-1.304172
[33]
Kevin Baker, Paul Cullen, citizen and soldier: the life and times of Major-General Paul Cullen AC, CBE, DSC and Bar, ED, FCA p. 146
[34]
다른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등도 생체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35]
다만
일본의 많은
신사가
전범을 일부러 모신다고 왜곡하는 국내의 일부 견해도 잘못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나 몇몇 주요 신사들을 제외하면 많은 일본 신사들은 그저 그 사람이 그 지역 출신 인물이기 때문이거나, 일본군의 군사력 증강에 공헌했다는 이유만으로 전범이 된 사람을 신사에 모신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야스쿠니처럼 일괄적으로 보아 일본 전역 곳곳에서 아직도 전범을 기린다고 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한 호도에 가깝다. 이런 것은 오히려 위의
일본 극우들이 자국민을 선동하기에 좋은 자료만 제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