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스탠드에 대한 내용은 킹 크림슨(죠죠의 기묘한 모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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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크림슨 King Crim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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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로버트 프립, 이언 맥도날드, 마이클 자일스, 그렉 레이크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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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당시의 모습 왼쪽부터 제이미 뮤어, 빌 브루포드, 로버트 프립, 데이빗 크로스, 존 웨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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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당시의 모습 [2] 왼쪽부터 빌 브루포드, 로버트 프립, 존 웨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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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당시의 모습 왼쪽부터 빌 브루포드, 아드리안 벨류, 로버트 프립, 토니 레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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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당시의 모습 (더블 트리오 라인업) 왼쪽부터 아드리안 벨류, 빌 브루포드, 팻 마스텔로토, 로버트 프립, 토니 레빈, 트레이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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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20년까지의 라인업 왼쪽부터 토니 레빈, 가빈 해리슨, 멜 콜린스, 빌 리플린, 로버트 프립, 팻 마스텔로토, 재코 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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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라인업 왼쪽부터 팻 마스텔로토, 개빈 해리슨, 제레미 스테이시, 멜 콜린스, 재코 잭식, 토니 레빈, 로버트 프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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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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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1968년 11월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데뷔 |
1969년
10월 10일 (데뷔일로부터 [dday(1969-10-10)]일, [age(1969-10-10)]주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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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앨범 | ||||
리더 | 로버트 프립 | |||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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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포스트 프로그레시브, 재즈 퓨전, 익스페리멘탈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뉴 웨이브, 인더스트리얼 록 | |||
활동 기간 |
1968년 –
1974년 1981년 – 1984년 1994년 – 2003년 2008년 – 2009년 2013년 – 20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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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 아일랜드 레코드, 애틀랜틱 레코드, E.G.레코드, 워너 브라더스, 버진 레코드, 디시플린 글로벌 모바일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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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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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록과 사이키델릭 록이 주류였던 영국 록 음악계에 1960년대 후반 무렵 또 다른 록 장르들이 탄생하며 위세를 얻게 되는데, 하나는 하드 록/ 헤비 메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프로그레시브 록 (Progressive Rock)이다. 진보적이란 뜻에 알맞게 이들은 클래식, 재즈,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등 모든 장르의 음악을 흡수하며,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음악을 만들어 내는 점은 프록 뮤직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킹 크림슨은 바로 이런 프록 뮤직의 양식을 확고하게 다진 밴드로, 현재 프록씬에서 보이는 다양한 장르의 결합과 다채로운 악기들의 사용은 대체로 이 밴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역사
2.1. 기원 (1967 ~ 1968)
킹 크림슨 데뷔 이전인 1967년 8월, 마이클 자일스와 피터 자일스 형제, 그리고 로버트 프립 이렇게 세 사람은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 이라는 밴드를 결성했고, 밴드는 "The Cheerful Insanity of Giles, Giles and Fripp" 라는 한 장의 음반을 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앨범은 망했다. 라디오 세션이나 몇 번의 방송 출연을 시도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이키델릭 록에 기반을 둔 뮤지컬 형식의 음악과 정교한 연주를 들고 왔으나 먹히지 않았는데,[3] 이런 스타일은 어느 정도 초기 킹 크림슨의 틀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이후에 자일스 형제는 밴드의 음악 스타일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색소폰과 플루트, 클라리넷을 담당하는 이언 맥도널드와 주디 디블이라는 보컬을 데리고 왔다. 주디 디블은 'I Talk to the Wind'나 'Peace - An End' 등 초기 킹 크림슨 곡의 초기 데모 버전을 녹음하는 데에도 참가했지만, 그녀가 다른 포크 락 밴드에 들어가기 위해 밴드를 탈퇴하면서 밴드와의 인연이 끝났다.[4]
"자일스 형제는 노래를 잘 하는 오르가니스트를 찾고 있었고 저는 노래를 못 부르는 기타리스트였을 뿐이죠. 30일 동안 녹음과 연주를 함께 하면서 저는 농담조로, 나 이 밴드 해도 될까, 아니면 그만둘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자 마이클 자일스가 담배를 말면서, 정말 차근차근, '너무 우리 허락 받으려고 조급해 하지 말아줘.' 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때 까지도 이게 제 업이 될 줄 몰랐습니다."
- 로버트 프립
- 로버트 프립
이언 맥도널드는 밴드에 들어오면서 작사가이자 로드 매니저, 문화 평론가인 피터 신필드도 소개했다. 이언 맥도널드와 피터 신필드는 노래를 함께 쓰던 사이였는데, 그는 신필드에게 '너네 밴드 가망 없음, 근데 너 가사는 좀 쓴다? 같이 곡 쓸래?' 라고 말하며 함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그 둘이 가장 처음으로 쓰던 곡 중 하나가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한편, 프립은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 참고 할 만한 몇몇 밴드들을 둘러보는데, 이 때 그가 마키 클럽에서 보았던 'Clouds' 라는 밴드는 초기 킹 크림슨의 고전적 멜로디 메이킹과 재즈 스타일 즉흥 연주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프립은 보컬이 공석으로 남아 있던 밴드에 자신과 같이 기타를 배운 동기였고 베이시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5] 그렉 레이크를 추천해 보컬 자리를 대체하고자 했다. 바로 이 때부터, '킹 크림슨' 이라 부를 수 있었던 1기 킹 크림슨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2.2. 1기 (1969 ~ 1970)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 Lizard밴드의 공식적인 첫 결성은 68년 11월이었고, 이듬해 1월, 첫 라인업으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밴드 이름은 피터 신필드가 제안한 것이다. 바알제붑의 동의어라고 한다.[6] 밴드 스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악기이자 당시로서는 첨단 음향 장비인 멜로트론의 구매를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이언 맥도널드로, 이는 무디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언 맥도널드는 킹 크림슨의 데뷰 앨범에 수록된 전곡에 co-writer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무려 9가지 악기의 연주를 소화해내면서 앨범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7]. 피터 신필드는 작사와 앨범 자켓 디자인 이외에도 밴드의 투어에 동행하면서 라이브 공연시에 조명 효과와 무대디자인을 담당하게 된다. 밴드의 라이브 데뷔는 1969년 4월 9일, 롤링 스톤스의 자선 공연이 펼쳐지던 하이드 파크에서 이루어졌다.[8]
당시 영상
그 해, 밴드는 10월 역사적인 데뷔앨범 "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했다. 이 앨범이 11주간 1위를 차지했던 비틀즈의 " Abbey Road"에 뒤이어 영국 앨범차트 1위를 거머 쥐었다는 루머[9]는 유독 국내 팬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떨쳤는데,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 앨범의 최고 성적은 명백히 영국 멜로디 메이커 지(紙) 앨범 차트 5위와 빌보드 200 차트에서의 28위. 다시 말해 출시 당시나 그 이후에도 이 앨범이 1위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실제로 1970년 멜로디 메이커 앨범 차트 1위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사이먼 앤 가펑클, 무디 블루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이 여섯 그룹이 나눠먹었다.[10]
앨범에 대한 대중의 평은 피트 타운젠드의 촌평인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이들은 락앤롤이 꽃피우던 60년대에 클래식과 현대음악, 재즈, 사이키델릭, 빅토리안 스타일 음악, 심지어 그 당시 태동기에 있던 아방가르드 뮤직[11] 등을 적극 수용해서 상당히 복합적인 사운드를 들려 주었고, 이는 이후 등장할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장르의 이름,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밴드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12]
공포에 질린 듯한 커버[13]를 꽉채운 얼굴은 사실 "공포"를 표현한 것이 아닌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정신 분열을 포착한 것인데, 망상과 정신 분열은 킹 크림슨 음악의 저변에 깔린 일관된 주제이다. 리더인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은 이처럼 무겁고 암울한 곡을 만들어냈고, 피터 신필드가 곡에 맞는 가사를 만들어 냈다.
특히 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 21st Century Schizoid Man"은 수없이 커버된 명곡으로,이 트랙은 후대의 그런지 또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코러스 부분은 카녜 웨스트의 " POWER"에 피처링 되기도 했다.[14][15] 국내에서 애창곡으로 불리던 " Epitaph"란 곡은 8분에 육박하는 대곡인데, 라디오와 음악다방 등에 물밀듯 신청해대다 보니 DJ들이 상당히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장대하고 묵시적이며 황량한 분위기에 애수 넘치는 그렉 레이크의 보컬이 일품인 곡이다. 인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질 세상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노래하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명성과 달리 오랫동안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가 실종된 작품이기도 했다. 2003년 마스터 테이프가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2004년 Original Master Edition이라는 타이틀로 재발매되었고, 2009년 스티브 윌슨이 리믹스한 버전이 발매되었다.
영국에서의 공연을 끝낸 후 밴드는 미국으로 투어를 떠나 많은 컨템포러리 팝 가수와 밴드들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미국 투어를 돌면서 앨범과 밴드에 대한 호평은 늘었지만, 밴드의 호평과 음악적 성과를 유지하려고 힘쓰던 마이크 자일스와 이언 맥도널드는 그게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프립은 킹 크림슨을 조금 더 어둡고 격렬한 음악으로 이끌고자 했고, 자일스와 맥도널드는 조금 더 로맨틱 팝 계열의 음악을 하고 싶어했으므로 노선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이는 밴드의 주도권 논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밴드가 생각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 자일스와 이언 맥도널드는 결국 새 앨범 In the Wake of Poseidon의 녹음을 진행한 후 탈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렉 레이크도 녹음이 끝난 1970년 중반에 키스 에머슨의 꼬드김과 이에 대한 프립의 허락으로 인해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를 결성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오리지널 라인업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69년 12월 16일 이었다. 밴드 탈퇴 이후, 마이크 자일스와 맥도널드는 그럭저럭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함께 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포리너의 창립 멤버와 세션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1970년 3월, 밴드의 남은 멤버들은 베이시스트로 자일스 형제들 중 한 명이었던 피터 자일스를 영입하고 In the Wake of Poseidon 의 녹음을 시작한다. 당시 무명이었던 엘튼 존이 보컬 오디션을 봤지만 거절되었다.[16] 결국 앨범의 보컬은 'Cadence And Cascade' 한 곡을 제외하고[17] (킹 크림슨과 금전 관계 청산이 아직 덜 됐던) 그렉 레이크가 맡기로 합의한다. 마이클 자일스는 세션 자격으로 킹 크림슨의 두 번째 음반에서 여전히 드럼을 담당하게 되었다. 남은 한 곡은 프립의 십대 시절 친구인 고든 하스켈을 세션으로 부른 뒤 진행했다.
인류를 상징하는 열두 사람을 그려 넣은 '타모 드 종(Tammo de Jongh)'의 1967년 작인 'The 12 Archetypes'을 표지에 사용한 앨범은 그 해 5월 15일에 발매되었다. 잘 들어보면 여덟 곡의 장단편적인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앨범의 음악적 구조가 데뷔 음반과 대단히 흡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나중에 발매된 4장 짜리 라이브 앨범인 "Epitaph" 를 같이 들어보면 이미 이 앨범이 데뷔 앨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브 셋리스트에 첫 번째 앨범의 곡들과 두 번째 앨범의 곡들이 함께 놓여져 있는 것. 이런 이유인지 "In The Wake of Poseidon"은 발매 당시에는 그럭저럭 잘 나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데뷔 앨범과 유사한 스타일 탓에 '처음 명성에 묻어가려 한다' 는 혹평을 받았다. 연작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일종의 해프닝임을 알 수 있다.
프립과 신필드는 "In The Wake of Poseidon" 의 프로모션 투어를 준비하지만, 밴드가 완전하지 않아 투어를 도는데 애를 먹었다. 때문에 고든 하스켈과 드러머 앤디 매컬로크, 색소폰과 플루트를 연주하는 멜 콜린스를 정식 멤버로 영입하고, 투어를 도는 동시에 세 번째 앨범 " Lizard"의 세션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써놓은 곡이 없으니 될 턱이 있나. 결국 프립과 신필드는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을 쓰면서 동시에 키스 티펫과 같은 재즈 뮤지션들을 밴드에 세션으로 초청해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앨범 중 한 곡은 예스의 보컬리스트인 존 앤더슨이 참가하기도 했다. 이건 고든 하스켈의 음역대와 스타일을 고려한 피쳐링이라고. 앨범은 아방가르드 재즈와 클래식 관악에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피터 신필드가 직접 신디사이저를 연주하기도 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다.
하지만 이 앨범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앨범의 평을 "짜깁기" 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하스켈과 매컬로크는 이 앨범의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세션을 그다지 즐기지도 못해 실망하기 까지 했다. 게다가 밴드의 창작 활동에 별로 참가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하스켈은 녹음이 끝나자 디스토션과 전자 효과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걸 거부하고 밴드를 탈퇴한다. 그 뒤에 매컬로크까지 탈퇴하자 프립과 신필드는 킹 크림슨을 새 멤버들로 한 차례 갈아 엎기로 결심한다.
2.3. 2기 (1971 ~ 1972)
Islands이후 로버트 프립, 피터 신필드, 멜 콜린스는 새 보컬 보즈 버렐과[18] 새 드러머 이안 월리스를 영입한다. 나중에 킹 크림슨의 멤버가 되는 존 웨튼과도 어느정도 접촉을 하고 있었지만, 그냥 접촉만 한다 뿐이지 당시에는 밴드에 들어오는 것을 고사했다. 베이시스트로는 릭 켐프라는 사람을 영입했는데, 이 사람이 앨범 녹음 직전 갑작스럽게 잠적하게 되자, 로버트 프립이 보즈 버렐에게 베이스를 가르쳐줘서 베이스까지 맡게 되었다. 베이스를 연주해본 적은 없지만, 리듬 기타를 연주해본 적은 있었기에 배우는 게 별로 어렵진 않았다고. 이렇게 결성된 2기 킹 크림슨은 1971년, 오리지널 라인업이 결성된 69년 이후 2년 만에 투어를 돌았다.
1971년 말, 킹 크림슨은 네 번째 앨범 Islands의 녹음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 세션을 진행하는 동안 그 때 까지의 밴드 역사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운드를 만들어 냈고, 이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길 에반스의 오케스트라 협연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앨범의 주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약간의 연관성을 보인다. 앨범은 프립과 신필드의 갈등이 표면화 된 정황을 보여주는데, 프립은 'Salior's Tale' 의 멜로트론과 기타 연주 스타일에서 알 수 있듯 더욱 거친 연주 스타일을 추구했고 신필드는 재즈-포크 어프로치의 본질적인 면모와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 밖에도 'Prelude: Song of the Gulls' 에서는 밴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본격적인 관현악을, 'Ladies of The Road' 에서는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들려주는 등 초기 킹 크림슨의 음악적인 행보 중에서도 단연 이색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19]
악화된 관계에다 음악적 아이디어의 불신과 갈등으로 인해 로버트 프립은 1972년 1월 1일에 피터 신필드를 밴드에서 쫓아내 버린다. 사실 당시 프립의 의욕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냥 밴드를 해체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프립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지만 투어는 그대로 속행한 뒤에 해체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다른 멤버들의 설득을 당해 1972년 까지의 투어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때 발매된 라이브 앨범이 "Earthbound" 인데, 이는 밴드의 고된 행보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극악의 레코딩 품질[20] 과, 막 연주한 듯한 컨디션으로 혹평을 들었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당시 밴드 멤버들은 나름대로의 결속력 향상을 보여주긴 했지만, 프립의 음악적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2기 킹 크림슨 역시 해체 수순을 밟았다. 훗날 프립은 투어 당시를 회상하면서 "공연 뒷풀이 때 다른 멤버들이 마약을 혐오하는 자신을 왕따시키며 마약을 했다."고 그들을 조롱했다.
2.4. 3기 (1972 ~ 1974)
Larks' Tongues in Aspic ~ Red새롭게 결성된 세 번째 킹 크림슨의 라인업은 색소폰이나 목관 악기들을 주로 쓰던 이전의 구성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립은 처음엔 퍼커셔니스트 제이미 뮤어[21]를 영입하고 두 번째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예스에서 나와 불안정하지만 자유분방한 밴드 생활을 하고자 했던 전직 드러머 빌 브루포드를 영입했다. 세 번째로 'Family' 라는 프록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존 웨튼을 영입했고, 마지막으로 음악 대학에서 아는 사이가 된 바이올리니스트 겸 멜로트론 연주자 데이비드 크로스를 영입해 세 번째 킹 크림슨 라인업을 완성했다.[22]
신필드가 밴드를 나간 이후, 프립은 새 작사가를 찾고자 했고 그 결과 존 웨튼의 친구인 리처드 파머-제임스[23]를 영입했다. 본업이 시인에다 무대 조명 등을 담당하며 밴드의 라이브 활동에 참여했던 신필드와 달리, 파머-제임스는 원래 시각 및 음향 감독으로 일하던 사람이었고 밴드의 일원이라기 보다 단독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밴드에 합류하지 않고 함부르크에 있는 집에서 우편으로 가사를 부쳐 주었다.
스튜디오 리허설과 라이브 투어는 72년 말에 시작되었다. 즉흥 연주에 탁월함을 보이던 밴드의 성향 덕분에, 밴드는 나름대로 언론과 음악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73년 초, " Larks' Tongues in Aspic"를 발표한다. 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프립은 밴드의 전권을 휘두르다 시피 했는데, 초기 킹 크림슨은 이언 맥도널드의 작곡 및 편곡 성향이나 피터 신필드의 가사 분위기에 좌지우지되어 프립 자신의 재량을 크게 발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4] 따라서 이 앨범에 이르러서야 로버트 프립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대로 하게 된 셈이다.
밴드의 성향이 이전과 크게 달라진 예로 주제곡인 Larks' Tongues in Aspic 이 A면 첫 트랙과 B면 마지막 트랙에 분할된 점을 들 수 있는데, 조용하게 흐르다 갑자기 굉음을 발하는 로버트 프립의 기타 소리나 반대로 강력한 록으로 진행되다 갑자기 찾아드는 정적 등에서 이런 느낌이 크게 나타난다. 이는 헝가리의 음악가 버르토크 벨러와 영국의 음악가 랄프 본 윌리엄스, 프리뮤직씬, 심지어 태동기 헤비 메탈까지 광범위한 장르의 음악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재즈와 클래식적인 요소를 접목한 심포닉 록을 선보였던 이전 음반 Islands와 Larks' Tongues in Aspic 음반을 비교해 보면 전작에 비해 재즈적인 연주 방식의 비중이 커져 있는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데, 이는 음반 표지에서 드러나듯 음과 양, 혹은 정과 동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25]
발라드 풍의 아름다운 소품 Book of Saturday에서도 실험적인 연주 방법은 왼쪽 채널을 잠식하고 있는데 마치 백워드 마스킹 기법을 사용한 것 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이처럼 보통의 발라드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멜로트론을 골고루 쓰고자 했지만, 이 때는 연주곡에 중점을 둔 재즈 스타일의 합주를 주로 선보였다. 특히, 이 앨범에는 제이미 뮤어가 퍼커션과 "그냥 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통해 들려주는 실험적인 사운드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한 편 웨튼의 거칠게 두드러지는 베이스와 프립의 격렬한 기타 연주도 주목할 포인트 중 하나다.
투어를 진행하던 도중, 제이미 뮤어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당시에는 공연 도중 입은 부상으로 탈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뒤늦게 알려진 이유에 따르면 개인적인 종교 수행을 하고자 밴드를 탈퇴했다. 브루포드는 밴드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뮤어 스타일의 퍼커션 몇 대를 드럼 세트에 추가했다.
길고 지난한 투어를 진행한 뒤인 1974년, 밴드는 Starless and Bible Black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롤링 스톤 지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밴드는 지난 앨범의 성과를 고스란히 이 작품에 가져 왔다. 이 앨범은 마일스 데이비스나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가 시도했던 전자 악기 재즈와 헤비 메탈 리프, 그리고 비틀즈가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시도했던 음악적 실험들의 성과를 균형 있게 조합해 들려주는 앨범으로, 독특하게도 1번 트랙 The Great Deceiver와 2번 트랙 Lament를 제외하고는 전부 라이브에서 녹음한 것을 절묘하게 편집해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처럼 만든 것인데, 이 때문에 앨범의 2/3은 연주곡이다. 이 연주곡들 중 가장 중요한 곡은 Fracture 로, 이 곡은 정교한 연주가 점층적으로 광기에 가깝게 변화하는 곡인데, 3기 이후의 킹 크림슨에서 시도되는 정교한 기타 사운드를 미리 엿볼 수 있는 곡이다.
이 때부터, 밴드 내에서 악기나 연주 비중에 대한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데이빗 크로스는 본인이 연주하는 악기가 리듬 섹션에서 별로 들리지 않는 것을 거슬려했고, 프립은 끊임 없이 곡 안에서 기타의 비중을 높히려 했다. 결국 프립과 음악적으로 성격 차이를 겪던 데이빗 크로스는 본 앨범의 투어를 진행하던 중, 킹 크림슨에서 탈퇴하게 된다.
데이빗 크로스의 탈퇴로 인해 3인 체제가 되어버린 킹 크림슨이 맘에 들지 않은 로버트 프립은 고심한 끝에 해체를 결심하고, 이후 밴드의 70년대 마지막 앨범인 " Red"를 11월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는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이 앨범의 곡 중 가장 명곡이라 평가받는 Starless는 애수에 찬 존 웨튼의 서정적인 보컬로 시작되지만, 서서히 기타, 색소폰, 드럼, 베이스 등 각 악기들이 묘한 불협화음을 만들면서 합주를 이어가며 쌓아올린 모든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듯한 클라이맥스로 치달은 후 베이스와 멜로트론의 조화로운 연주로 멋지게 마무리짓는 10분이 넘는 대곡이다. Starless는 존 웨튼이 곡의 초안을 만들었고 원래 전작 "Starless And Bible Black"의 타이틀곡으로 쓰려했지만 프립과 브루포드의 마음에 들지 않아 누락시켰다가 이후 "Red"에 수록된 곡이다.
2.5. 4기 (1981~1984)
Discipline ~ Three of a Perfect Pair제네시스를 나와 솔로로 활동하던 피터 가브리엘의 솔로 앨범[26]에 세션으로 참가하고 나서 79년에 솔로 앨범 "Exposure"를 발매하며 꾸준한 음악적 영감을 이어가던 로버트 프립은, 80년대에 들자 ( 데이비드 보위의 "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세션에 참가한 뒤) 연주곡 위주의 밴드 "리그 오브 젠틀맨"을 결성해 한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내고 10여 차례의 라이브 투어를 진행했다. 일련의 협업으로 음악적 영감이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프립은 빌 브루포드와 연락해서 메인으로서 활동할 새 밴드를 만들고자 했다.[27] 프립은 이전의 킹 크림슨과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기를 원했고, 때문에 그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주를 들려주는 아드리안 벨류를 영입하였다.[28] 이후 브루포드가 본인의 솔로 앨범 투어를 함께 진행한 젭 벌린을 베이시스트로 추천하지만 "지나치게 손을 바삐 놀린다" 는 이유로 기각되고, 베이스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3일 동안 오디션을 진행했다. 그는 토니 레빈과 함께 돌아왔고, 정식으로 베이시스트가 되었다. 토니 레빈은 기존의 베이스가 아닌 새 악기 채프먼 스틱을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프립은 흔쾌히 승낙했다.[29]
이후 1981년 프립은 "Discipline"이라는 이름으로 새 밴드를 결성한다. 라이브 데뷔는 서머셋 주의 배스에서 그 해 4월 30일에 이뤄졌다.[30] 영국 투어를 마친 뒤, 81년 10월 밴드는 다시 이름을 킹 크림슨으로 바꾸었다.
[31]
그해 하반기, 밴드는 프로듀서 렛 데이비스[32]와 함께 새 앨범 Discipline을 녹음했다. 앨범은 당대의 흐름, 포스트 펑크와 뉴 웨이브 음악, 아프로펑크(Funk), 그리고 스티브 라이히 스타일의 폴리리듬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을 보여준다. 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에선 이 앨범을 "턱 빠질만큼 정교한 리듬의 향연, 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고, 동시에 하모니를 들려줘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81년 9월에 발매된 "Discipline"은 영국에선 45위, 빌보드에선 41위를 기록했다.
프립은 이 라인업에서 "록 버전 가믈란", 즉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협주와 유사한 형태의 밴드 협주를 들려주고자 했다. 프립이 정교하고 선명하게 들리는 기타 연주를 들려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벨류는 동물 울음 소리나 기계적 질감의 소리, 그리고 디스토션을 잔뜩 먹인 굉음을 포함한 기타 소리의 저장고를 가져다준다. 한편 저음역대부터 고음역대까지 두루 들려주는 레빈의 채프먼 스틱 연주는 독특한 앨범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리고, 브루포드의 심벌 없는 어쿠스틱 드럼셋 + 전자 드럼셋 구성은 그가 솔로 커리어에서 실험한 다양한 형태의 연주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곡의 길이는 벨류의 음악 취향이 들어가 이전의 KC 곡들에 비해 짧아졌지만, 연주에 대한 열정만은 이전 라인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Indiscipline'의 라이브는 압권인데, 원곡의 독백 + 연주 부분은 라이브 버전에 이르러 1/3 독백 + 1/3 고함 + 1/3 즉흥연주 방식의 굉장히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변한다. 다른 곡들에서 비교적 정돈된 리듬을 들려주던 브루포드가 들려주는 장르 최고 수준의 화려한 변박은 4기 라이브 음원에서 유독 빛난다.
이듬해 6월, 밴드는 후속작인 " Beat"를 녹음하기 시작했다.[33] 이번엔 멤버 중 아무도 프로듀싱에 참가하지 않았고, 렛 데이비스에게 전권을 맡겼다. 앨범의 테마는 비트 세대와 그 창작물에 대해 다루고 있다. 'Neal and Jack and Me'[34], 'The Howler'[35], 그리고 'Satori in Tangier'[36] 가 대표적인데, 녹음 과정에서 프립이 벨류에게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를 읽어본 적이 있느냐 물어보았고, 이후 만들어진 수록곡들은 전반적으로 여행과 방황, 그리고 고독에 대해 다루게 되었다. 한편, 앨범은 "Discipline"보다 확실히 더 대중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Requiem' 과 같이 길고 전위적인 곡도 있다.
"Beat"를 녹음하면서 벨류는 프런트맨, 보조 작곡가, 그리고 리드 싱어로서 갖게된 부담감에 직면했고, 한 번은 프립과 마찰을 겪은 뒤 프립더러 스튜디오를 나가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갈등이 해결되고 나서, 그리고 "Beat"가 영국에선 39위를, 빌보드에서 51위를 기록한 뒤, 밴드는 투어를 재개했다. 이 때 발매된 싱글 Heartbeat는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에서 57위를 기록했다. 이 투어 중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프레쥐스에서 열린 공연이 녹음되었다.
다음 앨범인 Three of a Perfect Pair 는 83년에 녹음되어 84년 3월에 발매됐다. 앨범의 음악적 방향성과 제작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밴드는 앨범 전체를 연주곡 한 곡을 포함한 대중적인 스타일의 4곡이 들어있는 "좌측" (사이드 A) 과 3기 KC에서 보여줬던 즉흥 연주와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결과물이 포함된[37] "우측" (사이드 B) 으로 분리했다. 투어 중 녹음된 공연은 그해 4월 30일에 있었던 도쿄에서의 공연과 7월 11일에 있었던 몬트리올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전자는 비디오로, 후자는 앨범으로 발매됐다.
투어 마지막 공연을 뒤로 하고 프립은 작업 방식의 불만족을 토로하며 두 번째로 밴드를 해체한다. 브루포드와 벨류는 이에 대해 어느정도 불만을 표출했다. 벨류는 해체 소식을 'Musician' 지의 르포에서 처음 들었다고 회상했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벨류는 후에 10여년 동안 지속된 밴드의 휴지기에 대해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 이라고 설명했다.
"로버트가 다시 한 번 그룹을 깬 데에는, 이미 여러번, 긴 시간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상상력, 능력, 방향, 그리고 그 외에 의심할 여지없이 잃어버린 다른 수많은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패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실패했다고 가정할 뿐이죠. 제 생각에 여러분들이 앞서가기 전까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빌 브루포드
-빌 브루포드
2.6. 5기 (1994~1997)
THRAK90년대 초, 에이드리언 벨류는 로버트 프립을 찾아가 다시 킹 크림슨으로 밴드 음악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있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프립은 그에 동의해 벨류가 다른 뮤지션과의 투어를 끝낸 이후 새로운 형태의 킹 크림슨을 구성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밴드는 80년대 킹 크림슨의 라인업 - 빌 브루포드, 토니 레빈, 에이드리언 밸류 - 를 포함한 뒤 트레이 건과 팻 마스텔로토를 영입하기에 이른다. 프립은 두 명의 드러머,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를 둔 이 형태를 "더블 트리오" 라인업이라고 했다.
4기 킹 크림슨이 해체된 이후 프립은 다른 뮤지션들과 협업을 거쳤고, 그 중에는 뉴웨이브 밴드 저팬의 리더, 데이빗 실비언과 함께한 스핀오프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93년 발매된 'The First Day' 는 프립이 5기 KC를 꾸리는데 음악적으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트레이 건과 팻 마스텔로토는 이 투어를 함께 했으며, 프립은 이 두 사람을 KC 정식 라인업에 편입하기로 했다.
5기 킹 크림슨은 94년 우드스탁에서 리허설을 가졌고, 같은 해 10월에는 EP 'Vrooom' 을 발매했다. 5기 킹 크림슨에서 선보인 음악의 방향성은 그동안 킹 크림슨이 보여준 음악의 장점만 가져다 섞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직 리듬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Discipline' 시절 킹 크림슨의 요소와 강하고 직선적인 느낌의 'Red' 의 요소를 모두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당시의 인더스트리얼 계열 음악에서 인상을 받은 앰비언트 사운드 역시 고루 사용했다. 한 편, 에이드리언 벨류에 의해 완성된 많은 곡들의 작법은 1960년대 팝 음악의 요소도 고르게 보여주었다. 비틀즈스러운 형태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조금 더 쉽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음악적으로 사용하는 걸 아끼지 않았던 프립을 위시한 밴드 멤버들은 당시에 폭넓게 쓰이던 미디를 앨범 곳곳에 사용했다.
이후 94년 10월 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밴드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 공연은 녹음된 뒤 95년 8월에 'B'Boom: Live in Argentina' 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셋리스트에는 70년대 중반의 세 곡과[38] 80년대 초에 선보인 일곱 곡 [39]이 포함되었다. 공연을 마친 직후 밴드는 피터 가브리엘의 개인 스튜디오인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앨범의 녹음을 시작했다.
95년 4월, 5기 킹 크림슨의 첫 풀렝쓰 앨범인 THRAK 이 발매되었다. 이 중 몇몇 곡은 EP Vrooom의 곡들을 정리해 재녹음한 것이다. 대부분의 리뷰어들은 이 앨범을 '정교하고, 딱딱하며, 시끄러운 기타 상호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재즈 락' 또는 '역동적이고 쭉 창의적인 리듬이 있는 물건' 으로 평했다.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간 킹 크림슨의 실험은 이런 호평을 얻음으로서 어느정도 성공한 셈이다. 앨범의 호평과 함께 킹 크림슨은 95년에서 96년 동안 투어를 계속했다. 중간에는 'Thrakattak' 과 같은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라이브 앨범도 선보였고, 몇몇 공연의 라이브도 녹음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밴드는 점점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고, 97년 중반에 내쉬빌에서 진행한 밴드의 리허설에서도 프립을 만족시킬 만한 밴드의 원동력은 나오지 않았다. 이 때 프립과 브루포드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고, 브루포드는 이 때 상황에 대해 "지금 로버트와 난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조차 정할 수 없다. 그게 안되면 (프립과) 같이 음악도 할 수 없다는 걸 여러분도 확신할 것" 이라고 말할 정도로 갈등이 심각해져 있었다. 거의 동시에 지속되던 밴드의 소재 고갈과 획일적인 그룹 아이디어로 인해 킹 크림슨은 결국 다시 활동을 정지했다. 다만 아예 밴드를 해체하는 대신, 규모가 작은 하위 그룹으로 멤버를 재구성해 스핀오프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는데, 이런 일련의 조합들을 'ProjeKcts' [40]라고 한다.
2.6.1. ProjeKcts
1997년부터 99년 사이를 활동 시기로 삼는 이 스핀오프 밴드들은 주로 즉흥 연주와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을 다룬다. 어떤 형태로 구성되던 로버트 프립은 라인업에 반드시 들어가며, 모든 음악들은 추후 6기 킹 크림슨 스튜디오 앨범에 영향을 미쳤다.라인업 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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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Kct One (1997년): 로버트 프립 (기타), 트레이 건 (워 기타), 토니 레빈 (베이스), 빌 브루포드 (퍼커션)
빌 브루포드의 추천으로 결성된 라인업으로, 이 스핀오프의 시작을 알렸다. 로버트 프립은 이 구성에 아이디어를 얻어 스튜디오 앨범에 음악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즉흥 연주를 서로 다른 구성으로 몇 차례 더 열기로 결심한다. 이 라인업으로 재즈 카페에서 4차례의 공연이 이뤄졌고, 이는 모두 녹음되어 CD와 DGMLive 디지털 다운로드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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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Kct Two (1997-1998년): 프립, 건, 에이드리언 벨류 (전자 드럼)
결성은 P1이 먼저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스튜디오 작업을 시작한 것은 이 라인업이 처음이다. 벨류는 이 라인업에서 만큼은 전자 드럼을 애용했다.[41] 이 구성은 사실 계획에 없던 것인데, 녹음을 위해 벨류의 개인 스튜디오에 모인 뒤 그가 전자 드럼을 잡겠다고 제안했다. 밴드는 이 결과물에 만족했고, 이 방향성을 향후 프로젝트 밴드들로 이어가기로 했다. 이 라인업에서 'Space Groove' 가 스튜디오 레코딩 CD로 발매되었고, 98년 2월에서 7월까지 35차례의 공연을 진행했다. 라이브 레코딩은 DGMLive에서 디지털 다운로드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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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Kct Three (1999/2003년): 프립, 건, 팻 마스텔로토 (퍼커션)
이 라인업은 99년 3월 다섯 차례의 공연을 진행했다. 그러다 2003년 5월에 워싱턴 DC에 불쑥 나타나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원래 KC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곳에 벨류가 병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99년 외에 있었던 이 라인업의 유일한 풀 콘서트. P3의 99년 공연은 모두 녹음되어 DGMLive에서 디지털 다운로드로 공개되었고, 2003년의 공연은 킹 크림슨 컬렉터즈 클럽 (KCCC) 의 일환으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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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Kct Four (1998년): 프립, 건, 레빈, 마스텔로토
P4는 98년 10월부터 11월까지 7차례 공연을 진행했으며, 이 라인업은 초기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을 즉흥 연주로 확장하는 것에 주력했다. 7차례의 공연 모두 DGMLive에서 디지털 다운로드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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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Kct X (2000): 6기 KC 전원 (프립, 벨류, 건, 마스텔로토)
엄밀히 말해 이 구성은 ProjeKct 스핀오프의 일환으로 간주하지 않는데, 6기 KC와 완전히 동일한 인원구성일 뿐 더러 프립이 리드하는 구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네이밍은 'The ConstruKction of Light' 세션에서 녹음된 즉흥 연주들을 KC와 다른 명의로 발매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며, 그 결과물로 'Heaven & Earth' 가 TCOL과 함께 발매되었다. TCOL 투어의 경우 프립이 통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트레이 건과 마스텔로토가 리드하는 가운데 이 앨범의 곡들을 즉흥 연주로 풀어냈다.
2.7. 6기 (2000~2004)
The ConstruKction of Light ~ The Power to Believe빌 브루포드는 자신이 주도하는 재즈 밴드 어스워크스의 투어를 진행하러 떠나고, 토니 레빈은 세션 뮤지션과 리퀴드 텐션 익스페리먼트 활동으로 바빠지자, 프립은 남은 멤버들을 모아 그간 진행했던 ProjeKct 사이드 프로젝트들의 결과물들을 모아 내슈빌에 있는 벨류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새 스튜디오 앨범 녹음을 진행했다. 이 라인업은 더블 듀오라 불린다.
2000년 5월에 동시 발매된 The ConstruKction of Light와 Heaven & Earth는 차갑고 날카로운 악기 소리를 중심으로 상당히 무겁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5기의 연장선상에서 밴드가 다양한 전자 악기를 이용한 것을 그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팻 마스텔로토는 완전한 전자 드럼셋을 [42], 트레이 건은 이펙트 중심의 워 기타를 이용해 베이스의 영역을 넘어 기타와 그 영역을 중첩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그간의 킹 크림슨 음악과 거리를 두었다. 몇 년간 벌인 실험의 영향이었다. 물론 앨범이 곡 내의 파트 분절과 에이드리언 벨류의 노골적 현대사회 인간상 풍자, 잼으로 재구성될 연주곡들의 편성, 그리고 폴리리듬과 인더스트리얼 뮤직 요소의 결합과 같은 전통적 크림슨 음악의 특징과 맞닿는 부분도 있었다. Larks Tongues' 연작은 이 앨범에서도 계속된다. 다만 발매 당시에는 장르적 낯섦으로 인해 별로 인기가 없었고, 지금에 와서는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의 퀄리티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인상이 청자들 사이에서 주류였기 때문에 "The ConstruKction of Light"는 가장 인기없는 KC 스튜디오 앨범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발매 후 밴드는 2000년과 2001년 동안 대규모 유럽 및 미국 투어를 진행했다. 이 투어는 전적으로 잼 중심의 투어였다. 새 스튜디오 앨범을 위한 준비라고 봐도 무방했고, 인기가 갈수록 시들해지는 크림슨의 역량 과시라고 봐도 되었다. 툴의 서포트 밴드가 된 것 역시 이 투어의 일환이었다. 3CD 라이브 앨범 "Heavy ConstruKction"이 결과물인데, 스튜디오 앨범에 대한 반응과 반대로 이 앨범은 상당히 호응도가 높다. 다만 잼에 적응하기 어려운 청자들은 지루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여러 투어를 돌면서 KC는 두 장의 EP, "Level Five" (2001년 11월)와 "Happy with What You Have to Be Happy With" (2002년 10월)을 낸다. 처음에는 스튜디오 음원의 조각들, 끄트머리에는 라이브 음원 조금을 넣은 이 EP들은 다음에 나올 스튜디오 앨범의 부산물이었다.
2003년 3월, 밴드는 지금까지 나온 것 중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 The Power to Believe"를 발매한다. 프립은 이 앨범을 지난 3년간 크림슨화된 밴드 음악 역량의 결과물이라 일컬었다. 이전의 두 EP들이 내놓은 물건을 잘 다듬어, 프립의 디지털화된 사운드스케이프가 적재적소를 활용함과 동시에 당시까지 나온 크림슨 앨범들 중 가장 공격적이며, 인더스트리얼 메탈에 가까운 면모도 보이는 이 앨범은 프립 본인의 호언장담과 같이 꽤 많은 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중 ' Level Five'는 [43] 지금까지도 라이브 레퍼토리로 자주 들려주는 곡이기도 하다. 또 'The Power to Believe II/III'는 그간 진행한 라이브 잼의 수렴 진화에 가까운 연주곡으로, 앨범의 양극성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곡이다. 2003년의 마지막 투어 중 도쿄에서의 공연이 녹화/녹음되었고 이는 비디오로는 "Eyes Wide Open"으로, 오디오로는 "EleKtriK: Live In Japan"으로 발매되었다.
10월, 트레이 건이 솔로 음악 활동을 위해 밴드를 나갔다. 토니 레빈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채웠고, 2004년 몇 번의 리허설이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2007년, 포큐파인 트리의 드러머 개빈 해리슨이 포함된 새 크림슨의 5인 라인업이 발표됐고, 2008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발매 40주년을 기념한 투어를 돌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특정한 기수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 후 09년과 10년, 에이드리언 벨류는 4기 라인업을 재결성해 "Discipline" 30주년 기념 투어를 도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프립과 (당시 공식적으로 음악계에서 은퇴한) 빌 브루포드는 그 결정을 기각했다. 그 거절의 변은 '하던 것 또 하면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다'였다. 당시 칸예 웨스트의 'Power' 무단 샘플링과 더불어 음악계에서의 흥미를 잃어가던 프립은, 당시만 해도 KC가 조만간 재결성할 일은 없을 것이라 잘라 말했고, 본인도 은퇴 선언을 했었다 (2012년 11월). 그리고 팬들 역시 크림슨의 재결성은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2013년까지는 말이다.
2.8. 7기 (2013~2021)
Radical Action2013년 9월, 뜬금없는 로버트 프립의 킹 크림슨 재결성 및 리허설 준비 소개가 전해졌다. 1년 전만 해도 대중음악계에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2011년, 프립은 그간 영국에서 다양한 프리 재즈/프로그레시브 팝 밴드 멤버와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재코 잭식, 그리고 옛 크림슨 멤버인 멜 콜린스와 함께 반쯤은 크림슨이기도 하고 반쯤은 ProjeKct이기도 한 'A King Crimson ProjeKct' 형태로 EP "A Scarcity of Miracles"를 발매한 적이 있었다. 앰비언틱한 기타 중심 재즈를 들려주는 이 앨범에는 토니 레빈, 그리고 개빈 해리슨이 참가했다. 반응은 미적지근했고, 프립 역시 이 앨범의 결과물을 아직 남은 음악적 열정 조금일 뿐 온전한 KC는 아니라고 밝힌 바 있지만, 이때 이미 7기 크림슨은 결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3년 프립이 들고 나온 크림슨 멤버의 규모는 지금까지 보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거대한 규모였다. 무려 드러머가 세 명이었던 것이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로버트 프립: 밴드의 리더.
- 멜 콜린스: 2기 크림슨의 관악기 전문가. 다수의 유명 뮤지션과 세션으로서 협연함.
- 토니 레빈: 4기, 5기, 2008년의 라이브 투어를 함께함. 채프먼 스틱, 4현 베이스, 독특한 막대 형태의 콘트라 베이스를 이용.
- 팻 마스텔로토: 5기, 6기, 2008년의 라이브 투어를 함께함.
- 개빈 해리슨: 포큐파인 트리의 드러머이자 2008년 라이브 투어부터 합류.
- 재코 잭식: 본명은 마이클 리 커런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으로, 64 Spoons나 재즈 밴드 Rapid Eye Movement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 킹크스에 잠깐 몸담았던 적이 있음. 2000년대 초반, 1-2기 크림슨 멤버들이 모여 만든 21st Century Schizoid Band의 보컬리스트였었음.
- 빌 리플린: 나인 인치 네일스, 미니스트리, R.E.M. 등과 세션 뮤지션으로서 협업.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솔로 음반도 냈는데 그 중 첫 앨범에서 로버트 프립과 안면을 틈. 전자 악기와 타악기 모두에 조예가 깊은 편.
네 명의 영국인과 세 명의 미국인. 게다가 지금까지의 KC 역사를 모두 아우른 듯한 멤버 구성. 팬들은 이 밴드가 어떤 음악을 선보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프립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큰 밴드를 이끌고 라이브 투어 밴드로서 크림슨의 역사를 아우르는 지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2014년부터, 1974년 이후 처음으로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부터 "Larks Tongues In Aspic"에 이르는 앨범의 곡들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라이브 셋리스트에는 4, 5, 6기의 곡들 또한 포함되었다. 크림슨은 어떤 곡에서는 하드 록 밴드의 가까운 형태로, 또다른 곡에서는 모던 재즈 밴드의 형태로 서로 분리되어 섞이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던 곡들을 소화해냈다. 9월부터 10월까지, 밴드는 북미 투어를 돌았고, 이 중 LA 라이브가 10여 년만의 EP인 "Live at The Orpheum"으로 2015년 1월에 발매되었다. 청자들은 반신반의했고, 다수의 크림슨 팬들은 당황해했다. 공통적으로 나온 말은 '왜 드러머가 셋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반면 7기의 포괄적이고 기록 중심적 성격을 감안할 때 세 부분으로 분절되어 절제와 다양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연주, 그리고 현장 음향 중심의 강력한 리듬 파트가 뒷받침되는 "즐거운" 라이브 경험을 지지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2015년 동안 유럽, 캐나다, 그리고 일본 투어가 이어졌다. 이 중 캐나다 공연은 "Live In Toronto"로, 일본 투어는 스튜디오 앨범에 가까운 압축적이고 정교한 녹음과 연주, 그리고 색다른 분위기로 재구성된 셋리스트 구성이 중심인 "Radical Action to Unseat the Hold of Monkey Mind" 박스셋으로 2016년 9월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7기 크림슨의 교과서, 스튜디오 결과물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2016년, 투어 도중 빌 리플린이 병증으로 인한 휴식을 신청하며 밴드에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출신의 드러머 제러미 스테이시가 들어온다. 2017년 1월 빌 리플린이 복귀하자 밴드는 가장 많은 멤버를 자랑하며 8명이 되었다. 다만 빌 리플린은 드러머/전자 타악기 멤버에서 고정 전자 건반 악기 멤버로 재편성됐다.
그 사이 옛 킹 크림슨의 멤버들은 세상을 떠났다. 2006년의 보즈 버렐을 시작으로, 2007년 이언 월리스, 2016년 그렉 레이크, 2017년 존 웨튼이 차례로 사망했다. 크림슨의 멤버는 아니지만, 로버트 프립과 교분이 있었던 데이비드 보위가 16년 1월 세상을 떠났고, 프립은 라이브 셋리스트에 대표곡 'Heroes'를 집어넣기로 했다. [44] 이 곡이 들어간 EP는 2017년 6월 발매됐다.
2018년과 19년에도 투어는 이어졌지만, 빌 리플린의 건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19년에는 다시 휴식을 신청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건반은 지역 기반 세션 뮤지션으로 대체되었다. 소프트 머신의 테오 트래비스를 키보디스트로서 영입하려고 시도도 했지만, 몇 번의 리허설 결과 별반 소득이 없었는지 멤버는 다시 7인이 되었다. 그 해, 크림슨은 데뷔 50주년을 맞았고 스튜디오 앨범 음원 전부가 [45] 주류 스트리밍 플랫폼에 열렸다.
2020년에도 50주년 기념 투어를 성대히 열어젖히며 밴드의 여정은 계속되는 듯했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해 그런 일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밴드의 리허설과 라이브 모두 멈춰섰고, 로버트 프립은 아내인 토야 윌콕스와 함께 자택에서 여유를 보내거나, 크로매틱 연습을 하거나, 아내 유투브 채널에 찬조출연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발레하고 유명 기타 중심 곡들을 연주하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하며 지냈다. 그 와중 2020년 3월, 빌 리플린이, 9월 고든 하스켈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모두 암이었다.
2차 백신 접종이 마무리되고 부스터샷 접종이 진행되던 2021년 9월부터, 밴드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북미, 일본 투어를 돌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인 것임이 드러난 것은 토니 레빈의 개인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일기로부터였다. 멤버들도 이것이 최후임을 알기라도 하듯 가장 열정적인 모습으로, 조금은 전성기 때의 라이브처럼 공격적인 연주를 펼쳐보였다. 12월 8일, 레빈의 개인 사이트와 로버트 프립의 페이스북 https://m.facebook.com/robertfrippofficial/posts/435320738209378 모두 마지막 일본 공연 이후 "킹 크림슨은 소리에서 침묵으로 들어간다"라고 선언하면서, 킹 크림슨은, 최소한 이번 기수의 킹 크림슨은 종말을 맞이하게 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zyT0sMZPs
마지막 'Starless' 연주 이후, 로버트 프립의 인사. 이로서 킹 크림슨은 데뷔 공연과 최후의 순간이 모두 영상으로 남은 몇 안 되는 밴드가 됐다.
3. 여담
-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동명의 스탠드가 등장 하여, 덕분에 젊은 대중들 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46] 로버트 프립도 만화 관련 밈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한다. #
- 한국이 워낙 록 음악의 불모지로 유명하고 킹 크림슨은 음악사와 프로그레시브 록의 탄생에 여러 영향을 끼친 밴드인 것은 맞으나 객관적으로 대중적인 밴드는 아니다 보니[47]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중장년층 사이에서 Epitaph가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는 편이나 그냥 '얫날에 들어본 적막한 곡' 정도의 인지도만 가지지 킹 크림슨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인지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젊은 층 사이에서 죠죠의 킹 크림슨 때문에 인지도가 생긴 편.
3.1. 저작권 관리 관련 밈
2000년대 이후[48] 저작권 관리가 매우 빡센 밴드로 유명하다. 문제는 음악 파일 뿐에 그치는게 아니라 앨범 커버나 밴드 사진에도 해당되는지라 원성이 많다. 유튜브에 영상 올리면 신고 들어가 삭제 당하기 일쑤며, 입김이 닿는 곳에서는 사진 파일조차 못 올리게 막고 있다. 이런 퇴행적인 행태에 프립을 까는 사람이 많을 정도. 단 인터넷이 그렇듯 무시하고 올리는 사람도 많다.때문에 2019년부터 첫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올리는 밈이 흥하고 있다. 그냥 올리는게 아니고 NOT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이나 아티스트 명을 러시나 드림 시어터로 바꾼다던가, 아예 오디오를 다 들어내고 올린다던가... # 이것도 한번 지워봐라는 식으로 약올리는 것. 참고로 앞의 두 링크는 모두 저작권으로 영상이 잘렸다(...) 심지어 Pornhub에 1집을 통으로 올린 사람도 있다.
2019년 킹크림슨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전 음원을 스트리밍 사이트에 공급하기로 발표하면서 이 이야기도 옛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직 몇몇 사이트에서는 사진 저작권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20년 12월 17일을 기점으로 공식 유튜브에 정규 앨범 음원을 발매한 순서대로 풀고 있다!! 1월 7일을 기점으로 In the Wake of Poseidon 앨범부터는 일주일마다 정규 앨범을 풀다가 3월에 모든 정규 앨범이 풀렸다. 이후 4월 부터는 라이브 앨범도 푸는 중.
하지만 해외 저작권은 여전히 난항인지 대부분의 한국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서비스 되지 않고 있다. 상술했듯이 EMI 독립 이후 자주 레이블에서 관리중인지라 각 나라에서 따로 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아마존 뮤직이나 애플 뮤직에서 킹 크림슨 디지털 음원은 막혀있는 상태다. [49]
3.2. 잦은 멤버 교체
밴드의 멤버 계보도. 이 많은 사람이 모두, 킹 크림슨의 멤버(였)다.
이 밴드를 거쳐간 멤버들이 아주 화려하다. 그것도 그냥 화려한 게 아니라 잘 꿰어 보면 그 시대 프록 밴드들의 계보가 나올 정도. 문제는 이 밴드가 멤버 교체를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 딥 퍼플보다 더 심해'[50], '금주의 멤버 교체가 있겠습니다. 호명하는 사람은 지금 바로 나가 주세요' 라는 말이 나올 정도 잘 찾아보면 꽤 재미있다.
- 피트 신필드: 밴드의 작사가이자, 조명, 무대디자인 담당이었으며, 대표곡 "Epitaph"를 작사한 사람이다. 아래의 그렉 레이크의 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곡들도 작사해주었다. 본업이 시인이었던 만큼 작사능력이 출중하다. "Island" 등 정말 다른 영문시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버트 프립과의 불화 이후 킹 크림슨을 탈퇴한 이후엔 프로듀서로 활동하기도 했다.[51] 특히 이탈리안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보적 존재인 "PFM"의 프로듀싱과 가사의 영문 번역을 맡아 밴드의 세계 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 그렉 레이크: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레이크"이자, "Epitaph"를 부른 보컬 겸 베이스. 2016년 12월 8일 암으로 타계했다.
- 존 웨튼: 이후 "유라이어 힙", "UK", 밴드 " 아시아"에서 맹활약하는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2017년 1월 31일, 역시 암으로 타계했다.
- 마이크 자일스 : 드러머. 록 밴드의 구성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프리 재즈 형식의 연주를 즐겨 하곤 했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 피터 자일스: 위의 마이크 자일스와의 형제. 베이시스트이다.
- 이언 맥도널드: 건반악기 연주자 겸 관악기 연주자. 로버트 프립이 밴드의 주도권을 잡기 이전 사실상 음악적인 리더였으며 로버트 프립에게 멜로트론이라는 악기를 소개해 준 장본인. 이후 또 다른 수퍼밴드 "포리너" (Foreigner)를 결성했다. 킹 크림슨의 "Red" 앨범에서 관악기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 아드리안 벨류: 밴드 커리어 중 가장 중요한 멤버 1. 프랭크 자파, 데이빗 보위, 그리고 토킹 헤즈 와 함께 투어를 돌았던 그는 스티브 라이히 의 콘서트에서 우연히 로버트 프립을 만나게 되었다. 프립의 밴드 공연에 초대된 벨류는 새 4인조 밴드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들었고, 데이빗 번과 나머지 멤버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토킹 헤즈를 나와 솔로 앨범을 녹음한 뒤 밴드에 합류했다. 그는 1981년부터 2009년까지 쭉 밴드의 보컬과 세컨드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했고, 이는 프립을 제외한 킹 크림슨 멤버들 중 가장 오랜 활동 기간이다. 그동안의 킹 크림슨 음악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온 걸출한 기타 플레이어이자, 작곡가, 그리고 세션맨으로서 그는 KC를 나온 뒤에도 솔로 음악 활동과 함께 KC의 방계 프로젝트 밴드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2월, 그는 픽사의 '파이퍼' 에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참가해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 빌 브루포드: 밴드 커리어 중 가장 중요한 멤버 2. 이미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예스에서 엄청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리더인 존 앤더슨과 이후 예스의 음악방향 설정에서 갈등을 빚은 뒤 로버트 프립의 부름으로 킹 크림슨에 합류한다. 빌 브루포드의 킹 크림슨 가입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빌 브루포드는 예스와의 음악적 견해차이로 힘들어 하고 있었고 기분전환이나 할겸 친구들과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폭우때문에 잠시 몸을 말리려 급하게 음악소리가 들리는 어떤 집에 잠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바로 로버트 프립의 집이었던 것. 당시 한창 잼 세션 중이었던 프립은 빌과 그의 친구들에게 세션에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거기서 빌이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프립은 빌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전화로 빌에게 멤버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의 극히 건조하고 절제된 드럼 연주는 기존의 록 연주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중반기 이후 킹 크림슨의 음악과 완벽히 부합한다. 로버트 프립이 두 번째로 오래 붙잡아두고 있던 멤버.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
-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 In the Wake of Poseidon (1970)
- Lizard (1970)
- Islands (1971)
- Larks' Tongues in Aspic (1973)
- Starless and Bible Black (1974)
- Red (1974)
- Discipline (1981)
- Beat (1982)
- Three of a Perfect Pair (1984)
- THRAK (1995)
- The ConstruKction of Light (2000)
- The Power to Believe (2003)
4.2. 라이브 앨범
너무 많은 라이브 앨범이 있어 전체가 다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볼드체는 주요 앨범이다.- Earthbound (1972)
- USA (1975)
- The Great Deceiver (1992)
- B'Boom: Live In Argentina (1995)
- Thrakattak (1996)
- Epitaph (1997)
- The Night Watch (1997)
- Absent Lovers: Live in Montreal (1998)
- Live in Mexico City (1999)
- The ProjeKcts (1999)
- Heavy ConstruKction (2000)
- Vrooom Vrooom (2001)
- Ladies of the Road (2002)
- EleKtrik: Live in Japan (2003)
- Live at the Orpheum (2015)
- Live in Toronto (2016)
- Radical Action (To Unseat the Hold of Monkey Mind) (2016)
- Live in Chicago (2017)
- Live in Vienna (2018)
- Meltdown: Live in Mexico City (2018)
- Music is Our Friend: Live in Washington and Albany, 2021 (2021)
4.3. 컴필레이션 앨범
- A Young Person's Guide to King Crimson (1976)
- The Compact King Crimson (1986)
- Heartbeat: The Abbreviated King Crimson (1991)
- Sleepless: The Concise King Crimson (1993)
- The Deception of the Thrush: A Beginner's Guide to ProjeKcts (1999)
- A Beginners' Guide to the King Crimson Collectors' Club (2000)
- The Condensed 21st Century Guide to King Crimson (2006)
4.4. 싱글
-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 Cat Food (1970)
- The Night Watch (1974)
- Epitaph (1976)
- Matte Kudasai (1981)
- Thela Hun Ginjeet (1981)
- Heartbeat (1982)
- Sleepless (1984)
- Dinosaur (1995)
- Sex Sleep Eat Drink Dream (1995)
4.5. EP
- VROOOM (1994)
- Level Five (2001)
- Happy With What You Have to Be Happy With (2002)
- 2014 Live EP (2015)
- Heroes (2012)
- Uncertain Times (2018)
[1]
1969년 초창기 맴버의 모습으로 1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발매 당시 맴버들의 사진이다.
[2]
Red 앨범 커버 사진을 재배열함
[3]
심지어
더 후의 드러머인 키스 문도 이 앨범을 대놓고 깠다.
[4]
이 데모곡은 컴필레이션 앨범인 "A Young Person's Guide to King Crimson" 에서 들어볼 수 있다.
[5]
이 베이시스트 = 보컬리스트 공식은 킹 크림슨이 처음으로 휴지기를 가질 때 까지 지속된다. 그렉 레이크 뿐 아니라 고든 하스켈, 보즈 버렐, 그리고 존 웨튼이 그렇다.
[6]
나중에 프립은 이 바알제붑 이라는 단어가 아랍어 어구 'B'il Sabab' 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어구는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 을 의미한다.
[7]
밴드 탈퇴 후에는 또 다른 유명 밴드인 'Foreigner'를 결성하여 활약하게 된다. 2022년 2월 9일 사망. RIP.
[8]
앨범 발매 전에 공연을 한것이다.
[9]
* 등에서 그런 루머를 확인할 수 있다.
[10]
참조
[11]
앰비언트 음악, 구체음악 등등
[12]
영향력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인
ProgAchives.com에 프록 월드컵이란 주제의 포럼이 올라온적이 있는데, 데뷔 후 50년이 지나도 차트 상위권에 위치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럼 주최자가 마지막에 "킹 크림슨과 싸웠는데도 꽤 많은 표를 얻은
핑크 플로이드가 대단하다"는 농담을 적었을 정도다.
[13]
피터 신필드는 밴드에 들어가기 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배리 고드버와 함께 일했는데, 그는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킹 크림슨의 멤버가 된 뒤, 고드버에게 앨범커버 작업을 의뢰했다. 고드버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 그림을 창조했다. 이듬해, 고드버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이 그림은 그가 남긴 유일한 회화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로버트 프립은 이 그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14]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프립은 POWER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샘플링 원작자인 자신에게 한 푼의 돈도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카녜와 유니버설 뮤직에 상당히 분노를 표출했고, 심지어 이 때문에 음악 산업에 염증을 느껴 은퇴 선언까지 고려했었다.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다는 것으로 봐서 사실상 "나 허락 받았음" 수준이다.
[15]
이 곡을 커버한 음악가들 중
오지 오스본도 포함되어 있다.
[16]
Captain Fantastic: The Definitive Biography of Elton John in The '70s, 챕터 1: It’s A Little Bit Funny
[17]
보너스 트랙에
그렉 레이크의 가이드 버전 보컬이 있기는하다
[18]
보컬의 오디션을 뽑는 뮤지션에는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
엘튼 존, 심지어 밴드의 매니저까지 참가 했으나 전부 탈락했다.
[19]
킹 크림슨의 'Epitaph'와 같은 서정적인 곡을 좋아한다면,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인 'Islands'를 꼭 한번 들어보자. 보즈 버렐의 중저음 보컬과 곡 중간 중간의 피아노 연주가 멋지게 조화된 또 하나의 서정적인 킹 크림슨을 발견하게 된다.
[20]
믿기지 않겠지만
카세트테이프를 마스터로 사용해 만든 음반이다...
[21]
뮤어는 상당한 괴짜로 알려져 있는데 5집 "Larks' Tongues in Aspic"의 제목과 커버는 그가 디자인한 것이다.
[22]
제이미 뮤어가 밴드에 있던 기간은 꽤 짧지만, 이 때가 킹 크림슨이 '다수의 드러머' 구성을 시도한 첫 번째 사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23]
슈퍼트램프의 원년 기타리스트.
[24]
심지어 킹 크림슨의 데뷔 앨범에는 로버트 프립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곡도 수록되어 있다.
[25]
이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이 앨범 제목인 Larks' Tongues In Aspic이다. Aspic은 수프를 굳혀
묵과 유사하게 만든 음식이며, Larks는 종다리과의 새다. 'Larks' Tongues', 새의 부리가 들어간 애스픽이라는 앨범 제목을 전반적으로 따져 보자면 '부드러움에 내재된 견고함'.
[26]
Car, Scratch, Melt. 이 중 Scratch는 아예 프로듀서로서 활약했으며, 사실상 솔로앨범 "Exposure"의 테스트베드였다. 로버트 프립이 프로듀싱한 당대 앨범들은 다 이런 식이었다. 홀 앤 오츠로 유명한 대릴 홀의 솔로 앨범 "Sacred Songs"에서도 자신의 음악적 결과물을 선보이는 데 고민이 없었다.
[27]
당시 프립은 킹 크림슨을 재결합시킬 의사가 없었다.
[28]
벨류는 당시
토킹 헤즈와 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 유명한
Remain in Light 스튜디오 세션과 라이브 투어.
# 참고로 프립 본인도 토킹 헤즈와 연관이 있다. "Fear of Music"의 첫 트랙 'I Zimbra'의 기타 솔로를 그가 맡았다.
[29]
토니 레빈은 "Exposure"의 녹음에도 세션으로 참가한 바가 있다. 나중에 프립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레빈이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상황임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오디션따위 치르지 않고 바로 영입했을 거라고 한다.
[30]
KCCC로 발매된 공연의 녹음본이 있다.
[31]
초기 발매 시의 앨범 아트는 이것과 조금 다르다.
[32]
제네시스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브라이언 이노의 "
Another Green World" 등을 작업함.
[33]
웃긴 점은 "Beat" 앨범이 KC가 동일 멤버, 동일 라인업으로 2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한 최초의 작업물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발매된 앨범은 라인업이 같아도 구성원이 전부 달랐다는 얘기. 흠좀무...
[34]
인명은 각각 닐 캐시디와
잭 케루악을 이른다. 벨류에 따르면 파리에서 떠돌아다닐 때 이 두 사람에 대해 받은 인상을 다룬 곡이라고.
[35]
앨런 긴즈버그의 시 "Howl" 에서 영감을 받았다. 위의 두 사람과 함께 보려면
킬 유어 달링 참고.
[36]
폴 바울스에게 영감을 받았다.
[37]
앨범 맨 마지막곡으로 'Larks' Tongues In Aspic (Part III)'가 들어있다.
[38]
Red, Larks' Tongues In Aspic Part II, The Talking Drum
[39]
Frame by Frame, Elephant Talk, Indiscipline, Matte Kudasai, Heartbeat, Sleepless, Discipline
[40]
이 표기는 오타가 아니다. 프립은 5기 킹 크림슨 이후로는 유난히 c 앞에 K 를 많이 썼다. 킹 크림슨의 이니셜이 뭔지 생각해보자.
[41]
물론 80년대 KC 공연 중간중간 그는 전자 드럼을 치곤 했다. 'Waiting Man' 의 라이브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42]
불행히도 이 전자 드럼셋을 이용한 녹음은 재발매본인 "The ReconstruKction of Light"에서는 평범한 어쿠스틱 드럼셋 재녹음으로 대체되었는데, 당대 미디의 열악한 음질 수준과 데이터 손실, 그리고 주 저장장치 분실로 인한 결정이었다.
[43]
몇몇 팬들은 알파벳 L과 5가 들어간 걸 고려해 이를 Larks 연작의 마지막 곡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44]
사실 벨류 시절인 지난 2000년, 이미 라이브 셋리스트에 포함된 적이 있었다.
[45]
당연하게도 최신 음원은 아니고, 전부 30주년 기념반의 음원들이다.
[46]
스탠드의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
[47]
사실 애초에 프로그레시브 록 자체가 그리 인기 있는 장르는 아니다. 후발 밴드가 끊긴 지도 오래되기도 했고.
[48]
정확히는 독립 레이블인 Discipline 설립 이후로 보인다.
[49]
독립 이후 해외 라이센스 계약이 어려운 편에 속하는지 일본에서도 킹 크림슨 CD는 마이너인
WOWOW 산하 레이블에서 겨우 라이센스를 따서 내놓은 상태다.
[50]
아이러니하게도, 딥 퍼플의 숱한 멤버 교체 역시 계보도를 보면 7~80년대 하드 록/헤비메탈의 계보가 나올 정도의 결과를 낳았다.
[51]
피트 신필드는 킹 크림슨의 음악에도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로버트 프립은 그의 뮤지션적인 재능을 인정하지 않아서 작사가로 머물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