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축구만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러다 5학년에 전학간 서울 용두초에 축구부가 있었고 곧바로 가입하며 축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추첨을 통해 진학한 대광중엔 축구부가 없었기에, 중학교 3년 간 축구를 그만두고 공부만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공고로 진학해 우상권 감독 아래 선수 생활을 다시금 시작한다.
하지만 3년의 공백은 너무 컸기에, 6월에
남대문중학교로 직접 유급해 6개월 간 기본기를 다진 후에
우신고로 진학했다. 우신고 장원직 감독 아래 미드필더로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고교 2학년에
명지대학교의 스카웃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팀이 좋지 못한 일로 징계를 받으며 대학 진학이 물거품됐고, 축구를 그만둘 위기에 빠진다.
그때 동기 7명과
한일은행 축구단 입단에 성공했고, 1년 반 정도 뛰다가 육군팀에서 복무 후 한일은행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김호 감독을 만났고, 윙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실력이 만개하고 한일은행의 10년 만에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에 기여했다.
최강희는 현대 호랑이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91년 은퇴할 때까지 현대 호랑이에서 뛰었다.
대우로얄즈 선수와 경합을 하고 있다.
선수 시절에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던 그는 이른바 스태미나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며 '스태미너의 화신'으로 불렸다.[1] 그리고 뛰어난 활약으로 1985년 아디다스컵을 우승하였다.
개인수상으로는 1986년
K리그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 MVP를 받았다.[2] 특히 한일은행 시절 은사인
김호 감독이 1988년에 부임한 뒤로는 팀의 주장을 역임하며 1985년, 1986년 1988년 수비수로서 3차례 베스트일레븐, 1991년에 미드필더로서 1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지내며 총 4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수상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7세이던 1986년에 리그컵 격인 프로축구선수권대회 MVP로 선정되고, 28세이던 1987년에
1988 서울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9년 한일정기전 등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90월드컵 24강 본선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장했다.
[1]
K리그 최다 출전 대기록을 세운
김병지 선수가 선정한 베스트 일레븐에 우측 풀백으로 선정되었다. 김병지는 최강희의 선수 시절을 "지칠줄 모르는 체력의 화신' 영리한 경기 운영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2]
이전에는 K리그 최초의 수비수 MVP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의 MVP였고, 리그 MVP는 이흥실 단독수상이었다. 이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여러 사이트에서 프로축구선수권대회와 당시 K리그의 명칭이었던 축구대제전을 혼동하여 공동 MVP로 오기하였다.
[3]
본래는 1994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독일식 선수단 관리시스템을 적용하려는
차범근 감독과 주장 최강희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일찍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근까지 서로 감정이 담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15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차두리 선수가 강력하게 의지를 피력하며 팀최강희의 선수가 되고, 최강희 감독의 어깨를 주무르며 팀최강희 주장이 되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아버지 세대의 앙금을 어느 정도 봉합하는 모양새다.
[4]
여담으로, 차범근 감독이 취임한 1991년 최강희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리그와 리그컵을 포함해 총 37경기에서 5득점 4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