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세 중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한 교황령을 포함한 북부와 중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고, 남부는 랑고바르드 계통의 공국들과 반도 끝자락의 지역에 일부 동로마 제국이 시칠리아엔 이슬람 세력인 시칠리아 토후국과 아말피에는 아말피 공화국이 공존하고 있었다.그러다가 11세기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들이 이탈리안 남부로 이주한 후 시칠리아 백국을 건국한 후 로마령 랑고바르드 테마, 칼라브리아 테마, 베네벤토 공국, 아말피 공화국을 차례대로 정복한 후 나중에 시칠리아 섬을 공격해 시칠리아 토후국마저 멸망시켜 시칠리아 왕국으로 격상되나 12세기 말 시칠리아의 왕위를 두고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에서 오트빌 왕조가 단절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 국왕을 겸하면서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 될 것처럼 보였지만 11세기 중엽 교황령과 도시 연맹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결국 교황령이 신성 로마 제국에게 벗어났고, 시칠리아 왕국마저 교황의 부추김을 받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방계의 앙주 가문의 침략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이시기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북부와 중부에서 자유 도시 및 도시국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성기가 중세 중기부터 시작되었다.
2. 북부
이탈리아 북부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하면 이미 10세기 중엽부터 독일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지역은 중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도시화율이 높은 곳인데다 기존의 이탈리아 지역과 이민족 지역들이 난립한 가운데 알프스 산맥이라는 지리적인 차단 요소,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 덕분에 여러 도시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자체가 그렇듯 영주들보다는 주교들의 통치를 받던 도시 비율이 높았다.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언제나 권력의 절대적 타락을 불려왔다. 이미 중세 전기 말에 서술한 창부 정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교황령 내부는 부패했다. 비록 몇몇 교황들이 선출된 이례로 내부 개력을 단행했지만 노년에 즉위한 상태였기에 종신임에도 짧은 임기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는 주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이 통치하는 곳의 행정은 족벌주의가 만연했다.
그러다가 1005년 리구리아의 남단에 위치한 제노바가 외형적으로 자치권을 갖는 도시가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지배자이고 제노바 주교가 도시의 대표자였으나, 실제적인 권력은 주민총회에서 1년마다 선출한 몇명의 "콘술"들이 행사하였다. 그리고 1035년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였던 밀라노에서 코뮌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밀라노는 대주교의 통치를 받던 도시였으나 이 당시만 하더라도 성직자들이 독신이 아닌데다가 족벌주의까지 횡행하자 결국 1057년 파타리아 혹은 파타리노 운동과 함께 교회 권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다만 이 때는 그저 교회 개혁과 연개된 저항 운동인 탓에 자유 도시나 코뭔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황 니콜라오 2세 또한 특사를 파견해 당시 황제가 임명한 귀도 대주교를 압박해 밀라노 대교구를 로마 교황령에 종속시킨다는 조건을 강요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12세기까지 북부의 도시들은 자유 도시로 변했지만 1154년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가 역대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에 관심을 갖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교황을 지지하던 밀라노, 아스티 등의 도시들이 반발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1158년 론칼리아 법령을 발표해 이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주장하고 그의 수행원들이 이탈리아 도시들의 포데스타 행정관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지원 하에 1167년 12월 1일 폰티다에서 결성된 롬바르디아 동맹은 베로나, 파도바, 비첸차, 베네치아 밖에도 크레마, 크레모나, 만토바, 피아첸차, 베르가모, 브레시아, 밀라노, 제노바, 볼로냐, 모데나, 레조에밀리아, 트레비소, 베르첼리, 로디, 페라라 같은 도시들이 모여서 결성되었고, 친교황파였던 말라스피나 후작과 에첼리노 다 로마노 같은 몇몇 영주들도 포함됐다.
2.1. 사보이아 백국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아를 왕국에 속했던 사보이아 백국은 시조 움베르토 1세의 막내 아들 오도네가 토리노 변경백국의 상속녀 수사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하여 피에몬테 일대를 상속받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반도 양쪽에 걸친 독립 군주가 되었다. 사보이아 가문은 결혼, 정복 등을 통해 스위스 서부로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움베르토 3세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하인리히 6세 부자에게 영토 대부분을 빼앗겨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톰마소 1세의 노력으로 움베르토 3세 대에 빼앗긴 영토 대부분을 수복했다. 톰마소 1세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영토를 확장하였고, 피에트로 2세와 필리포 1세 형제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을 모델로 중세 봉건 국가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제 국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메데오 5세는 1295년 샹베리를 수도로 삼았다.아메데오 6세의 즉위 후 영토 확장 반경은 이탈리아반도로 바뀌었고 쿠네오, 비엘라 등 피에몬테의 많은 지역들이 사보이아 백국으로 병합되었다. 아메데오 7세는 니차와 빌라프란카 등지를 정복하여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1378년 아를 왕국이 사실상 소멸하여 사보이아 백국의 명목상 종주권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 독일 왕국으로 이양되었고 아메데오 8세는 1416년 독일왕이자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으로 선임되어 사보이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2.2. 이탈리아 왕국
2.3. 베네치아 공화국
3. 중부
중부 역시 960년 오토 1세때의 이탈리아 원정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겸한 독일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비록 황제가 죽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났지만 새로 즉위한 독일왕들에 의해 연례행사마냥 이탈리아 원정의 종착지를 로마로 정해져 있었으며 특히 교황령의 통치자들인 교황들의 경우 황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언제든지 다른 인물로 교체가 되었다. 이는 하인리히 3세까지 절정에 달하였으나 어린 아들인 하인리히 4세를 남기고 죽으면서 상황이 급변하 시작했다.3.1. 교황령
3.1.1. 신성 로마 제국 예속기
오토 3세는 여전히 로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로마를 오토 왕조 하의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을 요량이었고, 교황 실베스테르 2세 또한 오토 3 세와 협업하에 헝가리 대공이었던 이슈트반 1세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했다.그러나 1001년 로마 인근의 경쟁 도시 티볼리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은 로마인들이 오토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 3세와 실베스테르 2세는 그들은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포위하고 성문을 폐쇄해 우고와 하인리히가 로마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우고는 반란 주모자들과 협상해 오토 3세가 로마를 떠나는 조건으로 오토 3세와 실베스테르 2세를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황제와 교황은 일단 북쪽의 도시 치비타 카스텔라나에 머물면서 섭정으로 독일에 남겨둔 육촌 형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1002년 1월 24일 갑작스런 고열에 시달리다 서거했다.
비록 반동을 일으킨 귀족들이 여전히 로마의 권력을 잡고 있는 상태였지만, 오토 3세가 사망하자 실베스테르 2세는 바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베스테르 2세는 로마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12일에 사망하였다.이후 로마의 실권은 요한 크레센티우스라는 귀족에게로 넘어 갔고, 그는 6월에 조반니 시코라는 성직자를 요한 17세로 내세웠고, 베르푸르트의 성 브루노가 계획한 동유럽 지역 선교 활동을 허가한 것외엔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 체 선출된지 반년만에 사망하였고, 요한은 다음 교황으로 파사니우스라는 성직자를 요한 18세로 세웠다.
요한 18세가 선출된 당시 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1002년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자처한 이브레아의 아르두인과 하인리히 2세 황제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이 발생하여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로마에서는 전염병이 퍼져 사회 질서가 무너졌으며, 사라센족은 시칠리아 토후국을 벗어나 티레니아해 인근을 침략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교황으로서 요한 18세는 주로 교회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밤베르크에 새 교구를 신설하는 것을 허락하여, 하인리히 2세의 골칫거리였던 슬라브족에게 복음을 전할 전초기지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플뢰리 수도원의 아빠스와 상스 및 오를레앙의 주교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중재하기도 하였다.
1009년 7월에 그는 교황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얼마 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 세르지오 4세가 선출되었다. 그 또한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종종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요한 크레센티우스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르지오 4세가 요한 크레센티우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학자들은 세르지오 4세가 요한 크레센티우스에게 저항했으며, 로마 내에 요한 크레센티우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독일인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르지오가 교황 재임기간 중에 했던 일들 중에는 기근에 시달린 로마 시민들을 구제하는 구휼 정책과 일부 수도원을 주교의 감독으로부터 면제시켜 준 것이 있다. 1009년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 무덤 성당이 파티마 칼리파조의 알 하킴 빈 아므르 알라 칼리파에 의해 파괴되자 이슬람교도들을 성지에서 몰아내라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부 성직자들은 세르지오 4세가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칙서가 사실은 예루살렘 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1차 십자군 원정 때에 만들어진 위서라고 보고 있다. 근래에는 이 칙서가 진품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좀 더 신빙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
세르지오 4세는 1012년 5월 12일 사망했으며, 시신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이후 새로운 교황으로 베네딕토 6세와 같은 가문 출신인 테오필락투스가 베네딕토 8세로 선출되나 그의 반대 세력들이 대립 교황으로 그레고리오 6세를 내세웠고, 결국 그들의 세력에 밀려 잠시 로마로 떠나야 했다. 그러다가 1014년 2월 14일 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독일왕 하인리히 2세에 의해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베네딕토 8세는 교황으로 재임한 동안 하인리히 2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사라센족이 이탈리아 남부 해안에 대한 침략 행위가 다시 일어났다. 사르데냐에 정착한 그들은 피사를 약탈하였다.
이 시기에 노르만족도 이탈리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네딕토 8세는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고 사라센족을 사르데냐에서 패퇴시키고, 크레센티 가문을 굴복시킴으로써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1022년 그는 성직매매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부패 문제를 다루기 위해 황제와 더불어 파비아에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베네딕토 8세의 교회 개혁은 클뤼니 수도원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곳의 수도원장은 그의 오랜 친구인 성 오딜로였다.
1020년 베네딕토 8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새로이 부상하는 동로마 제국에 위협을 느끼고, 하인리히 2세와 논의하기 위해 독일로 길을 떠났다. 밤베르크에 도착한 그는 그곳의 새로운 대성당을 축성하고, 카롤루스 대제와 오토 1세의 기증을 재확인하는 하인리히 2세의 선언을 받아냈다. 또한 독일 방문기간 중에 그는 풀다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평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그는 '하느님의 평화와 휴전(Pax et treuga Dei)'이라는 이념을 장려했다. 하느님의 평화와 휴전이라는 건 중세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평화 운동이었는데, 이는 유럽 곳곳에 만연한 폭력을 멈추고 제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제로 하여금 원정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그의 가신들을 다시 종속시킬 것을 권유했다. 이후 1024년 4월 9일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인 로마노가 새로운 교황 요한 19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본래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형인 교황으로부터 ‘모든 로마인들의 집정관과 원로원 그리고 장군’(Consul, dux et senator omnium Romanorum)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형이 죽자 하루만에 모든 성직품을 받고 요한 1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재임 초반 요한 19세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스타시오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대가로 그에게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교회 수장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요청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알려져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 신도들의 비판마저 거세지자 교황은 마지못해 총대주교에게 한 동의를 철회했고, 총대주교는 돈만 받고 약속을 어긴 교황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이 스캔들은 훗날 1054년에 발생하는 동서 교회 분열로 이어지는 과정에 한몫을 하게 되었다.
102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하자, 요한 19세는 콘라트 2세와 그의 아내를 로마로 호출해 1027년 부활절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그들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1025년 요한 19세는 볼레스와프 1세를 축복하고 그를 폴란드의 왕으로 봉하였다.
1027년 4월 6일 요한 19세는 그라도 총대주교에 맞서기 위해 라테라노 시노드를 소집해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좌를 설정하고, 그곳의 총대주교로 아퀼레이아의 포포 주교를 서임하였다. 또한 그라도 총대주교를 주교로 격하하고, 앞으로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교도권 아래에 두도록 하였다. 실제로 총대주교는 모든 이탈리아 주교들보다 성품이 더 윗단계였다. 그러나 1029년 요한 19세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고 그라도 주교를 총대주교로 격상하는 한편 그의 권한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1025년 바리오트 교구가 로마에 귀일하자 그는 바리 대주교 비잔티우스에게 열두 명의 보좌 주교를 서임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의 교황 칙서를 반포하였다. 요한 19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타시오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전례를 집전하는 교회들을 정착시키는 대신 이탈리아에도 비잔티움 전례를 집전하는 교회들을 허용하는 협정을 맺었다.
1032년 12월 6일 사망하였고, 투스쿨룸 백작 알베릭 2세의 아들이며, 교황 베네딕토 8세와 교황 요한 19세의 조카인 테오필락투스 3세가 베네딕토 9세로 선출되면서 16년 간의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3.1.2. 교황청의 부패와 동서 분열의 시작
《가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베네딕토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나이는 20세라고 한다. 하지만 11세나 12세였다고 전하는 기록들도 존재한다. 베네딕토 9세는 굉장히 방탕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며, 권세 있는 유력한 집안에 속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교황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정통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입장이었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를 가리켜 부도덕한 행위를 즐기던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반교황주의 역사학자인 페르디난드 그레고로비우스는 “지옥에서 온 악마가 사제의 탈을 쓰고 베드로좌를 차지하였으며, 불손한 언행으로 교회의 거룩한 신비를 모독했다”고 평가했다.《가톨릭백과사전》 또한 베네딕토 9세를 가리켜 ‘베드로좌를 더럽혔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남색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에서 주지육림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9세는 당시 피아첸차 교구장인 벤노 주교로부터 추잡한 간음과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교황 빅토르 3세는 자신의 대화록 3집에서 “베네딕토 9세는 강간과 살인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력과 남색 행위를 저질렀다. 교황으로서 그의 삶은 극도로 불쾌했으며, 상스러웠고, 형편없었으며, 나는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고 비판했다.
그의 재위 12년 간은 평화스러워 크레모나와 스펠로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도 자유롭게 만나고 마르세유도 여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불법적으로 밀라노의 대주교 헤리베르트를 파직시키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다.
1044년 9월 로마에서 크레센티파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베네딕토 9세를 내쫓고 1045년 1월 사비나의 주교 조반니가 교황 실베스테르 3세로 명명하여 교황좌에 올랐다. 하지만 3개월도 못가 베네딕토 9세는 1045년 4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실베스테르 3세를 내쫓고, 다시 교황직에 복귀하였고, 로마에서 쫓겨난 실베스테르 3세는 본래 자신의 교구였던 사비나 교구로 돌아갔지만 자신은 정당한 교황임을 주장하며 복귀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045년 말, 베네딕토 9세는 거액의 돈을 받고 요한 그라시아누스에게 교황직을 양도하였다. 요한 그라시아누스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앉았다. 베네딕토 9세가 사임한 이유는 혼인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사바나 교구로 돌아간 실베스테르 3세는 여전히 정통 교황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베네딕토 9세는 이를 번복하여 사임의 뜻을 철회하고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성직자에게서 목자다운 능력이나 품성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한 그레고리오 6세는 고뇌에 가득 찼다. 그렇지만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올바로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신과 교회회의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으며, 정치 사회 면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경쟁 파벌들의 세력은 너무나 막강해 쉽게 굴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혼란스러위지자 개혁파 성직자들이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황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046년 가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자신의 교황즉위 과정이 교회개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였기에 죄가 될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리히 3세를 만나러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교황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그의 요청에 따라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실베스테르 3세 역시 교회회의에 참석했다. 1046년 하인리히 3세가 개입하여 소집된 수트리 공의회에서는 베네딕토 9세와 실베스테르 3세의 교황직 박탈을 선언하였고, 특히 실베스테르 3세는 처음부터 교황좌를 강탈한 자로 간주되어, 성직품 자체를 박탈당하고 여생을 수도원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6세에게는 사임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그레고리오 6세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베네딕토 9세에게서 돈을 받고 교황직을 넘겨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6세는 교황직을 매수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러한 행동이 성직매매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교회회의의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6세에게 그와 같은 행위는 사실상 성직매매라는 것을 이해시키며, 그에게 교황직 사임을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자신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교회회의의 요청에 따라 스스로 교황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하인리히 3세와 동행했던 밤베르크의 주교 수이드거가 그레고리오 6세의 뒤를 이어 교황좌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교황 클레멘스 2세이다.
클레멘스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그는 하인리히 3세와 함께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하인리히 3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봉하는 대관식을 집전하였다. 1047년 로마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규정을 제정하는 등 교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라벤나 주교좌와 밀라노 주교좌, 아퀼레이아 주교좌 간에 벌어진 우위권 논쟁은 라벤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클레멘스 2세의 선출은 훗날 교황청 내 개혁파로부터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다른 교구의 주교였다는 것과 세속 군주가 개입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받았다. 클레멘스 2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옛 주교좌를 그대로 보유함으로써 로마 교구와 밤베르크 교구를 동시에 사목하였다.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 3세를 대동하고 이탈리아 남부로 개선 행진을 했으며, 하인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925년 헝가리인들에 의해 순교한 비보라다 수녀를 시성하였다.
한편 베네딕토 9세는 수트리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폐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47년 8월 클레멘스 2세가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사망하자, 베네딕토 9세는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시오 3세를 찾아가 자신의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보니파시오 3세는 그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네딕토 9세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금을 뇌물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토스카나 후작의 지원을 받아 그 해 11월에 라테라노 궁전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이미 교황청은 하인리히 3세와 함께 미리 다음 후임으로 티롤 지방의 브릭슨 교구의 교구장인 포포 주교를 정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새 교황으로 지명된 포포는 울름까지 하인리히 3세의 안내를 받아 이탈리아로 내려갔는데, 이 때 교황청 재산이 거의 파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포는 자기 본래 교구의 수입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특별히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048년 알프스에 있는 푸스터 골짜기의 유명한 산림지대를 포포에게 준다는 증서도 작성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포포를 호위하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울 경우 반란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시오 3세에게 황명을 받들어 포포를 직접 로마로 안내하고 그를 새 교황으로 안전하게 즉위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가 교황좌를 찬탈할 당시 적극 협조했던 것과 하인리히 3세에 대한 태도로 볼 때, 보니파시오 3세가 토스카나에 도착한 포포에게 "나는 당신과 함께 로마로 갈 수 없소. 로마인들은 베네딕토를 다시 교황으로 복위시켰고, 그는 도시 전체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소. 게다가 나는 이제 너무 늙은 몸이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포포는 결국 독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하인리히 3세는 크게 격노했다.포포는 하루속히 베네딕토 9세를 추방하고 후임 교황을 즉위시키라는 하인리히 3세의 서찰을 갖고 보니파시오 3세를 다시 찾아갔다. 하인리히 3세의 글은 간단명료했다. “네가 돈에 눈이 멀어 짐의 명령을 거스르고, 교회법에 따라 물러난 교황을 다시 복위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네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짐이 친히 너를 찾아가 엄히 꾸짖을 것이다.”하인리히 3세의 경고에 겁을 먹은 보니파시오 3세는 마음을 돌이켜 1048년 7월 군대를 로마로 보내 베네딕토 9세를 강제로 추방시켰다.
베네딕토 9세가 물러난 후, 포포는 승전군처럼 로마에 입성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모두 기뻐하며 장차 교황이 될 그를 환영하였다. 포포는 1048년 7월 17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다마소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뜨거운 로마의 열기에 지친 다마소 2세는 팔레스트리나로 잠시 피신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24일이라는 짧은 재임 끝에 그 해 8월 9일에 다마소 2세는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시신은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해 12월에 보름스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툴의 주교인 브루노가 다음 교황으로 지명되었다. 황제와 로마의 사절단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정작 브루노 본인은 교회법에 따른 선거를 원했기 때문에, 후임 교황은 로마로 가서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교구민들의 목소리에 따라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바로 출발한 브루노는 브장송에서 클뤼니의 위그 수도원장과 만났으며,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젊은 수도자 일데브란도가 이 때 브루노의 여정에 동참하였다.
브루노는 다음해 2월 순례자 차림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마침내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교황직을 수락하여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여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로렌의 프레데리크, 훔베르트, 일데브란도 등 모두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레오 9세는 가톨릭 개혁에 임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도덕상을 제시하였다. 교황이 된 후 그의 첫 번째 공적 활동은 1049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시노드를 소집한 것이었는데, 이 시노드에서는 (차부제까지 포함한) 성직자들의 독신을 재차 요구하였다. 또한 시노드 회의장에서 레오 9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은 그 해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전역에 대한 사목 방문으로 할애하였는데, 이는 레오 9세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파비아에 소집된 시노드를 주관한 레오 9세는 이후 작센에서 하인리히 3세와 만나 쾰른과 아헨까지 그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랭스에서 고위 성직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회 쇄신 방안이 합의되었다. 마인츠에서는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성직자들이 대거 모인 교회회의를 소집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절단도 참석했다. 마인츠 교회회의에서도 주요 안건은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문제였다. 이때 끝까지 자신의 폐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베네딕토 9세는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되어 파문당했다.
또한 레오 9세는 프랑스에서 서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1049년 3월에 열린 랭스 공회의에서 레오 9세는 프랑스 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주장했고, 당시 프랑크의 국왕이었던 앙리 1세는 왕권이 약화된 터였기에 레오 9세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은 이를 타개하고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풀리아의 윌리엄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은 레오 9세 교황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아풀리아 지역을 장악해 그곳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저 악랄한 민족이 속히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1053년 제4차 예수 부활 대축일 시노드가 폐막된 후, 레오 9세는 직접 이탈리아인 병사들과 슈바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 군대를 격퇴하러 출병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노르만족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과 싸우기를 꺼려 협상을 요청했으나, 슈바벤 용병들이 그들을 조롱하자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레오 9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지만, 그의 군대는 1053년 6월 15일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053년 6월에서 1054년 3월까지 레오 9세는 노르만족에게 항복한 후, 베네벤토에 인질로 잡혀 지냈다. 하지만 포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결국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로마로 돌아왔다.
죽기 전까지 콘스탄틴의 유증을 빋었던 레오 9세는 1054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로부터 서신 하나를 받았는데, 서신에는 서방 교회가 효모를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한다는 것과 단식일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카엘 총대주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1]은 위조된 것이 아닌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인 로마의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
이렇게 동방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와 갈등을 빚은 교황은 사망하기 전에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임명한 후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했다. 훔베르트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한다는 칙서를 동방 교회 측에 전달했고,[2] 이에 반발한 미카엘 총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포함한 교황 특사 수행원들을 파문하는 칙서를 공표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그렇게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054년 4월 19일, 레오 9세는 사망하였다.
3.1.3. 교황청의 개혁과 서임권 분쟁
교황 레오 9세가 사망하자, 일데브란도를 대표로 한 로마의 사절단이 마인츠에 있는 하인리히 3세를 찾아가서 후임 교황을 지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게브하르트를 추천하였으며, 그리하여 게브하르트는 1054년 9월 공식적으로 후임 교황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빅토르 2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으며, 로마로 가서 1055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으로 즉위하였다.1055년 빅토르 2세는 카르카손의 에르메신데의 요청을 받아들여 간통을 저지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와 리모주 백작 부인 알모디스 데 라 마르체를 파문하였다.
1055년 6월 빅토르 2세는 피렌체에서 하인리히 3세를 만나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자들의 결혼과 성직매매, 교회의 금전 비리를 강하게 질타하며 금지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하인리히 3세의 호출을 받고 그를 찾아가 1056년 10월 5일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하인리히 3세는 자신이 뽑은 교황의 팔에 안겨 숨지면서 교황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와 황후 아그네스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하인리히 황태자의 후견인이자 그의 모후이자 섭정인 아그네스의 조언자가 된 빅토르 2세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는 지역 제후들의 반란에 맞서 제국 전역의 평화를 도모하고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권력을 사용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라리아로 고생하다가 1057년 7월 28일 아레초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한 지 5일째 되는 날에 리에주 대주교이자 추기경인 프리드리히가 빅토르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스테파노 9세를 선택하였다.
새 교황이 선출되어 즉위할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국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승인은 따로 받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당시에는 아직 미성년자라 태후 아그네스가 섭정하고 있었고 교황의 형은 하로렌의 공작이었으므로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의 승인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스테파노 9세는 교황 파스칼 1세 이래 로마의 성직자들에 의해 자유로이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스테파노 9세는 성직자들의 독신주의와 관련하여 그레고리오 개혁을 실행에 옮겼으며, 노르만족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한 다음 자신의 동생을 황제로 등극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당시 스테파노 9세는 중병에 걸려 겨우 일시적 내지는 부분적으로만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1058년 3월 29일 스테파노 9세는 피렌체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투스쿨룸 백작의 주도로 로마의 일부 귀족들이 1058년 벨레트리의 주교 요한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요한 주교는 스스로 교황 베네딕토 10세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추기경들은 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던져진 표가 뇌물로 매수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던 전임 스테파노 9세 교황이 피렌체로 떠나기 전에 성직자와 민중에게 독일 궁정에 간 힐데브란트가 돌아오기 전까지 신임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받아 두었는데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추기경들은 강제로 로마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도는 베네딕토 10세의 선출 소식을 듣고 반발하여, 피렌체의 주교였던 제라르 드 부르고뉴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지지하였다. 1058년 12월 추기경들은 시에나에 모여 베네딕토 10세의 선출을 불인정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제라르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된 제라르는 니콜라오 2세로 명명되었다. 교황은 삼층관인 티아라의 전신인 카멜라우쿰을 쓰고 교황좌에 등극하였다. 이는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니콜라오 2세는 로마로 가던 길에 수트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베네딕토 10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언하는 동시에 파문한다고 발표하였다. 니콜라오 2세는 고드푸르아 공작이 이끄는 군인들과 함께 로마로 진입하여 시가전을 벌인 끝에 로마를 장악하였다. 대립교황 베네딕토 10세는 황급히 로마를 떠나 갈레리아의 제라르드가 있는 성으로 달아났다.
1059년 4월 13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라테라노에서 소집된 시노드에서 니콜라오 2세는 칙서 《주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를 공표하여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성직자와 평신도[3]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황선출권을 원로 성직자인 추기경들에게만 부여하는 조치였다. 다른 성직자는 추기경의 선정과 동의가 있어야만 참여 할 수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추기경들이 선출한 교황을 승인하는 권리만을 가지게 하였다.
칙령으로 선포된 교황 선거 방식의 개혁은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상 독립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임 교황 선출권은 로마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성직자들 보다는 로마의 유력 귀족들이나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입김에 많이 좌우되곤 했다.
대립교황 베네딕토 10세와의 투쟁경험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교황 선거 방식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절감하게 만들었고 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개혁 조치가 함께 추진되었다. 교황 선출에 관한 개혁 법령은 1061년 공석이 된 교황을 선출할 때부터 실행에 옮겼다. 또한 황제와 로마 귀족들의 반발에 대비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신생세력인 노르만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교회의 비호세력으로 만들었고 북부 이탈리아의 가장 큰 교구인 밀라노를 종속시켰다.
본래 추기경은 로마교회의 교구 사제에게 명목상 부여되었던 직급이었는데 이번 개혁으로 교황 선거인단이 된 추기경들은 책임과 권한이 강화되어 권위가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콜라오 2세는 노르만족과 관계를 개선했다.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과감한 개혁이 격렬한 반발에 부딪칠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한 시칠리아를 탈환하기를 바랐던 그의 눈에는 노르만족이 이를 실천하기에 알맞은 세력으로 비춰졌다. 당시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남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 편입한 상황이었다. 1059년 8월, 멜피에서 로마와 노르만족 사이에 새로운 동맹이 맺어졌다.
니콜라오 2세는 힐데브란도와 훔베르트 추기경,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아빠스 데시데리우스를 대동하고, 로베르 기스카르를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책봉하는 장엄한 예식을 주재하였다. 그리고 아베르사의 리샤르는 카푸아의 공작에 책봉하였다. 이를 통해 니콜라오 2세는 노르만족 지도자들로부터 앞으로 교회에 충성을 바치며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니콜라오 2세는 노르만족의 지원을 받아 대립교황 베네딕토 10세와 그의 지지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첫 번째 전투는 1059년 캄파냐에 일어났는데, 이 전투에서 니콜라오 2세는 온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하반기에 니콜라오 2세의 군대는 프라에네스테와 투스쿨룸, 누멘타눔을 정복했다. 1059년 가을에 갈레리아를 정복하여 초토화 시킨후 베네딕토 10세를 체포하여 사제직을 박탈하고 투옥시켰다.
이로써 위조 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밖에는 변변한 기반이 없었던 니콜라오 2세는 더이상 교황이 로마인 귀족들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이는 교황권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등 두 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밀라노에서는 파타리노(patarino) 운동이라 불리는 민중 종교 개혁 운동이 벌어졌다. 파타리노 운동이란 타락한 대주교와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성직자들이 첩을 두거나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던 당시의 교회 제도에 반대하여 1058년경 기술자, 상인, 농민들과 같은 평신도들이 밀라노의 파타리노에서 일으킨 종교개혁 운동이다. 이들은 평신도와 성직자에 의해서 선출되고 교황에게 인준되는 방식 이외의 주교 임명에 대해서도 반대하였으며 매우 과격하고 혁명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교황은 이들을 지지하고 부추겨서 황제가 임명한 주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교황은 베드로 다미아노와 루카의 안셀모 주교를 교황 사절로 밀라노에 파견하였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운동이 확산되자, 당시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위도 대주교는 교황 사절들이 앞으로 밀라노 대교구는 로마 교구에 예속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조건을 제시하자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 밀라노 간의 새로운 관계는 1059년 4월 위도 대주교를 포함한 밀라노 대교구 소속 주교들이 라테라노 궁전으로 소환되어 의도치 않게 교회회의에 참석함으로써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교회회의에서는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혼인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주교좌 성당 소속 사제들의 공동 생활을 복구시키고 교회 재산 관리를 쇄신시켜 남용과 부당한 양도를 금지하는 등 사제들의 규율을 더욱 강화하여 힐데브란트[4]가 주장한 개혁을 이어갔고, 혼인법을 개정하여 혼인 유효와 무효, 친족 혼인 조당 등을 결정했으며, 훗날 교황직의 역사에 신기원을 여는 차기 교황 선거에 대한 법령이 통과되었다.
1061년 7월 27일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하였고, 생전에 추진했던 교황청의 개혁안에 따라 신성 로마 황제의 재가도 없이 새 교황의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시작되었고, 9월 30일 루카의 주교였던 안셀모 다 바치오가 알렉산데르 2세로서 선출되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은 예전처럼 후임 교황 후보로 파르마의 주교 카달루스를 지명하였다. 바젤에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카달루스는 호노리오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오랫동안 알렉산데르 2세의 자리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결국에 호노리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1064년 만토바에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대립 교황으로 단죄받았다. 그리하여 알렉산데르 2세는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아 그대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1065년 알렉산데르 2세는 나르본 자작 베렝가르와 나르본 교구장 귀프레드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이 유대인 학살을 막은 것에 대해 칭찬하면서 하느님은 유혈사태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같은 해에 그는 베네벤토의 란둘프 6세 공작에게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는 한편 스페인을 침공한 무어인들을 몰아낼 것을 요청하였다.
1066년 알렉산데르 2세는 훗날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기욤 드 바타르의 사절단을 맞이하였다. 당시 브르타뉴 정복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욤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목적은 향후 있을 잉글랜드 정복에 대해 교황의 축복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2세는 사절단에게 성 베드로의 그림이 있는 깃발과 잉글랜드 성직자들에게 보낼 교황 칙서를 건네 주었다. 당시 칙서에 적힌 내용은 기욤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승인하며, 이를 축복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교황의 지지는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잉글랜드 교회의 항복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는 잉글랜드의 색슨 왕가 말기에 중요한 네 교구가 불법적으로 설정되어 성직자들의 생활이 문란하고 지적 수준이 낮았으므로 기욤에게 사절을 보내어 왕위에 올라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를 성직매매를 통해 점거한 스키건드 대주교를 파직시키고, 개혁가이며 베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고 캉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였던 파비아의 랑프랑을 새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알렉산데르 2세는 라틴 교회의 경우 사순 시기 동안 '할렐루야'를 부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후 전통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 동안에도 '할렐루야'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가 사망하였다. 이후,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큰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데브란도를 교황으로!"[5], "복되신 베드로께서 일데브란도 수석부제를 선택하셨다!" 그 직후, 같은 날에 일데브란도는 사람들에게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안내를 받아 그곳에 모인 추기경들에 의해 교회법의 절차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사제단이 이에 동의한 순간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일데브란도를 지지하면서 일어난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이 순전히 즉흥적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상태에서 일어난 결과물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그레고리오 7세가 선출된 과정은 비록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반대자들한테 강도 높은 비난을 샀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교황이 된 것이 적법했느냐를 놓고 비판이 일어났다는 사실로 보아, 이미 불신의 감정이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선출이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059년 교회법에 명시된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선출 과정 당시 기록으로 보아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새 교황의 선출에 있어서 사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교황 니콜라오 2세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선출에 대한 유효성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꾼 것은 대다수 로마 시민들이 그에게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성한 초기 서신들을 보면, 분명하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선출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1073년 5월 22일 그는 사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30일에는 교황이 되기 위해 주교품을 받았다.
1073년 4월 22일 교황 선출 발표문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새 교황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가 “신심이 깊고,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역경에 강하며, 부유함을 절제할 줄 알면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행동주의자인 데다가 떳떳하고, 겸손하며, 냉철하며, 순결하고, 친절이 몸에 배여있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어린 시절 어머니 교회의 따뜻한 품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 어느덧 삶의 정점에 다다랐을 즈음 수석부제로서의 위엄을 갖추는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데브란도를 교황이자 사도의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영원히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나온다.[6]
그레고리오 7세의 첫 번째 대외정책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북유럽 제후들에게 십자군 원정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후, 베네벤토의 란둘프 6세와 카푸아의 리카르도 1세 등 노르만 제후들로부터 지원의사를 받자 1074년 로베르를 파문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규탄함과 동시에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재천명했다. 이때 발표된 칙령들은 다음해(2월 24일-28일) 이를 위반할시 파문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한층 더 강조되었다. 특히 2차 회기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하거나 면직시킬 수 있으며, 더불어 주교의 소임지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는 뒤이어 일어날 서임권 투쟁을 야기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및 정치와 관련된 주요 정책은 대부분 독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3세의 사망 후 독일 황실은 심각하게 권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에 산적한 커다란 난제들과 맞닥뜨렸다. 이러한 정세는 그레고리오 7세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는 1073년 하인리히 4세가 겨우 24세의 청년에 불과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때부터 2년여 동안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전쟁 때문에 그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1074년 5월 하인리히 4세는 과거 그레고리오 교황이 파문한 교회회의 위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한 죄를 뉘우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서 교황 특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해성사를 본 다음 교황에게 순명을 맹세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처음에는 교황에게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1075년 6월 9일 랑엔살자 전투에서 작센 공국을 굴복시키자마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주저없이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하였다. 그는 파타리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에버하르트 백작과 테달도 신부를 각각 롬바르디아와 밀라노 대교구에 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문제였던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동맹 관계를 다시 맺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8일 다소 거친 언사가 담긴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서신에서 그는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아 끝내 파문당한 성직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을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구두 메시지도 적어 보냈다. 즉, 그의 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대죄들 때문에 그가 교회에서 추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위도 박탈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075년 그레고리오 7세는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반대자 첸시오 1세 프란지파네의 기습을 받아 납치됐으나, 그를 매우 존경하던 로마 시민들이 첸시오 1세의 저택을 찾아가 공격함으로써 위협을 느낀 첸시오 1세에 의해 다음날 풀려났다.
한편 일찍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한 교황의 문책을 받은 하인리히 4세와 독일 궁정은 크게 격분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은 서둘러 1076년 1월 24일 독일의 보름스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하였다. 독일의 고위 성직자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과거에 그레고리오 7세와 친밀한 관계였으나 나중에 그의 적대자가 된 로마의 추기경 휴고 칸디두스 역시 보름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독일로 갔다. 보름스 회의는 칸디두스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7세를 고발한 혐의들을 모두 인정하고, 그를 폐위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문 내용은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찼으며, 독일 주교들은 그에 대한 순명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보름스 회의는 두 명의 주교를 이탈리아로 보내, 피아첸차에서 시노드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그들은 랑고바르드 주교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파르마의 롤란드는 라테라노 대성전에 소집된 시노드에 참석하여 운 좋게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가 결의되었다고 알렸다. 시노드에 참석한 교부들은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엔 놀랐으나, 이내 분노로 빗발쳤다. 다행히 그레고리오 7세의 인내로 롤란드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나 폭행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장엄하게 선포하였으며, 그의 제위를 박탈하는 동시에 제국 시민들의 그에 대한 충성을 면제시켜 주었다. 세속 군주를 파문하고 폐위시키는 것은 매우 대담한 행동이다. 4세기 기독교가 국교화된이후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교황을 폐위시킨 선례는 많았으며 그 반대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선포한 파문장의 내용을 요악하자면 하인리히 4세를 교회 밖으로 내쫓는 동시에 그의 제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선고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엄포에 그칠 것인지는 그레고리오 7세보다는 하인리히 4세의 신하들, 특히 독일 제후들의 의중에 달려 있었다. 당시 사료를 보면, 하인리히 4세에게 내려진 파문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전 하인리히 3세는 교황직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세 사람을 폐위시킴으로써 교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이러한 부친의 전철을 흉내내려고 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이러한 여론의 반응에 힘입어 각 지역 제후들은 교황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명분하에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기의 기회를 잡았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항할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귀족회의를 소집했지만, 정작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센 공국은 다시금 반역할 매우 좋은 기회를 잡았으며, 하인리히 4세를 반대하는 세력은 나날이 힘을 키워갔다.
이제 정국은 하인리히 4세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교황 특사인 파사우의 알트만 주교가 열심히 여론을 움직인 결과, 독일 제후들은 자신들의 새 군주를 선출하기 위해 10월 트레부르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당시 라인강 서쪽 제방의 오펜하임에 기거하던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이 누구를 새 군주로 추대한 것인지 합의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간신히 폐위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후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단순히 그들의 결정을 잠시 지연한 것에 불과하였다. 제후들은 또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마땅히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그들은 100일 이내에 하인리히 4세가 파문에서 해제되지 않을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자리는 공석 상태인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더불어 제후들은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기 위해 그레고리오 7세를 아우크스부르크에 초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100일이 지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파문 철회를 받지 못하면, 자신의 지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 그는 사절단을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내 화해를 시도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였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는 이미 로마를 떠나, 독일 제후들에게 군사들을 보내 1월 8일 만토바로 떠나는 자신을 호위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뜻을 넌지시 비추었다. 이에 따라 호위대가 파견되었지만,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되돌아갔다. 하인리히 4세는 부르고뉴 지역을 지날 때,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무력을 동원해 그레고리오 7세를 제압하라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077년 1월 25일, 하인리히 4세는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한 채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에 있는 카노사에서 참회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그곳에 있는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3일간 기다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나 측근들과 지지자들의 거듭된 간청에 못이겨 파문을 철회하였다. 만약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의 회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의 결과와 이후 역사 전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며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상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있어 종교적 책무는 정치적 이해득실보다 우선시되었다.
그러나 파문이 철회되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완전히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사이를 갈라놓은 근본적인 문제인 서임권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에게 내려진 파문이 철회되었기 때문에 폐위 선고 또한 자연스럽게 무위로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곧 새로운 분쟁의 씨앗을 낳았다. 당시 그레고리오 7세는 자기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중에 그레고리오 7세는 동로마 제국, 키예프 루스, 아르메니아 왕국 등 동방 정교회 국가들의 군주들과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레고리오 또한 교회의 동서분열이 장기화 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고, 때문에 동방정교회의 맹주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미하일 7세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동쪽에서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로마에까지 전해져오고 있었고, 미하일 7세는 이러한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을 막고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대한 군사 원정을 계획했으며, 모든 신자에게 거룩한 무덤 성당을 다시 되찾아오는 일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곧 훗날 있을 십자군 원정의 전초가 되었다.
다만 1077년 11월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아드리아노플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동로마 제국의 정세가 불안정했고, 1078년 3월 24일 치솟는 물가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미하일은 제위에서 쫓겨나고 수도원에 유폐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한편 하인리히 4세에게 내려진 파문이 철회된 후에도 반항적인 독일 귀족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077년 3월 포히하임에서 라인펜델의 루돌프 공작을 새 군주로 옹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새 황제를 뽑기 위한 선거에서 교황 특사들은 시종일관 중립을 유지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 역시 꽤 오랫동안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황제파와 귀족파는 서로 세력이 비등했기 때문에, 양측은 교황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상대에 대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교황이 어정쩡한 행동을 계속 취하면서 양측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루돌프 공작이 1080년 1월 27일 포히하임 전투에서 황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결정하였다. 색슨족의 계속된 압력과 포히하임 전투에 대한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7세는 중립을 지키면서 조용히 관망하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1080년 3월 7일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한 동시에 그의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4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 내려진 교황의 결정에 대해 여론의 반응은 극도로 차가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이번 처사에 대해 과연 하인리히 4세에게 내려진 두 번째 파문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전후사정이 어찌되었던간에 1077년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귀족들은 교황의 파문 철회에 반발하며 루돌프를 독일의 대립국왕으로 선출한후 하인리히 4세에게 적대행위를 했다. 교황이 파문을 철회했다는 것은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했던 충성맹세가 다시 유효해졌다는 뜻이며 충성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았으니 이는 봉건체제하에 봉신으로서 위법행위를 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교황은 즉시 대립왕과 그의 추종자 전부를 파문해야 한다. 교황의 준엄한 결정에 반기를 든 자들이니 하인리히 4세에게 1076년에 내린 파문처럼 즉각적으로 단호하게 파문을 내렸어야 했다. 그렇치만 화해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내전이 벌어진 3년간 양자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가 1080년이 되어서야 다시 하인리히 4세에게 두번째 파문을 내렸다. 이미 파문이 해제되었고 파문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교황의 조치에 불복한 루돌프와 그를 선출한 반대파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이는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금번 두번째 교황의 파문 조치는 효력이 전혀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와 이치에도 어긋났다. 교황의 결정에 불복한 자들을 응징하는 데 앞장섰던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조치는 누가 보아도 부당하였다. 그러므로 하인리히 4세에 대한 2차 파문은 교황권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으며 양측 모두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대파의 구심점이였던 루돌프 공작이 1080년 10월 16일에 사망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후 1081년 8월 새 군주 후보로 룩셈부르크의 헤르만이 떠올랐지만, 귀족파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그의 역량이 부족하였다. 반면에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만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층 더 노련해진 그는 대단히 과감하게 투쟁을 개시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교황의 파문과 폐위는 불법적이라면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영향으로 6월 16일 브레사노네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킨 다음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하였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반(反)교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갈수록 권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13명의 추기경이 그의 곁을 떠났다.
1081년 로마에 도착한후 3년간의 노력끝에 1084년 3월에 로마 탈환에 성공한다. 로마가 점령당하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해 준다면 귀베르트를 죄수로 넘기겠다고 교황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그의 방문을 일절 거절하였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 언젠가는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가 교회회의에 출두하여 공개적으로 참회해야만 알현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인리히 4세는 겉으로는 이러한 조건에 따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주교들이 모이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였다. 하인리히 4세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주교들이 가까스로 모여 교황에게 조언한 결과,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이 재차 선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4세는 3월 21일 로마에 재입성하여 1084년 3월 24일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이 세운 교황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올렸다. 산탄젤로성에 은신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배자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084년 5월에 3만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로베르가 로마로 진격했다. 소식을 접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불필요한 전투를 치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로베르가 도착하기 3일 전에 퇴각해버렸다. 한편 반교황파(반 그레고리오) 세력은 로베르 군대의 로마 진입을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이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에 대해 반발을 넘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교황권을 남용하여 서임권 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독일 군대가 로마를 3년 동안 포위, 공격함에 따라 외부와 교류가 단절되며 민생경제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교황은 끌까지 고집을 부리며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족과 사라센 출신 군대는 로마의 방벽 안으로 진입하며 도심 곳곳에 불을 질러 소란을 피우고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도심을 빠르게 가로질러 산탄젤로 성으로 진입한후 교황을 구출하였다. 구출 작전 중에 저항군과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 중에 약탈도 자행하였다. 약탈이 종료된 후 도시 로마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금번 약탈의 특징은 도시 곳곳 불을 질러서 건물들이 많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성당들에 불을 많이 질렀는데 이는 당대의 성당들이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성당은 견고한 석조건물로서 천연요새 역할을 했다. 성당 방화는 그곳에 숨어있는 저항군을 제압 혹은 몰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교황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노르만 군대가 도심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피해가 극심해지자 로마 시민들이 분개하였고 대립 교황으로 클레멘스 3세를 세운 후 교황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압박을 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노르만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로마 시민들에게 버림받은 교황은 처음에 몬테카시노로 갔다가, 나중에는 해안가에 있는 살레르노 성에 은거하였으나 다음해 1085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기에 유배지에서 죽는다.(Ho amato la giustizia e ho odiato l'iniquità. perciò muoio in esilio.)"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은 이탈리아 남부 추기경들에게 그레고리오 7세를 이을 가장 적합한 후임자로 자신의 전임자였던 데시데리우스를 추천했다. 로마 시민들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내쫓았으며, 데시데리우스는 앞으로 소집될 교황 선거에 관해 다른 추기경들과 협의하기 위해 서둘러 로마로 갔다. 그러나 교황직에 대한 뜻이 없었던 데시데리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몬테카시노로 도망간 후, 그곳에서 노르만족과 랑고바르드족에게 단합하여 성좌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 오면서 데시데리우스는 노르만족 군대와 함께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추기경들과 노르만족 지도자들 간에 후임 교황으로 자신을 추대하기로 의견을 모은 사실을 안 그는 그들에게 그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기 전까지는 로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추기경들과 노르만족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예수 부활 대축일에 로마에 모인 주교들과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와 관련한 논의를 위해 데시데리우스와 그와 함께 몬테카시노에 머물고 있는 소수의 추기경들에게 로마에 올 것을 요청했다.
5월 23일 산타 루치아 인 셉티솔리스 성당에서 추기경회의가 소집되어, 데시데리우스에게 재차 교황직을 수락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데시데리우스는 만약 강압적으로 자신에게 교황직을 계속 강요할 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다음날인 성령 강림 대축일 아침에 재차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어제와 똑같은 장면만 다시 연출되었다. 이에 참다 못해 로마 집정관 켄키우스는 오스티아의 주교 오동을 후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지만, 몇몇 추기경들이 교회법상 절차에 맞지 않다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파기되었다. 오동은 훗날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되었다.
결국 데시데리우스는 1086년 5월 24일 교황직을 수락하고, 유화적이었던 교황 빅토르 2세를 본받아 자신의 새 이름을 빅토르 3세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교황으로 선출된 지 4일 만에 빅토르 3세와 추기경들은 친황제파의 소요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였다. 그들은 테라치나로 달아났으나, 그곳에서도 반대자들을 맞닥뜨렸다. 빅토르 3세는 교황의 휘장까지 버리고 다시 피신해 몬테카시노에 1년 동안 칩거하였다.
1087년 사순 시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카푸아에서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모여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카푸아의 교황 대리 리용의 위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빅토르 3세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의사를 밝힌 편지가 낭독되었으며, 노르만족 지도자들과 로마의 귀족들, 교회회의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도 잇달아 지지의사를 밝혔다. 결국 빅토르 3세는 마침내 뜻을 굽혀서 다시 교황의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교황직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그의 고집 때문에 일부 성직자들이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카푸아의 위그가 보관한 리용의 위그의 편지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비록 빅토르 3세가 주위의 압력을 받아 1086년 교황직을 수락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아직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즉위식은 거행되지 못했다. 1087년 예수 부활 대축일이 끝난 후, 빅토르 3세는 수도원 생활에서 벗어나 로마로 갔다. 그와 함께 노르만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호위한 병사들을 모두 성 베드로 대성전 밖으로 내몰았다. 그런 다음 빅토르 3세는 1087년 5월 9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식적으로 교황으로서의 즉위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단지 8일만 로마에 머물다가 다시 몬테카시노로 돌아갔지만, 토스카나의 마틸데 공작 부인과 카푸아의 요르단 1세 공작의 도움을 받아 바티칸 언덕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이 끝나기 전에 마틸데 공작 부인의 부름을 받고 한 번 더 로마를 방문했다. 그리고 교황을 따르는 군대는 레오 성벽과 트라스테베레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6월 말에 대립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재차 장악하면서 빅토르 3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다시 물러났다. 8월에 베네벤토에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의 파문과 더불어 평신도가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재차 확인했으며, 북아프리카의 사라센에 대항하기 위한 성전(聖戰), 리옹의 위그와 마르세유의 아빠스 리샤르에 대한 단죄를 결의했다.
시노드가 폐막한 지 3일 후에 빅토르 3세는 중병에 걸려 1087년 9월 16일 몬테카시노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출신이자 오스티아의 추기경인 오동 드 라주리가 1088년 3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2세로 선출되었다.
3.1.4. 십자군의 시작
우르바노 2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당시 로마를 장악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라벤나의 주교 기베르트)를 상대해야 했다. 전임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의 권위를 둘러싸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를 굴복시킨 이후에도 그레고리오 7세는 슈바벤 공작을 새 황제로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1080년 황제를 재차 파문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로마를 점령한 후,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였다.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기조를 유지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들을 단호하게 지키면서도 상당한 유연성과 외교석 수완을 보여줌으로써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추진해 나갔다. 우르바노 2세는 재임하는 동안 종종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프랑스를 방문하곤 하였다. 로마[6]와 아말피, 베네벤토, 트로이아 등지에서 잇달아 소집된 교회회의들에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 일부 성직자들의 결혼을 비판하였으며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대립교황을 반대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토스카나 여공작 마틸데와 바이에른 공작 벨프 2세의 혼담을 제의하였다.
또한 그는 콘라트 왕자에게 부친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지했으며, 1093년에는 그를 로마와 밀라노의 왕으로 제수한다고 발표했다. 1095년 크레모나에서 우르바노 2세는 콘라트의 대관식을 집전하였다.크레모나에 머무는 동안 우르바노 2세는 콘라트와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 의 딸 막시밀라 사이의 혼담을 주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양자의 결혼은 그 해 말 피사에서 거행되었다. 이 때 막시밀라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 덕분에 콘라트가 활동하는데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에우프락시아 황후가 남편인 하인리히 4세를 고발하였는데 이를 격려하였다.[7] 우르바노 2세는 캔터베리의 안셀모를 지원해 윌리엄 2세 국왕과 잉글랜드 성직자들 간에 갈등을 봉합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와 대립교황에 대한 반대 의사 표명을 이끌어냄으로써 잉글랜드의 지원을 얻어냈다.
우르바노 2세는 전임자들의 개혁 정책을 계속 유지했으며, 캔터베리의 새 대주교로 착좌한 안셀모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을 때에도 기꺼이 그를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혁 정책을 위해서는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교황 특사 디에의 위그가 필리프 1세 국왕이 앙주 백작의 아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중혼한 것을 비판하며 파문한 것에 대해서도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드를 포기했다고 약속하면서 그에게 내린 파문이 풀어졌으나,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면서 재차 파문당했다. 비록 베르트라드가 도팽 루이를 대신해 자신의 아들이 필리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에 즉위하도록 적극적으로 정치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1104년 필리프 1세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사태는 종식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즉위하자마자 독일과의 전쟁, 프랑스에서의 갈등, 대립교황, 위협받고 있는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들을 당면하였다.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의 경우, 그는 대규모 성지 순례[8]를 해결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황은 1095년 3월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 제국에 맞설 군사적 원조를 요청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을 접견하면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소집된 지역 공의회(클레르몽 공의회)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프랑스의 주교들이 참석하면서 첫 모임은 클레르몽 시 외곽의 야외에서 치러야만 했다. 같은 해 11월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연설을 가진 우르바노 2세는 처음에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의 쇄신을 주문하다가, 11월 27일에는 민간인들까지 포함하여 더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연설하였다. 이 때 우르바노 2세는 시노드에 참석한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거룩한 땅과 동방 교회들을 셀주크 투르크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탈환해야 한다면서 매우 열정적으로 호소하였다.
당시 그의 연설을 그대로 옮겨 적은 정확한 필사본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다. 우르바노 2세가 했다는 연설은 총 다섯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는데, 이들 내용 모두 상당히 후대에 씌어진 것들인 데다가, 서로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샤르트르의 퓔세가 쓴 기록 외에 우르바노 2세 연설이라고 전해지는 나머지 기록들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룸》(Gesta Francoru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게스타 프랑코룸》에도 역시 우르바노 2세가 했다는 연설들 중의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샤르트르의 퓔세는 1101년경까지 우르바노 2세의 연설을 포함하여 십자군 원정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당시 시노드 현장에 있었다. 랭스의 로베르 역시 시노드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기록은 대략 1106년경의 것이다.
사실 우르바노 2세가 연설했다고 전해지는 다섯 가지 기록 모두 우르바노 2세 본인이 실제로 이야기했다기 보다는 후대에 작가들의 생각이 첨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한 우르바노 교황의 실제 동기에 대해서는 교황 본인이 직접 쓴 네 통의 서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나는 플랑드르에 보낸 것이고(1095년 12월자), 두 번째는 볼로냐(1096년 9월자), 세 번째는 발롬브로사 수도원(1096년 10월자), 마지막 하나는 카탈루냐 백작(1089년 또는 1096-1099년)에게 보낸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 대한 우르바노 2세의 본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클레르몽 시노드에서 그가 한 연설이라고 전해지는 것들보다는 본인이 직접 쓴 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우르바노 2세의 연설문은 십자군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불러왔다. 따라서 연설문 다섯 개를 우르바노 2세가 실제 했던 말과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샤르트르의 퓔세는 우르바노 2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나는, 아니,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전령이 되어 이 사실을 곳곳에 전파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보병이든 기사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서둘러 도와주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 친구들의 땅에서 사악한 무리를 쫓아내는 일을 돕기를 바라십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물론 자리에 계시지 않는 분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출처1]
랭스의 로베르는 우르바노 2세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방이 바다로 막혀있고 산지가 많아,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너무나 비좁습니다. 더군다나 자원도 충분하지 않아서, 경작자들에게 필요한 작물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그 결과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미움을 버리십시오. 서로 싸움을 멈추고, 전쟁을 그만두십시오. 모든 불화와 갈등을 종식시키십시오. 거룩한 무덤으로 가서 불경한 자들로부터 그곳을 되찾고 여러분이 다스리십시오. …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 먼저 우리에게 그처럼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로베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르바노 교황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껏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공경하올 로마 교황님께서 이 외침을 듣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출처2]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머무르시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외침은 모두 한 곳으로부터 기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게끔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 외침이 전장에서의 함성이 되게 합시다. 왜냐하면 이 외침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들을 향해 공격할 때, 하느님의 병사들이 모두 이렇게 외치도록 합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출처3]
샤르트르의 퓔세가 기록한 우르바노 2세의 연설 중에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는 자는 대사 수여를 허락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외교인들과 싸우다 죽은 모든 사람은 그 즉시 대사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받은 권한에 따라 전사자들에게 이러한 잠벌의 사면을 허락할 것입니다. 아아, 악마들을 숭배하는 혐오스럽고 비천한 민족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된 이들을 정복하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만약 우리가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돕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찌 책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한심하게도 서로 싸우는데 익숙했던 신자들이 이제는 신앙이 없는 자들과 싸워,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었어야 할 전쟁을 승리로 끝나게 합시다. 오랫동안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기사가 되게 합시다. 자기 형제와 친지들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야만족들을 상대로 싸우게 합시다. 적은 보수를 받으며 용병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이제는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합시다. 몸과 영혼이 모두 지친 사람들이 이제 더 큰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합시다. 보십시오! 한쪽에는 슬픔과 가난에 빠진 사람들이 설 것이고, 다른 한쪽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설 것입니다. 한쪽에는 주님의 적들이 설 것이고, 다른 한쪽에는 주님의 친구들이 설 것입니다. 군사 원정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미루게 하지 않게 합시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임대해 원정 비용을 충당하게 합시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자마자 그들이 인도자이신 주님과 더불어 원정을 떠나게 합시다."[출처1]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의미의 ‘Deus vult’가 실제로 클레르몽 시노드 기간 중에 사람들이 함성으로 외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 중이다. 로베르 수사의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하지만, 후대에 선전용 도구로 이용되면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플랑드르 시민들에게 보낸 우르바노 2세의 서신을 보면, 그가 동방 교회를 해방시키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대사 부여를 허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로베르 등이 기록한 연설 내용과 비교해봤을 때,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에 대해 매우 짧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신 속에서 우르바노 2세는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딱 한 번만 언급하고 있다. 플랑드르 시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투르크족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아름답게 꾸며진 거룩한 도시(예루살렘)를 장악하고 있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들지만, 거룩한 도시와 그곳의 성당들은 끔찍하게도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볼로냐와 발롬브로사에 보낸 서신들에서도 우르바노 2세는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의 통치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보다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선 십자군 원정대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글의 전체적인 논조는 예루살렘 자체를 탈환하는 것보다는 현지 교회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고 쓰여 있다. 우르바노 2세는 ‘동방 지역의 교회들’과 ‘동방 교회들’(플랑드르에 보낸 서신), ‘교회의 자유’(볼로냐에 보낸 서신), ‘그리스도교의 자유’(발롬브로사에 보낸 서신), ‘아시아 교회’(카탈루냐에 보낸 서신)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연이든 아니든, 샤르트르의 퓔세가 기록한 우르바노 2세의 연설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동방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이 투르크족으로부터 소아시아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우르바노 2세에게 있어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큰 소득은 바로 프랑스군의 힘을 빌려 1097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로마에서 몰아낸 것이다. 토스카나의 마틸다 역시 우르바노 2세의 로마로의 귀환을 적극 지원하였다. 물론 원군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이 보내주는 원군이 소수 정예의 프랑크인 기사들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가장 먼저 은자 피에르가 이끌고 온 민중 십자군을 시작으로 제1차 십자군을 목격한 이후 기대가 산산히 부셔졌다. 그는 니케아 탈환 이후 십자군 지도자들과 알력이 발생하면서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되찾는데는 성공했지만 십자군들이 레반트 지역에 국가들을 세우면서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가장 이슬람 다음으로 위험한 세력이 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지(예루살렘 공방전) 14일 만인 1099년 7월 29일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로마에 당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생전에 그는 예루살렘 탈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떠났다.
3.1.5. 서임권 분쟁에서의 승리와 재개혁기
우르바노 2세가 사망하자 산 클레멘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이었던 라이네리우스가 1099년 8월 13일 교황 파스칼 2세로 선출되었다. 즉위 초반 대립교황들[13]을 차례로 축출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그는 선출 이후 1084년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 기간 중에 전소된 산티콰트로 코로나티 성당의 재건을 지시하였다.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서임권 투쟁에 있어서 그는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인리히 4세가 시종일관 서임권은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자 교황 파스칼 2세는 1102년 교회회의를 통해 황제의 서임권 행사 금지를 재확인한 후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장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하인리히 5세는 부왕 하인리히 4세가 파문된 것을 기회 삼아 1105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를 지지했다. 반란은 성공했고 부왕 하인리히 4세는 폐위당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5세는 나중에 자기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교황을 찾아가 그의 사면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하인리히 5세는 비록 교황의 편에 서서 자기 아버지와 적대하기는 했지만,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훨씬 완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1106년 1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스칼 2세에게 초대장을 보냈지만, 파스칼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1106년 10월 구아스탈라에서 시노드를 소집해 평신도의 서임권 금지를 재천명하였다.
1106년 말,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방문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 없이 1107년 9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하인리히 5세가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자, 파스칼 2세는 1111년 2월 타협안을 제시하며 그와 비밀협정을 맺었다. 협정의 내용은 황제가 서임권을 포기한다면 그대신 독일 교회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해 독일 주교관할지역을 담당하는 주교들과 사전 상의가 없었다. 1111년 2월 하인리히 5세의 황제 대관식에서 협정서가 발표되었을 때, 재산과 권리를 반납해야 하는 독일 교회와 영주들이 크게 반발하며 항의가 너무 거세여 대관식을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이어서 로마 시민들이 하인리히 5세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하인리히 5세는 급히 대관식을 취소하고 교황과 추기경들을 인질로 생포한 후 피신하였다.
파스칼 2세는 61일 동안 감옥에 갇혀 힘겹게 살았으며, 카푸아 공작 로베르 1세의 노르만 군대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나섰지만 독일군에 패퇴하여 실패로 끝났다. 파스칼 2세는 감옥 생활을 견디다 못해 결국 하인리히 5세에게 굴복하여 그의 서임권을 인정하였다. 그 후 하인리히 5세는 1111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올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하지 않기로 합의한 후, 알프스 너머로 철수했다. 그러나 교회 개혁파는 이에 반발하여 1112년 3월 라테라노 시노드를 통해 폭력에 의해 강요된 양보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1112년 10월 빈에서 열린 시노드에서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파스칼 2세는 이를 승인하였다.
한편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기 전인 1106년, 잉글랜드 왕국에서 서임권을 놓고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모와 국왕 헨리 1세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헨리 1세가 지명된 후보자에게 성직록과 영지 부여 및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시킴으로써 주교를 임명하자, 안셀모는 자신의 주교 반지와 주교 지팡이를 보여줌으로써 주교인 자신만이 서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재임 후반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헨리 1세 국왕이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들의 소임지를 마음대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파스칼 2세는 1115년 시노드를 열어 그를 규탄하고 파문을 경고하였다.
이후 그레고리오 7세의 정치적 동지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1115년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영지를 교회에 양도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교황청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하인리히 5세는 즉시 마틸다의 영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1116년에 로마에 폭동이 일어나 로마를 떠나 피신했다. 이 피난 기간 중 그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렌가리오 3세에게 타라고나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였다. 1117년에 하인리히 5세가 로마에 도착하자 파스칼 2세는 그를 피해 다시 로마를 떠났다. 1118년 초 하인리히 5세가 롬바르디로 철수하면서 파스칼 2세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1118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1118년 1월 24일파스칼 2세의 후임자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자 교황청 상서원장인 조반니 카에타니가 젤라시오 2세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를 따르는 프란지파네의 첸시오 2세에게 납치되어 감금되었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덕분에 새 교황은 무사히 풀려났다. 하인리히 5세는 1110년 로마원정을 통해 전임 파스칼 2세 교황으로부터 서임권을 강탈한적이 있다. 그러나 이내 파문을 당하며 서임권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임교황 젤라시오 2세에게 서임권 양도를 재차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화가난 하인리히 5세는 1118년 3월 물리력을 동원해 젤라시오 2세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브라가의 대주교 마우리체 부르댕을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로 추대하였다.
젤라시오 2세는 가에타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118년 3월 9일 사제 서품식을 집전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주교 서임식을 집전하였다. 그는 하인리히 5세와 대립교황에 대한 파문을 선언하고, 노르만족의 힘을 빌려 그 해 7월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프란지파니 가문을 주축으로 한 친황제파가 산타 프라세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젤라시오 2세를 습격하여 반격을 가하였다. 결국 젤라시오 2세는 다시 한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프랑스로 피난길에 오른 교황은 잠시 들른 피사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한 다음 그 해 10월 마르세유에 도착하였다. 젤라시오 2세는 아비뇽과 몽펠리에 등의 도시들을 방문할 때마다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119년 1월 비엔에서 시노드를 소집한 그는 서임권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 계획을 승인한 다음 클뤼니에서 사망하였다.
1119년 2월 2일 클뤼니에서 후임 교황으로 비엔의 주교인 기가 선출되었다. 당시 교황 선출 장소에서는 아홉 명의 추기경만 참석했을 뿐,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기는 1119년 2월 9일 갈리스토 2세라는 이름으로 비엔에서 즉위하였다. 새 교황은 처음에는 하인리히 5세와 평화적으로 협상을 모색하였으며, 이에 하인리히 5세 역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새 교황이 보낸 사절단을 환영하고 로마에 있는 대립교황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교황과 황제는 랭스 인근의 샤토드무송에서 만나기로 합의했으며, 그 해 10월 교황은 프랑스의 루이 6세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의 영주 대다수와 4백 명이 넘는 주교 및 수도원장들과 함께 랭스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하인리히 5세는 갈리스토 2세와 회담을 갖기 위해 샤토드무송을 방문하였다.
홀몸으로 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3만 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 갈리스토 2세는 무력에 의한 협박으로 불리한 양보를 강요받을까봐 염려하여 랭스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곳에서 갈리스토 2세는 사이가 소원해진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형제를 중재하려고 나섰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교회회의는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를 포함하여 성직매매, 성직자의 축첩 행위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이를 처벌하는 징계 규정들을 제정하는 등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나갔다. 그리고 하인리히 5세가 기존의 입장을 전혀 철회할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1119년 10월 30일 하인리히 5세와 그가 추대한 대립교황을 엄숙하게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
갈리스토 2세가 이탈리아로 돌아올 때, 로마에 있는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 및 신성 로마 제국의 동맹군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갈리스토 2세는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대립교황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결국 황제가 추대한 대립교황은 수트리에 있는 요새로 피신하였으며, 나중에 그는 나폴리 왕국에서 온 노르만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죄수 신세가 된 그는 살레르노 인근으로 끌려가 갇혀 지냈으나, 나중에는 푸모에 있는 요새로 이감되었다. 로마에서 친황제 세력은 얼마 안 가 해체되었다.
1120년 갈리스토 2세는 유대인들의 처우 개선과 관련해서 교황의 공식적인 입장인 교황 교서 《유대인과 같이》(Sicut Judaeis)를 발표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5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교황의 교서는 이들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유대인들도 자유와 권리를 누릴 합법적인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가르침을 재차 반복한 것이었다. 교서에서 갈리스토 2세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재산 몰수 또는 그들의 종교적 기념일이나 축제를 방해하거나 그들의 묘지를 훼손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다시 확립한 갈리스토 2세는 하인리히 5세와 서임권 문제를 재차 협상하기로 하였다. 하인리히 5세 역시 독일에서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이 논쟁을 하루속히 끝내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세 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교황의 사절단이 독일로 가서 1121년 뷔르츠부르크에서 서임권 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개시하였다. 회담장에서 양측은 서임권 분쟁 종식 선언은 독일에서 선포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교회의 재산권, 그리고 반란자들의 영토를 반환한다는 것 등을 합의하였다. 이 사항들은 갈리스토 2세에게 전달되었으며, 갈리스토 2세는 교황 특사 람베르트를 보름스에 파견하여 그곳에 소집될 시노드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122년 교회와 제국 간에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 따라, 황제는 주교 서임권을 포기하여 교회에서 주교를 자유롭게 서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였다. 협약에서 모든 주교는 서임받을 때 홀을 받아야 하며, 주교를 선출할 때는 황제나 그의 대리인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출 과정에서 논란이 생길 경우 관구장 주교나 보좌 주교들이 의견을 모아 정당하게 새 주교를 선출해 이를 황제에게 알려 확인을 받도록 하였다. 더불어 주교는 축성되기 전에 독일에서 황제로부터 교구의 세속 재산을 받도록 한 점 등 교황 측에서 양보한 점 또한 적지 않았다. 교황령에서는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할 권한이 있었으며, 황제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은 반면 부르고뉴와 이탈리아에서는 종종 주교로 성성된 직후 황제에 의한 서임식이 있곤 하였다. 그 결과, 황제는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에서의 주교 서임과 관련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 안에서만큼은 주교 서임권이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보름스 협약의 이행을 확정하기 위해 갈리스토 2세는 1123년 3월 18일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엄숙하게 보름스 협약 내용을 승인했으며, 여기에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축첩 등의 범죄를 금지하고 징계하는 몇 가지 처벌조항을 통과하였다. 또한 중세기에 교회의 요청으로 특별한 날 또는 일정한 시기에 휴전하던 관습인 ‘하느님의 휴전’(Truga Dei)을 어기고 싸운 이들이나 교회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 교회 문서를 위조한 자에 대해서도 처벌하는 조항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자들에게 허락한 대사를 재차 확인하였으며, 주교는 재속 사제 뿐만 아니라 교구 내의 수도 사제에 대해서도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규정하였다.
갈리스토 2세는 재임 말년에 캄파냐에 대한 교황의 통치력을 재확립한 동시에 오랫동안 분쟁거리였던 아를 교구에 대한 비엔 교구의 우위권을 확립하는데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을 재건하였다. 하지만 로마 귀족들 간의 끊임없는 알력과 교황청 안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불신이 쌓여가고 있었고, 1124년 12월 13일 사망하였다.
그리고 칼리스토 2세의 사망과 함께 로마 귀족들 간의 끊임없는 알력과 교황청 안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불신이 쌓인 것이 폭발하고 말았다. 우르바노 2세와 파스칼 2세가 재임했던 시절에 추기경단에 이탈리아인 성직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로마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은 갈리스토 2세가 재임 말년에 서임한 프랑스인 추기경들 및 부르고뉴 추기경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탈리아인 추기경들 입장에서 보면, 서임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비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은 위험한 개혁가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특히 교황청 상서원장 아이메리크 데 보르고네 추기경이 이끈 비이탈리아인 출신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자신들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하기로 이미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추기경단을 나눈 두 파벌 모두 로마의 귀족 가문들에게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124년 무렵 로마에는 두 개의 큰 집단이 등장해 정계를 주릅잡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콜로세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프란지파니 가문으로 비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을 지원했다. 반면 테베레 섬과 마르켈루스 극장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이탈리아 추기경들을 지원했다. 양측은 교회법에 따라 3일 이내에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나중에 프란지파니 가문은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인 람베르토를 사람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교황 선거 날짜를 미룰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민심은 산 스테파노 인 첼리오몬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인 삭소 데 아냐니를 후임 교황으로 이미 점찍어놓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2월 15일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이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의전사제인 람베르토 스칸나베키가 새로운 교황 호노리오 2세로 선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아이메릭 추기경과 레오 프란지파니는 로마 시장 우르바노를 포함한 피에를레오니 가문과 좋지 않은 관계였던 이들에게 접촉하여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결국 테오발도를 추대했던 이들마저 그를 포기하면서, 호노리오 2세만이 교황좌를 요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로 교황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호노리오 2세는 추기경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교황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직후 다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1124년 12월 21일 공식적으로 즉위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 황제와 대립하였다.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임종 직전 자신의 영토를 교황에게 양도하였는데, 하인리히는 이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1116년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그리고 토스카나의 도시국가들과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령한 지역마다 즉시 자신의 대리인을 세워 간접 통치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자 호노리오 2세는 이에 맞서 토스카나 지역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알베르토를 토스카나 후작에 임명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임명한 토스카나 후작 콘라트 폰 샤이에른에 맞서도록 하였다. 여기에 더해, 하인리히 5세는 보름스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호노리오 2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편 서임권 논쟁을 틈타 황제에 의해 서임된 주교들은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황제의 묵인 아래 지역 교회의 재산들을 수시로 강탈해갔다. 이에 참다 못한 각 지역 교회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최종적으로는 1125년 5월 23일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면서 이러한 다툼은 종식되었지만, 호노리오 2세는 곧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권력 투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 하인리히 5세는 사후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호엔슈타우펜을 지명하였다. 독일의 제후들 중 친교회적 성향을 지닌 이들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그러한 이유로 프리드리히가 하인리히 5세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특사로 파견 나온 제라르도 추기경과 로마노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신성 로마 제국의 대상서국장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아달베르트의 주재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작센 공작 로타르를 독일의 새 왕으로 선출하였다. 로타르의 요청에 따라 교황 특사로 파견된 제라르도 추기경은 두 명의 주교와 함께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의 재가를 받아냈다. 이는 실로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는데, 일찍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거 결과를 교황에게 재가를 받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큰 성과를 올린 호노리오 2세는 로타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위해 그를 1126년 7월경 로마로 초대하였다. 로타르는 호노리오 2세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보름스 협약에 따라 주교 선출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교에 대한 임명식도 축성식 이후에 하기로 하였으며, 황제에 대한 맹세도 충성이 아니라 존경으로 대체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로타르는 당장 로마를 방문할 상황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콘라트 호엔슈타우펜이 반란을 일으켜 1127년 12월 스스로 독일 왕을 칭한데 이어, 1128년 7월 29일에는 이탈리아 몬차에 가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의 주재로 소집된 독일 주교회의는 콘란트를 파문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 결의는 1128년 4월 22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로마에서 소집된 시노드에서 호노리오 2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호노리오 2세는 크레마의 요한을 피사로 보내 콘라트를 독일 왕으로 추대한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를 파문하기 위한 시노드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콘란트는 외부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졌으며, 로타르는 무사히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가 있었다.
한편 로타르의 참모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크산텐의 노르베르토는 새로운 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를 설립하기 위해 1126년 초에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의 재가를 받았다. 한편 호노리오 2세는 즉위 후 당명한 문제 중의 하나는 사병들을 시켜 농부들과 여행자들을 괴롭히는 캄파니아 지역의 남작들을 처벌하는 문제였다. 1125년 교황의 군대는 체카노의 영주들을 평정하였다. 교황의 병사들은 마엔차와 로카세카, 트레비넬라치오를 포함해 여러 도시를 접수하였다. 1128년 호노리오 2세는 다시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성공적으로 세니를 점령하였다. 세니 남작은 전투 와중에 전사하였다. 호노리오 2세가 특히 주목한 곳은 과거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요새가 있는 푸모네였다. 요새는 이 지역 귀족들이 대립교황의 명의로 이 요새를 차지한 이후로 계속 그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는데, 10주에 걸친 교황군의 공성전 끝에 결국 1125년 7월 함락되었다. 호노리오 2세는 푸모네를 접수하자 먼저 치안을 안정시키도록 한 다음 반역자였던 이전의 소유주들에게 요새를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를 몬테카시노에서 데려올 것을 명령하였다. 이후 호노리오 2세는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장인 오데리시오 디 상로에게 관심을 돌렸다.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 시절부터 호노리오 2세는 나름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던 항상 오데리시오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호노리오 2세는 자신과 자신을 따르던 수행원들이 산타 마리아 인 팔라라 성당에 묵을 수 있도록 오데리시오 수도원장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본래 이것은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들이 오래 전부터 누려온 특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데리시오는 이를 거부했으며, 호노리오 2세는 자신이 받은 모욕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호노리오 2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후 1125년 오데리시오가 약간의 재정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한 것을 거절하는 것으로 복수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오데리시오는 또한 뒤에서 호노리오 2세가 농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조롱하고 다니기도 했다.
한편 호노리오 2세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도회 수사들 외에 야심으로 가득하고 세속의 영달에 관심을 쏟은 모기오의 폰스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클뤼니 수도원도 처리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폰스는 1122년 동료 수사들에 의해 수도원에서 쫓겨났다가 레반트 지역에서 막 돌아온 상황이었다. 1125년 그는 무장한 추종자들을 대동한 채 수도원을 공격해 장악한 다음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금은보화를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수사들과 마을 주민들을 하루하루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클뤼니 수도원에서의 무법 사태 소식을 들은 호노리오 2세는 즉시 폰스를 파문하고 수도원장직에서 파면하는 동시에 그가 로마에 와서 재판에 출석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교황 특사를 파견했다. 폰스는 교황의 소환 명령에 따랐으며, 1126년 공식적으로 수도원장직에서 파면당해 감옥에 투옥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호노리오 2세는 몽부아시에의 베드로를 클뤼니 수도원의 새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이내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프랑스 주교들 간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주창한 교회 개혁에 크게 영향을 받은 파리 교구장 에티엔 주교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왕권의 간섭을 막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였다. 그러자 루이 6세는 에티엔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그의 교회 개혁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런 다음 에티엔의 교회 개혁에 합류한 상스 대주교 앙리를 다음 표적으로 삼았다. 루이 6세는 앙리 대주교에게 성직매매 누명을 뒤집어씌워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또 다른 대상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호노리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왕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교회의 독립을 지키려는 두 주교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라바르댕의 힐데베르트도 프랑스 왕의 압력을 받게 되자 호노리오 교황은 르망의 주교였던 힐데베르트를 1125년 투르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1126년 루이 왕은 힐데베르트가 투르 대주교가 되는 것에 반대하며, 자신이 내세운 후보자들 중 한 사람이 대신 대주교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힐데베르트는 자신이 교구장으로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로마에 상고가 계속되는 것에 대해 호노리오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왕의 행동에 맞서 프랑스 주교들은 파리 교구에서의 성무 정지를 의결했고, 1129년 루이 왕은 호노리오에게 편지를 써서 성무 정지를 유보하게 하였다. 이 소식에 발끈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역시 호노리오 2세에게 보냈지만, 호노리오 2세는 1130년 상리스의 스테판에게 루이 왕과 화해하라고 압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앙리 상리에는 왕으로부터의 추가적인 간섭 없이 대주교로서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호노리오 2세는 교황으로서의 재임 말년에 루이 6세와 주교들 사이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1127년 호노리오 2세는 브르타뉴 지방의 범죄를 뿌리뽑기 위한 라바르댕의 힐데베르트 대주교가 주재한 낭트 시노드의 결의사항을 확인했다. 같은 해 호노리오 2세는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굴복시키는데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아랍 해적들로부터 끊임없이 피해를 입는 레랭 제도의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장려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앙주의 풀크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노르망디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자 이 사태에 개입했다. 렌리 1세는 풀크의 딸인 앙주의 시빌라와 노르망디 공작의 아들이자 자신과 6촌 관계에 해당하는 윌리엄 클리토가 혼인하는 것에 반대했다. 두 사람이 혼인을 무르는 것을 거부하자, 호노리오 2세는 풀크와 그의 사위를 파문하고 그의 영지 내에서의 성무 집행을 정지하도록 하는 강수를 두었다.
다시 몬테카시노의 일로 눈을 돌린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시오가 수도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돈을 착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공개적으로 그를 수사가 아니라 강도라고 부르면서 맹비난하였다. 그리고 아퀴노 백작 아테눌프가 오데리시오가 교황좌를 노리고 있다고 고발하자,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시오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로마로 출두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오데리시오는 세 차례나 교황의 소환에 응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호노리오 2세는 1126년 사순 시기에 오데리시오를 수도원장직에서 파면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오데리시오는 자신의 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수도원에서 수도원장로서의 직무를 계속하다가 결국 파문당했다. 그러자 카시노 주민들이 강제로 수도원에 쳐들어가 오데리시오에게 수도원장직에서 물러나라는 시위를 하였다. 압력을 견디다 못한 수사들은 결국 니콜로 수사를 새 수도원장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기회에 베네딕도회를 완전히 굴복시키기로 마음 먹은 호노리오 2세는 니콜로의 수도원장 선출은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밝히고, 카푸아에 있는 수도원 분원의 세니오렉투스를 새 수도원장로 다시 선출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수사들을 분개시켰다. 이와중에 수도원은 오데리시오를 지지하는 이들과 니콜로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 파벌이 나뉘어 폭력 사태가 빚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국 호노리오 2세는 오데리이소를 아빠스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니콜로마저 추가로 제명하였다. 이어서 그는 수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직접 1127년 세니오렉투스를 수도원장으로 서임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사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몬테카시노 일을 처리한 후 호노리오 2세는 이탈리아 남부로 관심을 돌렸다. 아풀리아 공작 굴리엘모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사촌 루제루 2세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령을 차지하였다. 루제루는 굴리엘모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지만, 호노리오 2세는 굴리엘모가 사후 자신의 영지를 성좌에 양도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호노리오 2세는 1127년 교황군이 아르피노에서 남작의 군대와 싸워 패퇴당하자마자 루지에로가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는 이탈리아 현지의 노르만족이 루지에로와 손잡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베네벤토로 길을 떠났다. 호노리오 2세가 베네벤토로 가는 동안 루제루는 아풀리아 공국을 신속하게 점령한 다음 호노리오 2세에게 푸짐한 선물을 보내 그에게 자신을 아풀리아의 새 공작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을 인정한다면 그 대가로 트로이아와 몬테푸스코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노르만족이 한 명의 지도자 아래 통합되어 그 힘이 팽창되는 것을 염려한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에게 즉시 이탈리아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리하여 1127년 11월 호노리오 2세가 공식적으로 루지에로를 파문하자, 루지에로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많은 노르만족 지방 영주들이 즉시 교황 편에 가담하였다. 루지에로는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돌아가던 중에 병사들이 베네벤토를 위협하게끔 사주하였다. 한편 호노리오 2세는 카푸아의 새 공작이 된 로베르토 2세와 동맹을 맺었다. 호노리오 2세는 로베르토 2세를 카푸아의 공작으로 임명한 다음 함께 루지에로에 맞서기로 결의하였다.
1128년 5월 시칠리아에 돌아온 루지에로 2세는 호노리오 2세가 이끄는 교황군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피하면서 교황령의 근거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양측은 브라다노 강 둑에서 서로 마주쳤지만, 루지에로 2세는 교황군이 곧 와해될 것임을 예상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교황의 동맹군 일부가 이탈하여 루지에로 2세에게 투항하였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호노리오 2세는 자신의 믿음직한 심복인 아이메릭 추기경을 첸시오 2세 프란치파네와 함께 사절로 보내 루지에로 2세와 협상하도록 하였다. 양측 간의 협상 끝에 호노리오 2세는 루제루 2세에게 신앙 고백과 충성 맹세를 하는 조건으로 아풀리아 공작령 승계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와 협상을 타결한 후, 베네벤토로 가서 카푸아 공작 로베르토 2세의 이익을 보호해주기로 약조한 다음 1128년 8월 22일 베네벤토 근처 사바토 강에 놓인 마조르 다리 위에서 루지에로 2세와 만났다. 그곳에서 호노리오 2세는 공식적으로 루지에로 2세에게 아풀리아 공작령을 하사하였으며, 두 사람은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령 사이에 평화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감스럽게도 호노리오 2세는 로마에 막 돌아왔을 때, 베네벤토의 귀족들이 교황이 임명한 총독을 살해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크게 진노한 호노리오 2세는 베네벤토를 즉각 응징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베네벤토 주민들은 그에게 용서를 구하며 새 총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호노리오 2세는 마음을 돌려 제라르도 추기경을 새 총독으로 보냈으며, 1129년 베네벤토를 재차 방문했다. 그리고 과거 주민들이 추방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거부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한 후 성전기사단의 설립 인가를 허가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종주권자로서 보두앵 2세가 왕으로 선출된 것을 재확인하고 그를 성전 기사단의 후원자로 지명하였다. 호노리오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는 다른 제후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군웅할거를 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다.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간의 오랜 재치권 분쟁은 호노리오 2세에게는 항시 근심거리였다.
호노리오 2세는 전통적으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발렌스의 베르나르의 관할이었던 일부 주교좌에 대한 티레의 새 대주교인 말린의 기욤의 권리 주장을 지지하였다. 베르나르는 일부 주교좌에 대한 자신의 관할권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자 기욤은 로마로 가서 호노리오 2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교황은 교황 특사를 팔레스타인에 다시 보내 베르나르에게 순순히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지시했고, 40일 동안 여러 주교들이 기욤에게 순명을 서약하였다. 베르나르는 호노리오의 지시를 따르기를 한사코 거부했지만, 호노리오 2세가 곧 몸져누워 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후 베네벤토 주민들의 불충실함을 잊지 않았던 호노리오 2세는 루제루 2세에게 1130년 베네벤토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미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로 병상에 누운지 오래였다. 그러자 추기경 에메릭과 프란지파니 가문은 향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호노리오 2세는 프란지파니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 있는 산 그레고리오 마뇨 알 첼리오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노리오 2세가 사망했다는 소문에 피에르레오니 가문은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를 차기 교황으로 밀기로 내정하여 그의 선출을 무력으로 강요하기 위해 임종을 앞둔 호노리오 2세가 있는 수도원을 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메릭 추기경의 계획은 1130년 2월 13일 저녁 호노리오 2세가 사망했을 때 결실을 맺지 못했다. 프란지파니를 지지하는 추기경들은 즉시 수도원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다음날 통상적인 관례에 반하여 호노리오 2세의 시신이 어떠한 의식도 없이 수도원에 서둘러 안장되었다. 그리고 추기경들은 신중하게 골라 2월 14일 부제급 추기경인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그가 바로 교황 인노첸시오 2세다. 이와 동시에 추기경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피에르레오니 가문의 지지자들로써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를 선출하여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 등극시켜 교회가 또 한 번 분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쌍방이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졌다. 하지만 아나클레토의 지지자들은 로마를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세력이 뭉쳐 강대했기 때문에 인노첸시오 2세는 하는 수 없이 북쪽으로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나클레토가 로마를 손아귀에 넣자 인노첸시오 2세는 피사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 후 제노바를 거쳐 프랑스로 항해하였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프랑스 여론을 움직여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받들도록 종용하였다. 같은 해 10월 그는 뷔르츠부르크 시노드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주교들로부터 교황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131년 1월 인노첸시오 2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1세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1132년 8월 로타르 3세는 아나클레토를 몰아내고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받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이탈리아 원정 계획에 착수하였다.
아나클레토와 그의 지지자들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결사적으로 농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1133년 6월 4일에 로타르 3세의 황제 대관식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외에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황제는 교황좌의 봉신이라는 교황청파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황제로 등극한 로타르는 교황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토스카나의 마틸다의 영토를 얻었다.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떠나자 인노첸시오 2세도 로마를 재차 떠나야만 하였다.
1136년 로타르 3세가 2차 원정을 감행했으나 이번에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인노첸시오와 아나클레토 간의 오랜 분쟁은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인노첸시오 2세는 자신의 조카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와 동생 피에트로 파파레스키를 각각 1134년과 1142년에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또 다른 조카 킨조 파파레스키 역시 인노첸시오 사후 1158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또한 교리 문제에 있어서 인노첸시오 2세는 피에르 아벨라르와 브레시아의 아르날도의 주장들을 단죄하였다
1139년 7월 22일 갈루초에서 루제루 2세의 아들인 아풀리아 공작 루제루 3세는 천여 명의 기사를 이끌고 교황군을 기습 공격하여 인노첸시오 2세를 사로잡았다. 1139년 7월 25일 인노첸시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의 왕권과 재산을 인정하는 내용의 미나노 조약에 서명했다.
한편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는 인노첸시오 2세가 피에르 드 라 샤트르를 부르쥬의 새 대주교로 지명된 것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피에르는 1142년 프랑스로 귀국했으나 루이 7세가 그가 교구령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자 샹파뉴 백작 티보 2세에게 의탁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행동에 대해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2년 동안 양측이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중재하고 나섰다. 1143년 인노첸시오 2세는 루제루 2세와 맺은 미나노 조약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고 교황령인 베네벤토로 행진하였다. 나중에 미나노 조약의 내용은 재확인되었다. 1143년 교황이 임종을 앞두자 로마 코뮌이 교황권에 맞섰으며, 인노첸시오 2세는 1143년 9월 24일 사망했고 뒤를 이어 교황 첼레스티노 2세가 즉위했다.
3.1.6. 로마 코뮌과의 대립
첼레스티노 2세는 즉위하자마자 가경자 베드로와 클뤼니 수사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리지외의 아르눌프에게 축하의 말을 들었다. 또한 숙고 끝에 로마 원로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비록 그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전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통치를 하였다. 그는 시칠리아 국왕 루제루 2세에 대한 인노첸시오 2세의 양보를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에 반대하여 플랜태저넷 가문의 잉글랜드 왕위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과거 인노첸시오 2세가 스티븐 왕의 동생인 블루아의 헨리 주교에게 부여했던 교황 특사로서의 권리를 갱신해주지 않았다. 첼레스티노 2세는 예루살렘의 성 마리아 독일 병원을 내려준 구호 기사단 뿐만 아니라 성전 기사단에게도 우호적이었다.
교황으로서 그의 주요 활동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를 사면해 준 일이었다. 1142년 이례로 부르쥬의 대주교직에 대해 간섭한 일로로 인노첸시오 2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행동에 대해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2년 동안 양측이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중재하고 나섰고, 첼레스티노 2세가 선출되면서 베르나르도와 티보 2세는 함께 새 교황에게 상고하였으며, 루이 7세는 성무 금지 철회를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루이 7세는 피에르를 부르쥬의 합법적인 대주교로 인정하는데 동의했으며, 그 답례로 인노첸시오 2세는 성무 금지를 철회하였다.
첼레스티노 2세는 1144년 3월 8일 팔라티노 언덕 위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노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라테라노 대성전 남쪽 십자석에 매장되었다.이후 3월 9일 교황청 상서국장이었던 게라르도 카차네미치 달오르소를 새로운 교황 루치오 2세로 선출한다.
루치오 2세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상적인 교회 사업 운영에 몰두하였다. 그는 성 에드문도 수도원에 세속 권위에 대한 복종 면제를 포함하여 잉글랜드의 주교들과 수도원들, 성당들에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그는 힌크마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여 잉글랜드로 보내 자신을 관구장 주교로 승격시켜 달라는 세인트데이비스 주교 버나드의 요청을 검토하고, 요크 대주교 윌리엄에게 팔리움을 주게 하였다. 잉글랜드의 정치적 상황에 관해서 그는 잉글랜드의 왕위에 대한 마틸다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즉위 초반에 루치오 2세는 루카의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루카와 피사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성의 영주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루치오 2세는 1144년 3월 18일 금화 10파운드를 받고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지켜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루치오 2세는 성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아폰수 1세 국왕이 레온 왕국에서 떨어져나온 신흥국가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루치오 2세에게 과거 인노첸시오 2세에게 했던 것처럼 봉건적 주종관계를 맺어 그의 신하로서 충성 맹세를 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루치오 2세에게 사도좌의 보호와 지지를 얻는 대가로 매년 4온스의 금을 바쳤다. 루치오 2세는 주종관계를 맺되 자신이 직접 로마까지 가서 하지는 않게 해달라는 아폰수 1세의 요청을 승낙했지만, 그를 포르투갈의 왕이 아닌 포르투갈의 지도자(Dux Portugallensis)로서 인정했다. 왕의 칭호를 부여받은 것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 때였다.
루치오 2세는 사적으로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친구이자 그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두 사람은 1144년 6월 체프라노에서 만나 루지에로 2세가 성좌의 봉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루치오 2세는 카푸아 공작령을 교황령에 반환하라는 요구를 했고, 루지에로 2세는 그 대가로 교황령의 남부 일부를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 루치오 2세는 추기경들의 조언에 따라 루지에로 2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루지에로 2세는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자신의 아들인 아풀리아 공작 루지에로 3세에게 캄파니아를 침공하라고 지시했다. 부왕의 요청을 받은 루지에로는 자신의 휘하 장군인 살레비아의 로베르토에게 군사를 주어, 페렌티노까지 북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시칠리아군의 군세에 로마는 굴복하였다. 1144년 9월 루치오 2세는 잠정적으로 7년 간 휴전하자는 루지에로 2세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대신 노르만족은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로 후퇴해 베네벤토와 다른 교황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편 루치오 2세가 시칠리아군에 굴복한 것을 기회로 로마 원로원은 교황의 세습 권력을 빼앗아 자신들의 권력과 독립을 회복하고 로마에 혁명주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운동에 가담한 주요 인사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었으며, 도시 귀족들은 중립을 지켰다. 인노첸시오 2세 치세 동안 교황이 모든 세속적 권력을 거머쥐었으며, 루치오 2세가 재위 초반기부터 상당한 정치력과 단단한 기개로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캄피돌리오 언덕을 떠나거나 교황의 교도권에 고분고분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제 루치오 2세가 패배하면서 원로원은 동력을 얻어, 옛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와 형제지간인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의 주도로 교황이 임명한 대표들을 내쫓고 로마 코뮌을 세움으로써 루치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교황이 정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단지 교회세와 자발적인 공물만 받는 것에 그쳐야 한다고 요구했다. 당초에 루치오 2세는 루지에로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가 자신의 왕권을 여전히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 루지에로 2세는 군사 원조를 보류하였다. 그러자 독일왕 콘라트 3세에게 대신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루치오 2세는 1144년 12월 그에게 편지를 써서 원로원과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에 맞서기 위한 군사 원조를 간청하였다. 루치오 2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도움을 받아 콘라트에게 보내 속히 이 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다.
콘라트의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루치오 2세는 아예 자기 손으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로마 귀족들, 특히 프란지파니 가문에 의지한 그는 1145년 1월 31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요새를 그들에게 주고 팔라티노 언덕의 남쪽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도록 하였다. 포로 로마노는 전쟁터로 변했으며, 루치오 2세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갈 때의 혼란을 막기 위해 1145년 1월 20일 산 사바 성당의 아빠스를 서품하였다.
결국 루치오 2세는 소규모 병사들을 거느리고 원로원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조르다노에 의해 격퇴당하고 만다. 비테르보의 고드프리에 의하면, 그는 이 전투 중에 돌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1145년 2월 15일 가까운 프란지파니 요새의 보호를 받은 산 그레고리오 마뇨 알 첼리오 성당에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추기경들은 선뜻 자기들 중 한명을 교황으로 선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결국 산 아타나시오 알레 트레 폰타네 수도원장인 베르나르도 데이 파가넬리를 선출하게 되었다. 베르나르도 역시 처음엔 자신이 추기경이 라니란 점으로 교황 자리를 고사하려고 했으나 결국 받아들여 교황 에우제니오 3세로 즉위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지고한 위치에 오르기는 했으나 실상은 그의 자리는 당시 아무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서방 교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성직자이자 교황의 세속 권력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친구이자 제자였다. 당초에 베르나르도는 에우제니오 3세가 천진하고 순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에우제니오 3세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요소를 오히려 이용하여 왕도 정치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에우제니오 3세는 재위기간 동안 거의 로마에 머무르지 못했다. 그가 주교로 성성(成聖)되기 위해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40km 떨어진 파르파 수도원에 갔을 때,로마에서는 교황의 세속 권력에 대적한 브레시아의 아르날도의 영향을 받은 시민들이 옛 로마 법률을 부활시켜 로마 코뮌을 세우고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를 파트리키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에우제니오 3세는 티볼리와 로마와 반목하던 다른 도시들,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지원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교황의 위세가 다시 기세등등해졌고, 1145년 12월 로마 코뮌은 에우제니오 3세가 로마에 들어오는 허락하고 성탄절을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티볼리를 적대시하는 로마 코뮌의 위험한 협약을 맺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1146년 3월 다시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비테르보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가 시에나로 갔고, 나중에는 프랑스로 갔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튀르크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12월 프랑스의 루이 7세 앞으로 칙서 《Quantum praedecessores》를 보내 그에게 십자군 원정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 1146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대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와 많은 귀족들도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베르나르도의 웅변술에 감복하였다.
에우제니오 3세는 유럽 대륙을 전전하며 파리, 랭스(1148년 3월), 트리어(1147년)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쓴 글들을 심사숙고한 끝에 인가하였다. 1148년 6월 에우제니오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비테르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는 1149년 4월 8일 투스쿨룸의 프토레매우스 2세의 요새로 피신하여 그곳에 머물며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루이 7세와 그의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만남을 가졌다. 그는 그곳에서 11월 7일까지 머물렀다. 1149년 11월 말에 그는 시칠리아 군대의 힘을 빌려 로마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으나, 공화주의자들의 거센 반대로 곧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150년 6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의 반란군에 맞서 교황을 돕겠다고 약속했으나 1153년 7월 8일 에우제니오 3세가 티볼리에서 사망함으로써 이행되지 못했다. 로마 시민들은 교황이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항상 인지하고 있었지만, 교황의 세속 권력을 주장한 에우제니오 3세의 입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교황의 개인적 인품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그런 이유로 에우제니오 3세의 시신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바티칸에 안장되었다.
7월 12일 추기경단의 수장인 코라도 델라 수부라가 고령의 나이에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로 선출되었다. 아나스타시오 4세는 짧은 기간 재위했지만 평화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교황 네 명의 치세 동안 계속되었던 마그데부르크의 주교 임명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놓고 프리드리히 1세 황제와 타협함으로써 오랜 싸움을 끝냈다. 그는 1140년에 윌리엄 피츠허버트를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시토회의 강한 반대로 오랫동안 주교좌에 오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시오 4세는 그에게 팔리움을 내려주었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는 1154년 12월 3일에 사망하였다.
다음날 알바노 교구장 추기경인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가 새 교황 하드리아노 4세로 선출되었다. 로마에 돌아온 니콜라스는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다. 아나스타시오 4세가 사망한 후, 1154년 12월 3일 니콜라스가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가 된 그는 곧바로 로마의 반교황파의 지도자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도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55년 로마 시내에 난동이 일어나 추기경이 백주대낮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드리아노 4세는 성지 주일 바로 전날에 로마 전역에 성무 정지를 부과하는 전례 없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 인하여 순례자 수가 크게 감소해 로마 경제에 악역향이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원로원은 즉각 아르놀도를 추방했다. 그러자 교황은 최근에 도착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협조를 얻어 아르놀도를 처형하고 로마에 내린 성무 정치 조치를 철회하였다.
115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아풀리아 지역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시칠리아 국왕에 적대적인 시칠리아 내부 반란군과 접촉한 동로마군은 해안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내륙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약간 흡족해하면서도 걱정스럽게 상황을 주시하였다. 사실 교황령은 실질적인 군사 행동의 위협을 받고 도움을 요청한 때를 제외하고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족과 전혀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남쪽 국경에 동로마 제국을 두는 것이 성가신 노르만족과 계속 씨름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누엘 황제와의 협상을 서둘러 진행하여 동맹을 맺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캄파니아에서 용병들을 모집했다. 한편 마누엘은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꿈꾸었으나 그것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일치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1054년 이래 계속 분열 상태로 이어져왔던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협상이 곧 진행되었다. 그동안 교황군과 동로마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족에 대항한 반란군과 합류하였고, 많은 도시들이 이들의 군사력에 굴복하거나 뇌물에 넘어가 항복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순전히 이해타산 때문에 동맹이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동로마군의 지휘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오만한 성격의 인물로 일부 동맹국을 무시하며 소외시켰고, 이에 분개한 시칠리아의 반란군 로리텔로의 로베르토 백작은 그와 말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두 사람이 화해하기는 했으나, 연합군의 기세가 약간 꺾이게 되었다. 설상가상 미하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비록 그의 오만함 때문에 군사 행동이 약간 늦추어졌지만, 어쨌든 뛰어난 군인이었던 미하일의 부재로 연합군은 큰 자산을 잃었다. 브린디시 전투를 전환점으로,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 양쪽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합군에 복무하고 있던 용병들은 자신들의 몸값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그들은 집단으로 탈영했다. 심지어 지방 귀족들마저 차츰 떠나기 시작하면서 교황령-동로마 연합군은 수적으로 열세가 되었다. 시칠리아군은 해전에서 동로마 해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고 동로마 지휘관을 생포하였다. 브린디시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는 완전히 끝났으며, 1158년 동로마군은 이탈리아에서 물러났다.
동로마 제국과의 영속적인 동맹에 대한 희망 또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일치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드리아노 4세가 내건 조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마누엘은 그 대가로 로마 황제인 자신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서방과 동방 모두 상대방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교황의 세속 권력이 지닌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고, 마누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멀리 로마에 있는 주교의 권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마누엘은 로마 교회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하드리아노 4세는 그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로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거래는 달성하기 힘든 것으로 판명되었고, 두 교회는 계속 분열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한편 하드리아노 4세는 잉글랜드 국옹 헨리 2세의 아일랜드 정복에 대해 교황 칙서 《마땅히》(Laudabiliter)를 보내 아일랜드를 정복해 그곳에 가톨릭 제도에 따라 교회의 통치와 개혁을 추진해 아일랜드 섬 전체를 복음화할 것을 촉구했다. 이 칙서의 진정성에 대해 역사학자 에드먼드 커티스는 “역사상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윈체스터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아일랜드 침공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가 반대하여 원정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일랜드에는 이 같은 소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걸쳐 서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강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에른스트 F. 헨더슨은 아일랜드 침공을 요청한 교황 칙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P. S. 오헤거티는 순전히 학문적으로 봤을 때 이 칙서가 과연 존재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4세의 후임자들인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교황 루치오 3세가 이 칙서의 내용을 부정하는 일도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하드리아노 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국가의 통치 아래 두려 하였고, 하드리아노 4세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프리드리히 1세와 대치하였다. 그러던 중 1157년 10월 브장송에서 열린 회의에서 교황 특사들은 프리드리히 1세에게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서찰을 전했는데, 이 서찰에 적힌 문구 하나가 큰 분란을 일으켰다. 문제가 된 단어는 황제에게 수여된 특혜들을 언급한 beneficia인데, 원래 해당 서찰 내용상 대관식으로 이해되는 이 단어를 독일인 법관이 영주와 봉신 간의 봉건적 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 줄 알고 번역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교황의 봉신이라는 말을 듣고 격분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려고 했으나 1159년 9월 아나니에서 사망하였다.
3.1.7. 교황령의 독립
9월 7일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인 롤란도 반디넬리가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일부 추기경들은 옥타비아누스 추기경을 대립교황 빅토르 3세로 내세워 신성 로마 제국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상황은 알렉산데르 3세에게 매우 위기였는데, 당시 기록들을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내세운 대립교황이 포르투갈, 시칠리아, 스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왕국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161년 헝가리의 게저 2세가 알렉산데르 3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는데 동의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오직 그만이 가장 으뜸가는 영적 지도자로서 성직 서임식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알렉산데르 3세의 합법성이 점점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곧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2세도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에 알렉산데르 3세는 어쩔 수 없이 교황으로서의 재위기간의 많은 세월을 로마 외의 지역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즉위 4년인 1163년 알렉산데르 3세는 불법적인 성직록 분배와 성직자들의 고리대금 및 십일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고위 성직자 및 사제들을 투르 지역 공의회에 참여해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는 발트해 동부 지역, 즉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선교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교황이다. 그는 1164년 스웨덴에 웁살라 대교구를 설정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에스킬을 룬드의 대주교로 서임했다. 또한 베네딕도회 수사 풀코를 에스토니아의 주교로 서임했다. 1171년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핀란드 교회 상황에 대해 연설했는데, 그는 핀란드인들이 평소에는 성직자들을 괴롭히면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만 하느님을 찾는다고 개탄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견제했을 뿐만 아니라 1170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 의해 살해당하자 1173년에 그를 시성함으로써 헨리 2세를 굴복시켜 공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도록 만들었다.그리하여 토머스 베켓은 1161년 시성된 에드워드 참회왕에 이어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된 두 번째 잉글랜드인이 되었다. 이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3세는 1172년 헨리 2세의 아일랜드 영주 지위를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3세와 프리드리히 1세가 내세운 대립교황 빅토르 3세(그리고 이후 이어진 대립교황 파스칼 3세와 대립교황 갈리스토 3세) 간의 논쟁은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가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는 마침내 1177년 베네치아 조약에서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1278년까지 교황령의 영토 변화 |
또한 이 베네치아 조약으로 교황령이 자리잡은 라치오 지역 부근은 이탈리아 왕국에서 독립하였고, 로마냐 등의 나머지 지역은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78년 3월 12일 알렉산데르 3세는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자 대립교황 갈리스토 3세 역시 1178년 8월에 알렉산데르 3세에게 항복하였다.
1179년 1179년 3월 알렉산데르 3세는 중세 교회의 중요한 세계 공의회들 중의 하나이자 11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 교부들은 대립교황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교황의 몇 가지 제안들을 실행에 옮겼는데, 그 중 가장 눈여겨볼 것은 교황 선출에 관한 규정이다. 규정은 추기경단에서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아야만 교황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5월 23일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 칙서 《Manifestis Probatum》을 발표하여 이미 1139년부터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던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의 왕으로 정식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포르투갈이 독립국이 되는데 있어 중요한 진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로마 코뮌은 알렉산데르 3세를 겁박해 로마를 내보냈으며, 이후로 알렉산데르 3세는 다시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했다. 1179년 9월 29일 일부 귀족들이 대립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3세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권력을 잡았으며, 대립교황은 1180년 1월 쫓겨났다. 1181년 알렉산데르 3세는 스코틀랜드의 일리엄 막 안리크를 파문하고 스코틀랜드 왕국 전역에 성무 금지 처분을 내렸다. 알렉산데르 3세는 1181년 8월 30일 치비타카스텔라나에서 사망했다.
3.1.8. 절정으로 향해가는 교황권
1181년 알렉산데르 3세가 사망한지 이틀 만에 교황으로 당시 추기경단장이었던 우발도 알루친골리가 루치오 3세로서 선출되었다. 그는 1181년부터 1182년 3월까지 로마에 거주했으나 로마 내에 교황에 반대하는 세력의 활동으로 인해 강제로 로마에서 쫓겨나 남은 재위기간을 발레트리, 아냐니, 베로나 등지를 전전하며 보냈다.루치오 3세는 재위기간 내내 신성 로마 제국과 항상 긴장 관계였다. 특히 고인이 된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남긴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대립하였는데, 이 논쟁은 1177년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 맺어진 베네치아 조약에서 미결 상태로 남아있었다. 1182년 황제는 교황청이 영지에 대한 권리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황제가 이탈리아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중에서 교황에게 1할, 추기경들에게 1할 등 총 2할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루치오 3세는 이에 찬성하지 않았고 이듬해 황제가 제안한 또 다른 타협안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1184년 10월 베로나에서 교황과 황제가 직접 만나 이야기해 봤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이처럼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갈등하는 사이 이단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만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1184년 루치오 3세는 《전멸을 위하여》(Ad abolendam)를 반포하여 황제가 허용함에 따라 교회의 사도적 권위에 따른 규정에 의거하여 이단에 맞선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도시들과 기타 영지들의 백작들과 남작들, 집정관들은 파문될 것이며, 파문된 지역에는 그 즉시 성무 금지 처분이 내려진다고 선언하였다.
그사이 루치오 3세와 프리드리히 1세 사이에 또 다른 갈등 요소가 생겼는데, 바로 1183년 트리어의 새 주교 선출을 놓고 교황이 내세운 후보인 카르덴의 풀마르와 황제가 내세운 후보인 비트의 루돌프 사이에 경쟁이 일어난 것이다. 루치오 3세는 1185년 프리드리히 1세의 후계자로 낙점된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의 대관식을 주재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황제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교황청과 제국 간의 불화는 이탈리아 정치 문제로 확대되었다.[14]
1184년 11월 루치오 3세는 베로나에 시노드를 소집해 카타리파와 파타리아, 발도파, 아르놀도파를 규탄하고 그들을 모두 이단으로 선언하며 파문하였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재판을 제정하지 않았다. 종교재판은 한참 후인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 때에 가서야 제정된 것이다.
1185년 9월 25일 루치오 3세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의 요청에 따라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와중에 베로나에서 사망했다. 11월 25일 밀라노 대교구장과 추기경인 우베르토 크리벨리가 교황 우르바노 3세로 선출되었다.우르바노 3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토스카나의 마틸다 여백작의 영지의 소유권 등을 비롯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격렬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우르바노 3세는 밀라노 대교구장직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 콘스탄체와 혼인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왕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교황에 반항적인 로마 원로원과 손을 잡고, 프리드리히 1세는 알프스 산맥의 통행을 차단하고 베로나에 있는 교황과 독일의 친교황파 인사들 사이의 모든 연락수단을 막아버렸다. 이제 우르바노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기로 결심했지만, 베로나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황제에 대한 파문이 선포되는 것에 반대하는 바람에 페라라로 철수하였다.
1187년 10월 19일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홧병으로 사망했다.10월 21일 새로운 교황으로 산타드리아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자 교황청 상서원장인알베르토 디 모라[15]가 그레고리오 8세로 선출되었다. 과거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전력으로 인해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이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8세는 교황 칙서 《Audita tremendi》를 발표하여 제3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그레고리오 8세는 피사로 가서 시민들에게 제노바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두 도시가 함께 연합 함대를 구성해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 달라고 설득하였다. 그는 피사로 가던 중에 루카에 들러 대립교황 빅토르 4세의 시신이 매장된 성당에게 그의 무덤을 빼라고 지시하였다.
그레고리오 8세는 교황으로 즉위한지 불과 57일 만인 1187년 12월 17일 피사에서 사망하였다.12월 19일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급 추기경인 파울리노 스콜라리가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즉위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멘스 3세는 로마 시민들이 직접 행정관을 선출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 총독 임명 교황의 권한으로 남기도록 합의함으로써 교황들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 반세기 동안 지속된 갈등을 치유하는데 성공했다. 1188년 5월 31일 그는 로마 시민들과 협약을 맺고 그토록 바랐던 로마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클레멘스 3세는 또한 숫자가 20명 이하로 대폭 감소된 추기경단을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는 총 세 차례(1188년 3월, 1189년 5월, 1190년 10월) 추기경 서임식을 거행해 30명 이상의 새 추기경을 서임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등, 서유럽 기독교 국왕들에게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1189년 4월 클레멘스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합의를 보았으나 프리드리히 1세가 1190년 소아시아에서 익사로 사망하자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임명 문제를 놓고 스코틀랜드 왕 일리엄 막 안리크와 논쟁을 벌였으며, 1188년 3월 13일에는 요크 대주교의 관할권에 있던 스코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 직접 로마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클레멘스 3세는 하인리히 6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는데 동의했으나 그를 견제하고자 그의 적수인 아풀리아 공작 루지에로 3세의 아들 탕크레디가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도 동의해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갈등이 한창이던 와중에 1191년 3월 27일 클레멘스 3세는 사망하였다.3월 30일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인 자친토 보보네가 교황 첼레스티노 3세로 선출된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로마 시민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들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투스쿨룸의 요새를 파괴하도록 허락하였다. 같은 해 말엽에 그는 시칠리아의 탄크레드에게 그의 숙모인 콘스탄체를 석방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콘스탄체는 하인리히 6세의 아내로 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으나 탄크레드에 의해 감금당했다. 탄크레드는 포로 교환을 하기 위해 콘스탄체를 데리고 로마로 길을 떠났다. 그는 하인리히 6세에게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협박했지만, 콘스탄체는 로마에 당도하기 전에 교황령 국경에 있던 독일인 병사들에 의해 풀려났다. 이후 탄크레드는 파문되기 일보 직전에 몰렸으나 마침 하인리히 6세도 똑같이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를 부당하게 감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6세는 피사에 머무는 동안 첼레스티노 3세에 의해 성사 참여를 금지당했으나 1198년 후임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처벌 조치가 해제되었다. 첼레스티노 3세는 레온의 알폰소 9세가 혈연 관계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혼인하자 이를 질책하였다. 그리고 1196년 알폰소 9세가 카스티야에서 무슬림들과 전쟁하던 중에 평화 관계를 맺자 또 한 번 질책하였다. 알폰소 9세가 카스티야의 베렌가리아와 두 번째 혼인을 하자 첼레스티노 3세는 결국 알폰소 9세를 파문하고 레온 왕국 전역에 성무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1198년 첼레스티노 3세는 튜턴 기사단을 기사 수도회로 공식 인가하였다.사망하기 전에 베네딕도회의 조반니 디 산 파올로 추기경을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고 교황직을 사임하려고 했으나 추기경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아 무위에 그쳤고, 1월 8일에 사망하였다. 새로운 교황으로 부제급 추기경으로 아직 마흔살도 되지 않았던 로타리오 디 세니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 선출되었다. 이는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에 선출되어 92살에 사망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1.9. 정점기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으로서 그는 자신의 책임감과 권위를 의식하고 통치를 시작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대거 고위 성직자로 임명하여 교황청의 행정부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실제로 교황령 안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정립하는 예비 단계였다. 이는 그의 단호한 행정 능력의 결과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많은 법령들을 반포하였으며, 6천 통의 서한을 보내고 교회법 학자들을 장려하였다. 한편 그의 눈에 1187년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한 사건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기독교 군주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군주들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는데 있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즉 다른 무엇보다도 세속의 군주들은 주교 선정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특히 베드로 세습령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교황의 영토인 교황령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해서는 안된다. 교황령은 일상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독일 왕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의 왕, 독일인들의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기를 기대했는데,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한 사람의 통치 아래 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교황령에게 있어 위협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4살짜리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인리히 6세의 미망인 콘스탄체는 자기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그녀는 인노첸시오 3세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몰아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1198년에 죽기 전에 그녀는 인노첸시오 3세를 어린 자기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명하였다. 그 대신 인노첸시오 3세는 시칠리아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권리는 과거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시칠리아 왕 구기에르무 1세 에게 굴복하면서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1198년 11월 교황은 어린 프리드리히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나중에 그는 프리드리히 2세와 헝가리 왕 임레의 미망인의 혼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1209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추종자 11명을 대동하고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새 수도회 요청을 허락받았고, 나중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사들은 로마에 들어오자마자 아시시의 주교 귀도를 만났는데, 귀도는 그들을 자신의 벗인 사비나의 주교급 추기경 조반니 디 산 파올로에게 소개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의 고해 신부였던 추기경은 프란치스코에게 금세 호의를 갖게 되었고, 그를 교황에게 소개하기로 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마지못해 다음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만나는데 동의하였다. 며칠 후, 교황은 그들을 비공식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고, 이후 그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하여 공식 수도회로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행자들에 대한 삭발례가 거행되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수십 년 전에 발도파 교도들이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가난의 이상을 폭력을 통해 실천하려 시도하려고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인준은 자칫 그들이 이단자로 몰릴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를 의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봤으나, 나중에 꿈에서 라테라노 대성전이 쓰러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프란치스코를 본 후로 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전승에 따르면 1210년 4월 16일 교황이 그러한 내용의 꿈을 꾸었다고 하며, 이후 프란치스코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작은 형제회’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회는 이후로도 어떠한 사유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포르치운쿨라에 본원을 둔 그들은 움브리아에서 설교한 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노첸시오 3세의 재임기간 동안 교황의 권력은 최고 수준으로까지 올라가 "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가 되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여겨졌으며, 왕들의 세속적 권위를 존중하되 교황인 자신의 영적 권위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모든 세속 권력이 교황을 통하여 군주들에게 위임되므로 군주들은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는 것처럼 교황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나라들의 정치 문제에 관여함으로써 교황직을 서유럽을 완전히 장악하는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하늘의 창공에 빛나는 두 개의 커다란 광채, 곧 낮을 지배하는 더 큰 광채와 밤을 지배하는 더 작은 광채를 두신 것과 같이, 그분께서는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보편 교회의 창공에 두 개의 커다란 영예직을 두셨으니, 더 큰 것은 낮과 같이 영혼을 지배하고, 더 작은 것은 밤과 같이 육신을 지배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교황의 권위와 왕의 권한입니다. 게다가 달은 그 빛을 태양으로부터 받고 실제로 크기와 질과 상태와 효과에서 태양보다 작은 것과 같이, 왕의 권한은 교황의 권위로부터 자신의 품위의 광채를 받습니다. 왕의 권한이 교황의 빛에 의존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빛으로 꾸며지고, 그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광채를 잃게 됩니다.[출처4]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후계자 논쟁이 벌어졌다. 하인리히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호엔슈타우펜 왕조 지지자들은 1198년 3월 하인리히의 동생 슈바벤 공작 필리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반면에 호엔슈타우펜 왕조 반대자들은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오토를 선출하였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필립을 지지했으며,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자신의 조카인 오토를 지지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이 한 명의 군주 아래 계속 통합되는 것을 막기로 하였다. 1201년 그는 오토 4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는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적대적인 관계였다. 오토는 보답으로 인노첸시오 3세의 어떤 요구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국이 혼란스러운 통에 인노첸시오 3세는 하인리히 6세가 임명한 안코나와 스폴레토, 페루자 등의 영주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1201년 7월 3일 교황 특사로 임명된 팔레스트리나의 귀도 추기경은 쾰른 대성당에서 사람들에게 오토 4세는 교황으로부터 독일왕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를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인노첸시오 3세는 토스카나 주 도시들에게 독일 황제의 이탈리아 지배에 맞서기 위한 토스카나 동맹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동맹에 참여한 도시들은 인노첸시오 3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1202년 인노첸시오 3세는 체링겐 공작에게 교령 《존경스러움》(Venerabilem)을 보내 황제는 교황이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교령은 유명해져서 나중에 《교회법대전》(Corpus Juris Canonici)을 통해 구체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독일의 제후들은 나중에 황제가 될 왕을 선출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제후들의 권리는 황제의 지위가 그리스에서 카롤루스를 기점으로 독일인들에게 옮겨진 이래 사도좌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고로 선출된 왕이 황제의 지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고 결정할 권리는 교황의 몫이다. 교황은 자신의 의무에 따라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하여 그에게 도유하고, 축복하며, 제관을 씌울 수 있듯이 그를 이단자나 이교도로 선언하고 파문할 수 있다.
만일 교황이 제후들이 선출한 왕이 황제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할 경우, 제후들은 새 왕을 선출해야 한다. 제후들이 이를 거부할 시 교황은 교회를 수호하는 또 다른 왕에게 황제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이중 선거의 경우, 교황은 제후들에게 서로 합의할 것을 권고해야 한다. 만일 제후들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들은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해야 한다. 교황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여 후보자들 중의 한 명을 지지해야 한다. 교황은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후보자의 자질만 보고 결정해야 한다.
고로 선출된 왕이 황제의 지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고 결정할 권리는 교황의 몫이다. 교황은 자신의 의무에 따라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하여 그에게 도유하고, 축복하며, 제관을 씌울 수 있듯이 그를 이단자나 이교도로 선언하고 파문할 수 있다.
만일 교황이 제후들이 선출한 왕이 황제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할 경우, 제후들은 새 왕을 선출해야 한다. 제후들이 이를 거부할 시 교황은 교회를 수호하는 또 다른 왕에게 황제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이중 선거의 경우, 교황은 제후들에게 서로 합의할 것을 권고해야 한다. 만일 제후들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들은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해야 한다. 교황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여 후보자들 중의 한 명을 지지해야 한다. 교황은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후보자의 자질만 보고 결정해야 한다.
교황이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필립이 나중에 개인적 다툼으로 인해 살해될 때까지 그를 쫓아내지 못했다. 자신의 등극을 이제 모두가 수용하자 오토는 과거 자신이 교황에게 했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내에 황제의 권력을 다시 행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까지 주장하였다. 독일과 시칠리아를 통합되어 황제의 권력이 더욱 막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는 새로 시칠리아의 왕 프리드리히를 지지하여 그로 하여금 오토에 대항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회복하게 하였다. 프리드리히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지지자들에 의해 정당하게 선출되었다.
오토와 프리드리히 양측의 충돌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오토는 과거 그의 적대자였던 필립과 맞섰던 잉글랜드 왕 존과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패배하고 이후 모든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가 1218년 5월 19일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2세가 모두에게 황제로 인정받았다. 한편 존 왕은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의 왕국을 바치고 그것을 다시 봉토로 받아 다스리는 한편 스티븐 랭튼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17]
인노첸시오 3세는 노르웨이, 프랑스, 스웨덴, 불가리아, 스페인, 잉글랜드에 대해서도 더욱 깊이 정치에 개입해 교황권을 적절히 행사하여 분쟁을 조정하였다. 잉글랜드의 존 왕의 요청에 따라 그는 마그나 카르타를 무효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잉글랜드 귀족들의 봉기를 초래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단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투쟁을 벌였다. 즉위 초반에 그는 프랑스 남서부에 널리 퍼진 분파인 알비파라고도 불리는 카타리파를 예의주시하였다. 툴루즈 백작 등 지역 영주들을 등에 업은 카타리파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들이 타락했다고 보았다.
이에 교황은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넬뇨를 프랑스 현지에 파견해 반항적인 영주들을 회유하려고 했으나 1208년 피에르가 툴루즈 백작 레몽의 친구들로 의심되는 신원 미상의 무리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인노첸시오 3세는 이를 교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고 말로 해결하려고 했던 기존의 방법을 바꾸어 힘을 행사하기로 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카타리파를 진압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제5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의 지휘 아래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알비 십자군은 카타리파와 가톨릭 신자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약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이고 해당 지역을 프랑스 왕의 지배 아래 두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단지 이단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툴루즈의 귀족들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봉신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영토 분쟁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아라곤 왕 페드로 2세는 1213년 뮤레 전투에서 사망했다. 1229년 프로방스 지역을 프랑스 왕의 영토에 통합하도록 합의한 내용의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분쟁은 끝이 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재위기간 대부분을 거룩한 땅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는데 보냈다. 그의 첫 번째 시도는 1198년 선언한 제4차 십자군(1202-1204)이다. 전임자들과 달리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 원정에 관심을 보이는 세속 지도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던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십자군을 조직하고 싶었다.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내린 첫 번째 명령은 모든 가톨릭 국가에 원정을 홍보하는 선교사들을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카푸아의 피에트로를 서로 대립 중이던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에게 보내면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1199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는 5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왕들 사이를 휴전시킨 의도는 그들이 십자군을 지휘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원조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유럽의 기사들과 귀족들에게 십자군을 이끌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 요청이 성공하여 많은 영주들이 교황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그 중 샹파뉴의 테오발드와 몽페라 후작 보니파스가 십자군의 지휘관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잉글랜드나 독일에서는 교황의 요청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십자군은 대부분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드는 시도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제껏 교황들이 하지 않은 모금 운동에 나섰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그들 수입의 40%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모금하게 하였다. 이는 교황이 성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세금을 부과한 최초의 사례였다. 잉글랜드에서는 공직자들의 부패와 성직자들의 무시로 돈을 징수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존 왕과 필리프 2세 왕에게 사절들을 보내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많은 돈을 모금하려고 애썼다. 두 왕들 모두 자신들의 수입 40%를 십자군 원정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존은 또한 잉글랜드 전역에서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한 모금 운동은 십자군 내에서도 일어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이 되기로 서약했으나 사정상 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엔 십자군에 기부하면 해당 서약이 무효화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허버트 월터에게 이 기부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겼다.
십자군을 조직했을 때, 당초 목적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이 휴전 상태였던 이집트였다. 프랑스인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는데, 베네치아인들은 십자군에게 선박과 보급품을 공급하고, 십자군은 그 대가로 베네치아에 85,000마르크(20만 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대리인이 십자군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그리스도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 조약을 승인했다. 프랑스인들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보급받은 대가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십자군은 빚을 갚기 위해 베네치아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도교 도시인 자라[18]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인노첸시오 3세의 허락 없이 이루어졌으며, 그는 십자군 측에 자라를 공격하는 자들은 파문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자라를 공격해 파문당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을 계속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곧 용서를 받았다. 십자군이 두 번째로 공략한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이 결정 역시 사전에 인노첸시오 3세와 아무런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인노첸시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같은 그리스도교 도시를 공격한 십자군을 이번에도 역시 파문했지만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재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동방 교회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기 때문에 이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 복종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두 교회 간의 현저한 차이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제국을 세우고 이후 60년 동안 통치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4월 19일 칙서를 통해 세계 공의회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공의회는 1215년 11월 11일에 개막했다. 참석 주교는 대주교 70명 이상을 포함해 400명이 넘었다. 대수도원장과 수도원장도 800명에 이르렀고, 주교좌 성당 참사회 대표들도 처음으로 참석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비롯해 동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 아라곤과 포르투갈, 헝가리, 시칠리아 왕들도 모두 사절들을 보냈다.
회의는 개막일인 11일에 이어 20일과 30일 3차에 걸쳐 열렸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승인한 70개 조항의 법령 가운데 가톨릭 신앙에 관한 제1조와 요아킴 수도원장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2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68개 조항은 모두 교회 생활과 규율에 관한 내용들이다. 제도와 조직, 성직자 생활, 교회 재산 처리, 십일조, 교구와 수도회 관계, 평신도 생활 등 중세기 교회 생활과 관습과 관련된 전반적 사항을 망라하고 있다. 공의회에서 발표한 70개 조항의 법령은 그 실제 준수 여부와는 상관없이 16세기 중반 트리엔트 공의회(1545~63년) 이전까지 성문화된 교회법전 역할을 했다.
공의회는 교회의 영도하에 제5차 십자군 원정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공의회가 폐막한 후, 1216년 봄에 인노첸시오 3세는 그의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 시절 파문당한 피사와 화해하고 제노바와 맹약을 맺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로 길을 떠났다.그러나 1216년 7월 16일 페루자에 머물던 중에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하기이틀 전에 17명의 추기경이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페루자에 모였다.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타타르족의 무서운 기세, 교회 분열에 대한 우려로 추기경들은 교황을 선출하는데 있어 타협점을 모색하였다. 7월 18일 추기경들은 오스티아의 우골리노[19]와 귀도 파파레스키에게 새 교황을 지명할 권한을 주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인 첸치오 사벨리를 지명했고, 첸지오는 첸시오 사벨리는 교황직을 받아들여 주교 서임식을 거친 후 호노리오 3세로 선출되었다.
교황 대관식은 8월 31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1216년 9월 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로마인들은 호노리오 3세의 선출을 크게 반겼다. 일단 호노리오 3세가 로마인이었던 데다가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마찬가지로 호노리오 3세도 두 가지 큰 목표를 달성하는데 전념하였다. 그 중 하나는 제5차 십자군을 통한 거룩한 땅의 회복이고 두 번째는 교회의 영적 쇄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노첸시오 3세와는 대조적으로 물리력과 엄격함보다는 친절과 관용으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제5차 십자군은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비준되었고, 호노리오 3세는 1217년에 십자군 원정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 거대한 사업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교황과 추기경들은 3년 동안 십일조를 냈다. 그 밖의 성직자들은 20분의 1을 냈다. 이렇게 모인 돈이 상당한 액수였지만, 호노리오 3세가 계획한 십자군 원정을 할 정도로 충분하지는 못했다.
1217년 4월 호노리오 3세는 쿠르트네이의 피에르 2세를 라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는 피에르 2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피에르 2세는 동방으로 길을 떠난 와중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사로잡혀 감옥에서 여생을 마쳤다.
호노리오 3세는 거룩한 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럽의 유일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과거 그의 제자였던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였다. 다른 많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1217년에 거룩한 땅으로 가겠다는 서약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막상 성지로 떠나는 것을 주저했고, 호노리오 3세는 그런 그에게 거듭 원정을 떠날 것을 촉구하였다.
1220년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로 선출되어 같은 해 11월 22일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호노리오 3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도 십자군 원정을 망설였으며, 1221년 9월 8일 이집트 원정은 다미에타 상실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유럽의 통치자들 대부분은 이미 자기만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터라 본국을 비우고 떠날 수가 없었다.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와 얼마 후에 니더라인(라인강 하류) 지방에서 모은 십자군 함대가 마침내 거룩한 땅으로 떠났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몇몇 곳을 점령했지만, 그리스도인들끼리 행동 통일이 되지 않고 십자군 지도자들과 교황 특사 펠라기우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면서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1225년 6월 24일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것이 확정되자 호노리오 3세는 이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2세 여왕의 혼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1225년 7월 산 제르마노 조약은 2년의 유예기간을 허용했다.
거룩한 땅의 해방 외에도 호노리오 3세는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 이단 진압,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발트해 연안을 대상으로 한 그리스도교 포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라틴 제국 유지 등 굵지한 현안들을 도맡았다.
이들 현안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신경 쓴 문제가 바로 이단의 뿌리를 뽑는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대한 인노첸시오 3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의 툴루즈 백작 레옹 6세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도 이 문제에 끌어들임으로써 인노첸시오 3세가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달성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아비뇽의 포위와 함락이다. 호노리오 3세와 프랑스의 루이 8세는 아비뇽에 대한 프리드리히 2세의 소유권 주장을 무시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도미니코회를 인가한 것을 시작으로, 1223년에는 프란치스코회를, 1226년에는 가르멜회를 인가하였다.
1219년 호노리오 3세는 도미니코와 그를 따르는 수도자들에게 로마의 산타 사비나 성당을 거처로 내주었으며, 그들은 1220년 초까지 이 성당에 머물렀다. 그 전에 수도자들 로마에 임시로 머문 거처는 산 시스토 베키오 수도원인데, 이곳은 1218년경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에게 내주었다. 도미니코의 지도 아래 이곳 수도원은 성소 희망자들을 모집하고 로마의 수녀들을 개혁하는 장소가 되었다. 산타 사비나 성당의 수도원 학교(studium conventuale)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의 도미니코회 대학교(studium generale)의 전신이 되었다.[6]
1217년 호노리오 3세는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세르비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호노리오 3세의 치세에 많은 제3회가 설립되었다. 그는 1221년 교황 칙서 《생활 지침》(Memoriale propositi)을 내려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인가하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전임 교수 네 명이 세운 발 데 에콜리에르 연합회를 인가하였다.
해박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호노리오 3세는 성직자들이 특히 신학 분야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르트르의 사제 위그가 주교로 선출되자 호노리오 3세는 그가 주교가 되기에는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1219년 1월 8일 《quum pateretur in litteratura defectum》이라는 서신을 보내 그의 승인을 보류한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심지어 그는 교황청에 근무하는 또다른 주교가 무지하다는 이유를 들어 주교직을 박탈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그 당시 학문의 위대한 두 축이었던 파리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에 각종 특혜를 내렸다. 이들 대학교 외에도 그는 교구에서 신학 공부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교황 칙서 《Super specula Domini》를 발표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중에 자신들의 교구에서 신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로마 교회의 징벌서》(Liber Censuum Romanae Ecclesiae)가 있는데, 이 책은 재산 문제에 대한 중세 교회의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써 내용이 사도좌의 수입 내역, 받은 기부 목록, 부여한 특권 목록 및 다른 도시국가 및 다른 나라 군주들과 맺은 계약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집필은 교황 클레멘스 3세 때부터 시작해 1192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 때 끝마쳤다. 《로마 교회의 징벌서》의 원본은 여전히 남아있다(Vaticanus latinus 8486).[7]
호노리오 3세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전기를 집필하고, 《로마 전례 예식서》(Ordo Romanus)에서 교회의 여러 전례 예식 및 34편의 강론 등을 기록하였다.
어째든 프리드리히 2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군 원정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호노리오 3세는 1227년 3월 18일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희망이 달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하루가 지난 3월 19일 호노리오 3세 이전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대신 추천했던 오스티아의 우골리노가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 선출되었고, 전임 교황이 추진했던 사업을 이어받았다.
파리 대학교 학자들과 지방 유지들 간의 갈등이 촉발해 1229년 파리 대학교의 총파업이 있은 후 그레고리오 9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231년에 교황 칙서 《과학의 어머니》(Parens scientiarum)를 반포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그의 칙서는 대학교에 대한 교황의 후원을 확대해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대학교의 마그나 카르타로 회자된다. 이 칙서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법적 소송에 휘말린 교수는 강의를 중단하도록 하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에 창궐한지 오래된 이단들이 단순히 확산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폭력적인 집단 행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그레고리오 9세는 1233년 종교재판소를 세웠으나 피의자의 수사나 심문을 위해 고문하는 것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뛰어나고 학식이 깊은 법률가였던 교황은 1234년 《신교령집》(Nova Compilatio decretalium)을 반포하였다. 《신교령집》은 중세 전기부터 모아온 교령들을 체계화하는 오랜 과정의 정점이었다. 이 체계화 과정은 12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은 교황의 위탁을 받은 법률에 정통한 그라티아누스가 교황의 지시에 따라 교령들을 편집해 1140년에 발행한 것으로, 그레고리오 9세는 여기에 새로 교령들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법적 지위의 근거가 되었다.
1239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니콜라스 도닌이 탈무드가 예수를 반대하는 신성모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 그레고리오 9세는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탈무드를 몰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이를 둘러싼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유대교 신학자들 간의 공식적인 논쟁이 촉발되었고, 1242년 6월 12일 12,000권의 탈무드 필사본이 대량 압수되어 소각 처리되었다.
탁발 수도회를 지지한 그레고리오 9세는 청빈이 당시 많은 성직자들의 재물욕에 대한 탁월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시시의 클라라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의 친구이기도 했다. 1235년 1월 17일 그는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메르체데스회(속로의 성모회)를 인가하였다.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열 명의 추기경을 서임하였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파도바의 안토니오, 헝가리의 엘리사벳 등을 시성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성모 경당을 개축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는 북방 십자군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동방 정교회를 믿는 동유럽[20]의 슬라브 민족을 교황의 재치권 아래 두려고 하였다 1232년 그레고리오 9세는 검의 형제기사단 측에게 핀란드-노브고로드 전쟁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에 맞서 싸우는 반(半)이교도인 핀란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핀란드에 지원군이 왔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220년 11월 22일 로마에서 가진 대관식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1221년 8월에 거룩한 땅에 가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9세가 즉위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당초 약속했던 제6차 십자군 원정을 실행하는데 미적거리기만 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를 내세워 십자군 원정을 계속 지연하였다. 원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파문과 퇴위 강요로 맞대응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거룩한 땅으로 갔으며, 실제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부재한 동안 그가 임명한 스폴레토 총독 라이날드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불신하게 되었다.[3] 1229년 6월 거룩한 땅에서 돌아온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를 침공한 교황군을 패산시키고 그레고리오 9세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그레고리오 9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휴전을 했지만 1239년 프리드리히 2세가 롬바르디아 동맹에 패퇴하면서 교황령을 둘러싼 이탈리아 전역을 수중에 넣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졌다. 이후 두 사람 간의 갈등이 다시 폭발하여 1239년 황제의 재차 파문과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이단자로 비난하고 그에게 기절벌[21]을 선고하기 위해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시노드에 참석하기 위해 고위 성직자들이 탄 많은 배들을 나포하거나 침몰시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리오 9세의 사망으로 끝이 났다. 사망한 후 엄격한 환경 아래 소집된 콘클라베(교황 선거)에서 산마르코의 교구장 주교 겸 추기경인 고프레도 카스틸리오니가 첼레스티노 4세로 선출되었지만, 이는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교황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와의 격렬한 투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의 추기경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교황의 봉신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바다에서 추기경 두 명을 생포해 교황청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조반니 콜론나 추기경은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사도좌 공석 상태였던 교황청이 콜론나 가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 원로원 의원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영향을 막고 교황 선거를 안전하게 실시하기 위하여 로마의 황폐화된 궁전 셉티조디움에 소집된 추기경회의에서 콜론나 추기경은 오르시니의 호위병들에게 붙잡혀 연금되었다. 당시 셉티조디움의 회의실 기와 지붕은 거의 허물어져 비가 샐 정도였다고 하며, 추기경들 중의 한 사람은 병에 걸려 사망하기도 하였다.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22]를 비롯하여 그레고리오 9세를 측근에서 보좌했던 추기경들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강경한 노선을 취하였다. 또 다른 추기경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이들로서 협상과 중도 노선을 주창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사로잡은 추기경들이 무사히 풀려나 로마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다루기 손쉽게 타협적인 인물인 오토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교황청 측에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마테오 오르시니가 내세운 후보인 로마노 다 포르토 추기경은 파리 대학교의 학자들을 박해한 전력 때문에 교황으로 선출되기 힘들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나이 많은 고프레도 카스틸리오니가 3분의 2 이상인 10명 중 7명의 추기경들로부터 표를 받아 1241년 10월 25일 교황 첼레스티노 4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좌에 불과 17일 밖에 착좌하지 못했으며, 그가 교황으로서 했던 일들 중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는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를 파문한 것이었다. 그는 1241년 11월 10일 고령과 허약한 체질 탓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3.1.10. 호엔슈타우펜 왕조와의 분쟁의 끝을 향해
첼레스티노 4세 사망후 새교황을 선출하는 선거가 1243년 6월 25일까지 이어졌고,산 로렌초 인 루치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인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가 인노첸시오 4세로 선출되었다. 추기경 시절 시니발도는 프리드리히 2세가 파문된 이후에도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또한 시니발도와의 토론을 즐겨 하였으며, 그의 지혜에 크게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시니발도의 선출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2세는 절친한 추기경을 잃은 대신 사사건건 싸워야 하는 교황을 얻게 되었다며 재치 있게 비꼬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농담이 들어간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공손한 언사로 축하하고 그의 성공적인 재위를 기원하면서 황제와 교황 간의 입장 차이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하여 양자 간에 협상이 곧바로 시작되었으나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했다. 인노첸시오 4세는 롬바르디아가 베드로 세습령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기를 거부했으며,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인노첸시오 4세의 입장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양측의 대립 관계가 지속되었다.
황제의 교묘한 술책은 이탈리아, 특히 교황령에서 엄청난 반(反)교황 정서를 불러일으켰고, 황제의 대리인들은 교황의 통치에 반대하도록 여론을 부추겼다. 로마에서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알게 된 인노첸시오 4세는 1244년 6월 7일 서둘러 로마를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왔다. 인노첸시오 4세는 변장한 채 수트리와 치비타베키아를 거쳐 7월 7일 자신의 고향인 제노바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0월 5일에는 다시 제노바를 떠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프랑스로 피신했다. 1244년 11월 29일 리옹에 당도한 그는 그곳 지사들로부터 기꺼이 환영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의 추적을 피해 리옹에 안전한 정착지를 마련한 인노첸시오 4세는 1244년 12월 27일 강론 중에 전세계 주교들을 상대로 제13차 세계 공의회를 리옹에서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40명의 주교가 1245년 6월 28일, 7월 5일, 7월 17일 세 차례에 걸쳐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공의회에서 다루어진 중점 사안은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막는 것이었다.
한편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1239년 6월 9일 모든 프랑스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모든 탈무드 책을 압수하여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1240년 12월 31일 첫 토요일에 수사관들이 각 시나고그를 급습하여 책들을 압수해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에서 보관하도록 하였다. 파리의 주교는 교황의 지시가 담긴 사본을 프랑스와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키스티야, 레온, 포르투갈 등의 모든 주교에게 배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239년 6월 20일 파리의 주교와 도미니코회 총장, 프란치스코회 총장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에서는 탈무드의 모든 필사본을 불태울 것을 요청하면서 이를 집행하는데 있어 어떠한 방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같은 날 그는 포르투갈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 모든 탈무드 필사본을 몰수해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에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1240년 파리에서 열린 재판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이러한 교황의 서신들을 언급했으며, 결국 법정에서는 탈무드에 35건의 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차 24대분의 탈무드가 소각 처리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 역시 재임 초반기에는 그레고리오 9세의 이러한 정책을 답습했다. 1244년 5월 9일 그는 루이 9세에게 서신을 보내 파리 대학교 학자들이 탈무드와 탈무드 주석들을 조사해 이단성이 있는 내용을 발견할 경우 소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유대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247년 7월 5일 인노첸시오 4세는 독일과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갈취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과 부활 시기가 되면 유대인들이 어린이를 죽여 심장을 먹는다는 헛소문과 기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들이 부당한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을 지시하는 서한을 보냈다. 1247년 8월 2일 프랑스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노첸시오 4세는 탈무드를 소각하기보다는 검열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보냄으로써 탈무드에 대한 입장을 번복하였다. 이러한 인노첸시오 4세의 입장은 투스쿨룸의 주교급 추기경이자 파리 대학교의 전직 총장이었던 샤토루의 오도의 불만을 샀다. 그럼에도 인노첸시오 4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였다.
시기 미상이기는 하나 인노첸시오 4세는 법인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청빈을 서약한 탁발수도회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공의 인격’인 법인 개념을 인정하고 이를 재산의 소유주로 지정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도원과 대학이 하나의 법인격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는 수도자들이 청빈의 서약을 파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1245년 소집된 제1차 리옹 공의회는 이전의 공의회들과 비교했을 때 참석자 수가 가장 적었다. 그렇지만 세 명의 총대주교와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2세 또한 참석했으며, 150명의 주교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인노첸시오 4세는 그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서부 지역의 주교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헝가리 등 동부 지역에서는 몽골(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중동에서는 사라센족 때문에 올 수가 없었다.
공의회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은 수에사의 타데오가 대변했는데, 그는 황제가 과거에 한 모든 약속을 재차 확인했으나 교황이 이를 보증하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타데오는 교착 상태를 끝내기는커녕 7월 17일 공의회 교부들이 엄숙하게 황제의 파문과 퇴위를 선언하기로 의견을 모으자 경악하였다. 교황은 7월 17일 마지막 제3차 회기에서 황제를 파문하면서 동시에 폐위를 선언하였다. 황제에게는 서약 위반, 평화 파괴, 고위 성직자 감금, 이단 등 4가지 혐의가 적용됐다.
이러한 공의회의 결정 소식에 유럽 전역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1250년 12월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면서 진정되었으며, 인노첸시오 4세는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숙적이 사라지자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공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임자인 인노첸시오 3세와 마찬가지로 인노첸시오 4세 역시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어떤 왕들보다도 더 강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았고, 세속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산슈 2세의 동생 아폰수의 요청으로 그의 폐위를 승인하였다. 뒤이어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한 아폰수는 아폰수 3세가 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또한 보헤미아 왕의 아들 오타카르를 보호하였다. 교황은 심지어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의 수석 주교인 에드먼드 리치를 괴롭히고 공석 상태인 교구의 수입과 성직록을 교회에 양도하지 않고 왕실 금고로 가져가는 등의 행동을 저지르는 행동 탓에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물론 주교들과도 대립한 헨리 3세의 편을 들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1245년 인노첸시오 4세는 조반니 다 플라노 카르피나와 폴란드의 베네딕트를 자신의 친서와 함께 ‘타타르인의 황제’에게 사절로 보냈다. 교황의 서찰에는 몽골 제국의 통치자에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것을 권장하고 유럽에 대한 '침략행위를 그만두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과 ' 헝가리 왕국을 침략한 이유를 설명할' 요구사항이 담겨 있었다. 귀위크 칸은 1246년 답신을 보냈는데, "네 요구를 둘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하며, " 헝가리인은 칸에게 복종하라는 신의 명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우리에게 정복되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23]고 일방적인 내용으로 사실상 교황과 유럽의 군주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편지는 현재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245년 인노첸시오 4세는 롬바르디아의 아셸랭을 다시 한 번 사절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아셸랭은 1246년 카스피해 인근에 있는 또다른 몽골 지도자 바이주와 만나 교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바이주의 답신 역시 귀위크 칸과 별다르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몽골에서 온 두 사신 아이베그와 세르지스가 당시 교황이 있는 리옹까지 찾아왔다. 귀위크 칸은 교황에게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까지 직접 가서 몽골의 황제에게 입조하고 야삭을 들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1251년 4월 19일 리옹을 떠나 5월 18일에 제노바에 당도하였다. 7월 1일에는 세 명의 추기경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와 함께 밀라노에 머물렀다. 그는 9월 중순까지 밀라노에 머무르다가 이후 볼로냐로 다시 길을 떠났다. 11월 5일 그는 페루자에 도착했다. 교황은 로마로 돌아갈 때 자신의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페루자에 머물렀다(1251년~1253년). 페루자에 체류하는 중 1251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인 민다우가스가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자 그를 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책봉했고, 1252년 5월 15일 인노첸시오 4세는 페루자에 머물러 있을 적에 종교재판에서 고문을 허락하는 것을 포함해 36조항의 법으로 구성된 교황 칙서 《근절시키기 위해》(Ad extirpanda)를 발표하였다.
마침내 그는 1253년 10월 첫 주에 로마를 다시 보았다. 그는 1254년 4월 27일 로마를 떠나 아시시를 찾았고, 그다음에는 아나니를 찾았다. 그는 독일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의 영토 분쟁에 곧바로 뛰어들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맞선 그레고리오 9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지지했다. 이러한 교황의 정책은 향후 이탈리아 반도가 분쟁에 휘말려 30년 간 지속되게 만들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재위 말년을 대부분의 귀족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로 인식한 그의 아들 만프레디를 타도하는데 전념하였다. 당초에 그는 시칠리아 왕국 전체를 교황령에 편입시키고자 했으나 그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앙주의 샤를과의 합의가 실패하자 1254년 5월 14일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9살짜리 아들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수여하였다.
같은 해,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또다른 아들인 독일 왕 콘라트 4세를 파문했는데, 에드먼드가 책봉된 지 며칠 지나서 사망하였다. 콘라트 4세는 유언으로 자기 아들 콘라딘의 후견인으로 교황에게 맡겼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주축이었던 독일 왕국은 콘라딘이 아직 2살이란 이유를 들어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마침내 대공위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1254년 6월 초에 아나니로 거처를 옮기고 만프레디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다렸다. 만프레디는 에드먼드의 위협에 대항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 교황 대리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인노첸시오 4세는 잠시나마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의 통치자로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10월 23일 아말피로 하여금 시칠리아 왕국 대신에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시하였다. 만프레디는 즉시 10월 26일 테아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라센 군대가 있는 루체라에 진지를 세웠다.
만프레디는 기가 죽기는커녕 교황의 공격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충직한 사라센 군대를 동원해 그는 반항적인 귀족들과 도시들을 굴복시켜 나갔다. 만프레디가 자신에게 복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인노첸시오 4세는 만프레디의 군대에 대응하기 위해 교황군에게 명령을 내려 8월 8일 자신의 여름 별장이 있는 아나니 남쪽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1254년 10월 27일 교황은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인노첸시오 4세는 나폴리에 머물던 중 몸이 안 좋아져 병상에 누워 있던 와중에 12월 2일 포자에서 만프레디의 군대가 자신의 조카이자 새 교황 사절인 굴리엘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지휘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인노첸시오 4세에게 충격을 주어 1254년 12월 7일 그의 죽음을 재촉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군의 패전 소식에서 교황의 사망까지는 불과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3.1.11. 호엔슈타우펜과의 분쟁에서 승자가 된다
12월 12일 오스티아의 주교이자 추기경단장이었던 리날도 디 옌네가 알렉산데르 4세로 선출되었다.알렉산데르 4세는 전임자인 인노첸시오 4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일족인 콘라딘의 후견인을 자처하여 그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으나, 3주 만에 마음을 돌려 콘라딘의 삼촌 만프레디에 강하게 반대하며 그에 대항할 음모를 꾸몄다.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파에 성사 참여 금지를 내려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왕이나 노르웨이의 왕에게 호엔슈타우펜에 맞설 십자군을 모집하지도 못했다. 로마에서는 구엘프- 기벨린 투쟁이 벌어져 교황이 비테르보로 피신하여 1261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다.알렉산데르 4세의 치세의 주요 특징들을 열거하자면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일치 노력, 프랑스에 종교재판소 설치, 탁발수도회에 대한 호의, 1259년 제2차 폴란드 침공이 있은 후 타타르족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 조직 시도 등을 들 수 있다. 1255년 9월 26일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회의 창립자인 아시시의 클라라를 시성하였다. 또한 그는 1255년 10월 29일 교황 칙서 《Benigna Operatio》를 공표하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받은 성흔의 진실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교황은 1258년 9월 27일 칙서 《Quod super》를 반포하여 이단심문관들은 오직 이단과 관련된 문제만 다루어야 하며, 마법을 부렸다고 고발된 이들은 이단심문관이 아닌 행정당국에서 조사해 처리하도록 했다.
1254년 5월 14일 인노첸시오 4세는 죽음을 앞두고 며칠 전에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차남인 에드먼드에게 교황의 영지인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부여하였다. 알렉산데르 4세는 1255년 5월 13일 이러한 결정을 확인했으며, 그 대가로 135,541마르크를 받아 시칠리아에서 만프레디를 축출하기 위해 들인 비용을 변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2천 온스의 금화를 받고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300명의 기사를 고용하기로 하였다. 알렉산데르 4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지불하기 위해 헨리 3세는 신민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요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왕과 의회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결국 이것이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였다. 1261년 4월 12일 알렉산데르 4세는 사망하기 며칠 전에 헨리 3세를 도와 그가 옥스퍼드 조례를 승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교황 칙서를 공표하였다.
5월 25일 알렉산데르 4세가 사망하자 8월 29일까지의 선거 끝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인 자크 팡탈레옹이 우르바노 4세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노 4세가 선출되기 2주 전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면서 제4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이 종식되고 동로마 제국이 다시 들어섰다. 1262년 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트루아에 생위르뱅 드 트루아 성당 공사에 착수하였다. 1264년 8월 11일 우르바노 4세는 교황 칙서 《이 세상에서 건너감》(Transiturus de hoc mundo)을 발표하여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 대축일(Corpus Christi)을 제정하였다. 우르바노 4세는 도미니코회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그리스도의 성체 대축일에 사용할 전례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때 입을 열어 찬양하세(Pange, lingua) - 지존하신 성체 앞에(Tantum ergo), 천사의 양식(Panis angelicus) 등 유명한 성체 찬미가들도 만들어졌다.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 문제에 주력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시절부터 격화된 교황과 황제의 다툼으로 도시들끼리 각각 친교황파와 친황제파인 구엘프와 기벨린으로 나뉘어 반목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만프레디는 이러한 투쟁에 몰두하였다. 교황군 지휘관을 맡게 된 아조 데스테는 콘도티에로 출신으로 만토바와 페라라를 포함한 느슨한 도시 동맹의 명목상 지도자였다. 시칠리아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프레디가 이들 도시들을 관리했으나 우르바노 4세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임금을 세우기 위해 앙주의 샤를(카를루 1세)을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봉하였다.
샤를(카를루 1세)은 아내의 권세에 힘입어 막대한 비용이 들 것으로 전망되는 이탈리아 전쟁에 대비해 자금을 축적하였다.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에게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재정복할지 여부를 놓고 2년 동안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샤를과의 협정을 강화하여 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세금 징수와 교황령에 배와 장정을 제공하겠다는 것과 더불어 이탈리아 북부의 제국령이나 교황령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샤를은 교황에게 콘라딘이 독일왕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아준다면 매년 조공으로 금화 10,000온스를 바치던 관례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고 합의하였다.
샤를이 독일왕으로 입후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10월 2일 페루자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1265년 2월 5일까지 교황 선거 끝에 사비나 교구장 명의의 주교급 추기경이자 교황청 내사 원장인 기 파우코이 레 그로 클레멘스 4세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 성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이자 지명 상속자인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분쟁하고 있던 시기였다.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클레멘스 4세는 변장을 하고 이탈리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생몰 1227~85)과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불화를 빚은 샤를은 교황을 자신의 봉건 영주로 인정할 용의가 있었다. 클레멘스 4세는 1266년 1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추기경들에 의해 앙주의 샤를에게 시칠리아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샤를은 국왕 카를루 1세로 즉위하였다. 클레멘스 4세는 반교황파인 기벨린이 장악한 비테르보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클레멘스 4세는 개인적으로 건강이 약간 좋지 않았음에도 금욕적인 생활을 산 것으로 동시대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자신의 일가 친척들이 풍족하게 살게 해주었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코회 학자 로저 베이컨에게 《대저작》(Opus majus)을 집필하도록 지시했다.
1265년 2월 클레멘스 4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로마로 불러 교황의 신학자로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도미니코회 대학교의 지도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로마에 오면서 1222년 산타 사비나 성당에 설립된 부속 학교(studium conventuale)는 도미니코회의 첫 부속 학교로 탈바꿈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시에 따라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259년에는 발랑시엔에 있는 수도원에도 수도원 학교가 설립되었다. 산타 사비나 성당에 설립된 학교는 훗날 16세기에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설치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같은 해에 교황이 성직자 배치에 개입할 수 있는 교회법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아비뇽 교황청시대에 교황의 개입권은 절정에 달했고, 이로서 교황청의 재원이 상당히 확충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후 14세기 중엽 교황청의 재원이 서구 각국의 국왕과 같은 수준에 설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구엘프파가 보낸 군대가 샤를에게 합류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24]] 클레멘스 4세는 베네벤토 전투 이후 피렌체의 구엘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도시들에 대한 그들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1267년에서 1268년 동안 그는 몽골의 일칸국 지배자이자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사위인 아바카 칸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아바카 칸은 교황에게 프랑스와 몽골이 동맹을 맺는 것을 제안했다. 당초에 아바카 칸의 제안에 대해 어중간한 입장을 취했던 클레멘스 4세는 그에게 곧 십자군 원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1267년 클레멘스 4세와 아라곤 국왕 하우메 1세는 아바카 칸에게 제이미 알라릭 드 페르피냥을 사절로 보냈다. 1267년 비테르보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들은 거룩한 십자가로 장식된 거룩한 땅을 마음속에 그리며, 십자가의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장인이 라틴인들을 돕기 위한 동맹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는 그대가 그러한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크게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군주들에게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의견을 묻기 전까지는 아직 그대에게 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조언을 군주들에게 전달하고, 그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그들이 검토해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출처5]
금세기 말까지 클레멘스 4세의 후임 교황들은 몽골과의 외교적 접촉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실제로 동맹을 조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선 클레멘스 4세와 그리고 그의 이전 역대 교황들의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1268년 갓 성년이 된 콘라딘이 독일왕 자리를 뒤로 하고 시칠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외삼촌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받아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시칠리아를 침공했지만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루 1세로 즉위한 앙주의 샤를에게 패배, 포로로 잡혀 나폴리에서 참수당하면서 마침내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1268년 11월 29일에 클레멘스 4세는 사망하여 비테르보 교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인 그라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시작되나 자그마치 1271년 9월 1일 전까지 사상초유의 강기간의 걸친 선거로 이어졌다.
이는 당시 비테르보에 모인 추기경들은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9세의 동생이자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한 카를루 1세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파는 자기 나라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려고 하였다. 18개월간 교착 상태가 이어지자 교황 선출이 너무 지연되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비테르보 당국과 시민들은 추기경들이 좀 더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그들이 모인 관저의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 빵과 물 밖에 주지 않았다. 추기경들은 마지막으로 1271년 8월 양측에 3명씩 총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여섯 명의 추기경들이 추기경들 중 한 명도 선택하지 않자 그들은 외부에서 인물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리에주의 수석부제를 지낸 테오발도 비스콘티로 결정하였다. 위원회의 결정에 1271년 9월 1일 추기경 전원이 만장일치로 비준하였다. 사실상 이는 프랑스파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테오발도는 프랑스와 가까웠으며, 그의 조카 비체도미노 데 비체도미니스는 엑상프로상스의 대주교이자 카를루 1세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테오발도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서 제9차 십자군에 종군하던 와중에 이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자신의 임무를 도중에 저버리기를 원치 않았던 테오발도가 자신의 교황 선출 소식을 듣고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것이었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 아크레에서 한 마지막 설교에서 그는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리리라”는 시편 137편 5절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하루속히 이탈리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1272년 1월 1일 테오발도 비스콘티는 브린디시에 이르렀으며,
1272년 2월 초에 추기경들이 기다리고 있던 비테르보에 도착하였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교황 선출을 수용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교황용 깝바를 걸쳤지만 여전히 자신을 교황이 아닌 주교 선출자(Episcopus-electus)라고 소개함으로써 태도를 조심하였다. 1272년 3월 13일 그는 로마 교황청 일원들과 함께 로마로 들어갔다. 아직 서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먼저 1272년 3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어서 1272년 3월 2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로 서품받고 교황 대관식을 가진 후 자신을 그레고리오 10세로 자칭했다.
1271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그레고리오 10세는 몽골을 방문하고 온 니콜로 폴로와 그의 17살짜리 아들 마르코 폴로를 통해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 칸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쿠빌라이 칸은 교황에게 선교사 백 명과 거룩한 무덤 성당의 등잔 기름 일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두 명의 수사와 약간의 기름만을 보내주었다. 몽골로 떠난 수사들은 얼마 안 가 되돌아왔다. 니콜로 폴로와 마르코 폴로 부자는 1275년 몽골 제국으로 다시 가서 교황이 쿠빌라이 칸에게 보낸 기름을 전달하였다.
몽골의 일칸국 지도자 아바카 칸은 몽골과 유럽 간의 군사 협력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십여 명으로 구성된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공의회가 폐회한 후, 아바카 칸은 재차 조지아 사람인 바사리 형제를 서방 지도자들에게 외교 사절로 보내 군사들을 준비시켰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에 그레고리오 10세는 아바카 칸의 사절단에게 일칸국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다면 군사 조직에 편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1276년 1월 10일 그레고리오 10세가 사망하면서 새 십자군 원정 계획은 사실상 좌초되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 모은 자금은 이탈리아에 배분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소위 ‘피의 비방’ 소문과 그로 인한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는 서신을 썼다. 그리고 교황 선거 과정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비테르보의 콘클라베에서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엄격한 콘클라베 규정을 담은 교황 선거법을 제정한다는 교황 칙서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발표하였으며, 이는 1274년 7월 16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비준되어 교회법전 조항에 포함되었다.
1272년 로마에 당도하고나서 그의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전임자 그레고리오 9세의 뜻을 이어받아 공의회 소집에 착수한 것이었다. 교황으로 즉위한 지 이틀 후에 그레고리오 10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1274년 5월 1일 개최될 공의회에 초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6월 5일 오르비에토를 떠나 1273년 11월 중엽에 리옹에 도착하였다. 모든 추기경이 그를 따라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시기 독일은 대공위시대가 절정으로 달하여지고 있던 상태였다. 교황은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 황제가 없는 상황을 반겼다. 이렇게 황제 자리가 공석으로 방치된 채 20년이 유야무야 지나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독일 지역의 상황은 막장이 되어가 마침내 교황조차 황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유력 제후들의 세력 다툼에 시달리던 중소 영주들과 여러 도시들에서도 황제 옹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 1273년, 마침내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황제 선출을 위해 모인 제후들은 스스로 황제 후보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유력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는 것을 견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의는 한동안 공전으로 흐르다가 힘의 균형을 위해 일부러 한미한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인츠 대주교와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26]의 주도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代子 godson)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가 황제선거에서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대공위시대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백작이 선출된 것은 첫 사례였고, 그전까지는 당연하게도 공작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독일왕에 선출된 루돌프는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와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밝히면서 이탈리아를 두고 각축전을 벌인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 간의 정치적 분쟁을 종겨시켰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11월 29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카르도 안니발디 추기경과 조반니 오르시니 추기경은 아직 로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기 드 몽포르를 수감할 경비가 엄중한 곳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두 추기경은 집안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로마에 남겨둔 것은 서로를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제2차 리옹 공의회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0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를 즉시 만났는데, 필리프 3세는 즉위 이래 줄곧 열심히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필리프 3세가 브나스크 백작령을 교황에게 이양했기 때문에 양측의 만남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1274년 5월 1일 교황 선거법 제정, 동서 교회의 분열 극복, 십자군 지원 등을 논의하기 위해 리옹에서 14번째 세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주된 목표를 세계 공의회 소집으로 정했으며, 세계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사안들을 다루게 하였다.
1. 동방 정교회와의 화해와 동서 교회의 분열 종식.
2. 새로운 십자군 원정 준비와 그를 위한 모든 교회의 지원금 납부.
3. 교회의 부패 척결.
4.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통한 교황 선거법 제정.
교황은 교리적인 문제가 아닌 규율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레오리오 10세는 십자군 지원을 위해 모든 성직자에게 수입의 10%를 6년 동안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다. 이전의 세계 공의회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성직자들에게 수입의 5%를 3년 동안 십자군 지원금으로 내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4배나 인상된 셈이었다. 이에 따라 26개의 세무소가 설립되었다.
한편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는 콘클라베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제정했다.
• 교황이 선종하면 교황과
교황청이 머물러 있는 곳 중 적절한 장소에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 만약 별장이나 시골 지역, 마을에 있다면 추기경단은 성무 금지가 내려 있지 않은 가장 가까운 도시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
• 콘클라베에 불참한 추기경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 콘클라베에 불참한 추기경 뿐만 아니라 추기경이 아닌 사람은 선거권을 가질 수 없다.
• 선종한 교황에 대한 공식 애도 기간은 교황 사후 9일이다. 10일째 되는 날에는 교황 선출 청원 미사를 봉헌한다. 모든 추기경은 교황이 선종한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들이 모인 장소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야 한다. 추기경들 중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 미리 양해를 구하여 서너 명 정도의 하인을 대동할 수 있다. 그 밖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이 함부로 퇴장하거나 출입할 수 없다. 내벽은 없어야 하지만 각 추기경의 숙소는 천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그들은 공동으로 기숙 생활을 해야 한다.
• 콘클라베 장소가 봉쇄되어 교황 선거가 시작된 뒤에 도착한 추기경도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파문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어떤 추기경도 교황 선거에서 배제될 수 없다.
•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한다.
• 추기경단에서 3분의 2 이상 득표를 받은 사람만이 교황이 된다.
• 교황이 선종하면 그 즉시 교황청 궁무처장과 교황청 내사원장 및 부원장을 제외한 모든 교황청 기구는 업무를 잠시 중단한다.
• 콘클라베에 불참한 추기경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 콘클라베에 불참한 추기경 뿐만 아니라 추기경이 아닌 사람은 선거권을 가질 수 없다.
• 선종한 교황에 대한 공식 애도 기간은 교황 사후 9일이다. 10일째 되는 날에는 교황 선출 청원 미사를 봉헌한다. 모든 추기경은 교황이 선종한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들이 모인 장소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야 한다. 추기경들 중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 미리 양해를 구하여 서너 명 정도의 하인을 대동할 수 있다. 그 밖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이 함부로 퇴장하거나 출입할 수 없다. 내벽은 없어야 하지만 각 추기경의 숙소는 천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그들은 공동으로 기숙 생활을 해야 한다.
• 콘클라베 장소가 봉쇄되어 교황 선거가 시작된 뒤에 도착한 추기경도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파문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어떤 추기경도 교황 선거에서 배제될 수 없다.
•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한다.
• 추기경단에서 3분의 2 이상 득표를 받은 사람만이 교황이 된다.
• 교황이 선종하면 그 즉시 교황청 궁무처장과 교황청 내사원장 및 부원장을 제외한 모든 교황청 기구는 업무를 잠시 중단한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5년 4월 리옹을 떠난 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탈장 증세로 고생하여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빈번히 멈춰야 했다. 그는 1275년 9월 30일 빈에서 곧바로 출발해 1275년 10월 6일 로잔에 이르렀다. 로잔에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을 받기 위한 독일왕 루돌프 1세를 만나, 1275년 10월 20일 그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았다. 1275년 11월 12일 목요일, 그는 밀라노에 도착했다. 교황 일행은 1275년 12월 5일 레지오에밀리아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2월 11일에는 볼로냐에 이르렀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탈장 증세로 인해 1275년 크리스마스 때 아레초에서 길을 멈추었다. 그레고리오 10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으며, 결국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아레초 대성당 안에 안장되었다.
3.1.12. 황혼기를 향해
그레고리오 10세가 사망한지 10일이 지난 후, 추기경들은 1276년 1월 20일 성 아녜스 축일 전야에 교황 선출 기원 미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 총 12명의 추기경이 자리를 함께 했는데, 프랑스에 교황 사절로 파견 나간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과 조반니 가예타노 오르시니 추기경[27]은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날 1월 21일 아침, 오스티아의 주교인 피에르 드 타랑테즈 추기경이 콘클라베 1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황 이름을 인노첸시오 5세로 선택했다. 교황청은 다시 길을 나서 2월 7일 비테르보에 당도했다.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루 1세는 비테르보까지 가서 새 교황을 만나 그를 로마까지 호위하였다. 1276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인노첸시오 5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대관식을 가졌다.1276년 3월 2일 교황 인노첸시오 5세는 시칠리아 왕 카를루 1세의 로마 원로원직을 갱신하였다. 3월 4일자 서신에서 그는 카를루 1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의 자격으로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는 사실을 진술하였다. 3월 9일 그는 이미 길을 떠난 독일왕 루돌프 1세에게 그와 교황청 간의 협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탈리아로 오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약속했던 루돌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즉시 거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3월 17일, 교황은 루돌프에게 재차 편지를 보내 협상을 위해 교황 사절단을 만날 것을 권유하면서 라벤나와 펜타폴리스, 로만디올라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루돌프의 눈에 이는 사실상 강요처럼 보였다. 프랑스 사람이었던 인노첸시오 5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이자 필리프 3세의 삼촌인 카를루 1세를 편애한 반면 상대적으로 루돌프 1세와의 사이는 소원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주어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평화를 위해 일했던 전임자 그레고리오 10세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26일 인노첸시오 5세는 파르마와 코마키오의 주교들에게 전임자 그레고리오 10세가 결정한대로 라벤나의 대주교로 보니파치오 데 라바니아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인노첸시오 5세는 1276년 6월 18일 제노바와 카를루 1세 사이의 평화 조약을 주선하였다.
1276년 5월 18일 인노첸시오 5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그의 벗인 도미니코회 신부 기 드 쉴리를 도미니코회 파리 관구장[28]에 임명한다는 사실을 통보하였다.
짧았던 인노첸시오 5세의 재임기간 중 주목할 만한 요소는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친서를 보내 그레고리오 10세의 사망을 알리고, 황제의 대리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석부제 요르고스와 궁정의 관리인 테오도로스가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그는 제2차 리옹 공의회의 최근 결정과 관련해 미하일 8세에게 사절을 보냈으며, 그와 카를루 1세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카를루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화해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인노첸시오 5세는 교회 재일치를 협상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자 성경학자인 볼로냐의 바르톨로메오를 동방에 보내는 사절로 임명했으나, 먼저 로마로 와서 적절한 장소에 체류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죽음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인노첸시오 5세는 교황으로 즉위한지 다섯 달 하고도 하루 이틀 만인 1276년 6월 22일 사망했다. 인노첸시오 5세는 재위하는 동안 새 추기경을 전혀 서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그의 후임자를 뽑기 위한 1276년 7월 소집된 콘클라베에서는 인노첸시오 5세를 선출했던 추기경들이 그대로 참석했다.
나폴리 국왕 카를루 1세의 영향 아래 1276년 7월 11일 전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조카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의 수석사제급 추기경인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가 새로운 교황 하드리아노 5세로 선출되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대관식도 거행하기 전에 1276년 8월 18일 비테르보에서 사망하였다.
결국 다시 콘클라베가 개최되어 9월 8일 투스쿨룸의 주교급 추기경인 페드루 줄리앙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대관식은 일주일 후인 9월 20일에 거행되었다. 짧은 재임기간 동안 요한 21세가 했던 몇 가지 일 중의 하나는 1274년에 소집된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통과된 콘클라베에 관한 교령을 번복한 것이었다. 그 교령은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계속 한 장소에 가둘 뿐만 아니라 선거가 너무 오래 걸리면 음식과 포도주 공급을 점진적으로 줄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한 21세의 재위 중 많은 날은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었던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에 의해 장악되었다. 요한 21세는 거룩한 땅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고,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에 주력했으며, 그리스도교 국가들 간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그는 타타르족을 개종시키기 위한 포교를 시도했으나, 그 일이 착수되기 전에 사망해 버렸다.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그는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궁에 빌라 건물을 신설했다. 1277년 5월 14일 교황이 홀로 빌라에 있던 중에 천장이 무너져 폐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요한 21세는 이 일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 5월 20일에 사망했다.
비테르보에서 다시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일곱 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는데,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은 여전히 교황 특사로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콘클라베는 빨리 끝나지 않았다. 추기경들 중 3명은 앙주파에 속했고, 나머지 3명은 이에 맞섰다. 유일하게 베르트랑 드 생마르탱 추기경은 어느 편에 설지 몰라 왔다갔다 하였다. 그리하여 콘클라베가 5개월 반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1277년 11월 25일 성녀 가타리나 축일에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이 교황 니콜라오 3세로 선출되었다.
당시 교황령의 정세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1250년대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제국의 영토를 남북으로 뻗어나가려고 한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황령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를 정복하려고 했는데, 이는 교황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빚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들에게 두 차례나 파문당하기도 하였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교황청은 프랑스의 루이 9세, 앙주의 샤를과 동맹을 맺었는데, 특히 앙주의 샤를에게는 시칠리아 왕위를 약속하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 정책을 크게 성공하여 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 카를루 1세가 되었으나 교황청은 카를루 1세와의 동맹이 자신들에게 있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니콜라오 3세의 주요 정책 목표는 교황청과 로마, 교황령에 대한 카를루 1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니콜라오 3세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크게 신장했다. 1273년 10월 1일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오랜 협상 끝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황제 칭호 부여와 대관식 일정은 보류했다. 니콜라오 3세는 전임자의 합의를 이행할 의향이 있었지만, 루돌프 1세가 먼저 교회 측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기 전까지는 그를 황제로 즉위시킬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루돌프 1세와의 협약은 1278년 5월에 최종 타결되었다. 볼로냐와 로마냐, 라벤나는 교황령에 귀속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연대기 작가 바르톨로메오 피아도니에 의하면, 니콜라오 3세는 루돌프 1세와 논의하여, 롬바르디아, 부르고뉴, 투시아, 독일 등 전반적으로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네 왕국에 대한 루돌프 1세의 상속과 더불어 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했다고 한다.
니콜라오 3세는 카를루 1세를 설득하여, 그가 토스카나에서의 교황 대리 지위 뿐만 아니라 10년 동안 점위하던 로마 원로원직을 1278년에 사임하도록 만들었다. 1278년 7월 니콜라오 3세는 교령 《Fundamenta militantis》를 발표해 외국인이 로마에서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였다. 1279년 4월 22일 니콜라오 3세는 산 체칠리아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인 시몽 드 브리옹에게 필리프 왕에 관한 친서를 써서 보냈다. 교황이 마상 시합 금지령을 내렸지만, 필리프 왕과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어기고 마상 시합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은 금지령을 어긴 프랑스 왕을 파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니콜라오 3세의 부친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 있었으며, 니콜라오 3세 본인도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였다. 그의 칙서들과 서간들 중 165편 이상이 프란치스코회와 관련된 주제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프란치스코회 내 엄률파와 완화파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279년 8월 14일 발표한 교황 칙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Exiit qui seminat)이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라테라노 궁전과 바티칸을 보수하고, 비테르보 인근 소리아노넬치미노에 아름다운 시골 저택을 짓도록 하였다. 니콜라오 3세는 1278년 3월 12일 추기경회의를 소집해 아홉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다.새 추기경들 대부분은 프랑스파가 아니었으며, 개중에서 다섯 명은 수도회 출신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오 3세는 학식이 풍부하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지만, 족벌주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척 세 명을 추기경에 서임했고, 그 밖의 친족들에게도 한 명씩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
니콜라오 3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비테르보에 머물고 있던 중에 돌연 중병에 걸렸다. 《Chronicon Parmense》에 의하면, 그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바르톨로메오 피아도니는 그가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니콜라오 3세는 종부성사도 받지 못하고 1280년 8월 22일 사망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추기경은 13명이 있었다. 카를루 1세는 오르시니 가문의 적이면서 니콜라오 3세가 사망한 후 일어난 시가전에서 패해 로마에서 쫓겨난 안니발디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하였다. 안니발디는 비테르보로 피신해 그곳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비테르보 시장이자 사망한 전임 교황의 조카인 오르소 오르시니를 몰아냈다. 그러자 곧바로 앙주파는 콘클라베를 장악했는데, 당시 그레고리오 10세가 세운 규칙들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3세가 세운 규정에 따라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선출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필요했다. 오르시니파나 프랑스 어디에서도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상대 진영의 후보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1280년 2월 2일 성모 취결례 축일에 성난 군중들이 콘클라베가 열리고 있는 주교 관저로 쳐들어가 마테오 오르시니 추기경과 전임 교황의 동생인 조르다노 오르시니 추기경을 납치했다. 그러자 시몽 드 브리옹이 1281년 2월 22일 반대 없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르티노 4세로 명명했다.
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로마는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티노 4세는 라티노 오르시니 추기경과 조프레도 다 알라트리 추기경을 친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 로마에 들어가서 사순 제1주일에 대관식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시민회의를 소집해 순전히 개인적 역량만 보고 조반니 가에타니 오르시니를 자신들을 대변하는 원로원 의원으로 뽑고 조반니에게 그의 대리인을 임명할 권한까지 주었다. 결국 마르티노 4세는 1281년 3월 23일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평생 로마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라바냐의 피에트로를 자신의 대리로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1281년 4월 30일 마르티노 4세는 카를루 1세를 재차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였다. 카를루 1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로마의 원로원을 겸직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카를루 1세에게 의존했던 마르티노 4세는 과거 제4차 십자군이 세웠던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카를루 1세의 계획을 지지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파문하였다. 이로써 그는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겨우 미약하게나마 이루어낸 동서 교회의 일치를 파탄내고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282년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인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 교황에게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교황의 속국임을 기꺼이 자처했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의 앙주 왕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영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그의 아라곤 왕국을 몰수하고 그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의 다툼이 반복되자 참다 못한 오르비에토 시장 라이네리우스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마르티노 4세는 더이상 오르비에토에 잔류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교황청을 이끌고 1284년 6월 26일 오르비에토를 나와 10월 4일 페루자에 들어갔다.
마르티노 4세는 1285년 3월 25일 주님 부활 대주일에 페루자 대성당에서 장엄 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고나서 평소처럼 교황 전속 사제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그리고 3월 28일 새벽 5시경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페루자에 있는 산 로렌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후임자는 그가 사망한지 4일이 지난 4월 2일에 추기경단의 부제급 추기경 단장인 자코모 샤벨리가 호노리오 4세로 선출되었다.
시칠리아 사건은 새 교황의 주목을 곧바로 받았다. 전임 교황 마르티노 4세 때, 시칠리아인들은 카를루 1세의 통치를 거부하고 교황의 동의와 승인 없이 아라곤의 페드로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내세웠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알려진 1282년 3월 31일 학살은 어떠한 화해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사 금지령을 내리고, 페드로 3세에게는 그의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어린 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을 아라곤의 새 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시칠리아를 무력으로 탈환하려는 카를루 1세의 시도를 도왔다.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군과 교황군의 합동 공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카를루 1세의 후계자인 살레르노의 샤를을 생포했다. 1285년 1월 6일 카를루 1세가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보다 온건하고 평화를 바라는 성향이었던 호노리오 4세는 앙주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도, 시칠리아에 부여한 성무 금지령을 철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칠리아인들에 대한 앙주 왕가의 폭정에 대해서도 찬동하지 않았다. 이는 1285년 9월 17일 반포한 교황 헌장(Constitutio super ordinatione regni Siciliae)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헌장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에 입각해 세워지지 않은 정부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왕과 관료들로부터 시칠리아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45개의 법령을 제정하였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인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가 각각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이 되어 왕국이 분열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이 변하였다. 호노리오 4세는 이 중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1286년 4월 11일 그는 하이메 2세와 2월 2일 팔레르모에서 그의 대관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였다. 하지만 하이메 2세와 주교들 모두 교황의 파문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하이메 2세는 로마 해안가에 함대를 보내고 아스투라 시에 불을 질러 파괴하기까지 했다.
한편 시칠리아인들에게 여전히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앙주 가문의 살레르노의 샤를은 오랜 포로 생활에 결국 지쳐 1287년 2월 27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하이메 2세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호노리오 4세는 이 계약이 시칠리아에 대한 교황청의 개입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무효로 선언하고 이와 유사한 어떠한 협정을 맺는 것을 금했다.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의 하이메 2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했지만,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의 관계는 좀 덜 적대적이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호노리오 4세와 알폰소 3세 간에 평화 협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1302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때에 와서야 아라곤과 시칠리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로마와 교황령은 호노리오 4세 치세에 지난 수년 간 누리지 못했던 평화를 구가했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여 교황군에 맞선 몬테펠트로 백작 귀도를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제 교황의 권위는 라벤나, 안코나, 스폴레토, 베르티노로, 펜타폴리스, 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등 교황의 영토 전역에서 인정되었다. 호노리오 4세는 세금 징수를 위해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의 유력한 은행 가문들을 고용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같은 로마 시민이면서 로마 원로원 의원인 판둘프의 형제였던 호노리오 4세의 선출에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마르티노 4세에 대해서는 교황이 로마에 들어와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방해했지만, 호노리오 4세에 대해서는 로마로 정중히 초대했다. 호노리오 4세는 교황 즉위 첫 몇 개월 동안은 바티칸에 살았으나 1285년 가을에 아벤티노 언덕에 세운 화려한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더이상 큰 위협이 되지 않자 전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취한 온건한 정책을 따랐다. 독일의 루돌프 1세는 바젤의 하인리히 주교를 로마에 보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루돌프 1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인츠 대주교를 임명하고, 대관식을 날짜를 정한 다음 투스쿨룸의 조반니 보카마차 추기경을 독일에 보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전반적으로 교황의 간섭 자체에 반대하였으며, 뷔르츠부르크 회의에서는 적극적으로 이에 항의하였고 루돌프 1세는 교황 특사가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래서 루돌프 1세와 호노리오 4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호노리오 4세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으나, 실제 활동은 피렌체와 시에나, 피스토이아의 은행인 가문들의 협조를 받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시행한 십일조 징수에만 국한되었다. 파리 대학교에는 교황에 의해 무슬림들의 개종과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위해 그들의 언어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동방 언어 학원이 설립되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오직 한 명의 추기경만 서임했는데, 바로 1285년 12월 22일 서임된 몬레알레 대주교이자 그의 사촌인 조반니 보카마차이다. 1285년 몽골의 지도자 아르군 칸이 호노리오 4세에게 사절과 함께 친서를 보냈다. 현재 그가 보낸 친서의 라틴어 번역본은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친서에서 그는 무슬림들의 땅에 대해 함께 군사 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와 당신 사이에 있는 무슬림들의 땅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우리가 에워싸고 압박합시다. 우리는 귀하에게 이집트에 군대를 파병할 것을 요청하는 사절들을 보내면, 우리는 당신께 훌륭한 전사들을 보내겠습니다. 귀하가 이에 응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절들을 통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황과 위대한 칸의 도움으로 사라센족을 쫓아낼 것입니다." 1285년 아르군 칸이 호노리오 4세에게 보낸 친서 내용 중에서.
그러나 호노리오 4세에게는 칸이 제안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남아 있던 시간도 없었다. 1287년 4월 3일 호노리오 4세는 사망했고, 그가 사망한 장소인 아벤티노 언덕의 산타 사비나 성당 옆 교황궁에서 13명의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10] 당시 추기경단은 후임 교황 선출 문제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양상이었다. 콘클라베 중에 추기경이 6명이나 사망하자 지롤라모 마쉬 추기경을 제외한 나머지 추기경들은 모두 콘클라베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콘클라베가 다시 소집된 것은 다음해가 되어서였다.
당시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은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급 추기경인 지롤라모 마쉬를 포함해 총 7명이었다. 1288년 2월 15일 1차 투표에서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지롤라모 마쉬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꿋꿋하게 교황궁에 남아있으려는 그의 모습에 다른 추기경들이 깊은 김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구체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마쉬는 선거에 앞서 말했듯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일주일 내내 교황직 수락을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2월 22일에 이르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교황직을 수락하였다.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이 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니콜라오 4세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자신을 추기경으로 서임한 니콜라오 3세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교황은 교황령의 일관된 통치를 위하여 강력한 콜론나 가문을 이용하여 반대 요인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자치 공동체(comune)를 업고 통치자(Signore)가 등장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정부들은 자주 소요를 일으켜 무장 충돌도 빈번히 일어났다. 교황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칙서 《Celestis altitudo potentiae》를 발표하였으나 이 교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내용은 교황청 수입의 반을 추기경단에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증가하는 추기경들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교황령에 대해 그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다.
1288년 10월 28일, 아라곤의 하이메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확정한 샹프랑크 조약을 무효화했다. 이 조약은 교황의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1289년 5월 그는 분명하게 교황령이 종주국임을 인정한 조약을 체결한 후 카를로 2세를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며, 1291년 2월에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시칠리아에서 하이메를 축출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288년 니콜라오 4세는 중국에서 온 네스토리우스파 라반 바사우마를 접견했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니콜라오 4세는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의로 불타올랐다. 그는 불가리아와 에티오피아, 몽골, 타타르족, 중국 등에 프란치스코회원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등의 선교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니콜라오 4세는 1292년 4월 4일 로마의 리베리오 대성전(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옆에 세운 궁전에서 사망하였고, 추기경들이 페루자에 모여 콘클라베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새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당시 베네딕도회 은수자로 알려진 피에트로가 추기경들에게 하루속히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추기경단 단장인 라티노 말라브란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는 피에트로 디 모로네 형제에게 표를 행사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추기경들도 일제히 이 고령에 병든 말라브란카 추기경에 합세해 피에트로에게 표를 행사했다. 피에트로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교황직을 한사코 거부하고 도망치다가 나폴리 왕과 헝가리 왕위 주장자 등과 더불어 추기경들의 설득으로 결국 교황직을 수락하였다. 1294년 7월 5일 79세의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첼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같은 해 8월 27일 주교로 수품받고 이틀 후인 8월 29일 아퀼라에 있는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첼레스티노 5세는 즉위 직후 자신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조 성당의 거룩한 문을 통해 참배하는 모든 순례자에게 전대사를 허용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 이후 라퀼라에서는 매년 8월 28-29일마다 이를 기념하는 축제(Perdonanza Celestiniana)를 열고 있다.
행정 실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첼레스티노 5세는 곧 나약하고 무능한 교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나폴리 왕국에서 즉위한 그는 로마 교황청과 소통하지 못하고 카를로 2세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카를로 2세가 총애하는 인사들로 교회 인사들을 임명했는데, 특히 추기경 12명(프랑스인 7명, 이탈리아인 5명) 중의 한 명인 툴루즈의 루이는 카를로 2세의 아들로서 리옹 대교구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장기적인 교황 선출을 겪었던 첼레스티노 5세는 콘클라베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세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교령을 재도입했다. 교황은 너무 단순하여 발표한 칙서나 여러 호의(favor)들은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나중에 후임자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전임 교황이 베푼 여러 가지 특전과 칙서를 로마로 보내게 하여 재심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대림 시기에 단식하는 동안 세 명의 추기경 인사를 단행했으나 교회 내 반발을 사 도로 없던 일이 되었다.
자신의 무능과 그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베네데토 가에타니 추기경과 교황직 사임의 유효성과 타당성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첼레스티노 5세는 교황에게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날 권리가 있다는 마지막 교령을 발표하고, 재임 5개월 8일 만인 1294년 12월 13일 공식적으로 교황직을 사임했다. 그는 자유로이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겸손함, 순수한 삶과 흠 없는 양심에 대한 바람, 자신의 육체적 강인함의 결여, 자신의 무지함, 심술궂은 사람들, 평온했던 이전 삶에 대한 바람.”
1294년 12월 13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나폴리에서 교황직에서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1294년 당시 나폴리에 있었던 루카의 바르톨로메오는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첼레스티노 5세에게 사임을 종용한 몇몇 추기경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록에도 있듯이 첼레스티노 5세는 전문가들과 상의 후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사임한 것으로, 베네데토는 어디까지나 단지 교황의 사임이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어쨌든,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좌에서 내려오면서 산 마르티노 인 산 실베스트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보니파시오 8세가 되었다.
1294년 콘클라베는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하고 10일이 지난 12월 23일에 열렸다.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제정한 규정들에는 교황의 사임에 관한 것이 없었지만, 추기경들은 교황의 사망과 마찬가지로 교황이 사임하고 10일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당시 추기경 22명 전원이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한 장소이기도 한 나폴리의 카스텔누오보에 모일 수 있었다.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9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차 투표에서 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 표를 얻었다. 그는 1295년 1월 23일 로마의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는 즉시 교황청과 함께 로마로 돌아가 1295년 1월 23일 주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교황으로서 그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를 페렌티노의 푸모네 성에 기거하도록 한 것이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곳에서 자기 수도회 수사 두 사람과 함께 8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지냈다.
교회법 분야에 있어서 보니파시오 8세는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교황의 권위로 《그레고리오 9세 칙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반포했으나 이후 60년 동안 후임 교황들에 의해서도 수차례 칙령들이 반포되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8세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칙령집이 필요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교회 법령집》(Regulæ Iuris)이라는 주요 법령들의 모음집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반포한 88여 개의 칙령을 포함한 역대 교황들의 칙령을 엮어 여섯 권의 책으로 출판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교회 법령집 제6서》(Liber Sextus)이다. 이 자료는 오늘날 교회법률가들 또는 교회법 학자들이 교회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법령집은 제6서의 말미에 나오는데, 현재는 《옛 교회 법전》(Corpus Juris Canonici) 제5권 말미에 소개되고 있다.
1297년 자코포 콜론나 추기경이 오토네, 마테오, 란돌포 등 자기 형제들의 영지 상속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세 형제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코포에서 자신들의 영지를 돌려주라고 명령해줄 것을 호소하며,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인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를 비롯하여 일부 마을을 교황에게 바쳤다. 자코포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코포와 그의 조카 피에트로 콜론나는 오히려 교황의 정지적 적들인 아라곤의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 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해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포 콜론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기경단에게 쫓아내고 파문하였다.
이에 (교황과 손잡은 세 형제를 제외한) 콜론나 가문은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은 전례 없는 일이며, 그를 뒤이은 보니파시오 8세는 불법적으로 선출된 것이기에 그를 교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쟁은 결국 전투로 이어져, 그 해 9월 보니파시오 8세는 란돌포 콜론나를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가문인 콜론나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1298년 말에 들어서 란돌포는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그리고 그 밖의 마을을 점령했는데, 이 때 그는 순순히 항복하면 해치지 않는다는 보니파시오 8세의 확약을 믿고 평화롭게 항복한 그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단테는 몬테펠트로의 귀도가 조언한 대로 이를 약속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면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라고 비판했지만, 기벨린(황제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용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되어 있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주교좌 성당을 제외한 나머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시타파팔레라는 새로운 도시가 팔레스트리나를 대체했다.
아라곤의 차이메 2세가 동생 프레드리코에게 시칠리아 왕위(트리나크리아 왕국, Regnu di Trinacria)를 물려주어 프레데리코는 시칠리아의 피디리쿠 2세로 즉위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그가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피디리쿠 2세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에 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피디리쿠 2세와 시칠리아 백성 누구도 이에 동요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을 폐위시켰는데, 존 발리올은 교황의 보호 아래 교황궁에 머무른다는 조건 아래 구속에서 물려났다.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 초반에 밀리던 스코틀랜드인들은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대영주 자격으로 나서서 보호해줄 것을 호소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교황 칙서 《나는 안다, 아들아》(Scimus, Fili)를 통해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점령한 것을 비판했다. 교황은 이 칙서를 통해 에드워드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격을 즉시 중단하고 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무시했다.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려는 군주들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충돌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가는 왕권과 교회의 갈등은 특히나 1285년 필리프 4세의 권력 강화로 악화되었다. 프랑스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국민 국가로의 발전은 카페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필리프 4세는 최고의 시민 법률가들을 거느리고 법집행에 있어 성직자들의 참여를 전면 금지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과세하자 보니파시오 8세는 이에 맞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를 세금 문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본 그는 1296년 2월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는 교황 칙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공표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발표로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 사실 교회 운영은 프랑스의 수입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교황을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놓으셨다”면서 강력히 항의하였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교회의 재산이 나라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자 하였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과 더불어 중동에 파병할 새 십자군 원정을 위한 기금을 모으던 교황 대리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9월 교황 칙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Ineffabilis amor)을 공표하여 기본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성직자가 자원하여 세금을 낼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필요하면’이라는 표현은 왕이 언제든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 명령을 철회하고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중재자로 받아들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필리프 4세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불화는 다시 재개되어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반교황 움직임에 착수한 14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분쟁은 필리프 4세의 측근과 교황 특사 베르나르 세세 간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3.2. 토스카나 지방
3.2.1. 토스카나 변경백령
3.2.1.1. 카노사 가문 이전
1001년 로마인들이 오토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포위하고 성문을 폐쇄해 우고와 하인리히가 로마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우고는 반란 주모자들과 협상해 오토 3세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시키게 했다.우고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도 종교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수도원장이 몇 년째 세워지지 않을 정도로 쇠락한 보비오 수도원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고, 바디아 피오렌티나 수도원 외에도 산 미켈레 알라 베루카(San Michele alla Verruca) 수도원, 몬테 세나리오의 바디아 델 부온솔라초 수도원, 세티모의 산티 살바토레와 로렌초(Santi Salvatore e Lorenzo) 수도원, 포지본 시의 산 미켈레 수도원, 아레초 수도원,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 수도원 등 여러 수도원을 건설했다. 또한 수많은 기부금을 여러 교회에 전달하고 빈민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쌓았기에, 우고는 후대인들에 의해 '대 변경백'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그러나 우고가 1001년 12월 21일에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후 아달베르토 2세의 후손으로서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된 보니파초 3세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토스카나의 유력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놓고 경쟁하던 하인리히 2세와 아르두이노 디브레아 중 하나를 택하고 상대방을 음해하려 들었고, 이로 인해 토스카나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급기야 1008년 하인리히 2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고 아두이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토스카나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던 그는 1012년에 사망했고, 1014년 라니에리가 새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라니에리 역시 뚜렷한 업적을 거두지 못하다가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임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콘라트 2세에 대적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토스카나 변경백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3.2.1.2. 카노사 가문
콘라트 2세는 경쟁자들의 숱한 방해공작을 뚫고 로마에 입성한 뒤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보니파초 4세를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했다. 보니파초 4세는 만토바,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레지오 등 북부 이탈리아의 상당수 영지를 갖춘 카노사 가문의 가주였다. 여기에 토스카나 변경백까지 손에 쥐면서,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1036년 콘라트 2세의 아들 하인리히와 크누트 대왕의 딸 군힐다의 결혼식이 열린 네이메헌에 가서 그 곳에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콘라트 2세의 황후인 슈바벤의 기젤라의 조카이자 수양딸인 로렌의 베아트릭스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베아트릭스는 지참금으로써 로렌의 중요한 자산인 브리이 성과 스테네이, 무제이, 쥐비니, 롱리에 등 여러 영지를 가져왔다. 베아트릭스와 결혼한 뒤 토스카나로 돌아온 보니파초는 1036년 초여름 콘라트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를 격파했고, 뒤이어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든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에게 가담한 파르마를 제압했다. 1038년 2월 콘라트 2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정성껏 대접했다.1043년 콘라트 2세는 그동안 제국에 공헌한 그에게 보답하고자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했다. 여기에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 후 만토바에 주로 거주하면서 자신이 관할하는 광할한 영토를 통치했다. 1046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한 뒤 독일왕에 오른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아그네스와 함께 피아첸차에 도착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그와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가 신하로서 과도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하인리히 3세의 이러한 우려는 보니파초가 교황 선임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1047년 8월 교황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한 후, 지난날 2번이나 교황에 선임되었다가 폐위되었던 베네딕토 9세가 보니파초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그 해 11월에 교황에 복위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하인리히 3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 교황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릭센의 주교 포포를 새 교황 다마소 2세로 선임했다.
보니파초는 로마로 향하는 다마소 2세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베네딕토 9세가 이미 교황에 올랐다며 그를 로마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마소 2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에게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송하고 베네딕토 9세를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보니파초는 이번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위하여 베네딕토 9세를 축출한 뒤 7월 17일에 다마소 2세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다마소 2세는 즉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9일에 로마시 외곽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 당대에는 보니파초가 교황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보니파초는 1052년 5월 6일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보니파초 4세의 아들 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보니파초 4세를 위시한 카노사 가문의 강력한 권세를 질시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 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카노사 가문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이들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트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친히 피렌체로 진격해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하고 독일로 끌고 갔다. 페데리코는 독일로 끌려가던 중인 그 해 7월 병사했다. 베아트릭스의 남편 고드프리트 3세가 황제를 피해 로렌으로 달아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하인리히 3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다가 1056년 10월 5일 보드펠트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뒤이어 6살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새 황제에 등극했고,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아그네스는 고드프리트 3세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고드프리트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승인하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석방했다. 1057년 토스카나에 돌아온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여 변경백에 취임했고 어머니 베아트릭스와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섭정을 맡았다.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 3세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켜서 로렌 가문과 카노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로 했다. 1069년, 마틸다는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전처 도다[29]와의 사이에서 낳은 '꼽추'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 직후 고드프리트 3세가 사망하면서, 마틸다의 남편고드프리트가 고드프리트 4세로서 공작에 올랐다. 이후 마틸다는 로렌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고, 토스카나 일대는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마틸다는 1070년에 임신해 1071년 1월 초에 딸을 낳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 베아트리체로 지었지만, 아기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인 1071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그 후 남편과 심한 불화를 겪은 마틸다는 1072년 1월 19일 로렌에서 탈출하여 만토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에게 달아난 뒤 안드레아스 수도원에 은거했다. 1072년 고드프리트 4세가 알프스를 넘어 토스카나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마틸다의 남편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루카에 머물고 있던 마틸다가 만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재회에 실패했다. 1073년 여름 고드프리트가 로렌으로 돌아간 뒤, 마틸다는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친 교황 세력인 로렌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간의 서임권 분쟁이 발발했을 때, 마틸다는 교황을 지지한 반면 고드프리트 4세는 황제 편에 섰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해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맞서 싸웠으며, 웨스트 프리슬란트의 백작 디트리히 5세를 추방했다. 그런데 1076년 2월 27일, 고드프리트 4세는 블라르딩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틸다에게 적대적인 독일측 연대기에서는 마틸다가 남편의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고드프리트 4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원칙대로라면 마틸다가 로렌 공국을 상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고드프리트는 암살되기 전에 조카 고드프루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영지를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로렌 공작에 세우고 나무르 백작 아달베르트 3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고드프루아는 108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마틸다는 토스카나로 돌아온 뒤 수녀원에 은거하면서 힐데브란트 추기경과 친분을 맺었다. 힐데브란트 추기경은 1073년 4월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등극한 뒤 교회 개혁을 밀어붙였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는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075년 12월 하인리히 4세가 로마에 무장 사절을 보내 그레고리오 7세를 체포했지만, 마틸다 모녀를 비롯한 교황 충성파가 교황을 구출했다.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의 지그프리트 대주교, 트리어의 우도 대주교, 그리고 24명의 다른 주교들 앞에서 "교황이 낯선 여성과 탁자를 공유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수용하고 있다", "교황이 여자를 원로원에 들여보냈다"고 비난했다. 이는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가 그레고리오 7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맞서 1076년 2월 15일에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풀어주고 기독교인들이 하인리히 4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던 1076년 4월 18일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토스카나 백국의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 해 9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제후들은 항니리히 4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 그레고리오 7세에게 다가오는 겨울에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탈리아를 떠나길 원치 않았지만 마틸다의 적극적인 권유를 따르기로 하고, 그해 12월에 마틸다와 함께 회의가 열릴 예정인 트레부르(Trebur)로 출발했다.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수도원장 우고(St. Hugh the Great. 1024-1109)(왼쪽 인물)와 마틸다(오른쪽 인물)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스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다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1077년 1월 초,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로 향했다.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다의 본거지인 카노사 성채로 경로를 변경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 앞에 나타난 하인리히 4세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참회복을 입고 맨발로 선 채 성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잡으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 여겨 면담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계속 성문 앞에서 무릎꿇은 채 3일을 버텼다. 이에 마틸다는 성직자들과 함께 하인리히 4세를 만나보라고 권고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마침내 황제를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철회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의 면담을 주선한 후, 마틸다는 광활한 영지를 순회하며 통치를 행사하고 여러 교구에 기부했다. 1077년 후반에는 거주지를 로마로 옮기고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한편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 직후엔 루돌프를 지지했지만, 파문을 취소한 후에는 루돌프의 지지를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1080년 3월 로마 사순절 행사에서 "하인리히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파문을 선고했다. 그러나 독일 주교와 제후들은 교황이 언행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고 독선적으로 행동한다고 여겨 분개했다.
1080년 6월 25일 브릭센에 모인 7명의 독일 주교, 1명의 부르고뉴 주교, 그리고 20명의 이탈리아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귀베르토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가 마틸다와 간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틸다는 이에 대항하여 1080년 9월 페라라에서 귀족들을 소집한 뒤 그레고리오 7세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하인리히 4세에 맞서 정의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080년 10월,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의 군대는 볼타 만토바나에서 친 황제파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많은 토스카나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귀순했고, 마틸다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81년 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 하인리히 4세는 마틸다에 대한 충성을 접고 자신 편에 선 루카 시에게 포괄적인 특권을 부여했고, 마틸다의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후 제국군은 로마로 내려가 도시를 2년간 포위 공격한 끝에 1084년 함락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한편 마틸다 역시 카노사 성채를 압박하는 제국군의 공세에 직면했고, 1082년 스폴레토 귀족 라니에리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폴레토 공작으로서 독립하는 등 대다수 가신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마틸다는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카노사 성 근처에 지어진 아폴로니우스 수도원과 노난툴라 수도원에 보관된 귀금속들을 모조리 팔아치워서 얻은 수익금을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냈다.
1084년 5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백작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그레고리오 7세를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로마로 진군해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격퇴하고 로마를 공략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의 기세가 꺾이자, 마틸다는 이 때를 틈타 카노사 성채에서 출진해 반격에 착수했다. 그 해 여름, 마틸다는 모데나 북동쪽의 소르바라에서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파르마 주교 에버하르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갔고, 마틸다와 추종자들은 모데나, 레지오, 피스톨라, 스폴레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살레르노에 유폐된 뒤 1085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1085년 7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가 마틸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 4세와 대적할 노르만 병사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전하기로 했다. 1087년 교황 빅토르 3세가 사망한 뒤 추기경단이 오스티아 주교 오도를 교황 우르바노 2세로 선출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우르바노 2세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고, 1089년 우르바노 2세의 제안에 따라 바이에른 공자 벨프 5세와 결혼했다.
우르바노 2세와 마틸다는 벨프 5세가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기대했지만, 황제와 대놓고 맞설 생각이 없었던 벨프 5세는 1089년 중반에 수십 명의 수행원들만 이끌고 찾아왔다. 마틸다는 수천 명의 군대를 롬바르디아로 파견해 그를 영예롭게 환영하고 120일간의 결혼 축제를 거행했다. 그러나 두 부부간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고, 1095년 봄 부부는 자식을 두지 못한 채 헤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는 일은 없었지만, 마틸다 측 기록에서 벨프 5세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109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후 11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1091년 4월 만토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1091년 여름에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한 포 강 북쪽의 대다수 영역을 장악했으며, 1092년에 모데나와 레지오 등지를 공략했다. 이에 마틸다는 1092년 늦여름 키르피네티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앞으로 어찌할 지를 상의했다. 대다수는 황제와 평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롤라의 은둔자 요한네스만이 계속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틸다는 요한네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추종자들에게 성전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1092년 가을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카노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마틸다가 굳건히 버텨서 공략이 지지부진한 데다 겨울이 찾아오면서 식량 보급에 애를 먹고 전염병이 나돌자, 병사들이 대거 탈영해버렸다. 결국 카노사 공략을 포기하고 베로나로 철수한 황제는 독일로 돌아가서 군대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남부 독일 공작들이 그를 상대로 반기를 들어 알프스 계곡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1093년 봄 제위 계승자인 콘라트가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크레모나, 로디, 밀라노, 피아첸차의 귀족들이 마틸다의 사주를 받고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하인리히 4세는 베로나 일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락했다. 다만 아드리아해 연안 지대에서 변경백을 자칭하던 베르너 2세가 하인리히 4세 지지를 천명하며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하인리히 4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1094년, 하인리히 4세의 두번째 아내인 키예프의 에우프락시아가 산 제노 수도원 감옥에서 탈출했다가 베로나에서 하인리히 4세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마틸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95년 3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보호 아래 피아첸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에우프락시아는 이 공의회에 참석해 하인리히 4세가 자신더러 난교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악마의 미사를 드리려 했다고 고발했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 4세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그러다가 마틸다가 벨프 5세와 헤어진 뒤 벨프 5세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4세가 하인리히 4세의 편을 들기로 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마침내 1097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지원에 힘입어 클레멘스 3세를 몰아내고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성 베드로의 여성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Marchio(후작) 작위를 공공연히 사용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마틸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을 순회하며 교황의 뜻에 따라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레지오 에밀리아, 토스카나의 교회 및 사회 기관에 대한 기부를 대대적으로 벌임으로써 하인리히 4세와의 전쟁 동안 피폐해진 수도원 및 마을 재건에 힘을 쏟았다. 특히 1083년, 1100년, 1103년에 피사에 대규모 기부금을 보내 피사 대성당이 재건축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설립하고 홍보했다. 그러는 한편, 루카, 파비아, 피사 등지의 독립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명목상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는 것을 허용했다.
마틸다는 40여 년간 통치를 행사하면서 정기적으로 박식한 학자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치세에 반포된 법령에는 42명의 법관, 29명의 재판관, 8명의 법학 교사, 42명의 변호사의 이름이 실렸다. 피렌체 문서 보관소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반포된 30개의 사법 회의 기록이 보관되고 있다. 이렇듯 박식한 학자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조언을 따라 법령을 시행하면서 사법 행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또한 마틸다는 사계절 내내 자신의 영지를 여행하며 순회 법정을 벌임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했다.
1111년 로마에 들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문제에 대한 논쟁이 또다시 불거지자 교황 파스칼 2세 및 추기경 몇 명을 사로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틸다는 자신과 가까운 두 명의 추기경인 파르마의 베르나르도와 레지오의 본시뇨레의 석방을 요청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탈다는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로마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던 하인리히 5세는 1111년 5월 6~11일에 비아넬로 성에서 마틸다와 만나서 리구리아의 통치를 양도하고 이탈리아 부왕으로 선임했다.
마틸다는 황제를 접견한 뒤 프리냐노 술라 세키아(Prignano sulla Secchia) 인근의 몬테바라조네(Montebaranzone)로 은퇴했다. 1114년 여름 만토바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만토바인들은 토스카나 후작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만토바에서 5km 떨어진 성채이자 그녀의 '혐오스러운 권력'으로 간주된 리발타 카스텔( Rivalta Castle)을 불태웠다. 이 소식을 접한 마틸다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관료를 보내 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고, 1115년 4월 만토바에 있는 산 미켈레 교회에 파센고 법원의 권리와 수입을 넘겼다.
마틸다는 두 차례 결혼했으나 전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누가 카노사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을 지를 놓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주요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구이도 구에라( Guido Guerra)를 양자로 들였다는 설을 제기하지만, 1099년 11월 12일 브레셀로 수도원 문서에 마틸다의 양아들( adoptivus filius domine comitisse Matilde)로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교황청 자료에 따르면, 마틸다는 1102년 11월 17일 성 크리소고노 성당의 베르나르도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뜻에 따라" 교황청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담긴 문서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측 기록에는 마틸다가 1111년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접견한 뒤 황제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았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렇듯 후계 구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마틸다는 1115년 7월 24일 밤 69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에 폴리로네에 있는 산 베네데토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2.1.3. 카노사 가문 이후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로 손꼽힌 마틸다가 사망한 이듬해인 11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베를린 출신의 귀족 라보도를 토스카나 후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당시 토스카나 일대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수많은 도시들이 토스카나 후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고,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던 라보도는 후작령의 중심지를 피렌체에서 산 마니아토 알 테데스코로 옮겨야 했다.그는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피렌체의 라이벌인 알베르티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비엔티나 성을 피사의 피에트로 모라코니 대주교와 피사의 재판관 및 관리자 일데브란도에게 양도했다. 1119년 알베르티 가문과 힘을 합쳐 피렌체로부터 몬테 카시올리 성을 공략했지만 피렌체인들이 두 차례 반격을 가하는 것을 막으려다 전사했고, 성은 불태워졌다. 하인리히 5세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120년에 콘라트를 새 후작으로 선임했다.
산 마니아토 알 테데스코에 도착한 콘라트는 전임 후작을 살해한 피렌체를 적대하면서도 제국에 그나마 공손하게 대하는 루카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1120년 루카에게 집정관을 임의로 뽑고 무제한적인 자치를 누리는 것을 허용하는 등의 혜택을 부여했다. 이후 라보도 사후 피렌체 편으로 돌아선 알베르티 가문에 맞서 루카의 동맹인 귀도 가문과 손을 잡았다.
1120년 10월, 귀도 가문의 가주 귀도 게라 2세와 쿠라 코뮌의 지원을 받으며 알베르티 가문이 영지로 삼은 폰토르모 성을 포위했다. 또한 귀도 가문은 엠폴리의 산탄드레아 교회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교회 가까이로 이동하고 그곳에 벽과 탑을 건설하도록 강요해 알베르티 영역과 경계를 이루는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하기도 했다. 1121년 4월, 폰토르모 성 공략에 실패한 콘라트는 발 디 페사의 파시냐노 인근에 진을 치고 알베르티 가문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행동은 피렌체에 어떠한 영향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면서 황제와 교황간의 서임권 분쟁이 해결되자, 피렌체 코뮌과 알베르티 가문은 마침내 콘라트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1122년 10월, 콘라트는 피렌체 외곽에서 평의회를 개최하고 사법권을 행사했다. 10월 24일, 피렌체 교회의 부제와 시성사가 법정에 출두했다. 그들은 보니파초 디 테그리모를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한 혐의로 기소했고, 콘라트는 토지를 몰수하고 보니파초에게 벌금을 매겼다.
1123년경, 귀도 가문에 충성하는 용병들이 피렌체가 내려다보이는 피에솔레의 언덕에 자리잡은 산성을 점령했다. 이에 피렌체는 1123년 또는 1124년 피에솔레를 포위 공격했다. 포위전은 3년간 지속되다가 마침내 1125년 또는 1126년 피에솔라인들이 굶주려 굴복하고 성벽이 파괴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콘라트는 피에솔레를 방어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피사와 제노바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노바를 지원하기로 한 그는 피렌체가 피사를 지원하는 것을 막고자 피렌체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1127년 피렌체의 고프레도 주교에게 캄폴리, 데시모, 보솔로로 구성된 교구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권리를 부여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루카와 피사의 무역 전쟁에서 루카의 편을 들었고, 1128년 피사와 시에나의 전쟁 때 시에나 편을 들어서 피사의 게라르데스키 가문으로부터 볼그레리 성을 점령했다.
콘라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대체로 1129년에서 1131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토스카나 후작 지위는 수년간 비워졌다가 11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의 특사로서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이스트리아 변경백 엥겔베르트 3세가 토스카나 후작이자 스폴레토 공작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3세는 1137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에게 직위를 넘기고 독일로 귀환했다. 하인리히는 이를 통해 바이에른, 작센에 이어 이탈리아 중북부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인 프라이징(Freising) 수도사 오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서 바다로, 덴마크에서 시칠리아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급사한 뒤,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그가 오만하고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알브레히트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으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급사했다.
그 후 토스카나 후작에는 아티미스 시의 유지인 울리히 폰 아템스가 콘라트 3세의 지시에 따라 부임했다. 그는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하면서 토스카나 일대에 대한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1140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지시를 받은 카푸아 공작 알폰소가 스폴레토 공국의 일부 지역인 아브루초 북부 일대를 공략하고 트론토강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후에도 토스카나 일대의 도시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했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그의 역량으로는 토스카나를 장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벨프 가문의 벨프 6세에게 직위를 넘기도록 했다.
벨프 6세 본인은 독일에 남아있으면서 아들 벨프 7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삼고 자신을 대신해서 이탈리아를 경영하게 했다. 그러나 1167년, 벨프 7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구엘프파를 응징하기 위한 북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했다. 벨프 6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깊은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탈리아의 영지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상당한 금액에 팔았다. 다만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 직위는 그대로 맡다가 1173년 정식으로 물러났다.
벨프 6세가 정치에 흥미를 잃고 토스카나 경영에 손을 뗀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수차례 단행하면서 토스카나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다 1173년 벨프 6세가 물러나자, 황제는 토스카나를 제국령으로 삼으면서 마인츠 대주교인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를 대리 통치자로 삼았다. 크리스티안은 프리드리히 1세와 대립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따르는 도시들을 응징하라는 황제의 뜻에 따라 스폴레토와 아시시 등지를 제압하고 1173년 5월 안코나를 공격했다. 당시 안코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대놓고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로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크리스티안은 안코나의 해상 라이벌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안코나 시를 6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안코나 시민들은 압도적인 수와 우수한 공성 무기로 밀어붙이는 제국군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안코나 시민들이 어둠을 틈타 성밖으로 빠져나와 적의 공성무기에 수지와 송진이 든 통 여러 개를 던졌다. 이제 불만 붙이면 공성무기를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었지만, 섣불리 불을 붙였다가 자기도 불길에 휘말릴 것을 걱정해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때 안코나 출신의 과부 스타미라(Stamira)가 뛰쳐나와 도끼로 통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불길이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면서 공성 무기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스타미라 역시 불길에 휘말려 사망했다. 제국군은 수비대의 이같은 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안코나를 공략하지 못하다가 10월 중순 베르티노로의 백작부인 알드루다 프란지페네(Aldruda Frangipane)와 구엘프 지도자 굴리에모 마르케셀리(Guglielmo Marcheselli)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철수했다.
1174년 3월 토스카나로 돌아온 크리스티안은 테르니를 약탈했고 1174년 여름까지 토스카나에 머물렀다. 이후 마인츠에 잠시 돌아갔다가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로 재차 원정을 떠났을 때 합세했다. 그는 로마냐로 이동하여 토스카나 귀족 귀도 게라가 통치하던 도시인 파엔차를 볼로냐를 겨냥한 군사 작전의 중추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공세는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75년 7월 파비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섬기던 그는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라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1176년 3월 10월 또는 16일 첼레서 인근의 카르솔리에서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 백작 탕크레디가 지휘하는 노르만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6개월간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그는 1176년 5월 29일 레나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연맹에게 참패한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돌아가면서, 9월 21일에 페르모를 점령하고 철저히 약탈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협상을 중재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기로 한 합의가 성립되게 한 그는 1178년 3월 12일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로 호위한 뒤 대립 교황 칼리스투스 3세가 머물고 있는 비테르보를 포위해 굴복시켰다. 1179년 3월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해 파스칼 3세가 결정한 모든 정책을 무효로 확정짓는 데 기여했다. 이후 몬페라도의 콘라도가 비테르보로 쳐들어오자, 그는 즉시 요격에 나섰으나 그해 9월 카메리노에서 참패해 생포된 후 생 플라비아노 성, 로카 베네레 성, 아쿠아펜덴테 성에서 15개월 동안 갇혀 지내야 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콘라도는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재정 지원을 받는 대가로 크리스티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려 했지만 마누일 1세가 고심 끝에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1181년 석방된 크리스티안은 비테르보에서 로마인들에게 축출된 교황 루치오 3세를 접견했으며, 1183년 루치오 3세가 투스쿨룸에서 로마인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물리치고 교황을 로마로 복귀시키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중병에 걸린 그는 그해 8월 25일 투스쿨룸에서 사망했다. 이후 토스카나 후작 지위는 수년간 비워져 있다가 119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동생 필리프를 토스카나 후작에 선임했다.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급사하고 갓 3살밖에 안 된 프리드리히 2세의 등극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었다. 필리프는 어린 조카의 이권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으로 독일왕에 도전하고자 독일로 떠났다. 이에 이 기회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은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유력 도시들이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토스카나 일대는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토스카나 후작령은 유명무실해졌다. 이후에도 토스카나 후작을 자처하거나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3.2.2. 토스카나 연맹
3.3. 스폴레토 공국
999년 이후 한동안 공백기로 남아 있던 스폴레토 공국의 정치 기록이 다시 시작된 것은 1014년 토스카나 변경백 라니에리가 스폴레토 공작이 전통적으로 관할하는 사비리아에 자리잡은 파르파 수도원장 선임 문제에 개입하여 법령을 반포한 사실이 파르파 수도원 문서에서 확인된 것을 볼 때, 그가 1010년대에 이미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선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27년 초, 라니에리는 루카에 군대를 집결시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임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콘라트 2세에 대적하려 했다. 그러나 콘라트가 무사히 로마에 도착하여 황제로 선출된 것을 볼 때,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니파초 4세가 콘라트 2세의 황제 즉위를 지원한 뒤 곧바로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된 것을 볼 때, 라니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03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는 우고 2세를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후작에 선임했다. 1038년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고자 남하했다. 그는 카푸아를 공략하고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를 내쫓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에게 카푸아를 넘겼다. 우고 역시 이 원정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미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1043년 보니파초 4세가 콘라트 2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하면서 물러났다.
1043년. 카노사 가문의 가주 보니파초 4세는 토스카나 변경백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을 인정받아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받았다. 여기에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 후 만토바에 주로 거주하면서 자신이 관할하는 광할한 영토를 통치했다. 1046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한 뒤 독일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아그네스와 함께 피아첸차에 도착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그와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가 신하로서 과도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하인리히 3세의 이러한 우려는 보니파초가 교황 선임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1047년 8월 교황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한 후, 지난날 2번이나 교황에 선임되었다가 폐위되었던 베네딕토 9세가 보니파초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그 해 11월에 교황에 복위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하인리히 3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 교황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릭센의 주교 포포를 새 교황 다마소 2세로 선임했다.
보니파초는 로마로 향하는 다마소 2세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베네딕토 9세가 이미 교황에 올랐다며 그를 로마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마소 2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에게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송하고 베네딕토 9세를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보니파초는 이번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위하여 베네딕토 9세를 축출한 뒤 7월 17일에 다마소 2세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다마소 2세는 즉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9일에 로마시 외곽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 당대에는 보니파초가 교황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보니파초는 1052년 5월 6일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12살된 아들 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보니파초 4세를 위시한 카노사 가문의 강력한 권세를 질시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 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카노사 가문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이들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친히 피렌체로 진격해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하고 독일로 끌고 갔다. 페데리코는 독일로 끌려가던 중인 그 해 7월 병사했다. 그 후 로렌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드프리트 3세를 진압할 준비에 착수하던 하인리히 3세는 1056년 10월 5일 보드펠트에서 급사했고, 뒤이어 황위에 오른 6살된 하인리히 4세의 섭정을 맡은 아그네스 황후는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의 귀국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피렌체에 복귀한 마틸다는 토스카나 여변경백이자 스폴레토 여공작에 등극했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은 마틸다의 통치를 받다가 108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옹호하는 마틸다와 전쟁을 벌이자 1082년 스폴레토 귀족 라니에리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폴레토 공작으로서 독립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물러난 후인 1086년 마틸다의 추종자들에게 패배하면서 축출되었고, 마틸다는 스폴레토 공국의 통제력을 확보했다.
109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후 11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1091년 4월 만토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1091년 여름에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한 포 강 북쪽의 대다수 영역을 장악했으며, 1092년에 모데나와 레지오 등지를 공략했다. 마틸다가 이에 대적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틈을 타, 아드리아해 연안 지대에서 변경백을 자칭하던 베르너 2세가 1092년 하인리히 4세 지지를 천명하며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하인리히 4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1105년, 그는 안코나, 페르모, 카메리노 일대를 장악한 뒤 안코나 후작을 자칭했다. 그 해 11월 대립교황 실베스테르 4세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했고, 교황 파스칼 2세는 그를 피해 티베르 섬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파스칼 2세를 옹호하며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실베스테르 4세와 함께 오시모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안코나로 귀환했고 1119년 사망했다.
베르너 2세 사후 기록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스폴레토 공국은 11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가 이스트리아 변경백 엥겔베르트 3세를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3세는 2년만인 1137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에게 직위를 넘기고 물러났다. 앞서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을 점유했던 하인리히 오만공은 이제 이탈리아 중부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인 프라이징(Freising) 수도자 오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서 바다로, 덴마크에서 시칠리아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급사한 뒤,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그가 오만하고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알브레히트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울리히 폰 아템스가 콘라트 3세에 의해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사라진 후 무주공산이 된 토스카나 일대에 대한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1140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지시를 받은 카푸아 공작 알폰소가 스폴레토 공국의 일부 지역인 아브루초 북부 일대를 공략하고 트론토강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후에도 토스카나 일대의 도시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했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그의 역량으로는 토스카나를 장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벨프 가문의 벨프 6세에게 직위를 넘기도록 했다. 벨프 6세는 1160년 스폴레토 공국을 아들 벨프 7세에게 물려줬다가, 아들이 1167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자 스폴레토 공작을 재차 겸임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에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 직위는 그대로 맡다가 1173년 정식으로 물러났다. 이후 1177년 우르슬링겐 출신이며 토스카나 후작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의 행정 관료를 맡고 있던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가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했다.
1190년 구엘프파가 스폴레토에서 봉기하여 콘라트 1세를 몰아내고 판둘프 2세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1195년 하인리히 5세가 스폴레토를 탈환하면서 콘라트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했지만,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4세가 시칠리아 반란 진압을 수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해버리면서 입지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직위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1198년 구엘프 파에 밀려 독일로 달아났다.
120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도전한 오토 4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폴레토 공국에 대한 제국의 권리를 교황청에 헌납했다. 그러나 1209년 필리프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오토 4세는 약속을 없던 일로 하고 디에폴트를 스폴레토 공작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스폴레토는 구엘프파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디에폴트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1218년 오토 4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갔다.
한편,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의 아들인 우르슬링겐의 베르톨트 1세는 교황청에 스폴레토 공국을 자기 가문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222년 볼펜뷔텔의 군젤린과 함께 스폴레토로 쳐들어가서 폴리뇨, 구비오, 노케라, 트레비 시를 공략하고 주민들에게 프리드리히 2세를 받들고 자신을 스폴레토 공작으로 섬기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과의 마찰을 가능한 한 완화하고 싶었던 그는 베르톨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그가 스폴레토 공작이 될 수 있도록 교황과 중재할 의사가 없다며 당장 시칠리아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는 1223년 초 더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1228년 여름, 베르톨트는 형제이며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프리드리히 2세를 대신해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을 맡고 있던 우르슬링겐의 레이날트 1세로부터 교황령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스폴레토 공국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안코나 공화국에 속한 노케라에 주둔한 채 레이날트 1세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이에 분노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 해 11월 프리드리히 2세, 레이날트 1세, 베르톨트를 파문하고 구엘프파를 독려해 전쟁을 벌였다. 베르톨트는 조반니 콜론나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에 패한 뒤 시칠리아 왕국으로 도주했다.
1230년 7월 시칠리아로 귀환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화해한 뒤 자신이 없는 동안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멋대로 전쟁을 벌인 레이날트 1세를 체포했다. 이에 베르톨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231년 5월 안트로도코에 자리를 잡은 뒤 토마스 1세 다퀴노가 이끄는 제국군의 연이은 공세를 물리쳤다. 1233년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레이날트를 안트로도코로 압송해 그 앞에 보이며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베르톨트는 레이날트를 풀어주면 안트로도코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말에 따랐다. 그는 레이날트가 석방되자 안트로도코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넘긴 뒤 우르슬링겐으로 귀환했다. 이후 우르슬링겐 가문은 대대로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하다가 1276년 이후로 그만뒀고, 이후 스폴레토는 교황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4. 남부
시칠리아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계 공국들 그리고 사라센과 노르만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건재했던 당시에는 이곳 남부 이탈리아에도 개입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는 독일 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9세기 동로마 제국의 남부 이탈리아 재정복.
서기 1000년경의 남부 이탈리아
10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계 귀족들은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쳐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4.1. 노르만족의 정복 까지의 역사
4.1.1. 랑고바르드계 공국들
4.1.1.1. 베네벤토 공국
1000년, 판둘프 2세는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성물을 놓고 오토 3세와 대립했다. 황제는 대군을 일으켜 베네벤토를 포위했지만, 베네벤토인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한 데다 제국의 수도로 정한 로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철수했다. 1003년 아벨리노 백작 아델페르가 정변을 일으켜 판둘프 2세와 란둘프 5세를 베네벤토에서 축출했다. 이후의 향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1005년경에 베네벤토에서 통치를 행사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몇년 안에 진압된 것으로 추정된다. 1007년 카푸아를 다스리던 란둘프 7세가 사망하자, 판둘프 2세는 카푸아 대공을 겸임하면서 또다른 아들 판둘프 4세를 카푸아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1014년 판둘프 2세가 사망한 뒤, 란둘프 5세가 베네벤토 시의 권력을 승계받은 뒤 아들 판둘프 3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얼마 후 베네벤토 시민들이 반기를 들었지만 진압되었다. 하지만 베네벤토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그는 그들이 최초의 코뮌을 결성하여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는 등 많은 특권을 양보해야 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바리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네스가 베네벤토 인근의 트로이아를 재요새화하고 압박을 가하자,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102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 대공이자 란둘프 5세의 형제인 판둘프 4세를 사로잡은 뒤 베네벤토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트로이아 공략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군은 트로이아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공략에 실패한 후 철수했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1024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남부 이탈리아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자, 다시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 과정에서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하에 있던 대부분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 귀속되거나 독립했고, 공국의 남은 영토는 베네벤토 시와 주변 시골에 불과했다.
1033년 란둘프 5세가 사망한 뒤, 판둘프 3세가 권력을 계승하고 1038년 아들 란둘프 6세를 베네벤토 공동 대공에 세웠다. 1040년, 롬바르드족 출신의 아두인, 멜피의 토포테리파, 그리고 노르만 용병들은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는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판둘프 3세의 동생인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남이탈리아인들에게 여전한 경외를 받는 베네벤토 공국의 일원이고, 실제로는 한미한 세력이니 자기들을 통제하려 들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1041년 9월 3일, 반란군은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 보이오안네스를 사로잡고 베네벤토에 수감했다.
그런데 1042년 2월, 아테눌프는 동로마 제국이 엑사고스토스의 몸값으로 지불한 돈을 가지고 그리스로 도망쳐 버렸다. 당시 노르만 용병대가 살레르노 공작 과이마르 4세에게 상당한 급료를 지불받아 점차 포섭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달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용병대는 기껏 세웠던 지도자가 돈을 갖고 도망쳐버리자 아르이로스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아르이로스는 동로마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며 4년간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다가 1046년 콘스탄티노스 9세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귀순했다. 이렇듯 남부 이탈리아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는 동안,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 부자는 베네벤토 시에서 잠자코 지냈다.
10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메초조르노를 장악했다. 이후 황후 푸아투의 아그네스와 함께 가르가노에 순례자로 방문하고자 했는데, 베네벤토 정부는 아그네스는 기꺼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하인리히 3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마음이 상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 베네벤토를 포위했고, 황제의 압력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2세는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를 파문했다. 판둘프 3세는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동생 디우페리우스[30]와 함께 살레르노 공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군이 베네벤토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하자 베네벤토로 귀환했다.
1050년 교황 레오 9세가 가르가노를 순례하면서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의 파문을 재확인했다. 이에 베네벤토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두 부자를 몰아내고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1051년 4월, 시민들은 교황에게 도시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7월 5일에 이를 수락했고, 1053년 교황 특사 로돌포에게 베네벤토를 관장하게 했다.
1053년 6월 치비타테 전투에서 참패한 레오 9세가 노르만인들에게 사로잡히자, 베네벤토인들은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를 도시에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복위에 성공했지만, 그들은 교황의 봉신을 자처하고 교황령에 상당한 공물을 바쳤다. 이후 1056년 손자 판둘프 4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우고 수 년간 통치하던 판둘프 3세는 1059년 은퇴하여 산타 소피아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1060년에 사망했다.
판둘프 3세의 뒤를 이어 베네벤토 시의 권력을 장악한 란둘프 6세는 1065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부터 " 유대인의 개종을 강제로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과 1071년 10월 교황에 선임된 그레고리오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벤토 시민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낸 것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1074년 2월 7일 아들이자 공동 대공인 판둘프 4세가 베네벤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노르만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출진했다가 몬테사르치오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리하여 유일한 후계자가 사라져버린 란둘프 6세는 1077년 11월 27일에 사망했고, 베네벤토 공국은 노르만계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아풀리아 공국에 흡수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베네벤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이름만 걸어놓을 뿐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다가 1081년 교황에게 돌려주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서임권 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에, 베네벤토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베네벤토에는 공작이나 대공이 오랫동안 세워지지 않았다.
4.1.1.2. 살레르노 공국
1009년, 바리의 랑고바르드계 귀족인 멜루스가 처남 다투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바리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아스콜리와 트로이아를 석권했다. 그러나 1010년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1011년 6월 11일 바리를 상실하고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 과이마르 3세는 반란 진압 후 살레르노에 찾아온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를 융숭하게 대접하며 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지만, 한편으로는 멜루스를 보호하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멜루스는 과이마르 3세와 교황 베네딕토 8세의 지원에 힘입어 가릴리아노 요새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원하면서, 풍부한 전리품을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그러던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과이마르 3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동로마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102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 대공이자 과이마르 3세의 처남인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베네벤토로 진군해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5세를 굴복시키자, 과이마르 3세는 즉시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공물을 바쳤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뒤 새 황제 콘라트 2세가 각지에 반란에 시달리면서 남이탈리아에 간섭할 여력이 없자, 제국에 사절을 보내 처남을 석방시켜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얻어낸 뒤 카푸아로 돌아온 판둘프 4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1027년 과이마르 3세가 사망한 후, 아들 과이마르 4세가 대공에 선임되었다. 1037년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의 가신이었던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0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고자 남하하자, 즉시 동로마 제국과 맺었던 종주관계를 청산하고 황제 편에 섰다. 콘라트 2세는 카푸아를 공략하고 판둘프 4세를 내쫓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과이마르 4세에게 카푸아를 넘기기로 했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란둘프 드렝고를 아베르사 백작으로 선임해 정식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남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노르만 용병들을 대거 고용해 장차 남이탈리아를 재패할 발판으로 삼았다. 1038년 8월 15일 로카 반드라를 공략한 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양도했으며, 란눌프를 산그로강 계곡으로 보내 그 일대를 통제하게 했다. 1039년 4월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만소 2세가 실명형에 처해진 후 추방되자, 그를 구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말피로 진격해 만소 2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조반니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추방한 후 스스로 아말피 공작을 겸임했다. 그 해 7월에는 소렌토를 공략하고 동생 귀도를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으며, 나폴리 공작 조반니 5세를 가신으로 삼았다.
과이마르 4세는 북쪽 방면으로도 세력을 넓혔다. 1039년 5월 코미노, 아퀴노, 트라에토를 제패했고, 1040년 6월에 폰테코르보, 소라, 가에타를 공략했으며, 그 해 10월에 베나프로를 공략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아풀리아에서 발발한 노르만 용병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틈을 타 1041년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었던 나폴리 공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라눌프 드렝고의 활약이 컸기에, 과이마르 4세는 1042년에 란눌프를 가에타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1042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고 이탈리아에 돌아온 판둘프 4세가 일부 영토를 회복하면서,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1042년 노르만인들에 의해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에 추대된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3년 과이마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인정받았다. 1044년 기욤과 함께 칼라브리아 일대를 평정했으며, 스퀼라체에 큰 성을 지었다. 1045년 가에타 공작이자 아베르사 백작을 맡던 란둘프 드렝고가 사망하자, 란눌프의 조카인 아스클레틴이 과이마르 3세의 동의를 얻고 아베르사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가에타 시민들은 과이마르 3세의 동의 없이 아퀴노의 랑고바르드 백작 아테눌프 1세를 공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아스클레틴을 대신하여 가에타를 공격해 전투에서 아테눌프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판둘프 4세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받는 대가로 아테눌프 1세가 가에타 공작에 맡는 것을 용인했다.
1045년 말 아스클레틴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노르만인들은 아스클레틴의 사촌 란눌프 2세 트린카노테(Rainulf Trincanocte)를 아베르사의 새 백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자신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정한 것에 책임을 물었지만, 아베르사의 노르만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는 판둘프 4세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분개한 과이마르 4세는 아베르사로 진격해 란눌프 2세를 사로잡았지만, 기욤의 형제 드로고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아베르사 백작을 계속 맡게 했다. 1046년 강철팔 기욤이 사망하자, 과이마르 4세는 드로고가 아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백작을 맡는 것을 인정하고 여동생 가이텔그리마를 드로고와 결혼시켰다.
10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남이탈리아에 제국군을 이끌고 와서 공작들로부터 주종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는 카푸아를 판둘프 4세에게 반환하고 아베르사와 아말피를 자신의 종주권으로 삼았으며,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 대해 과이마르 2세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고 그곳을 지배하는 노르만족을 자신의 직속 가신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1038년부터 1047년까지 10년 가까이 추진했던 남이탈리아 통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과이마르 4세는 황제의 공격을 받고 자신에게 망명한 베네벤토 공자 다우페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 황제가 돌아가자 1048년 카푸아를 탈환하기 위해 판둘프 4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1048년 아베르사 백작 란눌프 2세가 사망하고 갓난아들 헤르만이 백작위에 올랐다. 당시 헤르만의 사촌이었던 리샤르 드랭고는 드로고에게 반역을 꾀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과이마르 4세는 그를 석방시키게 한 뒤 아베르사로 데려와서 섭정으로 삼게 했다. 2년 후 리샤르 드렝고가 헤르만을 축출하고 아베르사 백작에 올랐을 때 이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아베르사는 과이마르 4세 편으로 돌아섰다.
1051년, 교황 레오 9세는 남이탈리아에 찾아와 과이마르 4세와 드로고를 면담했다. 교황은 노르만족이 많은 교회를 약탈하고 많은 수도자를 살해하고 수녀를 강간하는 등 현지 이탈리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는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교황이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찾아온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교황의 부탁을 받자마자 다시는 교회에 손을 대지 않겠으며 동족들이 주민들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 해 8월, 드로고는 교황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보비노 인근 몬테이라로(Monteilaro)에서 암살당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주민들이 드로고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풀리아를 회복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드로고 사후 아풀리아 백작에 선임된 옹프루아는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이 살해된 몬테이라로를 공략한 뒤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노르만족은 옹프루아의 지휘하에 주변 일대를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약탈했다. 이에 레오 9세는 노르만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고자 독일과 이탈리아 제후 및 기사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를 제패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재원이라 여겼던 과이마르 4세는 교황청과 노르만인들간의 분쟁을 중재하고자 했다.
그러던 1052년 6월 초[31], 과이마르는 아말피 해안가를 걷고 있던 중 아내 게마의 형제 아테눌프와 란둘프를 비롯한 4명의 암살자에게 공격받고 36번이나 칼에 찔러 죽었다. 이때 과이마르 4세의 형제 판둘프도 피살되었고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 등 가족들은 투옥되었지만, 동생 귀도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과이마르 4세를 살해한 처남 아테눌프와 란둘프는 테라노 백작 판둘프 6세의 아들이며 자신들과 함께 과이마르 4세를 처단한 판둘프 3세를 새 대공으로 옹립했다.
귀도는 아베르사로 피신해 노르만인들에게 과이마르 4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노르만인들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로 진격했다.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감옥에 갇혀있던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구출되었다. 귀도는 암살자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살려주려 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이마르 4세의 몸에서 발견된 자상의 수에 근거해 판둘프 3세 등 암살자 4명을 36차례 찔러 죽였다. 이후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기술프 2세로서 살레르노 대공으로 선임되었다.
기술프 2세는 노르만인들이 지역민들을 핍박하고 교회 재산에 손을 대는 것에 반감을 품었기에, 아버지와는 달리 노르만족을 적대했다. 살레르노 공국을 섬기던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대공에 반감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칼라브리아의 산 마르코 성에 자리를 잡은 로베르 기스카르는 살레르노 공국에 속한 여러 마을을 공략했고, 아베르사 백작 리샤르 1세도 독립했다. 그는 이에 맞서고자 아말피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복 형제인 기욤이 소렌토 공작 귀도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살레르노 공국에 있는 귀도의 모든 영지를 물려받은 뒤 기술프 2세를 적대했다. 이에 기술프 2세는 기욤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접근해 1058년 자신의 딸 시켈가이타를 로베르 기스카르와 결혼시켰다.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전쟁을 통해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하자, 기술프 2세는 위협을 느끼고 1071년경 카푸아 대공 리샤르와 함께 아풀리아에서 로베르 기스카의 조카들인 오트빌의 아벨라르, 오트빌의 헤르만, 그리고 몇몇 소영주들의 반란을 지원했다. 또한 아말피와 피사를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여 군자금 확보에 진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분노를 사고 노르만족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아말피와 피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악수였고, 살레르노 공국은 이로 인해 고립되었다.
1076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를 포위 공격했다. 기술프 2세는 수 개월간 항전했지만 12월 13일 시민들이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자 요새로 후퇴해 1077년 5월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면서 성이 함락되었고, 살레르노 전역이 노르만인들에게 심하게 약탈당했다. 기술프 2세는 카푸아로 도주한 뒤 그들이 로베르 기스카르를 적대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곳에서 곧 쫓겨난 뒤 로마로 피신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살레르노의 참상을 알리며 노르만인들을 파문에 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하려면 노르만인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요청을 묵살했다.
1088년 3월 노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한 아말피 공화국은 기술프 2세를 공작으로 추대해 맞섰지만 1089년 4월 20일 항복했다. 그 후 여동생 가이텔그리마가 안착한 사르노 성채에서 여생을 보내던 기술프 2세는 1090년 또는 1091년에 사르노에서 사망해 그곳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살레르노 공국의 명맥은 끊어졌고, 살레르노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후계자들이 대대로 맡은 아풀리아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4.1.2. 동로마 제국령
4.2. 노르만인의 지배
4.2.1. 노르만족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정복
1015년경, 40명 가량의 노르만족 순례자들이 아풀리아 북부 몬테 가르가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동굴 수도원을 순례했다. 이때 바리의 랑고바르드 귀족 멜루스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멜루스는 1009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1010년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에게 패배해 바리를 상실한 뒤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던 교황 베네딕토 8세의 도움으로 가릴리아노 요새에 자리잡았다.멜루스는 노르만 순례자들의 지도자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이 바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풍부한 전리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노르만족의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북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남쪽의 시칠리아 토후국의 침략으로부터 변경 요새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후 라눌프 드렝고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귀족들, 교황령,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에 잇따라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고, 1030년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로부터 아베르사(Aversa)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으면서 남이탈리아에 정착했다. 노르망디 공국에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지 못해 곤궁하게 살아가던 노르만 전사들은 라눌프의 성공담을 전해듣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이리하여 훗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제패한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하게 될 노르만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1058년 ~ 1090년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정복.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에 집단 이주한 뒤 교황, 랑고바르드 귀족, 동로마 제국을 오가며 용병 활동을 하고,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수여받으면서 차츰 영향력을 키웠다. 이들 중에서 오트빌 가문이 두각을 드러냈다. 오트빌 가문의 가주 탕크레드는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를 영지로 삼고 있었으며, 2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자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에는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식들은 활로를 찾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주했다. 장남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2년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위를 확보했고, 뒤를 이은 차남 드로고(Drogo)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 작위의 정당성과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현지 이탈리아인을 심하게 핍박했다. 많은 교회가 약탈당하고 많은 수도자가 살해당하고 수녀는 강간당했으며, 노르만군이 들이닥친 마을 중 무사했던 곳은 별로 없었다. 이에 현지민들은 노르만족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고, 기존에 남이탈리아를 다스렸던 랑고바르드 귀족들과 동로마 제국 역시 위협을 느꼈다. 1053년 교황 레오 9세를 중심으로 뭉친 랑고바르드족- 로트링겐 공국- 스와비아 연합군이 노르만족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 역시 이에 호응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교황이 이끈 연합군은 치비타테 전투에서 노르만족에게 완패했고, 레오 9세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가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종주권을 갖는 것을 인정한 후에야 겨우 풀려났다. 아르이로스는 북상하던 중 교황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철수했다.
그 후 노르만족은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의 지휘하에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섰다.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비록해 그의 형제들에게 각각 아풀리아 백작 및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백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아풀리아는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속했고 시칠리아는 시칠리아 토후국 수중에 있었다. 즉,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 지역들을 자기 것으로 삼을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1059년 형 윙프레가 죽자 형이 명목상 갖고 있던 작위들까지 상속하면서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로베르 휘하의 노르만 군대는 둘로 분산되었다. 하나는 로베르 본인의 지휘하에 아폴리아와 그 일대를 경략하는 본대와 다른 하나는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 1세의 지휘하에 칼라브리아와 그 일대를 경략하려는 분대로 나눠졌다.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아풀리아에서 아폴리아를 점령하고 돌아온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사이 동로마 황제 1060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기스카르가 칼라브리아 정복을 완료하는 사이에 이탈리아에 아불하레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아불하레는 전임 총독 아르이로스와 힘을 합쳐 아풀리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뒤 기스카르의 본거지인 멜피를 포위했다. 기스카르와 루지에로는 급히 멜피로 달려와서 1061년 동로마군을 격퇴해 멜피를 구했고, 여세를 이어가 브린디시와 오리아를 탈환했다
그러던 1061년 2월, 카타니아와 시라쿠사의 에미르 이븐 알 툼나가 엔나의 통치자 이븐 알 하바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자칫하면 자기 영토를 잃게 생기자, 그는 칼라브리아의 밀레토(Mileto)에 머물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안 그래도 풍요로운 시칠리아를 공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로베르에게는 이보다 좋은 명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과 현지인들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기에, 동생 루지에로 1세에게 시칠리아 공략을 맡겼다. 이리하여 노르만인들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의 막이 올랐다.
1061년 2월, 루지에로 1세는 160명의 기사단과 이븐 알 툼나가 이끄는 아랍군과 함께 메시나 북쪽의 파로 항 인근에 상륙하여 시칠리아의 북쪽 해안을 따라 이동해 내륙으로 진출했다. 그는 로메타와 밀라초를 습격해 상당한 전리품을 확보한 뒤 파로 항으로 돌아와서 전리품을 배에 실었다. 메시나의 아랍 수비대는 화물을 배로 옮기느라 분주하던 노르만인들을 기습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이르렀을 때, 마침 악천후 때문에 적재가 중단되어서 모든 노르만인이 해안에 있었다. 루지에로 1세는 즉각 아랍군의 정면으로 돌진했고, 그의 조카 셀로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요격했다. 아랍인들은 이내 크게 패했고, 메시나로 도주하다가 상당수가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루지에로는 다음날 아침 메시나 공성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메시나 주민들이 완고하게 저항하면서 쉽사리 함락되지 않자, 이븐 알 하바스가 파견한 아랍군이 도착할 것을 걱정한 루지에로는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폭풍이 닥치는 바람에 항해가 불가능했고, 그는 사흘 동안 해안에서 아랍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그러다가 폭풍이 잠잠해지자 신속히 배를 타고 칼라브리아로 출항했지만, 메시나 해협에서 아랍 함대의 요격을 받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레지오 항구에 가까스로 상륙한 루지에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셨다"라며 모든 전리품을 레지오 교회 건설에 기부했다.
106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원군을 이끌고 레지오에 도착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 형제는 2천 가량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시칠리아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2번째 원정을 감행했다. 로베르가 메시나 북쪽 해안에 상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적 함대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루지에로는 500 기사들을 이끌고 새벽 무렵 메시나 남쪽 해안에 기습 상륙했다. 당시 이븐 알 하바스는 메시나 북쪽 해안에 전군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메시나는 텅 비어 있었다. 루지에로는 즉시 메시나에 입성하여 깃발을 꽂았다. 날이 밝자 메시나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바스는 섬 깊숙이 철수했고, 메시나 해협을 감시하던 아랍 함대 역시 팔레르모로 철수했다.
뒤이어 1,500 병사들을 이끌고 메시나에 도착한 로베르는 아랍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고 오직 기독교도들만 그곳에 있게 한 뒤 도시를 요새화하고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 후 이븐 알 툼나를 앞세워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군해 로메타와 파자노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점령했다. 기독교도들은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성대하게 환영했고, 현지 아랍인들 역시 자신들의 주군인 이븐 알 툼나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왔다고 여기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만인들이 메시나와 로메타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가용 가능한 전력은 700명으로 줄어들었다. 엔나 지방의 센투리페에서 처음 저항에 직면했을 때, 이 정도 병력으로는 도시를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는 공성전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아랍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시장에 팔았다.
그러던 중 이븐 알 하바스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인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하고, 하바스의 본거지인 엔나를 향해 진격했다. 하바스는 엔나에서 수성전에 임하려 했지만, 적군이 엔나 주변 지역을 닷새간 약탈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밖으로 출진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노르만군은 700명인데 비해 아랍군은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무장한 노르만 기사들은 가볍게 무장한 아랍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선보였고, 아랍군은 반나절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참패해 엔나로 도주했다.[32] 하지만 엔나 공략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윽고 겨울이 다가오자,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메시나로 철수한 뒤 지금까지 정복한 영토 중 로메타 등 시칠리아 북동부 지역을 직접 관할하면서, 나머지 영토는 동맹인 이븐 알 툼나에게 맡겼다. 로베르가 이탈리아 본토로 떠난 뒤, 메시나에 남은 루지에로는 1061년 12월 다시 아랍인들을 습격하여 아그리젠토까지 진출했다가 귀환하던 중 트로이나 주민들의 귀순을 받아들여 그곳에 수비대를 남긴 뒤 메시나로 이동했다. 이후 칼라브리아로 가서 칼라브리아에 남겨둔 약혼자 데브뢰의 유디트와 재회해 1062년 초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이븐 알 툼나와 함께 페탈리아를 공략해 시칠리아 내 영토를 굳건히 한 후 칼라브리아로 돌아온 루지에로는 로베르에게 칼라브리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로베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루지에로가 머물고 있던 밀레토를 습격했다. 루지에로가 그라체(Gerace)로 도주하자, 그라체 주민들은 그를 숨겨줬다. 하지만 그라체의 유지였던 바실리가 로베르에게 루지에로의 망명 소식을 전했다. 이에 로베르는 한 밤중에 그라체에 잠입해 바실리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새면서 로베르가 그라체에 잠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주민들은 바실리의 집에 쳐들어가서 바실리를 잡아 죽였다. 로베르가 집 문을 걸어잠그고 대항하자, 그들은 집을 봉쇄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뒤늦게 주군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로베르의 군대는 루지에로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루지에로는 그라체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로베르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범죄했으니 그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봉쇄를 풀자, 루지에로는 집안에 들어가서 로베르와 대면했다. 두 사람은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한 형제 마냥 서로를 끌어안고 화해했다. 이후 그들은 칼라브리아를 동등하게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렇듯 로베르와 루지에로가 한바탕 갈등을 벌이다가 화해했을 때, 시칠리아에서 노르만인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이븐 알 툼나가 적의 습격으로 살해당하고 트로이나와 페탈레아의 노르만 수비대가 메시나로 철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즉시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트로이나를 다시 점령한 뒤 그곳에 새 수비대와 아내 유디트를 남겨두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니코시아로 향했다. 그러나 처음에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환대했던 트로이나의 그리스 주민들은 노르만인들이 약탈을 일삼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루지에로가 떠난 사이에 노르만인들을 쓸어버리고 유디트를 인질로 삼기로 마음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디트는 노르만 수비대를 소집한 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항했고, 루지에로는 즉각 트로이나로 돌아와서 아내를 구했다.
트로이나 주민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인근 마을의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지에로는 사방에서 아랍인들이 몰려오자 아내와 수비대를 이끌고 도시 성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훨씬 더 많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했다. 그리스인과 아랍인들은 성채를 포위하고 4개월 동안 공격했고, 노르만인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타고 다니던 모든 말을 잡아먹어야 했다. 게다가 따뜻한 옷도, 장작도, 담요도 없었기에, 겨울이 닥치자 얼어죽는 병사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죽겠다고 판단한 루지에로는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포도주를 마시며 경계를 게을리하던 아랍인들은 노르만인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모조리 제압되었다. 다음날 아침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한 노르만인들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그 후 루지에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칼라브리아로 가서 새 군마를 모았고, 유디트는 트로이나의 수비대를 통솔했다. 그녀는 밤에도 요새를 순회하고 병사들의 기강을 몸소 점검해 주민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았다.
1063년 루지에로가 군마를 구해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곧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다. 노르만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압둘라 이븐 하우칼과 이븐 알 하바스는 힘을 합치기로 했고, 명목상 주군으로 섬기던 지리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지리 왕조 술탄 티민은 아들 아이유브와 알리 왕자가 이끄는 두 군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각각 팔레르모와 아그리젠토에 상륙한 아이유브와 알리의 군대는 시칠리아 토후들의 병력과 합세한 뒤 노르만군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루지에로와 조카 셀로는 136명의 기사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에 비례하는 보병을 더하면 대략 500~600명 가량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출진한 아랍군은 기병만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아랍군의 전력이 적어도 4대 1로 우세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양측은 1063년 6월 체라미(Cerami) 마을 인근을 흐르는 강 양쪽의 언덕 꼭대기에 진을 치고 사흘간 대치했다. 그러다가 적군이 진영을 걷고 철수하자, 루지에로는 약 13km 떨어진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노르만군이 떠나자, 지리 왕조군은 철수한 지 4일만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뒤 강을 재빨리 건너 체라미 마을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전군에 체라미로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노르만군이 절반 정도를 이동했을 때, 아랍군이 이미 강을 건너 체라미 마을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라미가 이대로 함락된다면, 트로이나가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메시나와 트로이나 간의 연락로가 차단당할 위험이 컸다.
이에 루지에로는 조카 셀로에게 36명의 기사와 함께 체라미로 앞서 가라고 명령했다. 셀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3,000명의 기병과 다수의 보병대가 마을을 에워싼 채 숙영지를 세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적군이 인근에 노르만군이 온 줄 모르고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들의 진영을 즉시 공격했다. 셀로가 격노한 사자처럼 진영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자, 아랍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다.
그 후 나머지 군대와 함께 체라미에 도착한 루지에로는 이곳에 남아서 농성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당시 루지에로의 부관이자 훗날 동로마 제국의 용병대장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될 루셀 드 바이욀이 "적을 쫓지 않고 여기서 겁쟁이처럼 숨어 버린다면 더 이상 당신을 돕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다른 노르만인들 마저 동조하자, 전군을 이끌고 아랍군과 정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노르만군은 셀로, 루셀 등이 이끄는 선봉대와 루지에로가 직접 지휘하는 후위대로 나뉜 채 출진했다. 한편 아랍군 역시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자 진영에서 출진해 3개 사단으로 이뤄진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접근했을 때, 팔레르모 콰이드(Qaid)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이끄는 지리군 선두 부대가 노르만군의 위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선점한 뒤, 셀로의 선봉대를 우회하여 루지에로가 이끄는 노르만 후위대를 급습했다. 루지에로는 즉각 행군을 멈추고 전군에 방향을 틀어 아랍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한 뒤 말을 몰아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라테라에 따르면, 성 게오르기우스가 돌연 출현해 노르만인들보다 앞서 말을 타고 아랍군의 대열이 가장 밀집한 곳에서 아랍인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루지에로의 창 끝에 성자의 깃발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노르만인들이 앞장서서 돌격하는 주군의 뒤를 따라 용맹하게 돌진한 것만은 분명하다.
루지에로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 아르카디우스를 사살했다. 그러나 아랍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활용해 루지에로와 부하들을 에워쌌다. 노르만인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아랍군은 그들을 포위섬멸하고자 역공을 가했다. 이렇듯 양측이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셀로의 선봉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지리군의 양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주군이 전사한 데다 노르만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시달렸던 아랍인들은 사기가 꺾여 팔레르모로 달아났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다른 지리군 2개 사단은 전우들이 패주하자 공포에 질려 도주했다. 노르만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한 뒤 텅 비어버린 적 진영을 점령했다. 이후 체라미 주변 지역에서 낙오병들을 사냥하다가 전리품을 싣고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루지에로는 체라미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시칠리아 북동부의 지배를 확고하게 굳혔지만, 병력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64년 로베르가 시칠리아에 상륙해 동생과 합세하면서 전력이 증강되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가모 시를 공략한 뒤 팔레르모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팔레르모가 해상 수송 덕분에 굳건히 버티자, 해군이 없어서 항구를 봉쇄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팔레르모 공략은 요원하다고 판단해 메시나로 철수했다. 이후 아풀리아에서 옹프루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들을 지지하는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로마군은 이들과 연합해 브린디시, 오리아, 타란토를 다시 공략하자, 로베르는 시칠리아 문제를 동생에게 일임하고 섬을 떠났다.
루지에로는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아랍인들의 영역에 기병대를 파견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형이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이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성을 새로 건조하는 등 지배 영역의 방위를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의 아랍 세력은 적이 소극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이용하기는 커녕 심각한 내분에 휩쓸렸다. 지리 왕조의 간섭이 심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븐 알 하바스가 주민들을 선동해 지리 왕조의 왕자 알리, 아이유브를 공격한 것이다. 이 내전은 1067년이 되어서야 이븐 알 하바스가 패사하고 아이유브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이유브는 시칠리아 토후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뒤 1068년 미실메리(Misilmeri) 시 인근에서 약탈하던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을 요격했다.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은 이번에도 수적으로 훨씬 열세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해 아랍군을 압도했다. 아이유브와 추종자들은 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시칠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고 튀니지로 도주했다. 그 후 시칠리아의 아랍인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 없이 노르만인들의 침략에 개별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하지만 루지에로 역시 정복 전쟁을 신속하게 완료하거나 점령지를 통제하기에 충분한 인력이 없었다. 게다가 형 로베르로부터 바리 공성전을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그곳으로 가야 했기에,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바리가 함락되는 1071년까지 미뤄졌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의 남부는 1068년,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침략에 대응하고자 남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대거 차출했다. 기스카르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감행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던 모든 도시를 쉽게 공략했다. 1068년 6월, 그는 아르시나에 갇혀 있던 마지막 반란군 요새를 함락시켰고, 동로마군을 바리에 몰아붙였다. 1068년 8월 5일, 기스카르는 바리를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봉쇄하고 포위 공격을 가했다. 아르이로스는 공방전이 한창일 때 병사했고, 아불하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방전이 막 시작할 때 바리에서 탈출했다.
1069년 초, 스테파노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노르만 함대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가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다. 그럼에도 스테파노스는 기어이 봉쇄를 뚫고 바리로 입성하여 음식과 무기를 지원한 뒤 바리 수비를 이끌었다. 1071년 초, 스테파노스는 바리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로마노스 4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파견한 함대는 바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노르만 함대에게 섬멸되었다. 눈앞에서 이 참상을 지켜본 바리 주민들은 전의를 잃고 성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1071년 4월 16일,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바리에 입성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1071년 4월 바리를 함락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루지에로와 함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노르만군은 카타니아를 공략한 뒤 1071년 8월 팔레르모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했다. 팔레르모 항구에 있던 아랍 함대는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하루 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패퇴했다. 이후 수비대와 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끝에 1072년 1월 노르만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토후국이 다스린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였던 팔레르모가 노르만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1072년 1월 6일 팔레르모에 입성한 뒤 팔레르모 내 모스크들을 교회로 개조했다.
그 후 루지에로는 형 로베르가 이탈리아 본토의 지배를 굳히는 동안 시칠리아 원정을 꾸준히 이어갔다. 다만 대규모 원정을 벌이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영지에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약탈을 벌이는 방식을 추구했고, 그렇게 약탈을 해서 모은 자금을 토대로 용병들을 고용한 뒤 성채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4.2.2. 로베르 기스카르
한편 1073년, 기스카르는 미하일 7세에게서 군사 동맹을 맺는 대가로 자신의 동생과 기스카르의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기스카르가 별다른 답신을 보내지 않자, 미하일 7세는 자신과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의 갓난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그의 딸과 결혼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훈장 44개를 기스카르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겠으며, 매년 금 200파운드를 줄 테니 군사 동맹을 맺차고 청했다. 기스카르는 차기 황제의 황후에 자기 딸 헬레나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1075년 튀니지의 해적들이 마차르(Matzar)에 상륙하여 포위 공격을 가하자, 루지에로는 야밤에 요새에 잠입한 뒤 날이 밝자마자 해적들을 습격해 모조리 몰살했다.
1077년,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서쪽에 남아있는 2개의 사라센 요새 중 하나인 트라파니를 포위 공격했다. 그의 사생아 조르다노는 야밤에 100명의 기사와 함께 초원에 풀어놓은 양떼를 지키고 있던 수비대를 습격해 모조리 몰아내고 가축들을 탈취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공급할 길이 막막해지자, 트라파니는 곧 항복했다. 1078년, 루지에로는 타오르미나 시를 포위한 뒤 인근에 도시의 연락망을 차단하는 22개의 요새를 건설한 후 아랍 함대가 타오르미나 만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 지원군이 올 가망이 없자, 타오르미나의 에미르는 루지에로에게 항복했고 에트나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동로마의 정세가 꽤 불안정해졌다. 그런데 1078년,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폐위되면서, 기스카르의 딸 헬레나가 차기 황후가 될 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기스카르는 이를 빌미삼아 발칸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간 지배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는 데 시간을 보낸 뒤, 1080년 롬바르디아와 아풀리아 전역에서 많은 장정을 징집하고 선박을 대대적으로 건조하는 등 원정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살레르노에 라이토르라는 수도자가 찾아왔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실은 폐위되었던 미하일 7세라면서, 니키포로스 3세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뒤 수도원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니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지만 정설은 없다. 다만 미하일 7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주교로 지내고 있었으니, 이 자가 가짜인 것만은 분명하다. 로베르 기스카르 역시 그가 가짜라는 걸 눈치챘지만, 이 인물을 동로마 황제로 복귀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기로 하고 라이토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줬다.
1080년 12월, 기스카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퐁투아즈 백작 라둘프를 사절을 보내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헬레나를 만족스럽게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노르만인들을 회유하고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지지를 확보하게 했다. 라둘프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니키포로스 3세를 몰아내고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한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와 친분을 다진 라둘프는 기스카르에게 돌아가서 "전 황제 미하일이 수도원에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미하일 황제라 자처하는 자는 가짜고, 헬레나 역시 잘 대우받고 있다.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와 우호를 제안하고 헬레나를 귀국시키거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이참에 동로마 제국을 자신의 발 아래 완전히 굴복시키기를 희망했기에 라둘프의 제안을 뿌리치고 원정을 단행했다.
1081년 5월, 기스카르는 1,3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16,000명의 병력과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살레르노에서 아드리아 해로 출항했다. 그들은 아블로나에서 일찍이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었던 라구사 공화국 소속 함선들과 합세했다. 함대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항해해 코르푸에 닿았고, 코르푸의 제국 수비대는 즉각 항복했다. 기스카르는 코르푸를 전진 기지로 삼은 뒤 일리리아의 주요 항구인 디라히온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코르푸에서 북쪽으로 가서 아크로케라우니아 곶을 도는 순간, 함대는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 일부 함대가 침몰되었다. 기스카르는 함대를 가까스로 수습해 디라히온 연해의 정박지에 상륙시켰다.
얼마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도메니코 셀보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가 노르만 함대를 야습했다. 그들은 지중해에서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는 오트란토 해협을 노르만족이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참에 제국으로부터 점수를 따서 상업적 특혜를 얻고 싶었기에, 알렉시오스 1세의 구원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네치아 함대는 보트에 활대의 양쪽 끝까지 병사들을 싣고 밧줄로 들어올려 아래의 적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동로마 측으로부터 사용 방법을 숙지한 그리스의 불을 퍼부었다. 결국 노르만 함대는 궤멸되었고, 기스카르의 육군은 상륙지에서 고립되었다.
하지만 기스카르는 포기하지 않고 디라히온을 포위한 뒤, 디라히온 수비대 지휘관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미하일 황제를 복위시키려 하니 당장 따르라고 요구했다. 요르요스는 자신이 미하일 황제를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눈앞에서 확인한 뒤 성문을 열고 도시를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라이토르는 즉시 군인과 귀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곽 앞에 행진했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그를 보고 "넌 미하일 황제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일이 풀리지 않자, 로베르는 도시를 맹공격했다. 하지만 디카리움 수비대는 여름 내내 버텼고, 간간히 돌격대를 내보내 노르만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1081년 10월 15일, 알렉시오스 1세가 20,000~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디라히온 인근에 도착했다. 황제의 군대에는 타그마 8,800명, 프랑크 용병 1,00명, 바랑인 친위대 1,000명, 룸 술탄국이 보내준 궁기병대 9,000명,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두클랴 왕국의 국왕 콘스탄틴 보딘이 이끄는 부대가 포함되었다. 기스카르는 디라히온 북쪽으로 이동한 뒤 10월 18일 황제의 군대와 대적했다. 중앙 대열은 자신이 맡았고, 좌익이나 측면에 해당하는 내륙 쪽엔 아들 보에몽 1세가 맡았으며, 우익은 랑고바르드족 공주이자 자신의 아내인 시켈가이타가 맡았다.
이후 벌어진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노르만군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뒤 바랑인 친위대에 고용된 앵글로색슨족 장병들의 복수심에 가득찬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우익이 붕괴되면서 꼼짝없이 패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시켈가이타가 병사들을 독려했다. 안나 콤니니는 알렉시아스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병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로베르의 아내 시켈가이타(남편 곁에서 말을 달리는 그는
아테나까지는 아니더라도
팔라스처럼 늠름해 보였다.)[33]는 맹렬히 그들을 쫓아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마치
호메로스의 시를 읽는 것처럼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어디까지 달아나려느냐? 어서 일어나서 사나이답게 행동하라!"
그래도 병사들이 계속 달아나자, 그녀는 장창을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자들을 쫓았다. 그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너희는 어디까지 달아나려느냐? 어서 일어나서 사나이답게 행동하라!"
그래도 병사들이 계속 달아나자, 그녀는 장창을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자들을 쫓았다. 그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보에몽이 좌익의 궁수 부대를 이끌고 아군 전열 깊숙이 침투한 바랑인 친위대를 향해 화살을 퍼붓자, 바랑인 친위대는 기세를 잃었다. 그들은 아군 본대보다 너무 앞서 나왔기 때문에 퇴로마저 차단되었고, 결국 대부분 사살되었다. 한편 알렉시오스 1세는 중앙에서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노르만 군대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패주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급기야 룸 술탄국 궁기병대와 콘스탄틴 보딘의 부대가 전장을 이탈해버리자, 알렉시오스 1세는 홀로 말을 몰아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오흐리드의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디라히온 전투에서 패주하는 알렉시오스 1세 황제 |
디라히온은 알렉시오스 1세가 패주한 뒤에도 4개월을 더 버텼지만, 1082년 2월 한 베네치아 주민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함락되었다. 그 후 기스카르는 일리리아 전역을 수 주일만에 휩쓸고 카스토리아를 뒤이어 함락시켰다. 이제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해 4월, 기스카르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이보다 앞서, 기스카르에 의해 아풀리아 공작 직위에서 밀려난 옹프루아의 아들 아벨라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해 있었다. 아벨라르는 알렉시오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황제가 내준 막대한 자금과 형제인 에르망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서둘러 귀국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시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금괴 36만 개, 고위 궁정 관리 스무 명의 급료, 진주가 박힌 황금 가슴 장식, 크리스털 술잔, 붉은줄마노로 만든 컵, 그리고 '성인들의 유품이 작은 꼬리표로 분류되어 담긴 금갑 성물함' 등 귀중한 보물들을 선물했다. 하인리히 4세는 동로마 제국이 기스카르를 묶어두는 사이 성직자 서임 문제로 갈등을 벌이는 교황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하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상황이 이처럼 꼬이자, 기스카르는 할 수 없이 아들 보에몽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긴 뒤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알렉시오스 1세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가며 국방비를 대거 충당해 병력을 다시 끌어모은 후 기스카르가 떠난 틈을 타 노르만군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보에몽은 야니나와 아르타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고 마케도니아 전역과 테살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던 1083년 봄, 양군은 라리사에서 대치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전투가 임박할 때 주력군을 매부인 요르요스 멜리세노스와 바실리오스 쿠르티키오스에게 맡기고, 이들에게 적을 향해 진군하되 맞붙는 순간 방향을 돌려 후퇴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 알렉시오스는 사전에 선발한 병력을 이끌고 우회로를 통해 노르만 진영의 배후로 돌아갔다.
이후의 전투에서 노르만군이 후퇴하는 적을 맹추격하는 동안, 알렉시오스 1세는 적의 진지를 습격해 남아 있는 적군을 사살하고 보급품을 모조리 약탈했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보에몽은 카스토리아로 퇴각했다. 그 후 보에몽의 노르만군은 제국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급료를 지급받지 못해 전의를 잃었다. 여기에 알렉시오스가 탈영병에게 큰 보수를 지불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은 더욱 싸울 의욕을 잃었다. 보에몽이 자금을 얻어오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자, 노르만군은 대거 알렉시오스 1세에게 투항했다. 베네치아 함대는 이 틈을 타서 코르푸와 디라히온을 수복한 뒤 동로마 제국에 넘겼다. 1083년 말에 이르자, 발칸 반도에서 노르만군이 점령한 지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몇 개 섬과 해안 지대 뿐이었다.
한편, 기스카르는 반란을 평정한 뒤 산탄젤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하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다. 이후 1084년 봄 새롭게 병력을 소집한 뒤 로마로 진군하여 하인리히 4세와 일전을 벌이려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사전에 로마를 떠나 롬바르디아로 철수했고, 1084년 5월 27일 로마에 입성한 기스카르는 로마를 사흘 동안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봉기했고, 로베르는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가 구원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노르만군은 민병대를 꺾고자 로마 곳곳에 불을 질렀고, 카피톨리누스와 팔라티누스 언덕을 포함한 수많은 지역에서 성당과 궁전, 고대의 신전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기록에 따르면, 콜로세움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사이의 건물들 가운데 불타지 않은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활약으로 남부 이탈리아 전역과 시칠리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노르만족.
그 후 기스카르는 신변 보호를 명분삼아 그레고리오 7세를 본거지인 살레르노로 이송시킨 뒤 1084년 가을 보에몽과 다른 두 아들 루지에로와 기, 그리고 150척의 새 함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부트린토에서 폭풍으로 인해 2달 동안 항해가 중단되었고, 코르푸 해협을 가까스로 건넜을 때 베네치아 함대의 공격을 받아 3일 동안 2차례나 참패했다. 하지만 기스카르는 잔여 함대를 끌어모은 뒤, 적이 승리에 취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해 3번째 해전에서 승리했다. 안나 콤니니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3,000명의 베네치아 병사가 죽고 2,5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 포로들은 이후 신체 훼손형에 처해졌고, 도메니코 셀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제 직에서 물러났다.
코르푸를 장악한 노르만군은 육지에 상륙한 뒤 원정을 이어가려 했으나, 1084년 겨울에서 1085년 봄까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노르만 기사 500명이 죽고 상당수 병력이 몸져 누웠다. 여기에 기스카르의 장남 보에몽도 병에 걸려 바리로 후송되었다. 로베르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1085년 초여름 원정을 재개하여 케팔로니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자신 역시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아테르 곶에 상륙한 뒤 피스카르도 만으로 들어가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085년 7월 17일 아내 시켈가이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노르만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로베르 기스카르 사후, 로베르와 시켈가이타의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가 아풀리아 공국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보에몽 1세가 이에 반감을 품고 내전을 일으켰다. 루지에로 1세는 두 조카의 전쟁을 지켜보다가 1085년 9월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기스카르와 공동으로 소유했던 모든 칼라브리아 성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보에몽과 루지에로 보르사 간의 갈등을 중재해 보에몽이 루지에로 보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타란토, 올리아, 오트란토 등 솔렌티나 반도를 다스리는 '타란토 공국'의 공작이 되게 했다.
4.2.3. 시칠리아 백국
루지에로 1세는 1071년 시칠리아 토후국의 중심지인 팔레르모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 백국의 백작을 자처했다. 형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고 이후 벌어진 조카들 간의 분쟁 또한 조율 한 후 남은 생애를 시칠리아의 남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했다.1086년, 루지에로는 엔나 토후국 소유의 아그리젠토를 공략하고 엔나의 에미르인 이븐 하무드의 아내와 자식들을 생포했다. 1087년 초, 루지에로는 엔나 성벽에 도착한 뒤 이븐 하무드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이븐 하무드는 그럴 의사가 있지만 무슬림들의 보복이 두렵다고 밝혔다. 이에 루지에로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과 맞서는 모양새를 보이다가 군대를 탈영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권했고, 이븐 하무드는 그 말에 따랐다. 에미르가 그렇게 투항해버리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아랍군 역시 항복했다. 이븐 하무드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은 후 칼라브리아에서 영지를 수여받았다.
1087년 루지에로 보르사와 보에몽 1세간의 전쟁이 재발했다. 보에몽이 루지에로 보르사를 따르던 코센차 시를 공략하자, 루지에로 보르사는 삼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루지에로는 즉시 출진하여 코센차에서 보에몽을 몰아낸 뒤 두 사람을 중재했다. 그 결과, 루지에로 보르사는 코센차를 보에몽에게 내주는 대신 바리를 받았고, 그는 아풀리아 공국을 도운 대가로 팔레르모와 메시나의 공동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루지에로는 아랍인들이 여전히 다스리고 있던 시칠리아 남부 지역으로 공세를 펼쳐 1088년 부테라를 공략했고, 1090년 2월 노토를 복종시켰다. 1091년 몰타에서 활동하던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고 몰타의 주요 도시인 므디나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와 몰타 전역이 노르만인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여기에 1098년 카푸아의 어린 조카 리카르도 2세가 카푸아를 되찾게 해주는 대가로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했다. 그는 이렇듯 시칠리아 정복을 주도하는 한편 형제와 조카들간의 갈등을 중재한 대가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를 정복한 뒤 서유럽 기사와 라틴 성직자들을 섬에 재정착하도록 권장했지만, 대다수 인구가 무슬림과 그리스인이고 노르만족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유지하기 위해 국가적 및 종교적 관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아랍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는 공용어로 쓰였고, 기존의 법률은 효력을 유지했다. 자신에게 복종한 에미르와 콰이드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영지를 수여받았으며, 무슬림 병사들은 루지에로의 군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 루지에로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하에, 무슬림들은 시칠리아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세금 및 관세 징수 역시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루지에로는 다섯 개의 새로운 가톨릭 교구를 시칠리아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시칠리아 무슬림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본래 교회였다가 모스크로 개조된 건물들은 교회로 복원되었지만, 새로 지어진 모스크들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스인들 역시 정교회를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루지에로는 발데모네 일대에 12개 이상의 정교회 수도원을 건설하는 것을 후원했다. 이러한 조치에 만족한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노르만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전란으로 쇠락했던 시칠리아는 빠르게 회복했다.
시칠리아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프리드리히 2세 시대까지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과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정복에 기여한 노르만 귀족들에게 영지를 골고루 나눠주면서도,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감독했다. 여기에 자신의 가신들이 또다른 가신을 두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 내분의 여지를 없애려 노력했다. 그 결과, 가신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던 형 로베르와는 달리, 그는 가신들의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다.
루지에로는 1101년 6월 22일 밀레토에서 사망하여 밀레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시모네가 시칠리아 백작에 취임했지만 어머니 아델라이데가 섭정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105년에 칼라브리아의 밀레토에서 요절했고, 동생 루지에로 2세가 신임 백작에 취임했다.
그 역시 어머니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의 섭정을 받았다. 1112년 시칠리아의 수도가 밀레토에서 팔레르모로 이전했을 때 왕실 일가와 함께 팔레르모로 이동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기사라고 칭하며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1122년 아풀리아 공작이자 사촌인 굴리에모 2세가 민심의 이반과 재정 악화로 인해 곤란을 겪자, 루지에로 2세는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아풀리아 공국과 시칠리아 백국의 공동 소유로 되어있던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시칠리아 백국이 완전 소유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칼라브리아 일대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게 했다. 1125년에 굴리에모 2세가 재정 지원을 재차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자녀가 없던 굴리에모 2세의 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1127년 7월 25일 굴리에모 2세가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굴리에모 2세는 죽기 전에 다른 사촌인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2세와 교황 호노리오 2세에게 아풀리아 공국의 상속권을 약속했다.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아랍인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기에 아풀리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지만,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풀리아 귀족들에게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루지에로는 자신이 아풀리아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기정사실로 삼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풀리아의 수도인 살레르노 성벽에 이르렀다. 살레르노는 처음에 그를 공작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루지에로가 자유시로 인정해주고 세금 특혜를 약속하는 등 여러 조건을 내걸자 비로소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복 누이 마틸다의 남편이자 알리페 남작인 라눌프 2세에게 아리아노 백작의 영토 일부를 가지게 해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다른 대도시 및 남작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회유되었고, 루지에로 2세는 1127년 말에서 1128년 초에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루지에로가 시칠리아로 돌아간 뒤, 호노리오 2세는 트로이아 시,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 및 여러 영주들을 포섭하여 반 시칠리아 동맹을 맺은 뒤 루지에로를 파문했다. 1128년 5월, 루지에로는 남부 이탈리아로 재차 진군해 아풀리아에 도착한 뒤 그해 7월 교황군과 브라다노에서 대치했다. 그는 교황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는 대신 협상을 택했고, 양측은 2개월간 대치하며 사절을 교환했다. 호노리오 2세는 처음에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지만, 교황을 따르던 영주들이 점차 서로 다투었고 용병들도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응했다.
1128년 8월 22일, 교황은 베네벤토에서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루지에로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베네벤토가 교황에게 속해 있으며 카푸아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1129년, 루지에로는 여전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남작들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다. 라눌프 2세가 트로이아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로베르토 2세를 자신의 가신으로 인정했다. 1129년, 멜피에 아풀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을 집결시킨 뒤 자신과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130년 2월 14일, 호노리오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교황청은 2명의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아나클레토 2세로 분열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추종하는 세력에 밀려 로마를 떠나야 했지만, 대부분의 유럽 군주가 그를 지지했다. 로마를 통제했지만 외부 세력으로부터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한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아나클레토 2세에게 자신을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대관식을 치러준다면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130년 9월 27일,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 2세와 그의 후손에게 시칠리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에 대한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고, 루지에로 2세는 살레르노에서 열린 남부 이탈리아 남작들의 대규모 회의에서 자신을 왕으로 받들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130년 12월 25일, 아나클레토 2세의 사절인 코스마스 추기경은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루지에로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 추기경은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34]
4.2.4. 시칠리아 왕국
4.2.4.1. 오트빌 왕조
1130년 건국 당시의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의 등장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노르만 남작들과 남부 이탈리아 자유 도시들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 자신들을 통제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기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 역시 그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던 유럽 국왕들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부터 왕관을 받은 새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1131년, 콘베르사노의 탕크레드와 바리의 그리말디가 루지에로에게 반란을 일으켜 브린디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라눌프 2세의 형제인 아벨리노 백작 리카르도도 독립을 선포했다. 1132년 3월, 루지에로는 다시 이탈리아로 출진해 2달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아벨리노는 왕실 직할지로 들어갔고, 왕실 수비대는 바리에 주둔했다. 그리말디와 그의 가족은 포로로 잡혀 시칠리아에 보내졌고, 탕크레드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반란이 벌어지는 동안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왕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와 알리페의 라눌프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로마에 파견되었다.
1132년 5월, 루지에로는 또다시 반란에 직면했다.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의 이복 누이인 마틸다가 시칠리아로 도망쳐서 남편이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있으니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눌프 2세는 로마를 떠나 알리페로 귀환한 뒤 아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요청이 거부당하자, 라눌프 2세는 역시 카푸아로 돌아온 로베르토 2세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다. 루지에로는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도중에 베네벤토 시가 반군 편에 서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기자 카푸아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노세라로 후퇴했다. 1132년 7월 24일, 반란군은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을 대파했고, 루지에로는 4명의 군인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루지에로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시칠리아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풀리아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다.
한편, 로타르 3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에 올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1133년 4월 30일, 로타르 3세와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도착한 뒤 아나클레토 2세가 농성하고 있는 산탄젤로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산탄젤로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성하려던 계획 역시 아나클레토 2세의 추종자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타르 3세는 1133년 6월 4일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교회에서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황제의 제관을 씌워졌지만, 식량과 자금이 바닥나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독일로 철수했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황제를 따라 피사로 도주했다.
황제가 로마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무슬림으로 구성된 새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했다. 그는 반역을 일으킨 도시들을 파괴하고 여러 남작을 처형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1134년 아풀리아 지배권을 회복한 루지에로는 피사로 도망친 로베르트 2세가 소유하던 카푸아를 왕실의 소유로 삼았다. 라눌프 2세와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용서를 받았다. 루지에로는 자신의 권력이 불가침임을 현지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 아들 루지에로 3세, 탕크레드, 그리고 알폰소를 각각 아풀리아, 바리, 카푸아 공작에 선임했다.
1135년 초, 루지에로는 중병에 걸렸다. 급기야 그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이 남부 이탈리아에 확산되자, 또다시 반란의 조짐이 일었다. 1135년 4월,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피사 함대와 함께 나폴리에 도착했고,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로베르토와 손을 잡았다.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역시 로베르토 2세와 연합해 시칠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카푸아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루지에로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자, 로베르토와 세르지오는 나폴리로 후퇴했고, 라눌프는 아베르사에서 시칠리아군을 막으려 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자 역시 나폴리로 철수했다.
루지에로는 아베르사를 파괴한 뒤 육상과 바다에서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다. 반군은 교황 이노첸시오 2세와 황제 로타르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137년 2월, 로타르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에 입성한 뒤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황제 본인은 인노첸시오 2세와 함께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하했고, 사위인 하인리히는 토스카나와 교황령을 거쳐 나폴리로 진군한 뒤 바리에서 로타르 3세와 합세하기로 했다. 로타르 3세는 신속하게 진군했고, 하인리히는 로마를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베네벤토와 몬테 카시노를 복속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로 철수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는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카푸아를 탈환한 뒤 피사 함대와 함께 살레르노를 포위했다. 1137년 5월, 로타르 3세와 하인리히의 군대가 바리에서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 가신들이 귀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가지 못했고, 1137년 8월 라눌프 2세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승격시킨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떠난 후, 전력을 재정비한 루지에로 2세는 1137년 10월 반격에 착수했다. 카푸아는 시칠리아군에 재차 넘어갔고, 로베르토는 다시 도주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루지에로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한 뒤 리그나노에서 반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루지에로는 나폴리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그곳을 확고히 통제했다. 이제 남은 상대는 알리페의 라눌프 2세였다. 1137년 10월 30일, 루지에로는 리기아노에서 라눌프 2세와 맞붙어 패배했지만, 남작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137년 12월 4일, 루지에로를 계속 훼방놓던 로타르 3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1138년 1월 25일에는 아나클레토 2세가 사망했고 인노첸시오 2세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입성한 뒤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루지에로 2세와 그의 아들들을 파문했다. 1139년 4월 30일 라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리하여 루지에로 2세를 대항할 유력한 귀족은 아무도 없게 되었고, 루지에로 2세의 권위는 트로이아와 바리를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았다.
루지에로 2세는 자신을 파문에 처한 교황을 응징하고자 로마로 진군했다. 1139년 7월 22일, 교황군은 갈루치오 전투에서 시칠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인노첸시오 2세는 포로로 잡혔다. 1139년 7월 25일, 인노첸시오 2세는 루지에로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했고, 그의 장남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삼남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교황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교황청과 화해한 루지에로 2세는 마지막까지 저항을 이어가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먼저 트로이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그곳에 묻혀 있던 라눌프 2세의 유해를 끌어낸 뒤 도랑에 던졌다. 하지만 장남 루지에로가 "기독교도로서 망자에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간절히 설득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라눌프 2세의 유해를 재매장했다. 이후 바리를 공략하고 바리 공작과 고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많은 주민들을 실명시킨 뒤 지하 감옥에 수감했다. 이로써 카푸아, 나폴리, 바리 등 그동안 자체적으로 통치를 행사하던 공국들은 청산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자치권을 상실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를 넘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했다.
루지에로는 아버지 루지에로 1세의 종교 관용 정책을 그대로 이행했다.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는 그의 왕국에서 동일한 권리를 누렸다. 루지에로는 라틴 수도원과 그리스 수도원을 동등하게 후원했으며, 정교회 신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라틴 수도자들에게 복종하면서도 정교회 방식의 의식을 고수할 수 있었다. 무슬림들 역시 모스크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국가 행정 직책을 맡았으며, 시칠리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무역 관세와 세금 징수는 무슬림 관료들이 전문적으로 맡았다. 형사 재판은 각지를 순회하는 재판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포함한 지역 주민 중에서 배심원을 뽑아서 판결을 심의했다.
루지에로는 무슬림과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다양한 형태의 토지 보유와 불완전한 봉건제의 특성을 지녔다. 노르만 기사들은 영주로 군림하기는 했지만 종종 농노를 거느리는 대신 자유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형태를 띄었다. 왕 역시 왕권이 제약을 받을 게 뻔한 봉건제의 형성을 막는 정책을 추구했다. 영주가 기사에게 토지를 양도하려면 왕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했는데, 오직 왕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만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시칠리아 기사들은 왕에게 직접 의존해야 했고, 대귀족이 대규모 사병을 거느릴 기회가 박탈되었다. 루지에로는 이에 더해 이웃 지중해 국가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상당한 함대를 건설하고 유지 및 관리했다.
1140년 7월, 루지에로는 소위 <아리아노 법령(Assizes of Ariano)>으로 일컬어지는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에 종속된 모든 민족의 고유 법전의 효력을 왕실 법령과 상충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했다. 또한 신성한 권위를 지닌 왕만이 법을 만들고 폐지하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으며, 왕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반대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자 반역으로 간주했다. 왕족에 대한 범죄와 음모는 반역일 뿐만 아니라 왕국의 모든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전투에서의 비겁함, 왕이나 그의 동맹의 군대 지원 거부 역시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당시에 반역죄를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나라는 오직 시칠리아 왕국 뿐이었다.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그의 치세에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과의 활발한 무역 거래를 수행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듀럼밀이었고, 치즈와 덩굴 과일 등 식용품들도 수출되었다. 시칠리아 상인들은 강력한 해군과 왕의 후원에 힘입어 지중해 전역을 돌며 무역을 수행했고, 자연히 국내 시장과 산업 역시 갈수록 발전했다. 루지에로는 왕국에서만 쓰이는 동전인 두칼레(ducale)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동전에서, 왕은 'REX' 칭호로 일컬어졌다. 이 새로운 동전은 장거리 무역을 더 쉽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을 짓밟은 루지에로에게 반감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이 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 무역에는 잘 쓰이지 않다가 115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인과 아랍인 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루지에로는 동시대의 유럽 군주들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그는 아랍어와 그리스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아랍과 유럽 세계의 많은 철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의사를 팔레르모로 초빙해 시간이 남을 때마다 그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루지에로의 절친한 친구였고 루지에로의 요청에 따라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던 알 이드리시였다. 이드리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 대항해 시대 이전 주요 지리서로 취급된 <루지에로의 책>을 발간했다. 그는 루지에로 2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수학 및 정치 영역에 대한 그의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지식 역시 무궁무진했으며, 모든 세부 사항을 깊이있고 현명하게 연구했다. 그는 어떤 주권자도 이전에 만든 적이 없는 놀라운 발견을 이뤘고, 놀라운 발명품을 소유했다."
루지에로 2세 치하에서, 시칠리아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이뤄진 과학과 철학 연구가 동시에 수행되는 독특한 장소로 각광받았다. 또한 그는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시대에 세파루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로마네스크와 그리스 모자이크, 아랍식 예술이 혼합된 산 조반니 델리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수도원과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도 세워졌다. 그의 대관식이 거행된 마르토라나 교회는 루지에로 2세의 수석 장관이자 시리아 정교회 수사였던 안티오키아의 게오르기오스의 후원으로 건설되었다. 이 교회의 모자이크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관을 전달받는 장면이 그려졌다.
루지에로 2세의 어머니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는 1112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이전의 결혼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보두앵 1세가 아델라시아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루지에로가 예루살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두앵이 이전에 맺었던 결혼을 끝맺지 않고 아들라시아와 결혼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1117년 무효화되었다. 아델라시아는 불명예를 안은 채 시칠리아로 돌아갔고, 지참금은 반환되지 않았다. 보두앵 1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어머니가 받은 모욕에 반감을 품고 예루살렘 왕국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1130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리던 보에몽 2세가 사망하고 어린 딸 콩스탕스가 여공(女公)이 되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자신이 보에몽 2세의 가까운 친척이니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1135년 푸아티에의 레몽이 콩스탕스와 결혼하고자 이탈리아를 거쳐 동방으로 향하자, 그를 중도에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38년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라틴 총대주교를 억류하기도 했다. 안티오키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의 태도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주권자를 자처하던 동로마 황제의 반감을 샀고, 가뜩이나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던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1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다. 이때 루지에로는 십자군을 이용해 동로마 제국을 공략하기로 하고,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 조정은 반 동로마 세력이 강했고 루이 7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루이 7세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호해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6월 11일 프랑스를 떠나 10월 4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부관들이 루지에로의 제안을 이제라도 받아들여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1147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십자군이 발칸 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벌어질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제국군을 대거 동원해 십자군이 지나가는 경로 주변에 배치해서 십자군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 방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자, 루지에로는 이 기회를 틈타 코르푸를 기습 공략하고 이어서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했다. 하필이면 쿠만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걸 막아야 했기도 했기에, 마누일 1세는 시칠리아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한편, 루지에로는 북아프리아 해안의 트리폴리, 가베스, 마디아, 수스, 스팍스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함대는 지중해 중부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아프리카 내륙으로의 무역로가 이 도시들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무역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아프리카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1149년, 마누일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푸를 탈환했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여기에 마누일 1세의 환대를 받고 동로마 제국에 긍정적인 입장이 된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고 싶었던 콘라트 3세가 마누일과 손을 잡았고, 에우제니오 3세도 반 시칠리아 정책을 추구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이 한동안 프리드리히 1세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대립으로 인해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당분간 그들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대규모 함대와 병력을 디라히온에 집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1154년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가시화되던 1154년 2월 26일, 루지에로 2세는 팔레르모에서 병사했다. 사후 유일하게 살아있던 아들 굴리에모 1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라를 잘 다스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는 곧 문제를 드러냈다.
동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하렘을 세워 수많은 미녀들을 모집한 뒤 그곳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또한 정무를 돌보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아버지 치세 말기에 행정을 담당했던 대신들에게 떠넘겼다. 이중에서 바리의 마이오(Maio)가 실권을 행사했다. 마리오는 상인의 아들이자 바리의 순회 판사 출신으로,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왕국의 통치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태생의 마이오는 노르만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이탈리아인과 무슬림을 중용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굴리에모의 사촌인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 백작을 중심으로 뭉쳤고, 로베르토는 동로마 제국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난날 루지에로 2세의 침략으로 코르푸를 빼앗기고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디라히온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원정을 준비하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하여 왕국이 어수선한 지금이 원정을 단행할 호기라고 여겼다. 황제는 우선 주변 국가 및 현지 주민들을 포섭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선왕 콘라트 3세와 남부 이탈리아를 함께 협공하자는 협약을 맺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남이탈리아 현지의 귀족 및 시민들과 접촉해 막대한 금을 뿌려 충성을 맹세받았고, 교황청에도 접근해 "야만스러운 노르만인보다는 로마인을 곁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라며 협조를 잘해준다면 차후에 교황령을 지킬 병력 모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포섭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자, 마누일 1세는 1155년 원정을 단행했다.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는 서방 전선에서 차출한 병력을 이끌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보내준 수송 함대에 탑승해 바리로 이동했다. 그해 8월 바리에 도착한 동로마군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르만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현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바리에 순조롭게 입성했다. 이때 주민들은 앞장서서 도시 중앙의 시칠리아 성채를 완전히 파괴했다. 인근 도시인 트라니와 지오비나초, 타란토, 브린디시도 곧 귀순했다. 오직 안드리아의 리카르도 백작 만이 동로마군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끝내 동로마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전사했고 안드리아 역시 함락되었다. 아베르사 백국의 백작 아스클레티노 드렝고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은 캄파니아에 주둔하다가 동로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해 9월 아풀리아로 진군했지만 적의 기세에 밀려 바를레타에서 봉쇄되었다.
1155년 9월,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동로마 제국의 편을 들어 캄파니아로 교황군을 파견했다. 일전에 루지에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뒤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가 교황군과 함께 돌아와서 카푸아를 탈환한 뒤 교황을 대군주로 받들었으며, 캄파니아의 다른 지역들도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55년 말, 시칠리아 왕국의 수중에 있던 남부 이탈리아 중 아풀리아는 동로마 제국, 캄파니아는 교황에게 넘어갔다. 오직 칼라브리아만이 시칠리아 왕국을 여전히 지지했다. 굴리에모는 2,0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이 80여 년만에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는 듯했으나, 상황은 점차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먼저 기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를 통제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또다른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진출한다면 북이탈리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병력을 보내주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원정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현지 귀족들에게 고압적으로 일관해 반감을 샀다. 이에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트 3세는 그를 경질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마누일 1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군략은 뛰어난 장군이었던 반면, 요안니스 두카스는 범용한 인물일 뿐이었다. 굴리엘모는 이 때를 틈타 12,000명의 보병과 5천 기사대를 소집한 뒤, 아스클레티노 드렝고를 메시나로 소환한 후 적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투옥해 그 곳에서 옥사하게 만들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1156년 4월 말에 칼라브리아로 건너간 후 아풀리아로 진격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을 가하면서 동로마군의 급료 마련이 어려워졌다. 동로마 용병들은 급료 지급이 미뤄지자 "당장 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자, 현지 귀족과 시민들은 실망해 동로마군에 등을 돌렸다.
요안니스 두카스는 브린디시에 군대를 끌어모아 항전했고, 마누일 1세 역시 1158년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안코나로 보내 제국군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속절없이 밀린 끝에 브린디시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났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로 다시는 남부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굴리에모는 브린디시를 탈환한 뒤 동로마군을 환대했던 바리로 진격했다. 바리 주민들은 왕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굴리에모는 폐허가 된 시칠리아 성채를 가리키며 거부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틀을 줄 테니 재산을 챙겨서 나가라고 명했다. 이윽고 사흘째 되던 날이 바리를 초토화하고 남은 재물을 모조리 빼앗았다. 오직 성 베드로 대성당과 니콜라스 수도원 등 몇몇 예배당만 무사했다.
굴리에모는 뒤이어 캄파니아로 진격했다.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는 측근들과 함께 교황령으로 달아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귀족들은 뱀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그들의 아내와 딸은 하렘으로 보내지거나 매춘을 강요당했다.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생포된 뒤 사슬에 묶여 팔레르모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복역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령까지 쳐들어 올까 두려워 평화 협상을 맺자고 간청했고, 굴리에모는 교황을 적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굴리에모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남부 이탈리아 본토의 교회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 대신, 교황은 굴리에모를 시칠리아의 왕, 아풀리아 공작,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시칠리아 성직자들의 청원을 접수할 권리를 포기했다. 여기에 시칠리아 왕이 시칠리아 주교를 선임하고 시칠리아 성직자가 로마로 순례하는 것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지는 것도 인정했다. 이후 시칠리아 왕들은 시칠리아 교회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통제를 행사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긴 했지만, 굴리에모는 동로마 제국이 작심하고 대군을 동원해 또다시 쳐들어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시칠리아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리리아 해안을 공격하지 않으며 안코나가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성과는 원정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35]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루지에로 2세가 공략했던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들이 시칠리아로부터 독립했다. 1156년 스팍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가베스가 뒤를 이었으며, 1159년에는 트리폴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그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마흐디아 요새로 달아났다. 무와히드 왕조는 이 때를 틈타 튀니지로 진격해 시칠리아령이었던 해안 도시들을 모조리 석권한 뒤 1159년 6월 20일부터 마흐디야 요새를 포위했다. 시칠리아 함대가 출격해 해상에서 봉쇄를 풀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지원이 없자 마흐디야 수비대는 1160년 1월 11일 항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은 북아프리카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1160년 11월 10일, 무슬림과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우대하면서 노르만 귀족들을 억압하는 마이오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마테오 보넬루스를 주축으로 삼아 팔레르모에서 반기를 들어 마이오를 살해했다. 살인자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팔레르모에서 카카모(Caccamo) 성으로 도주했다. 굴리에모는 노르만 귀족과 팔레르모 시민들이 보넬루스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걸 보고, 그를 처벌했다간 자신마저 무사치 못할 거라 우려해 화해하기로 했다. 본넬루스는 팔레르모로 돌아간 뒤 왕의 영접을 받고 궁정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음모자들은 굴리에모의 잔인한 성격상 언제라도 자신들을 해칠 거라 여기고 그 전에 왕을 제거하기로 했다. 1161년 3월 9일, 그들은 궁전 바로 옆에 있는 감옥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고 1155년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석방했다. 루지에로 2세의 사생아 시모네, 굴리에모의 조카 레체의 탕크레드를 포함한 죄수들은 석방되자마자 궁전을 장악하고 추종자들을 들여보냈다. 굴리에모와 아내, 아이들은 구금되었고, 궁전 경비원 및 왕과 가까운 환관들은 살해되었다. 이때 팔레르모 궁전은 약탈되었고, 알 이드리시의 은색 평면구를 포함한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여기에 정변 소식을 접한 팔레르모 시민들이 마이오에게 중용받았던 무슬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음모자들은 굴리에모를 퇴위시키고 그의 9살된 아들 루지에로를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살레르노의 로무알드 대주교와 시라쿠사의 리카르도 주교를 포함한 고위 성직자들이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고, 팔레르모 주민들은 성직자들의 선동에 따라 궁전으로 진격했다. 이어진 시가전에서 어린 루지에로가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자, 공모자들은 굴리에모를 석방하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발코니로 나가서 주민들에게 반란군이 도망칠 때 해를 입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후 공모자들은 카카모 요새로 도주했고, 굴리에모는 자유를 되찾았다.
굴리에모는 처음에는 공모자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들 루지에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피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했다. 메시나에서 파견된 육군과 해군이 카카모 요새를 포위하자, 반란군은 항복하고 대부분 추방되었다. 보넬루스는 팔레르모 궁전으로 가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곧 체포되었고, 지지자들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굴리에모는 보넬루스를 포함한 주모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다. 여기에 보넬루스의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피아짜와 부테라가 왕실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1162년 모든 반역자가 체포되어 교수형이나 익사형 또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고, 반항적인 도시와 지역에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반역을 저지른 자들의 편에 섰던 아풀리아의 수도 살레르노 역시 굴리에모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1162년, 굴리에모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마틴을 시칠리아 총독으로 남겨뒀다. 마틴은 지난날 무슬림을 학살한 시민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무슬림인 친구들과 함께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을 집결시킨 뒤 팔레르모의 기독교도 중 아랍인 살해에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1162년 여름 굴리에모가 팔레르모로 돌아온 후 더 이상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이후에도 마틴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하렘에서 향락에 빠져 지냈다.
굴리에모는 말년에 팔레르모 인근에 키사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166년 5월 7일 이질에 걸려 팔레르모 궁전으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 사후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에 안장되었다가 몬레알레 대성당이 완공된 후 그곳으로 옮겨져 호화로운 반암 석관에 안치되었다. 이후 아들 굴리에모 2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올랐을 때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섭정을 맡았다.
마르그리트는 굴리에모 1세에 의해 지하감옥에 갇힌 정치범들을 사면하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거운 벌금을 부과받은 도시들을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국정 경험이 부족했기에 다양한 고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에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고관은 대신 마테오 데 아젤로(Matteo d'Aiello), 시라쿠사의 주교 리카르도 팔머,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베드로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국가를 장악하려는 다양한 파벌이 있었다. 여기에 마르그리트의 사촌인 길베르트 그라빈스키와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가 팔레르모에 들어온 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르그리트의 고문들은 곧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베드로는 음모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몰리자 시칠리아에서 도망쳤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그는 튀니지로 피신한 뒤 도로 무슬림이 되었고, 아흐메드 알 시켈리라는 이름으로 개명 후 기독교 국가에 맞서 무슬림 함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는 베드로의 빈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1166년 9월 동방으로 가는 여정을 떠났다가 시칠리아에 무기한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사촌 스테판 뒤 페르슈를 1166년 11월에 수석 공증인에 임명했고, 1167년 여름에 팔레르모의 대주교를 겸임하게 했다.
이 인사는 각각 수석 공증인과 팔레르모 대주교가 되기를 희망했던 마테오 데 아젤로와 리카르도 팔머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페르슈가 수석 공증인이 된 뒤 프랑스 출신 측근들을 대거 기용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궁정에서 커졌다. 얼마 후, 마르그리트의 형제인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 등이 스테판 암살을 계획했다. 1167년 12월, 메시나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엔리코는 타란토 공국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때 그는 일부러 스테판을 자극하는 내용을 실어서, 스테판이 자극받아 언쟁을 벌일 때 공모자들을 시켜 몸싸움을 벌이는 척하며 죽이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간파했던 스테판의 사주를 받은 길베르트 그라빈스키가 엔리코가 음모를 꾸미고 스테판을 암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엔리코는 즉시 체포되었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공범들은 뜻밖에 포위되었다. 스테판은 마르그리트를 대신하여 모든 공모자에게 시칠리아를 떠난다면 용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리하여 정적들을 모조리 몰아낸 스테판은 1168년 3월 마르그리트와 함께 팔레르모로 돌아온 뒤 엔리코와 몰리세 백작 리카르도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마테오 데 아젤로 역시 체포했다. 이리하여 그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체포를 두려워한 인사들이 메시나에서 주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칼라브리아의 레지오, 로메타, 타오르미나를 점령한 뒤 엔리코와 리카르도를 석방시키고 팔레르모로 행진했다. 여기에 마테오 데 아젤로도 감옥에서 탈출한 뒤 팔레르모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스테판과 프랑스 동료들은 팔레르모 대성당의 종탑에 포위되었고, 반군과 협상한 끝에 시칠리아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은 곧바로 배를 탄 뒤 다음날 시칠리아를 떠났다.
스테판이 추방된 후, 마테오 데 아젤로, 리카르도 팔머,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 등은 정국을 장악하고 마르그리트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마르가리트의 사촌 길베르트 그라빈스키는 모든 가족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성년이 된 굴리에모는 이 대신들과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시칠리아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해군과 무슬림+노르만 혼성군을 갖춘 강국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제럭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굴리에모 2세는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으려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야망을 경계해 이에 대항하는 교황청과 롬바르드 연합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오랜 갈등을 벌였던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 위해 마누일 1세에게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처음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169년경 자신의 딸 마리아 콤니니와 굴리에모의 약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지정된 날이 지나도 마리아가 오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과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굴리에모는 방향을 바꿔 1177년 2월 13일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조안나와 결혼했다. 이후 1177년 프리드리히 1세가 베네치아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앞에서 회개하고 롬바르드 연합과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했을 때, 살레르노 대주교,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 등 시칠리아 대표단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1171년 시리아의 통치자 누르 앗 딘 마흐무드와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공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사방에서 압박하자,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가 서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굴리에모 2세는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1174년 탕크레드 데 레치의 지휘 아래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그해 7월 말, 시칠리아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탕크레드는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공성전을 벌였지만,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공성 무기가 파괴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아모리 1세가 이집트로 향하던 중 사망하고 젊은 왕 보두앵 4세의 후견인을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예루살렘 왕국군의 지원이 오지 않자, 탕크레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오기 전에 철수하기로 했다. 300명의 기사들이 본대가 시칠리아로 떠날 때까지 해안에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가 살라흐 앗 딘에게 사로잡혔다.
1183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이래, 동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굴리에모 2세는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발칸 반도 제패를 숙원으로 삼던 오트빌 가문의 꿈을 이룰 기회라고 여겼다. 1184-1185년 겨울, 굴리에모 2세는 메시나에 육군과 함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 지휘권을 사촌 탕크레드에게, 육군 지휘권을 아케라 백작 리샤르와 보두앵에게 맡겼다.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1183년, 프리드리히 1세가 콘스탄차에서 롬바르드 연맹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굴리에모 2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끝에 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 하인리히 6세와 루지에로 2세의 딸이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의 조카이며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인 쿠스탄차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약혼식은 1184년 10월 29일에 거행되었다.
1185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출항한 시칠리아 함대는 그해 6월 24일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에 진입했다. 100여년 전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원정을 감행했을 때 디라히온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수비대와 주민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칠리아군은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며 동진한 끝에 8월 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육상에서 포위했고, 8월 15일 시칠리아 함대가 해상을 봉쇄했다.
당시 테살로니카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친척이었던 다비드 콤니노스가 4개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려 애썼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없던 3개 부대가 8월 24일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1개 부대만 챙기고 도주했다. 시칠리아군은 테살로니카에 입성한 뒤 1182년 4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라틴인 학살에 보복하겠다며 테살로니카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군은 3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맡았고, 한 부대는 세레스로 진군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부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한편, 테살로니카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다비드 콤니노스를 투옥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대군을 맡겼다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을 우려해 아들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 장군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그리고 환관 니키포로스에게 각각 한 부대씩 맡겨 시칠리아군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다섯 지휘관들 중 누가 우선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에 지휘체계가 문란해졌고, 결국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시칠리아군이 파죽지세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에게 적과 내통할 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히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명령에 따라 여러 인사를 잡아 처형하고 있을 때,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사키오스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뒤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대세를 읽은 수도 방위군과 근위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체포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는 시내로 끌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새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해 합류시키면서 군대를 독려했다. 브라나스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시칠리아군을 요격하여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에서 격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추격했다. 시칠리아군은 암피폴리스로 물러난 뒤 브라나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브라나스는 이를 무시하고 재차 총공격을 가했다. 시칠리아군은 괴멸되어 상당수가 스트리온 강에 익사했고, 육군 지휘관 리샤르와 보두앵은 사로잡혔다. 해군 지휘관 탕크레드와 핀도스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로 달아난 소수의 패잔병만이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발칸 원정이 재앙으로 끝난 뒤, 굴리에모는 1186년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정식 결혼식을 거행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두텁게 한 뒤 동로마 제국을 향한 2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졌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전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장인인 헨리 2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시칠리아에서 지원군과 보급품을 수급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는 먼저 십자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의 지휘하에 60척의 함대를 시리아 해안으로 파견했다. 마르가리트는 1188~1189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을 지속적으로 정찰했고, 1188년 7월 트리폴리를 급습해 타격을 입혔으며, 라타키아, 마카브, 티레에서 아랍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이들의 활약은 십자군이 시리아 해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와 요새를 손에 쥔 채 유럽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굴리에모 2세는 아내 조안나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자신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육인 쿠스탄차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하던 마테오 데 아젤로 등 대다수 노르만 귀족들은 쿠스탄차와 결혼한 하인리히 6세가 이를 빌미 삼아 시칠리아 왕을 자처할 게 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게 뻔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노르만 귀족들은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의 탕크레드를 놓고 고심했다. 탕크레드는 루지에로 2세의 손자이자 굴리에모 2세의 사촌이었다.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와 오트빌 가문의 관계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 없다. 아풀리아 백작이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형이었던 드로고의 증손자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마테오 데 아젤로는 탕크레드를 왕으로 받들기로 하고, 교황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대군주인 클레멘스 3세에게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공인하기로 했다. 이윽고 교황의 허가가 내려지자, 탕크레드는 1190년 1월 18일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마테오는 1168년 스테판 뒤 페슈의 도주 사건 이후 공석이던 수석 공증인에 선임되었고, 마테오의 장남 리샤르는 아젤로 백작령을 수여받았고, 막내 아들 니콜라는 살레르노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즉위 직후부터 반란에 시달렸다. 1190년 1월, 팔레르모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이 희생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탕크레드는 이를 수습하느라 1190년 말까지 시칠리아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다. 1190년 3월,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아풀리아 및 캄파니아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탕크레드를 몰아내기 위해 하인리히 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1190년 5월 칸덴의 하인리히 휘하 제국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무슬림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빴던 탕크레드는 아세라 백작 리샤르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리샤르는 상당한 용병을 모집한 뒤 제국군과 반란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세를 개시해 1190년 9월 반란군을 섬멸하고 제국군을 쫓아냈다.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는 토벌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1190년 9월 14일과 9월 23일,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메시나에 상륙했다. 이보다 앞서, 굴리에모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두 왕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고 지원군과 보급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 2세는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단행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두 왕은 이 제안을 이용해 시칠리아에 찾아왔다. 문제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1세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탕크레드는 굴리에모 2세의 왕비이자 리처드 1세의 아버지 헨리 2세의 딸이었던 조안나를 억류하고 그녀의 재산을 압류했으며, 결혼을 통해 그녀에게 이전되었던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에 상륙한 뒤 조안나를 석방하고 그녀가 겪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잉글랜드군과 대결할 이유는 없었기에, 탕크레드는 리처드 1세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굴리에모 2세가 십자군을 위해 완전히 장비된 선박을 포함한 전쟁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이를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탕크레드가 이에 난색을 표하자, 리처드 1세는 1190년 9월 30일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의 바나라 시를 점령하고 조안나를 영국 수비대의 보호 아래 그 곳에 두었다. 이후 메시나로 돌아온 잉글랜드군은 그리스 수도원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도자들을 몰아냈다.
1190년 10월 3일, 영국인들의 행동에 분노한 메시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그들을 수도원에 봉쇄했다. 필리프 2세가 양자를 중재하려 했지만, 리처드 1세는 협상 대신 무력 행사를 택하기로 하고 메시나로 진군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새로운 반 영국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인질을 요구했고, 메시나 성벽 인근 언덕에 마테그리폰(Матегрифон: 그리스인을 위한 굴레) 요새를 세웠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이같은 행동에 분개했고, 카타니아에 있던 탕크레드에게 "당신이 영국인들을 대적하려 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적인 벨프 가문을 지원하는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보다 시칠리아에게 더 선호되는 잠재적 동맹이었다. 탕크레드는 이 점을 고려해 리처드 1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1190년 11월 11일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탕크레드는 조안나에게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넘겼고, 굴리에모 2세가 약속했다는 군수 물자을 모아서 리처드 1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는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했다. 리처드 1세는 그 대가로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탕크레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메시나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상, 마테그리폰 요새 해체를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을 시칠리아에서 얼른 내보내고 싶었던 탕크레드는 1191년 3월 리처드 1세에게 지난날 필리프 2세가 보냈던 밀서를 보여줬다. 이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한바탕 다퉜고, 곧 시칠리아를 떠나 동방으로 얼른 가기로 합의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1191년 3월 30일과 4월 10일에 각각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이끌고 메시나에서 출항했다.
1191년 1월, 하인리히 6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롬바르드 연맹과 피사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4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로마에 입성했다.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던 클레멘스 3세는 제국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뒤이어 새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3세는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는 새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즉위식을 치렀다. 이후 하인리히 6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베르사, 카푸아, 타란토, 몬테 카시노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살레르노 주민들은 아예 제국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쿠스탄차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도록 초대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공세는 나폴리 성벽에서 저지되었다. 아크라 백작 리샤르는 제국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지만, 살레르노 대주교 니폴라 데 아겔로가 수비를 이끌어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여기에 해상에서는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가 제국군을 지원하던 피사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성전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군영에서 전염병이 나돌면서 많은 제국 병사들이 죽어갔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8월 24일 나폴리 포위를 해제하고 독일로 철수했다. 그는 이전에 점령한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쿠스탄차는 살레르노에 남아서 자신과 남편의 시칠리아 왕관에 대한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6세의 제국군이 독일로 철수하자, 그 때까지 쿠스탄차를 극진히 모시던 살레르노 주민들은 태도를 싹 바꿔 쿠스탄차를 붙잡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살레르노에 찾아온 탕크레드의 조카가 이를 막고 쿠스탄차를 메시나로 이송했다. 메시나에서 쿠스탄차와 대면한 탕크레드는 외국군을 끌여들어 조국을 위태롭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 이에 쿠스탄차는 탕크레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탕크레드는 쿠스탄차를 팔레르모에 유폐시킨 뒤 하인리히 6세가 남겨둔 수비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북부 캄파니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쿠스탄차는 팔레르모에 이송된 뒤 탕크레드의 왕비 시빌라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시빌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자야 했으며, 궁궐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자, 시빌라는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탕크레드는 마테오 데 아젤로의 제안에 따라 쿠스탄차를 나폴리로 이송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했다.
1192년 6월, 첼레스티노 3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가 그라비나스에서 탕크레드와 만났다. 하인리히 6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전임 교황 클레멘스 3세와 마찬가지로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탕크레드는 그 대가로 루지에로 1세 시대부터 시칠리아 왕이 누려왔던 권한인 "교황의 간섭 없이 시칠리아 주교들을 임명하고 교황 사절이 시칠리아에 방문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 포기일 뿐이었고, 시칠리아 왕들은 이후로도 시칠리아 주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때 교황 사절은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황후를 인질로 삼음으로써 하인리히 6세와의 정치 대결에 이용하려 했다. 탕크레드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은밀히 파견한 독일 기사단이 로마로 이송중이던 쿠스탄차를 빼돌려 독일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탕크레드는 이제 하인리히 6세가 대대적인 침공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마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꺼린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접근했다. 양자는 협상 끝에 탕크레드의 장남 루지에로 3세와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193년, 탕크레드는 후계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루지에로 3세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해 12월 24일, 루지에로 3세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남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은 탕크레드는 몸져누웠고, 오랜 투병 끝에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사후 차남 굴리에모 3세가 집권했고 시빌라 왕비가 섭정했다
1190년 굴리에모 2세 사후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했다가 탕크레드에게 잇따라 패배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끌어모아 남부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제국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캄파니아를 석권한 뒤 나폴리를 포위했다. 지난날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을 때는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제노아와 피사 연합 함대가 바다를 완전히 봉쇄해버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낙담한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나폴리가 제국군에 백기를 들자, 탕크레드를 지원했던 시칠리아 왕국의 남부 이탈리아 도시 대부분이 하인리히 6세에게 굴복했다. 살레르노는 지난날 하인리히 6세의 황후 쿠스탄차를 탕크레드에게 넘겨버린 것에 대한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저항했지만, 이내 함락되어 철저히 약탈당했다. 2개월간의 공세 끝에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한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0월에 제노아, 피사 함대가 공략한 메시나에 상륙했다.
제국군이 시칠리아에 발을 들이자, 카타니아와 시라쿠사는 곧바로 하인리히 6세에게 귀순했다. 시빌라 왕비는 굴리에모 3세와 자매들을 칼타벨로타로 보내고, 자신은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과 함께 팔레르모를 지켰다. 그러나 팔레르모 주민들은 제국군과 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성문을 열었다. 시빌라는 칼타벨로타로 도주했고, 마르가리트는 팔레르모를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귀순했다.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1월 20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이제 승산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시빌라는 굴리에모 3세를 대신해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 왕권을 포기할 테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소유했던 레체 지방을 돌려주겠으며, 타란토 공국을 추가로 이끌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194년 12월 25일, 굴리에모 3세는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게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하인리히 6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194년 12월 29일,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선포하고 수많은 시칠리아 고위 인사들을 체포해 독일로 끌고 갔다. 시빌라와 그녀의 딸들, 시빌라의 형제 아케라 백작 리샤르,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니콜라 데 아젤로 등도 이때 끌려갔다. 여기에 수많은 굴리에모 3세 지지자들이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굴리에모 3세가 어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이 멀어 거세된 뒤 곧 죽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와비아 알트-엠스의 어느 수도원에 보내진 후 그곳에서 수년간 살다가 1198년경에 죽었다고 한다. 그가 탕크레드 팔라마르 라는 이름으로 시칠리아에 숨어 지내다가 메시나에서 체포된 뒤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의 명령으로 1232년에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4.2.4.2. 호엔슈타우펜 왕조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손에 넣으면서 독일, 네덜란드,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공작을 벌였지만, 교황과 교황파 제후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독일왕에 아들을 앉히고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1197년 9월 28일 말라리아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팔레르모 궁정에서 아들을 양육하며 조용히 지내던 쿠스탄차는 남편이 죽자 여왕 쿠스탄차 1세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녀는 남편의 독일인 동료들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시칠리아인들로 대체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지키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단호히 물리쳤다. 1198년 5월에는 이제 갓 세살 된 아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는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고 후견인이 되어줄 역할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맡긴 뒤 1198년 11월 27일에 사망했다.
1201년, 브리엔의 발터 3세는 탕크레드의 딸 엘비라와 결혼한 뒤 아내를 내세워 시칠리아 왕이 되고자 교황에게 십자군에 참여할 테니 자신을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을 맡았는데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타란토 공국과 레체 백국에 대한 발터 3세와 엘비라 부부의 권리를 인정했다. 발터는 일단 교황의 뜻에 동의하고 1201년 늦은 봄에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골몰했다. 1202년 시칠리아 왕국의 권신 팔레리아의 발터와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이 이에 맞섰으나 카푸아와 칸나이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보부르크의 디에폴트가 전열을 정비해 계속 맞서자 점차 수세에 몰리다 1205년 6월 진영에 잠입한 적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1206년, 디에폴트는 어린 프리드리히를 경비하고 있던 카파로네의 빌헬름을 설득해 프리드리히를 팔레리아의 발터에게 넘기게 했다. 이후 디에폴트와 발터는 서로 힘을 합쳐 팔레르모 왕궁을 장악하고 있던 빌헬름을 추방했다. 그러나 디에폴트와 발터는 곧 권력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1207년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디에폴트는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후 살레르노로 도망친 후 카파로네의 빌헬름과 팔레아리아의 발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빌헬름과 발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그들을 몰아낸 후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1209년 2월, 디에폴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로부터 "마기스테르 카피타네우스 토티우스 아풀리에 에트 테레 라보리스(magister capitaneus totius Apuliae et Terre laboris: 아풀리아와 테레의 대리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토 4세의 지지자를 자처했으나, 1218년 제위를 오토 4세로부터 되찾은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다가 1221년에서야 풀려난 후 튜튼 기사단에 들어갔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실권을 잡은 뒤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삼고 그 곳의 인력과 자본을 기반삼아 오토 4세에게 빼앗겼던 황제 직위를 탈환하고 독일에서 호엔촐레른 왕조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데 골몰했다. 또한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해 예루살렘을 일시적이나마 기독교 세력의 손아귀에 들게 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원정과 모략을 벌였다. 그는 평생 독일에 발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생애 대부분을 시칠리아에서 살았고 스스로도 시칠리아에 애착을 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보다는 시칠리아 국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했다.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 국왕으로는 페데리코 1세)가 아풀리아에 세운 몬테 성.
그러나 자신 대신 독일을 다스리던 아들 하인리히 7세와 지나치게 갈등을 벌이다가 아들이 끝내 반란을 일으키자 체포한 뒤 죽을 때까지 유폐시키는 비정한 면모를 보였고, 교황청과 오랜 세월 갈등을 벌이고 모략을 일삼아 교황청과 친 교황파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러던 1250년 12월 12일, 프리드리히 2세는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다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죽기 전에 아들 콘라트 4세가 자신의 영지를 물려받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사생아인 만프레디가 타란토 공작으로서 대리 통치하게 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만프레디는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러던 1252년 남부 이탈리아에 찾아온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권한을 도로 가져가고 만프레디는 타란토 공국만 다스리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임하고, 교황에게 콘라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콘라딘의 섭정으로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 후작을 임명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4세가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만프레디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겨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가 섭정을 맡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이에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7월 만프레디를 파문했다. 만프레디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교황의 특사가 남부 아틸리아에서 교황을 대신해서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교황 수행원들이 오만하게 굴자 반감을 품고 루체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교황청에 대항했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그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투스카니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친 황제파)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그들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친 교황파) 파벌이 지배하는 피렌체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1258년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그해 8월 10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중에 콘라딘이 파견한 사절들이 콘라딘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만프레디는 강력한 왕이 시칠리아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중의 호소를 빌미삼아 퇴위를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아랍인들과 손잡은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사망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중 샤를이 교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기벨린파를 몰아낸 뒤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
4.2.4.3. 카를루 1세의 압제와 시칠리아의 만종
앙주의 샤를은 만프레디를 처단한 뒤 팔레르모에서 카를루 1세로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콘라딘은 만프레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야말로 시칠리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삼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카를루 1세에게 참패한 뒤 생포된 후 10월 29일 반역죄로 재판을 받은 뒤 나폴리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카를루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시칠리아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도시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또한 시칠리아 정부에 자신과 함께 남하한 프랑스 관료들로 채웠고, 프랑스 군인들을 시칠리아 각지에 배치해 시칠리아 귀족 및 백성들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공략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 각지에 세력을 뻗쳐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즉위 직후부터 대외 원정을 잇따라 감행했다. 1277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칭했으며, 1278년에 라틴 제국의 최후의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아카이아 공국의 주권을 양도받았다. 그는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발칸 반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1281년 교황 마르티노 4세로부터 " 이단인 정교회를 신봉하는 미하일 8세를 타도하고 가톨릭 국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재건하라"는 교령을 접수받고 십자군을 선포해, 동로마 제국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이렇듯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벌이면서,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카를루 1세에 대한 시칠리아 민중의 분노는 갈수록 불거졌고, 프랑스인들이 요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정치에 참여할 길이 막혀버린 귀족들 역시 만감을 품었다.
일전에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극렬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칠리아에서 망명 온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하고 왕위를 가로챌 기회를 노렸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을 선동했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부추김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던 1282년 3월 말,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봉기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전역에서 반 앙주 봉기가 발발해 시칠리아에 살던 프랑스 병사와 민간인들이 모조리 학살당했다.
미켈레 라피사르디(Michele Rapisardi) 작, 여인을 추행한 프랑스 병사를 살해한 시칠리아 민중.
바르톨로메오 디 네오카스트로(Bartolomeo di Neocastro)의 <시칠리아의 역사(Historia Sicula)>에 따르면, 팔레르모 시민들이 성벽 밖에 있는 성령의 교회까지 순례하러 가던 중에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무기를 소지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시민들의 몸을 수색했다. 그러던 중 드로헷(Drohet)이라는 프랑스 군인이 팔에 갑옷을 착용했는지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어느 귀족 여인의 가슴을 만졌다. 그러자 한 청년이 분노해 그 군인을 살해했고, 시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프랑스 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그 후 그들은 루지에로 마스트랑겔로(Ruggiero Mastrangelo)라는 귀족의 지휘 아래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앙주 왕조를 위해 일하던 관료, 병사 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프랑스인들을 학살했다. 이날 2,000명의 프랑스인이 하룻밤 사이에 살해되었고, 앙주 왕조의 재상 장 드 생 레미(Jean de Saint-Rémy)는 야밤에 비카리 성으로 도망쳤다가 끝내 체포된 후 온 몸이 갈기갈기 잘려서 짐승에게 먹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 사건을 다룬 13~14세기 연대기가 여럿 존재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한 연대기에서는 프랑스 병사가 여인을 추행하자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병사가 아이를 잡으려 하자 민중이 분노해 병사를 때려죽이고 봉기를 일으켰다고 기술했으며, 또다른 연대기에서는 병사가 한 여인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키스하려 하자, 그 여인의 오빠가 분노해 병사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고 기술되었다.
'시칠리아의 만종(晩鍾)[36]'이라는 표현은 샤를 8세가 1494년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한 후인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페사로 출신의 판돌포 콜레누치오(Pandolfo Collenuccio)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가 여전히 사용하는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때부터 1282년 봉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부활절 월요일(3월 30일) 또는 화요일(31일)에 팔레르모 시민들이 저녁 기도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프랑스군과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봉기를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프랑스인을 살육한 팔레르모 시민들은 4명의 "사람들의 대장(capitaines du peuple)"과 5명의 "고문(conseillers)"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한 코를레오네(Corleone)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후 자체적으로 의회를 세웠고,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가 힘을 합쳐 결성한 롬바르디아 연맹을 따라서 시칠리아 도시 연합인 시칠리아 연합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바 디 노토(Val di Noto: 시칠리아 남동부), 바 데모네(Val Demone: 시칠리아 북동부) 등지에서도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고, 4월 중순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의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4월 28일, 봉기군은 메시나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함대를 파괴했고, 카를루 1세의 대리인으로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오를레앙의 에르베르트를 칼라브리아로 축출했다.
도메니코 모넬리(Domenico Morelli) 작, <시칠리아 만종>
시칠리아인들은 카를루 1세의 압제를 도운 프랑스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다만 카를루 1세의 시종이자 프로방스 데 포자레 가문의 일원이었던 굴리에모 3세는 평소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시칠리아를 떠날 수 있었다. 한편,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 지방에 속한 스프링가(Sperlinga) 성은 프랑스 군인들에 대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13개월 동안 그곳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주민들은 성을 수비하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이 병사들은 13개월 만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한 뒤 칼라브리아로 이송된 후 카를루 1세로부터 굳건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영지를 제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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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페드로 3세는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튀니스로 함대를 몰고 간 후 시칠리아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렸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그는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4.2.4.4. 앙주 왕조의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
카를루 1세는 페드로 3세가 팔레르모에 입성하여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단 나폴리로 철수했다. 이후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로지에르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페드로에게 "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카를루 1세가 칼라브리아 등지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느라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1284년 6월 5일, 아라곤-시칠리아 함대 사령관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나폴리 항구로 침입했다. 카를루 1세는 아들 샤를에게 자기가 돌아오기 전꺄지 나폴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샤를은 이를 어기고 함대를 이끌고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여러 나폴리 귀족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구원군을 이끌고 나폴리 근교 가에타에 도착한 카를루 1세는 아들이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이 일을 망쳤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샤를을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아라곤 왕국에서 프랑스의 침공을 저지하는 페드로 3세를 대신해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여왕 쿠스탄차 2세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를루 1세는 아풀리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1285년 1월 7일 포자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카를루 1세의 아들 샤를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로 선임되었지만 감옥에 계속 갇혀 지내야 했고, 카를루 1세의 조카 아르투아의 로베르 2세가 섭정을 맡아 아풀리아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 국왕이 된 하이메 2세는 마침 앙주 편만 들던 마르티노 4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 호노리오 4세가 즉위하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를 교황에 봉헌하겠으니 아라곤 왕국 전체에 내린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히 거부하고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 군주 즉위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여전히 포로로 잡혀있던 카를로 2세는 석방과 평화 조약에 대한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보하려 했지만, 교황은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교황 호노리오 4세는 사망했고, 새 교황으로 니콜라오 4세가 선출되었다. 1287년 7월, 카를로 2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힘입어 아라곤 국왕 알폰소 3세와 울모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아들 3명을 포함한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나폴리에 돌아온 카를로 2세는 1289년 5월 29일 리에티 대성당에서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국왕에 선임되었다. 교황은 파문당한 자와 약속한 것은 무효라며 석방을 위해 하이메 2세와 맺었던 약속을 준수할 의무를 면제하고 시칠리아를 한시바삐 정벌하라고 독촉했다. 그러면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청에 들어오는 세입 중 10분의 1을 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역시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결정에 항의했고, 카를로 2세와 알폰소 3세 사이의 중재를 지속했다.
알폰소 3세는 에드워드 1세의 요청에 따라 인질로 잡았던 카를로 마르텔을 카를로 2세의 다섯번째 아들 레몽 베렝가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후 알폰소 3세와 카를로 2세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니콜라오 4세는 아라곤과 나폴리 왕국의 화해를 막기 위해 2명의 추기경을 보냈지만, 두 왕은 교황보다는 에드워드 1세 쪽을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한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카이아 공국을 직접 통치하기엔 벅차다고 여긴 카를로 2세는 전임 공작 빌라르두앵의 기욤 2세의 딸인 빌하르두앵의 이사벨라를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에노의 플로렌스와 결혼시킨 뒤 1289년 9월 아카이아 공작 직위를 그들에게 줬다. 다만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고, 플로렌스가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이사벨라는 자신의 동의없이는 재혼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1290년 5월 19일, 카를로 2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센리스에서 협약을 맺었다. 카를로 2세는 자신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시켰고, 아라곤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필리프 4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앙주와 마인의 통치권을 지참금 형식으로 받아냈다. 필리프 4세는 알폰소 3세와 교황청이 화해하는 대로 아라곤과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프랑스,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교황의 사절단은 페르피냥에서 잉글래드 대표단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다.
1290년 7월 10일, 카를로 2세의 처남인 라슬로 4세가 살해되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4세의 사촌인 언드라시 3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카를로 2세의 아내 마리어는 자신이야말로 라슬로 4세의 합법적인 후계자라 여겼고, 남편을 설득해 아들 카를로 마르텔이 헝가리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했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의 언질을 받고, 헝가리가 교황청의 영지이며 헝가리를 마리어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에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여 카를로 마르텔을 모시면서 언드라시 3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다른 헝가리 귀족들이 언드라시 3세를 지지한 데다,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급했기에 헝가리 왕위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카를로 마르텔이 1295년경에 요절하자, 더 이상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은 알폰소 3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자 조약을 승인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형이 맺었던 조약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페데리코를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일대의 통치자로 세웠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은 지속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카를로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4.2.4.5. 바르셀로나 왕조의 시칠리아 왕국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진압하고자 메시나로 진군해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에 들어와서 왕으로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철수했다. 이후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가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페드로 3세는 프랑스군이 아라곤 왕국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라곤 본토로 떠났고, 아내 쿠스탄차가 여왕 쿠스탄차 2세로서 시칠리아를 지켰다.
쿠스탄차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아풀리아,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등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던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노력했다. 칼라브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카를루 1세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청하자 지체없이 군대를 파견해 이들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유능한 제독인 라우리아(Lauria)의 루지에로를 시칠리아 함대 총사령관으로 삼아 적 함대가 시칠리아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했다. 루지에로 제독은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카를루 1세와 필리프 3세 휘하 프랑스 함대를 격멸하고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훗날 카를로 2세)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장남 알폰소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쿠스탄차는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나 아라곤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아라곤으로 가기 전에 먼저 로마로 가서 새 교황 호노리오 4세를 만나 양자의 화해를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그녀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쿠스탄차가 떠난 뒤 호노리오 4세는 입을 싹 닦고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287년 7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를 통해 울로론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전쟁을 이어가라고 독촉했다. 이후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쓴 것으로 알려진 위조 칙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와 제국의 서방 영토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대신 자신은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조작된 칙서는 중세 시대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2]
당시 그가 동방 교회 측에 칙서를 전달했을 때 레오 9세는 이미 사망한 후였고, 교황의 특별한 지시 없이 단독적으로 행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교회법적으로 무효였다.
[3]
로마 귀족, 황제
[4]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
[5]
힐데브란드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6]
여담으로 그레고리오 7세가 최초로 흰색 수단을 입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아고스티노 바라비치니 바리아니는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통해 많은 사람이 흰색 수단을 최초로 입은 교황이 교황 비오 5세(1566–1572)라고 여기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덧붙여, 그는 문서상 교황의 흰색 수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였다고 썼다. 그는 “1073년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선출 직후 붉은색 망토를 착용함으로써 장엄하게 교황권을 부여받았음을 알린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언급하면서 “전통적으로 선출된 교황은 두 가지 색상의 의복을 착용하는데, 바로 붉은색(모제타, 신발, 망토)과 흰색(수단, 양말)이다.”라고 덧붙였다.
[7]
고발한 이유는 잠자리를 강요한다는 것이였다.
[8]
이 때만 하더라도 십자군이라는 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음
[출처1]
Fulcher of Chartres' account of Urban's speech,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출처2]
마태복음 18장 20절
[출처3]
Robert the Monk's account of Urban's speech,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출처1]
Fulcher of Chartres' account of Urban's speech,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13]
클레멘스 3세,테오도리쿠스, 알베르투스, 실베스테르 4세등 총 4명의 대립교황이 파스칼 2세의 재임기간 중에 있었다.
[14]
훗날
그레고리오 8세가 되는 알베르토 디 모라는 트리어의 주교 임명을 놓고 그는 교황 측 후보인 카르덴의 폴마르와 황제 측 후보인 비드의 루돌프 모두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트리어 교구의 사제들이 새로 선출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기각되었다.
[15]
상서원장 시절 그가 고안한 문체 양식은 교황 문서 작성 체계에 사용되었다.
[출처4]
교황의 권위: 1198년 10월 30일 토스카나의 귀족 아케르부스에게 보낸 편지 《만물의 창조주처럼》(Sicut Universitatis Conditor)
[17]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18]
지금의
자다르
[19]
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
[20]
특히 프스코프 공화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21]
이단 선언
[22]
훗날의 교황 인노첸시오 4세
[23]
이는 몽골에서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강자의 평정 아래에 분쟁을 유발할 적대자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24]
전투가 끝난 후 만프레디의 유해는 수많은 돌무더기에 파묻혔다가 도로 파헤쳐진 후 나폴리와 교황령의 경계인 가리글리아노(Garigliano) 강둑에 안장되었다.
[출처5]
Quoted in Grousset, p. 644
[26]
나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거쳐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해
독일 통일을 주도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의 직계 선조이다. 루돌프 1세의 첫번째 부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
[27]
훗날의 교황 니콜라오 3세
[28]
1272년 리옹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까지 인노첸시오 5세가 재임했던 자리
[29]
르텔 백작 마나세스 2세의 딸
[30]
훗날 제158대 교황
빅토르 3세
[31]
베네벤토 연대기에는 6월 2일, 아마투스 연대기는 6월 3일, 몬테카시노 연대기는 6월 4일로 기재했다
[32]
말라테라에 따르면, 이날 아랍군의 사상자는 10,000명에 달한 반면 노르만인은 한, 두 명이 부상당한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33]
팔라스는 아테나 여신의 이름이므로, 안나는 말장난을 한 것이다.
[34]
넘버링은 이전 시칠리아 백국의 것을 이어서 써서 루제로 2세로 즉위하였다. 루제로 1세는 그의 아버지
루지에로 1세이다.
[35]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216만 전의 금화를 이 원정에서 소모했다고 한다.
[36]
저녁시간에 교회나 절에서 치는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