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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8:33:43

민다우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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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초대 대공
리투아니아 국왕
민다우가스
Міндоўг
파일:민다우가스.jpg
출생 미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망 1263년 9월 12일
리투아니아 대공국 아글로나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1]
1236년 ~ 1263년 9월 12일
배우자 리투아니아의 모르타
자녀 바이셀가
루클리스
루페이키스
성명 미상의 두 딸
아버지 링가우다스?
형제 다우스프룽가스
성명 미상의 두 누이
종교 발트 신화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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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초대 대공이자 리투아니아 왕국의 유일한 기독교 왕. 리투아니아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민다우가스의 기원과 가계도는 당대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 않다. 16~17세기에 기록된 비호베츠 연대기는 그의 조상이 로마 제국 출신이었으며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고 기술했지만 신빙성은 없다. 15세기에 익명의 저자가 중세 고지대 독일어로 집필한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Livländische Reimchronik)>에 따르면, 민다우가스의 아버지는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서 강력한 공작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다만 이 연대기에서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의 일부 학자들은 리투아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링가우다스가 그의 아버지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은 부족하다. 1219년 리투아니아와 갈리치아-볼히니아와의 협약에서 언급된 다우스프룽가스는 민다우가스의 형제로 추정되며, 성명 미상의 누이가 3명 있었는데 한 명은 사모가티아 공작 비킨다스와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루테니아 국왕 다닐로 로마노비치와 결혼했으며, 마지막 누이는 날시아 공작 다우멘타스와 결혼했다.

13세기 리투아니아인들은 다양한 부족으로 나뉘었고, 발트 신화와 전통, 무역, 친족 관계, 합동 군사 원정 등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었다. 1219년 리투아니아인들과 갈리시아-볼히니아와의 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리투아니아 측 조약 서명란에는 20명의 리투아니아 공작과 1명의 미망인 공작 부인이 있었다. 이 중 5명은 나머지 16명보다 더 높은 직위인 것으로 명시되었다. 민다우가스는 이 5명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리투아니아인들은 갈리시아-볼히니아와 우호 관계를 맺고 남동쪽 전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쪽과 남서쪽 전선의 위협은 갈수록 심해졌다. 북쪽에서는 1202년 결성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1209년 라트비아인 라트갈레인을 정복했고, 여세를 몰아 에스토니아인을 상대로 수십년간 공세를 벌이면서 수많은 이들을 이교도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그리고 남서쪽에서는 튜튼 기사단이 1230년 비스툴라 강에 자리를 잡고 바르티아인, 갈라시아인, 나드로비아인, 고대 프로이센, 스칼로비아인, 포게사니아인 등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였다.

라트비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에스토니아를 어느정도 평정한 뒤 1229년부터 리투아니아에 대한 체계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를 죽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1236년 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교 신앙을 고수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을 정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에 독일의 여러 지역과 리투아니아인들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은 키예프 루스의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 등지에서 출발한 3,000명이 리가에 집결했고, 검의 형제 기사단장 볼크윈은 이들을 이끌고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 일대로 진격했다. 이들은 사울레 강 남쪽에 살고 있던 리투아니아인들을 학살하고 정착지들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리투아니아인들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민다우가스를 중심으로 저항군을 결성했다.

십자군은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학살하고 약탈물을 가득 챙긴 뒤 리가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던 1236년 9월 22일, 사울레 강 인근의 샤울리아이에서 민다우가스와 처남인 비킨타스가 지휘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들을 습격했다.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에 따르면, 십자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해 "여자처럼 울부짖고 여기저기 흩어지다가 죽임을 당했다"라고 한다. 이날 불드윈과 십자군 90% 이상이 전사했다. 몇몇은 그 지역의 울창한 숲을 뚫고 원주민들의 습격을 피해 리가로 겨우 귀환했다. 이제 라트비아 검의 형제 기사단에게는 단지 50명의 기사와 600명의 수비대만 남아 있었고, 그들에게 정복되었던 라트비아 원주민들은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린 검의 형제 기사단은 프로이센에 있던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1237년 5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지시에 따라 튜튼 기사단에 병합되고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가 되었다.

민다우가스는 십자군을 궤멸시키면서 명성이 드높아진 틈을 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1238년 다우스프룽가스가 사망하자 다우스프룽가스가 가지고 있던 영지 상당수를 자기 것으로 삼았고, 뒤이어 네만 강 상류에 거주하던 요트빙거족을 복종시켰고, 키예프 루스의 동쪽 국경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뒤이어 발트해 연안에 살고 있던 쿠르족을 공략하기 위해 1244/45년에 공격해 복종시켰다. 뒤이어 쿠르족의 영역에 튜튼 기사단이 세웠던 엠뷰테 요새 공략을 실패했으나 격퇴되었다. 1246년 리투아니아 북동부 날시아에서 성명 미상의 누이의 아들인 렝브니스와 튜튼 기사단 연합군을 상대로 미엘니크에서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1248년 ~ 1249년, 민다우가스는 다우스프룽가스의 두 아들인 타우트빌라와 게드비다스, 그리고 처남인 비킨타스가 다스리고 있던 사모기티아 북부 일대를 평정하기 위한 원정을 일으켰다. 이에 세 사람은 볼히니아 공작 다닐로 로마노비치와 동맹을 맺었고, 튜튼 기사단도 여기에 가세했다. 디닐로는 남쪽에서 공세를 개시해 슬로님과 볼코비스크를 공략했고, 타우트빌라, 게드비다스, 비킨타스, 튜튼 기사단은 1249년 민다우가스를 보루타 요새에 가두고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250년,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의 넓은 지역을 황폐화시켰으며, 타우트빌라는 리가에서 세례를 받고 미래의 리투아니아 군주로 지명되었다.

민다우가스는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뭉친 동맹을 해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튜튼 기사단장 앤드루 폰 스티어랜드(Andrew von Stirland)에게 선물을 보내고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청했다. 앤드류는 그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요구했다. 민다우가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1250/1251년 겨울 아내 모르타와 궁정 귀족 대부분과 함께 보루타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사절들이 1251년 7월 밀라노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를 알현해 이 소식을 알렸다. 인노첸시오 4세는 즉시 리투아니아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민다우가스를 위한 3개의 교서를 발행했다.
1. 민다우가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아들이며, 그와 가족, 그리고 추종자들은 교회의 보호를 받는다. 또한 민다우가스가 통치하고 있는 모든 땅과 그가 불신자들로부터 정복할 땅은 그의 재산으로 인정된다.
2. 리부니아의 오셀 주교와 쿠로니아 주교는 위의 특권을 보증한다.
3. 프로이센의 쿨름 주교는 민다우가스와 그의 상속인들이 리투아니아를 성 베드로 왕좌의 소유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민다우가스를 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즉위시킨다.

이후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게 된 민다우가스는 1251년 트베라이 인근에서 자신에 대적하던 이들을 격파했다. 비킨타스는 전사했고, 타우트빌라와 게드비다스는 볼히니아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는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보루타로 철수했고, 비킨타스의 아들 트레니오타가 사모기타이인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1252년, 민다우가스는 튜튼 기사단이 메멜부르크 성(오늘날 클라이페다)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곳은 소리투아니아(Mažoji Lietuva)의 거점으로서 튜튼 기사단의 대 리투아니아 근거지가 되었다.

1253년 7월 6일, 민다우가스는 교황청이 제공하고 튜튼 기사단장이 전달한 왕관을 접수하고 쿨룸 주교의 주관하에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리투아니아에 설립된 가톨릭 주교단을 지원하기 위해 사모기티아 마을인 라세이니아이, 아리오길라 및 라우코바 일대를 기부했으며, 튜튼 기사단에게도 자신에게 대항했던 사모기티아 영주들의 봉토를 수여했다.

그후 민다우가스는 다닐로가 빼앗아간 영토를 되찾기로 했다. 1255년, 장남 바이셀가가 다닐로를 공격해 승리를 거둔 뒤 슬로님과 볼코비스크 등지를 탈환하고 아버지로부터 두 도시의 공작으로 세워졌다. 다닐로는 민다우가스와 평화협약을 체결하고 자신의 아들 슈반과 민다우가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결혼시키고, 자신의 아들이자 노브고르드 공작인 로만이 민다우가스를 주군으로 섬기는 걸 허용했다. 그 대신, 민다우가스는 다닐로에게 망명했던 타우트빌라와 게드비다스를 용서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나중에 타우트빌라를 폴로스크의 공작으로 세웠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그로부터 받은 영지에서 이교도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모기티아 일대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1324년 교황 요한 22세는 민다우가스가 오류로 돌아갔다는 교서를 반포했고, 갈리시아-볼히니아 연대기는 그가 계속해서 이교 신앙을 실천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시체를 불태웠으며, 이교 의식을 공공연히 거행했다고 서술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로 볼 때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혼란이 계속 일어나는 것에 환멸을 이끌고 개종을 취소했다고 추정한다.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민다우가스가 볼히니아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볼히니아인들이 그를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면서 이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위선자라고 몰아세우려고 그런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1268년 <행복한 기억의 민다우가스(Clare memorie Mindota)>라는 교서를 반포해 그가 살해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260년, 트레니오타가 이끄는 사모기티아군이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두르베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라트비아로 진군해 에스토니아 해안에 도달했으며, 마조프셰 일대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트레니오타의 명성이 드높아지면서, 민다우가스의 입지가 점점 약해졌다. 그러던 1262년, 민다우가스의 아내 모르타가 사망했다. 민다우가스는 모르타의 장례식에 날시아 공작 다우멘타스의 아내이자 자신의 누이를 참석시킨 뒤,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고 새 아내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다우멘타스는 트레니오타와 함께 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세웠다.

1263년 9월 12일, 민다우가스와 두 아들 루클리스, 루페이키스는 아글로나에서 암살당했다. 그는 조상의 전통에 따라 말과 함께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270년 트라이데니스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공의 직위에 오를 때까지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세웠던 성당은 발트 종교 사원으로 개조되었고, 성직자들은 모조리 축출되었다.

3. 기타



[1] 1253년부터 1263년까지 리투아니아 국왕을 칭했다. [2] 정치 67 전투 73 지모 62, 내정특기 농업/상업/등용, 전투특기 기동/공성, 병과적성 보B기B궁B수E. 문화권 서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