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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2:53:22

능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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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를 밧줄로 묶어 찢어죽이는 형벌에 대한 내용은 거열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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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의미3. 처벌 대상4. 집행 방식5. 조선에서의 능지형6. 능지형의 목적7. 능지형의 형제들8. 공식적인 마지막 집행9. 매체에서의 등장10. 능지형을 당한 인물들
10.1. 실존 인물10.2. 가공 인물
11. 인터넷 유행어

1. 개요

능지형(·)은 죄인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형벌의 일종이다. 말 그대로 사람을 산 채로 를 뜨는 것.

2. 의미

요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족의 형벌제도로 편입되었다. 북송 때는 살을 뼈에서 발라낸다는 의미의 과형(剮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명나라 시대 형법의 기준이 된 법전인 《 대명률》에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공식적인 형벌의 방식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이었고, 그 중에서 사형의 방식은 여전히 참(斬) 교(絞) 두 가지만 있었다는 점이다. 능지처사는 공식 형벌은 아니지만 특별 죄목에 대한 처벌방식으로서 개별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아래 단락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능지처사는 어지간히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았다.

원래 '능지'란 말은 힘을 안 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완만한 언덕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뜻으로 변주되어 이 형벌의 명칭으로 굳어버렸다고 하거나[1] 혹은 요나라에서 시행되던 형벌이 북송대에 수입되면서 원래 있었던 단어인 '능지'로 음차되었다는 설도 있다. 별칭으로 백각형(百刻刑), 또는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2], 이는 백 번, 천 번 칼질하여 천천히 고통을 주며 죽이는 형벌이란 뜻이다.

흔히 한국에선 죄인의 팔다리를 이나 등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을 능지처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형벌은 거열형(車裂刑)으로 본래 엄연히 다른 형벌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본래의 능지형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능지형으로 판결이 나와도 거열형으로 대체집행했으며, 거열형조차도 본래의 방식으로 집행하는 예는 많지 않고 대부분 참형에 처한 뒤 그 시신의 사지를 거열형에 처한 것처럼 사후에 절단하는 형태가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원래 능지처참이라는 말은, 능지형과 참형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는 책형이라는 형벌이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든 사람을 찢어죽이면 되는 거라 능지형도 거열형도 책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책형은 사형된 시체를 대중에 공개하는 기시의 의미로도 쓰인다.

참고로 중국에만 날카로운 칼로 살을 발라내는 형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일찍이 고대 아시리아에서도 그 사례가 있었고 미얀마, 베트남 등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3. 처벌 대상

반역의 주동자[3]이거나, 상급자나 주인, 부모를 고의로 살해하여 하극상이나 패륜을 저지르거나, 부정부패를 일삼거나 또는 3인 이상 살해하고 그중에 대를 끊기게 했을 경우에만[4] 집행하도록 하고 있으나 판관의 판단에 따라서 참수형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반대로 황제의 명에 의해 능지형을 금지하던 시기에도 판관의 재량에 따라 시행되는 일도 있는데, 일부러 거역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칙령이 지방까지 전해지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었고 대부분 칙령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냥 참수형을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사형을 하되 교수형 정도로만 해도 되는 사형을 굳이 괘씸죄를 부과하여 능지형으로 바꿔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라는 게 청나라 가톨릭을 전파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능지형을 당했다. 이런 야만스런 형을 결심한데는 태평천국 운동에 놀랐던 청나라 조정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제2차 아편전쟁 때 프랑스 영국 연합 함대가 출범해 광저우를 공격한다. 일방적으로 발린 청나라는 양광 총독 예밍천이 인도로 끌려가 자살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에 구룡반도와 신계까지 차례로 뺏기는 등 큰 피해를 보게 된다.

4. 집행 방식

능지형은 법정형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하게 규정된 처벌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래의 설명은 초기 능지형의 모습과 후기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일단 집행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사항으로는 아래의 두 가지가 있다.

사형수가 고통으로 먼저 사망하지 않도록 집행 시에 치사량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아편을 복용하게 한다. 그 다음 혀를 깨물지 못하게 나무 공을 입에 물린다. 물론 혀를 깨문다고 즉사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통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죄인을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어 고정시킨 후, 면도칼처럼 생긴 얇은 도검[5]으로 사형수의 온몸을 회를 뜨듯이 조금씩 발라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주의할 점은 이것도 기술자가 존재해서 과다출혈로 형집행 초반에 사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혈관을 최대한 피해서 절삭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먼저 손가락이나 발가락과 같은 덜 치명적인 말단[6]을 발라낸 후 관절을 부수고, 팔과 다리를 발라내고, 관절을 부숴서 목숨에 덜 치명적인 부분을 모두 발려낸 후 몸통을 발라낸다. 마지막에는 심장을 뚫는 등의 방법으로 죽인다. 일각에서는 죄인이 과다출혈로 일찍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처 부위에 진흙 등의 물질을 발라서 출혈을 막으면서 칼질을 했다고도 한다. 보통은 숨을 끊어놓고 시작하도록 하고 있지만 명대에는 죄질이 나쁜 경우 의도적으로 중간에 알아서 죽을 때까지 칼질을 할 때도 있긴 했다고 하며, 사형집행인은 칼질을 지정한 만큼 지속해서 내장 기관 및 흉곽 등을 모두 조각낸 후, 마지막으로 목 부위를 잘라내 효수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집행 기간이 대개 2박 3일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7]이렇게 함으로써 수형자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보는 군중들에게 구경거리를 주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형이 집행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도시락까지 싸들고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형이 집행되기 전후로 주변 식당과 매점의 매출이 급증한 건 덤이라 의도치 않게 내수 진작에 기여하기도 했다. 거기다 집행자는 사람들이 외치는 부위를 자르는 쇼맨십까지 선보였다고…[8]

능지형이 가장 활발히 집행되었던 시기는 명나라대로 매관매직과 부정축재를 일삼으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사형에 처해진 환관 유근(劉瑾, 1451~1511)이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당시 황제였던 정덕제의 명으로 정확히 총 3,457번이나 칼질을 해야 했다. 이 유근은 온갖 비리와 나라 말아먹을 일을 벌였으며 이를 고발하고 꾸짖던 정만(鄭曼)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무고로 죽이게 했는데 바로 능지형으로 처형하게 만들었다. 그 죄라는 게 바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죄였다. 물론 유근이 조작한 거였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런 일이 없다고 울며불며 정만이 죄가 없음을 알리려했으나 소용없었고 끝내 정만은 3600번 도끼질에 맞는 능지형으로 죽었고 이를 본 어머니는 정신이 나가 죽고 만다.[9]

온갖 횡포로 군림하던 유근은 이걸로도 부족해 반역까지 꾸미려다가 결국 들통나서 분노한 황제에게 똑같이 능지형으로 죽게 된다. 유근에 대한 능지형은 사흘 동안 집행되었으니 하루 평균 900번 가까이 생살이 발라졌는데, 살을 10번 발라낸 후 잠깐 쉬면서 혼절한 류근을 일갈하며 깨우는 식으로 형을 집행했으나 이틀째 되던 날 끌어내기도 전에 유근은 이미 죽어 있었다.[10] 사흘째 되던 날 몸통과 머리만 남은 유근의 시체를 장대에서 끌어내려 가슴께를 도끼로 부순 뒤에 내장을 끄집어 낸 후 목을 잘라 장대 위에 함께 걸어보임으로써 형이 모두 끝났다. 군중들 중에 유근에게 핍박당했거나 그의 모함으로 처형당한 유족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시신을 물어 뜯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유근의 살을 씹고자 도려낸 살을 푼돈으로 팔았는데 이걸 사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11] 여기에 오빠가 억울하게 근친강간범으로 몰려 능지형으로 죽고 어머니도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게 한 것에 이를 갈던 정만의 누이동생을 비롯하여 허천석, 장흠 등등 유근의 간악함을 고발하려다가 죽게된 이들의 많은 유족들도 끼어서 기어코 유근의 살을 씹으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말 최후의 명장 원숭환 모문룡을 계책으로 죽였다는 죄로 책형에 처해졌는데, 이 경우 기둥에 묶어놓고 살점을 바르며 죽이고 나서 나중엔 두개골까지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는 능지형까지 갈 정도의 죄라고 하기는 어려웠기에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물론, 원숭환의 주 죄목이 괘씸죄였기도 하고 숭정제부터 능력은 출중했으나 의심병이 심했던 만큼 모문룡의 죽음이 엄청난 괘씸죄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개 능지형이 끝난 후 뼈만 남은 토막난 몸통은 처형 직전에 입고 있었던 옷을 놓은 대바구니에 담겨 장대끝에 내장과 머리와 함께 걸리며, 처형 이튿날에는 각지로 보내져서 경계의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그냥 묻어버리기도 했다.

사형집행에 걸리는 시간이 길고, 죄인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12], 이미 고대 중국에서도 황제에게 형의 폐지를 건의하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일부 시대에는 형이 폐지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부활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존속했다. 결국 1905년 4월에 능지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신해혁명 이후에 다시 부활해 청나라 관리 출신의 탐관오리들이 능지형에 처해졌다가 중화민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된 뒤에 사형 방법을 규정[13]하면서 완전히 폐지됐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교수형을 폐지하고 민간인은 약물주사형, 군인은 총살형만 집행하도록 개정했다. 물론 이후에도 비슷한 형벌이 간혹 집행되긴 했는데 모두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형이 집행되는 초반에 사형수가 사망해 버리면 집행자를 처벌[14]하였으나, 사망 전까지 2천 번 이상의 조각을 발라낸 경우에는 집행자에 대한 처벌이 면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숙달된 집행자의 경우, 사형수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2만 번 이상 칼질이 가능했다 카더라는 말도 전해지나 그냥 카더라일 뿐 실제 그렇게까지 집행한 사례는 없다. 여기에 청대에 접어든 후 능지형의 칼질 횟수의 상한도 크게 제한되었다. 대부분 그 범죄의 흉악에 따라 8도(8번 칼질을 함), 24도, 72도, 120도 등으로 수천 번 썰어죽이던 명에 비해 숫자상으로도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대와 달리 숨통을 미리 끊어놓고 시신만 절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15] 사형 집행자도 죄수를 미리 죽여도 되는 조건으로 사형수에서 직업적인 사형 집행인으로 대체되었으며, 공개집행하는 일도 이전보다 훨씬 줄었다. 이 능지도 매뉴얼화 되어 첫 2도는 가슴, 그다음은 오른쪽 왼쪽 팔, 다리 뭐 이런 식으로 순서도 기록되어 있다. 실제 남아있는 집행 사진을 보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가슴살이 베어진 모습, 팔다리의 살덩어리가 떼어진 모습, 팔다리가 신체에서 분리된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후당 명종 시기 낭주의 장수였던 요홍은 반란군 동창에게 체포된 후 투항하지 않자 능지형에 처해졌는데, 그 방식이 매우 참혹했다. 발라낸 살을 물이 끓는 솥에 넣어 반란군들에게 자신의 살이 인육 샤브샤브(...)로 먹히는 모습을 죽기 전까지 지켜봐야 했던 것.

5. 조선에서의 능지형

조선에서는 원래 의미의 능지형이 시행된 적 없다. 법전에는 있는데 너무 잔인하다 하여 한 번도 실제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능지처사하였다'라는 말이 나오면 참수하였거나, 거열형을 하였거나, 참수한 후 시신을 능지형 비슷하게 훼손한 것이다. 왕이 '능지형을 반드시 집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대부분 참수로 끝났다. 중국에서 행해졌던 형벌 상당 부분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등 조선 시대의 형벌이 중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잔혹했다. 광무개혁으로 인하여 총살형 등으로 형이 바뀌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태종 7년(1407년) 실록에 의하면, 이웃 남자와 짜고 남편을 살해한뒤 암매장한 내은가이의 죄를 논하면서, 태종은 "처첩이 남편을 죽인 사건으로 이처럼 끔찍한 일은 없었다. 이 여자가 범한 것 같은 것을 외방의 수령은 어떻게 처벌하는가?"라고 묻자, 황희는 "곧 목을 벱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율에는 능지의 법이 없느냐?"라고 묻자, "이전에는 거열로 능지를 대신하였습니다."라고 답했고, 이에 태종이 "한 고을에서 죽이면 누가 알겠느냐? 잡아서 서울로 올려와 저자[市]에 세우고 대중에게 효유(曉諭)한 뒤에, 사지(四肢)를 나누어 여러 도(道)에 보이라."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수와 능지, 그리고 거열에 관한 당대의 인식과 함께, 보통 살인범은 참수형에 하지만 분노한 태종이 직접 명을 내려 능지형에 처하려던 것을 전례에 따라 거열형에 처하기로 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 능지형의 목적

사실 능지는 고통을 준다기보단[16] 유교적인 신체발부수지부모적 의미로써 영혼까지 토막쳐버린다는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 즉 이 형벌의 목적은 신체적인 고통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미에서 사후의 신체가 훼손당한다는 공포를 주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반역이나 연쇄살인 등이 끊이지 않았던 점을 보면 위하력은 별로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주원장조차도 오늘 부패 관리를 능지처참하면 내일 다른 관리가 또 부패를 저지른다고 말했을 정도다.

특히 중국인의 타고난 야만성의 증거라면서 서양 문화권 혹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도 비판의 도구로 곧잘 삼는데, 사실 고대 중국에서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비판여론이 높았고 황제에 따라서는 재위기간 동안 금지시키기도 한 형벌이다. 특히 지식인들이 비판한 이유가 쓸데없이 잔인하기만 하고 계도의 효과도 없다라는 취지에서 비판해왔다. 사실 법전에도 없는 형벌이어서 법가 유교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죄형법정주의를 근거로 비판하면 할 말이 없었다.

7. 능지형의 형제들

한국 역사에서는 공민왕 때부터 능지형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에 많이 집행되었다고 하는데, 중국과 달리 거열형으로 대체했고 그 방식도 대부분 사형 자체는 참수형으로 집행하되, 시신을 절단하는 과정만 추가하는 것으로 마지막 모습만 능지형 비슷하게 하고 실제로는 고통을 덜어주는 형태였다.[17] 또한 살아있는 죄인을 토막내는 것 외에 이미 죽은 죄수의 시체를 토막내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형벌도 능지라고 하였는데,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후 본국으로 이송되어 토막난 김옥균을 들 수 있다. 죄인의 시체나 목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형벌을 실질적으로는 효시(梟示)라고 부른다.

야사 청성잡기에 의하면 인조 시절 권신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킨 과거 반정 공신인 심기원을 잔혹하게 처형해야한다면서 기존의 방법인 시체 상태에서 능지형을 집행하지 않고 "저 놈은 산 채로 팔, 다리를 절단한 뒤 머리를 잘라 죽여야한다!"쏘우 랙 트랩라고 주장했고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의 권세가 워낙 엄청나던 시절이라 심기원은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그러자 심기원은 죽기 전 분노에 차서 "너도 똑같이 될 것이다. 이놈아!"라고 외치며 죽었고 훗날 김자점은 반역자가 되어 효종의 명령으로 능지형에 처해졌다. 그래도 김자점은 규정대로 처형되었고 김자점이 처형된 직후 능지형은 다시 폐지되었다고 한다.[18]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형벌이 시행된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드문 편이었으며 인조 때부터는 금지했다. 대신 참수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훼손하는 방식의 처형을 추가하여 역적에 대한 처벌수위를 높였는데, 어차피 이전에도 간판만 능지형으로 달고 실제로는 이렇게 집행했으므로 의미는 없다. 갑오개혁이 이뤄진 후 모든 사형을 교수형, 총살형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참수형 자체가 없어짐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편 서양 세력이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 유럽인들은 능지형을 중국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19] 그런데 영국에는 거열형과 비슷한 형벌이 실존했었다. 바로 '교수척장분지형'(Hanged, drawn and quartered)으로, 국가에 대한 남성 반역죄인에게 행해지는 형벌로[20] 처음에 목을 매달아 죽기 직전 상태까지 만든 후 내려주고, 이후 칼로 죄인의 장기나 생식기를 차례차례 잘라 에 구워 그것을 죄인 스스로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목을 베고 마지막으로 칼이나 말로 사지를 찢는 오체분시로 몸을 찢는다. 경우에 따라 참수가 제일 마지막에 행해지기도 한다. 가이 포크스가 이 형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21] 영화 ' 브레이브 하트'에서 붙잡힌 윌리엄 월레스가 실제로 이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튜더스 시즌 4의 5화에도 같은 방식의 처형을 볼 수 있다. 단, 거기에선 사지가 잘리는 것까지만 표현되어 있다. 참고로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문 위키에는 아예 교수척장분지형을 당한 사람에 대한 리스트가 있을 정도(...). 이 끔찍한 처형법은 18세기 말 대역죄인도 교수형을 하도록 하는 법이 생김에 따라 영국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에도 비슷하게 범죄자의 신체를 공개적으로 심하게 훼손하는 형벌이 있었는데,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에게 가해진 사형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사형방법을 매우 상세하게 지시하고 있다.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서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1장)

기독교 문명권은 아니지만 북유럽의 바이킹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산 채로 등 쪽에서 해체하던 피의 독수리라는 형벌이 존재하기도 했다.

자무카 칭기즈 칸에게 잡혔을 때 자신을 이 형벌로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는 말이 있으나, 몽골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피를 보지 않고 죽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좋으며 반대로 최악은 물 또는 기름에 익사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칭기즈 칸을 비하하고 몽골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위해 넣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정반대로 가죽푸대에 넣어서 말에게 밟혀죽거나 아니면 푸대에 넣은 채로 질식사 같은 식으로 '피를 흘리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죽였다는 기록이 위인전이나 다른 창작물에 더 자주 나온다. 몽골인들도 이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8. 공식적인 마지막 집행

문헌에 기록된 가장 마지막 집행[22]은 능지형을 폐지하기로 한지 2주 전이었던 1905년 4월 10일, 베이징에서 이루어졌으며, 사형수는 내몽골 아오한(ᠠᠣᠬᠠᠨ, Аохань, 傲漢) 기(旗, 내몽골의 행정 구역)[23] 왕자의 가노로서 그를 암살한 죄로 사형이 선고된 18세의 만주족 청년 푸주리(富珠哩, Fujuri).[24] 원래 몽골 측은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화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청 황제였던 광서제가 그건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대신 능지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25] 능지로 감형된 이유는 중국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사상에 의거, 시신의 원형이 조금이라도 유지되고 나중에 수습이라도 가능한 능지형이 아예 재가 되어 온전히 묻힐 수도 없는 화형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인 처벌이라고 봤기 때문.

그러나 중국 사회문화사 연구자인 티모시 브룩은 저서 『능지처참』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청대의 법정 최고형은 능지형일 뿐 화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형은 청대 형법에서 불법적 처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처형 전 다량의 아편을 죄수에 먹이고 집행한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청나라는 몽골에서 요구한 화형이 청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능지형을 집행한 것이다.

마지막 능지형이었기 때문인지 정석대로 횟수를 채워 집행했다. 또한 왕족 살해범의 최후라는 명목으로 집행과정이 베이징 저잣거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 집행 장면이 당시 베이징에 체류 중이던 서양 선교사의 카메라에도 담겼고, 후에 유럽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 사진은 조르주 바타이유가 그의 저서 『에로스의 눈물』에서 인용할 정도로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바타이유는 이 사진에 극단적 공포와 극단적 황홀이 공존한다고 보았다. 참고로 보통 능지형 집행 과정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좋게 볼 수 없는지라 대부분 그나마 좀 덜 잔인하게 한다고 숨을 끊고 나서 형을 집행하고 칼질 횟수도 제대로 채우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청 황제의 지시로 말 그대로 FM대로 선고된 횟수를 살려놓고 채웠기 때문에 사형수는 집행이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살아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사진은 당시 서양에서 큰 충격을 주었고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엄청나게 깠다. 실제로도 지나치게 잔혹한 형벌인터라 이러한 비난을 받아도 할말이 없었다. 참고로 이 사진은 구글에 'Fou Tchou-Li'라고 이름만 검색해도 볼 수 있으며 상당히 잔인하기 때문에 유의하여 보는걸 추천.

여담이지만, 후진에서는 이미 946년 능지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9. 매체에서의 등장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 쓴 소설 탄샹싱[26]에 능지처참을 집행하는 과정이 준비과정부터 아주 세세하게 묘사된다. 작중 위안스카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부하에게 황실 최고의 집행인에 의해 집행된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집행 마지막까지 죄수를 살려놓으려는[27] 집행인의 고뇌와 노력,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으며 버텨내나가다가 점점 정신이 무너져내려가는 죄수[28] 와 배경묘사를 비롯해 노벨상급 작가가 그려내는 잔혹도이니만큼 한 번쯤 감상해볼 가치가 있다. 능지형은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한다.

중국의 청대 태평천국의 난 시기를 다룬 명장(영화)에서도 고증에 따라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분량 문제로 인해 본편에선 짤렸다. 한겨울에 특수분장을 했다지만 반나체로 촬영에 임했던 배우에게 감독이 사정을 해명하느라 진땀 꽤나 흘렸단 후문.[29] 참고로 실제 사건의 범인 장문상도 능지형을 당했는데, 촬영장면과 유일한 차이점은 집행 장소다.[30]

얼음과 불의 노래의 등장 가문들 중 볼턴 가문이 이것으로 악명높다.

나루타루 코가 노리오가 이런 방식으로 죽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강간당하기까지 했다. 남잔데 남자한테. 최후는 머리만 남아 관절인형 같은 것에 장식...

워크래프트 넬쥴도 이런 식으로 되어 킬제덴에 의해 죽지 못하게 된 상태로 고통받았다. 게다가 위의 능지형은 다 처형법인데 이쪽은 이걸 고문으로 당했다.[31] 어떻게 보면 더 끔찍한 경우. 리치 왕 불타는 군단을 등질 이유는 이미 이때부터 있던 셈이다.

킹덤 컴: 딜리버런스에서는 라타이의 망나니가 쿠트나 호라에서 파견나온 인기 망나니를 견제하기 위해 핸리에게 그의 처형을 망쳐줄 것을 의뢰하며 묘사된다. 원래는 작은 메스같은 칼로 살살 살을 발라내면서 죄수가 최대한의 고통을 최장시간동안 느껴야 하는데, 망나니의 칼에 독을 발라서 즉사하게 만들 수 있다.[32]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10. 능지형을 당한 인물들

능지형으로 판결받았으나 실제로는 거열형으로 집행된 인물에 대해서는 거열형 문서로.

10.1. 실존 인물

10.2. 가공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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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터넷 유행어

2018년 들어 지능을 뒤집은 능지라는 단어가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면서, 능지(지능)가 처참하다라는 뜻에서 능지처참(能知悽慘)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기존에 어떤 사람의 바보같은 행동을 놀리는 것은 계속 있어왔는데, 그것을 지칭하는 표현이 생겼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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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중국의 과거 문헌에서 능지가 완만한 언덕의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순자》의 <유좌>편인데, 여기선 "어떤 석자짜리 언덕은 빈 수레를 끌고도 오를 수 없는데, 백장짜리 산도 가득찬 수레를 가지고 오를 수 있다. 완만하기 때문이다. 높은 담장은 넘지 못하는데 더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것 또한 완만하기 때문이다"의 의미로 쓰였다. 완만하게 사람을 죽이려면? 치명상을 덜 입히면서 여기저기 발라내면 된다. [2]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 사이가 나쁜 사람(주로 부부)끼리 서로를 가리켜 '천 번 살을 도려내어 죽일 나쁜 자'라는 뜻인 살천도(殺千刀)이라고 부르는데, 능지형에서 유래한 말이다. [3] 단,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태평군의 일반 병사들은 학살. 지휘관급은 무조건 생포하여 능지형을 집행했다. 생포 후 증국번과 독대하며 상호 간의 신뢰도를 쌓고 참수형으로 형이 감형된 이수성 정도가 예외. [4] 왕웨이친이 능지형을 받은 이유가 재산분쟁 와중에 이웃집을 습격하여 12명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그 집의 대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여럿 시켜서 저지른 점도 가중사유가 되었다. [5] 수술용 메스가 가장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6] 물론 목숨에야 말단이 덜 치명적이겠지만 통각 신경은 말단부에 더 많이 분포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아프고 잔인하게 죽이려고 그러는 거(...). [7] 사지수족을 모두 처리했는데도 사형수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는 흉곽에 구멍을 뚫어 기흉으로 사망시키거나 심장을 찔러 죽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집행 초반에 미리 죽여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 애초에 이 형벌을 집행하는 대상은 억울하게 숙청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연쇄살인범, 반역 주동자 등 중범죄자들이었기에 전근대의 인식으로는 어찌보면 축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능지에 국한되지 않고 사형 자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을 축제 취급 받은 역사는 유구하다. 유럽의 사형장면 기록을 봐도 죽은 사람의 피와 기름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굉장히 자주 보인다. 사실 오늘날에 비하면 변변찮은 놀거리가 없던 시대에 사형만큼 자극적인 눈요깃거리도 없었기에... [9] 다만 정만의 능지는 청나라 숭정제 때인 1639년 정치분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정만은 어머니를 채찍질하고 누이동생을 강간한 혐의가 적용되었다고 한다. [10] 전설에 따르면 첫째 날에 류근이 궁중 비사를 폭로했기에 둘째 날에는 입에 거칠고 억센 호두씨를 넣었다고 한다. [11] 90년대에 한국에서 정발된 1권짜리 중국의 간신이라는 중국 만화가 있었다. 여기서도 유근이 나오는데, 여기선 환관 이영이 유근을 구타하고 경비를 서던 두 군관도 달려와 유근을 발길질해버렸다. 다쳐서 입원 치료하던 유근에게 네가 맞은 일을 알리면 네놈을 죽이겠다! 라고 편지가 붙여진 화살을 쏴맞추자 이 구타 건은 넘어갔지만 그날, 황궁경비를 서던 간부들을 불러와 무능하다고 호통쳤다. 여기서 유근이 죽게 될때, 제발 빨리 죽게해달라고 하지만 망나니가 피식 웃으며 "아니되오, 댁을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는 이들이 저리도 많은데 그렇게 하다간 내가 맞아죽소."라고 거절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기에 지나던 사람이 대체 이게 무슨 줄이오? 라고 질문하자 한 노파가 "유근의 살을 도려내면 가져가길 기다리는 사람들 줄이라오. 그놈 살을 씹고 싶고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까."라고 웃으며 대답하며 유근 편이 끝났다. [12] 특히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혐오감을 준다. [13] 당연히 총살형, 교수형 등 서양에서 집행되던 방법만 수용하였다. [14] 그것도 그냥 처벌이 아니라 최대 사형. 단 이 경우는 사형수를 집행자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능지형을 맡는 집행자도 사형수일 때도 있고 전문 직업인이 맡기도 하고 망나니를 시키기도 했다. [15] 왕웨이친도 산 채로 썰어 버리지 않고 심장을 찔러 숨을 끊은 다음에야 능지형을 집행했다. 다만 그냥 아편을 먹이고 절단하다가 중간에 사형집행을 하는 경우도 있는 등 집행자의 재량으로 보인다. [16] 대량의 아편을 먹였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고, 청대 이후에는 아예 급소를 쳐서 숨통을 미리 끊어 놓은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17] 팽형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은 참혹한 형벌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은 국가였다. [18] 김자점의 능지형을 전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팔다리부터 잘라내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그렇게 집행되었으면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원칙대로 참수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절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19] 이는 티모시 브룩, 제롬 부르곤, 그레고리 블루 등이 지은 책에 잘 나와있다. 너머북스에서 번역본이 나왔는데 제목은 능지처참. [20] 참고로 여성 반역자는 교수척장분지형 대신 화형을 당했다. [21] 그러나 형벌을 받기 전에 고문을 너무 많이 당해서 집행 중에 죽었다. [22] 문헌에 기록된 마지막 집행이라고 말하는 건 실제로는 청의 통치권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변방에서 총독들이 흉악범 처형에 임의로 능지형을 채택한 사례가 그 뒤에도 신해혁명 전까지 드물지 않게 있었기 때문. [23] 오늘날의 츠펑시 소속. [24] 이름이 아닌 성씨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그 죽임당한 몽골 왕자가 그의 아내를 강간했다고 한다. 구글링하면 나오는 사진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충격적일 수 있으니 주의 바람. [25] 사실 순간적인 고통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오랜 시간 고통을 주는 이 형벌이 더 잔인한 편이다. [26] 한국 한자음으로는 <단향형(檀香刑)>. 2003년 번역 출간되어 오래된 도서관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다. [27] 능지형을 받는 경우에는 흉악범 아니면 진짜 신념에 따라 암살 혹은 반란을 주도한 자들인데, 전자라면 당연히 극악무도한 놈이므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서 그렇게 한 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자의 범죄자들에게 능지형을 집행할 때는 오히려 최대한 오랜 기간 살려서 집행하여 인상 깊은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게 오히려 그의 명예를 존중하는 거라 여겨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28] 위에 언급된 매뉴얼화된 능지처참의 집행 순서가 고증되어 유두를 비롯한 가슴살부터 저며지기 시작한다. 집행인 집단에서 전해지던 비술에 의해 심장을 강타당해 반쯤 가사상태에 빠진것도 있고 애초에 성공하건 실패하건 무조건 사형이라는 걸 알고 저지른 짓이라 이악물고 버텨나가다가 고환과 음경을 적출당하고 나선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죽이려던 위안스카이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집행을 참관하던 빡친 위안스카이에 의해 순서고 뭐고 혀를 뽑히게 되고 이로 인해 집행인이 상정하던 순서와 출혈량이 어긋나게 된다. [29] DVD에서 추가된 장면에서 감상 가능한데, 굳이 설명하면 회한의 눈빛으로 자신의 몸이 잘려나가는 걸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청대 능지형도 보통 수십 도씩 잘라냈기 때문에 날이 안 설 때가 있으면 칼 현장에서 갈고 집행을 다시 하고 했는데 이 부분도 그대로 고증됐다. 그리고 집행인들이 칼을 가는 동안 사형집행에 입회한 청 관료 두 명이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 [30] 장문상은 마신이의 제단 앞에서 다수의 관료들이 입회한 상태로 능지처사를 당했다. 반면 강오양은 그래도 비공개 처형되는 걸로 나온다. [31] 잔인한 이야기지만 능지형은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형벌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까지 가지 않고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의 살만 도려내는 고문이 서양이나 중국 모두 실제로 있었다. [32] 사형시키는 죄수가 3명인데, 나머지 둘은 참수형과 교수형이고 전자는 참수검의 날을 숫돌로 무디게 해 여러 번 내리치게 하는 게 포인트고(옆에서 이를 보고 기겁하는 사형수의 표정이 가관이다.) 후자는 밧줄을 썩은 동앗줄로 바꿔놔서 발판을 내리자마자 밧줄이 목에서 끊어지게 해 그냥 풀어주는 것. [33] 왜냐하면 그로부터 바로 1년 전, 명나라의 시조인 홍무제 주원장의 무덤을 불태워버리고 그 무덤을 지키던 주씨 황실 사람들도 모조리 죽여버린 대역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의 무덤이 고영상한테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조정 대신들을 거느리고 사당에 들어가 주원장을 비롯한 명나라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앞에서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34] 중국을 말한다 13권. [35] 사망 당시 수천만냥의 금과 은을 몰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당시 명나라 재정수입의 40배, 지금으로 치면 55조 원 정도였다고 한다. 관련기사 [36] 이 건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언급된다. [37] 1926년에 멕시코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가 보유한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개혁안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이며, 결국 1929년에 정부군에게 진압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상징적인 지위만 인정받고 대부분의 토지를 몰수당했다. [38] 멕시코 미초아칸 주의 도시 [39] 다만 조선의 다른 사례와 같이 실제로는 거열형 내지 참수형을 집행한 이후 시신을 절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40] 집행은 수술칼로 하되 끊임없이 수혈을 시키고, 형이 끝난 후에는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근육 조직을 재생하는 시술을 받기로 했다. 물론 죗값을 치러야 했으므로 형은 당연히 마취 없이 진행돼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쇼크로 죽거나 스스로 자살하면 그건 자기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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