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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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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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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25대 국군
효공
孝公
파일:진효공.jpg
영(嬴)
조(趙)
거량(渠梁)[1]
아버지 진헌공(秦獻公) 영사습(嬴師隰)[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81년 ~ 기원전 338년 (43세)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1. 개요2. 당시 진나라의 상황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3.1. 진나라의 위기3.2. 상앙의 변법3.3. 진 효공의 대외 정복3.4. 최후
4. 평가5. 후일담

[clearfix]

1. 개요

진(秦)나라의 25대 군주. 진 헌공(秦獻公)의 아들. 혜문왕의 아버지. 이때 상앙(商鞅)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해 진 헌공 때 커졌던 국력이 더욱 커져 6국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3] 월절서》에는 '진 평왕'(秦平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2. 당시 진나라의 상황

아버지 진 헌공이 나라를 개혁하고, 국력을 키워 진나라가 전국시대의 강국이 되는 기반이 마련된 상태에서 효공이 즉위했다. 이때는 제 위왕, 초 선왕, 위 혜왕, 연 문후, 한 소후, 조 성후 치세때였다.[4][5]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3.1. 진나라의 위기

진 효공 원년(기원전 361년), 초나라 위나라가 진나라와 경계를 맞댔고, 그들이 진나라를 위협적으로 여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진 효공은 구현령을 내려 부국강병의 의지를 드러냈고, 그 계책을 내는 자는 재상으로 봉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해 진 효공은 두 갈래 길로 출병해 동으로는 섬성, 서로는 서융을 쳐서 그 수령을 죽였다. 이에 조나라, 한나라는 진나라가 커지기 전에 치려고 했다.

3.2. 상앙의 변법

진 효공 2년(기원전 360년), 현왕은 사신을 보내 제사지낸 고기를 보냈다. 이때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가 죽자 그 식객 상앙이 진 효공이 구현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상앙이 효공의 측근인 경감을 통해 효공을 만나 성인의 도리와 왕도 정치에 대해 논하자 효공은 졸았다.[6] 그 뒤 상앙이 자신의 주특기인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대해 논하니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등용했다고 한다.[7] 상앙의 변법은 다음과 같았다.
  1. 십오제(什伍制): 이것은 5개 내지 10개 가구가 일종의 전우조가 되어 납세와 징병을 하는 기초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나머지 집도 같이 죄를 받는 상호 감시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조선 오가작통법으로 그 흔적이 남았다.
  2. 억상 정책: 당시의 산업 구조가 농업 중심이었는데, 농업이 발달해 생산력이 증대되면, 그것이 인구로 전환되었고, 그것이 국력이었기 때문이다.[8] 그러려면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줄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나중에는 억상정책을 누그러뜨리고, 상업 진흥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다.
  3. 노비제 폐지: 노비에게는 세금을 거두지 못하므로 그들이 양민이 되면 농사를 짓게 해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어 국부가 증대된다.
  4. 군공수작제: 이것은 이름없는 평민이라고 해도 전장에 나가 적의 목을 베어오면, 1계급 승급을 시켜주고, 반대로 아무리 잘나가는 집안 사람이라고 해도 전장에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으면 기득권을 박탈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진나라 병사들은 매우 용맹하게 싸워 '개인적인 싸움에서는 겁쟁이이나, 공적인 싸움에서는 용맹하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9] 이때부터 '수급(首級)을 벴다'는 의미가 생겼다. 즉 진나라 군인 입장에서 적군의 목은 자신에게 있어서 승진의 의미이기도 했는데 수급은 훗날 목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5. 악습 타파: 악습을 타파해 진나라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고, 그것이 진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조처들은 귀족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반발했다.[10] 그리하여 구신인 감룡, 두지 등이 특히 반대했으나 효공이 상앙을 적극 지원해서 그들의 말은 무시되었다.

진 효공 3년(기원전 359년), 상앙은 간초령을 내릴 것을 효공에게 제안했다. 그 내용은 생산력 향상을 권장하고, 상업을 억제하며, 귀족도 공이 없으면 귀족 노릇을 할 수 없게 하는 법령이었다.[11] 그것으로 국가 수입이 증대해 헌공 때보다도 강성해졌다.[12]

진 효공 4년(기원전 358년), 진나라가 서산에서 한군을 물리쳤다.

진효공 5년(기원전 357년), 초 선왕은 우윤 흑을 파견했고, 효공은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진 효공 7년(기원전 355년), 효공과 위 혜왕은 두평에서 회맹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중원의 제후와 동렬에 서게 되었다. 이때 태자가 법에 걸려 스승 공자 건[13]과 나머지 스승에게 벌을 주었다[14]. 그리하여 상앙은 제2차 변법을 시행할 기반을 마련했다.

제2차 변법의 내용은 이러했다.

정전제와 원전제를 폐지해 토지의 사유화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전국을 현으로 나눠 군주가 직할 통치했고,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악습 타파도 다시 시행했다.[15]

처음에는 백성들이 상앙의 법을 불편해했으나 결국 나중에는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국력이 강해졌다.[16] 그리하여 주나라 현왕은 효공을 패자로 인정했다.[17]

진 헌공 때 진 목공이 차지한 하서 땅을 어느 정도 수복했으나[18]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으로 힘이 커지자 하서 땅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3.3. 진 효공의 대외 정복

진 효공 8년(기원전 354년), 조나라가 위(魏)나라의 속국인 위(衛)나라를 치자 위 혜왕은 한단을 쳤다. 이 틈을 타 진 효공이 위나라를 습격해 하서의 요지인 원리를 점령하니 위군은 대패했고, 소량도 진군이 완전히 지배했다. 같은 해 진 효공은 공손 장에게 명해 한나라를 쳐 초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상지, 안릉, 산새를 점령해 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진군은 위나라, 한나라 땅에 깊숙이 진입했다.

진 효공 9년(기원전 353년), 위나라가 제나라와 계릉 전투를 벌이는 것을 틈타 위나라를 쳤다.

진 효공 10년(기원전 352년), 상앙은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포위해 점령했다. 위 혜왕은 요지인 고양 땅에 장성을 쌓아 진군을 막았다.

진 효공 11년(기원전 351년), 상앙은 고양을 포위했다.

진 효공 12년(기원전 350년), 위 혜왕은 융 땅에서 진 효공과 회맹해 양국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진 효공 14년(기원전 348년), 새로운 조세 제도를 시행했다.

진 효공 18년(기원전 344년), 효공은 봉택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위 혜왕은 천자의 의장을 써서 어그로를 끌었다.[19]

진 효공 19년(기원전 343년), 효공은 무성에 성을 쌓았다.

진 효공 21년(기원전 341년), 마릉 전투에서 위군이 대패한 틈을 타 상앙이 위나라를 치자고 해 효공은 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제나라, 조나라와 힘을 합쳐 위나라를 쳤다. 이때 상앙이 계략을 써서 위나라의 공자 앙을 속여 크게 이기니 진 효공은 상앙에게 상 땅의 15개 읍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상군에 봉했다.

3.4. 최후

진 효공 24년(기원전 338년), 효공은 다시 위나라를 공격해 안문에서 위군을 물리쳐 위장 위착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효공은 연합군을 소집해 위나라의 합양을 공격했다. 이때 효공이 병사하자 그 아들인 영사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혜문왕이었다. 혜문왕은 공자 건과 함께 상앙을 함정에 빠뜨려 잡은 뒤 함양에서 거열형에 처했다.[20]

4. 평가

효공은 아버지 헌공(秦獻公)의 정책을 이어 구현령으로 상앙을 등용해 그의 변법을 전적으로 밀어주어 헌공 때 회복한 국력이 더욱 강성해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도 혜문왕[21], 무왕, 소양왕, 장양왕, 진시황으로 이어지는[22] 진나라 황금기의 기반이 된 군주다.

5. 후일담

진나라는 그 뒤로도 국력이 신장되었다. 사마착을 파견하여 촉나라를 정벌해 성공한 뒤 진나라의 국력은 6국이 모여서 막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커졌다. 그리하여 그 손자인 소양왕 대에는 천하를 거의 통일할 뻔한 정도였고, 진시황 대에는 통일을 완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비전이 없었으므로 진나라는 기존의 법가대로 6국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리기만 해서 증오와 불만을 키웠고, 호해가 즉위한 뒤 시대를 읽지 못한 지나친 법가 정책의 시행은 진승·오광의 난으로 폐단이 터져 그로 인해 진나라는 멸망했으며, 초한쟁패기를 거쳐 한고제 전한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기록된 이름. [2] 영연(嬴連)이라고도 한다. 문서참조 [3] 물론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밸런스가 붕괴된 것은 사마착(司馬錯)이 촉나라를 먹은 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 [4] 즉 이들도 나름대로 세력을 키워가던 시기였다. [5] 단 위나라의 경우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6] 그나마 왕도 정책을 얘기할 때는 좀 듣는가 싶더니 곧 졸았다. 성인의 도리를 논할 땐 아예 듣자마자 자버렸다고(…). [7] 다만 상앙의 성격으로 봤을 때 진정으로 성인의 도리와 왕도 정치에 대해 논해서 효공이 들어주었다면, 자신의 뜻을 펴볼 길이 없다고 보고 떠났을 것이다. 공숙좌를 통해서 위 혜왕에게 그것을 알렸는데, 혜왕이 그 말을 무시했었다. 그런 즉 먼저 진 효공을 떠보고 앞서 말한 것을 듣지 않으면,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흥미를 보일 것이라 판단하고 설파 순서를 그렇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8] 일단 인구가 많으면 그들이 노동력이 되어 그 넓고 비옥한 관중 땅에 농사를 지어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고, 그들이 군역 및 부역에 동원되어 전쟁은 물론 기타 국가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9] 이는 사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상앙의 변법의 결과에 대해 논할 때 나온다. [10] 같은 사례로 초나라의 도왕 오기의 변법으로 반발한 초나라 귀족들를 들 수 있다. [11] 위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12]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진 효공 7년 기사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13] 진 효공의 형이다. [14] 태자가 곡식을 감독하던 도중 곡식에서 흙이라든지 이것저것 나오자 태자가 자신을 능멸했다면서 고을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법적인 처벌을 무시하며 학살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죄로 영건은 의형(코를 베는 형벌)을 당했고, 다른 스승인 공손 가는 이마에 죄인을 뜻하는 글을 새기는 자자형에 처해졌다. 결국 이 일로 태자와 공자 건은 상앙을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그 둘도 상앙을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변법 자체는 인정했다. [15] 악습 타파라는 것이 한두 번의 개혁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군대에서 왜 금방 악습이 타파되지 않는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6] 사기에서는 앞에 나온 백성들이 사사로운 싸움은 겁내지만 공적인 싸움에는 용맹했다는 것과 함께 백성들은 법령에 만족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으며 산적이 없고 집집마다 풍족해져 마음씨가 넉넉해지고 도시나 시골이나 다 잘 다스려졌다고 호평했다. 사마천은 상앙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하였지만 그의 변법에 대한 결과만큼은 정반대로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역시 상앙을 사마천 만큼은 아니라도 꽤 비판하지만 그도 상앙을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천재라 평했다. [17] 패자는 달리 '방백'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진 효공이 마지막 방백 즉 패자이다. 그 이유는 진 효공의 아들 혜문왕은 왕을 칭해 패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 진목공(秦穆公)이 진혜공(晉惠公)을 한원 전투에서 이긴 뒤 차지했다. 그런데, 그 뒤의 진(秦)나라 군주들이 무능하여 거기를 잃었는데, 진 헌공이 그곳을 되찾았다. [19] 이것이 위나라 몰락의 결정타가 된다. [20] 다만 혜문왕은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변법을 그대로 시행해 진나라의 강성함은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21] 위에서 보다시피 혜문왕은 상앙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그가 죽었어도 그의 정책 기조만큼은 그대로 유지했다. [22] 소양왕의 아들인 효문왕은 왕위에 오른 지 오래지 않아 죽어서 그 자신의 업적이 없으므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