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관중 서부(현 섬서성)에 있었던 민족으로, 당시 중원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서융(西戎)으로도 불렸다.
오랑캐로서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자주 토벌하려고 했으나 완전한 토벌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상나라와 주나라 문서에 이 견융족에 관련된 기록이 많다. 주로 토벌했다는 내용이다.
'견융'이라는 이름은 개 견이 들어간 거라 융족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전설로는 황제(黃帝) 헌원씨가 낳은 자손이, 백견 혹은 백마의 암컷과 수컷 두 마리를 낳았는데, 이들이 견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보는 전해진 이야기가 다른 것이 많아 명확하지 않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서술에 따르면, 견융족은 오늘날의 티베트인과 연관된 민족이었으며,[1] 언어학적으로도 견융의 언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흔하디흔한 이민족 중 하나이지만 견융족은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유왕 시기 서주를 침공하여 유왕을 시해했다. 이 시기, 주나라는 계속해서 약해지는 상태였는데 이 일이 결정타가 되어 더 이상 기존의 근거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호경을 포기한 후, 동쪽인 낙읍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주나라를 서주, 그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서주시대와 춘추전국시대가 갈린다. 즉 견융족은 춘추시대를 연 장본인들이었다.
게다가 이때 갑툭튀한게 아니라 이미 목왕 대부터 투탁거리고 지냈으니 아주 질긴 악연이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춘추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이 견융에 대한 기록이 끊긴다. 그래도 이후 중원 제후국들이 서쪽에 위치한 진(秦)나라를 비하하기 위한 의미로 진융(秦戎)이란 표현을 쓰는 등 '융'이라는 표현은 춘추시대 이후로도 자주 나타난다.[2]